관련 문서: 케니 달글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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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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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 현재 | ||||
초대 바클레이 ☆ |
2대 맥케나 ☆ |
3대 왓슨 ★★☆ |
4대 애시워스 ★ |
5대 맥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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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패터슨 |
7대 케이 ★ |
8대 웰시 |
9대 테일러 |
10대 샹클리 ( 샹클리 체제) ★★★☆ ★★★ |
|
11대 페이즐리 ( 페이즐리 체제) ★★★★★★ ★★★★★★★★ |
12대 페이건 ( 페이건 체제) ★★★ |
13대 달글리시 ( 달글리시 체제(1기)) ★★★ ★★ |
13대(대행) 모란 ( 모란 체제) |
14대 수네스 ( 수네스 체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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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에반스 ( 에반스 체제) ★ |
15·16대 에반스· 울리에 ( 에반스·울리에 체제) |
16대 울리에 ( 울리에 체제) ★★★★★ |
17대 베니테스 ( 베니테스 체제) ★★★ |
18대 호지슨 ( 호지슨 체제) |
|
19대 달글리시 ( 달글리시 체제(2기)) ★ |
20대 로저스 ( 로저스 체제) |
21대 클롭 ( 클롭 체제) ★★★★ ★★★ |
22대 슬롯 ( 슬롯 체제) |
||
★
프리미어 리그 / ★
FA컵 / ★
EFL컵 / ☆
EFL 챔피언십 ★ UEFA 챔피언스 리그 / ★ UEFA 유로파 리그 / ★ UEFA 슈퍼컵 / ★ FIFA 클럽 월드컵 |
[[케니 달글리시| |
|
제13대 감독 케니 달글리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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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00027><colcolor=#fff> 감독 |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케니 달글리시 / 제13대 감독 |
코치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로니 모란 (수석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로이 에반스 (코치)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루벤 베넷 (피지컬 코치[1])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존 베니슨 (유스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톰 손더스 (분석 코치, 스카우트[2])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제프 트웬티맨 (스카우트[3])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크리스 라울러 (리저브 감독[4]) [[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 스티브 하이웨이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필 톰슨 (코치)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론 예이츠 (스카우트) |
주장 |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앨런 한센 / 제35대 주장 (1985~1988) [[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로니 웰런 / 제36대 주장 (1988~1989)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앨런 한센 / 제37대 주장 (1989~1990) [[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로니 웰런 / 제38대 주장 (1990~1991) |
계약 기간 |
1985년
5월 30일 ~
1991년
2월 21일 (5년 9개월/ 2093일) |
계약 종료 (자진 사임) | |
연봉 | 미상 |
전술 스타일 |
패스 & 무브에 기초한 다이렉트성 축구 ┗ 4-4-2, 4-4-1-1, 3-5-2 포메이션 ┗ 비대칭 윙어 및 투톱 활용 ┗ 강한 전방 압박 ┗ 다양한 포메이션 구사 |
역대 전적 | 307경기 187승 78무 42패 (승률 60.9%) |
우승 경력 |
1985-86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1985-86 FA컵 (우승) 1986 FA 채리티 실드 (우승) 1987-88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1988 FA 채리티 실드 (우승) 1988-89 FA컵 (우승) 1989 FA 채리티 실드 (우승) 1989-90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1990 FA 채리티 실드 (우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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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버풀 FC의 제13대 감독 케니 달글리시 체제를 정리한 문서.2. 감독 선임 과정
1985년 조 페이건이 사임 의사를 밝혔고, 헤이젤 참사로 인해 리버풀은 유럽 대항전 출전 금지 징계를 받으면서 위기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에 리버풀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고 내부 체계를 연속적으로 이어줄 인물을 필요로 했고, 밥 페이즐리 시기부터 계속해서 팀의 절대적인 에이스로 통하며 선수들과 코치들의 신임을 얻고 있던 케니 달글리시는 그 적임자로 보였다. 당시 리버풀은 빌 샹클리 이후 부트 룸 출신 코치들을 연이어 내부 승격시켜오며 팀의 연속적인 퍼포먼스 유지에 집중해왔는데, 달글리시의 경우 부트 룸에 정식으로 합류한 코치는 아니었으나 선수로서 다년간 리버풀을 대표하며 부트 룸에 상주하는 코치들과도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구단의 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 중 하나였기에 즉각 감독으로서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페이건이 공식적으로 물러난 이후, 달글리시는 선수와 감독을 겸하는 플레잉 코치로 리버풀의 지휘봉을 잡았다. 이후 달글리시는 페이즐리와 페이건이 만든 스쿼드를 물려받고 로니 모란, 로이 에반스를 비롯해 남아 있던 부트 룸 출신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팀을 수습하고 본격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게 되었다.
