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03:30:56

이궁지쟁

남로당쟁에서 넘어옴
1. 개요2. 특징3. 배경4. 세력 분류
4.1. 태자4.2. 노왕4.3. 기타
5. 사건의 진행
5.1. 241년부터 245년까지5.2. 250년 손화 폐출, 손패 처형5.3. 250년에서 252년까지
6. 피해를 받은 인물
6.1. 손화파6.2. 손패파
7. 후일담8. 평가
8.1. 육손의 책임8.2. 손권의 책임8.3. 손권의 아들들과 관련8.4. 후계 선정과 숙청에 관하여8.5. 손화파와 손패파의 갈등이 불씨를 남겼는가?8.6. 숙청 결과와 이후 황제들
9. 비슷한 사례10. 기타

1. 개요

二宮之爭

250년,[1]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초대황제 손권의 후계자 선정을 놓고 일어난 사건이며 오나라 후반 30년 간 오나라 정계에 영향을 준 사건이다.

2. 특징

'이궁지쟁'에서 '이궁(二宮)'은 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 두 사람을 의미한다. 전근대 왕자들에게는 각자 거처하는 '궁(宮)'이 있었으며 이것이 일종의 ' 어칭호'가 되기도 했다.[2] 대한민국에서 주로 쓰이는 '이궁의 변'이라는 명칭은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정난의 변,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이나 이 사건처럼 권력을 둘러싼 집권 세력 간의 다툼이나 소요를 '변(変)'이라고 칭한다. 따라서 '이궁의 변(二宮の変)'을 적절히 풀자면 ' 두 왕자의 난' 정도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후일 명나라의 '쟁국본(爭國本)'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다툼은 '쟁(爭)'이라고 주로 하기 때문에 이궁지쟁(二宮之爭)'이나 '남노당쟁(南魯黨爭)'[3]이라고 칭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손권이 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 간의 위계를 불분명하게 두고 이른바 '적서의 차이를 분명하게 두지 않았다'는 식의, 태자를 지지하는 신하들의 반발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오의 신하들은 이 기간동안 양쪽으로 편이 나뉘어서 서로를 탄핵 및 참소했고, 손권은 자꾸 신하들이 후계 문제에 간섭하려 들자 결국에는 두 아들마저 모두 팽하고 막내아들 손량에게 제위를 물려주면서 후계구도에 파국을 불러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손권이 노망난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하기도 하나, 해당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에 손권이 치매 환자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했다거나 광증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오히려 당시 손권은 후계자 문제나 숙청 이외의 외교적, 군사적 일처리는 아주 멀쩡했다. 보즐 주연이 촉의 배반을 의심해도 손권은 논리적인 이유를 들어 반박했으며(오주전), 위군 측에서도 이 당시 손권을 절대 만만하게 보지 않아서 제갈탄 왕기에게 의논을 할 정도였다(왕기전). 손권이 치매에 걸린 상태였다면 저런 일화들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손권이 치매가 아니었다는 사실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가 이궁지쟁을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 호족의 세력이 강했던 오나라의 한계를 느끼고 호족들을 서로 억지로라도 싸움 붙여서 그들의 세력을 최대한 줄이고 황실의 힘과 권위를 높이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행한 일이라는 것.[4] 다만 최종적으로 형 둘을 제치고 황제에 즉위한 막내 손량은 겨우 10살 아이였고 섭정을 할만한 반부인은 이미 죽임을 당했기에, 손권이 생전에 세운 권신들에게 휘둘리기만 하다가 손권이 예상하지 못했던 역신 손침이 오나라 정계에서 손권이 손량을 위해 세운 핵심 인사들을 모두 숙청해 제대로 된 통치 행위를 해보기도 전에 폐위당하여 손권이 세운 후계 구도가 모두 어그러짐으로써 문제가 생겼다. 결국 손휴가 즉위해 손침을 숙청한 이후에야 이런 손권 사후의 혼란한 상황은 종료되었다.

물론 치매 같은 중증 정신질환이 아니더라도, 노환이 손권의 행동 요인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육체적 건강과 심리적 불안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노환이 불안으로 인한 판단력 저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결론도 나온다. 조조 또한 치매가 아니었지만 말년에는 젊은 시절의 과감함을 많이 잃어버리고 소심해보이는 언행을 많이 했다. 손권은 유비처럼 400년간 국성이었던 유씨도 아니었고, 한나라 남방 3개주를 제패하고 이곳을 크게 발전시키긴 했으나 조조처럼 자신의 군사적 능력으로 직접 군웅할거의 난세를 대부분 정리하고 국토의 70%를 평정한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황제를 자칭할만한 명분과 정통성이 부족했고 오나라의 발전과정에서도 항상 신하들과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사실상 손권 본인의 실력과 능력, 오랜 통치를 통해 본인부터가 정통성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처지였던지라 그렇게 오랫동안 오나라의 군주로서 전력을 다해 오나라를 구축하며 살면서 늙은 결과, 오랜기간 뛰어난 통치로 확고한 위치에 올랐음에도 말년의 손권은 후계 문제에 한해서는 신하들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으며, 불안감에 휩싸인 상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만약 손권이 앞으로 20~30년은 더 살 수 있는 창창한 나이였다면 이런 숙청도 군주 자신의 권위는 높아지기에 손권 입장에서는 행할 가치가 있었겠지만[5], 손권은 환갑이 지난 늙은 나이에 이런 행동을 저질러서 본인은 곧 죽어버렸고, 멀쩡하던 후계자 둘을 다 조져버리고 10살 아이에게 옥좌를 물려줬기에 사후에도 분란의 소지가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제갈량 사후는 연의가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 소재인데다, 상대적으로 오는 위나 촉에 비해 덜 주목받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사를 읽은 사람들이 늘면서 조금씩 다루기 시작( #)했다.

오주전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으나 육손전, 전종전, 장소전[6], 손화전 등에 개별 기록들이 존재한다.

3. 배경

이 모든 문제는 손권의 아들들이 일찍 죽은 비극에서 시작됐다. 차남 손려가 232년에 고작 20세로 요절한 것도 모자라 241년에는 장래를 촉망받던 태자 손등이 33세의 나이로 죽는다. 손권은 삼남 손화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 사남 손패를 같은 궁궐에 살게 했다. 이때부터 오나라의 신하들은 예법을 따르지 않고 둘의 구분을 두지 않는다며 손권의 행동에 대해서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같은 아들끼리 평등하게 대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평범한 가정의 경우일 뿐, 일정 규모 이상의 조직에서는 후계자인 아들과 그렇지 않은 아들의 관계를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나아가 현대도 아니고 고대 군주제 국가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황태자와 다른 황자들은 사적으로는 형제이지만 공적으로는 엄연히 군신관계라 할 수 있다.[7] 이등체강 원칙이 군왕이 아니라 친왕으로 대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전근대 사회에서 어느 조직이든 후계자와 그렇지 않은 이를 동등하게 대우하는 건 후계자의 자리를 노리고 도전하라는 신호로 여겨질 공산이 컸다. 가후가 괜히 원소 유표의 사례를 들며 후계자로 정통성있는 장자인 조비를 민 것이 아니다.

손화와 손패는 신하들의 반대로 결국 다른 궁궐에 살게 되나, 오히려 이때부터 오나라는 신하들이 두 파로 분리되어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했다.

4. 세력 분류

등장하는 관직명을 보면 알겠지만 오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인물들이 총동원된 싸움이었다. 칼만 안들었지 사실상 내전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을 정도니….

손화 편에 선 인사들은 육손, 제갈각, 고담, 주거, 주적, 장휴 등 오의 대호족이거나 대호족의 자제들, 외부파 인사들 중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고위직에 오른 사람들과 그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오의 최상위 인사들과 그 자제들이었다.

손패의 편을 든 인사들은 손홍, 보즐, 여대, 전종, 전기, 손준, 여거, 손노반 등 중소호족파와 중간급 위치에 있는 인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손권의 친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거기다 훗날 숙청의 달인 황제폐하 큰 딸내미도 있었다.

당시 손화는 하자가 전혀 없는 멀쩡한 황태자였다. 위의 두 형이 죽으면서 자연스럽게 태자가 된데다 손화를 태자로 책봉해달라는 전 태자 손등의 유언도 있었기에 정통성이나 책봉 과정의 문제도 없고, 손화 본인도 이궁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전까진 능력이나 인격 면에서 이렇다 할 흠이 없었다. 그러니 당시 오나라 정권의 고위 인사들이 그의 편에 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손권이 그냥 노망이 나고 손패가 마냥 좋아서 손패를 민 것이 아니라, 오에서 가장 큰 세력이지만 동시에 황권에 잠재적인 위험이 되는 호족 세력에 대한 견제였고, 신흥 호족인 보즐과 전종 등이 손권의 이러한 성향에 영합해 기존 호족인 강동 4성 등에 대항하고자 한 것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 즉 이것은 후계 문제를 두고 예법을 고수한 오의 최상위권 인사들과 그에 도전하는 중간파들의 싸움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다만 손화파 인사들에 비해 명성이나 세력이 부족했을 뿐 보즐, 여대, 전종 등이 손화파에 비해 능력이 부족한 인물들은 아니었다.[8]

4.1. 태자


정통성을 가진 태자파인지라, 굵직한 신하들이 예법을 내세우며 손화 편을 든다. 그리고 오의 사성에 들어가는 일가가 모두 포함되어 있고, 손오사우라고 불리는 손등의 옛 최측근 역시 이미 고인이였던 진표만 빼고 다 이곳에 포진해 있다.[10] 그 외에 제갈각, 주적 같은 재상&사령관급 인사들 혹은 그 2세들 또한 여기에 속해있다.[11] 대표적으로 외부출신 인사인 장소의 일족과 제갈근의 일족도 여기에 속해 있는데 이는 장소의 아들 장승이 제갈근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낳은 딸들이 각각 손화와 육항에게 시집가는 등 혼맥 때문에 손화파로 엮일 여지가 많아서다. 이것은 결국 당시 동오의 주류 세력 절대다수가 태자 손화를 지지하고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4.2. 노왕


전반적으로 손화파에 비해 명성이 매우 약한 편이다. 전종, 보즐, 여대 등이 그나마 네임드고, 여기에 손권의 지지가 추가된다.
이들이 손패 편에 선 이유에 대해 정사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으나, 보연사가 아들이 없이 죽어 손패를 지지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보연사의 다른 딸인 손노육은 손화파였기에 수긍이 가지 않는 설이다.[14] 보즐은 촉오전쟁 당시 형남에 있었고, 여일 사건을 안정시키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위의 투항자인 왕잠이 뻥튀기한 모래로 양자강을 막아 공격한다는 말도 안되는 계획을 호들갑을 떨면서 손권에게 상소했고, 손권뿐 아니라 제갈각과 여범에게까지 비웃음을 당했다. 거기에 보즐은 처첩의 사치가 심해 크게 비난받았고 자식들 역시 그다지 뛰어난 인물들이 아니었다.[15] 전종 역시 처음에는 공이 있었지만 작피 전투에서 패하는 등 갈수록 전쟁에서 별 활약을 못 한데다 아들들도 관위에 오르지 못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고, 결정적으로 아내가 손화의 어머니 대의황후를 끔찍하게 싫어했던 손노반이었다. 결론적으로 자기들의 입지를 세우고 대호족들이 가진 권력을 빼앗기 위해 손패파에 들었을 공산이 상당히 크다.

4.3. 기타

  • 좌대사마 주연: 손패파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으나, 그 아들 주적이 「손화전」 주석에 손화파의 일원이라고 적혀 있기에 여기 기술한다.
  • 독군사자 양도
  • 상서복야 시의: 손패의 부상으로 있었으며 그를 극진하게 섬겼으나, 그가 올린 상소문의 내용은 손화파의 내용과 가깝다.

5. 사건의 진행

5.1. 241년부터 245년까지

문제의 원인은 애초에 손권에서부터만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당초 손권은 손등의 죽음 이후 손화를 태자로 삼으면서 손패를 비롯한 다른 아들들을 애초에 왕으로 세울 생각이 없었다. 사실 손등이 태자 자리에 있었을 때도 다른 아들을 왕으로 세운 바가 없는 손권이었으니 이런 기조는 당연했다. 그는 손등을 태자로 삼았을 때도 지속적으로 둘째 아들인 손려를 왕으로 올려 황실의 변방으로 삼으라는 청을 거절했다. 이후 손등이 죽자 조정 신료들 모두는 손화를 태자로 삼을 때 손권의 다른 아들들을 왕에 봉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청했고, 손권은 결국 모두를 왕에 올리진 않고 과거 손등을 보좌했던 손려의 사례처럼 손패를 왕에 올리는데 동의하게 된다.
적오 5년( 242년) 봄 정월, 아들 손화(孫和)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고 대사면을 실시했으며, 화흥현(禾興)을 가흥현(嘉興)으로 고쳤다. 모든 관리들이 황후를 세우고 네 아들을 왕으로 삼을 것을 상주했다. 손권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현재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백성들은 수고로우며 고달프다. 게다가 공로가 있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는 아직 기록되지 않았고,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자는 오히려 구휼되지 못했다. 그런데 토지를 함부로 분할하여 자신의 자제를 풍요롭게 하고, 작위를 높여 자신의 비첩을 총애하려고 하니, 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 건의는 방치하라.

(중략)

가을 7월, 장군 섭우(聶友), 교위(校尉) 육개(陸凱)를 보내 병사 30,000명을 인솔하게 하여 주애(朱崖)와 담이(儋耳)를 토벌하도록 했다. 이 해, 역병이 크게 유행하였고, 담당 관리들은 또 황후를 세우고 자식들을 왕으로 삼을 것을 상주했다.

8월, 아들 손패(孫霸)를 세워 노왕(魯王)으로 세웠다.

흔히 손권이 손패를 총애해서 노왕 자리에 올리고 우쭈쭈한 것이 문제라는데, 원래 손권은 손화를 태자로만 삼고 손패를 노왕으로 삼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그해에 역병이 돌자 왕을 올려 황실을 튼튼히 하라는 조정 신료들이 다시 청했고, 이에 손권은 결국 다른 아들들은 일단 놔두고 손화의 바로 아랫동생인 손패를 노왕으로 삼게 했다.
손화가 태자(太子)로 임명되었을 때 손패는 노왕(魯王)이었는데, 총애와 특별한 대우에 있어서는 손화와 다름이 없었다.
<손패전>
남궁(南)과 노왕(魯)의 궁, 두 궁궐이 처음 세워졌을 때, 시의는 본래의 직책 위에서 또 노왕의 부상(傅)을 겸임했다. 시의는 두 궁의 지위가 근사함을 꺼려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신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노왕은 천부적인 미덕을 갖추고 있고 문무의 자질을 겸하고 있으며, 현재의 상황에 근거하여 적절한 것은 마땅히 사방을 지키도록 하여 국가의 방어를 돕도록 해야만 합니다. 노왕에게 아름다운 덕행을 선양하고 권위있는 명성을 널리 빛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국가의 훌륭한 법도이며, 사해 안의 사람들이 우러러 바라는 것입니다. 다만 신의 언사가 조잡하고 거칠어 생각을 전부 표현할 수 없을 뿐입니다. 저는 두 궁은 지위에 있어 높음과 낮음의 차이가 있어 상하의 질서를 바르게 하여 교화의 근본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러한 내용의 표를 서너 번 올렸다. 그는 노왕의 부상으로 있으면서 충성을 다하고 항상 간언을 했다. 그리고 군주를 섬김에 있어 근면하고 사람들과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귀었다.
<시의전>
애초에 손권이 손화를 태자로 삼고, 손패를 노왕으로 삼으며, 그들로 하여금 같은 궁궐에 살게 했는데, 각각의 예법에 따로 구별을 두지 않았다. 그러자 많은 대신들이 태자와 국왕은 마땅히 위아래의 서열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서로 예법을 다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때문에 따로 궁궐을 나눠 살게 했는데, 이때부터 분열이 시작되었다. 시어(侍御)와 빈객(賔客)들이 두 패로 갈라지고, 나중에는 대신들까지 두 패로 갈려졌다.

승상(丞相) 육손(陸遜), 대장군(大將軍) 제갈각(諸葛恪), 태상(太常) 고담(顧譚), 표기장군(驃騎將軍) 주거(朱據), 화계태수(會稽太守) 등윤(滕胤), 대도독(大都督) 시적(施績), 상서(尚書) 정밀(丁密) 등이 예법을 내세우며, 태자를 따랐고, 표기장군(驃騎將軍) 보즐(步隲), 진남장군(鎮南將軍) 여대(呂岱), 대사마(大司馬) 전종(全琮), 좌장군(左將軍) 여거(呂據), 중서령(中書令) 손홍(孫弘) 등이 노왕(魯王) 편을 들었으며, 이곳 저곳의 장군, 관료, 대신들이 둘로 나누어졌다.

손권은 이를 크게 우려하여 시중 손준(孫峻)에게 명하여

"아들들이 이렇게 서로 싸우고, 신하들도 나누어지니, 장차 원소의 원씨(袁氏) 집안 꼴이 되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겠소. 자제들이 화목하지 않으면 신하들이 나뉘어져서 장차 원씨와 같이 실패함이 있게 되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만약 한 사람을 세워놓게 된다면 어찌 혼란이 일어나지 않겠소?"
<손패전> 주석 《은기통어》

어쨌든 손권은 손패를 노왕으로 삼을 생각도 없었는데 신하들이 아들들을 번왕으로 삼으라 했기에 결국 타협해서 손패만을 노왕으로 삼았고, 손화와 손패가 손권의 아들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위치가 되자 총애와 특별한 대우에 있어서 손화와 손패가 다를 것이 없었다. 이에 지속적으로 신하들이 두 사람의 예법을 다르게 해야한다고 간언해서 해서 궁을 따로 짓게한 걸 손권이 그대로 따랐다. 즉 손권은 신하들이 예법을 다르게 해야한다고 해서 그 말대로 따로 나가 살게 하면서 두 사람의 구분을 지었던 것이다.

