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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1-3세기경 실크로드 교역망의 분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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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ddd> 초원길(상단) | 사막길(중간) | 바닷길(하단) |
1. 개요
비단길 또는 실크로드(Silk road)는 대항해시대 이전 중국 대륙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지중해 세계를 잇던 동서 교역 루트, 또는 이러한 교역 루트를 통해 연결되었던 교역망을 이른다. 이 루트를 통해 동서 간의 문물이 왕래했으며 비단길이 지나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도시나 마을이 생겼다.유사한 고대의 국제 교역로로 중국, 티베트, 인도, 네팔 등을 연결하던 차마고도가 있다.
2. 어원
'비단길', 영어로 '실크로드'라는 어휘의 유래는 독일의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2]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인도로 이어지는 옛 교역로를 연구하던 중 당시의 주요 교역품이 비단이었던 것에서 착안하여 '자이덴슈트라쎄(Seidenstraße)'로 명명하면서 사용되었다. 이 실크로드라는 말은 동서방 간의 교역로 중 스텝지대의 '초원길'과 인도양을 통해 이어지는 '바닷길'을 제외한 사막과 오아시스 일대의 도시들을 거치는 교역 경로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크로드라는 명칭은 교역로가 확대되면서 다소 부적절해졌지만 유라시아의 원거리 무역과 문명교류의 통로에 대한 상징적이고 관용적인 명칭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사주지로(絲綢之路)라고 부른다.2.1. 언어별 명칭
영어: Silk road독일어: Seidenstraße
중국어: 丝绸之路 (絲綢之路, Sīchóu zhī lù, 사주지로)
아랍어: طريق الحرير (Tariq Al-harir)
페르시아어: جاده ابریشم (Jadeh ebrisham)
우즈벡어: Buyuk Ipak Yo'li
카자흐어: Ұлы Жібек жолы (Uly Jibek joly)
투르크멘어: Beýik Ýüpek ýoly
키르기스어: Улуу жибек жолу (Uluu jibek joly)
타지크어: Шоҳроҳи Абрешим (Shohrohi Abreshim)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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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1-6[3]세기경 실크로드 교역망의 분포도. |
넓은 의미의 실크로드는 기원전 10,000년 전후 빙하기가 끝난 후 문명이 발생하고 인류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생겨난 몇 갈래의 교통로로서 지금까지 문명 간 교류의 통로로 기능하는 것을 지칭한다. 반면에 좁은 의미의 실크로드는 기원전 8~9세기부터 만들어져 근대 이전까지 기능한 동서문명 교류의 통로를 지칭한다. 초원길과 오아시스길의 경우 중앙아시아의 도시국가나 유라시아의 유목국가들에게는 부와 국력의 원천이기도 했으며, 사산조 페르시아부터 일 칸국에 이르기까지 서아시아의 국가들에게도 경제적으로 굉장히 중요했다. 그러나 16세기에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대서양 바다를 통한 대양무역이 확대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초원길과 오아시스길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줄어들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이 길이 완전히 "쇠퇴"했다고 볼 수는 없다. 대항해시대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서구 중심적 옛 사관에서는 내륙 실크로드가 교역루트로서 몰락했다고 간주하기도 했지만, 이쪽도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퍼센트가 줄어들었을 뿐 16세기 이후에도 이들 유라시아 내륙교역로의 무역랑의 절대량은 계속 증가했으며, 티무르 제국과 제국 붕괴 이후의 코칸트 칸국,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 등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러시아, 페르시아, 인도, 중국을 엮는 삼각무역의 요충지로서 전성기를 지내며 번성하였다. 러시아는 이곳에서의 모피 무역을 비롯한 각종 교역에서 얻은 자본을 통하여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한다. 실크로드 지역이 러시아 제국에게 완전히 정복되는 건 한참 이후의 일이다.
