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13:58:05

양전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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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楊佺期
(? ~ 399)

동진 말기 군벌. 사례 홍농군(弘農郡) 화음현(華陰縣) 출신. 후한의 태위 양진의 후손. 서진 시기 태상을 지낸 양준(楊準)의 증손자. 그의 가문은 양진에서 양준에 이르기까지 7대에 걸쳐서 위세를 떨쳤던 명문가 중에 명문가였다.[1]

2. 생애

양전기는 침착하면서도 용맹한 성품을 타고났으나 사나운 면 또한 있었는데, 형 양광(楊廣)과 동생 양사평(楊思平) 모두 그와 닮아 거칠고 난폭했다. 또, 양전기는 그의 조상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 입신양명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으며, 항상 동진 내에서 자신과 견줄만한 인물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정도로 자신감이 넘쳐나는 인물이었다. 어떤 이가 자신을 낭야 왕씨의 자제인 왕순(王珣)과 비교하자 원한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가문들보다 조금 늦게 강동에 자리잡았다는 이유로 동진의 귀족들 사이에서 배척당하니, 양전기는 그럴수록 더욱 이를 악물고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려 들었다.

태원 9년(384년) 2월, 일찍이 군대를 이끌고 성고(成固)에 주둔해있던 양전기는 사안의 북벌에 호응하여 전진의 장수 반맹(潘猛)이 지키는 강회루(康回壘)를 공격했다. 반맹은 양전기에게 격파당해 도주하고 그 무리가 모두 항복하니,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해 광위장군, 하남태수로 승진시키고 낙양(洛陽)을 수비하게 했다.

태원 16년(391년) 6월, 서연의 군주 모용영이 낙양의 하남군(河南郡)을 점령하려고 시도했으나 양전기에게 격파당하고 달아났다.

태원 16년(391년) 10월, 전진의 좌승상 두충(竇衝)이 동진의 평양태수 장원희(張元熙)가 지키는 황천오(皇天塢)를 공격하자, 양전기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두충을 격파했다. 그리고 도망치는 두충을 쫓아 호성(湖城)에서부터 동관(潼關)까지 진격하면서 적과 여러 번 싸워 전부 승리하고 적병 1,000여 명을 베었으며, 백성 900여 호를 거두어 낙양으로 돌아갔다. 이 공으로 양전기는 용양장군으로 승진하였다.

태원 18년(393년) 9월, 항복했던 저족 수령 양불숭(楊佛嵩)이 동진을 배반하고 후진에 투항했다. 이에 양전기는 장수 조목(趙睦)을 보내 동관에서 양불숭을 궁지에 몰아세웠으나, 후진의 장수 요숭(姚崇)이 양불승을 구원해주면서 동진군은 패배하고 조목은 전사했다. 이후 양전기는 병에 걸리는 바람에 더이상 변경 수비직에 임할 수 없어 신야태수, 건위사마로 옮겨졌다가, 다시 당읍태수로 옮겨져 석두(石頭)의 군사를 감독했다. 그럼에도 차도가 보이지 않아 결국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내려왔다.

융안 원년(397년) 4월, 형주자사 은중감의 부름을 받고 그의 사마가 되었다. 당시 은중감은 왕공과 함께 반란을 꿈꾸고 있었기에, 여기에 반대하던 남군상 강적을 내쫓고 자신과 뜻이 맞는 양전기로 대체했다. 이후 왕공이 반란을 일으키자, 양전기는 은중감의 명을 받고 파릉(巴陵)에 주둔했다.

융안 2년(398년) 7월, 왕공, 유해, 은중감이 연합해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군대를 다뤄본 경험이 전무했던 은중감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양전기와 그의 형제를 선봉에 세워 5,000명의 군사를 배속시키고, 환현으로 하여금 그 뒤를 보조하게 했다. 양전기와 환현이 관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며 계속 진군해 석두에 도착했을 무렵, 북부군을 지휘하던 반란군의 맹주 왕공이 부하 장수인 유뢰지에게 살해당하고 북부군 전체가 반란에서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뢰지가 북부군을 거느리고 건강 서남쪽에 위치한 신정(新亭)에 진영을 늘어뜨리자, 환현과 양전기는 놀라 채주(蔡洲)로 군대를 물리고 관군과 대치 상태를 이어갔다.