근데 문제는 이런 전장 제도를 마련한 감택 고옹이 죽고, 육손이 승상에 오르면서부터 발생했다. 두 황자 사이의 빈객들이 편을 나누던 것에서 그치지 않고, 조정 신료들까지 두 패로 나뉘어 태자파와 노왕파가 성립되었고 서로 싸움질을 하게 되었다. 손권이 이궁의 대우를 다르게 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두 궁을 나누어 예법을 다르게 해달라고 건의한 것을 손권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손권은 웬만해선 신하들이 해달라는대로 다 해준 셈이었다. 근데 정작 그렇게 해주니까 신료들이 손화와 손패를 가지고 당파를 결성해서 황자들한테 바람을 불어넣고 싸움질을 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오래지 않아 손화와 손패가 화목하지 않다는 소리가 손권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손권은 사람들의 왕래를 금지시켜 끊도록 하고 그 시간에는 학문에 정진하도록 했다.
<손패전>

손권은 처음엔 손화와 손패에게 싸움질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는 식으로 좋게 좋게 넘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양측의 갈등에 있어서 누구도 손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독군사자 양도가 보다 못해 손권에게 상소를 올렸다. 양도는 제갈각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식으로 노왕파로 오해받기도 하나 이궁지쟁 당시에는 이 표를 올린 것 외에 별다른 행동을 취한 바 없으므로 태자의 남당과 노왕의 노당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이 듣기로는, 옛날에 천하를 소유한 사람은 모두 우선 적자(適)와 서자(庶)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자제들에게 봉토를 나누어 주어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조종(祖宗)을 존중하며 국가의 방위벽이 되었다고 합니다.

두 궁궐이 각기 태자와 노왕(吳)으로 책봉되었을 때 사해 안에서는 마땅한 처사라고 칭찬했으며, 이것은 위대한 오나라가 흥성하여 융성해질 기초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두 궁궐이 동시에 빈객을 거절한다는 말을 듣고,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사람들은 놀랐으며 크고 작은 관원들은 실망했습니다.

저는 사사로이 아랫사람들의 의론 중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수집하였는데, 모두 두 궁궐에 있는 자는 지혜가 통달하고 영재가 무성하며, 신분을 세우고 명호를 확정시킨 이래로 오늘까지 3년이 되었는데, 덕행은 안에서 빛나고 아름다운 명성은 밖에서 빛나 서쪽과 북쪽 두 모퉁이에서도 오래 전부터 그들의 명망을 듣고 복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덕정(德)에 귀순하기를 갈망하는 것에 순응하여, 두 궁궐에서 사방 먼 곳의 빈객들을 초청하도록 명해 다른 나라로 하여금 그들의 명성을 듣게 한 후 그들의 노복이 되기를 원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현재는 이 점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히려 조서를 내려 그들의 방위를 감소시키고 빈객을 거절하도록 하여 사방의 예의와 경의로 하여금 다시는 통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실제로 폐하께서는 고대의 도의를 숭상하여 두 궁궐로 하여금 학문에만 뜻을 전념하여 다시는 미소한 일을 생각하고 관찰하거나 듣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역사 경험을 익혀 광범위한 사물을 숙지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신들이 머리를 길게 하고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두 궁궐이 전장 제도를 준수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신이 앉으나 누우나 편안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설령,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과 같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보충 조사하고 세밀하게 고려하여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사람들로 하여금 유언비어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이 두려운 것은, 의심이 쌓여 비방이 되고, 시간이 오래 흐르면 이 사실이 사방으로 전해질 것이고, 서쪽과 북쪽의 두 모퉁이는 우리 나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이동(異)의 말은 쉽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일단 전해지는 날이면, 여론은 반드시 일어나 두 궁궐은 순리를 따르지 않은 죄가 있으며, 폐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른다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이 점을 다른 나라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면, 또한 국내의 백성들에게도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국내의 백성들이 의심하고, 다른 나라에서 훼방을 일으킨다면, 웅대한 사업을 발전시키고 사직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일찍 우수한 조서를 발표하여 두 궁궐로 하여금 처음과 같이 훌륭한 인물들과 예의로써 왕래하고 임명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천지가 맑고 편안해질 것이며 만국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양도의 판단에 따르면 이때쯤 손노반의 공격으로 태자파가 불안감을 가지게 되어 이에 대한 반격으로 적•서의 구분을 더 분명히 해야 한다거나 지금까지는 궁의 대우가 동등했다는 주장이 비방이나 유언비어식으로 나돌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양도는 "유언비어인 것을 손권 본인도 알고 있으니, 갑자기 빈객을 끊고 이러면 괜히 유언비어만 퍼지니까 세밀하게 고려해서 원래대로 조치를 돌려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의심이 쌓여 비방이 되고, 시간이 오래 흐르면 이 사실이 사방으로 전해질 것이고, 서쪽과 북쪽의 두 모퉁이는 우리 나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이동(異)의 말은 쉽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적•서의 구분을 손권이 안 한 것이 아니고 설령 했다고 해도 사실 관계를 분명히 하면 될 일일 뿐이라는 것이 양도의 인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비방과 유언비어(이궁이 동등한 대우를 받아서 태자 자리가 위태롭다)를 퍼뜨린 자들이 있다고 양도는 판단한 것이다. 바로 손화파인 남당파들이 이런 소문을 퍼뜨리면서 손권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무렵에 손화가 손권의 총애를 잃을 짓을 했다. 손화는 무고하다고만 보통 알려져 있는데 손화가 총애를 잃은 연유는 손화 자신의 행실에 있었다.
이후 왕부인(王夫人)과 전공주(全公主) 사이에 틈이 생겼다. 손권은 일찍이 질병으로 인해 자리에 누워 있었으므로 손화가 종묘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손화의 비(妃)의 숙부인 장휴(張休)가 종묘 근처에 살고 있었으므로 손화를 초청하여 머물도록 했다. 전공주는 사람을 시켜 은밀히 감시하도록 하고는, 태자가 종묘 안에 있지 않고 오로지 비의 집으로만 가서 일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또 왕부인은 황상이 질병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기색이 있다고 말했다. 손권은 이 일로 인해 노여워했다. 왕부인은 근심하다가 죽었고, 손화의 총애는 점점 줄어들어 폐출될 것을 두려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육손(陸遜)ㆍ오찬(吾粲)ㆍ고담(顧譚) 등은 적자와 서자의 이치에 관해 여러 차례 진술하여 태자의 지위는 정리(理)에 따라야지 탈취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전기(全寄)와 양축(楊竺) 등은 노왕(魯王) 손패(霸)의 무리가 되었고, 이들의 모함은 나날이 심해져 갔다. 오찬은 결국 하옥되어 주살당했고, 고담은 교주(交州)로 쫓겨났다.

손화의 어머니인 왕부인( 대의황후 왕씨)과 전공주, 그러니까 손노반은 사이가 나빴기에 손노반은 어디 손화를 공격할 거리가 없나 하고 기회를 노리던 상황이었다. 마침 손권은 몸이 아파서 병의 치유도 빌겸하여 종묘의 제사를 손화에게 맡겼다. 문제는 황실 제사를 지낼거면 종묘에 있어야 할 태자가 종묘에는 안 있고, 손화의 본처 장비(張妃)의 숙부인 장휴의 집이 근처에 있어서 손화가 처갓집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당연히 손권은 종묘에서 지내면서 제사를 지내야 할 손화가 자신의 명령을 어긴 것에 격노했다. 고대 사회에서 황실 제사의 중요성은 말힐 필요가 없다.[16] 왕부인의 건은 손노반의 모함이라 할지라도, 중간에서 손화 본인이 황명을 어기고 편하자고 처갓집에 머문건 사실이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태자와 노왕이 벌이는 쌈박질에 조정 신료라는 자들이 끼어 들어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사안에 대해서 손권이 진절머리를 치던 중이었는데 손화의 이런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손화를 총애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 문제는 손화가 자초한 것이었으며, 당황한 남당파들은 이런 돌발사태에 태자를 폐위하면 안된다고 말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태자와 노왕의 두 궁궐이 병립하고,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대부분 자제를 보내 임무를 받도록 했다. 전종이 이 일을 육손에게 보고하자, 육손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제들에게 만일 재능이 있다면 임용되지 못함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므로, 마땅히 사적인 청탁으로 관리로 임명되어 영리를 구하는 일은 하지말아야만 된다. 만일 이 일을 훌륭하게 실행하지 못한다면 결국 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 궁궐의 세력이 대적하고 있을 때는, 반드시 이쪽을 지지하는 파와 다른 쪽을 지지하는 파가 대립하게 된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옛사람들이 매우 기피했던 것이다."

전종의 아들 전기(全寄)는 과연 노왕에게 아부하고 경솔하게 교제관계를 맺었다. 육손이 전종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김일제(金日磾)를 본받지 않고 아기(阿寄 ; 전기)를 비호하였으니 당신의 가정에 재앙이 이를 것입니다.

전종은 육손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다시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태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불안하다는 의론이 있게 되자, 육손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자는 정통이므로 마땅히 반석같은 견고함이 있어야 하고, 노왕은 번신(藩臣; 왕실의 내부를 지키는 신하)이므로 총애와 대우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도록 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피차 각각의 위치에 있어야만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안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간절하게 머리를 부딪혀 피를 흘리며 저의 의견을 진술합니다.

그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도성으로 가서 적자와 서자의 구분에 대해 직접 논의하여 득실을 바로잡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손권은 그의 의견을 듣고도 따르지 않았다.
<육손전>

이때 전종은 자신의 아들인 전기를 파견하여 손패를 섬기게 하고 육손에게 이 사실을 알렸는데, 육손은 전종에게 그건 옳지 않은 행위라고 경고했지만 전종은 듣지 않았다. 여기에 손패파로 들어간 전기가 둘 사이를 이간질하니 육손과 전종의 사이는 더 틀어지게 되었고, 육손은 다시 한 번 김일제[17]의 사건을 보라며 경고했지만 전종은 아예 답변조차 하지 않아 둘 사이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18]

또한 손패는 손화파지만 같은 손화파인 제갈각과 사이가 나쁜 주적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직접 그의 관서까지 찾아가나, 주적은 땅으로 내려가면서까지 합당을 사양하니 결국 실패하고 만다.[19]

육손은 이 상황속에 태자파의 영수로서 전종에게 김일제처럼 왜 아들을 죽이지 않느냐고 협박했고 전종을 김일제에 비하면서 손권을 은근히 한무제와 비교하는 등 슬슬 선을 넘고 있었다. 아마 이 김일제를 논하면서 전종과 손권을 공격했던 것을 전종이 손권에게 알렸으면 불벼락이 진작에 떨어졌을 것인데, 그래도 윗사람[20]이라고 전종이 참고 넘어가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 <오지>가 손화의 아들인 손호 때 지어진 《오서》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어서 잘 살펴보지 않으면 손화파는 잘못이 없고, 손패파만 손화를 모함하면서 잘못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양도가 유언비어를 언급하며 은근히 손화파를 저격하고, 육손이 편지로 전종을 인신공격하는 모습이 보이는 등 손화파도 만만치 않았다.

육손은 승상의 지위에 오른 이후 태자의 위치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적•서의 구분이 이미 명백한 상황에서 총애와 대우를 다르게 해야 한다고 계속 진술했다. 그러나 애초에 이럴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육손이 먼저 손권의 원래 의도대로 손패를 노왕에 올리라고 하질 말든가, 아니면 신하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손패 말고도 다른 아들들도 모두 왕작에 봉해야 한다고 먼저 주청했어야 정상이다. 손권이 신하들 하라는대로 했는데도 이제 와서 계속 적•서가 불분명하다면서 손권이 받아들이지 않을 주장을 한 것을 보면 육손도 이 문제에서 그렇게 책임이 깨끗하진 않다. 그리고 애초에 태자란 인물이 가뜩이나 조정에서의 당쟁으로 손권의 분노게이지가 점점 오르는 마당에 빌미를 제공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육손과 고담은 각각 상소를 올려 손권의 이러한 행위를 비판하지만 아들들간의 싸움과 신하들이 파벌을 지어 싸우는 행태에 질린 손권에게 육손 같은 세력 있는 신하가 뒷배인 손화파의 말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고, 이 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을 들은 손패는 화가 나서 고담과의 사이가 더더욱 악화되었다. 거기에 전종과 그 아들들 역시 고담을 미워하게 되는데, 원래 고담은 전종의 아들 전기의 성격이 간사한 것을 간파하고 그를 멀리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과거 위나라와의 전쟁때 장휴와 고승의 공이 전서와 전단의 공보다 크다고 하여 장휴와 고승은 잡호장군으로 승진하고, 전서와 전단은 그보다 아래인 편장군 및 비장군의 직위로 오르게 된 적이 있었는데[21], 전서는 전종의 아들이자 전기의 형이었고 전단은 전종의 조카였으므로 전종과 전기는 그들을 더욱 미워하고 있었다.

손화파의 공세에 불만을 품은 손패파가 먼저 목표로 삼은 것은 241년 수춘 전투에서 적의 기세를 꺾어 피해를 막은 장휴와 고승이었다. 앞서 설명한대로 전기는 과거에 형 전서의 공이 이들 때문에 과소평가되었다고 미워하던 터라, 양축, 오안, 손기, 전기를 중심으로 한 손패파가 손권에게 장휴와 고승이 진순과 내통해서 거짓으로 공을 늘렸다고 참소했다.

손권은 그 둘에게 벌을 내리고 연좌제를 적용해 그들의 친족들에게도 벌을 내렸는데, 이때 고승의 친족인 고담 또한 연좌제로 벌을 받게 되었다. 손권은 그래도 자신이 총애하던 고담인지라 그에게 사죄하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했으나 고담은
폐하, 참언[22]이 흥하고 있습니다!
라고 외치는 패기 넘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에 사무를 맡은 관리가 "저런 불경죄를 저지르다니! 저건 사형에 해당하는 죄입니다!"라고 외쳤으나, 손권은 여기서 아량을 베풀어 조부 고옹을 생각해 봐준다면서 장휴, 고승, 고담을 교주[23]로 유배보냈다. 이렇게 유배를 간 장휴와 평소 사이가 나빴던 손홍이 장휴를 참소하여, 장휴는 41세에 죽었고 고담 또한 유배간 지 2년 만에 죽었으며, 고승 또한 37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태자 손화가 그의 명성을 듣고 남다른 예절로써 대우했다. 마침 전기(全寄)와 양축(楊竺) 등이 노왕 손패에게 붙어 아부하고, 손화와 분쟁이 생겨 은밀히 서로 모함을 하게 되자, 육윤은 여기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가혹한 형구를 모두 사용했지만, 그는 끝까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록》(吳錄)에서 이르길, 태자는 폐출될 것을 두려워했고, 노왕은 불손한 태도가 더욱 심했다. 손권은 당시 양축을 보고 측근에 있는 자들을 물린 후 손패의 재능에 관하여 논의했다. 양축은, 손패는 문무 양면에 우수한 자질을 갖고 있으므로, 마땅히 정식 후계자로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진술했다. 그래서 손권은 손패를 태자로 세우기로 약조했다.

그런데 측근에 있는 자가 평상 밑에 엎드려 있다가 이 말을 듣고 태자에게 알렸다. 마침 육윤은 무창에 이르러 태자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태자는 미복으로 육윤의 수레 위로 올라가 함께 은밀히 이를 논의하고, 육손으로 하여금 표를 올려 간언하도록 했다. 그후 육손이 표를 올려 강력하게 진언하자 손권은 양축이 이 사실을 누설하였을 것으로 의심했다. 문책을 받게 된 양축은 이를 부인했다.

손권은 양축을 풀어주고, 이 일이 어떻게 누설된 것인지 연유를 찾도록 했다. 양축은 육윤만이 서쪽으로 갔으니, 반드시 그가 말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또 사자를 보내어 육손에게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된것이냐고 묻자 육손이 육윤이 알려주었다고 했기 때문에 육윤을 불러 고문하게 되었다. 육윤은 태자에게 죄가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양축이 신에게 말했습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 양축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양축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이런 거짓을 자신이 말했다고 시인하게 되었다. 손권은 애초에 양축을 의심했었는데 양축이 이를 시인하자 예상했던 바 그대로였다며 양축을 처형했다.
<육윤전>
태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불안하다는 의론이 있게 되자, 육손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자는 정통이므로 마땅히 반석같은 견고함이 있어야 하고, 노왕은 번신(藩臣; 왕실의 내부를 지키는 신하)이므로 총애와 대우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도록 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피차 각각의 위치에 있어야만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안녕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간절하게 머리를 부딪혀 피를 흘리며 저의 의견을 진술합니다.

그는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도성으로 가서 적자와 서자의 구분에 대해 직접 논의하여 득실을 바로잡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손권은 그의 의견을 듣고 따르지 않았다. 육손의 생질들인 고담, 고승, 요신이 모두 태자에게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무고하게 쫓겨나게 되었다. 태자태부(太子太傅) 오찬(吾粲)은 육손과 여러 차례 편지를 왕래했다는 사실 때문에 옥에 갇혀 사망했다. 손권은 궁궐으로부터 사자를 자주 파견하여 육손을 질책했다. 육손은 분노하고 통탄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고, 집에는 남은 재산이라고는 없었다.
<육손전>

이런 일이 벌어지자 손화파인 오찬은 시의의 상소문처럼 손패를 내보내 하구를 지키도록 하고, 손패파의 행동대장인 양축을 내보내 경사에 있지 못하도록 건의하는 한편 무창에 있어서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하는 육손에게 계속해서 소식을 전해주었다. 육손은 오찬을 통해 정보를 얻은 후 손권에게 끊임없이 표를 보내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했지만, 손패파가 이에 반응해 양축과 함께 오찬을 힐난했다. 이에 손권은 오찬을 투옥시켰고, 결국 오찬은 옥사했다. 이어서 양축은 20가지의 이유를 들어 육손을 고발했고, 손권은 무창에 있었던 육손을 계속 힐난하는 사신을 보냈다.

결국 육손은 이 문제에서 끝까지 손을 떼지 않고 손권과 대립했다. 손권이 육손의 청을 거절하고 육손의 생질들인 고담, 고승, 요신을 유배한 후 육손과 손을 잡고 손화파에 섰던 오찬을 처형한 뒤에도 육손은 태자인 손화를 바로 자신의 임지인 무창으로 불러 가까이 두면서 서로 계책을 논의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편 손권은 손패파인 양축을 몰래 불러 손패에게 태자를 물러주겠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애당초 《오록》의 기록에 따르면 손권이 양축을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양축을 떠보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24] 그러나 여기서 손권의 근신들과 육윤이 무창에 있던 육손과 손화에게 손권의 의견을 몰래 발설하는 사태가 터진다. 즉 한 나라의 승상과 태자가 군주의 측근을 포섭하고 군주를 몰래 감시하다가 들통난 것이다.
한의 신무현은 조충국을 위험에 빠뜨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조앙이 "선제가 장안세를 죽이고 싶다"고 자신에게 고했다고 고발하였는데 조앙은 금중에서의 발언 누설의 죄로 하옥했지만, 옥중에서 자해했기 때문에 조충국에 훼손은 없었다.
한서 조충국전
경방은 원제에게 속견했을 때의 담화 내용을 현의 장박에 누설하고, 장박은 듣고 작성하여 사위의 순양왕의 편익을 도모하는 도구로 하려고 했다. 이시 현의 고발로 교방과 장박은 금중에서의 발언을 누설한 혐의로 '교활부도'의 죄에 묻히고, 경방과 장박은 공개참수(기사), 처자는 유죄가 되었다.
한서 순양헌왕전
진함은 위현성이 금중에서 주운의 악행을 고발한 것을 주운에게 유출했다. 그 결과, 진함은 금중에서의 발언을 누설한 혐의로 고발되어 사일 등을 줄여 면발 노역형 및 임관권 박탈이 되었다.
한서 주운전.

