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9 23:22:04

한석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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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기력
2.1. 연기 스타일2.2. 그 외 특징
3. 90년대의 위상과 인기
3.1. 당시 자료들3.2. 왜 몰락했는가?
3.2.1. 3년 2개월이라는 긴 공백기와 이중간첩의 흥행 대실패3.2.2. 매니저이자 친형 한선규3.2.3. 까다로운 시나리오 선정3.2.4. 신인감독 고집
3.3.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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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배우 한석규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연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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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 배우들 중 연기력으로는 단연 손가락에 꼽히는 배우 중 한 명이다. 애초에 MBC 공채 배우 연수 과정에서 동기들 중 전체 1등을 할 정도로 눈에 띄는 연기력을 갖고 있었고, 데뷔 초창기때부터 드라마에 활약하며 이름을 알렸던 이유가 아들과 딸, 서울의 달 등에서의 모습을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아서였다. 드라마계 신성이 된 곧바로 충무로에 입성한 것은 물론 최전성기 시절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평가받으며 그 정도의 대중적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도 배우 본연의 매력과 함께 그 중심에 탄탄한 연기력이 뒷받침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90년대 그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흔히 말하는 잘생긴 외모를 가진 정통적인 미남파 배우는 커녕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인기가 많은 것에 의아해하는 이들이 상당했던 만큼 배우로서는 다소 평범한 마스크를 지니고 있지만, 그 단점을 상쇄할만큼 연기력은 진퉁.(...) #[1]

실제로 연기자로서 데뷔가 늦었던 한석규가 이러한 탄탄한 연기를 바탕으로 급속도로 입지를 키웠음을 주요 시상식의 후보 및 수상 실적을 통해 단적으로 알 수 있는데, 무려 데뷔 이후 2년만에 아들과 딸& 파일럿을 통해 MBC 연기대상의 신인상을 수상 및 백상예술대상 신인상 후보에 오르고 난 뒤 이듬해인 1994년에는 서울의 달을 통해 MBC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백상 최우수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그리고 1995년에는 '영화 데뷔작'인 닥터 봉을 통해 청룡영화상에선 신인상도 아닌 남우주연상 후보에 곧바로 오르기도 했으며 백상에선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다음, 이듬해에 곧바로 초록물고기를 통해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기까지 했다.[2] # 그리고 이 영화 데뷔작으로 신인연기상을 받고 이듬해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 기록은 백상은 커녕 주요 시상식 중에서도 남녀배우 통틀어 한석규가 유일하게 세웠으며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또한 연기력과 작품의 시너지가 최고조였던 90년대 전성기 시절에는 5년 연속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었다. 무엇보다 1997년에 초록물고기로는 그 해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독식하여 남자 배우 '최초'로 한국 3대 영화상 남우주연상 트리플 크라운을 한 번에 달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자 배우 기준으로 이 트리플 크라운 기록은 한석규 이후로 딱 3에 더 나오지 않았는데, 아직까지도 그가 달성한 최연소 트리플 크라운 달성 기록(만 33세)은 깨지지 않고 있다.

2.1. 연기 스타일

시나리오를 주의깊게 보는 만큼 단순 감정 연기뿐만아니라 캐릭터에 대한 디테일한 연구와 설정에 공을 들이는 편이다. 이 때문에 현장에서도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자주 내며 이것이 실제 극중에 활용되는 경우가 상당하다. 대표적으로 시신으로 돌아온 광평을 본 세종이 '차마 믿지 못하겠다'며 광평의 팔을 계속 머리 위로 올렸다가 떨어뜨리는 장면은 원래 대본대로라면 그냥 광평의 시신을 태운 가마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이었지만, 한석규의 요청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원숭이들이 동료의 죽음을 그렇게 확인한다는 것에서 따왔다고. # 또한 이만원씬으로 유명한, 젊은 세종(송중기)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대본에 아예 그 자체가 없었지만, 한석규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 뿌리깊은 나무의 장태유 PD는 한석규의 연구를 통해 반영된 장면이 매회 한두 신은 꼭 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 구타유발자들 문재가 계속 침을 뱉는 버릇은 시나리오에 없었고, 첫 촬영 당시 한석규의 순수한 아이디어에서 생긴 설정이다. # 이는 시나리오 후반부에 문재가 쥐약을 용각산으로 착각하여 먹는 모습이 등장하는만큼 침을 뱉는 버릇을 통해 호흡기가 안 좋다는 캐릭터의 특징을 잡은 것인데, 덕분에 이 설정이 없었더라면 용각산 먹는 장면이 상당히 뜬금없을 뻔했다. 또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속 백성찬의 백발도 그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인 형사 캐릭터와 전혀 다른 개성을 살리고 싶었다고 하는데, 이 백발 요소로 동물적인 본능의 검거율 100%의 형사가 지니는 날카로운 이미지가 더욱 강조되기도 했다. # 그 외에도 WATCHER의 도치광이 껌을 자주 씹는다는 소소한 캐릭터 설정 또한 독자적인 아이디어다. #