3. 연혁
3.1. 1985-86 시즌
페이건의 사임과 참사의 영향에 의해 부정적인 전망들도 다수 있었으나 달글리시는 여전히 메워지지 못한 그레이엄 수네스의 공백을 스티브 맥마흔의 영입으로 틀어막았고, 앨런 케네디를 떠나보내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달글리시는 이안 러시의 옆에 크레이그 존스턴을 배치한 변형적인 투톱을 사용하면서 팀에 변주를 줬고, 얀 몰비를 중앙 미드필더 뿐 아니라 3백의 스위퍼로도 사용하며 전통적인 4-4-2에서 3-5-2에 이르기까지 유연한 포메이션 활용을 보여줬다.선수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던 달글리시는 직접 선수로도 출전하며 해당 시즌 초반부터 꽤 괜찮은 성적을 이어갔고, 시즌 중반부에 무승이 이어지며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리그 마지막 12경기에서 11승 1무를 기록하는 놀라운 뒷심을 발휘해 결국 지역 라이벌 에버튼 FC과의 우승 경쟁을 이겨냈다. 26승 10무 6패로 승점 88점을 기록, 통산 16번째 리그 우승으로 다시 잉글랜드 리그 왕좌에 리버풀이 복귀하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달글리시호는 리그컵에서 연승을 달리며 4강까지 무난하게 진출했으나, 퀸즈 파크 레인저스에게 덜미를 잡혀 결승에는 올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FA컵에서는 무패를 기록하며 결승에 진출, 결승에서 당대 최고의 라이벌이자 영원한 더비 라이벌 에버튼 FC과 격돌하게 되었다. 1986년 5월 10일에 열린 결승전에서 리버풀은 선제 실점을 내주며 끌려갔으나, 이후 후반전에 이안 러시의 동점골과 크레이그 존스턴의 역전골, 러시의 세번째 쐐기골이 터치며 경기를 3-1로 승리, 통산 세 번째 FA컵 우승까지 달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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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니 모란, 로이 에반스 두 참모와 함께 |
해당 시즌 달글리시호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참사의 영향을 잘 수습하며 가장 큰 대회 두 개를 석권하는 더블을 달성, 붉은 제국의 연속성을 당당하게 이어갔다. 당시 에버튼 FC의 경쟁을 물리치고 리그에서도 2점차로 우승, FA컵에서도 결승전에서 승리를 챙기며 머지사이드의 강자가 누구인지를 각인시킨 리버풀은 역사상 첫 리그-FA컵 더블을 달성했고, 이 시즌 달글리시는 잉글랜드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며 본인의 첫 감독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보냈다. 이안 러시는 이 시즌 리그 22골을 포함 시즌 31골을 넣으며 화력을 뽐냈고, 레전드 라이트백 필 닐이 이 시즌 겨울에 팀을 떠나기도 했다.
3.2. 1986-87 시즌
더블을 달성한 뒤, 달글리시호는 팀의 주포였던 이안 러시를 유벤투스로 떠나보냈다. 그러나 이 시즌까지 러시가 임대로 다시 리버풀에 합류하게 되면서, 팀의 전력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리버풀은 레전드였던 새미 리를 여름에 떠나보내며 새로운 시즌을 준비했다.리버풀은 채리티 실드에서 에버튼과 1-1로 비기며 공동 우승을 차지한 뒤, 리그 2연패를 노렸다. 그러나 리버풀은 지난 시즌에 비해 약간 부진한 모습을 노출하며 승점을 많이 잃었고, 시즌 초반부터 흔들리는 모습을 노출하더니 시즌 막판에 연패를 당하며 일찍이 라이벌 에버튼 FC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리버풀은 23승 8무 11패로 에버튼에게 승점 9점 뒤진 2위로 준우승을 차지하며 아쉬움을 삼켜야했다.