근대에는 러시아에 의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비롯해 여러 대륙횡단철도가 부설되었으나 냉전시대 철의 장막으로 공산권 내부의 교통로 역할로 그 입지가 줄어들었다. 소련 치하에서 이 지역은 일률적인 산업화가 진행되고 사회간접자본이 설치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이 같은 경제권으로 묶이게 되었다. 특히 내륙에서의 운송은 철도만 한 것이 없기에[4] 철도 부설은 특히 내륙국이거나 내륙국과 교류하는 국가들에 있어 중요한 경제적 의의를 가진다.
오늘날 중국은 일대일로라는 인프라, 경제, 문화 교류 정책을 추진 중이며, 이는 과거의 실크로드가 남긴 유산을 문화적, 지정학적으로 재활용하는 구상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길을 따라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 전략까지 구상되었다. 2014년에는 실크로드: 창안-톈산 회랑 도로망라는 이름으로 실크로드상의 33개의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실크로드: 창안-톈산 회랑 도로망 참조.
3.1. 한국사와 실크로드
한국사에서 가장 이른 시점인 고조선과 부여의 시대부터 이미 몽골고원을 지배했던 흉노와 같은 여러 유목민족들과 교역을 한 흔적이 확인된다. 즉 아주 오래 전부터 이미 초원길과 한국계 국가들이 통하는 교역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또한 단연 당대 한국계 국가들의 최대 무역상대국은 중국이었으므로 사막길을 통해 온 문물도 해로 및 요동지방을 거치는 육로를 통해 전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의 해상무역은 주로 연안항해를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산둥반도에서 요동반도와 한반도의 서해안 및 남해안을 거쳐 일본 열도까지 이어지는 해상교역로가 성립되었고, 이것이 바닷길과 닿는 교역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이 전한에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된 뒤에는 고조선의 자리를 대체한 낙랑군을 중심으로 한 국제무역이 전개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요동지방 및 부여를 점령한 뒤 초원길과 통하던 옛 교역로들을 이어받아 중동에서 온 문물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흔적은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등의 국내외 유물이나 여러 고분벽화 및 당시의 기록 등을 통해 남아있다. 또한 요동반도 및 압록강과 대동강을 통한 서해안 해상무역도 활발하게 이뤄졌으므로 바닷길과 통하던 옛 해상교역로도 마찬가지로 이어받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경우 한사군과 요동지방이 고구려에 점령된 뒤 연안항해가 막히면서 서해안에서 연안을 거치지 않고 바로 중국과 통하는 해로를 새로 개척하여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바닷길과도 닿는 교역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5] 남중국을 통해 백제에 방문해 불교를 포교한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이 바닷길을 거쳐 백제에 방문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기록상 한국사에서 최초로 인도에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는 인물인 승려 겸익 또한 바닷길을 통해 갔다왔을 가능성이 높다.[6] 신라 및 가야의 경우 지리상 직접적으로 중국이나 유목세계와 통교하는 건 힘들었지만 고구려, 백제와의 무역을 통해 이미 교역망 안에 들어가 있었으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반파국(대가야)의 경우 한때는 서남해안 일대를 정복하고 아예 중국과 직접 통교하기도 했다. 이후 신라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점령한 뒤에는 백제가 사용하던 해상교역로를 이어받아 중국과 교류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참고로 이 시기에 해당하는 선덕여왕대에 실크로드의 영향이 유라시아 대륙의 끝단까지 미쳤음을 나타내주는 대표적인 표지 중 하나인 석굴암이 완성되었다. 종합하면 이렇게 일찍부터 있었던 광범위한 국제무역을 통해 한반도 전역에서 당대 동아시아에서는 생산, 제작할 수 없었던 서역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물로 경주 계림로 보검이나 황남대총 유리병 등이 있다.
