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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리에천

파일:쑨리에천.jpg
孙烈臣
1872.6.23~1924.4.25

1. 개요2. 초기 활동3. 장쭤린의 오른팔

1. 개요

쑨리에천(孙烈臣, 손열신)은 봉천군벌의 군사 지도자이다.

2. 초기 활동

쑨리에천은 1872년(동치 11년) 6월 23일 랴오닝성 쑨쟈좡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농부와 말 상인으로 살았다. 1897년(광서 23년), 그는 청군에 입대한다. 1902년(광서 28년), 그는 중로(中路)의 순방통령(巡防統領)인 주칭란(朱慶瀾주경란)의 수하가 되었고, 그의 용병술로 인해 주칭란에게 중용되었다. 1906년(광서 32년), 쑨리에천은 좌로순방통령(左路巡防統領)인 장쭤린에게로 돌아서 마적 토벌에 참여했다. 1910년(선통 2년), 그는 동삼성강무당 기병과에 입학했고, 다음 해 최우등으로 졸업한다.

1912년(민국 원년) 9월 민국이 수립되자 장쭤린의 육군 제27사단 하의 제54여단장으로 복무한다. 12월, 그는 소장으로 진급한다. 1915년 8월 (민국 4년), 그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1916년 4월, 장쭤린은 돤즈구이를 동3성군무에서 사직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장쭤린은 봉천장군으로 취임했고, 쑨리에천은 여기에 가담했다.

3. 장쭤린의 오른팔

1919년 7월 (민국 8년), 장쭤린의 지시로, 쑨리에천은 흑룡강 독군으로 임명된다. 그때, 1917년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중국과 러시아에 매우 불안정한 상황을 만들어내었다. 쑨리에천은 국경에서 작전을 벌이는 적군과 백군이 중국 영토로 돌아오는 것을 막고, 흑룡강성 내의 아편 거래를 금지시켰다.

1921년 3월 (민국 10년), 쑨리에천은 기린성 독군과 동3성철도군총사령으로 임명된다. 1922년 4월, 제1차 직봉전쟁이 발발했다. 쑨리에천은 봉군의 부사령관으로 복무했고 봉천을 방어했다. 장쭤린이 패배하고 3성으로 돌아오자, 쑨리에천과 장쭤린은 동3성의 자치를 선언하고, 쑨리에천은 동3성보안군 부사령으로 임명된다. 직예군벌에 보복하기 위해, 장쭤린은 군사 개혁을 부르짖었고 동3성육군정리처를 설립했다. 쑨리에천은 정리처 총감으로 임명되었고, 부총감인 장덩쉬안, 한린춘, 보안사령참모장 장쉐량, 부사령참모장 궈쑹링과 함께 유의미한 개혁 성과를 내었다.

그러나, 쑨리에천이 기린성에 투자할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기린성의 마적들이 고개를 들고 혼란이 찾아왔다. 1923년 11월 (민국 12년), 쑨리에천은 지역 정부의 정류를 위해 창춘으로 돌아왔지만, 결과는 녹록지 않았다. 그해, 쑨리에천은 큰 병을 얻었고, 집에서 요양하기 위해 장쭤에게 기린의 군사를 주었다.

1924년 4월 25일 (민국 13년), 쑨리에천은 펑톈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53세였다 (최소 5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