FA컵에서는 3라운드에서 루턴 타운을 만나 재경기 끝에 원정에서 3-0으로 패배하며 디펜딩 챔피언의 자존심을 구겼다. 그러나 리그컵에서는 무난하게 결승까지 진출하여 아스날 FC와 결승전에서 만났다. 1987년 4월 5일에 치러진 결승에서 리버풀은 이안 러시가 전반 초반에 골을 기록하며 앞서나갔지만, 이후 얼마지나지않아 동점골을 허용했고, 이후 후반 막판에는 역전을 허용하며 허무하게 준우승에 그쳤다. 리버풀은 러시가 득점한 경기에서 144경기 무패 행진을 달리고 있었지만, 이 경기에서 기록이 깨졌다.
또한 이 시기 헤이젤 참사의 영향으로 잉글랜드 클럽들의 유럽 대항전 출전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리그 슈퍼컵이라는 대체 토너먼트 대회가 신설되었는데, 이 대회에서 리버풀은 에버튼 FC을 상대로 승리해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잉글랜드 리그와 스코틀랜드 리그 우승 클럽들끼리 맞붙는 두바이 슈퍼컵도 이 시기 탄생하여 열리기도 했는데, 이 대회에서는 셀틱 FC를 만나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 시즌을 기점으로 달글리시는 과거 붉은 제국 시절의 부트 룸 코치들을 대거 물갈이하여 약간의 갈등을 빚었다. 달글리시는 피지컬 코치 루벤 베넷, 분석 개발 코치 및 스카우트 톰 손더스, 수석 스카우트 제프 트웬티맨과 리저브팀 감독 크리스 라울러 대신 스티브 하이웨이를 개발 코치에, 필 톰슨을 리저브 감독에, 론 예이츠를 수석 스카우트에 데려와 앉혔다.
3.3. 1987-88 시즌
지난 시즌 무관에 그치며 아쉬움을 삼킨 리버풀은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에 진출한 이안 러시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피터 비어즐리, 존 반스, 존 알드리지, 레이 호튼 등 우수한 선수들을 수급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리그 재패를 다짐했다. 비어즐리와 알드리지의 새로운 투톱 체계가 자리를 잡았고 왼쪽 윙에 공격적인 반스, 오른쪽 윙에는 조금 더 중앙에 관여하는 호튼이 위치하며 비대칭형의 전술이 밸런스를 잡았다. 중원에는 위치를 옮긴 로니 웰런과 스티브 맥마흔, 얀 몰비가 든든하게 힘을 더했다.그렇게 출발한 시즌의 달글리시호는 리그 개막 후, 1988년 2월 21일 리그 30라운드에서 에버튼 FC에게 발목을 잡히기 이전까지 모든 대회에서 37경기 무패[5]를 달리는 엄청난 경기력과 리그 장악력을 보여줬다. 이후 리버풀은 40경기에서 단 2패에 그치며 리그 4경기를 남겨두고 팀 통산 17번째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최종 리그 성적은 26승 12무 2패, 승점 90점.
하지만 리그컵에서는 에버튼에게 패하며 3라운드에 그쳤고, FA컵에서는 승승장구하며 에버튼을 격파한 뒤 8강과 4강을 뚫고 결승전까지 진출했으나, 약체로 평가받던 윔블던 FC에 충격패를 당하며 더블에는 실패했다. 이 시즌 달글리시는 본인의 통산 두 번째 잉글랜드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고, 1987년에는 FWA로부터 공로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이 시즌 팀 최다 득점자는 리그 26골 포함 시즌 29골을 올려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존 알드리지로, 이안 러시의 공백을 아주 잘 메우는 데 성공했다.