이상의 예를 보면 알수 있듯이 한나라의 법인 한율에서는 임금이 머무는 곳인 금중에서의 발언을 외부 누설하는 것을 처벌하는 죄가 있었다. 그 처벌은 당사자는 기시형이며 처자까지 연좌가 되는 유죄로 정해져 있었다. 또 진함은 감형되었지만, 이는 조경과 교방은 황제의 발언을, 진함은 재상의 발언을 누설했기 때문에 전자는 처분이 가벼워졌을 것으로, 즉 엄밀하게는 긍중에서 황제의 말을 누설하는 것이 기시에 상당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사건의 핵심은 손권의 '손패를 세우고 태자를 폐하는 발언'을 육윤이 손화에게 손화가 육손에게 누설한 것에 있었다. 오가 한의 법 체계를 계승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황제의 금중에서의 발언을 함부로 누설한 죄에 속하는 것이었다. 즉 교방의 예에 따르면 이 벌언을 유출한 유출된 손화와 손화의 당인들, 즉 육윤과 육손도 기시형[25]으로 처벌받아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조앙의 경우 당사자가 옥중에서 자해한 일로 고발자 신무현의 표적이었던 조충국은 죄를 묻지 않았었다. 죄상이 굳어지기 전에 자해하면 거기서 수사가 중단되어 관계자 및 친족에 대한 연루를 막을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육손의 분사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방증으로서 건강실록에서는 '손권은 화가 났지만, 육손이 중신이기 때문에 즉석에서 법을 가하지 않고 견책의 조서를 내렸고 육손은 분노하여 사망했다'라고 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 육손을 옹호하는 스탠스를 보이는 정사 삼국지와 달리 육손에게 명백한 죄가 있음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손권이 이 사건과 관련된 손화파 일당에게 적용을 주저했던 법이야말로 손화와 육윤이 누설하고 육손이 따진 발언, 황제의 발언을 누설한 죄요, 기시형이었을 것이다. 정말로 육손이 손화파를 위해서 후일을 도모하려고 했다면 손화와 육윤이 누설한 손권의 발언을 속으로 삼키면서 손권과 극단적인 대립을 할 필요는 없었을것이나, 육손은 이 부분에서 손을 넘어 단순히 손패파와 대립하는것 정도가 아니라 황제인 손권이 후계를 본인의 파벌로 결정하지 않으려고 하자 그에게까지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손화파의 영수인 육손이 황제 손권과 이렇게 전면전을 선포함으로써 손화파 영수인 본인과 손화의 운명도 완전히 결정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면 왜 손권이 육손의 처벌을 주저하였는가 하면, 어느 정도는 그 동안의 정도 있었겠으나, 무엇보다 당대 육손의 권세에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육손의 승상 임명조서에서 손권이 언급하듯, 고옹 사후부터 육손은 손오 조정의 안팎을 오로지 다 통솔하고 있는 위치였다. 육손은 형주 전역에 양주 서부를 더한 광범위한 지역 군사행정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와 그의 일족 육윤을 한율의 최고형인 기시형의 죄로 따지면 후대 동진에서 벌어진 왕돈의 난과 같은 내란 발발조차 육손의 각오에 달려 있었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었다. 때문에 최악의 경우엔 손권이 육손 주변에 배치한 주연이나 제갈각 같은 친위세력을 동원해 육손을 공격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를수 있었다. 손권은 승상 임명조서를 내리면서 그에게 조서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그저 모든 조정의 신료들을 훈도하고 겸손한 위치에서 더 이상의 파벌 조장은 자중하는 것을 바랬던 듯 싶으나, 그가 육손에게 바랬던 신뢰의 결과는 처참했다. 이에 손권은 극비수사에 그쳐 일단 같이 누설했다고 손화파로부터 공박을 받아 누설의 죄를 자복한 양축을 처형했으나 자신의 죄로 궁지에 몰리자 끝없이 시시비비를 따지겠다며 대드는 육손에게 마찬가지로 견책의 조서를 내려 맞받아치는 정도로 그를 대놓고 죽이려고 하지 않고, 그에게 일종의 '명예로운 퇴장'을 종용했다고 볼 수 있다. 후대에 손화파의 추대를 받았을 손호조차도 육씨 일족을 싫어하여 그래도 능력은 있었던 육항 사후 결국 오군 육씨의 세력을 나눈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때부터 오군 육씨는 부춘 손씨 황실에게 믿을 수 있는 친위세력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에 반할시, 여차하면 죽음을 각오하고 반기를 들 세력으로 찍혔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어이없게도 육손은 손권에게 대체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았느냐고 추궁받자 자신에게 정보를 알려준 육윤의 존재를 알려서 본인의 책임을 회피해버렸고 결국 이 사건으로 육윤과 양축은 모두 숙청되었으며 처형된 양축의 시신은 개울물에 버려지고, 육윤은 내쫒기는 결말이 나고야 만다. 당연히 양축의 일족도 다 피해를 입었지만, 양패의 형 양목의 경우 과거 육손이 양축을 조심하고 아예 가문을 따로 차리라고 경고했었던 것을 따라 그동안 양축을 여러 번 말려서 선을 그었던 점이 참작되어 남쪽 주로 유배가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이렇게 되어 손권과 육손은 한쪽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 상소를 보내고 한쪽은 궁궐의 사자를 보내 그 행동을 비난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육손은 이를 이기지 못하고 245년에 결국 분노와 통탄으로 죽고 만다. 그리고 이런 육손의 분사에도 불구하고 손권은 상주인 육항에게까지 환관을 보내 양축이 고발한 20가지에 대해 설명하게 하지만, 다행히도 아버지를 닮아 뛰어난 능력을 물려받은 육항이었기에 이에 대해 막힘없이 조리있게 반박했고, 손권도 감탄하며 의심은 점점 풀리게 된다.[26]

결국 육손전만 보면 육손이 손권에게 핍박을 홀로 받아 죽은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은 육손은 육손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일을 행하기 위해 불손함의 선을 넘어서 손권을 감시하며 손권에게 자꾸 뭐라고 하는 상황이고, 손권 역시 항상 신하들과 긴장관계에 있던 상황에서 본인의 측근이었다고 할 수 있는 육손까지 손권의 명령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태자를 멋대로 자기 임지에 불러서 계획을 짜고 자신을 감시하니 화를 참지 못해서 상호간 감정의 골이 깊어졌던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상호간 스트레스가 심화되던 도중 육손이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먼저 쓰러지고 만 것이다. 손권이 육손을 고의적으로 숙청한 것은 아니고, 평생 사이가 괜찮은 신뢰 관계였던 두 사람이 말년에 감정 싸움 끝에 안 좋게 결말이 난 상황인 것이다. 육손은 끝까지 오나라의 승상으로 죽었고 손권이 육손을 질책하긴 했을지언정 그에게 주어진 권한을 회수하거나 벌을 내린 적도 없고, 육항에게 육손과 갈등하면서 있었던 일을 사과하기도 하는 등 손권 역시 본인의 감정적 실책임은 인정한 일이다.

어떻게 보면 삼국의 난세에서 각국 군사와 행정은 각 전선에 대응하게 위해 어느 정도는 분권적일 수 밖에 없는 위치였으며 이를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후대 위진남북조시대 전반을 관통하는 각 중원 정권들의 주요한 난제 중 하나였다. 이 중 남조에 속하는 손오제국사, 나아가 육조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는 '장강 하류로 치우친 수도 건업(건강)에서 부수도 무창을 중심으로 서북쪽에 국경을 안고 있는 장강 중류 유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문제였는데, '신뢰할 수 있는 친인척을 재상에 기용하고 태자를 부수도에 두어 보필하게 하면서 중류에서의 거의 전권을 준다'라고 하는 손권의 이 당시 대응책은 부수도를 맡으며 큰 문제를 억제하는 능력을 보여준 손등이 죽고 나서는 거진 이렇게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나라에서 중앙에서 잇단 정변과 권력투쟁을 수반하는 집안소동이 격발하기는 했으나 조위의 고평릉 사변 같은 수도에서의 쿠데타도, 수춘삼반이나 촉한의 강유 답중 이탈과 같은 지방의 쿠데타도 일으키지 않고 외척 전씨와 제갈각 등의 손량 보필체제 출범으로 정국을 수습하고 부촌 손씨 황실이 여전히 전국을 통제할 힘을 남겨 준 것만으로도 손권은 어떤 의미에선 본인이 해야 할 일은 다했다고도 할 수 있다.

손오는 기본적으로 조정자 손권과 부춘 손씨 황실, 중앙 조정이 개발된 강남지역을 기반으로 한 풍족한 재정을 통해 지연, 혈연, 사돈, 지방세력에게 항상 강력하게 원심력을 구동시켜 균형을 유지했던 체제인데 이 조정자 손권으로서의 힘은 240년대부터 외적 내적 요인으로 감쇠는 하고 있었으나 손권이 마지막까지 정사를 오로지 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레임덕에는 이르지 않았고, 따라서 후계 문제를 이궁지쟁 사건 정도로 억제할 수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상호간의 전면 대립으로 파국에 치달았음에도 그건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었다고 후회하고 육항에게 용서를 구한 손권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선 한때 육손에게 모든 신뢰를 주었던 손권의 육손에 대한 정리가 이 시점에서도 남아 있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할 것이라 하겠다.

이궁간의 갈등에 대한 논의는 손화파의 영수인 육손이 손권과의 갈등 끝에 이렇게 사망하는 것으로 5년간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손권은 이미 손화와 손패에 대해 감정적으로 차갑게 식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당시 아직 숙청되지 않았던 손패의 측근들이 끊임없이 손화를 공격하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 파벌간의 갈등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는 결국 5년후에 손권이 손화, 손패 두 사람 모두를 처벌하게 되는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와중에 245년 7월에는 이런 혼란을 틈타 마무라는 자가 손권과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위에 항복하려는 계획을 세우다 발각되어, 마무와 그의 무리가 모두 처형된다.

한편 이때 제갈각은 손화파이고 그의 아들 제갈작은 손패파였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손패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손권은 제갈각에게 아들 교육 좀 잘 시키라고 하고, 이에 제갈각은 손권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아들에게 독을 먹여서 죽인다. 이 행동으로 제갈각은 손권의 호감을 산다.

5.2. 250년 손화 폐출, 손패 처형

손화와 손패의 이런 1차적인 파벌 싸움이 마무리되고 사건은 일단락 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손권은 양측의 갈등 상황을 계속 좌시하고 있었다. 손화전에 따르면 대놓고 손권이 몇 년 동안 이 일을 유예시켰다고 나오기에 잠시 수면 밑으로 가라 앉았을 뿐 갈등을 손권이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50년 8월, 마침내 손권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금 두 사람의 파벌에 불벼락을 내려 손패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고 양축이 죽은 후에도 남아 있던 전기, 오안, 손기 등 손패의 측근들 모두 처형하고 손화를 유폐시켰다.

이런 상황에 손패는 글렀다고 생각한 손노반은 반부인의 후손인 손량 파로 귀신같이 갈아탄다. 손노반은 이미 대의황후 왕씨와 손화를 모함해왔고 대의황후의 죽음에 크게 일조한 격인지라 이제와서 손화파로 갈 수도 없고, 가만 있다가 손화가 제위에 오른다면 1순위로 제거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손노반은 남편 전종의 조카인 전상의 딸 전혜해를 손량의 아내로 삼게 하고 연일 침이 마르게 손량을 칭찬한다. 이제 7살밖에 안 된 아이를 남편의 일족 여성과 결혼시키면서 외척으로서 개입하려는 속셈이었다.

이는 손노반이 아버지인 손권의 의중을 정확히 읽은 것이었다. 이미 손화와 손패 두 사람은 파벌 싸움의 과정에서 조정의 신료, 대호족들의 입김을 너무 많이 받은 상황이었다. 손권은 이를 걱정해 손준을 불러다가 "자제들이 화목하지 않으면 신하들이 나뉘어서 장차 원씨와 같이 실패함이 있게 되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만약 한 사람을 세워 놓게 된다면 어찌 혼란이 일어나지 않겠소?"라고 말할 정도로 이 두 사람을 둘러싼 신하들의 개입을 혐오했고 이 둘 가운데 이제와서 누구만 앞세우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손권은 잠자코 두 사람의 갈등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더는 참을 수 없어 자신의 딸과 연계된 최측근 전씨세력을 손량의 뒷배로 삼고 그를 후계로 삼고자 한 것이다. 손패와 손화 밑에 붙어서 파벌을 짓던 무리들은 다 토착 호족들이라서 사실상 손권이 죽으면 누가 후계자가 되던 이 둘에게 있어서 이제는 각자 서로의 위신을 세워주던 세력들이 호종공신이 되어 이들이 그들 손에 놀아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즉 손권 입장에선 손화와 손패파 모두를 때려잡았다는점에서 오히려 그동안 발목잡던 이들을 죄다 날려버린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이런 손권의 행위에 배송지는 길게 주석을 달아 손권을 비판한다.
신 배송지가 생각하건대 원소와 유표는 (장남이 아닌) 원상과 유종을 현명하다 말하고 본래부터 후사를 전할 뜻이 있었으니, 이는 손권이 기왕에 손화를 태자로 세워 놓고서도 다시 손패를 총애하여 앉아서 난리를 만들고 스스로 집안의 화를 빚어낸 것과는 다르며, 원소, 유표보다도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남이 더욱 심합니다. 보즐은 덕과 도리를 칭하여 오나라의 대신이 되었음에도 손패에게 아부를 떨고 양공과 같이 일을 도모했으니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손화를 기왕에 태자의 자리에 올려놓고 적자와 서자를 갈라 정했으니, 비록 재능과 덕이 특출나지 않다 해도 오히려 의로운 이는 서자를 편들지 않아야 하는 것인데, 손패가 실제로 저지른 일을 듣지 않고서 손화에게 후사를 잇게 한단 말입니까? (그게 제대로 이뤄지겠습니까?) 무릇 사악하고 편협한 자라도 그 행하는 근본에 어찌 장점이 없겠습니까마는, 만약 하나라도 선하지 않은 행동이 있다면 그 많은 장점은 모두 사라져 버릴 뿐입니다. 보즐에게 만약 이런 일이 있었다면 그 나머지는 족히 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여대, 전종의 무리들도 대개 논할 필요가 없을 뿐입니다.

한편 이 소식에 손화파는 심각하게 당황했다. 그래서 주거와 고제 및 수많은 신하들이 함께 상소를 올리지만 손권은 듣지 않고[27] 무시해버리니 주거는 굴황과 함께 여러 관리들을 이끌고 머리에 진흙을 바르고 스스로를 결박한 다음에 연일 손화를 석방할 것을 요구한다. 이 일을 백작관에 올라가 본 손권은 그들에게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면박을 주고 어린 반부인으로부터 얻은 손량을 태자로 세우려 한다. 이에 진정과 진상이 편지를 올려 진헌공 해제의 고사를 들어 이 일을 말리지만, 손권은 화가 치밀어 진정과 진상은 물론 그들의 일족까지 모두 주살하고 주거와 굴황은 곤장 백 대를 때린다. 굴황은 곤장을 맞아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태자를 바꾸면 안된다고 간언하지만, 이미 정신이 나갈 대로 나가버린 손권은 그를 추방해서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주거 또한 신도궁의 승으로 좌천되며 손권에게 간언하던 장순은 처형되어 시체가 저잣거리에 버려진다.

이처럼 간언을 하다가 주살되거나 좌천된 사람이 수십 명이 넘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이들이 억울하다고 생각했으나, 손권은 끝내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10여년간의 파당 싸움에서 손권은 손화와 손패 모두에게 마음이 떠난 것이었다.

5.3. 250년에서 252년까지

손패를 죽이고 손화를 폐출하고 이에 반대하던 신하들을 쫓아내거나 숙청해 더는 거칠 것이 없었던 손권은, 신하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250년 11월 아직 7살밖에 되지 않은 손량을 황태자로 책봉한다.

그리고 250년 12월에 신인이 편지를 주어 연호를 바꾸고 황태후를 임명하라고 했다는 것을 이유로, 251년 5월에는 어린 부인 반부인을 황후로 세워버린다. 문제는 이 반부인이 아주 잔학한 인물이었다는 것인데, 다른 비빈들을 무고해서 죽였고 궁녀들에게도 아주 가혹해서 죽거나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런 여자가 황후가 되었으니 여론이 좋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손권이 병에 걸려 누워버리니 이때다 싶은 손패파의 손홍은 손권의 거짓조서를 만들어서 좌천되어 임지를 향해가는 주거를 죽여버린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때 손권은 요양차 도성으로 온 육항을 만나 자신은 그저 간신배에게 속아 육손과 육항을 욕하게 되었다며 육항을 비난한 편지를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다 불태워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 편지들이 나중에 정치판에서 약점이 될 수도 있으니 제거하는 것이 좋기는 하다.

