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10 20:25:42

김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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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등 이찬(伊飡)
골품 진골(真骨)
직위 남원 태수(南原 太守)
본관 강릉
성씨 김(金)
이름 흔(昕)
태(泰) / 대흔(大昕) / 태흔(泰昕)[1]
아버지 김장여(金璋如)
생몰연도 803년 ~ 849년

1. 개요2. 생애

1. 개요

신라의 왕족, 무장. 김양의 사촌형.

2. 생애

태종 무열왕의 9세손(8대손).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밀린 무열왕계 강릉 김씨 김주원이 증조부다. 김주원의 맏아들인 김종기의 아들인 김장여의 아들이 바로 김흔이다. 신라 중대가 끝나고 하대로 접어들면서 무열왕계 왕통은 정계에서 그다지 힘을 쓰지 못했지만 김흔의 집안만은 제법 위세를 떨쳤다. 특히 헌덕왕 때 김주원의 둘째 아들인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김헌창의 난 참조)이 실패하고 그 혈족이 몰살당했는데도 김흔의 집안은 큰 피해가 없었는지 아버지 김장여는 파진찬까지 지냈다. 사촌동생이 김양이다.

822년, 당나라에 가왕자의 신분으로 사신으로 가서 숙위(宿衛)하고 1년 뒤에 귀국하였는데, 당목종(唐穆宗)으로부터 금자광록대부시태상경(金紫光祿大夫試太常卿)의 벼슬을 받았다. 그 뒤에 귀국하여 남원태수와 명주태수를 지냈고, 강주 도독과 이찬이 되었다.

839년 정월 19일, 장보고 청해진 군사와 김양의 군사가 달벌(達伐, 대구)에 도달하였다고 하자, 민애왕은 김흔을 토벌군 대장군을 삼고, 대아찬 윤린(允璘), 김의훈(金嶷勛)과 함께 10만 대군을 이끌고 맞섰다.

김흔이 이끄는 신라 관군 10만의 병력은 이전 삼국시대나 이후 시대를 통틀어 봐도 손꼽힐 만한 엄청난 규모의 병력이었다. 그러나 급하게 모은 대군은 사기가 낮았고 태반이 실전경험이 풍부한 장보고의 사병이던 청해진의 군사들은 소수정예였다. 회전으로 맞붙은 끝에 수천의 군대로 열 배가 넘는 관군의 절반 이상이 죽고 다수가 생포되었다. 대장군 김흔은 살아남았으나 전쟁에서 패하였고 또한 전사하지도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소백산에 들어가 갈옷을 입고 나물밥을 먹으며 중들과 함께 여생을 지내었다.

849년, 이찬 김식(金式)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흔은 이에 호응하였고, 대아찬 흔린(昕鄰)도 가담하였다. 반란에 실패하였고, 김식과 함께 김흔(대흔)은 처형되었다. 같이 가담한 흔린은 죄가 가벼웠는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김흔의 최후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와 김양 열전의 내용이 다르다. 열전에는 김흔이 달벌대전 패전 후에 산 속에서 은거하던 중 아무 일도 없이 죽었다고 나와 있어서 신라본기와는 차이를 보이는데 뉘앙스상 김흔이 숙청을 당한 정황이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1] 숭암산성주사사적기(崇巖山聖住寺事蹟記)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