3.4. 1988-89 시즌
1988-89 시즌에는 이안 러쉬가 이탈리아 무대에서 아쉬움을 남긴 뒤 다시 영입되어 복귀했고, 새롭게 전력을 가다듬어 다시금 트로피 사냥에 나섰다. 그러나 크레이그 존스턴이 가족의 투병에 의해 전성기 나이에 선수 커리어를 은퇴해 전력에 아쉬움이 발생했다.그러나 달글리시의 리버풀은 채리티 실드에서 윔블던 FC를 꺾으며 지난 시즌의 복수를 선사한 뒤, 계속해서 좋은 경기력을 이어갔고 지난 시즌만큼은 아니지만 리그에서 계속되는 장악력을 보여주며 리그 선두권을 질주했다. 달글리시호는 리그컵에서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게 패하며 4라운드에서 이르게 탈락했지만, FA컵에서는 무난하게 호성적을 이어가며 준결승에 진출하여 좋은 분위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1989년 4월 15일에 열린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FA컵 준결승에서 팀 역사상 최악의 사고인 힐스보로 참사가 발생했다. 헤이젤에 이은 이 충격적인 참사로 인해 달글리시와 리버풀의 모든 구성원들은 깊은 슬픔에 빠졌으며, 팀의 얼굴이었던 달글리시는 사고 수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시간을 보냈다.[6] 참사를 책임지고 수습하는 모습에 의해 당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으나 결국 참사의 아픔은 그의 커리어에 깊게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리버풀을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고 이후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국내의 모든 잔여 경기를 5월 이후로 미뤘고, 5월 3일에 리그 경기가, 5월 7일에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준결승전이 재개되면서 남은 일정이 진행되었다. 리버풀은 준결승전을 승리한 뒤, 5월 20일 결승전에서 숙명의 라이벌 에버튼을 만났다. 리버풀은 전반 초반 존 알드리지의 선제골이 터지며 경기 내내 리드를 지켰으나 후반 막판 89분에 에버튼이 동점을 기록하며 승부는 연장까지 흘러갔다. 그러나 연장전에서 이안 러시의 득점이 터졌고, 에버튼도 102분에 동점골으로 응수했으나, 존 알드리지가 104분에 결승골을 뽑아 리버풀은 3-2로 승리, 통산 네 번째 FA컵 우승이 이루어졌다.
리그에서는 일정 재개 이후 에버튼 FC을 만나 원정에서 0-0 아쉬운 무승부를 기록했고, 이후 리그 1위를 유지하며 모든 경기를 이겼으나 리그 최종전이 공교롭게도 승점 3점차로 2위를 달리고 있던 아스날 FC과의 홈 경기였다.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리버풀은 득실차에서도 2골을 앞서고 있었기에 최소 1-0 패배만 기록해도 우승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경기는 아스날의 2-0 승리로 끝나 리버풀은 승점 동률, 득실차 동률, 득점 열세로 준우승을 기록했다. 이 시즌 달글리시호는 FA컵을 우승하며 두 번째 더블 찬스를 잡았으나, 끝내 기적적인 역전 우승의 희생양이 되며 리그 우승을 내주었고, 아픈 참사의 상처를 껴안아야만 했다.
3.5. 1989-90 시즌
이어진 1989-90 시즌에는 존 알드리지가 이안 러시와의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라리가의 레알 소시에다드로 이적을 감행했고, 존 반스를 필두로 새롭게 강력한 공격진을 갖추게 된 리버풀은 큰 보강없이 전력을 유지하며 시즌을 시작했다.리버풀은 채리티 실드에서 아스날 FC에게 지난 시즌의 복수를 성공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시작된 리그에서 이변을 허용하지 않겠다는듯 좋은 리그 레이스를 재차 내달리기 시작했다. 리버풀은 후반기 단 1패만을 기록하며 대부분의 경기에서 승점을 가져왔고, 아스톤 빌라와 토트넘 홋스퍼 등, 당시 경쟁팀들을 제치고 여유롭게 1위를 질주하며 시즌을 마쳤다. 최종 성적은 23승 10무 5패, 승점 79점으로 통산 18번째 리그 우승이었다.[7]
그러나 리그컵에서는 아스날 FC에게 다시 발목을 잡혀 3라운드에서 탈락했고, FA컵에서는 4강까지 진출했으나 크리스탈 팰리스에게 석패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이 시즌이 끝난 뒤 달글리시는 세 번째 잉글랜드 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3.6. 1990-91 시즌
