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3 12:51:49

고중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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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파양정백(鄱陽靖伯)
顧眾 | 고중
시호 (靖)
작위 동향후(東鄕侯) → 파양현백(鄱陽縣伯)
(顧)
(眾)
장시(長始)
생몰 274년 ~ 346년
출신 오군(吳郡) 오현(吳縣)
부친 고비(顧秘)
자녀 고창(顧昌), 고회(顧會)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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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강동의 권위있는 호족인 오군 고씨 집안의 자제로, 서진 시기 교주자사를 지낸 고비의 아들이다. 사촌형으로는 동진에서 표기장군을 지낸 고영이 있다.

2. 생애

고중은 비록 고비의 자식이었으나, 큰아버지 고밀이 요절하면서 대가 끊기는 바람에 큰집으로 입양되어 과부인 큰어머니를 보살폈다. 고중이 입양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효심으로 이름이 높으니, 양주(揚州) 관아에서 그를 징소해 주부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재(秀才)로 천거되어 여항(餘杭), 말릉(秣陵)의 현령직을 제안받았으나 고중은 이를 전부 사양했다. 시간이 지나고 낙양에 있던 진동장군 낭야왕 사마예가 내려와 강동에 자리를 잡아갈 때, 고중을 불러 자신의 참군으로 삼았다.

영가 5년(311년) 6월, 사마예의 명령을 따르지 않던 강주자사 화일을 토벌할 때 공을 세워 동향후(東鄉侯)에 봉해지고, 승상연(丞相掾)에 임명되었다.

친아버지인 교주자사 고비가 사망하자, 교주 사람들은 고중의 형인 고수(顧壽)를 새로운 교주자사로 옹립했다. 그러나 형은 오래지 않아 장하독 양석(梁碩)의 반란으로 인해 피살당했고 교주는 양석에게 넘어갔다. 고중은 하는 수 없이 교주로 가 친형의 상을 치렀는데, 상을 모두 마친 후에도 두도의 난으로 인해 길이 막혀 다시 건업으로 돌아오기까지 무려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가 오흥(吳興)을 지날 때, 과거 그의 아버지 고비와 인연이 있던 오흥 사람들은 고중이 전란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돈 200만 전을 기부했지만 고중은 전부 사양하고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대흥 원년(318년) 3월, 장안성이 함락되면서 서진 정권이 완전히 무너지고 민황제 사마업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마예는 마침내 건강(建康)에서 진(晉)의 황제로 즉위했다. 고중은 부마도위, 봉조청에 임명되었다가 상서랑으로 옮겨졌다.

대장군 왕돈이 조정에 상표해 고중을 자신의 종사중랑으로 삼고 남강태수에 임명했다. 이후 조서가 내려져 고중을 파양태수로 삼고 광무장군을 더하자, 고중은 왕돈에게 인사 한 마디도 없이 곧장 파양으로 향했다. 나중에 이를 알게된 왕돈은 고중을 심히 괘씸하게 여겼다.

영창 원년(322년) 정월, 왕돈이 무창(武昌)에서 조협, 유외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고중에게도 사람을 보내 자신에게 호응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왕돈이 파양에 도착했음에도 고중이 병사를 일으키지 않으니, 왕돈은 크게 분노하여 고중을 자신의 군영으로 부르고 큰 소리로 힐문했다. 그럼에도 고중이 동요하지 않고 두려운 기색도 보이지 않자, 왕돈은 화가 조금 풀렸다. 이후 왕돈은 잘못을 저지른 선성내사 육우(陸喈)도 불러 그 자리에서 책망했는데, 이때 갑자기 고중이 나서서 육우를 위해 변명하기 시작했다. 당시 같은 자리에 있던 왕돈의 장사 육완은 고중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고중을 군영 밖으로 끌고 나와서 말했다.
"《 시경》에 이르기를, 중산보는 부드러워도 삼키지 않고 강해도 뱉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는 경에게 진실로 어울리는 말이구려. 비록 중산보라 할지라도 어찌 그대보다 더 할 수 있겠소!"

영창 원년(322년) 3월, 석두성(石頭城)에서 황제의 친위군을 모조리 격파한 왕돈은 뒤이어 심복들을 파견해 건강 조정까지 장악해버렸다. 인사권을 손에 넣은 왕돈은 고중을 오흥내사로 임명하려 했지만, 고중이 굳게 사양하면서 이부랑 환이를 대신 천거했다. 그러자 환이도 사양하고 다시 고중을 추천하니, 두 사람 모두 오흥내사에 임명받지 못했다. 왕돈은 고숙(姑孰)에 주둔하면서 고중을 자신의 곁에 두었다.

태녕 2년(324년) 정월, 왕돈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종사중랑 주숭(周嵩)과 주찰(朱札)이 참수되고 고중이 그들을 대신해 왕돈의 종사중랑이 되었다. 이후 왕돈이 명황제 사마소에 의해 평정되자, 고중은 태자중서자에 제수받았다가 의흥태수로 옮겨지고 양위장군이 더해졌다.