이러한 세세한 캐릭터 연구를 바탕으로, 대본대로 정석적인 연기를 펼칠 것이라는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은근히 애드리브도 많이 치는 스타일이다. 그때 그 사람들 촬영 당시 "연기를 막 해달라. 대신에 잘 해달라"는 임상수 감독의 말을 듣고 촬영 현장에서 즉석으로 여러가지 애드립을 치면서 연기를 즐겼다고 밝히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각하를 할아버지로 말한다든가, 헌병을 화이바로 표현한 것. # 혹은 영화의 대표적인 웃음 포인트 중에 하나인, 부하에게 "너 IQ 몇이냐?"가 묻는 질문도 모두 그의 애드리브였다.[3] # 극 중에서 여러번 언급되기도 하며 한석규가 맡은 주 과장의 캐릭터성이 깊게 드러나는, '껌을 계속 씹는다'는 설정 또한 그의 아이디어에서 왔다. 오죽하면 김혜수 이층의 악당 촬영 당시를 회상하며 “한석규는 워낙 점잖은 이미지여서 애드립을 안 할 줄 알았는데 그의 촌철살인 애드립에 웃음을 참지 못해 NG를 낸 적도 있다. ‘어떻게 이런 애드립이 나올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놀라웠다.”라고 밝혔을 정도. # 실제로 이층의 악당 속 집주인과 다투다가 주민등록번호 읊는 것이나 지하실에 갇혀 배가 고파서 과자봉지 냄새 맡으며 허기를 달래는 모습 등이 모두 애드리브였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애드리브는 잔재주일뿐 배우가 알아서 마음껏 하고 싶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믿고 기회를 준, 무대를 만들어준 감독에게 고맙다고 말을 돌렸다. # 뿌리깊은 나무의 이만원씬에서 젊은 날의 자신을 향해 자기모멸의 극단적 행위였던 침을 뱉는 행위도 그의 애드리브였다. 또한 WATCHER에서는 13살 차이나는 허성태와 친구 역할이였지만 감독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보이는 것에 대해 걱정하자, 한석규는 첫 촬영때 곧바로 "너 형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라는 애드리브 대사를 치며 실제로 둘 사이가 형동생/선후배 관계이라고 상황 정리를 하는 등, 작품과 극 중 캐릭터는 물론 캐릭터들 간의 관계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애드리브를 얹는 양상을 보인다. # 각종 메이킹 영상을 보며 이러한 면모를 더욱 잘 볼 수 있는데, 이같이 한석규의 섬세한 연기 스타일은 캐릭터의 매력과 작품의 디테일을 더해준다.
파일:한석규 연기스타일.jpg
또한 연기를 할 때는 감독이 원하는 스타일로 한 번, 본인의 프리스타일로 다시 한 번 연기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 후 감독이 택일을 하는데, 후자가 채택된 대표적인 예가 프리즌에서 걸어오면서 바나나를 먹는 장면이다. 원래 감독은 아무 것도 없이 그냥 걸어오라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이 장면을 통해 나홀로 바나나를 먹으며 유유자적 활보하는 모습을 통해 교도소에서 교도관없이 혼자 다녀서는 안된다는 독보 금지의 규칙을 깰 수 있을 만큼 교도소 내 익호의 제왕적인 입지를 단편적으로 알 수 있다. 근데 본인은 감독님이 원하는 걸 좀 안좋게 연기한다고 고백했다.(...) #

2.2. 그 외 특징

성우 출신답게 목소리가 굉장히 좋다. 깊고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는 서울 사투리가 묻어나오는 말투와 함께 한석규의 트레이드 마크. 실제로 '일반인들은 연예인 중 누구의 목소리를 선호하고 가장 멋지다고 느낄까'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남자 배우 중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 덕분에 배우 데뷔 초부터 좋은 목소리로 주목을 받아 극중 나레이션을 자주 맡았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의 이호재 감독은 "한석규 배우를 캐스팅하며 내레이션을 하지 않는다는 건 낭비"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 한석규와 함께 목소리 좋은 대표적인 배우, 이병헌 역시 여러 배우들 중에서 한석규의 목소리를 최고로 언급한 바 있다. #

목소리와 함께 배우로서 한석규의 가장 큰 장점이자 특징으로 꼽히는 발성은 그 어느 배우와 비견당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역대 반열 중에 한명으로 꼽힌다. 공채 아나운서 출신인 한석준은 "듣는 상대가 마이크든지 혹은 화면밖에 있는 화자든지 그 장소에 있는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듣는 사람의 귀에 정말 정확하게 날라와요. 내가 지금 딴 짓을 하고 있어도 그 분의 목소리나 발성이 들리는 순간 그 쪽으로 고개를 확 돌릴 수밖에 없는, 집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에너지와 힘이 있다."라고 한석규의 발성을 설명하면서 그를 남자 배우 최고의 목소리/발성으로 꼽았다. 심지어 "발성계의 반칙"이라고 평하기까지. # 그리고 이러한 발성은 극장 사운드가 별로 좋지 못했던 90년대 극장가에 사정과 맞물려 그의 장점이 특색을 빚어 더욱 빛을 보게 만들었다.

한편, “노래를 통해서는 발성을 배웠고 성우를 할 때에는 소리의 중요함, 발음, 국어의 바른 사용을 많이 공부했다. 배우는 결국 말을 많이 하는 일 아닌가.”라고 본인이 직접 언급할 만큼 가요제 출전 및 수상에 성우 데뷔까지 배우로서는 다소 특이한 경력도 그의 연기에 많은 영향을 주며 장점으로 작용하는데, 대표적으로 한석규가 말하는 대사들을 유심히 들어보면 대부분 장단음을 구별해서 발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우시절 평소에 사전을 가지고 다니면서 자신이 쓰는 단어 발음이 정확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는 등 발음 연습도 상당히 하였고, 실제로 몇 안되는 단점으로 꼽히는 대사에서 묻어나오는 서울 사투리와 늘어지는 말투의 소유자임에도 신기하게도 딕션 문제는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영화 우상의 경우 전체적으로 대사가 안 들린다는 불만이 상당히 많이 제기되었지만 출연진 중 한석규만 거의 유일하게 대부분의 대사를 알아듣겠다는 평이 상당하다.

