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01:27:19

학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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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학캬리 후국(샴보 왕조)
2.1.1. 학캬리 아시리아인 학살
2.2. 근현대
3. 코차니스

1. 개요

튀르키예어 Hakkâri[1]
쿠르드어 Colemêrg (졸레메르그)
아르메니아어 Քարբեր (카르베르)

터키 동남부의 도이자 동명의 도의 주도. 지즈레(시으르나크)에서 동쪽으로 120km, 에서 동남쪽으로 90km 떨어진 협곡에 위치한다. 인구는 6만 명으로, 학캬리도의 주도이다. 이라크, 이란과 모두 접경한 지역으로 각각 남쪽으로 35km, 동쪽으로 60km 가면 국경이 나온다. 지명은 13세기 이븐 할리칸의 기록에 따르면 중세 시기 일대에 정착한 쿠르드계 학캬르 부족에서 유래되었다. 본래 학캬리는 완호 남안에서 이라크 북부의 아메디에 이르는 산악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쿠르드 무슬림과 아시리아인 기독교도가 공존하던 땅이다.

14-19세기에는 쿠르드계 국가인 학캬리 후국(샴보 왕조)의 수도였다. 한때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하던 기독교도들은 1843-46년의 학살과 반세기 후 아시리아인 대학살(사이포)로 대부분 죽거나 이라크 / 이란으로 피신하였고, 현재는 0.8%만을 차지한다. 쿠르드 세력을 이용해 서방과 결탁한다고 여겨진 기독교도들을 숙청한 오스만 조정은 그 쓸모가 다하자 쿠르드 세력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1847년 학캬리에 대한 직접 지배를 확립하였다. 20세기에는 쿠르드 민족주의 세력과 터키 정부 간의 충돌이 이어졌고, 현재까지도 불안정한 지역으로 남아있다.

시가지는 이라크로 흘러드는 대자브강의 상류인 차탁수유강 서쪽 고지대에 자리한다. 시내에는 메이단 마드라사, 학캬리 칼레시 (성채) 등의 유적이 있다. 동북쪽 10km 지점 코차니스(Koçanis, 현재 지명은 코나크(Konak))에는 1600 ~ 1915년간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본부로써 대주교가 머물던 건물 유구가 남아있다. 해발 1720m의 고지대에 위치했지만 협곡 분지에 위치하여 연교차가 크다. 여름에는 35도에 육박하기도 하고 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 떨어진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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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캬리 성채(Hakkâri Kalesi)

1998년 학캬리에서는 13기의 석장승이 발견되었다. 이는 다뉴브강 하류 ~ 흑해 & 카스피해 연안 ~ 몽골 초원에 걸친 유라시아 스텝 지역의 문화 요소인 쿠르간 석상과 크게 유사하여 주목을 받았다. 고대의 학캬리 산지에는 후부쉬키아 왕국이 있었다. 북쪽의 우라르투 왕국과 남쪽의 아시리아 간에 시달리던 후부쉬키아는 결국 후자에 복속하였다. 중세 시기 일대는 쿠르드인들이 유입되었고, 그중 다수이던 학캬르 부족에서 학캬리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13세기 학캬리 쿠르드인들은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군인으로 활약하였다.

2.1. 학캬리 후국(샴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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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01년 이브라힘 베이가 세운 메이단 메드레시

14세기 말엽 티무르의 침공 이후 모술 일대의 아시리아인 기독교도들이 학캬리 산지로 피신하였고, 늘어난 인구를 바탕으로 아르메니아 왕실의 방계인 아르추루니가의 후예라 전해지는 쿠르드인 귀족 이젯딘(요자단) 쉬르가 1384년경 학캬리를 중심으로 한 토후국을 세웠다. 쉬르는 티무르 왕조 흑양 왕조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하며 지배를 이어갔지만 1423년 그가 사망하고 얼마 후 흑양조의 군주 카라 이스칸데르는 쉬르의 자손들 대부분을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이로써 일시 멸망했던 학캬리 후국은 흑양 조가 멸망한 15세기 후반, 이집트에 망명해 있던 쉬르의 후손 아사드 앗딘 자린을 학캬리 기독교도들이 초청하며 복구되었다. 왕국 재건은 토요일(현지어로 샴보)에 이루어졌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샴보 왕조라 명명되었다.

