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소설에 대한 내용은 BEATLESS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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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어: Bitlis
아르메니아어: Բաղեշ (바게쉬)
오스만어: بتليس
1. 개요
튀르키예 동부 아나돌루 지방에 위치한 도이자 동명의 도청 소재지이다. 바트만에서 동쪽으로 100km, 완(도시)에서 서쪽으로 120km 떨어진 분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5만 명이다. 시가지는 티그리스강의 지류인 비틀리스강의 협곡에 형성되어 있고, 완호는 동쪽으로 15km 떨어져 있다. 해발 1,500m에 위치하여 여름에도 30도 이하의 기온을 유지하고, 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진다. 과일, 곡물, 담배 등의 농업과 가죽 산업이 발달하였다.2. 역사
비틀리스 성채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설이 난무하다. 튀르키예 측 전설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 3세의 장군 바틀리스가 이곳에 도시를 세운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측 전설에 의하면 한 당나귀가 마구간을 나가 떠돌다가 이곳의 계곡에서 얼어 죽었는데, 봄이 되어 발견된 후 사람들이 일대를 파그 에쉬(차가운 당나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 시기 바게쉬는 왕국 중부의 중요한 성채였다. 그러다 7세기 후반 이슬람 제국이 정복하였는데, 9세기 들어 바트만 인근 아르잔에서 발흥한 주라르 토후국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주라르 가문의 아미르들은 무슬림이었지만 현지 기독교도 영주 가문과 통혼하였고, 함께 압바스 왕조에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마지막 아미르 아부 무그라는 기독교로 개종까지 했다가 890년에 디야르바크르 총독 아흐마드 빈 이사 앗샤이바니에게 사로잡혔고, 아르젠은 디야르바크르 토후국에 편입되었다.
디야르바크르 토후국이 898년 압바스 왕조에게 토벌당한 후에도 중앙 정부의 통치력은 미약하였고, 10세기 들어 동북쪽으로 70km 떨어진 만지케르트의 카이스계 아미르들이 지배하였다. 그러다 929년 동로마 제국의 장군 요안니스 쿠르쿠아스가 바게쉬를 점령하였다. 3세기에 걸친 아랍인들의 지배가 붕괴되자 쿠르드인들이 일대에 정착하였다. 그중에서도 로자키 부족은 조지아 왕국의 다비드 3세를 격파하고 비틀리스를 거점으로 삼았다. 11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이 약화되자 쿠르드계 마르완 왕조가 일대를 지배하였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에는 동북쪽 40km 완 호숫가의 아흘라트 토후국(샤아르멘 왕조)이 일대의 패권을 쥐었다. 그러나 1180년대 샤아르멘 왕가가 단절되어 아흘라트 토후국이 혼란에 빠지자 비틀리스의 로자키 쿠르드인들이 자립하였다. 이렇게 성립된 비틀리스 공국은 1847년까지 6세기간 이어지게 된다.
2.1. 비틀리스 공국
1830년대 쿠르드계 공국들
비틀리스 공국은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인한 혼란기에도 빠르게 일 칸국에 복속하여 화를 피하였다. 14-15세기에도 흑양 왕조와 티무르 제국에 복속하였고 전자의 재건을 도왔다. 다만 흑양조의 원수인 백양 왕조의 공격을 받아 3번의 공성전 끝에 비틀리스는 함락되었다. 다만 우준 하산이 사망한 후 1494년 로자키 부족이 도시를 수복하여 공국을 재건하였다. 16세기에는 사파비 왕조에 복속하였다. 그러다 찰디란 전투 후 오스만 제국에게 복속하여 칸 칭호를 받았는데, 1531년 당시 칸인 셰레프가 사파비조에 복속하였다. 이에 오스만군이 비틀리스를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1533년 셰레프는 결국 오스만군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그 후계자인 아들은 오스만조에 다시 복속하였으나 무슈와 흐느스는 몰수되어 산작이 되었다. 한편 로자키 칸들은 아르메니아계 주민들과 기독교에 관대하였고, 여러 수도원이 세워졌다. 1685년에는 예수회 교회가 세워졌다.
17세기 전반 샤라프 칸과 압달 칸은 오스만 제국의 대사파비 전쟁을 도왔고, 이에 술탄 무라트 4세가 친히 비틀리스를 방문하여 치하하기도 하였다. 전쟁 외에도 샤라프 칸은 1597년 최초이자 최고의 쿠르드 역사서인 샤라프나마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대의 프랑스인 여행가 장바티스트 타베르니에는 압달 칸이 가장 강력한 쿠르드 영주였고, 비틀리스는 오스만이나 사파비 모두에 속하지 않은 독립국이라 평하였다. 압달 칸은 1만 2천 기병을 거느렸고, 도서관에 여러 언어로 된 책을 소장하였다. 비틀리스 공국은 1849년 오스만군에게 마지막 아미르 셰레프 베이가 사로잡혀 코스탄티니예로 압송되는 것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일대에는 비틀리스 빌라예트가 설치되었고 파샤들이 파견되었다.
2.2. 근현대: 아르메니아인 학살
19세기 말의 비틀리스. 성탑은 건축 자제로 활용되며 점차 낮아졌다.
1814년 비틀리스의 인구는 1만 2천 명이었고, 반은 무슬림에 반은 아르메니아 기독교도였다. 1838년의 인구는 1만 5천이 되어 2/3은 쿠르드 무슬림, 1/3은 아르메니아 기독교도로 역전되었다. 1900년 경에도 비중은 같았지만 인구는 3만으로 늘어났다. 아르메니아 공동체는 5개의 남학교와 3개의 여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1915년 아르메니아 대학살 당시 제브데트 베이 파샤가 이끄는 쿠르드-튀르크인들은 1만 5천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