그러나 참사의 후유증은 1990년대로 들어서서까지 서서히 달글리시를 갉아먹고 있었고, 달글리시는 호성적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리버풀은 채리티 실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공동 우승을 차지한 뒤, 리그 개막 이래 13라운드까지 12승 1무를 질주하며 선두를 유지했고 이전 시즌처럼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후 리그 중반부로 넘어서자 리버풀은 약간의 부침을 겪으며 승점을 잃는 경기가 생기기도 했으나, 2월 말까지 달글리시의 팀은 리그에서 여전히 1위를 달리고 있었다.그러나 리버풀 감독직에 대한 압박감과 참사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겪고 있던 달글리시는 괜찮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팀을 떠날 결심을 마친 상태였다. 결국 1991년 2월 21일, 달글리시가 감독직을 끝까지 마치지도 못하고 사임을 발표했다. 1991년 2월 20일 구디슨 파크에서 열린 FA컵 5라운드 재경기에서 라이벌 에버튼과 4-4로 비긴 후였다. 사임 당시의 달글리시는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기에 구단도 그를 붙잡지 못했다. 달글리시는 "만약 리버풀이 제가 감독으로 돌아와주길 기다린다면, 저는 돌아올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렇게 정들었던 안필드를 떠났다.[8] 전설적인 선수이자 전설적인 감독의 힘겨운 마침표였다.
3.6.1. 로니 모란 대행 체제
[[로니 모란| |
|
제14대 감독(대행) 로니 모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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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00027><colcolor=#fff> 감독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로니 모란 / 제13대 감독(대행) |
코치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로이 에반스 (수석 코치) [[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 스티브 하이웨이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필 톰슨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존 베니슨 (유스 코치)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론 예이츠 (스카우트) |
주장 |
[[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 로니 웰런 / 제38대 주장 (1990~1991) |
계약 기간 |
1991년
2월 23일 ~
1991년
4월 15일 (2개월/ 52일) |
계약 종료 (대행 종료) | |
역대 전적 | 10경기 4승 1무 5패 (승률 40%) |
리그에서 승점 3점차로 1위를 수성하고 있던 상태에서 남은 시즌은 수석 코치인 로니 모란에게 넘어갔다. 모란은 1965년부터 1998년까지 리버풀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한 전설적인 부트 룸의 일원이었고 붉은 제국을 선수와 코치로 지탱해온 팀 내 최고 베테랑의 지도자였기에 당시 급작스러운 상황에 감독직을 맡아줄 수 있는 적임자였다.[9]
모란은 리그 25라운드부터 팀을 지휘하여 구단을 다잡기 위해 힘을 썼으나 중심을 잃은 팀은 급속도로 경기력을 잃기 시작했다.달글리시의 사임 이후 구단 전체가 여전히 충격에 빠진 듯했고, 리버풀은 모란 체제의 첫 경기였던 루턴 타운 원정에서 3-1로 충격적인 완패를 당했다. 다음 두 경기도 패배로 이어졌다. 구디슨 파크 원정으로 치러진 에버튼 FC와의 FA컵 두 번째 재경기에서 리버풀은 석패를 당해 대회에서 탈락했다. 26라운드에서 아스날 원정을 떠나 1-0으로 패배하며 타이틀 선두를 내준 것은 더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리버풀은 시즌이 끝날 때까지 모란을 감독 대행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연패 이후에는 다행스럽게도 3연승을 거두었다. 그 중 세 번째 승리는 더비 카운티 리그 원정 7-1 대승이었고, 해당 라운드에서 아스날이 노리치 시티를 만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리버풀은 다시 리그 1위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란은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했다. 리버풀은 다음 라운드에서 퀸즈 파크 레인저스를 홈으로 불러들여 3-1로 충격패했고, 이후 사우스햄튼 FC 원정에서 실망스러운 패배로 연패를 당해 리그 우승에서 허무하게 멀어졌다.