남북국시대에 들어서는 신라의 경우 중국의 항저우와 취안저우에서 한반도의 당항성(화성)과 영암, 청해진(완도), 울산으로 이어지던 해상교역로가 바닷길과 통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발해의 경우 무역로 중 압록강을 거친 조공도가 바닷길과 통했고, 육상교역로였던 거란도와 영주도가 초원길과 닿았던 고구려의 교역로를 이어받은 교역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 발해의 교역로를 따로 서술했지만 사실 이 시기는 대체적으로 대대적인 국제전쟁이 멈춘 평화의 시대였기 때문에 몇몇 시기를 제외하고는 딱히 서로의 교역을 틀어막거나 하진 않았고 따라서 국제교역이 굉장히 활성화된다. 그래서 발해와 신라 사이에도 신라도라는 교역로가 있었고[7] 해상교역로 또한 서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세계사적으로도 당나라와 이슬람 제국을 중심으로 한 실크로드의 번영기에 해당하는데, 이러한 시대배경을 통해 겸익에 이어 한국사상 두 번째로 인도에 방문했다 온 신라의 승려 혜초가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했던 바 있으며, 서역에서 신라로 건너간 사람들의 흔적으로 원성왕릉의 호인상과 처용무의 인물 모티브 등이 있다.[8]
중세시대에 해당하는 고려시대에 들어선 뒤에도 여전히 실크로드 교역은 활성화되어 있었고, 특히 몽골 제국이 단독으로 유라시아의 주요 교역망을 장악한 뒤에는 전례 없던 대교역의 시대가 펼쳐졌다. 이에 당시 고려의 무역항이었던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 번영하였고, 국수요리, 소주, 화약, 당시 가장 발달했던 이슬람권의 수학과 역법, 달력(회회력) 등 정말 현대 한국인의 삶에도 와닿을 만한 수많은 문물이 들어왔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기를 경계선으로 직후의 조선시대는 이전과는 문명의 성질이 다소 달라진 것 같은 느낌마저도 준다. 그러나 정작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명나라의 해금령과 유럽의 항해기술 발달에 따른 대항해시대의 도래 등으로 인해 실크로드 무역은 국제 해상무역망에 포섭된 바닷길을 제외하고는 동아시아에서는 비교적 쇠퇴하게 되며, 한국사에 있어서도 근대에 개항이 있기까지는 이전보다 무역이 훨씬 쇠퇴하게 된다.
4. 종류
중세의 동서 교역로는 초원길, 사막길(오아시스로), 바닷길의 3대 간선과 마역로, 불타로, 라마로, 메소포타미아로, 호박로라는 5대 지선으로 나뉜다. 다만 이런 복잡한 구분이 생긴 것은 19세기 즈음에 서구 제국주의의 근대적인 팽창 과정에서 실크로드 연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실크로드의 서양 기점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알려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오늘날 스웨덴에서 중앙아시아 사만 왕조의 금화나 혹은 중세 초 아프가니스탄에서 제작한 소형 불상 등등이 발견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이것보다 그 폭과 규모가 더 방대하였다 볼 수 있다.[9]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는 실크로드의 주요 경유지였다. 중국 측 기점은 장안이 대표적이다. 다만 쓰촨성 청두(성도)에서는 실크로드의 끝자락을 장안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꺾어서 연장시켜 비단의 산지인 청두까지 이어지도록 그려 놓았다.[10][11] 한반도 역시 고조선시대부터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시대 등 고중세시대 전반적으로 초원길과 바닷길을 통해 교역품이 거래되었으며, 당시의 유물들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4.1. 초원길
초원길 또는 스텝길(Steppe Silk Road)은 비단길 가운데 가장 먼저 발생한 교역로로, 흑해, 아랄해, 카스피해 일대에서 살던 스키타이인들이 개척하였다. 유라시아 북방 스텝 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길이며 선사 시대부터 이용되었다. 오아시스로가 개척되기 전부터 초기 문명 전파의 주요 통로로 기능했으며, 실크로드의 3대 간선 중 가장 오래된 길이다.
