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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하야시 요시키 林 佳樹[1] |
출생 | 1965년 11월 20일 ([age(1965-11-20)]세) |
치바현 타테야마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5cm, B형 |
직업 | 가수, 드러머, 피아니스트 |
장르 | 메탈, 록 음악, 클래식, 팝 |
레이블 | X Project |
소속사 | William Morris Endeavor Entertainment |
소속 그룹 |
X JAPAN THE LAST ROCKSTARS |
활동 시기 | 1982년 ~ 현재 |
악기 | 드럼, 피아노, 보컬 |
가족 | 남동생 하야시 코우키(1970년생)[2] |
링크 | | | | |
[clearfix]
1. 개요
일본의 가수 겸 아티스트. X JAPAN과 THE LAST ROCKSTARS의 멤버이자 리더이다.2. 생애
2.1. 유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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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요시키와 어머니의 모습 |
4세가 되던 해에 요시키는 부모님에게 피아노를 사달라고 했다. 부모님은 갑작스러운 부탁에 처음에는 의아해 했지만, 집 근처 걸어서 2분 거리에 있는 피아노 학원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요시키가 그랬을 거라고 짐작했다. 아버지는 요시키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학원에도 등록시켜 줬다. 그 피아노 학원 앞에는 콜리견이 한 마리 있었는데 요시키는 갈 때마다 항상 무서워했다. 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남학생은 본인 포함 2명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여학생이었다. 그래도 배우는 속도가 빨라서 선생님에게 칭찬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5살 때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고 그곳에서 50년 이상의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는 친구 토시를 처음 만나게 된다. 스미레구미(제비꽃 반)로 같은 반이었다. 토시의 어머니는 피아노 선생님이었고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살았다. 이후 토시와는 초중고를 모두 같이 나오게 된다.
2.2. 초등학교 시절
1972년 4월, 요시키는 다테야먀 사립 소학교에 입학했다. 여름 방학에는 친구들과 함께 바다에서 낚시를 하거나 인근 덤불에 있는 딱정벌레와 사슴벌레를 잡으러 다녔다. 하지만 여전히 건강은 좋지 못해서 갑자기 발작이 일어나면 다시 조용히 누워있어야 했다. 심한 경우에는 학교를 쉬고 4개월 정도를 병원에서 지낸 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교통사고도 두 번이나 당했다. 첫 번째는 정면에서 자동차에 치이고, 두 번째는 오토바이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두 번 모두 몸과 머리를 다쳐 그 충격으로 천식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다.그런 요시키를 괴롭히던 것은 천식과 교통사고뿐만이 아니었다. 심각한 음식 알레르기도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할머니가 하와이 여행 선물로 사온 마카다미아 넛트 초콜릿 5 박스를 한꺼번에 먹어 버려 급성 알레르기를 일으켜 의식 불명에 빠지게 되었고, 쓰러져 있던 아들을 어머니가 발견해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해 간신히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후 요시키는 초콜릿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요시키는 의사와 간호사가 걱정할 만큼 자주 입원하며 다테야마 종합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매우 많아졌다. 부모님은 교대로 요시키를 돌보러 병원에 와줬고 발작할 때마다 간호해줬다. 숨쉬기가 힘들 때는 누워있는 것조차 할 수 없었고, 인후통과 가슴의 답답함에 정신이 몽롱해지면 등을 구부리고 가만히 고통이 지나가기 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침대에 갇힌 채 좋아하는 피아노 연습도 할 수 없게 되자, 피아노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떠올리면서 덮쳐 오는 발작의 고통을 잊으려 했다.
점점 기력을 잃어가는 아들에게 희망을 준 것은 아버지가 병실에 올 때 가져오는 선물이었다. 아버지는 몇 권의 책을 가지고 요시키의 병실로 찾아왔다. 책들의 종류는 다양했고, 아이들이 읽기 쉽게 쓰인 위인전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요시키는 베토벤의 책을 좋아했다. 병으로 청력을 잃으면서도 불굴의 투지로 작곡을 해나간 베토벤은 요시키에게 영웅이었다. 요시키는 난청과 싸우는 독일의 위대한 작곡가를 매일 학교에 다닐 수도 없고 친구도 없는 자신과 겹쳐서 생각하게 되었다. 다행히 요시키는 최소한의 출석 일수로 겨우 3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성적이 매우 좋아 공부에 지장이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통신 판매로 구입한 클래식 EP판 세트가 집에 있어서 유명한 교향곡은 거의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8살 때 요시키는 난생 처음 자신의 용돈으로 LP판을 직접 사게 된다. 매장을 둘러보며 클래식 코너에 다가가서 요시키는 빽빽하게 진열된 LP판의 재킷을 한 장씩 손가락으로 꺼내 제목과 커버 사진을 확인했다. 마침내 골라낸 한 장에는, A면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C단조 " 운명", B면에는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 B마이너 단조 " 미완성"이 수록되어 있었다. 요시키는 손에 넣은 그 레코드를 가슴에 안고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의 스테레오의 턴테이블에 올려 몇 번이나 듣고 또 들었다. 이후 요시키가 매 달 구입하는 레코드는 요시키의 보물이 되었다.
4학년으로 진급하면서 1학년 때부터 쉬는 것이 당연했던 체육 시간에도 참가했다. 의사의 만류에도 전교 마라톤 대회에도 출전하게 되었다. 뛰면서 호흡이 가빠지고 배도 아팠지만 뛰는 속도는 나날이 더 빨라지고 있었다. 요시키의 달리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던 동급생들은 그의 질주에 놀라워했다. 고작 몇 킬로였지만, 첫 마라톤 대회에서 학년 상위 입상을 하면서 요시키는 큰 자신감을 얻었다.
요시키는 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활동적이게 되었다, 키는 여전히 반에서 가장 작은 편이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여자로 많이 오해받았던 외모는 시원스러워지고 행동도 기민해졌다. 공부에도 재미를 느낀 요시키는 보통의 학원처럼 산수를 가르치는 학원을 병행하며 습자, 영어 회화 교실까지 다녔다. 바쁘게 공부하고 또 여기저기 학원에서 친구들을 만나면서 요시키는 밝아졌다. 요시키의 피아노 레슨은 빠른 속도로 늘어갔고 레슨을 하는 선생님도 요시키의 연주 수준이 오를 때마다 바뀌었다.
요시키는 피아노뿐 아니라 새로운 악기에도 빠졌다. 5학년이 된 요시키는 기악 클럽에 소속되며 트럼펫을 불게 되었다. 기악 클럽 방학을 이용하여 관악기 연주곡의 연습이 한창이었고, 트럼펫을 담당한 요시키도 클럽 활동에 매일 참석했다.
충격의 날은 갑자기 찾아왔다. 1976년 8월 여름 아침, 항상 똑같이 기악 클럽 연습을 위해 향한 나는 오후에 집으로 돌아오니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뭔가 무서운 것이 기다리고 있음을 감지하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집에는 많은 친척들이 모여 있었다. 거실에는 이불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는 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엄마와 남동생 코우키, 그리고 친척들의 얼굴이 일제히 귀가한 나를 향했다. 엄마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여섯 살의 코우키를 제외하고 모두 울고 있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친척 한 분이 "아버지는 병이야." 라고 말을 건넸다.
"지쳐서 주무시는 거야. 지금은 일어나지 못하실 거야."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가슴 속에서 불 같은 감정이 솟구쳐 목구멍으로 쏟아져 나오는 듯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크게 눈을 뜬 나의 전신에 불규칙한 떨림이 전해졌다. 고함 소리가 울음으로 바뀌면서 나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아빠는 병에 걸린 게 아니잖아요! 죽었잖아! 그러니까 저렇게 누워있는 거잖아!"
나는 통곡했다. 아이처럼 울부짖고 날뛰는 나를 아무도 달래지 못하고 마침내 억지로 몸을 잡아 눌러야 했다.
- 요시키의 자서전 제2장 「갑작스러운 죽음」 中 -
요시키가 10살일 때, 아버지가 사업난에 절망해 34세의 젊은 나이로 차에 배기가스를 틀어 놓고
자살하는 일이 발생했다. 다만 어렸던 요시키는 처음에는 자살이 아니라 심장마비로 알고 있었다. 요시키는 중학생이 되어서야 친척집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자살이라는 사실을 들어 버렸고, 충격을 크게 받는다."지쳐서 주무시는 거야. 지금은 일어나지 못하실 거야."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가슴 속에서 불 같은 감정이 솟구쳐 목구멍으로 쏟아져 나오는 듯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크게 눈을 뜬 나의 전신에 불규칙한 떨림이 전해졌다. 고함 소리가 울음으로 바뀌면서 나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아빠는 병에 걸린 게 아니잖아요! 죽었잖아! 그러니까 저렇게 누워있는 거잖아!"
