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4 08:47:04

곽박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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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郭璞
(276 ~ 324)

서진 동진의 인물. 자는 경순(景純). 사주(司州) 하동군(河東郡) 문희현(聞喜縣) 출신. 상서도령사 곽원(郭瑗)[1]의 아들. 산해경에 주석을 달았다.

2. 생애

곽박은 경서에 능통하여 박학하였고, 높은 재능을 지니고 있었는데, 화술이 뛰어나지 않아서 이를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였다. 다만, 사부(詞賦)를 짓는 데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여 그의 한시 등은 중흥기 최고의 작품으로 꼽혔고, 옛 문장이나 기이한 문자를 좋아하였으며, 역법과 음양술에 능하였다. 곽박은 하동에서 점을 보던 곽공(郭公)이라는 자에게서 점술을 배웠고, 그로부터 《청낭중서(青囊中書)》 아홉 권을 받아 오행(五行), 천문(天文), 복서(卜筮) 등을 익혔다. 이로 인해 곽박은 점치는 기술을 통달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화를 돌리는 데 능했으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비록 경방(京房)이나 관로가 살아돌아온다 할지라도 곽박만 못할 것이다라는 평가를 하였다. 그가 공부했던 《청낭서》는 훗날 그의 제자 조재(趙載)가 훔쳐서 스승 몰래 읽으려 했으나, 조재가 미처 읽기도 전에 《청낭서》는 불타 사라졌다고 한다.

혜제 사마충 재위기에 하동에서 변란이 일어났다. 이때 곽박은 점을 치고는 제사를 올리면서 탄식하였다.
"아, 평민들은 이민족에 의해 매장될 것이고, 그들의 집과 나무들은 무너져 사람들의 발길 끊긴 황무지가 될 것이다!"
이후 곽박은 수십 명의 친족과 친구들을 비밀리에 모아, 다같이 동남쪽으로 피난갈 계획을 세웠다. 곽박은 이를 성공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장수 조고에게 연락을 하려 했지만, 당시 조고는 아끼던 애마가 죽은 것을 슬퍼하여 손님을 받지 않았다. 곽박이 도착해도 문지기가 그를 통과시키지 않으니, 곽박이 말했다.
"내가 그 말을 살릴 수 있소."
이를 듣고 놀란 문지기는 안으로 들어가 조고에게 보고하였고, 조고도 황급히 나와 곽박에게 물었다.
"선생이 정말로 내 말을 살릴 수 있소?"
곽박이 답했다.
"건장한 사람 20~30명을 데려다가 긴 막대기를 들고, 동쪽으로 30리를 걸어가면 언덕과 숲이 있는 사당이 있을 것이오. 그곳에 도착하면 막대기로 무언가를 때려서 잡아야 하며, 빨리 가져와야 하오. 이것을 가져오면 말이 살아나게 되리라."
조고는 그의 말대로 했고, 정말로 원숭이 같은 것을 잡혀왔다. 이 생물이 죽은 말에게 다가가 코를 킁킁거렸는데, 잠시 후 말이 일어나서 힘차게 울고 평소처럼 먹기 시작했고, 그 생물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조고는 이를 기이하게 여겨 곽박에게 많은 보상을 제공하였다.

곽박의 무리가 여강(廬江)에 도착했을 때, 여강태수 호맹강(胡孟康)은 승상 사마예의 부름을 받아 군자좨주로 임명받았다. 하지만 그 시기에 강회(江淮) 일대는 하북과 달리 평화로웠고, 호맹강은 남쪽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에 곽박을 불러 점을 치게 하니, '패(敗)'라는 결과가 나왔다. 호맹강은 점괘를 믿지 않았고, 곽박은 서둘러 여강을 떠날 채비를 하였다. 하지만 곽박은 당시 머물고 있던 집주인의 하녀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두고 여강을 떠날 수 없어, 작은 콩 세 되를 주인의 집 주변에 뿌렸다. 이후 주인은 다음 날 아침에 집을 둘러싼 수천 명의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았고, 가까이 가보니 그들이 사라지자 매우 불길한 징조로 여겨 곽박에게 점괘를 뽑아달라 요청하였다. 이에 곽박이 말했다.
"주인께서는 저 하녀를 데리고 있지 말아야 하고, 동남쪽 20리(里) 떨어진 곳에서 파십시오. 다만, 가격을 다투지 말고 팔아야 그 요괴를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은 그의 말을 따랐고, 곽박은 몰래 사람을 시켜 저렴하게 그 하녀를 사오게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주문을 써서 우물에 던지자, 수천 명의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두 묶여 우물에 스스로 뛰어들었고, 주인은 이를 보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얼마 뒤, 곽박은 하녀를 데리고 떠났고, 그로부터 며칠 후에 여강은 함락되었다.

