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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뮬러 1 월드 챔피언십 역대 드라이버 챔피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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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前 F1 드라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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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제임스 헌트 James Hu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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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제임스 사이먼 월리스 헌트 James Simon Wallis Hu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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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7년
8월 29일 영국 사우스이스트 잉글랜드 서리 주 벨몬트[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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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3년
6월 15일 (향년 45세) 영국 런던 윔블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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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영국 ( 잉글랜드 ) | ||
배우자 |
수지 밀러 (1974~1976) 사라 로맥스 (1983~19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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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헤스케스 레이싱 (1973~1975) 말보로 팀 맥라렌 (1976~1978) 올림푸스 카메라 울프 레이싱 (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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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더 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colbgcolor=#eeeeee,#191919> 출전 횟수 | 93경기 | |
월드 챔피언 | 1회 (1976) | ||
그랑프리 우승 | 10회 | ||
포디움 | 23회 | ||
폴 포지션 | 14회 | ||
첫 경기 | 1973년 모나코 그랑프리 | ||
첫 그랑프리 우승 | 1975년 네덜란드 그랑프리 | ||
패스티스트 랩 | 8회 | ||
마지막 경기 | 1977년 일본 그랑프리 | ||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 | 1979년 모나코 그랑프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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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국적의 전 F1 드라이버이자, 1976년 월드 드라이버 챔피언.
2. 선수 경력
F3 등에서 커리어를 쌓다가 1973년 헤스케스 소속으로 F1 데뷔. 하위권 팀 소속으로 3년 동안 실력을 인정받았고 1975년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는 생애 첫 우승컵을 든다.1976년 맥라렌으로 스카웃되어 에메르손 피티팔디의 빈자리를 채운다. 그리고 페라리의 니키 라우다와 함께 F1 역사상 가장 치열했고 가장 극적이었던 명승부를 연출한다.
당시 니키 라우다가 애초에 워낙 잘 하기도 했고[3] 이제나 저제나 유명한 페라리의 '정치력'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스페인 그랑프리 우승기록을 몰수당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는 이탈리아 마샬들의 노골적인 견제와 텃세로 아예 스타팅 그리드에 나오지도 못할 뻔 했다.
아무튼 라우다가 독일 뉘르부르크링에서의 최악의 사고로 인해 레이스를 할 수 없던 동안 착실히 포인트를 쌓았고, 시즌 마지막 일본 그랑프리에서 라우다가 레이스를 포기할 정도의 악천후 속에서 끝끝내 3위로 레이스를 끝마친 덕에 1976 시즌 챔피언에 등극한다. 2위 라우다와의 격차는 단 1점 차이.
그러나 1977년 이후 3년 더 F1에서 활약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은 내지 못한다. 어찌보면 하위권 팀에서 갑툭튀해서 맥라렌을 몰게 되고, 한 시즌 크레이지 모드로 돌입해서 세계 챔피언 자리에 등극하고, 그리고 바람같이 사라졌던 극적인 행보 덕분에 더욱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여담으로 77년 시즌 중간에 한번 리타이어 당했는데, 분이 풀리지가 않았는지 자신을 도와주러 온 마샬에게 느닷없이 죽빵을 꽂아버린 사건이 있었다. 이 다음 바로 어깨를 토닥여주며 사과해주기는 하였다.
3. 연도별 성적
3.1. 포뮬러 1
시즌 | 팀 | 경기 | 우승 | 폴 포지션 | 패스티스트 랩 | 포디움 | 포인트 | 순위 |
1973 | 헤스케스 레이싱 | 7 | 0 | 0 | 1 | 2 | 14 | 8위 |
1974 | 15 | 0 | 0 | 0 | 3 | 15 | 8위 | |
1975 | 14 | 1 | 0 | 1 | 4 | 33 | 4위 | |
1976 | 말보로 팀 맥라렌 | 16 | 6 | 8 | 2 | 8 | 69 | 1위 |
1977 | 17 | 3 | 6 | 3 | 5 | 40 | 5위 | |
1978 | 16 | 0 | 0 | 0 | 1 | 8 | 13위 | |
1979 | 올림푸스 카메라 울프 레이싱 | 7 | 0 | 0 | 0 | 0 | 0 | - |
4. 기타
- 은퇴 이후에는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며 특유의 거침없는 언변으로 거성 스타일의 해설로 인기를 끌었다. 1993년 45세의 이른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망할 무렵 그는 여자친구에게 청혼을 할 예정이었다.