나는 통곡했다. 아이처럼 울부짖고 날뛰는 나를 아무도 달래지 못하고 마침내 억지로 몸을 잡아 눌러야 했다.
- 요시키의 자서전 제2장 「갑작스러운 죽음」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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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키와 아버지가 같이 찍었던 사진 |
요시키는 친한 친구들 앞에서도 쓸쓸한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과 인근 해안에서 낚시를 하거나 바다에서 수영도 하고 피아노나 트럼펫 연습하는 것도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도 진심으로 즐겼다. 집에 있는 동안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보내고 위대한 작곡가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악보를 암기하고 있었다. 동급생이 가져오는 유행하는 일본의 팝과 해외 팝 음악도 거의 듣지 않았다. 진지한 클래식의 선율만이 요시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런 요시키가 11세 생일이 다가올 무렵 관심의 대상을 바꾸게 된다. 단골 레코드점에서 화려한 EP판의 재킷을 발견한 것이다. "다들 왜 이런 모양을 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요시키가 바라보고 있던 레코드의 밴드 이름은 " KISS"였다. 4명의 남자들이 얼굴에 흑백의 화장을 하고 검고 기묘한 의상을 입고 있었고, 그 화려한 차림의 록 밴드에 호기심과 자극을 받은 요시키는 레코드를 구입하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 턴 테이블에 올렸다. 그러자 강렬한 기타와 드럼 소리가 진동되어 요시키의 방에 울렸다. 마치 콸콸콸 물결치는 맥이 그대로 음악이 되어 빠져나가는 듯했다. 요시키는 스테레오의 볼륨을 더욱 높였다. 숨을 삼키면서 크게 울리는 소리와 박력 있는 영어 노래에 귀를 기울인 요시키는 폭음 속에서 온몸이 뜨거운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클래식 이외에도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음악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요시키는 이튿날부터 한눈도 팔지 않고 KISS의 레코드만 반복해 들었다. 지금까지 접한 적이 없는 록 음악이란 장르는 초등학교 5학년의 소년을 아주 단번에 사로잡고 말았던 것이다.
록 음악에 심취한 요시키는 어머니에게 생일 때 드럼 세트를 사달라고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흔쾌히 드럼을 사주었다. 요시키가 손에 넣은 드럼 세트는 스네어 드럼과 베이스 드럼이 하나, 탐탐이 둘, 플로어탐이 하나, 심벌 2장의 단순한 셋트였다. 2층 자기 방에 드럼을 세팅한 요시키는 즉시 연습을 시작했다. 독학으로 드럼을 두드리는 요시키는 근처 악기점에서 구매한 드럼 교본으로 연주하는 방법의 기본을 배우고 레코드에서 들려오는 드럼 소리를 기억해 비트를 만들어 나갔다. 악보를 읽고 리듬까지 가늠할 수 있던 요시키는 기본적인 테크닉은 금방 익힐 수 있었다. 스틱의 컨트롤이나 베이스 드럼, 4비트, 8비트, 16비트처럼 기초부터 셔플, 슬로우 록, 6/8박자나 3/4박자 등 고급 기술까지 차례로 마스터 해나갔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드럼을 두드리던 요시키는 계속해서 KISS의 LP 레코드를 구매해서 앨범에 실린 모든 곡의 드럼을 연습하여 순식간에 실력을 쌓아갔다. 1층 포목점에 손님이 와도 신경 쓰지 않고 연주했다.
1977년 3월, 6학년으로 진급하기 전인 봄 방학을 보내던 요시키는 무심코 보던 신문에서 "KISS 일본"이라는 콘서트의 광고가 실린 것을 보고 흥분을 누를 수 없었다. 요시키는 환호를 지르며 어머니에게 꼭 가고 싶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열성적인 아들의 감정을 알고 일본 무도관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같이 가기로 약속했다. 표 예약을 위해 접수하는 곳에 바로 전화했지만 이미 매진되어 콘서트 당일 티켓을 구해야만 했다. 1977년 4월 KISS의 콘서트의 날 당일권을 손에 넣어야 했던 요시키, 엄마, 그리고 남동생 코우키는 다테야마의 집을 나와 구단 시타에 있는 무도관으로 향했다. 기모노 옷 차림의 어머니는 콘서트 도중 배가 고프면 안 된다고 하여 도시락에 초밥 3개를 챙겼다. 무도관에 도착하자 당일권 판매 창구에는 끝없는 행렬이 이어졌다. 3명은 그 줄을 서면서 조용히 티켓이 판매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KISS의 팬들이 줄지어진 그 속에서 기모노의 여성과 11세와 6세의 남자아이까지 총 3명의 모자 일행을 무척이나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렇게 요시키는 자신이 선망하던 KISS의 공연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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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키가 그날 보았던 공연 |
혼자서 드럼을 두드리는 것에 질렸던 요시키는 친한 동료 3명과 함께 밴드를 만들기로 계획했다. 요시키가 제일 먼저 지명한 멤버는 토시였다. 토시는 당연히 요시키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또한 이미 토시는 기타 연주도 가능했다. 다른 1명은 요시키가 급하게 구해서 황급히 기타와 베이스를 구입하고 각각 처음부터 연습을 시작했다. 록을 들으며 받은 충격의 크기를 나타내는 이름을 밴드에 붙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던 요시키는 자신이 리더가 된 그 밴드에 "DYNAMITE"로 이름을 붙였다. 멤버는 드럼과 보컬을 요시키가 담당하고 토시가 기타를, 또 다른 사람이 베이스를 담당했다. Kiss와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밴드를 성립시키려면 부끄러워할 틈이 없었다. 다테야마에서 탄생한 이 초등학생 록 밴드는 근처의 악기점 안에 있는 1시간에 300엔의 대여 스튜디오 건물에서 연습을 늘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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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시절 결성한 밴드 다이너마이트의 모습 |
2.3. 중학교 시절
중학생이 되어서는 NOISE라는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요시키는 자신과 교사가 절대 상반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수업 중에 "장래의 꿈"이라는 과제가 주어졌던 날 요시키는 "록 스타가 될 것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그것을 읽은 담임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요시키를 호출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고 적으라고 했는데 왜 이런 실없는 소리를 쓰는 거냐?"라며 요시키의 뺨을 주먹으로 때렸고 요시키는 나뒹굴고 말았다. 록 스타라는 꿈을 장난으로만 받아들인 교사라는 존재가 요시키에게 젊음과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권력자의 상징이 되어갔다.요시키의 분노는 자신을 무조건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항상 NOISE 멤버들과는 별도로 교무실로 불리며 불량학생들과 행동을 함께 하게 된 것도 이즈음부터였다. 학교에서 반항적인 태도를 부렸던 불량 그룹은 밤에는 자전거로 집합하여, 정처 없이 밤거리를 누볐다. 오토바이를 동경했던 요시키는 자신의 자전거를 변형해 핸들이나 점멸 라이트를 달고 폭주족 오토바이처럼 개조했다. 이미 포목점을 닫고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가가 되어 생계를 꾸렸던 어머니는 요시키를 걱정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종종 묻곤했지만 중학생이 된 요시키는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지 않았다. 2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요시키의 말투나 태도는 점점 거칠게 되어, 동급생과 함께 대놓고 담배를 피우는 등, 몸이 약하던 초등학생 시절과는 전혀 딴 사람처럼 난폭해지고 눈초리도 매서워졌다. 반항의 증거로 외모에 집착한 요시키는 눈썹도 가늘게 깎고 머리를 염색했다.
주체 못한 반항심을 발산할 곳이 필요했던 요시키는 축구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플레이 중에 격앙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며 상대를 스파이크로 밟고, 멱살을 잡는 등 난동을 자주 부려서 경기 시작 15분 만에 퇴장당하기 일쑤일 정도로 이곳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론 중학교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담당하고[4] 교내 피아노 연주도 담당하거나 수학을 100점을 맞아 상도 받는 등 교내 문제아면서 여러 재능도 있는 독특한 아이로 학교생활을 했다.
요시키가 색다른 존재로 더욱 인기를 모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말 교내 공연에서 록을 연주한 것이다. 졸업생들을 위한 공연무대에 록 밴드의 등장은 개교 이래 처음 있는 일이였다. NOISE의 무대 데뷔에 자신감을 가진 요시키는 일찍부터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악기나 빌린 앰프를 체육관의 무대에 옮기고, 요시키와 멤버들은 KISS와 DEEP PURPLE의 곡을 선 보였다. 완벽한 연주는 아니었지만 중학생 5명이 연주하는 록을 들은 학생들은 그 음량이나 퍼포먼스의 화려함에 제대로 빠져들었다.