연기 스펙트럼도 꽤 넓어서 맡아 본 역할이 굉장히 다양하다. 최전성기 시절만 놓고봐도 홀아비 치과의사, 석판 공중부양 화가, 최고를 꿈꾸는 깡패,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PD, 시한부의 사진사, 한국 정보기관 OP 특전부대, 강력반 형사이며 그 장르도 각기각색이여 로맨틱 코미디, SF 판타지, 갱스터, 멜로, 고어 스릴러, 액션 첩보물까지 모두를 폭넓게 아우른다.
안경을 썼을 때 안경을 쓰지 않았을 때
파일:접속 권동현.gif 파일:쉬리 유중원.gif
1997년 영화 《 접속》 中 1999년 영화 《 쉬리》 中
파일:8크 유정원 진료.gif 파일:초록물고기 김막동.gif
1998년 영화 《 8월의 크리스마스》 中 1997년 영화 《 초록물고기》 中
안경을 썼을 때와 쓰지 않았을 때의 이미지 차이가 심한 배우 중 한 명이다. 전자의 경우 선하고 부드러우며 차분/따뜻한 인텔리의 이미지인 반면에 후자의 경우 날카로우면서도 쎄한, 선이 굵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특색을 부각할 수 있는 멜로 작품이나 CF 등에서는 안경을 쓰고 액션& 스릴러 작품 등이나 악역을 맡을 때에는 대부분 안경을 벗고 나온다. 특히나 안경을 안 쓰고 CF를 촬영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본인도 이 점을 알고 있는지 굉장히 신경쓰며 영리하게 잘 활용하곤 하는데, 실제로 안경 쓴 배우의 대표격이기도 하고 대중들이 평소의 한석규를 생각할 때 안경을 쓴 이미지를 먼저 떠올림에도, 안경을 벗고 작품에 임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특히나 영화 우상에서는 처음으로 안경을 끼고 악역을 연기하였는데 덕분에 시민들 앞에서는 온화하지만, 궁지에 몰리자 비겁하게 변하는 야누스적인 연기와 그 이중적인 면모가 더욱 강조되기도 했다.

3. 90년대의 위상과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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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데뷔작인 닥터 봉을 시작으로 은행나무 침대, 초록물고기, 넘버 3,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텔 미 썸딩까지 1995년부터 1999년사이 총 5년간 8편 연속 대흥행을 기록하면서 199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계를 완벽하게 지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들 모두 흥행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아내는 영화들이였는데, 한석규 역시 작품의 매력을 한껏 더해주는 본인의 캐릭터 소화력 및 연기력을 증명해냈다. 실제로 90년대 한석규가 찍은 모든 영화들은 모두 그해 한국영화 흥행순위에서 10위권 밖으로 나와본 적이 없다. 그마저도 청소년 관람불가 초록물고기(10위)와 넘버 3(6위)를 제외하면 나머지 작품들의 흥행순위는 모두 3위권 안이다. 1990년대 출연작 총 관객수가 무려 1,370만명. 또한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의 접속, 청룡영화상 최우수 작품상의 초록물고기와 8월의 크리스마스,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작품상의 초록물고기,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등 출연 영화들 모두 각종 영화상을 챙겨받았다. 덕분에 한석규는 일종의 믿고 보는 배우이자 흥행 보증 수표라는 별명의 시초쯤으로 여겨지며 그만큼 90년대 어마어마한 티켓 파워를 보유하였다. 오죽하면 이 시기 충무로의 모든 시나리오가 한석규에게 제일 먼저 갔다는 말이 나왔는데 이것이 과언이 아니였다. 이후에 그가 거절한 시나리오는 후순위의 다른 배우들이 받아 보는 경향이 업계에서도 당연시 여겨졌다. 물론 당연히 다른 배우들에게는 전혀 유쾌한 현상이 아니었기에, 당시에도 "한석규의 티켓 파워는 인정하지만 같은 배우로서 참 서글프더라."라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이러한 명성으로 쉬리를 통해서 한국 배우 중에서는 최초로 러닝개런티를 받기도 했다. # 또한 3여년간의 긴 공백기를 가질 동안에도 남배우 중에는 여전히 캐스팅 1순위였으며 개런티도 한국 배우들 중에 가장 고액을 받았을 정도. #

또한 이러한 이유들로 한석규의 출연 여부가 곧 투자의 성패를 가르기도 했다. 실제로 한석규는 시나리오를 고를 때 누구나 좋아할 만한 무난한 작품보다는 무언가 새로운 구석이 있는 작품들, 다시 말해 기획 단계에서 투자자들로부터 환대를 받은 예가 드문 작품들을 대개 택했는데, 한석규의 출연 확정 소식이 알려지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적극적인 영화 투자를 받을 수 있었을 정도였다. 대표적으로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가 있다. 쉬리의 경우 그보다 더 했는데, 워낙 대작으로써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발주자라 이를 회의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었을 뿐더러 제작 당시 외환 위기 직후였던지라 전작 은행나무 침대의 대성공으로 충무로에서 입지가 상당했던 강제규 감독도 투자까지 받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한석규의 출연 소식이 전해지자 마자 삼성영상사업단에서 막대한 제작비를 투자했고 무사히 영화 제작을 마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 동안에는 씨네21에서 조사한 '충무로 파워 50인'에서도 최소 10위권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최고 순위는 1998년에 조사한 4위. 제작, 배급, 상영, 투자, 비평, 정책 등 영화를 둘러싼 전 분야를 고루 포함하는 영화계의 파워 게임에서 배우가 4위를 기록한 것은 매우 이례적일만큼 당시 영화계에서의 한석규의 입지와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웬만한 유명 제작자와 감독도 한석규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 심지어 한창 공백기를 갖고 있던 2002년에도 영화제작자들이 뽑은 관객동원력 1위의 남배우로 꼽히기도 했다. #

영화 산업적인 면에서 1990년대는 1950년대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충무로의 질서가 해체되고 영화계 외부에서 수혈된 새로운 인력들과 대기업과 금융권의 참여로 제작과 유통환경이 개선되면서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모두 한국 영화가 한 단계 도약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 영화는 주먹구구식 가내수공업에서 문화 산업으로 환골탈태한다. 그리고 이 흐름의 최선두에서 흥행과 비평 모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인 한석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석규는 한국 영화계를 완벽하게 지배하면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실제로 한석규 덕분에 그동안 외면당하고 있었던 한국영화는 국민들의 관심을 되돌려놓게 되고 멀티플랙스에 보급과 시너지 효과를 내며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시기별 주요 배우들로 보자면, 1980년대에는 안성기 충무로 황제로 영화계 전반을 장악하던 흐름이 90년대에 와서 문성근, 박중훈, 최민수, 이경영 등 신진의 등장으로 점차 파이가 분할되어지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다양성이 발화되던 영화판을 일시적으로 한석규 1인의 시대로 봉합했으니 말 다했다. 물론 한석규의 전성기가 끊긴 2000년대로 가서는 이 파이가 다시 충무로 트로이카( 송강호, 설경구, 최민식)로 나뉘게 되며 그 이후로 김윤석, 황정민, 이병헌, 하정우 등 후발주자들이 추가로 대거 등장하면서 춘추전국시대로 돌입한다.