비록 자린의 아들이자 후계자 이젯딘 쉬르 2세가 1491년 백양 왕조의 술탄 야쿱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왕조는 계속 이어졌다. 쉬르 2세의 아들 자히드 베그부터는 오스만 제국 사파비 제국의 경쟁 속에서 유리한 쪽에 붙으며 자치를 누렸다. 다만 자히드 베그 사후 친오스만과 친사파비 세력 간의 내전이 터지며 백년간 13명의 에미르가 등극하는 혼란기를 맞았다. 한편 19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이는 메흐메트 알리 파샤의 시리아 정복과 아나톨리아 진격으로 가시화되었다. 학캬리와 보흐탄 등 쿠르드 후국들은 후자의 반란에 동참하여 사실상 자립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 후 심화되던 근동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영국과 러시아는 아시리아 기독교도들을 지원하며 동맹으로 삼으려 했다. 따라서 19세기 들어 학캬리 일대에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줄곧 파견되었고, 서구식 학교가 세워졌다.

2.1.1. 학캬리 아시리아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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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촬영된 코차니스 마르 샬리타 성당

동시에 샴보 왕가는 재차 누룰라 베그와 술레이만 베그 간에 내전을 벌였는데, 아시리아인들도 반으로 나뉘어 가담하였다. 다만 쿠드샤니스 대주교 마르 쉬눔을 비롯한 주류가 후자의 편에 섰는데, 승리자는 전자였고 누룰라는 반대편을 지지했던 아시리아 마을들을 습격하고 학살을 자행하였다(1839-41년). 이로써 5세기 이상 공존하던 쿠르드인과 아시리아인 간의 갈등이 깊어졌다. 그리고 1842년 학캬리의 누룰라, 보흐탄의 바드르 칸, 아메디의 이스마엘 파샤는 쿠르드 연합을 맺어 모술 총독 메흐메트 파샤와 대립하였다. 쿠르드 연합은 아시리아 인들에게 동참을 요구했으나 메흐메트 파샤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은 대주교는 중립을 선언하였다. 쿠르드 연합과 오스만군과의 전투는 후자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그 사이에 영국인 선교사 아사헬 그랜트는 아쉬타 마을에 큰 선교 학교를 세웠다. 그해 말엽 쿠르드 연합은 패전의 책임을 아시리아인들에게 돌렸고, 양측의 갈등과 불신은 커져만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랜트가 세운 선교 학교가 쿠르드인에 대한 요새로 활용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누룰라는 에르주룸 총독에 항의하였다. 동시에 모술 총독 역시 아시리아 인들과 서방의 결탁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1843년 초엽 누룰라는 대주교에게 회동을 청하였다. 대주교는 영국인 선교사 조지 배드거와의 만남을 핑계로 거절했는데, 후자가 떠나자마자 누룰라는 바드르 칸 및 이스마엘 파샤와 재차 연합하였다. 그해 7월 조정과 모술 총독의 암묵적인 승인하에 바드르 칸이 이끄는 쿠르드 연합군은 학캬리의 아시리아 마을들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노예화하였다. 각지의 아시리아 인들은 사로잡힌 동포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지만 대주교의 친족 등 150여 명 정도가 풀려나는 것에 그쳤다.[2] 인근 이란의 쿠르드인들도 학살과 약탈에 동참하며 쿠르드 연합군은 10만에 달하였다. 학캬리 지역 아시리아인 전체 인구는 7만을 상회하는 숫자였다.