251년 11월, 남교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풍질을 만난 손권은 "손화에게 내가 너무 심했던 것 같은데, 다시 태자로 삼자"는 발언을 한다. 갑자기 손화에게 유화적으로 나온 이유는 자세히 알기 어렵지만 일단 손권 입장에서는 자신이 몇년 더 살아 손량에게 힘을 실어 줄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쓰려지게 되니 일단 장성한 아들인 손화를 다시 세우는게 향후 정국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나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28] 손노반, 손준, 손홍은 이를 반대하며 손준이 손화파였던 제갈각을 보정으로 세우는게 어떻겠느냐고 진언했는데 손권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후계구도는 다시 정립되었으며 손화는 남양왕으로 임명돼 장사로 떠나게 되어 태자가 될 마지막 가능성마저 사라진다. 한편, 이렇게 손권이 오늘내일 하고 있을 때 반부인은 손홍 등을 시켜 전한 여후가 섭정하던 전말을 조사케 했다. 쉽게 말해 손권이 죽으면 여후처럼 섭정이 되어 자신이 권력을 휘두르겠다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태후가 섭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특기할만 사항은 되지 못한다.[29]

잔혹한 성품으로 궁내외에서 미움을 산 반부인은 252년 2월, 손권을 간병하다 지쳐 침대에 누워 자는 틈에 들이닥친 후궁과 궁녀들에게 목이 졸려 죽고 말았다. 이들은 반부인이 병에 걸려 급사했다고 꾸미려 했으나 목졸린 흔적 때문에 들통났고 모두 체포되었다. 손권은 황후를 살해한 자들을 용서할 리가 없기에 결국 가담자 예닐곱 명이 주살당한다. 이렇게 마지막까지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마무리 한 손권은 252년 4월에 건강이 악화되자 제갈각, 손준, 등윤, 손홍, 여거를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죽었다.

6. 피해를 받은 인물

6.1. 손화파

  • 손화 - 생존.
  • 육손 - 화병으로 사망.
    • 육윤 - 생존.
  • 제갈각 - 아들을 제물로 생존.
  • 고담 - 유배 후 사망.
  • 고승 - 유배 후 사망.
  • 고제 - 아버지 제사를 지내다가 극심한 슬픔으로 사망.
  • 주거 - 좌천 후 손홍의 문서조작으로 처형.
    • 손노육 - 생존.
  • 등윤 - 생존.
  • 주적 - 생존.
  • 정밀 - 생존.
  • 오찬 - 양축의 참소로 손권이 처형.
  • 장휴 - 유배 후 손홍의 참소로 처형.
  • 굴황 - 유배 후 기록 없음.
  • 진정 - 일족 전멸.
  • 진상 - 일족 전멸.
  • 장순 - 끔살 후 시장바닥에 시체 뒹굶.
  • 대의황후 왕씨 - 상황 걱정하다가 사망.

손화의 뒷배였던 장소의 일족과 고옹의 일족이 대표적인 피해를 입었고 오의 사성에 속했던 상당수 인물들이 피해를 입었다. 이들 중 손침 사후까지 피해 없이 살아남은건 육윤(추정), 주적, 정밀 정도고 나머지는 제갈각을 제외하면 손준-손침 시기에 제거당한다.

6.2. 손패파

  • 손패 - 명령에 의한 자결.
  • 보즐 - 도중에 자연사.
  • 여대 - 생존.
  • 전종 - 도중에 자연사.
    • 손노반 - 생존.
    • 전기 - 손패 사망 후 끔살.
    • 전단 - 생존.
  • 손준 - 생존.
  • 여거 - 생존.
  • 손홍 - 생존.
  • 제갈작 - 아버지의 생존을 위한 제물로 희생.
  • 양축 - 본인만 끔살 후 강가에 시체 투하.
  • 오안, 손기 - 손패 사망 후 끔살.

희한하게 좀 정상처럼 보이는 이들은 대부분 도중에 자연사했다.(…)

제갈작의 경우는 제갈각전에만 실려있어 시행시기가 모호하고 국역 삼국지에는 노왕의 사건과 연루되었다고만 나와 손패파라는 점에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원문을 보면
恪長子綽,騎都尉,以交關魯王事,權遣付恪,令更教誨,恪鴆殺之。

(제갈)각의 장자 (제갈)작은 기도위였으며, 노왕과 교유했기 때문에 (손)권이 (제갈)각에게 보내 가르쳐 꾸짖게 했거늘, (제갈)각이 짐살했다.

라는 부분에서 노왕과 교류했다는 것을 통해 손패파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7. 후일담

손권이 죽은 직후 손패파의 일원인 손홍은 주거를 죽였던 방법처럼 거짓 조서를 만들어 제갈각을 죽일 계획을 세우지만 그 자리에 있던 손준이 이 사실을 제갈각에게 보고했고, 제갈각은 손홍을 불러 자문을 요청한 다음에 대답하지 못하자 바로 그를 죽여버린다.

그 후, 권력을 잡은 제갈각이 잘 나가면서 손화파에게도 빛이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253년 합비신성 공략 실패로 제갈각의 세력이 약해졌을 때 손준의 계획으로 제갈각과 그의 일족은 주살되고[30], 손준이 권력을 잡아손패파인 손준+손노반+전씨일가라는 세력이 세워진다.

이렇게 써놓으니 손패파의 집권을 위해 손준이 제갈각을 제거한 것 같지만, 손준은 애초에 파가 다르긴 해도 제갈각과의 사이가 나쁘진 않았다. 앞서 설명한 대로 손홍을 처리할 때도 둘이 힘을 합쳤었고, 그 전에 손량이 황제가 되었을 때 제갈각이 권력을 잡은 것 부터가 손준이 손권에게 추천해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후 전쟁에서 패한 제갈각이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엇나가버려서 손준이 황제 손량의 동의 하에 제거한 것이다. 즉 이건 제갈각이 손화파여서가 문제가 아니라 대놓고 손패파였던 이들이 손을 잡자고 나섰는데도 폭주한 제갈각이 문제였다고 봐야 한다. 어쨌거나 권력을 잡은 이들은 제갈각이 뒷배로 있던 손화도 죽이고 손노육도 죽이며 육손이 죽은 이후 제갈각이 영수였던 손화파 정리에 들어간다.

256년 9월 14일 손준이 죽고 뜬금없이 손침이 뒤를 잇는데, 이에 손패파였던 여거와 손화파였던 등윤이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둘 다 죽는다. 여대도 같은 해 9월 16일에 자연사하는데, 나이가 무려 만 95세였다. 그리고 손침은 약 2년 뒤에 손휴의 계략에 의해 잡혀 죽고 그의 삼족이 송두리째 목이 날아갔으며, 이미 죽은 손준과 함께 호적에서 파이는 수모까지 당했다.

그리고 257년 제갈탄의 반란 때 전단을 포함한 출진했던 전씨 일가가 모조리 위에 투항해버린다. 그 후 오나라에서 전씨 일가는 풍비박산나고 얼마 안 되어 손노반도 유배당하고 더 이상 기록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드디어 손패파가 깨끗이 정리된다.

나머지 이궁지쟁 생존자 중 육윤은 그 뒤로도 조구좀 이상한 방법으로 잡거나 청렴하다고 칭찬받는 등 이런저런 공도 세워가며 잘 살다가 사망한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굉장히 좋은 결말을 맞은 셈. 주적, 정밀 역시 자기 수명대로 살고 갔다.

어쨌든 이 5년간의 혼란상은 손휴가 즉위하면서 결국 정리되었다. 문제는 손휴가 오래 살았다면 오르겠는데 촉한이 멸망하자 근심 걱정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일찍 죽어버렸다는 것. 이 때 손화 본인은 이미 살해당했으나 그의 서자 1명이 황제에 오르면서 죽은지 약 11년 후에 황제가 되었는데, 문제는 그가 바로 손호였다는 거다. 결과적으로 손호 대에 동오는 멸망한다.[31]

8. 평가

8.1. 육손의 책임

손화와 손패가 다툰 이궁지쟁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나오는 레파토리가 존재한다.
  • 육손은 손권에게 억울하게 죽었다.
  • 손화는 별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손패가 모함해서 손화가 황제가 될 수 없었다.
  • 결국 손권이 노망나서 이 꼴이 난 것이다. 손권이 군주 안되었으면[32] 오나라는 좀 더 발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흔히 이궁지쟁, 남노당쟁의 논리에서 앞선 세 논리는 전부 반박이 가능한 주제다. 우선 사실 당대의 평가로는 손화나 손패 모두 재능이 있었다는 사실은 꽤 언급된다. 다만 손화의 경우 전 태자 손등의 유언으로 태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정통성 혹은 명분으로는 손화가 좀 더 앞서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나 후계자는 군주의 의중에 좌우된 것이기 때문에 가변성은 충분했기 때문에 다룰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손화의 자질이 손등만큼 우수했다는 근거도 없기 때문에 논하기에 별로 남는 것도 없다.

오히려 이궁지쟁의 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것은, 보통은 억울한 피해자로 여겨지는 육손의 행동에 대해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부분이다. 이궁지쟁의 불씨를 남긴 것은 분명 손권이지만 거기에 불을 붙인 것은 명백히 육손이다. 육손도 이미 이 당쟁에서 한 쪽 파당에 들어있었고 후대의 인식과 달리 고결한 사람마냥 양쪽을 다 수습하려다가 독박을 쓴 게 아니다. 그의 충심은 의심할 바가 없었으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정승으로써의 처신은 본인의 위치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처신하지 못한 면이 있다.
육손. 사적으로는 손책의 사위이며 공적으로는 대장군과 승상을 맡은 오나라의 큰 기둥. 오나라에서 그의 공을 굳이 따지면 주유, 노숙, 여몽, 장소 정도가 좀 앞서거나 대등할 뿐, 나머지는 활동기간이나 임팩트로도 육손보다 높이 보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고옹이 죽은 후 육손이 승상이 된 것이고 승상이 된 후에도 건업으로 가지 않고 무창에서 형주를 진수하며 승상직을 맡는다.
사실 육손이 승상이 되기 전부터 손화와 손패 사이에는 문제가 있었다. 손권이 두 사람에게 차이를 두지 않고 공평히 다루었고 태자와 노왕에게 신하들이 부화뇌동하기 시작한다. 첫 단추는 여기서부터 잘못 꿰인 것이라 봐도 된다. 손권이 이를 단속하지 않은 것의 책임은 누가 뭐래도 군주인 손권의 책임이 크다. 하지만 이 당시 손권은 병을 앓고 있었고, 군주가 병을 앓으면 재상이 이를 대리하는 것이 순서다. 이궁이 정해질 당시 승상은 고옹이었다. 고옹도 이미 연로했지만 그래도 20년간 승상을 재직하면서 여일 사건 이외에는 한 번도 책잡힌 적이 없는 노련한 정치가로 그가 있을 때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고옹 생전에 문제를 재기한 것은 오직 노왕부에서 재직하던 시의 뿐이었다.
남양왕(南)과 노왕(魯)의 두 궁궐이 처음 세워졌을 때, 시의는 본래의 직책 위에서 또 노왕의 부상(傅)을 겸임하였다. 시의는 두 궁의 지위가 근사함을 꺼려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신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노왕은 천부적인 미덕을 갖추고 있고 문무의 자질을 겸하고 있으며, 현재의 상황에 근거하여 적절한 것은 마땅히 사방을 지키도록 하여 국가의 방어를 돕도록 해야만 합니다. 노왕에게 아름다운 덕행을 선양하고 권위있는 명성을 널리 빛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국가의 훌륭한 법도이며, 사해 안의 사람들이 우러러 바라는 것입니다. 다만 신의 언사가 조잡하고 거칠어 생각을 전부 표현할 수 없을 뿐입니다. 저는 두 궁은 지위에 있어 높음과 낮음의 차이가 있어 상하의 질서를 바르게 하여 교화의 근본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러한 내용의 표를 서너 번 올렸다. 그는 노왕의 부상으로 있으면서 충성을 다하고 항상 간언을 했다. 그리고 군주를 섬김에 있어 근면하고 사람들과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귀었다.
오서 시의전

사실 시의의 생애를 돌아보면 시의가 노왕파라고는 할 수 없다. 시의의 성격상 그저 이 두 궁의 병립이 후에 화근으로 발생할 것이라는 걱정을 한 것일 뿐이지 딱히 누구를 지지하겠다는 말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반대로 시의를 제외하면 이에 대해서 우려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도 된다. 이 상소가 올라간 때는 아직 승상 고옹이 생존 중이었고 육손은 대장군이었기 때문에 이궁이 병립한 242년 8월부터 고옹이 사망하는 243년 11월까지는 양 쪽 사이에서 별 일이 없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고옹이 죽은 후 상소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조부 고옹이 죽은 지 수개월 만에 태상(太常)에 배수되고, 고옹을 대신하여 상서의 일을 맡아보았다. 이때 노왕(魯王) 손패(孫覇)가 성대한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태자 손화(孫和)와 나란히 하니, 고담이 상소를 올려 말하길

"신은 듣기에 나라가 있고 집안이 있는 자는 필히 적서(嫡庶)의 본원을 밝혀야 하고, 존비(尊卑)의 예를 달리해서, 고하(高下)에 차등이 있게 하며, 계급 넘어 멀리하게 하여, 이같이 하면 골육(骨肉)의 은혜가 생겨나고, 분수에 당치 않은 바램(覬覦)가 끊어진다고 했습니다.

옛날 (전한 한문제 때) 가의(賈誼)가 치안의 계책을 진언하고 제후의 형세를 논했는데, 그 세력이 중하면 비록 친근하게 하더라도 필히 역절(逆節)의 위험이 있고, 세력이 가벼우면 비록 소원하다 하더라도 필히 보전하게 될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옛 회남(淮南)왕은 (전한 문제의) 친 아우였지만, 끝내 봉국에서 누리지 못했으니, 세력이 무거운데서 잃었던 것이며, 오예(吳芮)는 소원한 신하였지만, 장사(長沙)에서 그 지위를 전했으니, 세력이 가벼운데서 얻었던 것입니다.

옛 전한 문제가 신부인(愼夫人)과 황후를 동석하게 했는데, 원왕(袁盎)이 신부인을 자리에서 끌어내리자 황제가 대노한 기색을 띠니, 원앙이 상하의 의례를 분별하고 사람돼지(人彘=한 고조의 총애를 받던 척부인이 고조가 죽은 뒤 여후에 의해 팔다리가 잘리고 돼지우리에서 돼지 취급을 받아가 죽은 일) 의 교훈을 진언하니, 황제가 기뻐하였으며 신부인 또한 깨달았습니다. 지금 신이 진언하는 바는 편벽된 바가 있는 것이 나이면, 진실로 태자를 안정되게 하며 노왕에게도 편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 했다. 이로 말미암아 손패와 고담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오서 고옹전
들어가서 둔기교위(屯騎校尉)ㆍ소부(少府)로 임명되었다가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승진되었다. 그는 두 궁의 변란을 만났을 때, 대항하여 바른 것을 고집하여 말하고, 적자와 서자의 구분을 분명히 하여서 노왕(魯王) 손패(霸)로 하여금 밖으로 나가 하구(夏口)에 주둔하도록 하고, 양축을 파견하여 부득이 도읍에 있게 하려고 했다.
오서 오찬

고담은 손등이 태자이던 시절부터 태자사우의 한 사람. 손등이 죽은 후에는 손등이 추거한 손화를 지지하던 사람이었고 오찬의 경우에는 감택의 뒤를 이어 태자태부가 된 사람이다. 오찬의 전임자인 감택의 경우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 이궁의 대우를 동등하게 하자고 한 것은 이 감택이기 때문이다.
적오 5년(242)에 감택은 태자태부로 제수되었으며, 이전과 마찬가지로 중서령을 겸임했다. 감택은 경전의 문장이 번다하여 전부 응용하는 일이 곤란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사람의 견해를 참작하고 곧 《예기》의 문장과 여러 주석서를 간략하게 만들어 두궁의 왕자(손화와 손패)를 가르쳤으며, 두 사람이 출입하거나 빈객과 회견할 때의 의식을 제정했다.
오서 감택전

앞에서는 두 궁의 대우가 동등했다고 하는데 감택전에는 분명 두 궁의 출입과 빈객과 회견할 때의 의식을 제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결국 그 대우를 동등하게 한 것은 감택이고, 최종적으로 손권이 승인한 격이 되는 것이다. 그랬던 감택도 고옹과 같은 시기(243년 겨울)에 사망하고 오찬이 감택의 뒤를 이어 태자태부가 되었다. 앞뒤를 이어보면 고옹과 감택의 죽음 이후 잡음이 심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의 후임자인 육손과 오찬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한 쪽(태자)을 지지하는 형태를 보이게 되었다.
또 오찬은 여러 차례 육손에게 소식을 알렸다. 육손은 당시 무창(武昌)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계속 표를 올려 간언하였다.
오서 오찬전
양축은 젊었을 때 아주 명성이 있었으나 육손은 그가 결국 실패할 것을 내다보고 양축의 형 양목에게 동생과 별족할 것을 권한 적이 있었다. 양축이 죽게 되자 양목은 여러 번에 걸쳐 양축을 간계한 사실이 인정되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자치통감

이것은 노왕파를 자극하는 일이라고 봐야한다. 하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승상이요, 하나는 태자궁의 사부. 이 두 사람이 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번갈아 상소를 올렸다는 것은 오히려 선빵을 친 것은 노왕파가 아닌 태자파라는 이야기가 된다. 즉, 육손은 어쩌다 휘말려든 것이 아닌 이미 당사자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것도 한쪽 파당의 주요 인물로서. 어째서 명분에서 우위를 점해야 했을 태자파가 먼저 노왕파를 공격한 것일까? 이는 오나라의 내명부와 관련이 깊다. 왕부인의 죽음으로 태자의 미래에 암운이 드리웠기 때문이다.

손권에게 부인은 여럿 있었으나 조조나 유비하곤 다르게 내명부의 1인자라고 할 수 있는 황후는 없었다. 이는 손권의 특이한 가정사로 인한 것인데, 태자 손등조차 생모가 비천하여 서부인이 손등을 키웠다. 하지만 서부인은 질투가 심하여 손권이 싫어했고 손권은 보부인을 총애했다. 이 보부인이야말로 궁중의 인심이나 손권의 총애로 보아 황후가 되기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으나 태자인 손등을 양육한 서부인을 제치고 보부인을 황후로 삼기엔 신하들의 반발이 심했다.
십여 년이 쌓인 뒤 손권은 오왕(吳王)이 되었다가 존호에 나아갔다. 손등을 태자(太子)로 삼으니 여러 신하들은 부인을 후(后)로 삼으라고 청했다. 하지만 손권의 뜻은 보씨(步氏)에게 있었기에 그는 이를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부인은 뒤에 병으로 죽었다.
오서 서부인전
당초, 손등의 생모는 신분이 미천하여, 손등이 어렸을 때부터 서부인(徐夫人)이 어머니로서 양육해준 은혜가 있었다. 후에 서부인은 질투 때문에 폐출되어 오군(吳)에서 살게 되었고, 보부인(步夫人)이 가장 총애를 받았다. 보씨(步氏)가 하사하는 것이 있을 때는, 손등은 감히 사양하지 않고 정중히 받았다. 서부인이 사람을 보내와 의복을 줄 경우에는 반드시 목욕을 한 후에 입었다. 손등은 태자로 세워졌을 때,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근본이 확립되고서 도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태자를 세우려면 마땅히 먼저 왕후(后)를 세워야 합니다.”