카스피해연안 혹은 발트해 남단 스텝에서 시작해 흑해의 동북편과 남러시아와 아랄해연안을 지나 카자흐스탄과과 알타이산맥을 넘어 몽골 고비사막의 북단 몽골 고원의 오르혼 강 연안으로 이어진다. 이후 동남향으로 대흥안령산맥을 거쳐 동쪽 끝까지 이르는 경로이다.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저서 『역사』[12]의 기술에 의하면 초원로는 기원전 7세기 전반에 스키타이인들이 흑해로부터 우랄 산맥을 넘어 알타이(Altai) 지방에 이르러 동방교역을 할 때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고대부터 초원로의 주변에는 주로 기마유목민족 문화가 발생 · 번영하였으며, 이 길을 따라 동서로 널리 전파되었다. 초원로를 통해 최초로 동서에 전파된 문물로는 비너스(Venus)상(像)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너스상은 지금까지 서유럽의 피레네 산맥 북쪽 기슭에서 시베리아의 바이칼호 부근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지역에서 수백 점이 발견되었다. 또한 이 루트에는 유목민족 문화 특유의 동물 문양이나 금은세공(金銀細工) 등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으며, 특히 알타이 북단 초원길을 따라 발굴되는 다량의 유적들을 통해 초원로를 통한 동서간의 교류를 실증해주고 있다.
한반도로 유입된 금속기나 세공 문화도 초원길의 교류를 통한 유입이 이루어졌다 보고있다.
이후, 몽골 고비 사막 부근에서 흉노가 성장하면서 광활한 초원지대가 단일한 정치 체제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초원길 경영이 이루어졌다. 이 초원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흉노의 선우에게 통행증을 제시해야 했는데, 통행증이 없다면 이 길을 우회해서 가야 하므로 신체적, 경제적인 한계가 굉장히 많이 따랐다. 그러나 흉노가 경제적, 군사적으로 한나라를 공격하고 이 과정에서 한나라의 비단이 헐값 혹은 공짜로 흉노에 유입된다. 흉노는 이 비단을 그대로 서부 지역에 전달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4.2. 사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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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판의 고창국 고성 유적. |
사막길 또는 오아시스길(Oasis Silk Road)는 가장 널리 이용되었던 비단길의 중심 루트로서, 좁은 의미의 비단길은 바로 이 사막길을 의미한다. 파미르 고원 서쪽에서는 헬레니즘 제국 시기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이 인도 간다라 지방까지 교통로를 건설하면서 개척되기 시작했고, 파미르 고원의 동쪽에서는 한나라 때 장건이 월지와의 동맹을 위해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교역망이 이어졌다.
사막길은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렀으며 이 길을 통해 로마 세계와 동아시아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교역품은 중국의 비단[13]과 로마의 유리 공예품이었다.[14] 또한 단 한 번뿐이지만 로마 제국의 사신이 한나라까지 오기도 했다.
4.2.1. 천산북로와 천산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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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사막길 동부를 확대한 지도 |
중국 측 교역로는 장안에서 돈황을 거쳐 천산 산맥을 지나 파미르 고원을 통과하는 길이었는데, 이것도 천산북로(북비단길, Northern Silk Road)와 천산남로(남비단길, Southern Silk Road)로 나눠진다. 이러한 구분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같은 자연적인 한계가 강한 곳을 최대한 피해가면서 형성되었다. 초반에는 천산 산맥 남쪽을 지나는 길을 천산남로로 칭했는데, 인근 도시국가들이 물 부족과 사막화로 쇠퇴하고 북방 민족이 이곳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천산 산맥 북쪽 교역로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이를 천산북로라고 한다.