모란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누가 다음 시즌에 달글리시의 뒤를 이어 정식 감독이 될 것인지에 대한 소문이 경기장 밖으로 끊이지 않았고, 붉은 제국의 또 다른 레전드이자 위대한 주장이었던 그레이엄 수네스가 리버풀 보드진에 의해 점찍어졌다. 수네스는 레인저스 FC 감독으로 있었기에 시즌이 끝난 뒤에야 새 감독으로 공개될 예정이었지만, 언론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그가 레인저스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리버풀도 당장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했기에 결국 4월 16일에 수네스가 정식 감독으로 시즌 중 부임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모란은 공식전 10경기로 대행 체제를 마무리하고, 리그 30라운드부터는 수네스가 감독을 맡았다.[10]
그레이엄 수네스 체제에 대한 내용은 리버풀 FC/수네스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4. 공격 포인트 순위
5. 시즌별 주요 성적
케니 달글리시의 시즌별 주요 성적 |
||||||||||
시즌 | 리그 | FA | EFL | CS | UCL | UEL | USC | ICC | 감독 | |
1985-86 시즌 |
우승 (16회) |
우승 (3회) |
4강 | - | - | - | - | - | 케니 달글리시 | |
1986-87 시즌 |
2위 (▼ 1) |
3R | 준우승 |
우승 (10회) |
- | - | - | - | ||
1987-88 시즌 |
우승 (17회) |
준우승 | 3R | - | - | - | - | - | ||
1988-89 시즌 |
2위 (▼ 1) |
우승 (4회) |
4R |
우승 (11회) |
- | - | - | - | ||
1989-90 시즌 |
우승 (18회) |
4강 | 3R |
우승 (12회) |
- | - | - | - | ||
1990-91 시즌[11] |
1위[12] ( = ) |
5R | 3R |
우승 (13회) |
- | - | - | - |
케니 달글리시 ↓ 로니 모란(대행) ↓ 그레이엄 수네스 |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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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명장들[13] |
헤이젤 참사로 위기에 빠져있던 팀에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하여 팀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붉은 제국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20세기 리버풀의 마지막 명장이자, 힐스보로 참사의 아픔을 위로하고 통감하며 팬들과 도시의 영웅이 된 구단 역사상 최고의 인물 중 하나. 1970년대 밥 페이즐리에 의해 영입된 후 1980년대까지 리버풀의 절대적인 에이스로 통하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일찍이 자리매김했으나, 이후 1990년대에 진입하기까지 감독으로서도 대단한 위업을 달성한 레전드 중의 레전드다. 달글리시의 첫 번째 재임기간 동안 리버풀은 3회의 리그 우승, 2회의 FA컵 우승, 3회의 채리티 실드 우승을 달성했으며, 매 시즌 우승 경쟁을 펼치며 리그 2위 밑으로는 떨어지지 않는 강력한 팀을 구축할 수 있었다.
달글리시는 밥 페이즐리와 조 페이건 휘하에서 전설적인 선수로 성장하며, 당대 부트 룸에서 이어지던 리버풀만의 특별한 리더십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흡수하고 있었던 인물로, 코치 출신은 아니었으나 페이건의 사임 이후에 팀을 곧장 이어받아 적재적소의 기용과 확실한 리더십을 필두로 유럽 대항전 진출이 불가해진 시대에 대단한 국내 대회 지배력을 만들어냈다. 실제로 위르겐 클롭 이전까지 구단 역대 감독 중 최다 승률을 자랑했으며[14], 현재까지도 평균 리그 순위가 가장 높은 감독으로[15] 거대한 참사를 두 차례나 겪었음에도 계속해서 전력을 유지하며 당대 우승 경쟁자였던 에버튼 FC과 아스날 FC을 상대로 잉글랜드 왕좌를 방어해냈다. 이에 리버풀에서 샹클리와 함께 페이즐리 다음으로 리그를 가장 많이 우승한 감독이며 FA컵은 최다 우승 감독으로 남아있다.