요약하여 그의 전성기는 5년 정도라는 다소 짧은 편이긴하나, 후술할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터지며 배우로서 오랜 기간 하락세와 슬럼프를 맞이했음에도 송강호, 전도연에 이어 지난 30년을 빛낸 배우 3위에 뽑힐 정도로 이 전성기때의 임팩트와 영향력, 장악력은 한국 영화 역사상 길이 남을 정도로 전무후무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 즉, 현재의 수많은 탑배우들의 존재감을 오롯이 혼자 보유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3.1. 당시 자료들

파일:1998년 연예인 인기순위.png

파일:코바코1위 김희선 한석규.png

<rowcolor=#FFFFFF> 1999년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 '광고주' 실태조사
선호하는 남자 광고모델
1위
한석규
2위
김국진
3위
최불암
4위
안성기
5위
차승원
6위
송승헌
7위
박중훈
8위
유동근
9위
박상원
10위
배용준
#

<rowcolor=#FFFFFF> 연합뉴스 '가장 좋아하는 남자 영화배우'
<rowcolor=#FFFFFF> 연도 순위 득표율 링크
1999년 1위 31.0% #

<rowcolor=#FFFFFF> 한국대학신문 '가장 좋아하는 영화배우'
<rowcolor=#FFFFFF> 연도 순위 득표율 링크
1997년 1위 34.0% #
1998년 1위 19.4% #
1999년 2위 25.8% #
2000년 2위 -[4] #
2001년 3위 10.2% #

<rowcolor=#FFFFFF> 경향신문 '독자가 뽑은 광고 모델'
<rowcolor=#FFFFFF> 연도 순위 득표율 링크
1996년 1위 14.0% #

3.2. 왜 몰락했는가?

그러나 90년대와 00년대 이후 들어서의 한석규의 위상은 확연히 다르다. 물론 한석규가 한때 하락세를 겪었던 원인은 연기력이 좋지 못했던 것도 본인의 행실이 나빴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영화계 독보적인 ' 원탑' 한석규가 갑작스러운 추락을 맞이한 것을 넘어 10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침체기 내지 슬럼프를 겪은 것에 의아함을 가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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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영화계 내에서는 이전부터 한석규 원탑체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던 것이 사실이다. 배우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기반으로, 시나리오와 캐스팅은 물론 제작 전반적인 과정에 참여하는 등 한석규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도 스포트라이트는 오로지 한석규만 받아가는 구조속에서 한석규를 아니꼽게 보는 업계인들의 시선이 점점 늘기 시작했던 것. 게다가 영화 홍보에 소극적이며 방송 출연은 커녕 매체 인터뷰마저 꺼리는 한석규의 연기적 신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CF 촬영에는 선호했던 성향 역시 이러한 좋지못한 시선에 한 몫했다. 제작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출연료의 경우, 어찌보면 배우들의 전체적인 개런티가 극적으로 높아지게 된 것도 원탑 체제속에서 높은 개런티를 받은 한석규가 사실상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업계에서는 이런 한석규를 좋게 볼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업계내에서의 단순한 반감에 그쳤지 그 충무로의 흥행보증수표 한석규가 언젠가 영화도 몇번 실패하고 하락세를 가지더라도 10여년간의 긴 기간동안 대침체기를 겪으며 ' 퇴물'이라는 소리를 들을 날을 예상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한석규가 그런 일들을 겪으며 몰락하기까지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섞여있었고,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3.2.1. 3년 2개월이라는 긴 공백기와 이중간첩의 흥행 대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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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쌓아왔던 "흥행보증수표"라는 이미지와 필모그래피(흥행 성적, 작품성 등)가 한 순간에 무너뜨릴정도로, 몰락의 가장 큰 요인이다. 물론 재충전을 위한 공백기라는 사유는 충분히 감안할만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 공백기가 2년을 넘어 3년이 넘어가는 등 길어지면서, 그 천하의 한석규도 점차 대중들 사이에서도 잊혀지기 시작했다. 현재 최정상 배우로서 입지를 가지고 있는 송강호, 최민식, 이병헌 등의 차기작 텀을 보면 웬만해선 필모의 공백을 1년 넘게 갖으려 하지 않는 것과는 굉장히 대조적이다. 게다가 인터넷도 발달되어 있는 지금과 달랐던 당시는 대중들에게 잊혀지기 더더욱 쉬웠다. 게다가 00년대 들어 영화 산업 시장도 굉장한 성장을 거듭하면서 한석규의 그늘에서 그동안 빛을 못 보던 다른 배우들의 도약도 조금씩 시작되었다. 그 결과 굳이 한석규가 아니더라도 연기나 흥행 면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만한 배우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 3년 2개월 동안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가 충무로 트로이카로 묶이며 한석규의 자리를 완전히 대신하게 되면서 그로서는 조금씩 설 자리를 잃게 된 셈이 되고 말았다. 송강호는 반칙왕으로 씬 스틸러 조연급을 넘어 주연 데뷔에 성공적으로 안착, 공동경비구역 JSA로 자리를 확실하게 잡았으며 최민식은 쉬리를 통해 슬럼프를 완전히 씻어내고 해피 엔드 파이란으로 정상의 자리를 공고히 다졌다. 설경구는 99년 박하사탕으로 혜성같이 등장하여, 2002년에는 1997년의 한석규처럼 공공의 적, 오아시스, 광복절 특사를 연속으로 히트시킨다. 3년 2개월의 공백기 동안 세대교체가 순식간에 이뤄지게 된 것이다. 특히나 송강호와 최민식의 경우 그전까지만 해도 한석규가 주연으로 나온 초록물고기, 넘버 3과 같은 작품들에서 조연 내지 단역으로 출연했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한 격세지감이다.

