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멤미우스 라틴어: Gaius Memmi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미틸레네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루키우스 멤미우스(조부) 루키우스 멤미우스(아버지) 멤미아(누이) 코르넬리아 파우스타(아내) 가이우스 멤미우스(아들) |
직업 | 로마 공화정 호민관, 법무관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호민관, 법무관. 호민관 시기에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동맹을 맺고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임페리움을 폼페이우스가 갖도록 했으며, 법무관 시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적으로서 활약하다가 나중에 집정관에 도전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유권자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망명했다.2. 생애
기원전 3세기부터 쿠르수스 호노룸을 역임했지만 집정관에는 이르지 못한 노빌레스 가문인 멤미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루키우스 멤미우스는 유구르타 전쟁 시기에 귀족들이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아먹고 그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친 것을 비난한 저명한 연설가였으며, 아버지 루키우스 멤미우스는 기원전 90년 호민관을 맡으면서 역시 탁월한 연설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 <브루투스>에서 그를 "루키우스의 아들 가이우스"라고 지칭했는데, 이는 기원전 111년 호민관이었으며 기원전 100년 집정관 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지지자들에게 피살당해 실제로 취임하지 못했던 가이우스 멤미우스와 구별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누이로 기원전 76년 집정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의 아내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측근이 된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의 어머니인 멤미아가 있었다.젊은 시절에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휘하 재무관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내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딸 코르넬리아 파우스타와 결혼했던 것을 볼 때 술라 사후 술라의 가족들의 후견인을 자처했던 루쿨루스에게 결혼 허가를 받아낼 정도로 원만한 관계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원전 66년 호민관에 당선된 뒤, 그는 루쿨루스를 향한 맹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독일의 역사가 프리드리히 뮌처는 이에 대해 그가 정치 활동에서 친척이나 친구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성공만을 추구했다고 평했다.
그는 먼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형제인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를 고발했다. 그가 술라의 내전 당시 원로원의 승인 없이 술라의 재무관으로 활동한 것은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르쿠스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에 타겟을 루키우스로 돌린 그는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좀처럼 끝나지 않는 것은 루키우스가 전쟁을 통해 이득을 얻기 때문에 일부러 질질 끌고 있기 때문이며, 병사들이 그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파업을 감행한 것을 볼 때 그는 전쟁을 끝내기엔 무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중해 해적을 단시일에 평정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야말로 전쟁을 끝낼 수 있으니 루키우스의 임페리움을 박탈하여 폼페이우스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키우스를 심정적으로 지지하던 원로원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지만, 그는 민회에 이 문제를 회부해 관철시켰다. 이 일로 그와 루쿨루스 형제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기원전 60년, 마르쿠스 루쿨루스는 성명이 알려지지 않은 아내가 멤미우스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혼했다. 키케로는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다의 그 양치기는 메넬라오스만 화나게 했는데, 우리의 파리스는 메넬라오스와 아가멤논 모두 아끼지 않는다."
루키우스 루쿨루스 역시 아내 세르빌리아[1]가 멤미우스와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혼했다고 전해진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의 외조카인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자신의 정적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추종자라는 점 때문에 그와 불편한 관계였다. 하지만 기원전 59년 쿠리오는 키케로에게 자신과 삼촌 멤미우스는 삼두정치를 결성한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적대한다고 확신시켰다. 그래서 키케로는 멤미우스가 기원전 58년 법무관에 선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에게 아래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희망과 열정으로 가득 찼다. 니기디우스, 멤미우스 및 렌툴루스. 다른 사람들도 훌륭하지만 이들은 특별하다."
멤미우스는 동료 법무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손잡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정치 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삼두의 활동을 조사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카이사르가 젊은 시절에 비티니아 왕국의 국왕 니코메데스 4세와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을 앞장서서 퍼트리면서, 카이사르가 일부 로마 손님도 참석한 연회에서 술을 따르는 관원으로서 니코메데스 아래에 서 있었다고 주장했다.
법무관 임기가 만료된 후 비티니아 총독에 부임한 그는 젊은 시인 가이우스 헬비우스 킨나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를 데려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방에서 부자가 되도록 해주기를 희망했지만, 멤미우스가 그렇게 해주지 않자 풍자시를 통해 멤미우스를 백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탐욕스러운 작자라고 공격했다. 멤미우스는 총독으로서 이민족과 싸워 군공을 어느 정도 세운 뒤 임페라토르 칭호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사료에는 이 사실이 전혀 언급되지 않지만, 기원전 51년 비티니아에서 주조된 동전에는 트로피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포로들을 담은 이미지와 함께 " 가이우스 멤미우스,임페라토르"(C. Memmius imperator)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기원전 56년 로마로 귀환한 그는 멤미우스 가문의 숙원인 집정관에 도전할 자격이 주어졌지만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자 당선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포기했다. 또한 기원전 55년 집정관 선거 역시 자신의 동지인 아헤노바르부스를 당선시키는 데 주력했을 뿐 출마하지 않았다. 그러다 기원전 54년 현직 집정관 아헤노바르부스의 지원에 힘입어 집정관 선거에 비로소 출마했다. 폼페이우스의 지원을 받는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와 손잡고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와 결쟁했다.
선거에 출마한 인사들은 표를 얻기 위해 막대한 뇌물을 선거인단에게 뿌렸다. 특히 멤미우스와 칼비누스는 먼저 투표할 권리가 있는 이들에게 최대 1,0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분배하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에 현직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와 아헤노바르부스가 원하는 속주에 총독으로 부임할 수 있도록 돕겠으며, 그러지 못할 경우 각각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보상금으로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일이 발각되면서 심각한 논란이 벌어졌고, 멤미우스는 폼페이우스의 요구에 따라 원로원에서 아헤노바르부스와 맺었던 계약서를 낭독했다. 이 일로 위신에 손상을 입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선거전에 몰입했다.
이렇듯 후보 4명 모두 막대한 뇌물을 현직 집정관과 선거인단에게 뿌리다가 고발당하여 법정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바람에 차기 집정관이 좀처럼 선출되지 않다가, 기원전 53년 여름이 되어서야 정치 세력들의 합의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 후 기원전 52년 단독 집정관을 맡던 폼페이우스는 선거법 위반에 관한 새로운 법을 통과시킨 뒤 이에 따라 멤미우스를 법정에 재차 회부했다.
멤미우스는 유죄를 선고받고 로마에서 추방된 뒤 아테네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기원전 51년 미틸레네로 이동했다. 그의 조카 쿠리오는 외삼촌의 복귀를 위해 노력했지만 카이사르의 내전 발발과 본인의 전사로 무산되었다. 멤미우스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아내 코르넬리아 파우스타를 무시하고 불륜을 일삼았고, 파우스타 역시 여러 남정네와 바람을 피웠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간통자라고 비난하고 이혼했다. 그럼에도 아들 가이우스 멤미우스를 낳았는데, 이 인물은 기원전 34년에 멤미우스 씨족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집정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