특히 그는 팀의 베테랑 선수이면서 지휘봉을 잡은 감독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고, 붉은 제국 시절 명장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성장한 인물로, 빌 샹클리로부터 이어진 리버풀 특유의 패스 앤 무브먼트 철학과 강한 압박, 4-4-2에 기반한 강렬한 플레이를 이어받으면서도 선수들의 플레이에 맞는 부분 전술과 포지션 부여로 페이건까지 이어져온 리버풀의 축구를 지속적으로 끌고갈 수 있었다. 달글리시는 대단한 지략가나 전술가 스타일의 감독은 아니었으나 경기를 읽고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여 선수들의 장점을 끌어내는 유형의 감독이었다. 특히 그는 이전의 페이즐리와 페이건과는 다르게 3백에 기반한 3-5-2 혹은 5-3-2 전술도 종종 구사했는데, 이 체계에서 미드필더 얀 몰비를 스위퍼로 활용하거나, 윙어였던 로니 웰런을 중원 자원으로 활용하는 등, 선수단의 장점을 살려 전술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우수했다. 이후 존 반스와 레이 호튼과 같은 우수한 측면 자원들이 영입되자 달글리시는 4-4-1-1에 기반하여 좌우 비대칭의 윙어들과 피터 비어즐리처럼 피지컬이 좋은 타겟형 공격수를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활용하는 변칙적인 기용으로 감독으로서의 자신의 역량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이에 달글리시 체제에서 존 알드리지와 이안 러시를 비롯해 공격수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게다가 달글리시는 힐스보로 참사 당시의 감독으로서 책임감을 발휘해 피해자 가족들을 직접 챙기고 발로 뛰며 지역 사회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으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유족들 및 고통받은 관계자들의 억울함을 위해 목소리를 내며 구단과 팬들, 그리고 지역 시민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 의해 리버풀은 참사를 잘 수습하고 지속적으로 진실을 위해 노력한 결과 당국의 사과와 해명을 받을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팬들과의 특별한 유대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종합하자면, 케니 달글리시는 선수 시절과 감독 시절을 합해 리그 우승 8회, FA컵 우승 2회, 유러피언 컵 3회, 리그컵 4회, 채리티 쉴드 5회, 유러피언 슈퍼컵 우승 1회를 달성하며 전설적인 커리어를 안필드에 수놓은 구단 역사상 최고의 인물 중 하나이며,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만 따지더라도 두 차례의 참사를 극복하고 구단의 정체성을 살리며 팀의 20세기 마지막 전성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구단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다. 실제로 달글리시의 사임 이후 리버풀은 길고 지독한 침체기에 빠져야 했으며, 2019-20 시즌 위르겐 클롭이 리버풀을 30년 만에 프리미어 리그에서 우승시키기 전까지 리버풀을 1부 리그에서 우승시킨 마지막 감독으로 남아있었다. 이후 2011년에 다시 리버풀에 부임하며 2기 체제에서의 부진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1985년부터 1991년까지의 활약만으로도 달글리시는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위르겐 클롭과 함께 리버풀을 이끈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1]
~1986
[2]
~1986
[3]
~1986
[4]
~1986
[5]
리그 29경기 22승 7무 포함
[6]
당시 감독이었기에 책임을 지고 매일같이 유족들과 만나고, 장례식을 찾아다니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굉장히 피폐해졌다고 한다.
[7]
이 리그 우승을 마지막으로 리버풀은 2019-20 시즌까지 30년 동안 리그 무관기에 들어선다.
[8]
이후 2011년에 이 약속을 지킨다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9]
모란은 팀의 위기 상황에서 기꺼이 대행 감독직을 맡게 되었지만, 구단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정식 감독이 될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10]
모란은 구단이 권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정식 감독에 생각이 없었으나, 후에 생각이 바뀌어 보드진에 정식 감독직을 맡겠다는 요청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드진은 이미 일주일 전에 수네스를 선임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늦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11]
사임 당시 성적
[12]
모란 대행 체제는 2위로 마감
[13]
좌측부터 차례로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케니 달글리시,
케니 달글리시,
라파엘 베니테스,
위르겐 클롭 감독이 자리해 있으며, 모두 리버풀 소속으로 유럽 대항전 우승을 일궈낸 인물들이다.(달글리시는 감독은 아니지만 선수로서 했기에 들어가있다.) 해당 배너는
리버풀의 홈 구장
안필드의 스피언 콥 스탠드에 대형 플래그로 자주 등장한다.
[14]
2011년 2기 체제에서 승률을 많이 깎아먹었음에도 역대 감독들 중 클롭 다음이다.
[15]
물론 유럽 대항전에 진출하지 않았기에 리그에 집중하기는 유리한 조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