손권이 말했다.

"너의 어머니가 어디에 있는가?"

손등이 대답했다.

"오군(吳)에 있습니다."

손권은 묵묵히 있었다.
오서 손등전

이렇게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서부인도 보부인도 모두 죽어 황후가 될만한 여인은 사라진 상태. 일견 안정되어보이지만 무질서한 이 내명부에 커다란 풍파를 일으키는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바로 손권의 장녀 손노반이었다. 이궁지쟁에 있어서 거의 절대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러나 권력의 행방에 몹시 민첩하고 정치적 음모를 꾸밀줄 알았던 이 교활한 여인은 전당의 호족인 전종에게 시집간 상태였다. 손등이 죽지 않았다면 결코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을 그녀가 이런 커다란 소용돌이를 만들어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손화가 태자가 되면서 그 생모 왕부인이 득세하는데, 이 왕부인과 손노반은 사이가 매우 나빴던 것이다. 역사에 나오는 여인들의 불화는 간혹 역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기기도 하는데 오나라에 있어서는 이 두 사람의 불화가 국가를 뒤흔들고 말았으니 손노반이 노왕을 지지하는 것도, 전당 전씨가 노왕을 지지하게 된 것도, 노왕파가 몰락한 후에는 새로운 세력 손량을 지지하는 것도 모두 일관되게 왕부인, 그리고 그녀의 소생 손화를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두 사람이 어째서 사이가 나빴는지는 자세히 기록되어있지 않으나, 결국 손노반의 거듭된 참소로 마음이 불안해진 왕부인은 병으로 죽고 태자 손화와 손노반 이 두 남매의 사이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고 만다.

즉, 왕부인의 죽음은 태자 손화와 그 일파로 하여금 커다란 신변적 위협을 느끼게 하였고 (이궁의 병존을 기획하고 묵인한) 감택과 고옹의 죽음을 기화로 그 위협에 대한 자기방어가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노왕파에게 있어서는 이건 아닌 밤중에 홍두깨와 같았다.
양도가 상주문을 올리다

신이 듣기로는, 옛날에 천하를 소유한 사람은 모두 우선 적자(適)와 서자(庶)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자제들에게 봉토를 나누어 주어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조종(祖宗)을 존중하며 국가의 방위벽이 되었다고 합니다.

두 궁궐이 각기 태자와 노왕(吳)으로 책봉되었을 때 사해 안에서는 마땅한 처사라고 칭찬했으며, 이것은 위대한 오나라가 흥성하여 융성해질 기초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두 궁궐이 동시에 빈객을 거절한다는 말을 듣고,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사람들은 놀랐으며 크고 작은 관원들은 실망했습니다.

저는 사사로이 아랫사람들의 의론 중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수집하였는데, 모두 두 궁궐에 있는 자는 지혜가 통달하고 영재가 무성하며, 신분을 세우고 명호를 확정시킨 이래로 오늘까지 3년이 되었는데, 덕행은 안에서 빛나고 아름다운 명성은 밖에서 빛나 서쪽과 북쪽 두 모퉁이에서도 오래 전부터 그들의 명망을 듣고 복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덕정(德)에 귀순하기를 갈망하는 것에 순응하여, 두 궁궐에서 사방 먼 곳의 빈객들을 초청하도록 명해 다른 나라로 하여금 그들의 명성을 듣게 한 후 그들의 노복이 되기를 원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현재는 이 점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히려 조서를 내려 그들의 방위를 감소시키고 빈객을 거절하도록 하여 사방의 예의와 경의로 하여금 다시는 통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실제로 폐하께서는 고대의 도의를 숭상하여 두 궁궐로 하여금 학문에만 뜻을 전념하여 다시는 미소한 일을 생각하고 관찰하거나 듣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역사 경험을 익혀 광범위한 사물을 숙지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신들이 머리를 길게 하고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두 궁궐이 전장 제도를 준수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신이 앉으나 누우나 편안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설령,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과 같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보충 조사하고 세밀하게 고려하여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사람들로 하여금 유언비어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이 두려운 것은, 의심이 쌓여 비방이 되고, 시간이 오래 흐르면 이 사실이 사방으로 전해질 것이고, 서쪽과 북쪽의 두 모퉁이는 우리 나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이동(異)의 말은 쉽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일단 전해지는 날이면, 여론은 반드시 일어나 두 궁궐은 순리를 따르지 않은 죄가 있으며, 폐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른다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이 점을 다른 나라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면, 또한 국내의 백성들에게도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국내의 백성들이 의심하고, 다른 나라에서 훼방을 일으킨다면, 웅대한 사업을 발전시키고 사직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일찍 우수한 조서를 발표하여 두 궁궐로 하여금 처음과 같이 훌륭한 인물들과 예의로써 왕래하고 임명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천지가 맑고 편안해질 것이며 만국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오서 손패전

앞에서 감택이 이궁의 법도를 정할 때 태자 쪽에서 아무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양도의 상주문 또한 국내에서 이궁을 동등하게 대우한 것에는 별 말이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 오히려 비방에 휘둘려 이궁의 빈객을 막아버린 손권의 조치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또한 국내에 이궁에 관한 유언비어와 비방이 있음을 알림과 동시에 훌륭한 사람을 맞이하게 하여 이궁을 안정시키도록 권하고 있다. 양도의 상주문이 정확히 언제 올라갔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자치통감에서는 245년에 상주문을 올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평소 양도가 손화파인 제갈각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것은 사실이지만 양도 본인도 제갈각과 함께 손등을 섬기던 근신이었고 손등이 손화를 추천한것을 모르진 않았다. 양도가 딱히 어느 파벌에 치우쳤다는 얘기도 없다. 그런 그가 비방을 거론함으로서 고담이나 오찬 등의 상소에 대해 우회적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즉, 양도의 상주문은 남당파, 노왕파가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상황이 보였다는 증언인 것이다.

여기서 또 한 명 중요한 인물이 있다. 전종이다. 전당의 호족으로 손권의 장녀 손노반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전종은 청렴하고 남을 돕길 좋아하여 명성을 얻었고, 결국 전당 전씨의 당주가 될 수 있었다. 손권도 그를 신임하여 딸을 주었고, 장군으로서의 재능도 겸하여 석정에서는 조휴를 격파하는데 공을 세웠고 산월 토벌에도 종군하였으며 손권이 황제를 칭한 후 회남방면의 사령관으로서 육안 등을 공격하는 등 군사적 방면에서 활약한 인재다. 전종은 이궁지쟁이 아니었다면 오나라의 명장으로 좋은 이름만 남았을 것이다. 전종 그 자신은 흠결이 별로 없는 인물이었으나 아들들이 변변찮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맏공주의 사위인 장군 전종(全琮)의 아들 전기(全寄)가 손패의 빈객이 되었는데, 전기는 본래 간사한 경향이 있어 고담에게 용납되지 않았었다. 이에 앞서 고담의 아우 고승(顧承)과 장휴가 함께 북으로 수춘(壽春)을 정벌했는데, 전종이 당시 대도독이 되어 위의 장수 왕릉(王淩)과 작피(芍陂)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군세가 불리하니, 위의 병사가 승세를 타고 오영장(五營將) 진황(秦晃)의 군대를 함몰시키자, 장휴와 고승이 분격하여 싸웠다. 마침내 위나라 군대를 주춤거리게 했다.

당시 전종의 아들은 전서(全緖)와 전단(全端)도 모두 장수가 되었는데, 적이 물러가는 틈을 인하여 이에 진격하였고, 왕릉의 군대는 퇴각하게 되었다. 당시 논공행상을 하는데, 적을 머뭇거리게 한 것을 큰 공이라 하고, 적을 퇴각시킨 것을 작은 공이라 여겨, 장휴와 고승은 모두 잡호(雜號)장군이 되었고, 전서와 전단은 편장군이나 비장군에 그칠 뿐이었다. 전기 부자가 더욱 원한을 품어 함께 고담을 얽어맬 계책을 짰다.
오서 고옹전

오나라의 분위기상 전공을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 전공을 세우기 위해 단독작전을 서슴치 않을 정도니까. 하지만 황실의 인척 집안으로서 그들의 행실은 너무도 쪼잔했다. 이 정도였다면 차라리 다음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정도로 끝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육손과의 불화가 일어났다. 전종을 흑화시킨 것은 이게 오히려 더 직접적이고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이보다 앞서, 태자와 노왕의 두 궁궐이 병립하고,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대부분 자제를 보대 임무를 받도록 했다. 전종이 이 일을 육손에게 보고하자, 육손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제들에게 만일 재능이 있다면 임용되지 못함을 걱정하지 않을 것 이므로, 마땅히 사적인 청탁으로 관리로 임명되어 영리를 구하지 말아야만 된다. 만일 이 일을 훌륭하게 실행하지 못한다면 결국 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 궁궐의 세력이 대적하고 있을 때는, 반드시 이쪽을 지지하는 파와 다른 쪽을 지지하는 파가 대립관계가 있게 된다고 들었는데, 이것은 옛 사람들이 매우 기피했던 것이다."

전종의 아들 전기(全寄)는 과연 노왕에게 아부하고 경솔하게 교제관계를 맺었다. 육손이 전종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김일제(金日磾)를 본받지 않고 아기(阿寄 ; 전기)를 비호 하였으니 당신의 가정에 재앙이 이를 것입니다."

전종은 육손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다시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오서 전종전

전기가 별로 재능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었다, 실제로 노왕을 망하게 한 것은 그와 양축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관리들이 모두 자제들을 궁에 넣는 판에 일부러 자신에게 보고한 전종에게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전종을 신뢰해서 그랬다고 한다면 아들을 나라를 위한다며 죽여버린 김일제의 사례를 들어 집안이 망한다는 식의 악담은 하지 말아야 했고, 전당 전씨가 노왕 쪽으로 붙는 것을 염려한 것이라면 육손도 결코 중립을 지키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하물며 전기는 전종의 적자도 아니었다. 결국 고씨 집안과의 전공다툼과 육손의 이 말로 인하여 전당 전씨가 육손에게 품은 적대심은 갑절이 되어 나중에 동지들에게 큰 해악을 끼치게 되었으니 이는 후술하도록 한다.
짐은 덕행을 닦지 않은 몸으로 천명에 순응하여 제위에 올랐지만, 왕도(王塗)로 천하를 통일하지 못하여 간사한 자들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 짐은 아침 저녁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잠자리를 돌아볼 틈이 없었다. 오직 그대는 천부적인 자질과 총명함이 있어 미덕을 빛냈으며, 상장(上將)으로 임명되어 국가를 보좌하고 재난을 제거했다. 세상을 뒤덮을 정도의 공로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크나큰 총애를 받아야만 되고, 문무(文武)의 재능을 갖고 있는 자는 반드시 국가의 중임을 맡아야 된다. 옛날 이윤(伊尹)은 탕(湯)을 융성하게 했고, 여상(呂尚)은 주(周)왕조를 보좌하였는데, 현재 조정 안팎의 임무는 사실상 그대가 겸하고 있다. 오늘 그대를 승상으로 임명하여 사지절, 수태상(守太常)인 부상(傅常)으로 하여금 인수를 수여하도록 한다. 그대는 미덕을 드날려 아름다운 공업을 세우고 공손히 왕의 명령을 집행하여 천하를 어루만지고 평정시키라. 아! 삼공의 직책을 총괄하여 신하들을 훈도하니 공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노력하기를 바란다! 형주목, 우도호, 무창의 일을 겸임하던 것은 옛날과 같이 하라.
오서 육손전

나머지 미사여구와 상찬은 제껴두고 마지막 부분에 주목하자.
'그대는 미덕을 드날려 아름다운 공업을 세우고 공손히 왕의 명령을 집행하여 천하를 어루만지고 평정시키라. 아! 삼공의 직책을 총괄하여 신하들을 훈도하니 공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君其茂昭明德,脩乃懿績,敬服王命,綏靖四方。於乎!總司三事,以訓羣寮,可不敬與,君其勖之!')

후에 사도가 생기긴 하지만 손권 시대의 오나라에는 태위,사공,사도의 삼공이 존재하지 않았다. 승상이 모두 총괄하는 것이었다. 촉도 삼공이 존재하지 않았고, 위는 삼공이 있는 대신 승상이 없었다. 진시황 때부터 승상은 만인지상의 재상 자리였고, 가끔 폐지되긴 하였으나 승상이 있는 나라에서 승상보다 더 높은 관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승상이라는 직책은 국가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고, 거기에 육손은 승상만이 아니라 형주목에 우도호까지 겸했으니 전진 부견 왕맹에게 옛 전연 땅을 전부 다스리는 중책을 맡긴 것과도 같다. 이랬음에도 손권이 육손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다만 전임 승상인 고옹은 정책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적절한 것은 보고하고, 부적절한 것은 묻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했건만, 육손은 승상이 되기 전과 된 후가 똑같았다. 자신이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쓴 말을 서슴치 않고, 간언을 서슴치 않는 것. 강직하고 유학에 깊이 심취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육손의 충심은 의심할 부분이 없지만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분위기를 해칠 때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본의 아니게 분란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후한 왕윤이 그러했고 후대에는 북위 최호, 조선에서는 송시열이 그러했다. 승상의 직위는 관리들을 총괄하는 역할이지, 한쪽편을 들어서 군주의 고유권한인 후계자에 관해서 왈가왈부 하라고 있는 자리가 아니다. 선임자인 고옹은 이 역할에 충실했으니 적어도 최소한 손권은 그런 역할을 기대하고 육손에게 승상직을 준 것이 아니다.[33] 만약 그런 쓴소리를 하는 사람을 원했다면 애당초 손소가 죽었을 때 고옹이 장소를 제치고 승상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육손은 이런 배려가 부족했다. 아니, 손권이 힌트를 주었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쪽이 더 가깝다. 교서에 그대로 적혀있었지 않은가. 결국 육손은 용의 역린을 건드려 벼락을 떨어뜨리게 된다.

앞서 이야기한 사안들로 인해 이궁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태자 손화는 자신의 위치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육손,오찬,고담 등은 손권에게 잇달아 상소를 올렸고, 특히 육손의 상소는 그 언사가 격렬했다고 한다. 거기에 모자라 아예 무창에서 건업으로 올라가 손권과 대면하여 적서의 의리를 말하고자 했는데, 이는 한비자가 말했던 군주의 역린이라는 것을 건드린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육손이 이런다는 건 당대에 있어서 굉장히 무거운 의미를 지닌다. 육손은 직함은 승상이라지만 외지에서 대군을 통수하고 있는 군사지휘관이기도 한, 군권과 신권의 최고 위치를 다 잡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런 입장에서 정면으로 황제와 부딪친 게 정치적으로 현명할 일이었을지는 불명이다. 고옹과 육손은 둘 다 오나라 최대 호족인 오군 고씨와 오군 육씨의 수장이긴 하지만 육손은 이미 본인이 태생부터 군사권을 가지고 있던 사병과 중앙군을 동시에 장악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이 지지해 줬기 때문에 고담 등이 더 강경하게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손권이 형주 주변에 보즐, 주연, 여대, 제갈각을 배치한것도 육손의 권한이 너무 커졌기 때문인데 이들은 다들 손권의 친위세력에 가깝기에 적절하게 견제의 의미로 배치한 것이다. 이럼에도 손권은 육손이 선을 넘을때까지는 오히려 그를 신뢰했다, 손권의 분노는 다 늙은 자신이 쥐어준 막대한 권력으로 육손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손권의 후계에 본격적으로 간섭함으로써 발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고금을 통틀어 이 정도로 강력한 권신이 후계에 간섭하려는 행동을 좋게 보는 군주는 드물다.[34] 거기다 육손 다음의 승상대리가 되는 군부의 2인자격인 거기장군 주거마저 나중에는 이속들을 데리고 건업에서 시위를 벌였다는 점도 손권에게는 손권 자신이 쥐어준 군권으로 이들이 후계 문제에 간섭하려고 한다는 인식을 주기 충분했을 것이다.

또한 손권은 원래 형 손책의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된 것으로, 손책이 죽을 당시에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너무도 어렸고, 당시 오를 둘러싼 환경은 어린 군주로 헤쳐나갈 수 있을만큼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손권 또한 당시에 19세였고, 생각지도 못한 동생 손익이 경쟁자로 나서려는 상황이었다. 만약 주유가 손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장소가 원래 생각대로 손익을 그대로 밀었다면 지금의 손권은 없었으리라. 결국 손권이 후계자가 된 것은 적서의 문제가 아니라 실력주의였다는 것이다. 만약 적서대로 한다면 어쨌거나 손책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고 손권이 이를 보좌해야 하는게 옳은 순리이기 때문이다. 육손은 본의 아니게 손권의 이런 점을 건드리고 만 것이었다.