물론 그 3년여년의 기간동안 한석규도 마냥 쉬기만 한것은 아니였다. 해마다 30여편의 시나리오를 선별해나가면서도[7] 선술했듯 직접 시나리오 공모전을 열기도 했으며 당선작들 중에서 직접 출연하려는 작품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여러가지 사정으로 제작 무산되는 등의 비운을 겪으며 어쩌다보니 공백기가 길어지게 된 것. 그러나 그때의 대중들이 이 사실을 알리도, 딱히 이해해줄 리도 없었다.

게다가 그 긴 공백기를 뚫고 개봉한 영화인 이중간첩이 흥행에 대실패하면서 한석규의 커리어에 있어 더 큰 치명타가 됐다. 실제로 이중간첩으로 복귀하기 전년의 조사에서도 관객동원력 1위를 기록해 건재를 과시했지만, 이중간첩이 개봉 및 흥행 실패를 하고난 해에는 무려 12계단이나 떨어진 13위에 위치했다. # 이 때문에 데뷔 이후로 인터뷰를 꾸준히 피하는 것으로 기자들 사이에선 악평이 자자하기도 했고 한 시대를 상징했던 배우의 극적인 실패만큼 자극적인 기사소재가 없으므로, 여러 매체에선 "한석규 시대의 종언"과 같은 표현을 쓰기까지 하며 한석규를 집중적으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90년대의 커리어마저 현재로 따지면 물로켓론과 다를 바 없는 거품 취급을 받을 정도로 전체적으로 '퇴물'의 이미지가 씌어지며 기존까지의 명성의 추락은 가속화되었다.

한편 한석규는 이중간첩 촬영 도중 진행한 인터뷰에서 '왜 공백기를 가졌냐'고 묻는 기자의 말에 한석규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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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의 시간이 지난 뒤, 2014년 12월 11일 JTBC 뉴스룸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는 한국영화의 거대한 거품이 낀 시기고 이 거품이 다 빠져나간 후에서나 진짜 작품 활동을 해야 할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001년~2003년은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 가는 감독, 작품, 배우들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나온 시기였다(…). 특히 2003년은 박찬욱 올드보이, 봉준호 살인의 추억, 김지운 장화, 홍련이 한꺼번에 출현했던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황금기로 꼽힌다. 물론 2014년 12월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는 '부흥기였지만 동시에 거품이 굉장히 많은 시기였다'는 표현을 통해 정정했다. 실제로 앞선 영화들을 제외한 메인스트림에서는 오직 수익만 노리는 개그+신파+조폭이라는 코드로 묶을 수 있는 2000년대 초중반의 B급 이하의 영화들이 무더기로 양산된 시기이기도 했다. 재밌는 것은 이러한 작품들의 대박 흥행 때문에 조폭미화물 양산이 가속화되었다. 이런 류의 작품들을 토대로한 장르마저 새로 만들어도 될 정도로 비슷한 아류작들이 양산되었고 이런 작품의 주연들이 온갖 예능에 출연해서 개봉 1~2주간 후딱 벌어먹고 빠지는 식의 쓰레기스러운 현상이 지속되었던 시기였다. 또한 상술한 명작들도 많았지만, 망작의 대명사인 긴급조치 19호,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주글래 살래, 클레멘타인 모두가 한석규의 휴식기~복귀 시점인 2002년~2004년에 나온 것이기도 하다.

3.2.2. 매니저이자 친형 한선규

당시 한석규의 매니저를 맡은 친형 한선규는 한석규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1차 검토하는 역할도 맡았다. 하지만 그렇게 시나리오를 판단하는 역할만 했으면 좋으련만, 본인의 능력을 넘어선 영화 제작에까지 관여하다 보니 정작 한석규 본인이 하고 싶었던 작품은 시나리오 선별 작업에서 퇴짜를 놓는 경우도 상당했다. 때문에 김기덕 감독의 악어와 같은 좋은 작품들을 놓치게 되면서 한석규는 한동안 형과 많이 싸우기도 했다고 밝혔었다. 또한 은행나무 침대를 통해 생긴 제작자 이승재와의 인연으로 인샬라의 주인공으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었지만, 한선규가 상대 여배우 캐스팅 및 제작에도 간섭을 하는 바람에 제작진 내에서 불만이 표출되면서 결국 최종 캐스팅에서 탈락되었다. 충무로 입성 초기 닥터봉이 크게 성공하여 수많은 시나리오가 들어올 무렵에는 사전에 한석규와 상의없이 무조건 출연한다고 했다가 나중에 출연 번복을 하거나 개런티가 적다며 퇴짜를 놓기도 했다.

이외에도 한선규는 한석규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만행들을 여럿 보이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영화잡지 월간 스크린에서 주최한 핸드프린팅 행사건이 있다. 이때 행사제의를 처음 들은 한석규는 '형과 상의해서 제게 말씀해 주세요.'라고 해서 잡지사에서 한선규에게 다시 제의를 했더니, 한선규는 '이런 건 박신양 같은 애들이나 해야 한다.'라며 타 배우의 간접비하는 물론 실명 거론까지 했다. 그리고 이는 1999년 해당 잡지내에 언급을 통해 그대로 박제가 되면서 해당 발언의 당사자도 아닌 한석규가 억울하게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락내리락하였고[8] 업계 내에서 평판이 매우 안좋아지면서 한석규를 기피하는 제작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선규는 심지어 그 동안 한석규가 벌어 준 돈 수십억 원으로 영화사를 차려서 제작까지 했으나 촬영 도중 제작이 중단되거나 개봉을 하더라도 손익분기점을 못넘으서 손실도 상당히 많이 봤다.