중학교 내에서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던 요시키의 생활환경은 3학년 진급 후 급변하게 되었다. 이때쯤 중학생이 수가 많아져 학교가 대형화가 되었다. 다테야마 시립 제3중학교가 신설되어, 지정된 학군대로 요시키는 이 새로운 중학교로 넘어가게 되었다. 중학교가 두 개로 분리되어 NOISE의 멤버는 흩어지게 되었는데 하필 보컬을 담당했던 친구들만 두 번째 중학교에 남게 되었다. 중학교가 바뀌면서 자주 만날 수 없게 되자 요시키는 그를 대신할 보컬을 찾아야 했다. 토시와 기타와 베이스를 맡은 친구도 같은 제3중학교에 다니게 되어, 요시키는 남은 멤버들에게 "여기서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사람을 보컬로 정하자"고 제안했다. 아직 굵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던 요시키 본인은 보컬에서 제외했다. 대신 토시에게 "우선 너부터 불러봐"라며 권유했고, 토시는 제일 자신 있는 곡으로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듣는 순간, 요시키는 바로 새 보컬을 정해버렸다. 그렇게 토시가 밴드의 보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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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SE 시절 모습. 앞에 보컬은 토시, 뒤에 드럼은 요시키. |
2.4. 고등학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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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구역에서 담배를 물고있는 고교시절의 요시키 |
아와고등학교 문화 축제에서 NOISE의 연주는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학교측은 록 연주와 그들의 퍼포먼스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했다. 학교에서는 록은 불량아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었고, 요시키 이외의 나머지 성실한 멤버까지 "저놈들도 모두 요시키와 같은 문제아들이다"라고 취급해버렸다. 문화제의 무대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불량아로 오해받은 멤버들에겐 미안함 마음의 요시키었으나 자신에 대해 주위에서 어떤 식으로 떠들든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드럼을 격렬히 더 빨리 치는 즐거움을 느끼며 "왜 이런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라는 생각뿐이었다.
1982년 4월, 2학년이 된 요시키는 진로별 선택에서 이과 코스를 택했다. 어린 시절부터 수학을 잘했던 그는 별로 생각할 필요 없이 이과를 선택했지만 진학의 구체적인 계획이 있던 건 아니었다. 요시키는 공부에 흥미를 잃고, 밴드를 이끄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시키와 토시 외에 멤버들이 대학 진학에 준비를 시작한다는 이유로 밴드를 빠지게 되었다. 요시키는 결국 NOISE을 해체하고 토시와 함께 새로운 밴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요시키는 IRON MAIDEN에 빠져 있어서 새 밴드의 리드 기타를 둘로 하는 것을 생각했다. 요시키는 멤버 모집을 위해 기타 실력이 뛰어난 다른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밴드에 참여하지 않을래?"라며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다.
마침내 1982년 여름, 요시키가 모은 멤버들로 새 밴드가 결성되었다. 이름은 바로 X였다. 당시 긴 이름의 밴드가 많았기에 오히려 한 글자면 문화제나 콘테스트의 책자에 실릴 때 눈에 띌 수 있다는 이유에 X라고 지었다. 또한 요시키는 "X"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알파벳의 24번째 글자 외에도 수에는 미지수의 부호, 미지의 사물, 무한의 가능성 등 여러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요시키는 밴드의 활동이 바쁘게 되면서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펑크 내기도 했다. 화난 여자친구가 "음악과 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해?"라고 물을 때면, 요시키는 "음악이지"라며 딱잘라 얘기했다. 요시키는 밴드 멤버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잃게 될 바에는 차라리 여자친구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요시키는 드럼 연습하는 시간을 확실하게 쌓아 갔다.
요시키는 첫 자작곡 I’ll Kill You를 작사/작곡한다. 고등학교 2학년, 자신의 학교 문화제에서 처음으로 이 노래의 공연을 펼친다. 따지고 보면 이 공연이 X의 첫 공연이다.
요시키는 1983년 4월, 3학년으로 진급하자, 음대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이과에서 문과로 옮기고 피아노의 레슨을 본격적으로 재개한다. 음대 피아노과를 가려면 보다 전문적인 기술을 배워야 했던 요시키는 도쿄시내에 사는 프로 피아니스트 강사에게 일주일에 2회 왕복 3시간을 걸려 레슨을 받으러 다니며 음대 입시를 위한 준비를 밀어붙였다.
입시 준비를 위한 수업내용은 피아노 연주에만 머물지 않았다. 청음, 시창(視唱), 악전을 배우는 훈련을 거듭해야 했다. 또 자주 시험과제를 하기 위해 19세기 독일 작곡가 프란츠 부에루나가 간행한 <합창 연습 곡 모음 집>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처음 보는 악보를 바로 치는 초견 연주의 훈련과 청음 훈련에서 경이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강사이자 피아니스트도 혀를 내두르며 인정했다. 여름이 되면서 일본 대학 예술 학부에서 개최되는 음대 수험자를 위한 강좌에도 다녔다.
청음으로 완벽한 점수를 받은 요시키는 일찍이 지망 학교를 정했다. 제1지망은 무사시노 음악대학, 제2지망은 도호 음악대학, 3지망은 일대 예술학부이다. 국립대학의 도쿄예술대학은 사립음악대학과 다른 수험과목이 많아서 처음부터 제외했다. 2년간의 공백의 시간을 되찾기 위해서 요시키는 필사적이었다.
요시키는 밴드 멤버들에게 콘테스트에 나가보자고 제안을 한다. 요시키의 생각에 반대하는 멤버는 한명도 없었다. 요시키는 야마하가 주최하는 EastWest의 치바현 대회 참가를 신청한다. 시험공부를 잠깐 멈춘 요시키는 X의 멤버와 함께 대회에 나선다. 타테야마에서 나와 치바시에서 연주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겐 첫 경험이었다. 사복 차림으로는 절대 연주할 수 없었던 문화제와는 달리 멤버들은 T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고 무대에 올라갔다. 요시키는 얼굴에 화장을 하고 머리카락을 곤두세웠다. 몸에 쇠사슬을 두른 토시는 주위를 거칠게 돌아다니고 소리치며 노래를 불렀다. 대회 직전에 정학 당했던 또 한명의 멤버는 교사에게 머리가 깎여서 빡빡머리였다. 연주곡으로 선택한 "I'll Kill You"의 폭주하는 멜로디와 토시의 높은 키의 목소리는 참가한 많은 밴드들 속에서도 당연 독보적이었다. 솔로 파트에서는 기타 멤버가 피를 보이는 퍼포먼스를 보이면서 심사원이나 관객을 더욱 놀라게 했다. [5]
X는 이 대회에서 밴드로서의 수상은 놓쳤지만 요시키가 베스트 드러머 상을 거머쥐었다. 작은 상장을 건네받은 요시키는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역시 기쁨을 감출 수는 없었다. 자신만의 개성적인 드럼 실력이 관객들에게 전해진 것의 기쁨이 17세의 요시키를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얼마 후 음악대학의 추천 입학도 정해지고, 요시키는 피아노 레슨에만 집중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요시키의 집에 토시가 놀러온 것은 겨울 방학 직전이었다. 요시키는 이층계단 아래의 냉장고에서 캔 쥬스를 꺼내고 토시에게 초콜릿을 주었다. 토시는 끊임없이 입속으로 초콜릿을 넣고 있었다. 요시키는 초콜릿을 먹지 못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 토시가 물었다. "앞으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지?" 토시는 X의 활동에 대해서 요시키에 물었다. 토시도 EastWest 경연대회 후 다른 대회에서 베스트 보컬 상을 수상하였고, X의 보컬로서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대회에서 얻은 작은 영광은 미래를 비추는 빛이었다. 제법 관객들에게 인정받아 작고 큰 상을 여러 개나 수상한 요시키도 마음이 사실은 용솟음 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들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대단할지 몰라." 그런 요시키에 이번에는 토시가 맞장구를 쳤다.
요시키의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요시키는 음대를 목표로 입시 공부에 몰두한 1년을 되돌아보았다. 대입을 위해 달려온 그 순간, 요시키는 자신이 오랜 꿈을 꾸는 느낌이 들었다. 대학 입시 시험이라는 목적을 향하여 집중해 있었던 요시키는 이제야 겨우 오랜 꿈에서 깨어나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시키는 빠른 어조로 토시에게 말했다.
요시키: "하면 하는 거야. 어중간한 건 싫으니깐. 도쿄에 나가 X로 승부한다면 나 음대 가는 거 그만둘게. 너와 일본을 정복, 아니 세계 정복을 하자.“
토시: "그래. 요시키 너라면 틀림없이 할 수 있어."
