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8-01 19:12:04

프랜시스 베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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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ancis_Bacon,_Viscount_St_Alban_from_NPG_(2).jpg
<colbgcolor=black> 본명 <colbgcolor=white>제1대 세인트앨번 자작,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1st Viscount of Saint Alban
출생 1561년 1월 22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사망 1626년 4월 9일, 잉글랜드 왕국 미들섹스
국적 영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모교 트리니티 칼리지 케임브리지(학위 없음)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국회의원2.3.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2.4. 제임스 1세 시절2.5. 말년
3. 사상
3.1. 귀납법3.2. 4가지 우상
4. 아는 것이 힘이다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영국 대법관, 철학자, 과학자.

기존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방법론을 부정하고, 자연에 대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과학적 사실을 점진적으로 구축해나가야 된다는 귀납적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여 고전 경험론의 창시자라 불린다.[1] 유명한 명언인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

2. 생애

2.1. 어린 시절

프랜시스 베이컨은 1561년 런던의 요크하우스에서 국새관 니컬러스 베이컨 경의 아들과 그의 두 번째 아내 앤 베이컨 사이에서 태어났다. 베이컨은 일생 내내 몸이 약했는데, 그 이유 때문에 어린 시절은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12살에는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컬리지을 3년간 다니면서, 훗날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되는 존 월솔에게 개인적인 지도를 받기도 했다. 또한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엘리자베스 1세를 처음 만났고, 그녀는 그의 조숙한 지능에 큰 감명을 받아 그를 습관처럼 "어린 국새관"이라 불렀다고 한다. 학교에서의 교육은 주로 라틴어로 진행되었으며 중세 교육과정을 따랐다. 그는 이때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했는데 과학의 방법과 결과에 있어서 이러한 방법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고 한다.

15살에는 고위 법률가를 양성하는 그레이스 인(Gray's Inn)에 들어갔다. 그곳에 있으면서 파리 주재 영국 대사와 함께 프랑스를 여행하기도 하고, 이후 이탈리아, 스페인을 방문하면서 경험을 쌓았다. 그는 여행하는 동안 일상적인 외교 업무를 수행하면서 언어, 국정 및 민법을 공부했다. 그러면서도 영국 정부 및 여왕을 위해 영국에 외교 서한을 전달하기도 했다.

18살에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베이컨은 영국으로 돌아온다. 막내였기 때문에 유산을 제대로 상속받지 못했고, 어릴 때부터 씀씀이가 컸기 때문에 항상 빚에 시달리자 더 이상 돈을 물쓰듯 쓰는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매달 나오는 소량의 토지 임대료를 그에게 주었고 그는 평범한 생활로 돌아갔다.

2.2. 국회의원

19살이 된 베이컨은 정치에 관심을 가진다. 당시 제법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삼촌을 통해 궁정에서의 직위를 얻고자 신청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20살에는 콘월 주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21살에는 그레이스 인의 외부변호사로 임명되었으며, 23살에 멜컴과 톤턴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힘입어 그는 힘센 그의 삼촌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일이 잘 풀려서 25살에 그레이스 인의 의장이 되었고 1년 뒤에는 그레이스 인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다.

나아가 27살에는 리버풀의 의원이 되었고, 32살에는 미들섹스의 의원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입스위치에서 세 번, 케임브리지 대학 지역구에서 한 번 의원이 된다.

그는 의원에 있으면서 법을 개정하고 단순화하기를 열망하는 자유주의 개혁가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는 비록 왕실의 친구였으나 봉건적 특권과 독재에는 반대했다. 그는 종교적 박해에 대해서도 언급했으며, 상원의 권리침해적인 화폐 법안을 공격하기도 했다. 또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통합을 옹호하여 영국 통합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3.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

베이컨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가장 좋아하는 에식스 2세 백작을 소개받아 30살이 될 때까지 백작의 비밀 고문으로 활동했다. 31살에는 예수회 로버트 파슨의 반정부 논쟁에 대한 응답으로 소책자를 작성하라는 임무를 받아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2]

하지만 32살, 미들섹스의 의원 자리에 있을 때, 세금을 올리자는 법안에 대해 베이컨이 반대를 했고, 이는 여왕을 화나게 했다. 정적들은 그가 인기를 추구하기 위해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으며, 법원은 한동안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법무장관를 수행하는 자리가 한 자리 공석이 났는데도 여왕은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줌으로써 그를 냉정하게 무시했다. 이 탓에 한동안 공직에 인연이 없었다. 에식스 백작은 실망한 베이컨을 위로하기 위해 부동산을 사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베이컨이 36살이 되었을 때,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를 법률 고문으로 지정했다. 베이컨은 항상 통찰력있는 조언을 여왕에게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여왕의 신뢰를 더 굳건하게 했다. 이 무렵 에식스 백작은 반역죄로 처형을 당하는데, 베이컨은 그와의 관계를 단호하게 끊었다. 이 결정은 여왕과의 관계를 더욱 개선시켰으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곧 죽고 제임스 1세가 그 뒤를 이었다.