다만 훗날의 한선규의 인터뷰를 들어본다면, 단순히 한선규가 혈연으로 한석규의 매니저를 맡아 막무가내로서 사고치고 말아먹기만 했다기엔 나름대로의 고충도 심했던듯 하다. 특히나 한석규가 이미 드라마로도 커리어를 나타냈고 닥터봉, 은행나무 침대를 연이어 성공을 거뒀음에도 충무로 관계자들 중 사이에선 그때까지도 "한석규가 영화 몇 편 찍었다고 무슨 배우냐? 쟤는 탤런트지."라고 영화판에서 한석규를 은근히 깔보는 상황도 많이 겪었다고 한다.[9] 이 때문에 한석규가 계속 작품을 흥행시키며 몸값이 수배로 올라가자 상황이 반전되자, 갑질하던 영화 제작사들과 관계자들을 역으로 을질을 했다는 것. 게다가 계약상 러닝개런티를 한국 배우 최초로 도입한 것 역시도 한선규의 아이디어여서 한석규가 수억의 개런티를 챙길 수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한선규 역시 과만 있는 것은 아니다.

3.2.3. 까다로운 시나리오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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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의 모든 시나리오가 한석규에게 제일 먼저 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90년대 한석규의 위상은 어마어마했지만, 그만큼 그 당시에도 한석규는 까다로운 시나리오 선정으로 유명했다. # 물론 배우가 시나리오를 선별하는 능력은 중요하지만, 그 까다로움이 너무 지나쳤다는 것이 당시 업계인들의 주된 평가이다. 실제로 영화 접속의 경우, 제작이 확정 나기 전부터 여러번 시나리오가 수정되었는데 한석규가 처음 기획서를 보았을 때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다가 수정된 시나리오를 보고는 출연에 망설였고 스무번째 수정된 시나리오를 보고는 "못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결국 시나리오는 다른 남자 배우들에게 거쳐갔지만 '한석규가 거절한 시나리오'라는 딱지가 붙은 영화에 출연을 결정한 배우들은 없었고, 거의 2년을 채우는 시간이 지나 25번 고쳐 쓴 마지막 시나리오를 보고나서야 한석규는 출연 결정을 했다. 그리고 한석규가 출연을 결정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에 가속화가 붙었을 정도다. # 이는 한석규 본인이 좋은 시나리오에서 좋은 영화가 나온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서였고, 실제로 직접 시나리오 공모전까지 열었을 정도로 시나리오는 한석규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였다.

이러한 한석규의 깐깐한 시나리오 선정은 그의 전성기를 완성시키면서도 더 견고히 만들어주었지만, 동시에 양날의 검으로 돌아왔다. 시나리오 선정에 너무 오래 걸리면서 많은 각본가/감독/제작자들의 불만이 쌓여갔던 것. 실제로 한석규의 출연 여부에 따라 투자의 여부가 갈렸기 때문에 일단 한석규에게 먼저 시나리오를 보내기는 하지만 한석규의 출연 의사가 결정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제작이 올스탑되어야 했기에 관계자들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였다. 게다가 안그래도 한석규 본인이 (시나리오를 꼼꼼히 보기에) 영화 출연을 결정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이미 흥행보증수표 한석규에게 모인 시나리오가 굉장히 상당했으므로 시나리오를 고르는 시간이 중첩되면서 시나리오를 수락 내지 거절하는 과정까지 굉장히 오래 걸렸다. 게다가 한석규가 수락할 가능성이 있기에 그 사이 다른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건내주지도 못했다. 심지어 이런 일련의 과정을 오래 걸치고 나서 본인들의 영화 시나리오를 한석규가 거절했더라도 영화 제작은 계속해야 하므로 후순위의 다른 배우들을 대신 캐스팅하려 했지만, 선술했듯 '한석규가 거절한 시나리오'를 기피하는 배우들이 상당했다. 물론 이것은 배우 스스로의 자존심 문제도 있을 뿐더러 시나리오를 꼼꼼히 보고 잘 고르기로 유명한 한석규가 거른 영화는 졸작 내지 망작 일 것이라는 인식이 배우들 사이에서 파다했기 때문이다. 캐스팅에서부터 난항을 겪은 영화는 결국 제작 자체에 큰 차질을 빚은 것이다. 이 덕에 8월의 크리스마스때부터 차츰 영화계 산업속 한석규 원탑 구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져만 갔다. 이런 와중에 선술한 한선규와 관련해 업계 평판이 점차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긴 공백기 동안 한석규를 대체할만한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굳이 그 고난을 겪으면서까지 한석규를 쓸 이유가 없으니 시나리오가 자체가 잘 안 가게 되었다. 시나리오가 적게 가니 동시에 좋은 시나리오도 기존에 비해 적게 받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3.2.4. 신인감독 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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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흥행배우들을 보면 감독과 배우들이 인맥으로 같이 가는 경우가 많은데, 한석규의 경우 신인 감독과의 작품을 고집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박찬욱, 김지운, 이창동, 봉준호 감독 등 검증된 감독과 작품을 하는 최민식, 송강호, 이병헌이라든지, 강우석, 윤제균 감독 및 그 연출부 출신들과 작업을 하는 설경구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한석규의 경우, 데뷔작을 같이 했던 이광훈 감독은 닥터 봉 이후 패자부활전, 자귀모, 천년호라는 영화 팬들은 알만한 최악의 작품을 연속으로 연출하며 2003년을 끝으로 영화계에서 자취를 감췄고 현재 뉴욕에 거주중이다. 그리고 은행나무 침대와 쉬리를 같이했던 강제규는 현재 제작에만 전념하며 가뭄에 콩 나듯 연출하다가 마이웨이의 실패와 한중합작영화 제작 실패 등등의 악운이 겹쳤으나 다시 영화연출을 하게 되었다. 한편 초록물고기의 이창동 감독과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감독은 활발하게 작업을 하는 감독이 아니고, 접속과 텔 미 썸딩을 같이 했던 장윤현 감독은 그 후 썸, 황진이, 가비가 연속으로 실패해버렸다. 거기에 넘버 3의 송능한 감독은 아예 영화계를 떠났다. 즉, 8편 연속 흥행으로 1990년대 전성기를 가져다 준 감독 중 현재에도 활발하게 작업을 하고 있는 감독들이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한석규에게 유명 감독들과의 협업할 기회가 전무하지도 않았다. 앞서 데뷔작인 초록물고기 이창동 감독의 후속작 박하사탕의 경우, 설경구가 맡은 김영호 역 자체가 한석규를 염두에 두고 만든 캐릭터로서 한석규에게 먼저 캐스팅 제의가 갔었다. 하지만 한석규는 장윤현 감독의 후속작 텔 미 썸딩의 촬영 기간과 곂쳐 고사하였다. 당시 스릴러 영화가 매우 찍고싶어서 거절한 것이였지만 나중에야 놓쳐서 매우 아쉽다고 밝혔으니 말 다했다. # 덕분에 신인인 설경구에게 역할이 넘어갔는데, 설경구는 박하사탕을 계기로 공공의 적, 실미도, 오아시스까지 연타석으로 성공하면서 충무로 트로이카로 이름을 날렸고 한석규의 입지를 한자리 차지했다는 점이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만약 한석규가 박하사탕을 찍었더라면 그때의 설경구처럼 이창동과의 협업을 연달아 하여 오아시스도 이어 촬영할 기회도 매우 높았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한석규가 최소한 10여년 간의 깊은 슬럼프를 겪지는 않았을 것 이라는 게 정설이다. 또한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의 경우, 상대 배우인 최민식의 강력한 추천도 있었을 뿐더러 박찬욱 감독이 구상한 이우진 역의 캐스팅 1순위가 바로 한석규였다. # 하지만 한석규는 이 역시도 서브 주연이라는 역할의 성격과 영화의 소재 때문에 고사하였다. 물론 그 당시에는 한석규를 제외하고도 매우 많은 배우들이 거절하여 돌고 돌아 유지태에게 향한 것이였으며 그 유지태마저 마지막까지 출연을 고민하긴 했다. 박찬욱 감독의 경우 복수는 나의 것에도 송강호 역에 캐스팅 제의를 받았으나 이 역시도 거절했다고 박찬욱 감독이 직접 밝히기도 했다. #