두 말 없이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중학생 때 장래의 꿈으로 내세운 록스타는 요시키의 진실된 꿈이었다. 그것이 명백히 드러난 지금 음대입학을 기다릴수는 없다. 어머니에게 미안하고, 선생님들에게 실망감을 안기는 일은 어쩔 수 없었다. 겨울 방학이 끝난 3학기, 요시키는 담임 교사에게 거짓없이 자신의 마음을 말했다. 그러나 결정된 대학진학을 무산시키고 록 밴드를 하겠다는 건 상식에 맞지 않았다. 요시키는 교무실로 불리고 몇 시간이나 교사의 설득을 들어야했다. 하지만 달라질 수 없는 결정이었다. 진학 포기를 들은 어머니도 계속해서 대학에 가는 게 좋겠다며 아들에게 간청했다. 하지만 요시키는 전혀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결국 어머니도 그런 요시키에게 손을 들었다. 그런 아들의 성격을 가장 잘 알고 계시던 어머니는 결국 대학포기를 용서해주었다.토시: "그래. 요시키 너라면 틀림없이 할 수 있어."
하지만 요시키는 아마추어 록 밴드가 어떤 장소에서 활동하면 되는가, 또 실력 있는 멤버는 어떻게 찾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또 어떻게 하면 프로로 데뷔할 수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요시키와 토시는 지식이 부족했다. 음악 잡지에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밴드 활동의 장소는 대체로 라이브 하우스였다. 유명한 가게에서 라이브를 성공시키면 정기적으로 연주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요시키는 졸업이 가까울 무렵 학교를 빼먹으면서까지, 도쿄에 가서 라이브 하우스의 최신 정보를 수집하러 다녔다. 요시키를 걱정한 선생님이 그를 찾아 직접 라이브 하우스를 가기도 했다. 그러나 요시키에 대한 교사들은 점점 응원의 마음을 갖기 시작했다.
졸업식은 무난히 치러졌다. 졸업 앨범에 요시키가 쓴 메시지는 단 하나의 단어였다.
"X"
요시키와 우정을 같이한 토시는 이렇게 적었다."We are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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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사진 |
2.5. X JAPAN 시절
자세한 내용은 X JAPAN 문서 참고하십시오.3. 이력
이 글은 요시키의 음악적, 상업적 이력을 기입한 글입니다. |
- 중학교 시절, 토시와 밴드 NOISE를 결성한다.
- 고교 시절, 자신의 첫 자작곡 I’ll Kill You를 작사/작곡한다. 1983년 아와고등학교 문화제에서 처음으로 이 노래의 공연을 펼친다.
- 1986년, 요시키는 Extacy Records를 설립한다. 이후 LUNA SEA, Zi:Kill, LADIES ROOM, GLAY를 비롯한 많은 밴드들 및 아티스트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 1991년 12월, 요시키 본인이 좋아하는 클래식 곡을 모은 "YOSHIKI SELECTION" 선곡집을 발매했다. 이례적인 인기를 끌어서 클래식 차트 상위에 올랐다. 이 앨범은 국내에도 2000년 정발되었다.
- 1991년, TM NETWORK( TMN)의 코무로 테츠야와 함께 프로젝트 V2를 결성했다. 12월 5일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사망 200주기를 기념한 라이브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으며 이듬해 1월 발매된 V2의 유일한 싱글은 40만 장을 상회하는 판매량을 보이면서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했다.
- 1993년 4월 당시 솔로 활동 소속사였던 TOSHIBA-EMI에서 기획하여 비틀즈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의 편곡과 프로듀싱을 거쳐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X JAPAN의 기존 곡을 클래시컬하게 편곡한 "YOSHIKI Presents~Eternal Melody"을 발매하였다. 20만 장 정도로 역시 클래식 계에선 이례적인 판매고를 기록. 신곡으로는 "Amethyst"가 새로이 작곡되어 클래식 곡으로 수록되었다.
- 1993년 11월 3일, TBS 방송사 드라마 주제곡으로 쓰인 NOA라는 유닛의 "今を抱きしめて"가 발매, 요시키 작사[6], 작곡, 편곡 및 프로듀스 담당으로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대단한 인기와 주목을 받았던 싱글이며[7] Eternal Melody에 수록된 "Amethyst"를 담은 싱글이 같은 해에 발매되었다.[8]
- 1994년 영국 밴드 퀸의 드러머 로저 테일러와 협업, 공동 프로듀서로 싱글 "Foreign Sand"를 발매했다. 1번 트랙 "Foreign Sand"의 작곡과 편곡을 담당, 2번 트랙 "Final Destination"은 로저 테일러가 작곡했고 요시키는 로저 테일러와 공동 편곡을 담당했다. 역시 TOSHIBA-EMI의 기획.
- 1994년 GLAY 데뷔 싱글인 "RAIN"의 작사 및 공동 작곡, 편곡 및 프로듀스를 담당했는데, 현악과 피아노 등 자신만의 색채를 너무 입혀서 훗날 GLAY는 라이브 구현도 어려운 편곡이며 자신들의 분위기도 아니라면서 새롭게 편곡해서 앨범에 수록한 전례가 있다.
- 1996년 11월, 본인이 작곡하여 당시 라이브 투어 오프닝 곡으로 쓰이던 "Amethyst"를 재 수록한[9] 두번째 클래식 선곡집 "Yoshiki Selection 2" 발매. 이 선곡집은 전작 만큼의 반향은 없었다.
- 1998년 기타노 쇼코의 Begin(6월)과 薔薇と緑(10월) 두 장의 싱글을 발매하면서 이 곡들의 프로듀싱과 작사 작곡 편곡을 도맡았다. 그녀는 저 유명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딸로 이 곡의 PV 감독은 부친인 거장 기타노 다케시가 맡았다. 하지만 요시키와 기타노 다케시 이 두사람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활동은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 1999년 5월 1일, hide의 헌정앨범 "hide Tribute"에 도입곡 격인 "Introduction" 및 엔딩곡인 "Goodbye"를 본인이 담당한다. "Introduction"은 hide의 솔로 1집에 수록된 "PSYCOMMUNITY"를 피아노 솔로로 편곡, "Goodbye"는 hide의 솔로 2집 앨범에 수록되어 있었던 동명의 곡을 피아노 및 현악을 활용한 소편성 클래식으로 재편곡하여 수록하였다.
- 2000년에 설립한 Extasy Japan에서 신인 및 데뷔시킨 밴드들을 야심차게 프로듀스 해보기도 했지만 히트작을 내지는 못했다.[11] 그리고 회사는 도산, 사실 Dir en grey 정도를 제외하면 프로듀스 성공작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솔로 프로젝트로 Violet U.K.를 10년 넘게 기획해오고 있다고 밝히며 콜럼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 2000년에 세븐일레븐 광고로 선보인 곡들이나 2002년에 발매된 더 라스트 라이브의 DVD에 프로모션 영상이 수록되었다. 그동안 요시키가 진정으로 하고 싶어했다던 음악인 Violet U.K.의 이후 아무런 소식이 없다.
- 2002년 갑작스럽게 코무로 테츠야의 그룹인 globe에 객원 멤버로 참가하기도 했다. globe의 경우는 싱글 "Seize the Light" 발매. 그외 다카라즈카 극단에 제공한 곡을 보컬 케이코가 부른 데모 음원 하나만 떠돌고 있을 뿐, 사실상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해 도쿄 시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Yoshiki Symphonic Concert featuring VIOLET UK란 콘서트를 거행, 훗날 이 공연은 2005년 DVD로 정발되었다.
- 2003년, 2005년 아이치 만국 박람회의 주제곡을 맡아서 이미지송의 제작에 참여했다. 하와이 출신의 일본혼혈인 여성 보컬 DAHLIA[12]의 곡 "I'll be your love"를 싱글화 했다.
- 2004년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록밴드인 TraxX[13]의 일본 데뷔 프로듀스를 맡았고 자신이 작곡 및 편곡까지 담당한 "Scorpio"와 X JAPAN 시절의 최대 히트곡 중 하나인 "TEARS"까지 제공했다. 기획사[14]에서 한일 양국에서 100% ROCK이라는 문구와 엑스재팬 해체 이후 전혀 보지 못했던 드럼위에 앉은 요시키의 사진을 게재하며 거하게 홍보를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역시 흥행에는 실패했다.[15]
- 2005년 3월 Eternal Melody 2를 발매하였다. 2000년에 도입부 데모만 살짝 공개했던 히데의 추모곡 "Without You"의 클래시컬 버전이 수록되었다. 99년 공개된 천황 즉위 10주년 봉축곡 "Anniversary"도 최초 음원화, 그외에 원래 음원조차 공개되지 않은 Violet U.K의 클래시컬 곡이 수록되었던 것까지는 좋으나, 그 옛날 93년 Amethyst 싱글의 커플링 곡 "今を抱きしめて"부터 96년 X JAPAN 싱글로 발매된 "Longing~절망의 밤"에 2002년 심포닉 콘서트 실황 음원까지 그간 발매했던 음원들이 트랙리스트의 대부분을 빼곡히 채우고 있으니 그저 별 노력없이 수입만 챙기려는 재활용반이라 보는 견해가 다수다. 게다가 그 모든 것이 요시키 본인의 기획하에 이루어진 것이니… 어쨌든 국내에도 정발이 되었으나 X-JAPAN의 인기와 요시키 본인의 인기와 주목도가 하강세에 접어든지가 오래되었던 시기였던 만큼 판매량은 낮았다.
