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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소(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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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邵
손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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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숙후(肅侯) |
작위 | 양선후(陽羨侯) |
최종직위 | 승상(丞相) 겸 위원장군(威遠將軍) |
성씨 | 손(孫) |
휘 | 소(邵) |
자 | 장서(長緖) |
생몰년도 | 163년 ~ 225년 5월 |
고향 | 청주(青州) 북해국(北海國) |
승상 재임기간 | 222년 ~ 225년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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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오나라의 문신이며 자는 장서(長緖)로 청주 북해국 사람이다.2. 생애
손오의 초대 승상을 지냈으며 《 삼국지》<오주전>에는 승상으로 죽었다는 기록 밖에 없다. 그의 기록은 주석으로 인용된 《오록》과 《지림》, 그리고 훗날 허숭이 편찬한 《 건강실록》에 분산되어 있다.손소는 신장이 8척으로 처음에는 북해상 공융에게 출사하여 공조가 되었고 그에게서 '조정의 인재'라고 극찬받았다. 나중에 동향 사람 유요가 양주 자사로 부임하자 함께 강동으로 갔다.
이후 손책에게 임관하여 손권이 집정하자 여러 차례 진언을 올렸다. 여강태수를 지냈고 거기장군 장사로 옮겼으며 황무 원년( 222년), 손권이 오왕(吳王)에 임명되자 승상, 위원 장군이 되었고 양선후에 봉해졌다. 사실 승상 자리에 관한 중신들의 중의는 오랫동안 손씨를 섬긴 장소에게 있었지만 당시 손권은 장소와 사이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손소를 승상에 삼았다. 장온과 글염이 상주하자 스스로 위계를 사임하고 죄를 청했으나, 손권이 복직시켰다. 황무 4년( 225년) 5월에 죽으니 시호를 숙후라 했고 후임으로 6월에 고옹이 승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