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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중심부의 풍경. 우측의 사원은 쉴레이만 베이 모스크이다
시가지 북쪽의 트랄레스 유적
1. 개요
Aydın튀르키예 서남부의 도시 및 동명의 도. 영어식 표기에 끌려 아이딘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는데 엄밀히 말해 틀린 발음이다. 튀르키예어로 아이든이다. 이즈미르에서 동남쪽으로 60km, 데니즐리에서 서쪽으로 80km 떨어진 협곡 분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20만명으로, 아이든 도의 주도이다. 멘데레스 (메안드로스) 협곡의 중심 도시로, 일대의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곡물로 유명하다. 고대에는 트랄레스, 안티오키아, 셀레우키아, 카이사레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고 중세 튀르크인들은 '예쁜 성채'란 뜻인 귀젤히사르(Güzelhisar)라 명명했다가 14세기 일대를 지배했던 아이든 왕조에서 유래된 아이든으로 정착되었다. 다만 아이든 국의 수도는 산맥 너머의 현 이즈미르 도에 속하는 셀축이었다. 오스만 제국 들어 쇠퇴했던 도시는 1827년 아이든 산작이 신설되고 19세기 중반 목화 수출과 튀르키예의 첫 철도 (이즈미르-아이든 노선)의 건설로 부흥하였다.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1919-22년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크게 파괴되어 시내에는 고고 박물관과 지한자데 모스크 외에 볼거리가 별로 없고, 도시 북쪽 언덕에 트랄레스(Tralleis) 유적이 남아있다. 다만 인근 해안 방면에는 저명한 고대 유적들이 즐비하다. 서남쪽 40km 전후 거리의 멘데레스 강 하류 지점에 밀레투스, 미우스, 디디마, 프리에네가 있고 이즈미르 도에 속하긴 했지만 에페소스 역시 이즈미르 도심에서보다 더 가깝다. 이러한 고대 유적들 외에 서쪽 40km의 쿠샤다스 역시 이름난 휴양지이다. 따라서 이들을 둘러본 여행자들이 파묵칼레 등 내륙으로 향하거나 그 반대의 이유로 경유하는 거점 도시로, 동남쪽 외곽에 아이든 츨드르 공항(Aydın Çıldır Havalimanı)이 자리한다. 그외에 시가지 동쪽에는 경공업 위주의 아스팀 공단, 동북쪽에는 아드난 멘데레스 대학교[1]가 있다.
2. 역사
트랄레스 유적에서 출토된 여인상과 유적지 전경 |
2.1. 고대
역사가 스트라본에 의하면 트랄레스는 아르고스 출신 이주민과 트라키아의 트랄리아 부족이 정착하여 세워진 도시라 한다.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는 안테아 (Ανθέα) 혹은 에우안티아 (Ευανθία)로 기록되었다. 리디아 왕국에 이어 아케메네스 제국에 속하던 도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자 스파르타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기원전 334년 트랄레스는 그라니코스 전투 직후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항복하여 약탈을 피하였다. 대왕의 사후 기원전 313년부터 일대는 안티고노스 1세의 수중에 있었으나 기원전 301년 셀레우코스 왕조령이 되었고, 안티오키아라 명명되었가 다시 메안데르의 셀레우키아 (Σελεύκεια επί του Μαιάνδρου, 셀레우키아 에피 투 메안드루)으로 불렸다.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 이후 일대는 페르가몬 왕국령이 되었다.기원전 133년 페르가몬 국왕 아탈로스 3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며 왕국을 로마에 양도하자 그에 반발한 아리스토니코스가 스스로 선왕의 숨겨진 동생으로써 에우메네스 3세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현지 주민들은 그를 지지하였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사후 혼란을 틈타 반군은 기원전 130년 로마 장수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2]를 전사시키며 기세를 올렸으나, 이듬해 로마 집정관 마르쿠스 페르페르나에 패하여 진압되었다. 비록 로마는 도시의 화폐 주조권을 빼았았지만 여전히 일대의 주요 도시로 유지시켰고, 라틴식으로 트랄레스 (Tralles)라 불리게 되었다. 기원전 1세기 트랄레스는 연이은 수난을 겪었다.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 6세의 침공으로 시내의 로마인 거주민들이 학살당하였다.
기원전 26년에는 지진으로 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로마 제국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재정 지원으로 복구되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주민들은 도시의 공식 명칭을 카이사레아로 바꾸었지만, 여전히 트랄레스로 통용되었다. 일련의 수난과 함께 로마령 아시아 속주의 수도는 북쪽의 에페소스로 정해졌다. 한편 기원전후 무렵 트랄레스의 유명인은 현지의 부자 피토도로스였다.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장녀 안토니아와 결혼하였고, 둘 사이의 딸 피토도리다는 결혼을 통해 여러 지역[3]의 왕비 혹은 여왕을 지냈다. 한편 서기 1-2세기경 트랄레스에서 제작된 세이킬로스 묘비 기둥[4]에는 그리스식 기보법이 적용된 장송곡 (비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악보로 여겨진다.