게다가 육손의 위치가 좋지 않았다. 그는 손책의 사위였으니 대놓고 후계문제를 두고 적서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자칫하면 손권의 정통성 자체를 공격하는 것으로 비춰질 소지가 다분했다.[35] 거기에 오찬이 노왕을 외방으로 보내고 양축 등과 격리시켜야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손권이 폭발했다. 오찬이 전격적으로 처형되었다. 오랫동안 손권을 섬긴 원로대신이던 그의 최후는 너무도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병든 몸으로 태자파와 노왕파 양쪽에서 시달리던 손권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것이리라.
거기에 고담, 고승, 장휴는 유배형에 처해졌고, 장휴는 결국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고담은 태자파의 거두로서 적극적으로 노왕을 공격했던 사람이고, 고승과 장휴는 작피 전투에서 전종의 아들들과 군공다툼을 했던 사람이다. 거기에 장휴는 태자비의 숙부이기도 했다. 사실 노왕파의 공격은 오찬과 고담에 무게가 실리지 고승과 장휴 등은 휘말린 격이다. 그럼에도 장휴만이 사약을 마시게 된 것은 중서령 손홍과 원한을 샀기 때문이었다. 손홍은 후에 제갈각, 손준과 더불어 손량을 보좌토록 고명을 받은 사람으로, 그의 행적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태자파와 노왕파 어느 쪽인지도 알 수 없다. 후에 주거에게도 사약을 먹이게 되는 이 인물은 아무래도 손노반 쪽 사람이 아닌가 싶다. 장휴는 손노반이 미워하는 왕 부인의 사돈이었고, 주거는 손노반과 대립하던 손소호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손량은 손노반이 노왕을 재기불능이라 생각하여 밀던 사람이었고, 결국 오의 2대 황제가 되었으나 손홍 그 자신은 그 덕을 보지 못했다.
이렇듯 태자파를 크게 덮친 이 벼락은 그들과 가까이 교류하던 육손도 피해갈 수 없었다. 손권은 20개조의 죄목을 힐문하는 사자를 육손에게 보냈고, 육손은 이로 인해 분함이 병이 되어 죽고 말았다. 20개조의 죄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것이 양축의 모함으로 밝혀지고 손권도 육항에게 이에 대해 사과했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여긴 위소가 기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손권이 육손이 죽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육손은 죽었고, 이것이 오나라에게는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이궁지쟁은 오나라에게는 횡액이었고, 이를 제대로 제압하지 못한 손권에게 가장 큰 책임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손권에게만 책임을 물릴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이궁의 병립에 대해서 제대로 간언한 것은 노왕의 스승인 시의였고, 오히려 반발해야 할 태자파는 조용했다. 하지만 손권에게 전적으로 후계를 선택할 권리가 있음을 알고 선을 그으며 중도를 잘 지키던 승상 고옹이 죽고 친 태자파인 육손이 승상에 오르자마자 무리하게 노왕파를 공격한 것은 분란의 원인은 태자파에게 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손권이 손화를 혐오하게 된 것은 물론 손노반의 말을 듣고 손화를 미워한 측면도 있겠지만 본인의 실력주의를 통해 오나라를 여기까지 이끌고 온 손권에게 손화파의 거두인 육손이 대놓고 손권의 약점을 공박한 점도 크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여기서 적서의 관계를 분명히 하라는 식의 육손의 말을 손권이 수용했다면, 손책의 사위인 육손이 손권에게 손책의 다음대를 이은 손권의 적서는 부적절하다고 논박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손권으로써는 손화의 편을 든다고 이렇게 형성되어버린 정치 논리를 결코 긍정할 수 없었고, 자연히 손패에게 힘을 줬던 것이다. 거기에 손권 입장에선 아무리 평소에 사심이 없었다고 한들 태자를 비호하며 격렬하게 손권을 비판하면서 여차피면 황제권을 침해할 수도 있는 인물임이 분명해진 육손이, 만약 병을 앓던 손권이 죽어버리고 손화가 즉위했을때 과연 어떤 위치에 오르게 될 지가 너무 확실해지기도 했다.[36] 결과적으로 태자인 손화에게 지존인 손권이 적대적으로 나가게 된 원인 상당수는 손패의 역성을 든 손노반 외에도 손화파인 육손이 조장한 바도 없지 않은 것이다. 정말로 손화를 보호하려고 했다면 이는 육손의 가장 큰 실수였다. 어차피 손화의 편을 들던 명망높고 실력있는 자들이 많았으니 후일을 기약하도록 태자파를 안정시키고 이전의 흐름을 유지하는 정도로만 나가는 만도 못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태자파의 실책은 개인적인 원한으로 움직이던 손노반을 노왕파라고 여겼던 것이고, 그 과정에서 손화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손권의 집권논리 자체를 건드렸다는 점일 것이며, 노왕파의 실책은 그런 태자파의 실책을 보고 헛된 야망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파의 착각은 결국 공멸이라는 결과로 끝나버리고, 손노반의 뜻대로 되어버렸다. 그러나 손노반 또한 밀통상대였던 손준이 죽고 새파란 손침이 정권을 잡자마자 끈 떨어진 연이 되어버렸으니 모두 그녀 생각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8.2. 손권의 책임

육손이 불씨를 붙였더라도 손권에게도 큰 책임이 2가지 존재한다.

첫번째는 처음부터 손화와 손패의 구분을 하지 않은 것, 나중에 했다고 하지만 애초에 후계자 문제는 언제 바로잡았는지가 아니라 처음부터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핵심이다. 육손이 책임이든 손패파의 책임이든 손권이 처음부터 명확하게 해놓았다면 군주가 처음부터 명확히 그어놨는데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손노반 정도가 있겠지만 군주의 뜻이 확실하다면 일개 공주 정도가 어찌할 수가 없다.

당초에 이것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손권이 태자 외 번왕을 두려 하지 않은 것 자체도 문제일 수 있다. 이 문제는 주나라의 천자가 제후를 임명하는 전통에서 시작되는 문제이므로 천자인데 제후를 임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로 거론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 동생들을 그토록 경계한 조비도 적어도 동생들을 친왕으로 삼긴 했다. 심지어 이후 결국 타협책이랍시고 손패만 왕으로 삼은 것 또한 손패가 아무래도 손권의 남은 아들들 중에 가장 연장자라 그럴듯하긴 하지만 결국에는 일종의 편애처럼 보일 여지가 있는 것도 맞는 말이다.

결국 손권이 처음부터 손화와 손패 두 사람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은 것이 육손의 책임을 떠나 발단을 제공하였다. 육손은 단지 거기에 불을 붙였을 뿐. 후계자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라서 삼국시대만 해도 북방 4개주를 차지하고 있던 원소의 세력이 원소 사후 갑작스레 몰락해버린 것도 후계자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지 못해서 원소의 자식들끼리 서로 싸우다 조조에게 격파당한 것임을 감안하면 육손이 이궁지쟁을 열었다 할 지라도 그 발단을 제공한건 손권이다.

두번째는 이궁지쟁의 마무리 관련이다. 여기서 책임이 있는 양대 핵심인물인 손화와 손패 두 사람을 처벌한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그 후계자가 하필 손량이다. 손량은 손권의 아들들 중 제일 막내인 것도 모자라 즉위 당시 9살에 불과한 어린아이다. 손량도 총명한 면모가 있긴 했지만 즉위 당시의 나이가 어려 제갈각, 손준, 손침 같은 이들이 실권을 잡았지 본인은 별 일을 못했다.

문제는 손량 시기의 실권자들은 하나씩 문제가 있었다는 것으로 제갈각은 합비신성 공략 실패 후 엇나갔고 제갈각을 주살한 후 떠오른 손준은 근친상간을 했다는 의혹을 받을 정도로 문제있는 사람이었으며 그 손준의 뒤를 이은 손침도 문제있는 행위를 저질렀다. 이 모든건 손량이 성인으로서 직접 정사를 돌볼 수 있었다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으나 그러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다.

그럼 정말로 손화, 손패를 배제하고 손량밖에 대안이 없었냐면 그건 아니다. 손패 아래로 손권은 손분, 손휴, 손량이라는 세 아들이 더 있었기 때문. 그리고 이들은 손권 사망 당시를 기준으로 각각 손분 17세에서 28세 사이[37] 손휴는 17세 손량은 9세다. 즉 손권 사망 당시 손분은 성인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손휴는 성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17세라면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어린 나이는 아니라서 둘 다 손량보다는 안전한 선택지다. 그나마 손분은 생떼를 부리거나 놀고먹기만 하는 등 부정적인 기록을 빼더라도 손휴가 있다. 손휴의 경우 손량이 손침을 몰아내려다 폐위된 후 손침에 의해 꼭두각시 황제로 세워진 인물인데 겨우 두 달 만에 역으로 손침을 날려버린걸 보면 손휴의 자질도 제법 있을법하다. 즉 손화, 손침 싫고 손분이 영 아니다 싶으면 손휴가 대안이지 손량이 대안인게 아니다.

뒤에 나오는 '후계 선정과 숙청에 관하여'에서 후계자를 선택할 권리는 군주에게 있고 성리학적 질서는 아직 없었다며 옹호하고 있는데 그래도 손량은 너무했다. 다른 아들이 없어서 손량을 지정했다면 어쩔 수 없는 문제지만 아들이 손패 아래에서 손량 사이까지 둘이나 있고 손분을 빼도 하나가 있는데 이게 어떻게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차라리 손휴가 손분처럼 함량미달이라면 또 몰라도 그것도 아니다.[38] 그리고 장자승계의 원칙은 성리학만의 원칙이 아니다. 주나라때 종법제가 탄생한 이래 군주의 자리는 왕-왕자-왕손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이 구축되었고 이 원칙에 따르면 왕이 있고 왕이 태자와 태손을 세웠는데 태자가 먼저 죽으면 태자 다음 아들이 아니라 태손이 잇는다. 즉 태자와 그 자식들 사이에는 명백한 급이 있고 그렇기에 태자 외의 자식들은 승계에서 배제된다.

물론 이 원칙이 꼭 잘 지켜진건 아니다. 한나라 시대에만 해도 실컷 어겨지는게 이 원칙이었으니. 그러나 적어도 사대부 같은 유교에 충실한 집단에서는 장자승계를 중요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궁지쟁에서 손화파에 속한 인물들이 여기에 드는 편이며 위나라의 경우에도 후계를 누가 이어야 하는지 조비와 조식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을 때 조비가 장남이라는 이유로 지지한 모개, 환계 등도 이 라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보면 후계를 정하는데 있어 장자를 따지는게 중요함을 알 수 있다. 하다못해 손권의 세 번에 걸친 후계자 지정에서도 손등과 손화는 선정 당시 장남[39]이지 않던가.[40]

그리고 근본적으로 왕위 계승의 법칙은 한번 정해지면 군주의 권위로 쉬이 깨뜨릴 수 없다. 한번 원칙이 정해져서 몇대를 내려오면 전통이 되고 나중에는 그 원칙 자체가 정통성이 된다. 달리 말하자면 원칙을 한번 깨뜨리면 그만큼 정통성이 깨져 권위가 위협받게 된다. 비록 손오는 아직 개국 초기단계이지만 한나라 시절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고 유학적 분위기 역시도 남아있는 상황에서 장자를 세우는 것이 차라리 안전한 선택지다. 피차 손화나 손패나 둘 중 누가 특출나다 할 정도가 아니라면 장자계승이 낫다. 도토리 키재기 수준의 차이로 정해지면 정해지지 못한 쪽은 불복할테니.

즉 손권이 손화와 손패가 파벌을 이루어 다툰 이궁지쟁에 진절머리를 느끼고 핵심인물인 손화와 손패에게 책임을 물어 이들을 모두 배제해버린 것 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41] 그러나 그 다음 후계자가 손량이라는 것은 명분상으로도 실리적인 이유에서도 도저히 납득가지 않는 선택이다.

결국 손권의 잘못은 이궁지쟁의 발단의 제공과 잘못된 뒷수습이다. 아무리 이궁지쟁에서 손화, 손패를 배제해 더이상의 논란을 끝내고 문제를 일으킨 자들도 다 청소했다고 한들 9살짜리에게 후사를 맡기니 조정은 한동안 신하들 위주로 굴러갈 수 밖에 없는데 통일왕조인 한, 당, 송, 명, 청 같은 시대라면 모를까 삼국시대 같은 전란의, 혼란의 시대에 어린아이에게 후사를 맡기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위나라의 경우 조예가 조방이라는 듣보잡 어린애를 아들로 삼아 후사를 잇게 하자[42] 위나라 정치는 불안정해졌고 이를 기회로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켜 실권자인 조상[43]을 축출하고 자기가 정권을 차지했고 그 이후 위나라는 사마씨 가문에 무너지고 만다. 심지어 이궁지쟁과 고평릉 사변은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사건으로 손권은 이웃 국가 위나라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했다. 그나마 오나라에는 손씨가문을 엎어버릴 사마씨 가문 같은 세력가도 없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손준과 손침도 어쨌든 손씨가문이며 결국 손준-손침의 시대를 끝장낸 것도 황제인 손휴인 문제가 되지 않았지 손씨가 아닌 다른 가문이 힘을 얻었다면, 그리고 황제가 이들을 쫓아낼 수 없었다면 오나라가 위나라 꼴이 나지 않았을거란 법은 없다.

8.3. 손권의 아들들과 관련

손권의 아들들 중 손등, 손려[44], 손화는 준수한 군주가 될만한 자질이 있었다. 심지어 어린 막내 손량마저도 똑똑함을 칭송하는 미담들이 사서 곳곳에 기록될 정도이니 너무 어렸을 뿐 정상적으로 즉위했다면 충분히 좋은 군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손량 이후 즉위한 손권의 육남 손휴도 요절해서 그렇지 괜찮은 자질을 보였기에 손권은 우수한 아들들을 많이 남겼다. 조위 촉한의 창업군주인 조조 유비의 경우, 조조는 조비나 조식이나 개인적 행실에 문제가 있었고 유비는 아들들의 제대로 된 자질을 확인할 틈도 없이 죽었다는 점에서, 손권은 자식들의 재능 면에선 정말 축복받은 케이스였다. 그러나 오나라는 유독 요절한 인물들이 많았고, 하필이면 손권의 장남과 차남도 그러했다. 그러니 저렇게 많이 죽어나갔음에도 손휴 같이 막장이 된 오나라를 조금이라도 수습해보려 한 군주가 나온 것이다.

조조의 후계자인 조비는 지능이나 학식, 문학적 재능 등 문(文)의 능력은 뛰어났으나 무(武)의 능력은 어중간했다. 그래도 종합적인 리더로서의 능력은 그럭저럭 나쁜 수준은 아니었으나, 인격에 결함이 있어서 군주로서는 좋은 인물이었다 할 수 없었다.[45] 또 다른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던 조식은 문의 능력은 너무나도 뛰어났으나 무의 능력은 검증된 바가 없었고[46] 성격이 방종하고 방탕했으며, 조창은 조식과 완전히 반대로 성격이 듬직한 맛이 있어 조조가 좋아했고 무의 능력은 상당했으나 문에 대해 관심이 거의 없다시피해서 군주로 부적합했다. 장자인 조앙은 197년의 장수 토벌전 때 조조의 어리석은 짓으로 완성에서 전사했고, 어리지만 총명해서 조조의 총애를 받던 조충은 13살에 죽었다. 그보다 더 아래로 조간이 있었지만 조간은 조조가 60세에 얻은 아들로 조조 사망 당시 고작 5살이었다.

유비의 후계자인 유선은 성품이 어질고 무난했으나 난세의 군주로 살아남기에는 능력이 부족했고, 유봉은 양자라는 약점이 있었던데다 조창처럼 오히려 군재로서 싹수를 보였다. 다만 그마저도 번성 공방전 당시 상용을 지키면서도 관우의 구원 요청을 무시하는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며 애매한 재능으로 역사에 남아버렸지만. 유영과 유리는 207년 출생인 유선과 나이 차가 상당했다고 하니, 유비가 사망한 223년에는 어린아이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유비는 오랜 세월 동안 유랑하느라 자식들을 많이 잃었으며, 유선 이외에 적당한 후사도 없었기에 이쪽은 선택지조차 많지 않았다.

결국 손권의 불행은 가장 뛰어났던 장남과 그 뒤를 이를만한 차남이 죽고도 아들들이 모두 비교적 자질이 뛰어난 편에 어느 하나 앞선 저 둘을 넘지는 못했다는 비극에서 비롯되었다. 손권은 손화-손패 구도를 세우고 손등-손려가 화목하게 지내며 후계구도를 안정시킨 사례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불행히도 손화와 손패는 손등과 손려가 될 순 없었고 서로 갈등하며 파국을 맞이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이상적이었던 장남과 차남을 보면서 삼남과 사남도 비슷하게 생각했기에 문제가 커지기 전까지 그 이상의 조치를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후계구도에 신하들까지 가세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 하겠다. 손권의 이런 어찌보면 안이한 생각이 화를 불렀다는 점은 확실히 비판의 대상이 될 만하다.[47]

이 때문에 호되게 당한 손권이 손량을 세우면서 능력있는 신하들이자 자신의 최측근 세력들이며 외부 세력들이나 친족 세력인 제갈각, 손준, 등윤, 여거를 보정으로 세워 이런 후계과정의 혼란상과 호족들의 개입을 막아보려 한 것이 손량으로의 후계자 교체의 진상이다. 하지만 손권이 내세운 저들이 죄다 자멸하거나, 요절하거나, 뜬금없이 나타난 난신에게 각각 숙청당하거나(등윤, 여거) 하는 일로 이 인선은 실패로 돌아갔다. 물론 손권이라고 이런 결과를 원하진 않았을테고 너무 결과가 안 좋긴 했지만 이것도 그의 실책이라면 실책이라 할 수 있겠다.