동진 조정은 반란군의 맹주인 왕공이 사망했음에도 은중감이 이끄는 서부군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안팎으로 매우 근심하였다. 이때 환현의 사촌형 환수가 사마도자에게 환현과 양전기를 관직으로 유혹하고, 은중감을 좌천시켜 서로 다투게 만들자는 계책을 내놓았다. 사마도자는 이를 받아들이고 조서를 내려, 양전기를 도독양옹진3주제군사(都督梁雍秦三州諸軍事), 옹주자사로 삼아 치회를 대신케 했다. 환현은 왕유를 대신해 강주자사에 임명되었고, 이 계책을 제안한 환수도 형주자사에 임명되어 은중감을 대신했다. 홀로 좌천당한 은중감은 환현과 양전기가 배신하고 자신을 칠 것이 두려워 다시 형주로 돌아가면서, 선봉군 진영으로 사람을 보내 그들의 가족을 모두 죽일 것이라 협박했다. 이에 양전기와 환현은 황급히 그 뒤를 쫓아 심양(尋陽)에서 은중감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심양에서 제단을 쌓아 셋이 더불어 맹약을 맺고는 조서를 받들지 않기로 합의하고 반란을 재개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사마도자는 하는 수 없이 형주자사를 다시 은중감에게 돌려주었고, 그제서야 은중감 등은 만족하여 반란을 해산하고 각자의 부임지로 돌아갔다.

당초 조서가 내려졌을 때, 환현은 자신이 옹주자사를 맡고, 치회를 광주자사로 보내고 싶어했다. 치회 또한 환현이 옹주자사를 탐낼 것이 두려워 부하들에게 장차 어찌할지 물으니, 부하들이 모두 입을 모아 대답했다.
"양전기가 온다면 함께 힘을 합쳐 막지 않을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상대가 환현이라면 적수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후 치회의 예상과 달리 양전기가 옹주자사에 임명되어 양양(襄陽)으로 향하자, 치회와 그 무리는 남양태수 여구선(閭丘羨)과 거병해 양전기를 막을 계획을 꾸몄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을 훤히 읽고 있었던 양전기는 곧바로 강을 건너지 않고, 먼저 부하를 보내 "환현이 양전기를 선봉에 세워 면수(沔水)로 진격하고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치회의 무리는 그 말을 믿고 싸울 의지를 잃어 군대를 해산시키고 양전기에게 투항했다. 양전기는 관아로 들어가 여구선만 참수한 뒤, 치회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도성 건강(建康)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하여 양양에 부임하게 된 양전기는 병사를 위로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동시에, 성벽을 보수해 방비를 튼튼히 하면서 의외로 지역을 잘 다스리니 민심이 그를 무척 따랐다.

융안 3년(399년) 8월, 후진의 제공(齊公) 요숭과 진동장군 양불숭이 낙양을 대대적으로 침공해왔다. 낙양을 수비하던 하남태수 신공정은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하면서 원군만을 기다렸다. 이 소식을 들은 양전기는 북위의 상산왕 탁발준에게 사자를 보내 낙양을 구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탁발준이 이를 도무제 탁발규에게 보고하자, 도무제는 산기시랑 장제(張濟)를 보내 일의 경위를 알아오게 했다. 이때 양전기가 강족이 낙양을 차지하느니 북위의 선비족이 가지는 것이 낫다 답하니, 도무제는 태위 목숭에게 60,000 기병을 주어 낙양을 공격하던 후진군을 몰아내게 했다.