- 2005년 9월 22일에 Violet U.K 데뷔 앨범 발매를 다시 고지했으나 보란듯이 연기. 계속되는 발매 연기로 소속사가 소송. X JAPAN의 정규 마지막 앨범 DAHLIA가 포함된 Atlantic 산하에서 발매된 음원의 본인 소유 저작권을 넘기는 걸로 일단 합의를 한 후 계약을 해지했다.
- 2012년, 미국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 로고송을 제공했다.
- 2013년 9월 요시키의 솔로 앨범 YOSHIKI CLASSICAL이 발매 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Violet U.K 활동과는 상관없다는 사실. 신곡은 제일 첫 트랙 "MIRACLE"이 전부이며 그외 최근에 온라인 음원으로 발매된 "Golden Globe Theme"(2012)이 '최초로 CD화 되었다' 정도로 의미부여할 수 있으며, 같은 곡이 Quartet(4중주) 버전으로 재편곡된 버전도 수록되어있다. 나머지는 과거에 발매한 Eternal Melody 1, 2의 수록곡이 대부분이다. 일본판과 해외판이 다른 것도 특징. 일본 내 발매본에는 2002년에 치러진 본인 클래식 콘서트에서 연주된 "The Last Song" 클래식 버전이 실황 녹음으로 실려있고 해외 발매본에는 그 대신에 무려 1993년에 Eternal Melody 1에서 수록된 "Say Anything"의 클래식 버전이 수록, 그외 곡 순서가 상이하고 재킷 사진 차이 정도가 다르다. 일단 일본 및 세계 동시 발매이며 일본판은 오리콘 앨범 차트 주간 4위로 데뷔, 차트에 8주간 머물렀으며 iTunes 클래식 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 2014년 10월 자신의 밴드 X JAPAN을 통해 2012년의 L'Arc~en~Ciel에 이어 아시아 아티스트 사상 두 번째로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단독 공연을 성사시켰다. # 공연의 뒷풀이 자리에서는 B'z의 마츠모토와 GLAY의 타쿠로의 모습도 보였다. #
- 2015년, 방송을 통해 드디어 X JAPAN의 새 앨범 제작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리고 2015년 2월 본인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15곡이 수록된 마스터 CD의 사진을 올렸다.[16]
- 2019년부터는 NHK 홍백가합전에 출장자 자격이 아닌 해외 아티스트와 함께하는 특별 기획무대의 형식으로 지속적으로 출연을 이어가고 있다. 2019년에는 평소 자신의 우상으로 밝혀온 KISS와 합동 공연을, 2020년에는 그 Queen의 멤버인 브라이언 메이 와 1994년 싱글 작업을 함께했던 로저 테일러, 그리고 2018년에 음원작업을 같이한 사라 브라이트만의 노래와 함께 해외에서 본인이 피아노를 연주한 다음 온라인 녹화 중계로 영상과 음원을 제공하고 무대에서는 BABYMETAL, milet, LiSA, SixTONES가 참여하여 대표곡 "ENDLESS RAIN"을 공연하는 형식으로 무대를 꾸몄다.
- 2021년 홍백가합전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 2022년 1월(한국 기준)에 디즈니의 OTT서비스 디즈니플러스에서 4중주 현악단과 함께하는 요시키의 음악 다큐멘터리 "나의 음악 이야기"(원제 Yoshiki: My Music Story)가 공개되었다. 2020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로 자신의 음악 인생 및 인상적이었던 디즈니의 OST곡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유명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OST 명곡인 "Let It Go" (겨울왕국)과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Lion King)을 피아노+현악4중주 버전으로 직접 편곡하고 피아노 연주를 맡았으며 그 외 자신의 대표곡인 "Endless Rain", "Without You" 그리고 미발매곡인 "River Of The Light"도 공연하였다. 다큐용으로 편집되지 않은 무삭제 연주실황은 다큐가 끝난 후 47분 41초부터 시작되니 다큐 내용 외에 연주만 감상하고 싶으면 참고할 것.[17]
- 2022년 2월 27일 요시키가 닛폰테레비와 함께 보이그룹 오디션 프로젝트 「YOSHIKI SUPERSTAR PROJECT X」를 시작하는 것이 발표되었다.[18] 요시키의 입장 발표 전문-[19][20]
- 2022년 8월, 지난 2017년부터 "Evening with YOSHIKI"라는 브랜드로 이어온 요시키의 디너쇼가 그랜드 하얏트 도쿄 볼룸에서 개최되는 것이 공지 되었다. 조식 제공 및 공연인 "Breakfast with YOSHIKI"는 1인 8만엔, 석식 제공 및 공연 관람인 "Evening with YOSHIKI"는 1인 10만엔. #
- 2022년 11월 11일 LUNA SEA의 SUGIZO, L'Arc~en~Ciel의 HYDE, MIYAVI와 함께 슈퍼 밴드 THE LAST ROCKSTARS를 결성해 활동한다고 발표했다.
- 2023년 3월 4일 보이그룹 오디션 프로젝트 「YOSHIKI SUPERSTAR PROJECT X」 의 합격자 13명으로 구성된 XY가 데뷔하였다.[21] 동년 6월 30일에 요시키가 작사·작곡·편곡을 한 “ Crazy Love”로 데뷔 싱글 앨범을 발매하였다.
- 2023년 11월 7일 베이시스트 히스가 암으로 급사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10월 하순에 사망했으며, 발견한 시점에서 이미 말기 암이 온 몸으로 전이 된 수준으로 너무 늦게 발견하여 멤버들에게 투병 사실을 알릴 시간적 여유 조차 없었을 정도라고 한다. 히스의 사망 당시 요시키는 해외에 체류 중이었는데 소식을 듣고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였고, 11월 3일 SNS에 가족의 사정으로 급히 귀국하였다고 요시키가 글을 올렸고 사실 히스의 사망으로 인해 급히 귀국했던 것이다. [22]
4. 음악적 성향과 역량
작곡가로서는 감성적이면서 유려한 멜로디를 잘 잡아내는 것을 특기로 한다.[23] 주로 발라드에서 그 멜로디의 장점이 크게 부각되는데, 밴드 X를 인디계의 유망주에서 일약 메이저 밴드로 확실히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게 된 발라드 Endless Rain[24] 1992년 NHK 홍백가합전 주제곡이자 이후 X JAPAN의 곡으로 발매되어 요시키 개인 및 X JAPAN 역사상 최다 싱글 판매작인 Tears(1993년 발매, 83만장 판매) 같은 곡이 대표적. 멜로디 감각은 최근작(?)인 "Without You"(2005, 클래식 버전으로 발매, 히데 추모곡으로 작곡됨), "Scarlet Love Song"(2011, 극장용 애니메이션 "Buddah"의 O.S.T), 정말 극히 최근작인 "Golden Globe Theme"(2012)에서도 여전하다.90년대 일본 음악시장이 분명 거대했지만 90년대 초 일본 시장내에서 자국 내 메탈 밴드가 밀리언을 달성하고 1년 내에 40만에 육박하는 관객 동원을 해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며, 주간 오리콘 차트 1위에 싱글과 앨범을 자주 올린 것 또한 사실로 작곡가로서 멜로디 메이킹 능력이 이에 기여한 바가 컸다는 것은 절대 부정할 수 없다. 더군다나 X JAPAN의 총 음반 판매량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게 요시키의 비중이 커졌던 X JAPAN 후기의 곡들이니만큼 더더욱 그렇다.
다만, 록-메탈계 리스너들의 경우 X 시절 베이시스트였던 타이지의 편곡 비중이 컸던 WEEK END, 紅, SILENT JEALOUSY 들과는 사뭇 다르게[25] 후기 X JAPAN 시절의 곡은 경시하는 식으로 요시키의 음악성에 불만을 보이는 예가 많은 편이다.
인디즈 데뷔 앨범인 "Vanishing Vision"부터 바로 그 타이지의 해고 전에 발매된 마지막 음반인 "Jealousy" 까지의 앨범과, 원래 "Jealousy" 수록곡으로 기획되어 타이지가 편곡과 녹음에 참여했었던 미니앨범 "Art of Life", 그리고 타이지 탈퇴 후 기타 리프 제작의 상당수를 도맡던 히데마저 사망한 뒤에는 기타 파트가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맴버와의 불화와 음악적 스타일이 상반되었던 문제[26]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으니 요시키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을 수 있다. 현재 기타 세션은 스기조가 맡고있다.
X JAPAN 해체 이후 요시키가 프로듀싱한 곡들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는 특징 중 하나로, 본인이 좋아하는 피아노와 관현악이 주 멜로디를 연주하는 식으로 곡을 구성하고 있고 기타와 베이스음은 뒷배경으로 밀려나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여전히 멜로디 메이킹 하나는 일품이라는 평이지만 전체적인 곡의 구성이 사실상 록이나 헤비메탈이라기보다는 교향곡에 가깝다. 그나마 과거의 색채가 가장 많이 묻어나는 싱글곡 Born To Be Free 같은 곡도 관현악의 비중이 더 크다.
