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7:40:42

반도의 봄

반도의 봄 (1941)
半島の春 | Spring of Korean Peninsula
<colbgcolor=#444><colcolor=#fff> 감독 이병일
원작 김성민
각색 함경호
촬영 양세웅
조명 김성춘
편집 이영웅
음악 이토센지(伊藤宣二)
김준영
박영근
도쿄관현악단
신흥악극단(특별출연)
주제가 태평레코드
미술 윤상열
상영시간 84분
제작사 명보영화사
개봉일 1941년 11월 7일
1949년 9월 28일(재개봉)
개봉관 명치좌
수도극장(재개봉)
1. 개요2. 상세3. 출연4.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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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성민의 소설 〈반도의 예술가들〉을 영화화한 이병일 감독의 1941년 개봉 영화.

2. 상세

김성민은 1915년생으로 1936년 일본 주간지 〈선데이 마이니치〉[2]의 대중문예소설 현상공모에 〈반도의 예술가들(半島の芸術家たち)〉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이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 이 작품이며 김성민은 광복 후 영화 《사랑의 교실》(1948)로 제작·각본을 겸하며 감독으로 데뷔하여 《 막난이 비사》 등 12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1930년 중반 이후의 영화 기업화론을 담고 있다. 영화 기업화론은 다른 예술과는 달리 영화가 종합적인 기술과 조직적인 기술자들, 그리고 거대한 자본의 생산성을 요구하는 기업화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이다.

당시 조선에서 제작되던 유성영화들이 대개 그랬듯, 한국어 일본어가 병행되어 사용되었다.[3][4][5] 한국어 대사에는 일본어 자막이 붙어 있다. 이 상태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재개봉되었다는 점이 당시 국민정서상 이례적이긴 했으나, 옛날 영화였던데다 일본어를 듣고 이해 가능한 인구가 당시에는 그래도 많이 남아있었고, 영화를 향유하던 계층 역시 그때만해도 중산층 이상이었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던 듯하다.[6] 20세기 초반에 사용되던 서울 방언과, 조선인 배우들의 일본어 발음을 원음으로 들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귀중한 사료이기에 언어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당시 영화가 촬영된 시대가 시대니만큼, 길빵이나 실내 흡연이 당연시되던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남자 등장인물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계속 담배를 피워댄다.

한동안 필름이 전하지 않다가 2005년 베이징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발굴되면서 복원되었다.

이병일 감독의 데뷔작이다.

파일:아름다운 청춘 지면 광고.jpg
1949년 9월 28일 수도극장에서 《아름다운 청춘》이라는 제목으로 재개봉했다. 제목 뿐만 아니라 '중앙문화흥업사 제공, 최남용 기획'으로 바뀐 것에서 상단 포스터 이미지도 재개봉시 포스터임을 알 수 있다.[7]

3. 출연

  • 김일해 - 이영일 역
  • 김소영 - 김정희 역
  • 서월영 - 허훈 역
  • 백란 - 안나 역
  • 김한 - 한계수 역
  • 복혜숙 - 모경숙 역
  • 이금룡 - 영화사 사장 역
  • 모리 다쓰조(森達三)[8] - 김창수 역
  • 극중극 《춘향전》
    • 김소영 - 춘향 역
    • 권영팔 - 몽룡 역
    • 전택이 - 방자 역
    • 윤정란 - 향단 역