- 1978년 이탈리아 그랑프리 레이스 스타트 직후 발생한 사고 현장에서 로니 피터슨을 불붙은 로터스 78에서 끄집어낸 장본인이다. 당시 드라이버들이 포메이션 랩을 마치고 그리드에 정렬하기도 전에 스타트 신호가 발령되었는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리카르도 파트레제가 헌트의 앞으로 무리하게 끼어들었고, 헌트는 이를 피하려다 피터슨과 충돌했다. 하필이면 피터슨은 당해 현역 섀시인 로터스 79가 아닌 전년도의 로터스 78을 타고있었고[4], 이는 더 심한 다리부상을 야기했다. 레드 플래그가 뜨고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다음날 숨을 거두고 말았다. 헌트는 마샬들이 후방의 드라이버들을 살피러 간 동안[5] 피터슨의 곁에서 피터슨의 시선을 처참하게 망가진 다리에서 돌리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6]
-
한편으로는 수려한 외모와 능수능란한 잠자리 스킬(...)로 F1의
플레이보이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항상 빠지지 않는 수식어가 5000명의 여자와
몸을 섞은 남자. 시즌 챔피언을 결정짓는 1976 시즌 마지막이자 16라운드인 일본 그랑프리, 폭우로 레이스가 지연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 같았으면 초조하게 레이스를 기다렸겠지만 헌트는 그 와중에 일본 미녀를 꼬셔서 개러지에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더라는 일화도 있다. 70년대에 F1 드라이버 하면 누구나 떠올렸던 개성 강한 이미지를 가장 충실히 현현한 인물이기도 하다.
-
F1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아내였던 모델 수지 밀러와 배우
리처드 버튼이 얽혔던 이혼 스캔들로 유명하다.
1975년 버튼은 이미 아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사이가 완전히 어긋난 시기에 같이 휴가 겸 스위스에 갔다가 역시 쉬러 와있던 헌트-밀러 부부와 만나게 됐다. 밀러와 헌트는 결혼한지 1년 밖에 안 됐을 때였다. 버튼과 밀러는 바로 눈이 맞았고 헌트가 경기 때문에 스위스를 뜨자마자 바람피기 시작했다.
버튼은 이혼을 빨리 진행시키려고 헌트에게 100만 달러를 줬는데 이미 헌트는 헌트답게 밀러에게 벌써 질려있었고 버튼이 주는 돈을 감사히 받으며 재빨리 이혼 도장을 찍었다. 사실 헌트의 다큐를 보면 헌트는 이미 결혼 준비를 할 때부터 밀러와 결혼하기로 한 걸 후회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진행이 너무 많이 돼있어서 취소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테일러 역시 버튼과의 결혼생활은 이미 끝났다는 걸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혼에 빠르게 동의했다. 그래서 두 부부가 깨졌는데도 실질적인 피해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사건 당시엔 '무려 그 헌트가 훨씬 나이 많은 유명 배우 때문에 아내에게 버림 받았다'는 언론 프레임이 매우 강했다.
몇 년 뒤 밀러는 전아내 엘리자베스 테일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버튼과도 이혼하게 된다. 그리고 밀러는 다시 한 백만장자와 재혼해 미국에 정착했는데, 이 남편과도 헤어졌는지 2013년 스페인 이비자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는 근황이 마지막으로 보고되었다.
-
영화
러시 : 더 라이벌에선
토르크리스 헴스워스가 열연을 했는데, 경기 시작 전에 구토하는 버릇이나, 전처인 수지 밀러와의 결혼과 이혼, 챔피언에 등극하기 까지의 과정과 틈만 나면 붕가붕가를 하는 장면을 잘 그려내서 호평을 받았다.
[1]
제임스 헌트가 태어난 1947년에는 서리 주 소속이었다. 1965년 그레이터 런던이 만들어질 때 그레이터 런던 남부의 서튼에 편입되었다.
[2]
오른쪽 가슴에 달린 패치를 볼 것. 'Breakfast of Champions'는 '해장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3]
1976 시즌에 헌트가 소위 말해 '미치긴' 했지만 드라이빙 스킬 자체는 라우다를 더 높이 친다. 커리어도 그렇고...
[4]
피터슨의 로터스 79는 이탈리아 그랑프리 연습주행 중 전손됐고 여분의 섀시는 관리가 덜 된 78뿐이었다.
로니 피터슨 문서 참조.
[5]
사실 사고 직후에는 의식도 있던 피터슨보다 머리에 타이어를 맞아 의식을 잃은 비토리오 브람비야의 상태가 더욱 심각했다. 다행히도 브람비야는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있다 1년 뒤 회복하여 복귀할 수 있었다.
[6]
조사 후 어떤 드라이버에게도 과실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헌트는 파트레제를 곱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파트레제는 이전부터 과격한 드라이빙으로 말이 많았다.
리카르도 파트레제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