작사의 원천은 자살. 어릴 적 아버지가 자살한 모습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겨 자살과 죽음에 대한 가사가 굉장히 많다. X JAPAN의 대표곡인 "Blue Blood", "TEARS"[27], "Week End"과 "Silent Jealousy"만 하더라도 자살이 소재로 쓰였을 정도. 특히 TEARS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소재로 한 곡이다. Say Anything의 경우 유년기에 아버지의 자살을 목격하고 거리로 뛰쳐나갔던 자신의 모습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하고, Tears는 성장한 자신이 어느 날, 이국(L.A.)에서 밤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추억하는 내용이다.
90년대 한참 X JAPAN의 인기가 국내에 드높던 시절 한국에만 들리던 소문으로 전세계적으로 3위의 드러머 안에 든다는, 참으로 근거없는 헛소리가 유행했다. 우선 드럼 "실력"에 순위를 매긴다는 것이 말도 안되는 일이다. 실력이라는 것이 성적처럼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연주하는 장르도 다르며, 같은 장르라고 해도 연주자에 따라 각자 연주하는 스타일이 있는 법인데 순위를 매긴다는 자체가 넌센스. 실력이 아닌 인기 투표는 실제 있긴 하지만 어떠한 드러머 관련 인기 투표에서도 요시키가 3위권 안에 들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예로부터 요시키의 속주는 유명했다지만 세계의 타 드러머, 아니 국내 인디 씬에서만 보더라도 요시키의 속주가 독보적으로 뛰어난 속도를 가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국내 드러머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드러머 임용훈의 스트로크 영상을 보면 BPM 220의 16비트 필인 연주도 굉장이 빠르며 버거워 보이는게 사실. 스트로크가 아닌 트윈페달의 속도만 보더라도 유럽이나 미국 데스 메탈 계열 드러머들의 페달링을 보면 기관총의 소리가 날 정도로 파워와 스피드를 겸비한 괴물들이 굉장히 많다. 물론 80년대의 시대를 반영해보았을 때, 프로드러머로써 손색이 없는 실력인가?'라는 질문에는 프로드러머로써 실력을 갖춘 드러머라고 말할 수 있음이 확실하다.
'드럼 실력에 있어서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에 관해서는 무리가 없을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지만 레코딩에서는 종종 세션을 기용하기도 했으며 작곡이나 프로듀싱 등 이것 저것을 다 하기 때문에 프로 드러머로서의 자각은 다소 부족한 것일지도...' 라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우선 종종 세션을 기용하기도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반박하자면, 적어도 X, X-JAPAN 작품 내에서는 퍼커션을 제외한 모든 드럼을 그가 쳤다. 단, 논란이 되는 것은 DAHLIA 앨범에서 쓰인 컴퓨터로 찍은 '전자 드럼'인데(SCARS와 DRAIN), SCARS의 경우 HIDE의 요청에 의해서 전자 드럼을 찍었다.[28] 오히려 요시키는 어쿠스틱 드럼으로 녹음을 고수했고, 전자 드럼으로 하자는 HIDE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결과적으로 어쿠스틱 드럼과 전자 드럼이 혼재되어 녹음) 이는 '드러머로서의 자각'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인더스트리얼 장르에 부합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29]
80년대 후반 인디즈 시절부터 90년대 초 젤러시 투어 시절까지는 더블 베이스 연타와 같은 스피디한 연주도 즐겼으나[30] 1995년 달리아 투어 시절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플레이를 다소 자제하는 경향을 보임과 동시에 그 속도의 저하도 현저해졌다. 드럼을 칠 때의 특유의 자세와 그 세팅에서 비롯한 대미지 때문에 경추부의 디스크에 시달리고 있는 바, 1996년 3월 달리아 투어 나고야 공연에서 쓰러진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대에 오를 때는 쭉 목에 깁스를 채운 상태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5. 디스코그래피
5.1. 정규 앨범
『Eternal Melody』(1993)1993년 4월 21일 발매. X JAPAN의 곡들을 클래식 버전으로 리메이크하였다.
『ETERNAL MELODY II』(2005)
2005년 3월 23일 발매.
『YOSHIKI CLASSICAL』(2013)
2013년 8월 27일 발매.
5.2. 컴필레이션 앨범
『Yoshiki Selection』(1991)1991년 12월 12일 발매.
『Yoshiki Selection II』(1996)
1996년 11월 4일 발매.
5.3. 미니 앨범
『Yoshiki Melodies Classics -Japanese Edition-』(2013)2013년 9월 25일 발매.
5.4. 싱글
「Amethyst」(1993)「Foreign Sand」(1994)
퀸의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와의 합작.
「BLUE SKY HEAVEN」(2009)
「ゴールデングローブのテーマ」(2013)
「 Red Swan」(2018)
L'Arc~en~Ciel의 hyde가 피처링.
5.5. 피처링 싱글
「クリスタルピアノのキミ」(2011)X JAPAN의 보컬 Toshl의 싱글에 피처링.
「春の願い」(2011)
X JAPAN의 보컬 Toshl의 싱글에 피처링.
「Miracle」(2018)
사라 브라이트만의 싱글에 피처링.
「ZIPANG」(2019)
hyde의 싱글에 피처링.
6. 수상
- 2023 마마 어워즈 페이보릿 인터내셔널 아티스트
7. 여담
- X JAPAN의 곡에서 가끔 등장하는 작사가 白鳥 瞳(시라토리 히토미), 白鳥 龍(시라토리 류), 橘 朋実(타치바나 토모미), 五十嵐 美由姫(이가라시 미유키)의 정체는 전부 요시키가 작사를 할 때 쓰는 가명이다.
-
나이에 비해 상당한
동안이다. 세는 나이로 60대가 되는 나이임에도 상당히 어려보인다.
- 할리우드 영화의 음악 감독으로도 자주 활동하는데 대표적으로 xXx, SAW, Spycies가 있다.
- X 활동 초기에는 멤버들과는 달리 신비주의 컨셉의 일환으로 X의 상징이자 X 그 자체라는 식으로 프로필란의 생년월일이나 혈액형 등을 전부 X로 표기했었으며 본명 역시도 밝히지 않았었다.[31] 그러나 2009년에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본명, 출생 및 성장 과정, X에 대한 각종 사연과 비화들을 모두 공개했다.[32]
- 인디즈 시기에는 음악성 외에 싸움꾼으로 유명했던 듯 하다. X를 메이저로 스카웃한 CBS SONY의 프로듀서 츠다 나오시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서도 요시키와 같이 금발로 염색한 장발은 흔치 않았고, 워낙 튀는 외모 탓에 거리를 걷다가 불량배들에게 조롱을 당하거나 시비를 걸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요시키 역시 이에 물러서는 일 없이 부딪히는 족족 싸운 통에 싸움꾼으로 알려져 버렸다고. CBS SONY와 계약 당시 츠다가 당부한 약속 중 하나는 일반인과 시비가 붙어도 싸우지 않고 참기. 데뷔 초 싸움에 관한 소문에 대한 요시키와 히데의 토크 히데가 진상관객한테 기타를 뺏길뻔한적이 있었는데. 이걸 요시키가 한대 후려치려는 모션을 취하면서 제지되기도 했다.
- 쿠도 시즈카와 연인 관계였다. 1994년 3월 10일, 쿠도 시즈카는 공백기를 틈타 미국 헐리우드에 있는 요시키의 저택에 놀러갔고,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서 상당한 양의 알코올을 섭취하고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 만취 상태로 요시키가 운전하는 페라리에 동승했다. 로스 앤젤레스의 선셋대로를 주행 중에 요시키는 음주운전 과 속도위반으로 현행범 체포되었고, 이 사건이 일본에 알려지면서 두 사람의 교제도 덩달아 알려졌다. 나중에 요시키가 자서전에서 쿠도 시즈카의 첫 인상을 두고 티비나 사진에서보다 늙어 보였다(...)고 한 통에 안 좋게 헤어진 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냥 서로서로 좋게 쿨하게 헤어졌으며 쿠도 시즈카가 결혼 한 후에도 2002년까지 요시키의 레이블인 엑스터시 레코드에 소속돼 있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 2002년 서울소년분류심사원[33]과 안양 소년원, 안양교도소[34]에서 재능기부 차 위문 공연[35]을 가졌는데 이때 서울소년분류심사원 공연 사진이 요시키의 굴욕이라는 짤방으로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36] 필름기그(Film Gig)의 개최로 방한하게 된 김에 친분이 있던 박삼중 스님의 제의로 일종의 재능기부 형식으로 한국 가수와 합동 공연을 펼친 것이라고 한다. 소년원 공연은 극비리였는데 몇몇 팬들이 눈치를 채고 가기도 했다. 이때 관객은 30명 정도였다.