하지만 이러한 한석규의 신인감독 선호 기질에도, 한석규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서 역대 최다 관객수를 동원한 영화는 짝패, 부당거래 등으로 이미 스타 감독 배열에 선 류승완 감독과 함께했던 베를린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물론 한석규가 최전성기를 보냈던 90년대 영화들은 지금과 달리 영화 산업이 많이 발달되지 않았으며 관객수 역시 제대로 집계되지 않았다는 당시 상황을 감안해야겠지만,[10] 00년대와 10년대 출연 작품들 중에서 총 관객수 500만명은 커녕 300만명을 동원한 작품이 베를린밖에 없다는 점은 생각해볼만한 부분.

한편 한석규는 스스로가 신인 감독과의 작업을 '물물교환'이라고 표현하며 "배우에게는 아무리 변신을 하려해도 '덩어리 이미지'라는 게 분명히 있다. 배우로서 그 이미지를 어떻게 변주하느냐가 큰 고민(이다). 신인 감독 분들은 그런 고민을 배우 이상으로 함께 해준다. 내가 빠지기 쉬운 함정에서 건져주는 셈. 그래서인지 신인 감독과의 작업이 많고, 그런 면에서 보람이 크다."라고 밝힌 바 있는 데, 이에 따르면 원래부터 신인 감독을 선호하는 성향인 듯 하다. #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17년 역시나 신인 감독 나현과 함께한 작품인 영화 프리즌 관련 인터뷰에서는 "늘 나의 다른 면을 고취시켜주기에 신인 감독과의 작업이 좋다. 내가 빠질 수 있는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도전해볼 수 있는 게 장점이다. 모든 걸 거는 신인 감독들과 작업하면서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게 중요하구나’를 날로 생각하게 된다."라고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또한 2019년 우상때는 "신인 감독들의 장점이다. 모든 걸 다 걸고 한다. 자신의 모든 걸 다 쏟아 붓는 거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

3.3. 결론

이러한 이유들로 90년대 영화계의 아이콘이였던 한석규는 1996년 6월 프리미어에서 선정한 한국 배우 평가에서 여러 배우들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하였지만, 2001년 10월 프리미어에선 과대평가받은 배우 2위로 뽑혔다. #[11] 또한 기자들끼리 선정한 최악의 배우 순위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더니, 2004년 프리미어에선 흥행성 없음을 이유로 과대평가된 배우 5위에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 이처럼 2002년까지 티켓파워 1위를 기록했던 그가 2000년대 침체기 이후에는 언론에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며, 가끔 하는 설문조사 순위권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이러한 한석규의 위상의 추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로는 영화 악마를 보았다 캐스팅 비하인드가 있다. 당시 영화 제작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면서도 한석규의 절친한 관계인 최민식의 제안으로 한석규는 영화 출연에 동의했지만, 영화 제작자의 반대로 출연이 무산되었다는 굴욕을 당한 것. 아마 제작자 입장에서는 한석규가 2000년대 들어 이 영화를 비롯해 대부분의 영화에 흥행 부진을 겪고 있었던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석규를 대신해서는 이병헌이 캐스팅되었다.

그리고 뺀찌당한 한석규는 결국 영화판에서 드라마판으로 눈을 돌렸고,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 역을 택하며 16년만에 드라마 복귀를 감행하기까지 한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악마를 보았다는 흥행에 실패하였고 그 대신하여 한석규가 차선으로 택한 뿌리깊은 나무가 초대박이 나면서 부활이라 칭할만큼 커리어에 큰 전화위복이 되긴했지만, 한석규의 출연 여부로 투자의 여부가 갈려 모두가 그의 출연을 바라며 캐스팅을 하기 위해 어떻게든 노력했던 과거를 생각했을 때 제작자의 반대로 영화 출연이 무산되었다는 그 사실만을 놓고보면 씁쓸하기 그지없다. 실제로 이 뿌리깊은 나무의 대 성공전까지 배우로서 한석규는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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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석규는 이러한 자신의 침체기 내지 슬럼프 기간에 대해 어찌보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며 나름대로에게는 뜻깊은 시기였다고 언급했다. 중심에서 물러나는 경험도 해보고 또다시 여러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도전을 거듭하면서 많은 생각들 속에서 스스로 변화를 겪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배우가 된 후 계속해서 스스로 물어왔던 ‘나는 연기를 왜 하나?’라는 질문에 겨우 ‘내가 느끼고 싶어서 연기한다’라는 답을 내리게 되었는데, 이같은 깨달음도 2000년대 넘어가면서 소위 슬럼프 기간을 겪는 동안 얻을 수 있었다고. 90년대처럼 승승장구만 했다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살았을지도 몰랐고, 오히려 그때 그만큼 나빴기 때문에 지금이 좋다는 등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