2.2. 중세
동로마 제국기에도 꾸준히 보수되어 비잔팅 양식 건축 기법이 남아있는 트랄레스의 수도교 유적 |
서기 100년경 안티오키아 대주교 성 이냐시오(이그나티우스)가 트랄레스 주교 폴리비우스를 언급할 정도로 일대는 일찍부터 기독교화되었다. 5세기 들어 메안데르 강의 퇴적으로 에페소스가 쇠퇴하자 트랄레스는 일대의 중심 도시로 부상하였다. 6세기에는 두 유명인이 탄생하였는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의뢰로 성 소피아 대성당을 설계한 건축가 안테미우스와 당대 가장 유명한 의사였던 알렉산드로스이다. 다만 7세기 들어 동로마 제국이 침체되며 트랄레스 (Tralleis 혹은 그리스식으로 트랄리스 Τράλλεις) 역시 쇠퇴하였고, 11세기 말엽 만지케르트 전투 후 셀주크 제국이 점령하였다. 비록 얼마 안가 도릴라이온 전투와 함께 알렉시오스 1세가 수복하였으나, 마그네시아나 에페소스와 달리 트랄레스는 1230년 주교 요안니스를 마지막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유적으로 변해있던 도시는 1278년 메안데르 협곡의 재정착을 추진하던 안드로니코스 2세에 의해 안드로니코폴리스 혹은 팔라이올로고폴리스로 명명되었고, 재건을 맡은 대장군 미하일 타르하니오티스(Μιχαήλ Ταρχανιώτης)는 성벽을 복원한 후 인근 지역에서 3만 6천의 그리스 / 쿠만인 주민을 정착시켜 튀르크 세력에 대한 보루로 삼았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1284년 튀르크계 멘테셰 후국이 도시를 포위하였고, 물자가 부족한 상태에서 물길까지 끊기자 결국 점령되었다. 이후 도시는 대대적으로 파괴되었으며, 일부 주민들은 학살당하고 2만여명은 노예가 되어 팔렸다. 1310년대에는 룸 셀주크의 멸망 후 오우즈 튀르크인들이 세운 아이든 왕조가 일대를 장악하였고, 튀르크인들은 도시를 '예쁜 성'이란 의미인 귀젤히사르라 명명하였다.
2.3. 근대
1756년 오스만 바로크 풍으로 지어진 지한자데 모스크
1425년 아이든 국이 오스만 제국에게 병합된 후 일대는 아나돌루 에얄레트(Eyalet-i Anadolu)에 속하였고, 지명은 점차 귀젤히사르에서 아이든으로 바뀌었다. 아이든은 개화된, 계몽된이란 뜻으로, 현대 터키에서도 선호되는 남자 이름이다. 다만 귀젤히사르 역시 한동안 병기되었고,18세기 말까지도 아이든산 목화가 서양권에서 (들리는 대로) 조셀라사르 혹은 조세프 라사트 종 목화라 표기될 정도로 남아있었다. 1827년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아이든 에얄레트(Eyalet-i Aydın)가 설치되었고, 아이든은 그 치소가 되었다. 다만 1829-30년 동쪽 20km 지점 아트차의 호족 메흐메트 에페의 반란 후 1840년대에 치소는 이즈미르로 이전되었다.
19세기 후반 아이든 철도역
한편 19세기 중반 미국의 남북 전쟁으로 국제적인 목화 품귀 현상이 벌어지자 무화과와 올리브 기름 외에 멘데레스 협곡의 목화가 유럽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비록 1864년 설치된 아이든 빌라예트의 주도는 여전히 이즈미르였지만, 이즈미르 항에서 거래되는 목화의 상당수는 아이든에서 운송된 것이었다. 목화의 운송을 위해 이즈미르와 아이든을 잇는 철도 건설이 추진되었고, 영국 자본인 오스만 철도 회사의 투자로 1856년 9월 건설이 시작되어 1866년 7월에 완공되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2번째, 튀르키예 영내의 첫 철도 노선이었고 이후 데니즐리를 거쳐 1912년 에이르디르까지 연장되었다.
2.4. 근현대
1883년 기찻길 옆에서 발견된 세이킬로스 비석 | 요뤼크 알리 에페의 저항군 |
1900년경 아이든에는 1만 2천의 튀르크, 8천의 그리스계 주민들이 거주하였다. 튀르키예 독립 전쟁기인 1919년 5월 27일, 그리스군은 본래 이탈리아 구역으로 지정되었던 아이든을 점령하였다. 그리스 점령군의 횡포에 반발하던 튀르크계 주민들은 전통적인 에페 (민병대장) 요뤼크 알리(Yörük Ali)의 주도 하에 저항군을 꾸렸고, 6월 27일 그리스 군 순찰대를 공격하며 무력 투쟁에 나섰다. 다음날 저항군은 시내에 진입하여 그리스 군을 축출하였다. 다만 얼마후 그리스 군은 대포와 함께 돌아와 시내의 무슬림 구역에 방화하였고, 도망치는 튀르크계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예니파자르의 요뤼크 알리 에페 박물관
29일 그리스 군이 철수하자 다음날 저항군이 재차 도시를 장악하고 이번에는 그리스 구역에 방화한 후 주민들을 살해하였다. 7월 4일 그리스 군은 재차 아이든을 점령하였고, 튀르크계 주민들은 데니즐리 방면 혹은 이탈리아 지배령으로 피신한 후 종전 뒤에야 돌아왔다. 1922년 9월 튀르키예군이 아이든을 수복할 때까지 그리스계 주민 2천명과 튀르크계 주민 1천 5백이 희생되었고, 도시는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남은 그리스인들은 1923년 튀르키예-그리스 인구 교환 시에 도시를 떠났고, 그리스의 튀르크인들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현재 주민들의 절대 다수는 튀르크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