양전기, 은중감, 환현은 서로 반목하였는데, 특히 양전기와 환현의 갈등이 매우 심하였다. 양전기는 항상 환현을 원수같이 여기며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그럴 때마다 은중감에게 제지받아 직접 실행에 옮기지는 못 했다. 그렇게 위태로운 관계를 유지하던 중, 환현이 조정을 압박해 양전기의 형 양광 대신 자신의 형 환위(桓偉)를 남만교위에 임명하게 했다. 여기에 더해, 양전기의 사촌동생인 강하상 양자경(楊孜敬)까지 환현에게 습격 받고 볼모로 잡히자, 마침내 폭발해버린 양전기는 병사와 병장기를 점검하고 환현을 도모하고자 했다.

융안 3년(399년) 12월, 양전기가 낙양 구원을 빌미로 군대를 일으키고, 은중감에게 같이 환현을 공격할 것을 청했다. 비록 은중감은 환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환현을 제거하면 자신이 양전기를 통제할 수 없을 것을 걱정하여 도리어 조카 은휼(殷遹)을 파견해 양전기의 진군을 막게 했다. 양전기는 혼자서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회군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양전기의 소동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환현이 먼저 거병하여 강릉(江陵)을 공격했다. 강릉을 지키던 은중감이 급히 사람을 보내 양전기에게 구원을 청하자, 양전기가 말했다.
"지금 강릉에는 식량이 없을 텐데 어찌 적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으로 와 함께 양양을 지키도록 합시다."
양전기의 말대로 은중감은 군량을 전부 백성 구휼에 쓰는 바람에 강릉성에는 남은 양식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세력 기반인 강릉성을 잃고 싶지 않았던 은중감은, 사실대로 말하면 양전기가 구원하러 오지 않을 것을 우려해 미리 저축해둔 양식이 있다 거짓말 쳤다. 이에 양전기는 정예 보•기 8,000명을 거느리고 강릉성을 구원하기 위해 출격했다.

양전기의 구원군이 강릉성에 이르자, 은중감은 식량이랍시고 양전기군에게 말린 밥풀 따위를 보급해주었다. 이를 본 양전기는 대로하여
"이제 패하겠구나!"
라 외치고는 은중감을 만나보지도 않고 바로 환현을 치러 떠났다. 양전기가 형 양광과 더불어 영구(零口)에 주둔해있는 환현군을 공격하니, 그 기세가 자못 예리하여 환현은 두려운 마음에 마두(馬頭)로 잠시 군대를 물렸다. 다음 날, 양전기가 은도호(殷道護) 등과 합류해 10,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나아갔지만, 환현군이 나타나 대치하면서 쉽사리 진격하지 할 수 없었다. 양전기는 대치 상태를 깨고자 직접 장강에 전함 수십 척을 띄우고 환현군의 군함으로 곧장 돌진했다. 환현의 장수 곽전(郭銓)도 선봉을 거느리고 영격하러 나왔으나, 양전기의 공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거의 붙잡힐 위기에 놓였다. 그때 근처에서 대기하던 환현의 본군 뛰쳐나와 지쳐있는 양전기군을 덮치니, 양전기는 이내 패배해 단기로 양양으로 도주했고 그의 정예군은 결국 전멸했다.

환현은 곧바로 추격군을 편성해 양전기의 뒤를 쫓았다. 병사를 모두 잃은 양전기는 제대로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형 양광과 나란히 환현에게 붙잡혀 참수당하고, 그 수급은 도성 건강으로 보내져 주성문(朱雀門)에 효수되었다.

양전기의 동생 양사평, 사촌동생 양상보(楊尚保), 양자경은 환현으로부터 달아나 오랑캐의 영역으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훗날 유유가 환현을 축출했을 때, 동진으로 돌아와 다시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양자경은 홧김에 옹주자사 노종지의 참군 유천기를 칼로 찔러 죽인 죄로 참수되었고, 양상보, 양사평도 모두 죄를 지어 주살당하면서 남조의 홍농 양씨 집안은 완전히 멸절되었다.


[1] 비록 조부 양림(楊林)은 북방 이민족의 침입으로 전국이 혼란스러울 때 비명횡사하였지만, 부친 양량(楊亮)이 남쪽으로 내려와 동진에 정착해 양주자사(梁州)에 이르면서 동진에서 입지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