2.4. 제임스 1세 시절

베이컨은 제임스 1세 때 더 잘나가게 된다. 그는 42살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다음 해에는, 앨리스 반햄과 결혼을 했다. 46세에는 드디어 법무장관의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넉넉한 수입에도 불구하고 빚을 지는 것이 습관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그 빚을 갚지 못하고 있었고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임스 1세의 독단적인 정책을 옹호함으로써 더 많은 승진과 부를 추구하고자 했다. 왕이 사치스럽다고 비난을 하는 의회에 해산 명령을 내린 제임스 1세의 편에 섰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는 제임스 1세를 충분히 만족시켰으며 1613년, 52살의 나이에 그는 마침내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제임스 1세와 너무 친밀한 나머지 그의 동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지나친 영향력에 분개하거나 이를 걱정했다. 그러나 베이컨은 왕의 지속적인 호의를 방패삼아 그는 승승장구했으며, 56살에는 한 달 동안 임시 잉글랜드 섭정으로 임명되었고 57살에는 대법관(총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베이컨의 공직 경력은 1621년(60세)에 불명예를 얻고 끝나게 된다. 의회의 법 집행 위원회가 그를 23건의 부패 혐의로 기소한 것이다. 베이컨이 소송 당사자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는 당시의 관습에 불과했지만, 그의 평생의 적이었던 에드워드 코크 경(Sir Edward Coke)은 이러한 비난을 적극적으로 선동했으며 결국 베이컨은 40,000 파운드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왕의 뜻에 따라 런던탑에 수감되었다. 투옥 기간은 며칠 밖에 되지 않았으며 왕은 벌금을 면제해 주었으나, 의회는 더 이상 베이컨이 미래의 공직을 유지하거나 의회에 앉을 수 없다고 선언하여 그에게 치명상을 안겼다. 그는 이 과정에서 귀족 칭호를 치욕스럽게 박탈당했다. 이후 베이컨은 공부와 글쓰기에만 전념하였다.[3]

2.5. 말년

1626년 베이컨은 마차를 타고 가다가 눈을 사용하여 고기를 보존할 수 있다는 영감을 갑자기 떠올렸다. 그는 당장 실험을 해보겠다고 결심했고, 바로 마차에서 내려 하이게이트 언덕 아래에 있는 가난한 여인네 집에 들어가서 닭 한 마리를 샀다. 그리고 그 닭의 배를 갈라 눈으로 채웠다. 그런데 갑자기 한기가 느껴지고 추위에 덜덜 떨려서 베이컨은 숙소로 곧장 돌아갔다. 2~3일 동안 격렬한 기침을 해대다가 1626년 4월 9일, 런던 외곽 하이게이트의 애런델 맨션에서 폐렴으로 숨을 거뒀다. 묘지는 세인트알반스에 있는 성 미카엘 교회에 있다.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를 위한 장문의 추도사를 적어 보냈고 이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한 전기작가는 마지막까지 과학적 실험을 하다가 죽은 그를 두고 "근대 과학의 순교자"라 평가한다. 자신이 평생을 주장했던 과학적 연구를 온몸으로 실천하다 생을 마감한 셈이다.