란저우에서 하서주랑(河西走廊)을 거쳐 돈황에 이르면,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북쪽 루트는 옥문관(玉門關)을 거쳐 하미로 가는 천산북로 & 천산남로 이고 남쪽으로는 양관(陽關)을 거쳐 누란과 호탄으로 향하는 서역남로가 있다.[15]
이 길을 통해 중국의 차, 도자기, 비단을 전하게 된다. 제지 기술도 이 길을 통해 서역으로 전해졌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흔히 탈라스 전투 와중에 붙잡힌 중국인 제지공 덕분에 중동에 제지술이 전파되었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지만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따르면 탈라스 전투 한참 이전인 서기 3세기 제지술이 이미 중앙아시아에 퍼져 있었다. 압바스 칼리파조 초창기에 재상을 지냈던 중앙아시아 발흐 출신 바르마크 가문이 지혜의 집 등을 후원하면서 대규모 제지공장을 건설한 시점과 탈라스 전투에서 제지 기술자가 붙잡힌 시점이랑 너무 짧다보니, 그 이전 이미 제지술이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했고 결국 고고학 발굴 결과 제지술이 탈라스 전투 이전 이미 중앙아시아에 퍼져 있었으며, 오히려 목면을 사용하여 중국의 그것보다 더 개량된 형태였다는 것까지 밝혀졌다.
카슈가르- 호탄-뤄창- 돈황으로 이어지는 길에 한나라 때의 유적들을 볼 수 있다. 다만 이름처럼 매우 험한 길이다.
이후 천산북로는 일리 계곡을 따라 천산 산맥 사면을 거치고[16] , 천산남로와 서역남로는 페르가나 계곡을 거쳐 양 방면의 루트는 사마르칸트에서 합쳐져 부하라에 이른다.
4.3. 바닷길
바닷길(Maritime Silk Road)은 기원후 1세기경에 개척되었다. 홍해에서 예멘을 거쳐서 페르시아 만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인도로 가는 루트이다. 인도양으로 향하는 이 길을 통해 본격적으로 원거리 무역이 성행했다.
이로써 당대 로마는 동방의 물건을 해상으로 운송할 수 있었으며 베트남, 중국 남부로 추정되는 지역에까지 교류를 확대했다. 해상 수송은 대량수송의 장점이 있어 도자기와 향료, 차 등이 주로 오갔다. 따라서 비단이 오고간 육지의 비단길에 빗대 이 길은 '향료길', '도자기길' 로 불리기도 한다.[17] 그래서 인도 서부 해안에서 로마시대 주화가 발견되기도 한다. 고대도시 페트라와도 연관이 있는데 페트라는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2500㎞ 향료길을 잇는 관문이기도 했다. 고대 아라비아 무역로의 중심지였던 페트라는 AD 2세기 로마에 함락된 이후 동서무역로의 중심이 비단길로 옮겨가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13세기의 페르시아 시인 사디의 저서에는 페르시아에서 중국으로 황, 중국에서 비잔틴으로 자기, 비잔틴에서 인도로 비단, 인도에서 시리아로 강철, 시리아에서 예멘으로 유리, 예멘에서 페르시아로 무늬옷감을 실어 나른다고 내용이 실려 있다
페르시아 만에서 중국에 이르는 바닷길은 중세 초까지 이른바 파르시로 불리는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도 상인들이 장악하였던 바 있다. 물론 교역상 중에는 조로아스터교도들만 있던 것은 아니고 힌두교도나 무슬림, 그리고 기독교도들도 적지 않은데 오늘날 인도 케랄라 주의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시로말랑카라 가톨릭,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등등은 당시 로마 제국이나 페르시아에서 남인도 해안 지대로 정착한 기독교인 상인들과 이들에게 전도된 현지 기독교인들의 후손이다.
4.3.1.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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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 제작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중동과 유럽을 포함하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해안 지대까지 묘사되어 있다. |
바닷길은 단순히 중국과 중동만을 연결하는 것이 아닌 아프리카 동부 해안지방까지 연계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바스코 다 가마 이후 포르투갈인인들은 스와힐리 해안 지방을 정복한 후 대항해시대 항로에 포함시켰다.
중·남아프리카의 경우 그레이트 짐바브웨도 킬와 술탄국을 통해서 내륙의 금을 해외로 수출했다.
사하라 종단 무역과 연결된 실크로드 |
서아프리카의 사헬 일대 역시 몰디브와 교류했는데 몰디브에서 쓰였던 앵무조개 껍질이 말리 제국에서도 쓰였다.[18] 또한 실크로드는 사하라 종단 무역과 이어지기도 했으며, 사하라 종단 무역으로 서아프리카와 지중해 일대 사이의 무역이 흥하기도 했었다. 잠깐이었지만 중앙아프리카 중서부 카넴-보르누 제국 역시 사하라 종단 무역을 통해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었다.