곽박이 강을 건너 강남에 이르니, 선성(宣城) 태수 은우(殷祐)가 그를 참군으로 삼았다. 그때 거대하고 회색인 동물이 도시 아래로 나타났는데, 다리는 짧았고, 생김새는 코끼리와 비슷했으며 가슴과 꼬리 위는 모두 하얗고 힘이 세지만 둔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생물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은우는 사람들에게 숨어 있다가 이를 잡으라 명했고, 곽박에게는 점괘를 뽑게 하니, '둔(遯)'의 '고(蠱)'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 점괘의 의미는 이러하였다.
'간(艮)'의 몸이 '건(乾)'과 연결되어, 그 동물은 용맹하고 거대하다. 산에 숨어 사는 짐승으로, 외뿔소도 아니고 현무도 아니다. 몸은 귀신과 나란히 하여, 두 정령이 낮에 등장한다. 본래는 붙잡혀야 마땅하나, 그 두 정령이 허락치 않는다. 그러나 결국 한 번의 큰 타격을 입고, 그의 원래의 장소로 돌아갔다. 점괘의 이름에 따라 이것을 '려서(驢鼠)'라 이른다.
과연 사람들이 그것을 창으로 찌르자, 한 자 이상 깊이 찔렸고, 그 동물은 떠나 다시 보이지 않았다. 선성군에서 군의 풍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사당으로 가 이 동물을 잡아 제사로 쓰고자 청하였다. 하지만 무당이 말했다.
"사당의 신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며 말씀하시길, '그것은 공정(䢼亭)의 려산(驢山) 산신 려서로, 형산(荊山)으로 가기 위해 나의 허락을 구하러 잠시 온 것이니, 손대지 말지어다.'라 하셨습니다."
곽박의 점술은 이처럼 정교하였다. 이후 은우는 승진하여 석두(石頭)에 도독으로 부임하였고, 곽박도 그를 따라 석두로 갔다.

어느 날, 연릉(延陵)에서 비단털 다람쥐가 나타났다. 곽박은 이를 보고 말했다.
"이 지역 동쪽에 권력을 장악하려는 요사스러운 사람이 있을 것이며, 곧 스스로 죽을 것이다. 나중에는 요사스러운 나무가 자라날 것이고, 이는 상서로운 징조 같지만 그렇지 않으며, 이는 오히려 '신석(辛螫)'의 나무이다. 이러한 일이 있다면 동남쪽 수백 리에서 반란을 일으킬 자가 있을 것이고, 내년에 일어날 것이다."
과연 무석(無錫)에서 갑자기 산수유 나무 네 그루가 서로 가지를 엮어 마치 연결된 것처럼 자랐고, 그 해에 오흥(吳興) 태수 원수(袁琇)가 도적에게 살해당했다. 누군가 이를 곽박에게 묻자, 곽박이 말했다.
"묘효(卯爻)가 발생하여 액운을 불러올 것이다. 저 나무는 굽히지도 곧지도 않으니,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동진의 명재상 왕도는 곽박의 명성을 듣고, 그를 매우 중히 여겨 군대의 일을 의논할 때 참여케 하였다. 한번은 곽박에게 점괘를 뽑게 했는데, 곽박은 점을 치고 말했다.
"장군에게 큰 위기가 찾아을 것이니, 서쪽으로 수십 리를 가서 소나무 한 그루를 찾고, 그것을 자신의 키만큼 잘라 평소 잠자리에 두면 재앙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도는 그의 말을 따랐다. 며칠 후에 정말로 큰 지진이 일어났고, 왕도는 무사할 수 있었지만, 그 소나무는 부서졌다.

과거에 낭야왕 사마예가 업(鄴)을 진수할 당시, 왕도는 곽박을 찾아가 점을 본 적이 있었다. 이때 점괘로 '함(咸)'과 '정(井)'이 나오자, 곽박이 말했다.
"동북의 군현들 중 '무(武)'라는 이름을 가진 곳에서 탁(鐸)이 나타날 것인데, 이는 명령을 받았음을 상징하는 징표입니다. 그리고 서남의 군현 중에 '양(陽)'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에서는 우물이 끓을 것입니다."
그 후에 진릉(晉陵)의 무진(武進) 사람들이 동탁(銅鐸) 5정을 발견하였고, 역양(歷陽)에서는 우물이 며칠 동안 끓었다. 이처럼 곽박의 신통력을 알고 있던 사마예는 진왕(晉王)으로 즉위한 후에 곽박을 불러 점을 보게 하였다. 점괘로 '예(豫)'와 '규(睽)'가 나오자, 곽박이 말했다.
"회계(會稽)에서 종이 나타나 성공을 알릴 것이며, 이는 '왕이 음악을 만들어 덕을 높이고, 신(神)에게 감사를 표하다'라는 고사와 알맞습니다."
과연 진왕 사마예가 황제로 즉위하자, 회계의 섬현(剡縣) 사람들이 우물에서 길이가 7치 2푼, 입구의 지름이 4치 5푼의 종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종 위에는 18자의 고문(古文)이 적혀져 있었는데, '회계악명(會稽嶽命)'이라는 4글자 외에 나머지 글자는 알아볼 수 없었다. 곽박이 말했다.
"이것은 왕의 작품임이 분명하며, 반드시 영험한 부적이 있어 사람과 인간의 마음을 막고, 신령과의 계약을 완성한 후에야 '명령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릉에서 발견된 다섯 개의 종이 신호를 보내고, 회계에서 발견된 종이 성공을 알렸으므로, 상서로운 징표가 그 종류를 잃지 않고, 모두 정확한 방식으로 나타났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큰 종이 그 소리를 내면, 작은 종은 그 형상을 드러내고, 그러한 도구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사건들이 실제로 응답하며, 하늘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제 사마예는 곽박의 말을 깊이 받아들였다.

