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4 23:17:14

혜함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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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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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嵇含
(263 ~ 306)

서진의 인물. 자는 군도(君道). 예주 초국 질현 출신. 서주자사 혜희(嵇喜)의 손자. 태자사인 혜번(嵇蕃)의 아들.

2. 생애

혜함은 공부를 좋아하여 문장 짓기에 능했다. 혜함의 집은 공현(鞏縣) 보구(亳丘)에 있었기에, 그는 보구자(亳丘子)를 자칭하고, 집 대문에는 "귀후지문(歸厚之門)", 집 안에는 "신종지실(慎終之室)"이라는 글귀를 적어 항상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 수양에 힘썼다. 이후 초왕 사마위에게 등용되어 그의 속관으로 일하다가, 사마위가 가남풍에게 주살당하면서 면직되었다.

수재로 천거받고 다시 임관하여 낭중을 지냈다. 당시 홍농왕 사마수는 황실의 자제답게 관사를 매우 성대하게 꾸미고 조정의 관리들을 불러모은 뒤, 문장을 잘 짓기로 유명한 혜함에게 이를 칭찬할 것을 명했다. 헤함은 붓을 집고 조문을 적어 사마수의 사치를 비꼬았는데, 그 문장이 무척 아름다워 흠 잡을 데가 없으니, 사마수는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제왕 사마경의 부름을 받고 서정참군에 임명되었고, 아버지의 무창향후(武昌鄉侯) 작위를 계승했다. 그리고 표기장군, 장사왕 사마예가 정권을 잡았을 때는 그의 휘하로 배속되어 기실독을 지내던 중 상서랑으로 옮겨졌다. 이후 사마예가 성도왕 사마영의 세력과 교전하기 시작하자, 혜함은 사마영의 군대가 강성한 것을 보고, 일단 출전하여 전투를 감독하다가 밤을 틈타 복귀했다. 혜함이 사마예를 만나 말했다.
"과거 위무제는 군대나 전쟁에 관한 일이 있을 때마다 관리를 증원했습니다. 또, 청룡 2년(234년)에는 상서랑 진교가 군무를 처리하면서 낭(郎)의 증원을 상주한 바 있습니다. 지금 간사한 역적들이 사방에서 몰아붙이는 와중에 길이 틀어막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상황이 이보다 안 좋아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조씨의 전례에 의거해 낭을 증원한 뒤, 낮에는 도성의 관리들이 삼조(三曹)처럼 말을 타고 전투를 독려하다가, 밤에는 돌아와 업무를 보게 한다면 한 사람이 두 사람분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10만에 달하는 무리를 모은 다음에 이를 통솔할 수령을 뽑아 각 부대 간의 협력을 원활히 하고 전체를 이끌 대장을 두어, 기존의 관료들이 그 사이에 섞이지 않게 하십시오."
사마예는 혜함의 계책에 따라 낭을 늘리고 낙양의 각 관리들에게 명령을 하달했으나, 도중에 동해왕 사마월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다.

영흥 원년(304년) 3월, 예장왕 사마치가 진북대장군에 임명되었을 때 혜함은 그의 종사중랑으로 배속되었다가, 동해왕 사마월이 혜제를 끼고 사마영 토벌에 나섰을 때는 중서시랑으로 옮겨졌다. 이후 사마월의 군대가 탕음(蕩陰)에서 대패하자, 혜함은 사마월의 무리에서 빠져나와 형양(滎陽)으로 도주했다.

영흥 원년(304년) 12월, 황태제 사마영이 다시 성도왕으로 강등당하고 예장왕 사마치가 황태제에 오르자, 혜함은 태제중서자에 제수받고 중앙으로 복귀하려 하였다. 하지만 서쪽으로 가는 길이 막혀 부름에 응할 수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혜함을 정남장군, 범양왕 사마효(司馬虓)의 종사중랑으로 배속시켰다. 이후 혜함은 진위장군, 양양태수를 역임했다.

영흥 2년(305년) 10월, 진동장군 유교가 허창(許昌)을 급습해 사마효를 격파하자, 사마효는 사마 유곤, 유곤의 형 유여(劉輿)와 함께 하북으로 달아났다. 혜함은 사마효와 헤어져 진남장군 유홍이 지키고 있는 양양(襄陽)으로 향하니, 유홍이 그를 상빈(上賓)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다만, 혜함은 성품이 너무 강직하여 유홍의 사마 곽매(郭勱)와 자주 충돌하였다.

영흥 2년(306년) 8월, 역양(歷陽)에서 반란을 일으킨 진민이 위세를 떨치면서 강주(江州)와 양주(揚州)가 자못 진동했는데, 유홍은 남쪽으로의 길이 워낙 멀고 험하여 토벌을 꺼렸다. 때마침 광주자사 왕의(王毅)가 병으로 사망하자, 유홍은 조정에 상표해 혜함을 평월중랑장, 광주사사, 가절로 추천하려 했지만, 미처 서신을 보내기도 전에 유홍도 급사하고 말았다. 당시 혜함이 유홍을 대신해 형주를 다스리길 바라는 여론이 우세했으나, 곽매는 이대로 형주의 통치권이 혜함에게 넘어가면 자신이 먼저 죽임을 당할 것이라 의심하고, 야밤에 혜함을 엄습해 살해하였다. 향년 44세.

혜함을 죽인 곽매는 황급히 반란을 선포하고, 동해왕 사마월을 피해 신야(新野)에 숨어있던 성도왕 사마영을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이내 치중 곽서(郭舒)와 유홍의 아들 유번(劉蕃)의 공격을 받고 패하여 참수당했다. 훗날 회제 사마치가 황제로 즉위하고, 혜함의 시호를 '헌(憲)'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