5. 매체와 실크로드
방송 매체의 영향으로 실크로드하면 비단 장수들이 낙타 타고 한가하게 사막을 건너는 모습이 연상될 수 있겠지만, 사실 비단 교역로는 사람 살기 힘든 동네였다. 특히 오아시스 주변으로 발달한 도시들은 기후 변화로 인해 물이 줄어들면 그와 함께 급격하게 쇠퇴하거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날아오는 어마어마한 모래 폭풍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모래 더미에 폭삭 파묻히는 경우도 있었다.(…) 초원길과 사막길의 개척 시기에 격차가 있는 것도 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고원을 통과하는 길이 너무 험난했기 때문이다.[19] 게다가 이 주변에 매복하고 있는 도적 떼에게 습격이라도 당하는 순간엔 가진 물건을 모두 빼앗기기 십상이었다. 한마디로 비단 장수는 죽을 각오를 하고 사막길을 건너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의 저서들과 김호동 교수의 <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가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한 동서교역사을 다루는 대표적인 서적으로 꼽힌다. 정수일 소장은 서역과 신라의 구체적인 실크로드 교류 등 한국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을 많이 다루고, 김호동 교수의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는 지도 자료와 그림이 충실해서 실크로드 지역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해하기 쉽다. 좀 더 심층적으로 이슬람의 동점 이전 고대 실크로드의 역사에 대해서는 발레리 한센의 <실크로드: 7개의 도시>,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수잔 홧필드의 <실크로드 이야기>, 서양인들의 실크로드 탐험사에 대해서는 피터 홉커크의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는 책이 번역되어 있으니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실크로드에 대한 본격적인 언론사의 첫 취재로 1974년 조선일보에서 간행한 <서역 3만리>라는 제목의 연재물이 있다. 아직 한국과 외교관계가 없던 중국과 소련 지역은 답사하지 못하고, 왕정 폐지 직후 아직 혼란스럽지 않던 아프가니스탄[20]과 한창 흥성하던 팔레비 왕조의 이란을 거쳐 터키 이스탄불까지의 실크로드 구간을 답사했다.
- 실크로드를 구체적으로 다룬 대표적인 영상물로는 NHK의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실크로드'가 있다. 중국 CCTV와 합작 제작하여 장안에서 로마까지의 여정을 담았다. 당시는 중국이 덩샤오핑 체제하에서 갓 개혁개방을 시작하던 때라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OST를 뉴에이지 음악가인 기타로가 담당하였고 ' 메인 테마'와 ' 캐러밴의 쉼터' 등이 유명하다. 이 다큐멘터리는 훗날인 1984년 KBS에서도 수입 방영되었다. KBS 방영 버전 제1편(유튜브)
- 2005년 실크로드 제작 25주년을 기념하여 리부트판인 ' 신 실크로드'가 제작되었으며, 이 때는 NHK와 CCTV뿐만 아니라 KBS도 공동제작에 참여하고 LG그룹이 제작을 후원하였다. 이 다큐멘터리도 영상미와 음악이 뛰어난데 OST 담당은 요요마. 요요마 특유의 중후한 첼로와 서역의 이색적인 음률이 잘 어우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21] 원래 시리즈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방송장비와 촬영기술이 발전하면서, 그 당시에 비하며 대단히 수려한 영상미를 뽑아낸다.
- 날아라 슈퍼보드 -환상서유기-(고전 게임)에서 자하의 무기로 실크 로드(ATT +265, DEX -5, INT +11)가 등장하는데, 제작진은 의도적으로 툴팁에 다음 설명을 달았다(Road vs. Rod): "비단을 수송하던 길, 이 아니라 비단 막대기. 마비를 준다."