진나라가 천도하고 곽박은 《강부(江賦)》라는 글을 지었는데, 그 문장이 매우 웅장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또, 그 뒤로 《남교부(南郊賦)》라는 시를 지었는데, 원제 사마예가 이를 읽고 칭찬하며 그를 저작랑으로 삼았다. 당시 음양이 혼란스럽고 형벌이 번성하여 곽박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바로잡고자 하였다.

어느 날, 기양(暨陽) 사람 임곡(任谷)이 나무 밑에서 쉬고 있을 때, 갑자기 깃털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나타나 그와 음란한 짓을 한 뒤 사라졌다. 여러 달이 지나서 임곡은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아이를 출산할 무렵에 그 깃털 옷을 입은 사람이 다시 나타나 칼로 임곡의 하체를 찔러 뱀 아이를 꺼내고 사라졌다. 이로 인해 내시로 입궁한 임곡은 상소를 올려, 자신이 도술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원제 사마예가 임곡을 궁중에 머무르게 하니, 곽박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임곡의 행위는 요사스럽고 괴상하여 까닭이 없습니다. 다만, 폐하께서는 광범위하게 보고 깊이 살피시기 위해 그를 일단 궁에 불러들여 안락한 처소를 제공하셨습니다. 신(臣)은 국가 운영은 예의와 정도로 이뤄져야 한다고 들었지, 기이하고 사악한 것으로 이뤄져야 한다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엄격하고 정직하게 국사를 다스리시며, 움직임마다 고전에 따르십니다. 하나, < 주례>에 의하면,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은 궁궐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데, 하물며 임곡과 같이 더욱 기괴한 사람이 궁정에 가까이한다면, 태양과 달을 더럽히고 천지를 혼란스럽게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저의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정녕 임곡에게 신령이 깃든 것으로 믿으신다면, 그를 비록 존경하되 멀리해야 합니다. 신령은 밝고 정직하며 사람들하고만 교류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임곡을 사악하고 기만적인 자로 여긴다면, 그를 먼 곳으로 보내야 하며, 성스러운 곳에 가깝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임곡이 신기(神祇)의 경고이거나 국가에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자라면, 스스로를 절제하고 예절을 바로잡아 그의 사악함을 없애야 하며, 임곡을 편안히 있도록 두어 그의 사악한 변화를 자유롭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신(臣)은 어리석게도 음양이 변화무쌍하고, 또한 여우나 귀신이 사람을 빙의해 사악함을 저지른다고 봅니다. 폐하께서 신(臣)의 어리석은 마음을 받아들이시어 임곡을 궁 밖으로 내보내 주시길 바랍니다. 신(臣)은 스스로 과분한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리입니다."
그러나 원제는 듣지 않았고, 이후 원제가 붕어하자 임곡은 어디론가 도망쳤다.

곽박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곽박은 상을 치르기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어머니의 시신을 매장할 장소를 강에서 약 백 걸음 거리에 있는 기양으로 정하였다. 사람들은 매장지가 물가와 너무 가깝다 말렸지만, 곽박이 말했다.
"곧 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모래가 쌓여 묘지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까지 모두 농지가 되었다.

모친상을 무사히 치른 곽박은 대장군 왕돈의 휘하로 들어가 기실참군이 되었다. 이때 대장군 연을 지내고 있던 영천(潁川) 사람 진술(陳述)은 아름다운 명성이 있어 왕돈이 그를 중용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진술이 사망하고 말았다. 곽박은 진술의 죽음을 심히 슬퍼하며 울부짖었다.
"사조(嗣祖), 사조(嗣祖), 어찌 그것이 복이 아니겠는가!"
훗날 왕돈은 2차로 거병하여 진명제에게 모반하였다.