함화 3년(328년) 2월, 소준이 반란을 일으키고 도성 건강을 함락시켰다. 이에 고중은 고향인 오현(吳縣)으로 돌아가 은밀히 의거를 꾀하였다. 당시 오국내사 유빙(庾冰)이 소준을 피해 회계(會稽)로 도망치니, 소준은 채모(蔡謨)를 유빙 대신 오국내사로 삼고, 전 능강장군 장철(張悊)을 오현으로 보내 병력을 모집하게 했다. 이때 고중이 장철을 설득해 자신의 의거에 참여하도록 만들고, 채모에게도 낭중 서기(徐機)를 보내 호응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회계내사 왕서가 먼저 거병하면서 고중과 채모 또한 왕서의 격문에 응해 들고 일어났다. 고중은 본국독호(本國督護)에 임명되고, 고중의 사촌동생 고양(顧颺)은 위원장군, 전봉독호에 임명되어 서쪽으로 진군해 소준을 압박했다.

동쪽에서 의군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소준은 장수 홍휘(弘徽)에게 중갑병 500명을 주고 북을 치며 나아가게 했다. 고중, 고양, 장철은 고작(高莋)에서 홍휘와 싸워 대파하고 그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이후 고중은 고양을 파견해 무석(無錫)에 주둔시켰다. 채모에게서 다시 오국내사 직책을 되돌려 받은 유빙은 어정(御亭)을 지켰고, 고중은 해우(海虞)를 지키며 소준이 추가로 군대를 보내오는 것에 대비했다.

과연 소준은 홍휘가 패배한 것을 보고 장건(張健), 마류(馬流)을 보내 다시 공격했다. 무석을 지키던 고양은 적에게 대패해 달아났고, 유빙도 적의 공세를 당해내지 못해 어정을 버린 채 전당(錢唐)으로 패주했다. 고중은 끝까지 전방에 남아 해우를 지키면서 여러 현에서 적군과 교전해가며 분투했지만, 결국 격파당하고 오포(烏苞)로 물러났다. 왕서가 우담을 5군대독호(五郡大督護)로 삼고, 의군을 통솔해 장태(章埭)로 진군하게 했다. 우담의 선봉장인 요휴(姚休)가 먼저 도착해 고중과 합류했는데, 때마침 폭우가 쏟아져 지역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그때 소준의 장수 관상(管商)이 배를 띄워 고중과 요휴의 군대를 급습하자, 의병은 곧바로 전멸하고 고중은 유빙과 고양이 있는 전당으로, 우담은 본래 자신의 부임지인 오흥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이후 왕서의 지시에 따라 고양과 함께 자벽(紫壁)으로 들어가 그곳을 수비했다.

우담이 또 소준군에게 패하면서 오흥이 적의 손에 떨어졌다. 고중의 부하들은 동요해 자벽을 포기하고 절강(浙江) 이남으로 대피할 것을 권했지만, 고중은 거절하고 자신과 뜻을 같이한 범명(范明)을 참군으로 삼았다. 범명이 집안 사람 500명과 일반 병사 4,000명을 모아 선두에서 장건을 격파하자, 장건은 오성(吳城)에 전홍(錢弘)을 남기고 곡아(曲阿)로 패주했다. 고중은 범명이 만들어준 승세를 몰아 노구(路丘)에서 남겨진 적을 공격해 격파하고 적장 전홍을 참수했다. 그리고 독호 주기(朱祈) 등 9군을 파견해 난릉태수 이굉(李閎)과 협력하여 능정(庱亭)을 수비했다. 장건은 마류, 도양(陶陽) 등을 보내 능정을 습격하면서 반격을 시도했으나, 이굉과 주기가 역습하여 적을 대파하고 수급 2,000여 개를 얻었다.

함화 4년(329년) 2월, 소준의 반란이 모두 평정되고 조정에서 논공행상을 시행하였는데, 이때 고중과 채모가 서로에게 공을 양보하니, 사람들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여하튼 고중은 공을 인정받아 파양현백(鄱陽縣伯)으로 진봉되었다. 또, 조정에서 그를 평남군사(平南軍司)로 삼으려 했으나, 고중이 이를 사양하자 단양윤, 오국대중정(吳國大中正)으로 고쳐 임명했다. 이후 시중, 상서를 역임했다.

함강 8년(342년), 조정에서 고중을 영군장군, 양주대중정(揚州大中正)으로 승진시키려 했지만, 고중은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모친의 사망을 이유로 사직했다.

건원 2년(344년) 9월, 목황제 사마담이 즉위하자, 보정대신 하충이 고중을 다시 불러 영군장군으로 삼았다. 고중은 조정에 들어와 하충과 무릉왕 사마희(司馬晞)와의 갈등을 해소하고, 불교를 맹신하던 하충이 절에 수많은 돈을 낭비하는 것을 막으려 노력하는 등, 여러 일들을 했다. 이후 늙었다는 이유로 상소해 은퇴를 구했으나, 조정에서 그의 청을 불허하고, 되려 상서복야로 승진시켰다.

영화 2년(346년), 재직 중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 조정에서 그를 광록대부로 추증하였다. 시호는 '정(靖)'. 장남 고창이 그의 작위를 이었고, 관직은 건강현령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