4. 줄거리

매일신보 1941년 11월 9일자에 소개된 내용이다.
미모와 음악의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김정희는 영화계에 크나큰 동경을 젊은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의 오빠 김창수는 도중 경성에 머물러 친구인 청년 작가 이영일에게 누이동생의 소원을 풀어주도록 일체를 부탁하고 떠난다. 이영일은 문학에 정진하는 한편 모 레코드 회사 문예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관계로 정희를 회사의 문예부장이요 자본주인 한계수에게 소개한다. 정희의 청순한 용모에 호색한인 한계수의 마음이 쏠린다. 한계수가 주관하는 영화촬영소 직원들은 허훈 감독을 중심으로 많은 곤란과 악조건과 싸워가며 영화 《춘향전》의 제작을 둘러싸고 피가 맺힐 듯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 중 주연 여배우 안나는 한계수의 사랑을 코에 걸고 갖은 교만을 있는 대로 떠는 여자였다. 호사와 향략에 사로잡힌 안나의 마음은 어느덧 영일에게로 쏠려 미칠듯한 사랑이 불붙는다.
세상의 더러움을 모르는 정희의 출현과 영일의 냉정한 거절을 받게 된 안나는 자포자기가 되어 몸을 어떤 술집에 던지게 된다. 한편 영일의 신변에도 큰 사건이 닥쳐왔다. 그것은 영화촬영소 직원들의 쓰라린 생활을 구하기 위하여 주선한 약간의 돈이 뜻하지 않은 실수로 횡령이란 무서운 죄명 아래 경찰의 손에 걸리게 된다.
이러한 사건을 알게 된 안나는 남자에의 끊을 수 없는 애정을 전차한 돈으로 바꾸어 영일을 무사히 구해준다. 영일은 안나의 그러한 심경을 어찌할 바 모르며 안정을 필요로 하여 병원 베드에 몸을 싣게 된다.
술집의 여급으로 타락한 안나도 영일에게 베푸는 불민불휴의 간호에 정성을 바치는 것을 오직 자기의 모든 기쁨으로 알고 진심을 다했다. 한편 안나를 잊은 촬영소는 새로운 스타 정희를 얻어 《춘향전》의 제작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반도 영화계에 새로운 이해와 깊은 뜻을 품은 소장 실업가 방씨의 출자에 의하여 여기에 반도영화주식회사가 설립되어 대작 《춘향전》은 나날이 완성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반도의 젊은 영화인의 피와 땀의 결정이 화려한 각광을 받아가며 관중을 맞는 날 빛나는 스타로 스테이지에 오른 정희는 피로와 박수 그리고 흥분에 쌓여 무대 뒤에 쓰러져 부랴부랴 병원의 응급 치료를 받게 된다. 놀라 달려온 사람들 중에는 안나와 영일의 얼굴도 있었다. 여기서 안나의 애끊는 단념의 고백으로 서로 사랑하는 영일과 정희는 지나간 옛일을 물에 띄워 보내고 수일 후 여러 사람의 축복에 쌓여 새로운 예술로의 정진을 굳게 가슴에 품고 경성역을 떠나 여행길에 오른다.


[1] 1949년 재개봉시 포스터 [2] '주간 아사히'라고 기록된 자료도 있지만 '선데이 마이니치'가 맞다. '주간 아사히'와 '선데이 마이니치'는 둘 다 아사히신문사에서 같은 해에 창간한 주간지라 혼동하기 쉬운데 소설 현상공모는 '선데이 마이니치' 쪽이다. [3] 작중에서 한국어는 본심을 이야기할 때 주로 사용되는 한편, 일본어는 공적인 대화를 할 때 사용되고 있다. 다만 영화에서처럼 실제 어문생활에서 조선인끼리도 직장에서 일본어로 소통했는지는 불분명한데,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일본어 대사의 비중을 맞추기 위한 묘사였을 수도 있다. [4] 다만 당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당시 조선인들은 한국어를 구사할 때 요즘처럼 서울말을 준표준어를 기준으로 삼고 구사하기보다는 각자 출신지역의 사투리로 구사하는 경우가 많아 제주도처럼 아예 방언이 외국어 수준으로 다를 때는 그냥 일본어로 소통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5] 이는 이 당시 일제가 교육현장에서 일본어를 국어이자 표준어로 교육을 시킨 탓이 컸다. [6] 다만 해방 직후 이런 식의 한국어-일본어 이중언어 영화를 그대로 틀어주자 영화관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는 기록이 있긴 하다. [7] 예전에는 재상영시 포스터 제목을 바꾸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예컨대 ' 미망인'은 '과부의 눈물', ' 효녀 심청'은 '효녀 청이', ' 백치 아다다'는 '벙어리의 서름'으로 적혀 있다. [8] 일본 영화계에서는 활동 기록이 없다. 극중 자연스러운 한국어 대사를 하는 것을 보면 창씨개명한 조선인일 가능성이 높다. 1949년 재개봉시에는 지면 광고에서 임달삼(林達三)으로 바뀌어 표기되었는데 임달삼 역시 한국 영화계에 활동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