또한 이때부터 흥행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영화들을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할 수 있었다고 얘기했는데, 흥행 보증 수표라는 별명 내지 평가와 함께 주변 시선에 대한 부담감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넘버 3 출연 당시 초록물고기에 이어 또 깡패 영화를 찍냐는 소리를 들었고, 이 때문에 접속의 차기작을 고르다가 또 멜로 영화를 찍는다는 생각에 8월의 크리스마스 출연을 망설인 적도 있을만큼 나름대로 장르의 변화나 연기 변신에 대한 압박감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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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규에 대한 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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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수(배우 /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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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승욱(감독 /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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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작 본인은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시절에 리포터가 이와 관련해 언급하자 "그놈의 평범한 얼굴..."이라고 다소 투덜거리면서도 속상해하는 반응을 보이는 등, 이같은 수식에 대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애초에 개성없이 평범한 외모라는건 돌려말해 배우로서는 매력없는 마스크를 지녔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니 배우입장에선 이런 반응이 당연하다. 그것도 모자라 미디어에선 허구한 날 당대 최고의 미남 배우들과 외모 비교를 당했으니...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그러한 미남 배우들의 대표적인 배우격인 장동건은 되려 무슨 역할을 맡든 자연스럽고 어울린다는 점에서 한석규의 외모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2] 닥터 봉이 개봉한 건 1995년이지만 이때 백상은 이듬해인 1996년에 진행되어 수상했기에 1년 차이가 맞다. 그리고 사실 신인상을 받고 곧바로 최우수연기상을 받은 것이 2년 차이라 해도 어마무시한 기록이며 이 기록에 가까운 남배우는 현재까지도 나오지 않고 있다. 여배우조차 1990년 거인을 통해 신인연기상을, 1992년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 채시라밖에 없다! [3] 거사 직전, "똑똑한 놈 세 놈만 있으면 된다"는 중앙정보부장의 말에 부하를 선별하면서 내뱉는 말이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절박한 마음이 담긴 대사. [4] 기사 자체는 2001년 조사 기사이며 2000년 조사 기사는 확인할 수 없지만, 본문에 2000년에 2위를 차지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다만 이 때문에 정확한 득표율은 알 수 없다. [5] 한석규가 긴 공백기를 갖기 이전에 찍은 마지막 작품, 텔 미 썸딩이 개봉한지 정확히 1년이 지난 뒤인 2000년 11월 14일에 작성된 기사이다. 1년의 공백기를 가진 시점에서도 이렇게 강도높고 날선 비판의 기사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한석규는 여기서 2년을 더 공백기를 가졌으니... 당시 영화계와 대중들이 어떻게 한석규를 생각했는지 어느정도 짐작 가능하다. 참고로 여기서 언급되는 SF 영화 '제노사이드'는 한석규가 주최한 막동이 공모전에서 당선된 각본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인데, 시나리오 수정 문제로 영화 제작이 무산되었다. [6] 나름 메이저 신문에서 올라온 사설기사치고는 굉장히 비약적이며 과장적으로 영화의 내용에 대해 비판하는 글이긴 하지만 당시 개봉한 영화와 한석규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대강 알 수 있다. [7] 이 당시 한석규의 위상을 감안하면 생각보다 적은 양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실제로 이를 한석규가 차기작에 적극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게 한석규의 형이자 매니저를 자처한 한선규가 먼저 1차적으로 검토한 뒤 한석규에게 전달 된 것이므로 결코 적지 않은 양이다. # [8] 사실 당시 한석규는 개인의 품성은 둘째치고 인터뷰나 방송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CF에 전념하였기에 이 모습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점차 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한선규의 행동들 덕에 언론에 더더욱 찍히면서 결국 한석규의 사소한 행동마저 조금씩 구설수에 오를 정도가 되고 말았다. [9] 당시에는 희극배우는 코미디언, 드라마 배우는 탤런트이고 오직 영화배우만 배우 타이틀을 사용해야한다는 문화가 아주 심했고, 배우병 항목을 보면 알듯이 아직도 영화배우와 드라마배우 사이에 급을 나누는 영화인들은 많은 편이다. [10] 실제로 쉬리의 경우 지금의 관객수로 환산하여 계산하면 천만 영화라는 것이 반쯤 정설이다. [11] 재미있는 것은 이때 또다른 항목인 '한국의 최고 배우'에서도 한석규는 4위에 랭크되었다는 점이다. [A] 이때 한석규는 단역을 맡았다. [13] 한석규와 최민식의 캐스팅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무척 실망했지만, 이내 연기를 보곤 마음을 돌리고 두 배우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실제로 김운경 작가는 서울의 달이 다 끝나고 얼마 안 가 일약 스타가 되버린 한석규를 향해 이런 멘트를 남겼다. [B] 이때 상대 배우는 단역을 맡았다. [B] [16] 유 퀴즈 온 더 블럭 출연 중 영화 접속의 캐스팅에 대한 코멘트이다. 전도연은 이 날 이것외에도 영화 해피엔드의 출연 이유로 "그때 당시는 이제 한석규씨가 나오는 영화와 나오지 않는 영화 두가지로 나뉘었다고 그랬잖아요, 근데 그냥 어린 나이에 나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였다."라고 얘기하며 한석규를 다시 한 번 언급하기도 했다. 그때 그의 위상이 어느정도였는지 대강 알 수 있는 부분. [B] [B]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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