3. 사상

3.1. 귀납법

나는 확실성의 단계를 점진적으로 확립하는 과정을 제안하고자 한다.
『신기관 (Novum Organum)』 머리말 중...
베이컨은 자연을 관찰하고 그 법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끊임없는 실험 사례들을 모으고 그 사례들을 분석하여 자연의 법칙을 찾을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떤 현상의 결과를 미리 판단(anticipation)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정당한 순서에 따라 높은 수준의 일반화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섣불리 단정을 내리거나 원칙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고 베이컨은 강조한다. 인간의 감각이 아무리 섬세하고 이해력이 특출하다고 하더라도 자연의 미묘함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새롭게 관찰되는 사실들을 단지 해석(interpretation)할 수 있을 뿐이지, 그 사실에서 모든 자연을 설명하는 어떤 고정불멸의 진리가 있다고 이를 성급하게 확신해선 안된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분만을 관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제든지 자신의 기대와 다른 예외가 나올 수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 3단 논법처럼, 처음부터 참인 지식을 전제로 논리적인 해답을 찾는 연역법을 비판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 답은 논리적 확실성을 담보할 수야 있겠지만 기존 전제에서 벗어난 새로운 지식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사례들을 나열하고 거기에서 지식을 얻어내는 베이컨의 귀납법의 경우에는, 새롭게 경험되는 사실들을 바탕으로 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도출해낼 수 있다.[4] 경험의 과정에서 기존 지식과 어긋나는 새로운 반례의 발견은 우리의 지식을 매번 갱신시켜 나갈 것이고, 그것은 일시적이고 잠정적이지만 새로운 지식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은 실험을 통해 새롭게 발견된 자료들을 매번 분석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과학적 지식의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이 방법론은 과학을 위한 새로운 이론적 틀이 되었으며 과학적 실험을 구상하고 그 실험의 객관성과 실용성을 향상시키는데 영감을 주어, 갈릴레오가 지핀 유럽의 과학 혁명이 이후 폭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후대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3.2. 4가지 우상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 지식이 옳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기존의 지식들이 맞는지 하나하나 고찰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베이컨은, '실험을 통해 증명되거나 검증되지 않은', 기존 지식들을 우상이라 보고 이들 우상을 타파하고자 한다. 우상은 4가지로 나뉜다. 차례대로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있다.
  • 종족의 우상( idola tribus)
    종족의 우상은 인간이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다. 인간의 감각은 종종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인간의 감각은 불확실하고 오류투성이기 때문에, 자연계의 진리에 좀 더 근접하기 위해서라면 적절한 사례와 조직화된 실험에 근거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견해를 일단 수용하게 되면 아무리 강력한 반증의 사례가 있어도 애써 그것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려 든다. 들어맞지 않은 것들은 얼버무리거나 무시하지만 요행히 들어맞는 사실은 강조하면서 이들은 헛된 믿음을 계속 이어 간다. 우리는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부정적인 사례들에 더욱 깊이 파고드는 것이 올바른 명제를 수립하는 데에 더 바람직할 것이다.
  • 동굴의 우상(idola specus)
    동굴[5]의 우상은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오류다. 개인마다 겪어온 삶과 살아온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특정 주제를 선호하거나 과도하게 집착하게 된다. 그것은 타고난 개인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일 수도 있고 교육의 영향을 받거나 다른 사람에게 감화를 받아서 그럴 수도 있다. 혹은 마음이 평온한 상태인지, 귀찮은 상태인지에 따라, 또는 선입견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에 따라, 개인이 받는 인상은 달라질 수 있다.
  • 시장의 우상(idola fori)
    시장의 우상은 인간의 의사소통, 즉 언어가 가지고 있는 오류다. 애매한 단어를 사용하면 자신의 뜻이 왜곡되어 전달될 수 있다. 또한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단어는 그것이 마치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이는 시장에서 자신의 제품을 과장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들을 제각각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하지만 학문하는 데 있어서는, 동일 사건, 동일 사물에 대해 그 현상을 표현하는 단어가 서로 같아야 한다. 만약 다르게 되면 학자들 간에 혼란이 생기고 무의미한 논쟁이나 공허한 허상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
    극장의 우상(시스템의 우상)은 철학적 논리 체계에 의해 생기는 오류다.[6] 베이컨이 생각하기에 지금껏 수용되고 있는 철학 체계는 여러 막으로 구성된 일종의 연극과 같다. 자연 현상은 한 가지로 동일한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여러 배우들이 차례대로 극장에 오르는 것과 유사하게, 저마다 서로 다른 체계를 가지고 제각각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그들의 대본은 사실보다 더 사실적이고 심지어 우아하고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철학적 논리를 너무 적은 것에서 많은 것을 이끌어 내거나 반대로 너무 많은 것에서 소수의 것을 이끌어 내기 때문에, 자연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즉, 그들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자연 현상이 외부에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작정 자신들의 논리 체계의 정합성을 끝까지 지키려고만 하기 때문에 도리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철학적 논리나 체계에 얽메이지 않고, 실험하여 관찰된 사실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4. 아는 것이 힘이다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인을 모른채로는 어떤 결과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을 지배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자연계가 작동하는 데에는 항상 뭔가 원인이 있다. 그것이 법칙이다.
『신기관』
베이컨의 명언 '아는 것은 힘이다'는 말은 위의 문장을 축약한 것이다. 어떤 결과에 대한 원인을 알게 된다면 자연을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뜻으로, 그 원인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자연을 관찰하고 실험하는 것에 있다. 즉,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이 밝혀지는 '자연'을 관찰하고, 거기서 밝혀진 제한적 앎으로 제한적 법칙을 새롭게 구성해내는 것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되고 인류를 행복하게 만드는 원천이 된다. 그러므로 베이컨에 있어서, '자연'의 관찰에는 관심없으면서, '정신'과 '신'에 대해서만 말하는 기존 '형이상학'은 제대로된 앎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한국에는 '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모르면 편할 것을 공연히 알아서 괴롭게 됨'을 뜻한다. 이는 자연을 관찰하고 지식을 쌓자는 베이컨의 의도와는 다르게, '앎'을 '심리적 측면'에서 살펴본 것이다.