-
2009년 내한 공연 전에 치러진 홍콩 공연을 마치고 섹션TV와의 현지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좋아하는 가수는 누구냐는 질문에
서태지라고 답하며 훌륭한 뮤지션이고 기회가 된다면 같이 작업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
- 2011년 엑스재팬으로 내한했을 당시 팬서비스로 여자 한복을 입으며 팬들에게 충공깽을 안겨주기도 했다. #
- 한국에서 90년대~00년대 초반까지 지나치게 과대평가 됐던 것에 대한 반발 심리 때문인지 00년대 중후반~10년대 초반까지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 일각에서 엄청나게 폄훼되고 각종 비방과 음해에 시달린 인물이기도 하다. 요시키의 음악적 역량에 있어선 여러 논란이 많지만 적어도 한국에 매우 우호적인 친한파인 건 분명하고, 전성기 때 뛰어난 음악 제작 실력으로 한국 음악가들에게 엄청난 음악적 영감[37]을 불어넣어 한국 대중 음악의 수준을 상향 시키는데 일조[38]하는 등 지금까지 한국에 꾸준히 득을 줬으면 줬지 절대 해를 끼친 적 없는 요시키 입장에선 억울하고 어이없는 노릇일 듯...
- 가령 <요시키의 만행>이라는 짤이 한동안 인터넷에서 떠돌아 다닌 적이 있는데, # 이 짤에 담겨 있는 콘텐츠는 일부 사실[39]이 있긴 하지만 주로 일본의 타블로이드 연에계 잡지나 니찬넬 같은 일본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등지에서 요시키와 엑스재팬을 싫어하는 일본 전통파 록 팬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날조와 왜곡과 과장이 극대화된 에피소드들과 가십들로 점철돼 있다. 이후 2022년, 요시키의 일본에 돌아왔다는 트윗에 호테이가 Welcome Home이라는 리플라이를 달았고 요시키도 거기에 '호테이상, 감사합니다!'라고 답장하는 등 현재는 시간이 많이 흐르며 갈등의 응어리가 풀린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를 본 팬들도 답글에서 기뻐하고 있다.
-
소위 <요시키의 만행>의 출처는 지금은 사멸화된 '다음 카페 <일본록디비보기>'
#인데 이 카페 운영자는 다년 간의 인디 뮤지션 경력이 있는 재일교포 3세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엑스재팬의 인기가 너무 높아서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일본 굴지의 록 뮤지션들(자신이 선호하거나 존경하는)은 인지도도 거의 없고 과소평가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일본 현지의 엑스재팬 관련 정보를 한국인들에게 알린 것으로 유명했다. 예를 들자면 한동안 한국에서 일본 최고의 밴드로 알려졌던 엑스재팬이 사실은 대중적인 인기도나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측면에서 비즈나 미스치루 등 일본의 진짜 국민 밴드들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진다든지, 자발적인 탈퇴로 알려졌던 타이지가 사실은 요시키에게 해고된 사실이라든지, 엑스재팬이 해체된 결정적 계기가 보컬 토시의 사이비 종교 때문이라든지 하는, 지금이야 다 알려졌지만 2000년대 초중반경에는 한국에 그리 알려지지 않았던 정보를 토대로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엑스재팬의 위상을 한국 네티즌들에게 알려줬다. 또한 라우드니스나 Anthem, VOW WOW 등 일본의 레전드 메탈 밴드들을 비롯해 비즈나 미스터 칠드런 같은 주류 밴드들은 물론이고 인디에서 활동하는 비주류 밴드들까지 망라해 일본의 록 문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전파하여 비주얼계를 제외하면 일본 록 팬들이 별로 없던 한국에서 일본 록 팬덤이 형성되는 데 분명 엄청난 기여를 했다. 당장 이 곳
나무위키에 등재된 일본 록 가수들에 대한 콘텐츠만 보더라도 <일본 록 디비보기> 운영자가 풀었던 썰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한국의 엑스재팬, 비주얼 록 팬들과 계속 대립각을 세운 것에 대한 반발 심리 때문인지 일본에서 오랫동안 인디 뮤지션으로 활동했던 경력을 악용해 가면 갈수록 확인할 수 없는 낭설이나 괴담, 날조된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유포하는 경향을 보였다.
위에서 언급된 <요시키의 만행>이라는 짤만 보더라도 요시키가 본 조비한테 폭행당했다는 내용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만약 해당 내용이 록 세계 내부 비화가 아닌 대중에게 공개된 내용이라면 세계적으로 난리가 날만한 해외토픽급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내용은 어디에서도 보도가 된 적이 없다. 한국으로 치자면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근거도 없이 온라인상에 퍼진 ' 마르코와 배정남이 난투극을 벌였다' 수준의 공신력 제로의 헛소문을 마치 사실인 것마냥 국내 네티즌들에게 소개한 격이다. 또한 요시키가 호테이와 트러블이 있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요시키가 호테이에게 맞았다는 썰 역시 아무런 근거가 없다. 한국으로 치자면 디시발 썰에 불과한 내용을 일부 사실과 뒤섞어서 한국의 엑스재팬과 비주얼 록 팬들을 조롱하는데 악용한 측면이 있었다.[40]
- 다만 저런 루머와 괴담들이 2000년대 중반 정도에 일본 현지 록 팬들 사이에서 횡행했을 만큼 한때 요시키와 엑스재팬에 대한 이미지가 최악이었던 것은 분명 사실[41]이었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요시키 본인의 불성실한 활동력과 경솔한 언행에 따른 것으로 전적으로 본인이 자초한 것이기에 요시키 본인이 상당 부분 감수해야 될 오명이다. 한국의 연예계에 비유하자면 원래 안티가 별로 없던 원빈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작품 활동이 전무한 채로 계속 공백기가 길어지다보니 근래 들어선 안티가 꽤 형성되고 일부 헛소문까지 퍼지게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하물며 맨날 복귀한다는 둥 공연할거라는 둥 신곡&신작 음반 발매할 거라는 둥 계속 뻥카만 날리면서 팬들을 기만하고 아무런 활동도 안 하고 극히 무책임한 자세로 일관한 요시키인데, 일본 내에서 여론이 악화되지 않는다면 외려 그게 더 이상할 일일 것이다. 계속해서 퇴보하는 음악성 문제도 있겠지만 사실 일반 대중의 취향이 록 매니아들 수준으로 까다로운 건 아니다. 실제로 음반 시장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좌우하는 건 음악적 퀄리티도 퀄리티지만 매스 미디어 출연 같은 해당 뮤지션의 적극적인 대외 활동 같은 게 더 핵심적으로 작용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 메탈 밴드로서의 면모를 상실한 X JAPAN 말기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록 평론가나 메탈 팬덤 사이에서 평가는 안 좋았을지 몰라도 대중적 지지도에 있어선 결코 하락세라고 보기 힘들었다. 당시 싱글 앨범으로 발매된 곡들만 보더라도 외려 음악적 퀄리티에 있어선 절정에 달했던 시기보다 더 많이 팔리면 팔렸지 결코 적게 팔리지 않았다. 메이저 3집 <DAHLIA>가 전작에 비해 상업적으로 실패한 건 사실상 컴필레이션 앨범이었기 때문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탈 밴드의 음반으로선 많으면 많았지 절대 적다고 볼 수 없는 60여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때 당시 요시키의 건강 악화와 멤버들의 솔로 활동 등으로 엑스 재팬의 대외 활동이 뜸한 와중에도 그런 대중적인 인기도를 구가했는데, 아마 그 때 당시 음악적 퀄리티를 떠나서 엑스 재팬의 모습으로 음악 활동을 더 성실히 했다면 더 많인 대중적 지지도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엑스 재팬이 다시 활동을 재개하고 요시키를 비롯한 멤버들이 대외적으로 비교적 꾸준히 얼굴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복귀 후 별다른 음악적 성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에서 요시키와 엑스 재팬에 대한 비판 여론은 상당 부분 불식됐다.
- 아이돌 마스터 샤이니 컬러즈 1주년 CM에 출연했다. 섹시한 목소리로 게임명을 읇는게 일품.
