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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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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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江績(338 ~ 400)
동진의 인물. 자는 중원(仲元). 예주 진군 어현 출신. 상서랑 강몽(江瞢)의 손자. 오군태수 강관의 아들.
2. 생애
일찍이 포부가 있어 비서랑으로 조정에 임관했다. 강적은 아버지 강관과 더불어 사씨 집안과 화목하지 못했는데, 명망 높은 사안의 부름을 받고도 응하지 않았다. 이윽고 사안이 사망하자, 강적은 표기장군, 회계왕 사마도자의 부름에 응해 그의 휘하로 들어가 사마가 되었고, 사마도자 곁에서 올바른 간언을 바쳤다. 이후 자의참군으로 옮겨졌다가, 남군상(南郡相)에 임명되었다.융안 원년(397년) 4월, 연청2주자사 왕공이 사마도자의 최측근인 왕국보 등의 횡포에 반발해 거병했다. 형주자사 은중감은 왕공의 연락을 받고, 밖으로는 옹주자사 치회와 일을 도모하고, 안으로는 남만교위 은의, 강적과 함께 왕공에게 호응하는 일에 대해 의논했다. 은중감은 은의와 강적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을 밀어붙이려 했지만, 강적은 끝까지 반대하며 은중감의 지시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곁에 있던 은의는 강적이 행여나 해를 입을까 염려해, 그에게 은중감과 화해하라 이르니, 강적이 외쳤다.
"대장부를 어찌 죽음으로 협박할 수 있으리오! 이 강중원은 비록 나이 예순 살이나, 아직 죽음 따위 알지 못한다네!"
그러자 좌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은중감은 강적의 강직함을 꺼려,
양전기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게 했다. 조정에서는 이런 강적의 강직함을 높이 사, 다시 중앙으로 불러 어사중승 직책을 맡겼다. 어사중승에 임명된 강적은 권세가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탄핵을 상주하는 데에 꺼리낌이 없었다.융안 2년(398년) 10월, 강적은 좌위장군 환수에게 잘못된 계책을 바친 책임을 물어, 그를 탄핵하고 면직되게 하였다.
융안 4년(400년) 12월, 술에 쩔어있는 회계왕 사마도자를 대신해 안제 사마덕종의 보좌를 맡은 회계왕세자 사마원현은 교만하고 횡포하여 국정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았다. 어느 날, 사마원현이 밤에 황궁의 6개의 문을 죄다 열어놓은 짓을 벌이자, 강적은 사마도자를 찾아가 사마원현의 탄핵했지만, 사마도자가 이를 불허했다. 이부상서 차윤도 곁에서 강적을 거들어
"사마원현은 교만하고 방종하니, 의당 그를 말리셔야만 합니다."
라 간했지만, 사마도자는 이 또한 묵살시켰다. 나중에 이 일을 전해들은 사마원현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이르기를,"강적과 차윤이 우리 부자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는구나!"
라 하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차윤을 질책하자, 차윤은 두려워 자결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적도 세상을 떠나니, 조야의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죽음을 슬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