손량 역시도 손권 때문에 인생 망쳤다. 물론 손권이라고 세워둔 제갈각이 그렇게까지 실패하고 망가질 줄은 예상 못했겠지만 제갈각의 몰락, 손준의 요절 이후 손량은 손침의 전횡으로 재위기간 내내 허수아비 황제였고 결국 손침에게 폐위당한다. 이후에 손침이 제거되지만 본인은 이후 자살인지 짐살인지 모를 이유로 고작 18세에 사망한다. 손량이 황제가 될 때 당시에 10살도 안 되는 어린아이였음을 감안하면 손권의 실책으로 손량은 앉을만한 자리가 아닌데도 앉아서 딱히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다가 성인도 안 되는 나이에 죽은 것이다. 중국 역사적으로 이렇게 어린 늦둥이를 황제로 즉위시켜서 좋은 꼴을 본 사례가 거의 없는데,[48][49] 손권은 후사 결정에서 안 좋은 선례를 남긴 것이다.
배송지의 경우 "그래도 모든 책임이 손권의 잘못은 아니다"라고 했다.[50] 사실 먼저 죽은 황태자 손등이 후계자로 손화를 지목했다고 하나 이후에 후계자를 다시 손패로 바꾸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대우를 동등하게 했다는 얘기도 어떻게 보면 손권이 무슨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분란을 일으킬 목적도 아니었는데 지나치게 신하들이 과하게 후계구도와 파벌 싸움에 간섭하면서 명분삼아서 상호간의 공격전에 쓴 감도 있는 편이다. 오나라의 신하들 역시 손권이 뒤늦게나마 두 궁을 따로 나가게 하여 차이를 두겠다고 제스쳐를 취할때 파벌 싸움을 멈출 필요가 있었는데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게 손권이 호족 때려잡으려고 일부러 그랬다고 하기엔 감택, 고옹이 두 궁의 법식을 제창한 초기에는 적서 구분에 대한 이의가 없었고 감택, 고옹이 죽은 이후 두 왕자들의 시종들끼라 싸움이 조정에까지 옮겨붙여 파당싸움이 난점이나, 손권이 당파를 지었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먼저 조진게 아니라 일단 두 왕자들을 신하들에게 떼어낼 생각을 했다는 것만해도 어느 정도는 손권이 처음에는 수습하려는 입장에 있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문제는 두 왕자들이나 그 밑에 붙은 신하들이나 여기서 물러서면 우리 모두 죽는다는 식으로 위기감을 가지고 사태를 에스컬레이팅 시켰고[51] 손권도 손화의 종묘사건 이후로 손화에게 정에 떨어졌는데다가 무엇보다 손화에게 달라붙는 호족들이 너무 거물급이라 문제가 갈수록 해결이 안 되었던 것이다. 승상 육손이 이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육손 본인도 서로 좋게좋게 해결하자고 두 파벌을 화해시키기 보단 무턱대고 전종을 인신공격할 정도로 한쪽의 의견에 너무 쏠려 있었는데다가 여일 사건때 강경하게 나가지 못하고 반준에게 책임을 떠넘겼던 점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그 반동으로 이번엔 지나치게 강직하게 나서며 손권과 감정싸움을 한것도 일의 이성적인 해결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궁지쟁, 혹은 남로당쟁은 누구 하나가 잘못 안했다는게 아니라 오나라 내부의 사소한 알력다툼이 어디까지 어그러질 수 있나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결국 손권은 극단적으로 남당과 노왕을 다 폐해버리는것으로 답해 버렸고 말이다.[52]

8.4. 후계 선정과 숙청에 관하여

손권은 이궁지쟁 과정에서 기존의 대세력인 호족파가 후계에 관여하려 들자 이들을 모두 박살내 버렸다. 많이들 간과하는 지점인데 장자계승이 되면야 좋겠지만, 원래 종법상으로도 장남 이하 아들들은 상하관계가 장남과 다른 아들들에 비해서 절대적이지 않다. 그러니 손권 후계분쟁에서처럼 3남과 4남의 관계로 보면 이런 서열관계가 장남만큼 절대적이진 않은것이다. 즉 장남이자 태자였던 손등이 죽고 3남인 손화가 높은 건 아니고 유리하다는 것인데, 왜냐면 장남이 아니면 그 밑으론 종법에서 정해놓은 서열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효종도 차남이라서 왕이 된 게 아니라 인조가 '장자가 아니면 차서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으니 대군들 중에 누가 나을지 추천해봐' 했는데 봉림대군이 낫다고 해서 된 거고, 선조도 임해군이 자연스럽게 아웃되고는 내심 차남 광해군이 아니라 신성군을 밀었다. 조선 태종이 장남인 양녕대군을 폐할 수 밖에 없게 되자 남은 아들들 중 그나마 나은 3남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것이나 당태종 이세민이 문제를 일으킨 장남 이승건을 폐하고 3남인 이치를 택한것도 이런 연유이다. 현대 한국인들은 전근대의 계승순서를 잘 모르고 형제관계를 단순히 나이순으로만 서열을 잡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것인데 전근대 왕실에선 장남이 아니라면 택현 적용해서 순서 무시하고 픽할 수도 있었다.[53]

후한의 명군 광무제가 총애하는 여인 음려화의 아들 한명제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싶어서 멀쩡한 황태자를 폐한 사례를 보았을 때, 후계자를 선택할 권한은 군주에게 있는 것이며 아직 성리학적인 장자우선의 원칙이 확립되지 않은 이 시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괜히 조조가 조비와 조식, 심지어 이들보다 한참 어린 조충까지 고려해서 후계자를 택현한 것이 아니다. 난세에는 무조건 장자계승이 최선이 아니라 세력을 유지할 명민한 군주감이 필요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손등 같이 장자로써의 명분과 실력이 모두 뒷받침되면야 좋겠지만 손등의 요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일이 항상 그렇게 좋게만 진행되리라는 법은 없다.

삼국시대와 관련된 인물 가운데서도 장자가 문제가 있음에도 유교적 장자우선의 원칙을 고수하다가 후대에 나라를 말아먹은 서진 진무제의 사례가 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이궁지쟁에서 손권이 크게 비판받는 점은 장성한 손화, 손패 다 내치고 세운게 10살도 안된 손량을 택했다는 것에 있다. 손량이 똑똑한건 사실이지만 오랜 세월을 살면서 노련한 정치력을 가진 대신들을 상대하는 건 든든한 후견인이나 역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정치적 안목을 타고난 게 아닌 이상 절대 불가능했으며 안타깝게도 손량에겐 그런 강점들이 없었다.

실제로 삼국지 팬들 가운데서는 조비의 인성 문제의 예를 들어가며, 조조의 후계자 선정을 비판하고 조식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유독 손권의 문제에 관해서만은 손권이 조조처럼 고민해가면서 난세에 후계를 본인이 택현할 수 있다는 논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결과적으로 손패가 문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이궁지쟁 과정에서 뒤늦게 손패가 손권에게 보여준 사항이지, 원래는 손패 역시 그 자질로 손권에게 총애를 받을만한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태자와 노왕에 대한 신하들의 상소에서도 손패의 자질을 칭찬하는 글도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손화나 손패 모두 파당싸움을 하면서 아버지인 손권을 분명히 실망시킨 것 역시 사실인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선, 손권에게는 정말 이상적인 후계자였던 손등과 그를 충실히 보좌했던 손려라는 이상적인 후계구도가 있었고 누구를 데려와도 이게 성에 차지 않았을거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하물며 아버지가 나중에서라도, 둘을 따로 살게하여 대우를 어느정도 분명히 했음에도 한쪽은 조정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신하와 편을 먹어 아버지를 염탐하고, 다른 하나는 자기편을 들지 않는 신하들을 모함하는 짓을 했으니 손권 입장에서 얼마나 이들에게 실망했을지 보이는 대목인 것이다. 적어도 조조의 아들인 조비 조식은 후계자 선정과정에서 이 정도로 조정에 분란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실망시킨 적은 없다.[54]

물론 손화보다는 손패가 더 잘못을 하긴했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다. 아무리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한들 정석대로라면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며 거듭 자신이 제위에 관심도 없다는걸 보여야 했다. 선대의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고 형인 손려가 이미 보여준 케이스이다. 물론 사람이 다 그럴수는 없고 오히려 그런 총애에 기대어 '나도 한 번...'하는 심상으로 권력욕이 동하기 쉽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손패는 아버지의 총애와 친어머니의 죽음으로 불안감에 휩싸여 입지를 굳히려고 한 형쪽에서 빌미를 제공했을 때 지나치게 공격한 감이 없잖아 있다. 본인이 죽게 된 것도 본인 주변인물들 탓도 있지만 손패 역시도 손화를 해치려는데 가담했고 손권도 손패에 대한 정나미도 떨어진걸 보면 역시 본인 행실에도 문제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궁지쟁에서 크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기실 따지고 보면 손권에게 지나치게 후계에 대해서 간섭과 비판을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다고 보긴 어렵다. 태자파와 노왕파의 당쟁때 피해를 입은 자들을 보면 태자파는 주로 본인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노왕파는 노왕 중심 측근들이 주로 피해를 봤다. 즉 손권에게 찍히지 않으려면 이 싸움을 손권이 극혐하는 후계자 간섭 및 조정내 파당 싸움이 아니라 태자vs노왕 근신들과 문객들의 싸움으로 둬야 한다는걸 노왕파가 잘 알았고 그래서 잘 살아남은 것이다. 대놓고 손권에게 대들었던 육손과 달리 전종이 비교적 처신을 조용히 했고 손화파를 공격할때도 후계 문제가 아니라 논공행상 과정에서의 문제를 두고 공격한 것을 생각해보자. 태자파 가운데서도 그렇게 처신한 사람들은 알아서 잘 살아남았다. 처음에 좀 나대다가 손권이 대놓고 눈치주니까 깨갱거리며 손패에게 붙었던 아들 제갈작을 죽이고 물러난 제갈각이나 아예 태자파에 조용히 묻어간 등윤 같은 사람들은 알아서 나중에 보정대신 자리에 올랐단 걸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애초에 문서 서두에도 쓰여 있지만 이궁지쟁 시점에서 손권은 이미 고령이었고 후계를 생각해야 할 상황이었기에 이 시기에 본인의 권력욕 때문에 신하를 대거 갈아버렸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시기에 신하를 대규모 숙청하는 것은 권신이 될 우려가 있는 인물들을 제거하고 후계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인데, 왜 후계자까지 갈아버렸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8.5. 손화파와 손패파의 갈등이 불씨를 남겼는가?

결과적으로 손화파와 손패파의 갈등이 큰 불씨가 된 것도 아니다. 손권이 죽었을때 오나라의 정치구도를 보면 손량의 보정대신 가운데 제갈각, 등윤은 손화파이고 손준과 여거는 손패파, 손홍은 손패에 가까운 자이다. 여기에 전씨 일족과 손노반이 외척세력으로 존재하는 셈인데 손준과 손노반은 기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척관계로 엮여서 사실상 이 시점에선 한배를 탄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손준은 제갈각을 보정으로 세우고 같은 손패파인 손홍의 음모로부터 제갈각을 보호한 사람이며, 제갈각의 동흥제 전투까지만 해도 오히려 제갈각에게 협조적인 사람이었다. 기실 손준이 제갈각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제거한 것은 오나라 최악의 대패인 합비신성 전투의 참패 이후 폭주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 시기 제갈각은 손준과 손침을 격하한 손휴조차도 대체 제갈각을 내가 왜 신원시켜 줘야 하느냐 소리를 할 정도로 개막장이었다. 즉 손준의 전체적인 행보를 보면 무슨 손패파가 손화파를 누르고 폭정을 저질렀네 어쩌네라는 망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손량의 재위 기간 당시를 보면 진짜 손량에게 문제가 된 때는 손준이 죽고 갑자기 손권이 기획하지 않은 손침이라는 이레귤러가 등장한 때이다. 손침의 집권과정부터가 급병에 걸려 환각을 볼 정도로 정신이 혼미했던 손준이 표를 올려서 집정을 멋대로 계승하게 했다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는지라 이런 황당한 보정의 계승을 주장한 손침을 제거하기 위해 손패파였던 손노반이나 여거, 손화파였던 등윤, 심지어 손준의 다른 측근, 황제 손량까지 모두 손침을 제거하려고 했다. 손침은 집권의 정당성이 없으면서도 멋대로 이들을 모두 죽이거나 폐해버렸고 이 때문에 손권이 내세운 정치구도가 모조리 어긋남으로써 손량이 무너진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8.6. 숙청 결과와 이후 황제들

이렇게 숙청당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호족이므로 손권이 황권 강화와 중앙집권을 꾀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장작 손량을 지지해줄 모후도 즉위 전에 이미 사망한 상태였기에 문제가 꼬여 버렸다. 이 때문에 손량 본인이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다가 손권이 내세운 보정대신들도 어처구니 없는 이유들로 다들 폐사해 버리면서 오나라 정계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다만 이궁지쟁은 분견대에서부터 300여명이 넘는 인재를 잃어버린 유비의 이릉대전 마냥 인재를 완전히 고갈시킨 건 아니었다. 국내 특정 팬덤은 자신들이 추종하는 군주 유비의 말년 암군 행각을 무마시키기 위해 손권의 이궁지쟁을 과도하게 부각시켰으나 손권의 이궁지쟁은 몇몇 신하들의 일족이 몰살되는 일은 있었으되 근본적으로 핵심인원들이 피해를 입은 건 사서에도 나오듯이 수십여명에 불과한 편이고, 모든 신하들을 죽인것도 아니라 일부는 유배, 일부는 처형이라는 형태로 숙청이 이루어졌다. 중국 본토의 바이두 백과에선 제갈근과 고옹 같은 1세대가 죽은 뒤 2세대 신진세력들이 왕자들에게 붙어서 한자리 차지하려고 당파를 조장했다가 손권에게 벼락 맞았다는 식으로 묘사하며 이궁지쟁 숙청 자체도 육손이 죽은 245년 경으로 한정하고 이후에는 조정이 정상복귀되었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식으로 후계자 다툼 과정에 일어난 정치적 갈등과 분란으로 보지, 한때 오나라 비판자들의 손권을 조롱하기 위해 과장한 바처럼 피의 대숙청이라는 식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

또한 오나라 전반적으로 봤을땐 혼란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다. 이궁지쟁은 오나라 내부에서 상위층 몇명만 날아간 사건이지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진 사건이 결코 아니다. 당시 외정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특히 246년에는 주연이 조중을 공격해 큰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동흥 전투 역시 이궁지쟁으로 나라가 어수선해지고 손권이 죽은 직후 벌어졌는데 오나라가 대승을 거뒀다. 당시 오나라는 강릉-형남의 물자와 강남의 물자를 연계시키고 한참 양쯔강 인근과 남방의 개발에 힘을 써 국력을 늘렸으며 이런 오나라의 개발은 한창 이궁지쟁이 진행되던 손권 치세 후기나 그의 사후에도 마찬가지였음이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같은 후대 학자들의 연구에서 밝혀졌다. 또한 손량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손휴는 손침이 꼭두각시로 만들 요량으로 즉위시켰으나 즉위 2개월만에 손침을 잡고 혼란을 잠재웠다.

또한 이 사건 이후에 오나라 정계에 보신주의자들이 판을 쳤다는 지점에서 복양흥, 장포 등이 손호를 황제에 올렸다는 점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오나라 정계는 사실상의 시조였던 손책대부터 손씨 가문과 호족세력들이 끊임없이 긴장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손휴가 내세운 이들은 강동 외부 출신으로 근본적으로 손씨 가문과 손휴의 측근 세력으로써 기능한 이들이었기에 손휴의 명을 받들어 보신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고, 손휴가 죽은 다음에도 일단 통치가 되는 성인이자 손씨 가문인 손호를 올려 자신들 권력의 배경인 손씨를 섬기는 역할을 맡은 것일 뿐이다. 그나마도 토착 호족들은 끊임없이 손씨 가문에 간언을 하며 황권을 견제하는데 충실했으며 육씨 가문인 육개, 육항이나 화핵 같은 이들도 목숨을 걸고 손호에게 간언했다는 점에서 오나라 조정의 기풍이 그런쪽으로만 흘렀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오히려 복양흥, 장포 같은 이들이나 시적 같은 이들도 손호를 폐할 생각을 했다는 점을 감안했을때 이는 손씨 가문이 언제든 신하들의 반기를 제압하기 위해서 오히려 지속적으로 그들과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좌로 봐야 할 것이다.

역량은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손침의 부상으로 통치에 실패한 손량 다음의 황제인 손휴, 그리고 손휴 다음에 제위를 이은 손호는 모두 즉위 당시 나이가 20대로 직접 정치를 할 수 있는 나이였고 또 그리하였다. 심지어 손휴는 즉위 당해에 손침을 제거하기도 했으니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했고 손호도 폭군이라 문제지 똑똑했다는 평도 있고 실제로도 요절하지 않은 채 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16년간 제위한걸 보면 자리도 못 지킬 정도로 멍청한건 아니다. 그나마 손호 시기에는 간신들이 많기는 했어도 이들도 결국 손호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었고 이들 중에는 손호에게 죽은 이들도 많았다. 이후 황제들이 초대 황제인 손권만한 역량이 없어서 그렇지 무조건 무능한 자들만 있는 건 아니었고 따라서 이궁지쟁으로 무조건 오나라가 망조에 들었다는 시각도 과한 면이 있다. 오멸망전도 근본적으로는 손호대까지 남아있던 육항을 비롯한 수뇌부의 유능한 인재들이 손호 치세 후기인 270년대 중후반에 소실된 사이 세대교체에 실패해 오나라가 서진의 물량에 밀린 것이지. 열세인 상황에서도 교주를 두고 서진과 마지막까지 힘겨루기를 할만큼 오나라의 역량은 후기에도 그렇게 간단하게 금방 소진되지는 않았다.

9. 비슷한 사례

  • 조선의 중종 말~명종 초 상황: 세자(인종)+대윤 VS 경원대군(명종)+소윤[55]
    양측이 정당한 후계자와 지지자 VS 정통성이 딸리는 경쟁자와 지지자 구도이며 지지세력도 전자가 명분아래 모였다면 후자는 그 집단 자체의 이득을 위해서라는 점이 닮았다. 왕실 여인이 개입한 것도 같으며[56] 재위 후반기에 결정권자가 후자에 더 힘을 실어준 것도 비슷하다.[57] 그 와중에 심하게 충돌하고 피도 흘렸고 조금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첫 승 자체는 전자가 했지만[58] 최종적으로 후자가 승리한 후 나라꼴이 엉망이 된 것도 닮았다.

    다만 이궁지쟁과는 달리 정작 양대 당사자끼리의 사이는 좋았고[59] 첫 선공은 전자에서 날렸으며[60] 후자 세력은 지지하는 후보를 교체하지 않았다.[61]

10. 기타

국내외를 막론하고 유명한 삼국지 관련 2차 창작물 중 이궁지쟁을 제대로 다룬 창작물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일단 1세대 인물[62]이 극에서 완전히 퇴장하는 제갈량 사후의 극후반이라 연의에서 생략된 것이 큰 이유고, 영웅호걸이나 대군끼리 맞붙는 전투가 아닌 내부 권력 싸움이다보니 극적인 장면이 적다는 이유도 있다.

대표적으로 진삼국무쌍 시리즈의 경우, 스토리 플롯이 6편부터 촉의 멸망까지 확장되었음에도 사마의와 사마씨 가문에 초점을 맞춘 후반부 스토리 때문에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63][64] 그나마 사마의가 주인공인 화봉요원은 다룰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이궁지쟁 시기가 사마의 말년에 일어난 일인데다 사마씨 가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건도 아니라서 비중있게 다뤄질지도 미지수이고 애초에 이 만화 연재속도가 너무 처참하여 언제 사마의 말기까지 갈지도 미지수이다.(...) 게다가 작가 인터뷰 언급 중 애당초 스토리 플롯을 오장원까지만 잡고 있다고 언급하며 사마의의 말년을 안 다룰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까지 확인사살을 했다. 삼국지톡은 정사에 어느정도 신경쓰고 있는 만화인지라 삼국시대 후반까지 연재한다면 다룰 가능성이 있다.[65] 최강무장전 삼국연의에선 유비 사후, 등지에 의해 손유동맹이 다시 체결되자, 비중이 공기로 되어 버리는 오나라지만, 작중 최후반부 전권을 장악한 사마사와 사마소의 대화에서 은근슬쩍 언급된다. 다만 대놓고 언급한게 아니고 정정하던 손권이 갑자기 노망이 들었다는 식이라 입문용으로 보는 이들은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기겠지만, 삼국지를 잘 아는 사람은 이게 무슨 사건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당연히 나온적이 없으며 11에서 육손이 이궁지쟁을 연상케하는 유언[66]을 남기는 정도로 비중이 없다시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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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오는 비스트 감택. 마지막과 그 바로 전 컷의 한량은 전기다.
최훈: 손권..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손권: "형제들끼리 분파를 만들고! 서로 싸우고! 헐뜯고!! 이게 뭐야?!! 더러워! 나랑 손책 형은 우애가 있었다구!"
최훈: "다.. 당신 땜에 그렇게 된 거잖아."
전투외편 4-4, 최훈의 감상평

국내 삼국지 팬덤에서는 그나마 삼국전투기에서 다룬 이후 많이 알려진 편이다. 후기로 갈수록 떡밥을 던지더니[67], 전투외편 에피소드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손권이 정신줄을 놓아버린 모습과 함께 손권이 가족과 나라를 어떻게 망치는지를 잘 묘사했다. 손권의 인물과 업적을 고평가하던 최훈 작가도 이 때는 대놓고 "손권 이 쥐새끼야!"라고 질책한 것을 시작으로 손권의 삽질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인다. 해당 작품의 연재 당시 지각 연재를 포함한 여러 문제로 비판받던 삼국전투기였지만, 이궁지쟁 등 제갈량 사후의 이야기를 이 정도로 자세하게 다룬 한국 작품은 손에 꼽힐 정도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다.
TV프로그램 천일야사에서도 이궁지쟁이 다뤄지는데, 부제가 참 적절하다. " 오나라의 비선실세는?".