진명제가 즉위하고 한 해가 지나도록 개원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형혹성[2] 방성(房星)[3]에 머물렀다. 당시 곽박은 휴가를 나와 집으로 잠시 돌아왔기에, 명제는 칙령을 내려 곽박을 부르고 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일찍이 기양에서도 붉은 까마귀를 보았다는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곽박은 상소를 올려 연호를 바꿔야 한다 권했지만, 상소의 내용은 유실되어 알 수 없다.

곽박은 누군가의 장례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명제는 그와 상의할 것이 있어 허름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찾아갔다. 그때 명제는 상주가 용의 뿔을 이용해 장례를 치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상주에게 왜 용의 뿔을 썼는지, 용의 뿔을 이용하면 멸족되는 것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에 상주가 말했다.
"곽박이 이르기를 이렇게 장례를 치르면 3년 안에 천자가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명제 물었다.
"천자가 온다고?"
상주가 다시 말했다.
"능히 천자에게 물어볼 기회가 온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명제는 심히 기이하게 여겼다.

곽박은 환이와 친구 사이였는데, 환이는 방문할 때마다 곽박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고, 곽박이 부부 사이의 일을 보고 있을 때조차 꺼리낌없이 불쑥 찾아오고는 하였다. 이에 곽박이 말했다.
"경은 오더라도 다른 곳은 직접 가도 되지만 화장실만은 들어가지 마시오. 이를 어길 시, 반드시 불행이 주인과 손님 모두에게 닥칠 것이오."
하지만 한번은 환이가 술에 취한 채로 곽박의 집을 찾아와, 화장실로 향하여 그곳에서 볼일을 보던 곽박을 몰래 지켜보았다. 거기서 환이는 곽박이 발가벗은 채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칼을 들고서 강령술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곽박은 환이의 존재를 눈치채고, 크게 놀라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네게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오히려 이런 식으로 오다니! 이것으로 나뿐만 아니라 너도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 이 또한 하늘이 한 일이니,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어느 날, 온교와 유량(庾亮)이 왕돈의 반란이 어떻게 돌아갈지에 대해 점을 쳐달라며 곽박을 찾아왔으나, 곽박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에 온교와 유량은 그렇다면 자신들의 운세를 봐달라 요청하였고, 곽박은 그들의 운세가 "대길(大吉)"할 것이라 답하였다. 온교 등은 곽박과 헤어지면서 서로 말했다.
"곽박이 답변을 하지 못한 것은 말하기를 꺼려서이거나, 혹은 하늘이 왕돈의 운명을 앗아간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국가와 함께 큰 일을 계획 중인데, 곽박이 대길이라고 하니 이는 일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명제 사마소를 찾아가 왕돈의 먼저 공격하도록 권유하였다.

초기에 곽박은 자신을 죽일 자는 '산종(山宗)'이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실제 성이 종(宗)씨였던 사람이 정말로 왕돈에게 곽박의 신기에 대해 말하였다. 왕돈은 거병하기 전에 곽박을 불러 앞으로의 일에 대해 물어보았고, 곽박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왕돈은 곽박이 온교, 유량과 짜고친 것이라 의심하여 또 물어보았더니, 곽박은 다시 점괘가 흉하다고 하였다. 이에 왕돈이 곽박에게 다시 물었다.
"경은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점쳐볼 수 있겠는가?"
곽박이 답했다.
"생각해보니, 명공(明公)께서 거병하시면 재앙이 곧 닥칠 것입니다. 다만, 만약 무창(武昌)에 계속 머무신다면 수명을 가늠할 수 없겠습니다."
왕돈이 분노하여 물었다.
"그럼 경의 수명은 얼마나 남았소?"
곽박이 답했다.
"오늘 낮까지입니다."
결국 왕돈은 약이 올라 곽박을 체포해 남강(南岡)에서 그를 참수하였다. 곽박이 처형되기 직전, 형 집행인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으니, 형 집행인은 "남강, 머리"라고만 답하였다. 이를 들은 곽박이 말했다.
"분명 양쪽으로 측백나무가 있는 장소 아래에서 처형되겠구나."
이윽고 그곳에 도착하자 정말 그러하였다. 곽박이 또 말했다.
"이 나무에는 큰 까치둥지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찾아보았지만 발견하지 못하니, 곽박은 다시 찾아보라 하였고, 결국 나뭇가지 사이에서 큰 까치둥지를 발견하였다. 이후 곽박은 처형되었다. 향년 49세. 왕돈의 반란이 평정된 후에는 홍농태수(弘農太守)로 추증되었다.

[1] 두예가 상서를 지낼 때, 공정함으로 명성을 얻어 건평(建平) 태수로 임명되었다. [2] 원래 화성은 안타레스를 뜻했다. [3] 대략 전갈자리의 머리 쪽에 위치한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