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9344><colcolor=#fff> 나폴리 공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디 사보이아 Vittorio Emanuele, Principe di Napol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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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7년 2월 12일 |
이탈리아 왕국 나폴리 | |
사망 | 2024년 2월 3일 (향년 86세) |
스위스 제네바 | |
가문 | 사보이아 가문 |
이름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알베르토 카를로 테오도로 움베르토 보니파초 아메데오 다미아노 베르나르디노 젠나로 마리아 디 사보이아 (Vittorio Emanuele Alberto Carlo Teodoro Umberto Bonifacio Amedeo Damiano Bernardino Gennaro Maria di Savoia) |
배우자 | 마리나 도리아 (1971년 결혼) |
자녀 |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
아버지 | 움베르토 2세 |
어머니 | 벨기에의 마리조제 공주 |
형제 | 마리아 피아, 마리아 가브리엘라, 마리아 베아트리체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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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이탈리아의 왕위 요구자이다.만약 아버지 대에 이탈리아 왕국이 공화제로 전환되지 않고 계속 왕국으로 유지되었다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4세(Vittorio Emanuele IV)가 되었을 것이다.[1]
2. 생애
1937년 2월 12일 이탈리아 왕국 나폴리에서 피에몬테 공 움베르토와 벨기에의 마리조제 공주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이자 둘째로 태어났다. 조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유일한 친손자였기에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그러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등용한 베니토 무솔리니가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이탈리아는 전쟁 피해로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했고, 1943년 국왕이 뒤늦게 무솔리니를 자르고 나치 독일에 지배당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 된 이탈리아 북부를 버리고 연합국이 점령하여 안전한 남쪽으로 피신하면서 1940년 이전까지는 극좌파를 제외하고 대체로 인기와 평판이 아주 좋았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일가와 사보이아 왕실의 평판은 극도로 나빠졌고, 1944년 왕가가 로마로 귀환했을 때는 로마 시민들은 환영보다는 저주와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1945년 무솔리니가 총살되고 좌파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정치권은 무솔리니 다음으로 전쟁 책임이 있던 왕실을 폐지하려 국민 투표를 벌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그나마 자신보다 인기가 있던 당시 왕세자였던 움베르토 2세에게 양위해서라도 군주제를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54 대 46으로 이탈리아 군주제는 폐지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역시 1946년 5월 아버지가 움베르토 2세로 즉위함에 따라 왕세자가 되었지만 한 달 만에 왕세자 자리를 뺏기고 가족들과 함께 추방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9살이었다.
2.1. 망명 이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조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먼저 망명해 있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떠났고, 이듬해인 1947년 조부가 죽자 그 이후에는 주로 스위스에 살았다.1971년 10월 7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2살 연상의 스위스인 수상스키 선수 마리나 도리아(Marina Doria, 1935년생)와 팔라비 왕조 이란 테헤란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1972년 6월 22일 외아들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태어났다.
2.2. 귀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9세 때 이탈리아에서 추방된 이후 계속 이탈리아 귀국을 원하였고, 추방된 지 53년이나 지난 1999년에서야 겨우 이탈리아 정치권에 로비를 해서 2002년 10월 드디어 입국 금지가 해제되었고, 2002년 12월에 56년만에 처음으로 이탈리아 땅을 다시 밟았다. 이 때 그의 나이 65살이었다.그러나 2002년 당시에는 입국 금지 해제와 시민권 회복만 있었고, 그동안의 생활은 거의 스위스에서 해왔기에 실질적인 이탈리아 정착과 거주는 2008년에야 이루어졌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가 이탈리아 정부와 본격적인 협상을 시도한 1990년대~2000년대 초반에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군주제가 폐지된 유럽 국가들이 전반적으로 냉전 종식 이후 친 군주제 여론이 강해지던 시기였고,[2] 사보이아 왕실을 혐오했던 이탈리아 공화국 건국 1세대들이 이 시기에는 거의 다 죽거나 은퇴한 지 오래여서 이탈리아 정부 내에서 전반적으로 사보이아 왕실 혐오가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상술한 귀국에 성공한 다른 나라의 옛 왕족들과 달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사보이아 가문은 정치적 영향력[3]은 없는데 그 이유는 후술.