6.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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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구시가지 레기스탄의 모습. 사마르칸트에는 고구려 사신이 그려진 아프라시압 벽화가 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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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히바의 이찬 칼라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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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Merv)의 산자르 영묘 (Sanjar Mausole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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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Merv)의 고대 성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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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투루판(Turpan) 근교의 교하 고성(交河故城, Jiaohe rui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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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투루판(Turpan)의 고창 고성(Gaochang Rui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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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만리장성 시작부분의 유적 |
[메타문서]
동음이의어 문서로 이어진다.
[2]
여담이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
육군 항공대 에이스 파일럿이었던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 이 사람의 조카다.
[3]
5세기에는 훈족이 캅카스 지역의 교역망을 점령했으며, 6세기에는 소그드인이 튀르크족에 동화되었다.
[4]
대량 물류 수송은 항만이 가장 효율이 좋다.
러시아가 역사적으로
부동항 확보를 중시한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내륙에는 배가 들어올 수 없기에 철도가 가장 효율이 좋다.
[5]
고구려와 백제 모두 중국의
남북조와 동시에 교류한 기록이 확인된다.
[6]
다만 두 경우 모두 완전히 확증된 바는 아니라 중국을 거쳐 사막길을 이용했을 수도 있다는 이견이 있다.
[7]
순수한 육상교역로였는지 아니면 육상과 해상의 혼합교역로였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데, 그냥 둘 다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8]
정수일 박사의 소개로 알려진 중세 이슬람권의 지리서에서도 신라에 정착한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의 존재를 묘사하고 있다.
[9]
스웨덴과 중동, 동양과의 교류는 주로
키예프 루스를 통해 이루어졌다.
[10]
삼국지에서
촉한이
조위보다 나라가 훨씬 작음에도 대충 3국 구도로 대치가 가능했던 원동력 중 하나가 쓰촨의 특산물 비단(촉금, 蜀錦) 무역 수익이 있었다.
[11]
쓰촨성에서
히말라야산맥 남부를 돌아 인도로 직행하는 육로 무역도 가능하긴 했으나 지형이 험하고 현지 원주민들의 무관심으로 교역 규모와 수익이 적었다. 쓰촨성-
윈난성-
미얀마-
아삼-
벵골 루트는 13세기 원나라 시기가 되어서야 윈난성에 무슬림(
후이족)이 정착하고
아삼 지역이 인도화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12]
제4권의 13장과 16~36장
[13]
로마에서 막연하게 중국 일대를 비단이 나는 나라라는 뜻의
세레스라고 부르는 것의 연원이 되었다.
[14]
이 유리는
신라와
가야에까지 전해져서, 현재 많은 신라
고분에서 서역산 유리가 발굴되었으며 특히 황남대총에선 그야말로 쏟아져 나왔다. 상태가 온전한 유리공예품은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등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가야 지역의 경우도
합천
옥전 고분군에서 로만글라스 유리잔이 출토되었다.
[15]
이후 타림강 물길 흐름의 변화와
누란이 폐허속에 몰락하면서 서역남로 루트는 뤄창(若羌)을 거치는 루트로 변경되었다.
[16]
대표적으로
투루판 -
우루무치 - 쿨자 -
알마티,
발라사군 -
탈라스 -
쉼켄트 -
타슈켄트 - 지자흐 -
사마르칸트 루트. 아무다리야 강 북쪽
튀르키스탄을 거쳐 아랄해로 향하는 무역로도 있다.
[17]
오늘날 인도 남서부 지역이 바로
후추의 원산지로,
캘리컷,
코지,
벵갈루루 등이 위치해 있다.
[18]
출저: 해양실크로드 문명사(주강현 저자).
[19]
타클라마칸 사막 자체가 당대의 현지 언어로 들어가면 못 나오는 곳이란 뜻이다.
[20]
27년 뒤에 탈레반이 파괴한
바미안 석불을
취재하기도 했다.
[21]
사카이 마사토가 일본에서 장안으로 유학하여 관리까지 지내며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세이 신세이의 재연배우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