5. 여담

파일:external/i3.kym-cdn.com/Knowledge-is-power-France-is-bacon-francis-bacon.jpg }}}||
  • 19세기~20세기 초, 한자문화권에서 베이컨을 '배근(培根)'이라고 음차했었다.
  • 정복지향적 자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윤리와 사상 교과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베이컨이 '인간은 자연의 하인이요, ...'라고 한 적도 있어서 헷갈릴 수 있다. 이것은 '자연을 정복하기는 위해서 하인 같은 마인드로 자연을 귀납적으로 관찰해야 한다'는 말이다.
  • 1618년 베룰람 남작, 1621년 세인트앨번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 현대 동명이인 화가인 프랜시스 베이컨과는 살짝 혈연적으로 연관이 있다.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본 문서의 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이복형제의 먼 후손이라고 한다.

6. 관련 문서


[1] 물론 베이컨 이전에도 '과학적 방법'을 통해 사실을 발견한 사례는 있었다. 그 한 예시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실험 등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다만, 갈릴레오는 베이컨처럼 '그 과학적 방법이 어떤 식으로 체계화 되어야 하는가'를 논하진 않았다. [2] 『명예훼손에 대한 특정 관찰』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 책에는, 민주적인 아 테네의 생각들이 스페인의 호전성에 맞서는 영국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3] 1627년에는 《새로운 아틀란티스 (The New Atlantis)》에서 과학자들이 모여 귀납적인 방법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과학 단체를 만들자고 주장했다.[9] 이 구상은 훗날 영국 왕립학회와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로 실현되었고 이는 과학 발전의 요람이 되었다. [4]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오르가논 (Organum)』에서 단순한 귀납법적 분류를 언급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법은 삼단논법의 순서를 바꿔놓은 것에 불과하다. 삼단논법에서, 보편자에서 개별자를 논증해 내는 것이 연역법이라면, 개별자에서 보편자를 논증해 내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법이다. 베이컨의 귀납법과 다른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법은 개별자를 드러내는 명제가 애초부터 참인 명제로 시작되는 반면에, 베이컨의 귀납은 개별자는 단지 수많은 경험 중 하나에 불과하고 그 귀납을 통해 성립된 보편 명제도 언제든지 반례에 의해 폐기될 수 있다는 점이 다른 점이다. 따라서 베이컨은 "확실성의 단계를 점진적으로 확립"해 가자고 제안했던 것.(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확실한 개별 명제를 가지고 귀납을 한 것) [5] 플라톤의 동굴과 비슷하다. [6] 일부 서적에서 극장의 우상을 '전통이나 권위를 따르고 신뢰하는데서 생긴다'고 설명하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무엇'이 빠져있어 오해하기 쉽다. '무엇'은 바로 '철학적 논리 체계'이다. 즉, 극장의 우상은 '철학적 논리체계'라는 전통과 권위를 따르는데서 생기는 우상이라고 설명해야 한다. [7] 그 밑에 어떤 유저가 실제로 닉네임을 "France_is_Bacon"으로 바꾸고 그렇게 하지 못한 유저들이 절규한 로그들이 있다. [8] 댓글에는 유사 사례에 대한 증언들이 이어졌다. 어느 유저의 학교 기념비에는 'Francis'가 빠져 "Knowledge is power - Bacon"으로 적혀 있었다고 했다. 지식이 곧 파워-베이컨이라는 기묘한 문구를 본 학생들은 파워-베이컨이 대체 무엇인지,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