2.3. 사망
2024년 2월 3일 현지시각 오전 7시 5분 스위스 제네바에서 사망했다. 향년 86세로, 생일 9일 전이었다. 장례식은 2월 10일에 토리노 대성당[4]에서 거행되었다. 유해는 7월 1일, 사보이아 가문의 묘당이었던 토리노의 수페르가 성당에 안장되었다. 모나코의 알베르 2세, 스페인의 소피아 왕대비, 그리고 계승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아이모네 부부, 옛 불가리아 왕국 왕실의 보리스 왕자(고종사촌 시메온 2세의 장손) 등이 참석했으며 외사촌인 벨기에 왕실에서는 불참했다.3. 논란
후술할 논란들 때문에 유럽의 현존하는 모든 왕실들과 군주제가 폐지된 모든 구 왕실을 포함해서 가장 평판이 나쁘다.[5] 유럽에서 군주제가 폐지된 다른 나라들의 경우는 제1차 세계 대전[6], 제2차 세계 대전[7] 등등 해당 국가가 감당하기엔 스케일이 너무 큰 세계대전 때문이고 프랑스의 경우는 잦은 혁명으로 인한 지지세력의 분열, 그리스의 경우는 군부 쿠데타와 잦은 군주제 폐지의 결과였을 뿐 이럴듯한 전범 행위는 저지르지 않았고 굵직한 논란도 일어나지는 않았는데 이탈리아 사보이아 가문은 전범 행위가 의심되는 행위를 하여서 폐지되었고 그 이후로도 잦은 논란을 일으켜서[8] 유럽의 구 왕가들과 현 왕가들 모두 포함해서 가장 평판이 나쁘다.이탈리아 내 좌파 세력[9]은 말할 것도 없고 중도우파나 우익은 물론, 극우 세력에게도 전혀 지지를 못 받고 있다.
그야말로, 이탈리아에서 극좌부터 극우까지 거의 모든 정치세력 모두에게서 사보이아 가문에 대해 부정적이다.
3.1. 1978년 민간인 살해 의혹
41세이던 1978년 8월 18일, 코르시카 인근 카발로 섬에서 여행을 하고 있던 중 자가용 요트에서 고무보트가 없어졌다며 화가 나서 근처 보트에서 잠을 자고 있던 19세 독일인 청년 디르크 해머(Dirk Hamer, 1959 ~ 1978)를 총으로 쏴 죽였다는 의혹을 받아서 체포되었는데 프랑스 중죄법원에서 고작 집행유예 6개월 판결만 받았다.당시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가 해머를 죽일 목적으로 정확히 조준해서 죽인 게 아니라 홧김에 아무데나 쐈는데 실수로 디르크 해머에게 조준되어 의도치 않게 실수로 죽였다고 주장해서 그런 판결을 받은 것인데, 2006년 다른 죄로 일시적으로 감옥에 있을 때 범죄를 자백하는 듯한 발언이 녹취, 녹화되었다. CCTV 분석 결과 프랑스 법정을 비웃고 자신이 처벌을 피했다고 자백하는 듯한 장면이 포착되어서 엄청난 논란이 되었고 이탈리아 국내외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게다가 보로메오 백작가[10]의 영애로 인플루언서이자 언론인이기도 한 베아트리체 보로메오[11]가 이 사건을 보도하며 비판하자, 허위사실이자 명예훼손이라며 베아트리체를 고소했다가 2015년 패소하면서 전 유럽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베아트리체 보로메오는 이 사건으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물론 그 아들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도 SNS로 설전을 주고받았다.
베아트리체는 기존의 취재 자료와 당사자들의 인터뷰를 통합하여 다큐멘터리 <왕이 될 수 없는 왕자>를 제작하였으며, 이는 2023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
3.2. 말바꾸기 및 가보 반환 소송
2002년 10월 입국금지 해제 당시 이탈리아 정부와의 합의에 따라 이탈리아 귀국 이후로는 왕실 복원 주장을 하지 않기로 하고 이탈리아 정부가 압류한 왕실 재산에 대해 어떠한 요구도 하지 말라는 조건이 있었다. 그런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귀국에 성공하자 말을 바꾸고 이탈리아 왕실 복원을 주장하고는 이탈리아 정부에 2007년 정부가 압류한 왕가 재산을 도로 내놓으라는 소송을 하다가 패소당했다. 2022년에도 가보를 내놓으라고 소송을 진행 중이다.3.3. 마약 중독 의혹 및 성매매 알선 논란
2003년 마약 중독 의혹이 있었고 2006년에는 마피아 관련 성매매 알선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풀려났다.3.4. 무솔리니 옹호 발언
이탈리아 파시즘의 상징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한 비판에 "무솔리니의 정책이 뭐가 문제인가?" 라는 발언으로 빈축을 샀다.결과적으로 할아버지가 총리로 임명한 무솔리니 때문에 왕실이 무너지고 본인 역시 스위스를 비롯한 외국 이곳저곳을 떠돌며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속담이 잘 어울린다.