2024년 5월 삼국지톡이 완결했으나 이궁지쟁편은 딱 프롤로그 느낌만 내두고 끝내버렸다. 게다가 손노반을 고평가하던 시선을[68] 그대로 들고 스킵시켜서 평가가 바닥을 치고 있다. 애초에 스토리 작가 무적핑크가 삼국지 2차 창작물을 많이 소비하는 일본에서도 적벽 이후의 역사는 없는 역사라고 궤변을 놓는 인간이니...진삼국무쌍이나 창천항로도 적벽 이후를 다룬다만?


[1] 250년은 손권의 명령에 따라 손패의 자살과 손화의 폐태자가 결정된 해이다. 그러나 단순히 손권이 사건을 마무리한 250년의 대규모 숙청뿐만 아니라, 후계갈등이 시작된 241년 손등의 사망부터 손량을 태자로 세우는 250년까지 10여년의 기간을 전부 이궁지쟁 기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2] 전근대 동양 왕정에서 두루 용례가 있다. 조선시대에도 출가한 대군이나 대원군의 사가(私家)를 개축하여 대궁, 도정궁, 운현궁 삼았고, 현재 일본에서도 천황의 방계는 이런 어칭호를 쓰고 있다. [3] '남노(南魯)'는 태자 손화의 거처인 '남궁(南宮)'과 손패의 왕작'노왕(魯王)'에서 따온 것이다. 손화와 손패가 '지지 세력'을 만들고 권력 다툼을 했다는 뜻. 어느 쪽이든 손화와 손패 두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동일하다. [4] 조선 선조가 기축옥사를 통해 신하들끼리 싸움을 붙이고 숙청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인 것처럼, 국가에는 손해가 가더라도 왕과 왕실에는 이득이 되는 정치적 사건은 여러 사례가 존재하고 있다. [5] 기축옥사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높인 조선의 선조는 이후로 거의 30년을 더 살았기에, 그때 얻은 자신의 권위를 충분히 사용하고 갔다. [6] 3남 장휴에 대한 기록 [7] 예를 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들 히데타다의 정실부인 스겐인이 차남인 쿠니마츠를 편애해서(다만 스겐인의 편애는 근거가 없다는 말도 있다.) 히데타다에게 후계자 교체를 졸랐고 이로 인해 후계자로서 권위가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일부러 이 둘을 불러 이에미츠만 자신의 옆에 앉히고 또 과자를 이에미츠에게만 주고 이를 다시 쿠니마츠에게 주도록 해서 누가 후계자인지 분명히 했다는 말이 있다. [8] 근데 전종은 애매하다. 애초에 본인이 총사령관을 맡은 241년의 작파 전투에서 대차게 패하고도, 이를 조금이나마 수습한 장휴 등과 공적 문제로 대립하다가 고옹의 자손들과 장휴를 모함해 유배보내거나 죽이기에 이른다. [9] 손권의 사위이기도 하다. [10] 고담은 오의 사성이랑 손오사우 둘 다 속해있다. [11] 제갈각은 동오사우에도 포함된다. [12] 오경의 손자. [13] 이런저런 정황 때문에 손권의 사촌형 손보의 손자로 추측되는 인물.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14] 이보다는 손패파의 우두머리가 손권이었기에 이에 영합하고자 했다고 보아야 한다. [15] 그냥 뛰어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호부견자 수준이다. 보협은 위나라의 하후무랑 맞먹을 오나라 최악의 졸장이고, 보천은 훗날 손호 치세 때 자기의 조카들, 즉 보즐의 손자들을 진나라에 팔고 투항한 매국노다. [16] 더군다나 송서 예지와 자치통감에 따르면, 손화가 제사를 지낸 사당은 장사환왕을 모시는 사당이였다고 하는데, 즉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손권의 형 손책의 사당에서의 제사를 게을리 했다는 것이다. [17] 곽거병의 흉노 토벌 때 잡혀온 흉노 번왕의 왕자로( 선견지명 참조), 자신의 아들이 황제의 자식들과 지나치게 친하게 지내자 아예 자기 아들을 죽여서 우환이 될 소지를 막은 것으로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김일제를 언급하는 것은 자식 교육 똑바로 시키라는 소리를 완곡하게 말하는 것이다. [18] 둘 사이 서신의 자세한 내용은 육손 참고. [19] 그리고 후에 주적은 강릉 전투에서 제갈각의 동생 제갈융과의 사건으로 인해 제갈각과의 사이는 더 악화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히 손패파로 노선을 변경한 것 같지는 않다. [20] 육손은 손책의 사위였으며, 전종은 손권의 사위였다. [21] 전서 문서에서도 설명하는데, 요약하면 위나라 왕릉의 추격을 장휴와 고승이 막아내자 그 분위기를 타고 전서와 전단이 공격해 오히려 퇴각시키고 승리했다. 이에 적을 물리친 건 전서와 전단의 공이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을 만든 장휴와 고승의 공이 더 크다고 하여 더 높은 직위에 오른 것이다. 이게 타당한 건지 아니면 권위있는 호족 집안인 장휴와 고승에게 편파적인 거였는지는 각자 판단할 일이다. [22] 거짓으로 남을 헐뜯는 말. [23] 지금의 베트남. [24] 제갈각에게도 손패파에 속한 제갈작에 대해서 경고를 한 바가 있는 손권인 만큼 손패를 총애한다고 한들 손패파의 행각을 무조건 신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25]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그 시신(屍身)을 길거리에 버리는 것. [26] 여일 사건 때 여일의 정치 공세에 육손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점이나 이 사건 당시 양축의 고발에 대해 육손 본인은 통한하여 분사했을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걸 아들 육항이 막힘없이 처리했다는 점을 들어 정략적인 능력에서는 육항이 아버지 육손보다 낫다는 평가도 꽤나 된다. [27] 상소 내용은 주거 참고. [28] 사실 손권은 이 때에 몇년 더 사는건 커녕 이 때까지 살이있는 것도 기적 수준이긴 했다. 당시 나이가 68세인데 이 시대에는 60대에 진입하는 것도 힘들었고 특히 손오의 기반인 강남지역은 미개발지도 많고 풍토병도 있고 대부분의 한족출신인 여기에 익숙하지 않아 요절하기 쉬웠다. 본인의 친족들 역시도 본인만큼 살고 죽지는 못했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자기가 몇년 더 살 것을 노린 손권이 좀 무모했다고 봐야 한다. 이미 자신은 충분히 살만큼 살았고 손화든 손패든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마냥 도저히 후계자로 세워선 안 될 만큼의 흠결을 보인건 아니기 때문. [29] 다만 하필이면 여태후가 보여준 만행과 반부인의 성품이 그렇다 보니 해석이 중의적으로 나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30]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때 제갈각의 심복이 장약으로 나오는데, 사실은 장소의 차남 장승의 아들 장진이었다. 그 또한 죽었다. [31] 손호의 다른 동생 손준(孫俊)은 장승의 외손자로 곧 손화의 적자였는데, 총명하여 말재주도 뛰어나 멀리서까지 칭찬이 자자했으나 손호는 그도 죽였다. 이 때문에 황제위에 올랐을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 손호 대신에 손준이 황제위에 올랐으면 어땠겠느냐는 의견이 있다. 물론 손호도 즉위 전에는 평가가 좋았기에 황제에 오른것이긴 하다. [32] 온건하게 표현하는 경우 말년에 추태를 부리지 않았거나, 너무 오래 살지않았다면 [33] 온건하게 공신들을 숙청한다고 칭송이 자자한 조선 태종의 예만 봐도 명백하다. 그는 자신의 후계에 간섭하려 든 여흥 민씨 처가나 감히 세자를 바꾸는데 극력 반대한 황희, 세자 주위에서 후일을 도모하려던 구종수 형제와 결탁한 이숙번은 가차없이 처리했다. 또한 송시열의 예에서도 알 수 있지만 군주의 후계에 함부로 간섭하는 권신이 숙청된 예도 수두룩하다. 조선사에서도 후계 문제로 왕에게 함부로 의견을 제시하다 끝이 좋지 않은 권신들은 비단 송시열만은 아니었다. [34] 비교대상인 제갈량조차도 유비에 의해 유선의 탁고대신으로 지명되어 그 정도 권위와 권력을 쥔 것이지 유비 생전에는 육손같은 위치가 아니었다. [35] 따라서 이때까지 주유가 살아있었다면 육손을 도와 손권이 이궁지쟁을 일으키는걸 막으려했을거라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오히려 본인이 깍뜻이 군주로써의 손권에게 먼저 예를 취하고 손책의 후계자로써 손권의 입지를 지지한 인물이 주유인 만큼 주유가 살아있었다면 대놓고 자신이 선택한 논리에 대해 정면으로 들고 일어나는 육손을 좋게 봤을리가 만무하며, 오히려 손권의 편에서 육손을 공박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36] 만약 이대로 손권이 죽어버리고 손화가 황제위에 오르기라도 한다면 육손은 '원래부터 강력했던 토착호족으로써의 명망 + 군권과 신권의 최고봉 + 선황제를 공박하면서 꺾고 현황제의 입지를 다진 신하 + 황실의 인척' 이 모두를 한 몸에 가진 정신나간 위치에 서게 된다. 제갈각과 손준, 손침의 무리 정도로도 후대 황제들이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 정도 입지를 지니게 된 육손과 오군 육씨를 과연 후대 황제들이 감당이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에 답을 할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37] 손분은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없다. [38] 물론 손휴가 이 때는 손량처럼 눈에 띄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 수는 있다. [39] 손등-애초에 장남으로 태어남, 손화-삼남이지만 둘째 형과 첫째 형이 차례로 죽어 사실상 장남 [40] 물론 이런 면을 보면 손등의 아들을 태손으로 세우는게 더 정석이긴 한데 아들들이 너무 어렸던 모양. 게다가 당시 손권의 나이가 50대 후반이라 어린 후계자를 세우기에는 좀 그랬다. [41] 사실 굳이 말하자면 안 바꾸는게 더 상책일 것이다. 이러면 손화파의 승리가 되지만 그래도 즉위했다면 20대인 손화가 9살에 불과한 손량보다야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심지어 태자라는 지위도 있었으니 누가 감히 손화를 폐위하려 시도하기도 뭣하다. 이미 손패라는 실패사례가 있기 때문. [42] 심지어 출신 성분 자체가 불분명한 어린애였다. 한마디로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43] 능력이 아버지 조진보다 못한 무능한 인물이었으며, 고평릉 사변 당시 사마의가 낙양만 장악했으니 허창으로 이동해서 항전하면 충분히 승산있는 환범의 제안을 물리치고 사마의한테 항복한 역대급 최악의 인물이었다. 그로인해 본인을 포함하여 가족들까지 처형장으로 끌려가서 참수당하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44] 손권의 차남이나 손등보다 먼저 죽었다. [45] 다만 나라를 완전히 망칠 수준의 암군은 아니었어서 특출나게 뛰어난 업적도 없지만 아버지가 물려준 기반을 그럭저럭 유지할 수준은 되었다. 인격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대량 학살하거나 주색에 빠져 정사를 안 보는 수준의 막장은 아니었다. 다만 그놈의 인격적 결함 때문에 결국 자기 아내에게 자결을 강요해 죽여 자신의 아들이 타락하여 위나라 멸망에 일조하게 된다. [46] 다만 조조가 그를 사령관으로 세워 한창 기세등등하던 양번 공략 당시의 관우를 막으려 한 것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의 재능은 있었던 모양이다. 조식은 조비의 모략으로 이 때 술에 취해 명을 받들지 못하고, 결국 후계자 구도에서 탈락한다. [47] 어떤 말로 변명을 해도 태자와 일개 황자의 지위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은 것은 그의 실책이다. 나중에야 바로잡았다 했지만 그보다 더 좋은건 진작에 구분을 하는 것이었다. [48] 사실 중국사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어린 늦둥이를 지도자로 세우는 것 자체가 군주의 판단미스이거나 권력을 노리는 간신 혹은 권신의 의도이므로 세계적으로 좋은 사례가 나오기 힘들다. 그나마 북주 무제같이 충분한 역량과 때가 올 때까지 그것을 감출 수 있을 정도의 참을성이 있다면 가능하긴 하지만 이런 사례는 손에 꼽을만큼 드물다. [49] 8세에 즉위한 강희제 정도가 예외인데 이 쪽도 셋째 아들이지만 장자와 차자가 모두 후궁 소생이라서 정실 소생에서는 적장자이기에 원칙적으로는 황위 계승 1순위다. [50] 배송지가 섬긴 유송의 태조 유의륭은 형 유의부가 황음무도하여 신하들에게 참살된 다음 즉위했고, 유의부의 아들 유의진도 황음하다는 평가를 받아 함께 살해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시대적 상황의 영향으로 배송지가 다른 사가들과는 달리 정통성보다는 유능함을 강조하는 평가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 있다. [51] 노왕에게 붙은 중소호족들이 자기들 이권용으로 한게 맞긴 하지만 태자파들도 이런 점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52] 문제는 그 뒷처리였다. 사실 손화, 손패의 몰락 후 태자로 정해진게 손량이라 그렇지 사실 손량 위에는 손휴가 있었고 손권 사망 당시 17세로 성인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손량보다야 8살이나 많아 손화도 싫고 손패도 싫다면 그나마 안전한 선택지였는데 하필 손량이었다. 당시로서 손휴는 친정이 충분히 가능할 나이였지만 손량은 보좌가 필요했고 그것이 문제였다. [53] 장남, 차남이 장성하기 전에 죽었다면 삼남이 사실상 장남 취급 받긴 하지만 손화는 그런 케이스가 아니다. [54] 조식과 그 일파가 야심이 있어서 끊임없이 어필하고 조비 또한 이에 불안함을 느끼긴 했으나 조비는 결코 다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가후가 말한대로 그냥 처신만 좀 신경썼을 뿐인데 그 결과 조비는 황제가 될 수 있었다. [55] 태자 손화와 태자파 VS 노왕 손패와 손패파 구도와 같다. [56] 오나라쪽은 공주인 손노반 [57] 정순붕이 대소윤의 갈등을 아뢰자 중종은 윤임(세자의 외숙부이자 대윤 수장), 윤원형(경원대군의 외숙부이자 소윤 수장) 모두 처벌하면서도 윤임은 김안로와 짝짜꿍한 놈이라며 더 큰 벌을 줬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신하들이 반발하자 처벌수위를 낮춰주었다. [58] 이쪽은 손패 처형, 조선 쪽은 인종 즉위 [59] 왕세자였던 인종이 천성이 워낙 어질기도 했지만 경원대군이 그냥 어린애이기도 해서(둘의 나이차이가 18세다. 당시 기준으로는 거의 부자지간 수준.) 서로 충돌할 여지도 없었다. 사실 또 그래서 서로 경쟁관계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60] 이미 대윤에 가까운 김안로가 문정왕후 폐위 음모를 꾸민 바 있다. [61] 이는 문정왕후의 존재 때문으로 손패의 어머니는 정작 손패파에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경원대군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는 엄연히 소윤편이었다. 소윤의 수장인 윤원형 또한 경원대군의 외숙부였으니 소윤에겐 경원대군 외의 대안은 없던 셈 [62] 2세기 중반생. 황건적의 난 당시 사회인이었던 이들. [63] 일단 이궁지쟁 자체가 특별한 전투 씬이 아니기 때문에, 스테이지로 내기도 어렵고, 손권의 캐릭터성(진중하고, 신중한 이미지)을 완전히 반전시켜야 하는 위험성이 존재하고, 심지어 나름 인기 캐릭터 축에 속하는 육손은 여기서 죽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오나라 무장 중 후반기에 남게 되는 무장은 정봉, 연사 정도인데, 실제 정사상으로는 보연사는 이궁지쟁 한참 전에 고인인 상황이고, 정봉은 이궁지쟁에 관여한 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아예 가상의 시나리오로 써 내려가야 하는 문제점까지 발생하는 등의 이래저래 장애 요소가 많이 존재한다. [64] 다만, 스핀오프 작인 진삼국무쌍 BLAST에서 몇몇 캐릭터를 본가로 끌어오는 명분을 만들어 내기에는 적합하기는 하다. 이궁지쟁을 일으킨 주범인 손노반과 대척점에 있는 손노육을 끌어올 수 있고, 손화파에서는 제갈각도 끌어 올 수 있다. 손패파의 핵심 멤버는 딱히 구현된 장수가 없으나, 승상 보즐의 차남 보천을 억지로라도 끌고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현 시점에서 진삼국무쌍 BLAST에서 본가로 편입된 캐릭터들의 인기나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하고, 특히 손노반의 경우는 자칫하면 악녀를 미화시키게 되는 위험성도 존재한다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65] 육손과 손씨 가문의 불화를 암시하는 장면이 있고 손노반, 손노육도 등장했기에 가능성이 높다. [66] "지지 않는 전쟁을 해 왔으나 그것도 옛날 이야기가 됐다. 어디서 잘못을 했는지……." [67] 손등의 죽음 이후 후계구도, 낙곡 전투1 편에서 이궁지쟁 직전 세상을 떠난 고옹이 감택에게 "뭔가 험한 꼴 당하기 전에 탈출하는 기분 안 들어요?"하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표정을 짓는다. [68] 트윗에 손노반이 후계자가 되었으면 삼국통일을 했을거라는 궤변을 트위터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