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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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孫氏(240 ~ 334)
서진의 인물. 양주(揚州) 오군(吳郡) 당춘현(富春縣) 출신. 동오의 태조 대황제 손권의 먼 친척. 동오의 의도태수 우충의 처. 동진 시기 무창효열후 우담의 어머니.
2. 생애
초기에 우번의 아들인 우충과 혼인한 손씨는 공손하고, 온화하며, 정직하여 아내로서의 덕이 대단하였다. 이후 서진군이 동오를 침공하면서 우충이 전사하자, 손씨는 비록 젊었지만 기필코 절개를 지키리라 맹세한 뒤, 어린 아들 우담을 홀로 양육하며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손씨는 보통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통찰력이 뛰어났기에, 우담은 어릴 때부터 이러한 어머니의 밑에서 자라면서 충성과 의로움에 대해 배웠다. 손씨의 교육 덕분에 훗날 장성한 우담은 양주(揚州)에서 관리 생활을 하면서 명성을 날렸고, 얼마 안 가 조정에 수재(秀才)로 천거되어 그곳에서도 칭송받았다.영가 5년(311년) 6월, 우담이 남강(南康) 태수를 지낼 때, 두도의 반란 진압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손씨는 우담을 전장으로 보내면서 필사의 각오라 싸울 것을 당부하였고,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 우담의 병사들이 먹을 식량을 보급하였다. 그 결과, 우담은 공을 세워 당시 강동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낭야왕 사마예의 눈에 들 수 있었고, 이후로도 동진 정권을 위해 여러 공을 세우면서 수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함화 2년(328년) 5월, 반란을 일으키고 건강을 점령한 소준이 형주(荊州)에서 일어난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석두성(石頭城)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오흥(吳興) 태수를 지내고 있던 우담은 소준이 건강을 비운 틈을 타 동쪽에서 거병하였다. 이때 손씨가 우담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충신이 효자의 집안에서 나온다고 하였으니, 너는 마땅히 목숨을 버리더라도 의로움을 취해야 한다. 나의 노환은 신경쓰지 말아라."
그리고 그녀는 집안의 노복들을 모두 동원해 우담의 전투를 돕도록 했으며, 자신이 착용하던 반지와 귀걸이를 팔아 군자금으로 사용하게 하였다.한편, 비슷한 시기에 소준 토벌을 명목으로 거병한 회계(會稽) 내사 왕서가 아들 왕윤지를 도호로 삼아 파견하자, 손씨가 이를 듣고 우담에게 말했다.
"왕서는 아들을 보냈는데, 너는 어찌하여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
이에 우담도 자신의 아들 우초(虞楚)를 도호로 삼고, 왕윤지와 함께 힘을 합치게 하였다. 그녀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이와 같았다. 소준의 난이 진압된 후에는 조정에서 그녀를 무창후태부인(武昌侯太夫人)으로 삼고, 금장자수(金章紫綬)를 하사하였다. 우담은 '양당(養堂)'을 세워 어머니를 모셨고, 승상
왕도 이하 많은 공경들이 그곳을 방문해 절을 올리기도 하였다.함화 9년(334년), 손씨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5세. 성제 사마연도 사절을 보내 조문하였고, 시호는 '정부인(定夫人)'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