3.5. 사보이아아오스타 분가와의 갈등
비토리오 에마누엘레가 수장으로 있는 사보이아 본가는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국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장남 움베르토 1세의 후손들이고, 그 분가인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차남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의 후손들이다.1971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결혼한 마리나 도리아가 평민이기 때문에 1983년 이탈리아 마지막 국왕이자 사보이아 가문의 수장인 움베르토 2세가 사망했을 당시 방계의 친척인 사보이아-아오스타 공가 사람들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가 평민과 결혼했으므로 명목상의 가문 수장(이자 이탈리아 왕위 요구자) 계승권을 귀천상혼으로 자동으로 상실되었다고 주장했고 움베르토 2세 사망 이후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그 아들인 에마누엘 필리베르토를 건너뛰고 바로 다음 후순위 후계자인 사보이아-아오스타 공가의 수장 아메데오에게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았고[12] 사보이아 본가[13]와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갈등이 극화되었다.
결국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격화된 사보이아 본가와 사보이아-아오스타 분가의 갈등은 2004년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들이자 당시 아스투리아스 공이었던 펠리페 6세의 결혼식장에서 양가 수장들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아메데오가 직접 몸싸움을 벌이면서 극한을 맞았고[14], 아들의 결혼식에서 몸싸움이 일어난 것에 분노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다시는 스페인 왕실 행사에 사보이아 가문을 초청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을 정도였다. 당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67세였고 아메데오는 61세였다. 한때는 사이좋게 웃음지었던 사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비록 군주제가 이미 폐지된 지 오래이지만 사보이아 본가와 사보이아-아오스타 분가가 왕가의 수장 자리를 놓고 이토록 격렬하게 차지하려는 이유는 사보이아 왕가가 사보이아 백국이던 시절부터 거의 천년 가까이 이탈리아의 군주로 있으면서 소유한 수많은 문화재와 문화유산, 예술품, 소유했던 궁전, 구성원들이 사후 매장된 수도원이나 성당 등이 어마어마한 관광 수익을 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사보이아 가문의 조상들이 안치된 프랑스 사부아 생피에르드퀴르티유의 오트콩브 수도원만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아 존재조차 모르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연간 15만여 명이 방문했다. 오트콩브 수도원 같이 대중적이지 않은 장소만 해도 이 정도인데 토리노 왕궁과 같은 다른 명소들은 말할 것도 없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를 포함한 본가는 카를로 알베르토 때부터 장남에 장남으로 대를 이어온 현 수장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그 외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진짜 정통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사보이아-아오스타 분가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가 1780년 제정한 왕위 계승법에 따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가 평민과의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상실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본가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때 베니토 무솔리니를 총리로 등용한 것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전쟁범죄 등등에 대해 관여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고, 그 손자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민간인 살해 의혹과 성매매 알선, 무솔리니 옹호 발언, 이탈리아 정부를 향한 재산 반환 소송 등을 하고 있고 그 외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역시 마약중독자에 증조부 옹호 발언, 아버지의 민간인 살해 의혹 옹호 발언 등으로 이탈리아 국민에게 강한 비호감을 산 반면, 사보이아-아오스타 분가는 이렇다 할 논란거리를 불러일으킨 적도 없고 수장인 아메데오도 이탈리아 왕정 폐지 이후로도 이탈리아에서 추방되지 않고 이탈리아에서 해군 복무를 성실히 했다는 평도 있어서 사보이아 본가보다는 사보이아-아오스타 분가의 평판이 더 좋은 편이다.[15]
2020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외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손녀 두 명만 있고 손자를 낳지 못해서 적대관계인 사보이아-아오스타 분가가 본인과 외아들 사후 명목상의 왕위 요구자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도록 가문 법을 개정해 남계만 계승할 수 있던 기존 계승권을 폐기하고 여계도 계승할 수 있도록 하되 계승권자는 본인의 자손으로 제한하도록 법을 개정했다. 아오스타 분가는 크게 반발하고 있지만 두 손녀가 자녀를 낳지 않고 죽으면 아오스타 분가의 남계가 단절되지 않는 이상 아오스타 분가가 유일한 왕위요구자가 된다.