사로잡힌 아시리아인들은 숨긴 재산을 실토하도록 고문을 당한 후 노예로 팔리거나 채찍을 맞으며 약탈된 자신들의 물건을 짊어지고 먼 길을 가다가 탈진해 사망하는 운명을 맞았다. 일부는 쿠르드 민병대에 의해 '재미 삼아' 살해되기도 하였다. 산길을 따라 모술 방면으로 도주하려던 아시리아인들도 호전적인 베르와르 쿠르드 부족의 매복으로 살해되었다. 영국 측 통계에 따르면 당시 살해된 아시리아인은 1만에 달했다고 한다. 그후 1846년 바드르 칸은 재차 학살에 나섰고, 이번에는 유럽 국가들이 개입하여 오스만 조정에게 조치를 취하도록 압박하였다. 기존에 학살을 묵인 혹은 부추겼던 오스만 조정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동시에 이 기회를 틈타 지나치게 성장한 쿠르드 세력을 일소하고자 하여 군대를 파병하였고, 1847년 바드르 칸과 누룰라 모두 체포되어 유배되었다. 이로써 학캬리와 보흐탄 후국이 모두 멸망하고 일대는 완 빌라예트 산하 학캬리 산작에 펀성되었다.

2.2. 근현대

결과적으로 쿠르드 세력의 기독교도 학살은 수백 년간 이어지던 두 세력의 협력을 파탄 낸 것은 물론, 쿠르드와 아시리아인의 자치권이 모두 박탈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880년 학캬리 산작은 빌라예트로 승격되었으나 8년 후 다시 환원되었다. 당시 인구는 약 6천 명으로, 기독교도 비율은 18%였다. 그나마 남아있던 기독교도들은 1차 대전기인 1915년 아시리아인 대학살로 학살되거나 이라크 등지로 피신하며 거의 사라졌다. 1920년 학캬리에서는 총알 생산에 필요한 납 광산이 개발되었다. 한편 학살 후 남아있던 기독교도들도 무슬림인 척 살아가며 통계상으로는 0.1%에 불과한 유대인만이 유일한 소수 종교 공동체였는데, 그들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그곳으로 떠났다. 기독교 공동체는 1965년부터 다시 집계되어 1% 전후를 유지하고 있다.

튀크키예 공화국 수립 후 쿠르드 지역에는 '튀르크화' 정책이 실시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쿠르드인들은 무장 투쟁에 나서기도 하였고, 가장 외진 데다가 산세가 험한 학캬리 지역은 튀크키예 정부에 있어 다루기 까다로웠기에 종종 군사 작전이 있었다. 따라서 1965년까지 외국인의 방문이 금지되었고, 1987년부터 2002년까지는 계엄 지구였다. 1950년 튀크키예어를 제1 언어로 여기던 주민 비율은 단 9%에 불과했으나 이 수치는 1960년 19%로 올랐고, 현재는 적어도 도시 거주민은 튀크키예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계엄 해제 후에도 긴장과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2010년대에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자자인 민선 도지사 딜레크 하티포을루(Dilek Hatipoğlu)[3] PKK에 대한 지원 혐의로 해임되고 말라티아출신의 쿠르드계 이드리스 아크브이으크(İdris Akbıyık) 관선 도지사가 권한을 넘겨받았다.

3. 코차니스

파일:터키 하카리 4.jpg 파일:하카리 터키 8.jpg

코차니스(코나크)의 마르 샬리타 성당 유적

16-17세기 아시리아 교회( 네스토리우스파)는 모술 부근 알코쉬에 기반한 엘리야 분파, 디야르바크르에 기반한 요세프 분파, 시르트 우르미아에 이어 코차니스에서 혈연 세습을 확립한 솀온 분파로 나뉘었다가 1780년 전자에서 칼데아 가톨릭이 떨어져 나간 후 1804년 후자를 중심으로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통일되었다. 그렇게 한세기 이상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통합된 중심지로 남았던 코차니스는 1915년 아시리아인 대학살 후 버려졌고, 대주교청은 살마스를 거쳐 모술로 이전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키프로스, 시카고 등지를 전전하다 2015년 원수 쿠르드인들의 도시 아르빌로 돌아와 현재에 이른다.

[1] /hak.ca:ri/로 실제 발음은 '학캬리'에 더 가깝다. 터키어 발음사전 [2] 하지만 대주교의 모친은 끝내 탈출하지 못하고 살해되었다. [3] 당시 BDP 소속으로 무슈 출신의 자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