4.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Emanuele Filiberto) |
1972년 6월 22일 |
클로틸데 쿠로 슬하 2녀 |
5. 여담
마찬가지로 군주제가 붕괴된 프랑스의 앙리 5세로 불리는 샹보르 백작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둘 다 할아버지의 실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었고 그로 인해 국외 이곳저곳을 떠도는 힘겨운 삶을 살았으며 나중에나마 동정여론과 재평가 여론이 조명되어, 귀국이나 복고 가능성이 어느 정도 생겼음에도 처신을 잘해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먹지 못하고 실책을 저질러 그나마 있던 복고 여론조차 깎아먹었다는 점이 빼닮았다.
[1]
실제로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4세라고 치면 이 인물로 리다이렉트된다.
[2]
이 때 소련에 총살된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정식 장례식이 치러지고
러시아 정교회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루마니아 왕국
미하이 1세도 이 때 귀국하였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고종사촌인
불가리아 왕국
시메온 2세도 이 때 귀국해 정치활동을 시작했고,
알바니아 왕국
레카 1세도 이 시기에 귀국했다.
[3]
비슷한 시기에 군주제가 폐지되어 국외로 망명했다가 냉전 종식으로 귀국에 성공한 알바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옛 왕가들은 왕실 복원 얘기가 과반을 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여론의 한 축을 크게 형성하고 있으며 정치적 영향력도 상당하다. 사실 이도 유고슬라비아 내전 등으로 공화정 치하의 치세가 너무 개판이었기에 상대적으로 나았던 구왕실 시절에 대해 비교적으로나마 재평가를 한 것에 가깝다.
[4]
사보이아 가문의 가보였던
토리노의 수의를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이곳의 수의 예배당에는 조상인
아메데오 8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카리냐노 공 톰마소 프란체스코(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의 시조이자
사부아 공자 외젠의 할아버지),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가 묻혀있다.
[5]
다른 구왕가들과 비교하자면, 이탈리아 반도의 왕공가 중에서 그나마 논란이 있는
보르보네파르마 공가의 경우는
카를리스타 왕위 요구 관련 문제로
스페인 왕실과 불편한 관계에 있지만 그나마도 지금은 사실상 포기한 상태에다 품행이나 과거사 관련 논란은 없고 자선 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중이고,
하노버 왕가는 이혼이나 별거 등의 품행 관련 문제로 여러 번 구설수에 올랐지만 심각한 범죄에 연루된 것은 아니고, 옛
독일 제국 황실인
호엔촐레른 가문은 마지막 황태자였던 빌헬름 황태자와 몇몇 황족들의 친 나치 의혹 정도만 있었고 품행이나 과거사 문제는 특별히 없는 편이고 그나마 재산권 분쟁에 있어서도 여론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7]
불가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알바니아 왕국.
[8]
왕정 폐지 당시 군주제 유지를 지지하는 여론도 46%에 달했음을 고려하면, 왕정 폐지 후 행보에 의해 구 왕가에 우호적인 여론이 조성될 여지는 충분히 남아 있었다. 다만 이조차도 전쟁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남부의 투표와 로마에서 교황 비오 12세의 지지를 얻어 겨우 얻어낸 결과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9]
민주당,
이탈리아 좌파,
행동,
생동하는 이탈리아.
[10]
보로메오 가문은
밀라노 출신의 유서 깊은 백작 가문으로 이 가문 출신의 유명인으로
가톨릭
성인
카를로 보로메오가 있다.
[11]
#베아트리체의 어머니인 파올라 마르초토는 디르크 하머의 누나인 비르기트 하머와 친구였다. 이 때문에 베아트리체는 피해자인 하머 일가와 가까운 관련자이기도 하다.
[12]
여담으로 어머니 마리조제 왕비는 생전에 아들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계승을 지지했다.
[13]
사실 현 사보이아 본가도 본래는 사보이아-카리냐노 분가였다. 1831년
카를로 펠리체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본가의 대가 끊기자 사보이아-카리냐노 공작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5대조
카를로 알베르토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위를 이어받으면서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이 본가가 되었다.
[14]
당시 가디언 기사
[15]
다만 이 말은 어디까지나 본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다는 소리이지, 사보이아 가문 전체적으로는 이탈리아에서 평이 좋지 못하다. 아오스타 분가의
아이모네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함께 남부로 도망갔다가
괘씸죄로 추방당해
아르헨티나에서 사망했으니
도긴개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