- 엑스재팬 활동 당시부터 요시키는 거의 모든 곡의 작사와 작곡을 맡았으며 독단적인 리더십을 보였다. 이 독단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다른 멤버들과의 불화도 자주 일었던 바,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전임 베이시스트였던 TAIJI와의 트러블이나[42] 보컬리스트 토시와의 트러블.[43]
- 근래에 요시키와 가장 가깝게 지낸 인물은 각트로 각트는 요시키를 의외로 재미있는 인물이라 평가했는데, 보통 사람들로서는 전혀 화를 낼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폭발하거나 하는 식의 희한한 사례들을 예로 들어가며 요시키를 두고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장난감 상자 같은 인물이라 평가했다.[44] 상황을 예를 들어보자면 리허설 때 먹었던 카레가 매워서 테이블 뒤집어엎고 그대로 집에 가버렸다거나[45] 사진 촬영하러 간 사진사인 시노야마 키신의 스튜디오 샤워기 물이 뜨거워서 그대로 집에 가버렸다. 해당 블로그 영상 참고 각트와 함께 결성한 밴드인 S.K.I.N.의 미국 공연 때 서로가 크게 다툰 일이 있었던 이후 이를 계기로서 상호 간의 친분이 끊긴 것이 아닌가 하는 일부의 추측도 있었지만 이에 관해서는 2014년 1월 각트를 향한 “요시키는 잘 지내냐”는 한 팬의 질문에 각트가 “여전히 다투기는 하지만 잘 지내고 있다”고 답변, 요시키 역시 각트의 새 노래인 “P.s I LOVE you”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임과 동시에 S.K.I.N의 재결성에 대해 언급을 하기도 함으로서 둘 사이의 친분에는 문제가 없음이 확인되었다.[46]
- 한국에서는 2000년대 이후 TAIJI가 X-JAPAN에서 해고된 계기가 요시키가 혼자서 타 멤버에 비해 인세를 2배 독식했던 것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는 게 밝혀지면서 수전노 취급을 받기도 했다.[47]
- 1999년 아키히토 천황의 즉위 10주년 기념일 날 피아노를 연주한 것으로 서한을 받은 적이 있다. 일본 황실 행사에 대중 뮤지션이 참여하는 건 그 당시로선 상상을 초월한 파격적인 일이었기에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을 초월한 정치적 논란으로 비화됐다. 당시 도쿄대의 진보 성향의 교수들[48]이 '대중 뮤지션은 정치에 이용돼선 안 된다'는 요지로 요시키에게 공개 서한 #을 보낼 정도였다. # 요시키는 수취를 거부했다고 한다.[49]
- 항상 반복되는 작품의 발매 연기와 "긴급"을 붙인 공연 중단 등으로 관련 업계에서의 악평이 자자한 바[50]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는 순간에마저 그 화려한 전적이 거듭되어[51] 현재 일본 내 그 어떤 레코드 사와도 제대로 된 계약을 맺지 못하고 있는 상태로 보이며, 이와 같은 사정들로 인해 재결성 이후의 신곡 "I.V"와 "JADE"조차도 CD 화하지 못하고 웹 다운로드로만 판매했다. 도쿄돔 라이브 DVD와 블루 레이들은 전부 인디즈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었지만 2013년에 발표한 솔로 앨범인 "YOSHIKI CLASSICAL"의 경우 워너 뮤직 레이블을 통해 일본 내에서도 발매가 되었는 바 이것은 해외 발매 본과 함께 계약이 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14년의 베스트 앨범도 워너에서 발매했다.
- 2019년 고성-속초 산불로 피해를 입은 아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1억 원을 기부했다. 자신이 운영하는 미국 비영리 공익 법인을 통해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기부금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는 배우 이병헌과 친분이 있는데 이병헌, 이민정 부부가 산불 피해 지역에 1억 원을 기부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부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 2019년 8월 쿄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를 겪은 쿄애니에 1000만 엔을 기부했다. 기부를 잘 하지 않는 일본 연예계에서 보기 드문 기부 천사로 칭송받는 중.
- 2019년도 NHK 홍백가합전 꿈을 노래하자(夢を歌おう)에서 KISS(밴드)와 함께 "Rock and Roll All Nite"를 협연하였다. 처음에는 그의 특기인 특별히 만든 피아노를 치고, 나중에 에릭 싱어랑 드럼으로 협연했다.
-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가 받는 Asian icon award를 수상한 경력이 있다. 또한 세계가 존경하는 일본인 100인의 뮤지션 부분에서 요시키가 뽑혔다.
-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한국에서 귀신으로 오해받은 적이 있다. 지금은 폐지된 MBC TV특종 놀라운 세상에서 2005년도에 방영된 내용으로, 한 주부가 저주받은 티셔츠를 샀다고 제보했다. 대량으로 사온 구제 옷 중에 처녀 귀신 형상이 그려진 티셔츠가 있던 것. 제보자는 그 티셔츠를 보자마자 놀라서 기절할 뻔 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악몽과 공포감에 시달리다가 너무 두려운 나머지 티셔츠를 동네 뒷산에 묻었는데, 불 태울까 고민도 했지만 티셔츠의 저주가 두려워서 그대로 묻었다고. 하지만 티셔츠를 버린 뒤에도 증상이 가시질 않아서 제작진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제작진이 뒷산에 가서 문제의 티셔츠를 확인해보니, 그 형상은 여자도 귀신도 아닌 요시키였다.(...) 티셔츠의 전말을 알게 된 주부는 그 뒤로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당시 팬들의 반응
- 일본 스모 역대 최다 우승 횟수를 자랑하는 요코즈나 하쿠호 쇼의 단발식에 각트와 함께 초대받아 머리를 잘라주었다. 오랜 친구 사이이며 하쿠호 쇼의 애창곡이 FOREVER LOVE라서 같이 가라오케도 다닌다고.
- 2023년 9월 14일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위치한 차이니스 극장에 손도장을 새겼다. 차이니스 극장 거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릴린 먼로, 프랭크 시나트라,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톰 행크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등 유명 스타들과 성룡, 이병헌, 안성기 등의 아시아권 스타들이 손도장을 새긴 곳으로, 일본 아티스트 최초로 요시키가 손도장을 새기게 되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이병헌이 요시키가 손도장을 새기는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1]
한국식으로 읽으면 임
가수이다. 물론 한자는 佳樹와 歌手로 다르다.
[2]
현 엑스터시 레코드 대표.(회사 자체는 존속했지만 2003년을 끝으로 활동 중단에 들어갔다 2022년에 전임 사장이던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잠깐 배우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형과는 달리 2003년에 체조 강사와 결혼했다.
[3]
베와 무명 따위를 파는 상점.
[4]
치바 현 대회에 나가 우승도 했다고 한다.
[5]
참고로 이때 다른 밴드로 콘테스트에 참가 중이였던
파타도 이 공연을 보고 있었다고 한다.
[6]
白鳥 瞳(시라토리 히토미)는 요시키의 가명이다.
[7]
2013년에 리메이크되기도 하였다.
[8]
今を抱きしめて의 클래시컬 버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싱글에만 수록되어 있어서 나름 희귀성을 인정받던 이 트랙은 2005년에 발매된 ETERNAL MELODY 2에서 또 재 수록된다.
[9]
해당 음원은 "Eternal Melody"와 요시키 솔로 싱글에 수록된 그 음원 그대로다.
[10]
훗날 밝혀지기로는, 토시가 부인으로부터 전도받은 "홈 오브 하트" 라는 사이비 종교의 세뇌로 인해 탈퇴를 하게 되었다.
[11]
자신의 전 연인이었던
쿠도 시즈카를 영입해서
진홍의 꽃(深紅の花)이라는 곡을 주고 프로듀서로서 싱글을 발매했다. 사실 쿠도 시즈카는 왕년의 대스타였지만 이미 전성기가 지나 가창력도, 미모도 예전만 못한 그녀가 음악으로 성공하긴 불가능했다. 다만 그녀의 음원 성적과는 별개로 같은 해에 일본 연예계 최고의 인기남인 2살 연하의
기무라 타쿠야를 잡아채서 결혼에 골인한 여자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다. 그외 여성보컬인 Shiro와 밴드 BEAST、Revenus 등의 아티스트 들을 프로듀스했으나 역시 히트작을 내진 못했고 지금은 잊혀진 상태.
[12]
X JAPAN의 정규 3집 앨범과 예명이 동일하다.
[13]
어느 정도 독자적인 문화로서 궤도에 올라 있었던 일본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에서도
인디씬이
홍대 인근에서 한참 불타오르고 있었던 시기로 그와 비슷한 이미지를 표방키도 했으나.. 트랙스는 명백히 멤버 개개인의 독자성과 자립으로 이루어져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온 밴드가 아닌 대형 기획사의 주도 하에 아이돌 양성 시스템을 통해 만들어진 아이돌 밴드였다.
[14]
국내 기획사는
SM엔터테인먼트이었고 일본 기획사는 당시 SM이 제휴했던 최대 레이블인 AVEX TRAX.
[15]
이들의 실패의 최대 원인으로 연주력 음악성을 논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연주력 가창력 문제 등은 초반에는 미흡하더라도 일단 주목을 끌면 시간을 들여 차차 개선을 시켜나가면 나중에는 좋게 해결될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음악성이라는 것은 문제를 삼기에 앞서 뭐가 옳고 그른지 기준 자체도 모호하고 진짜 문제는 그 당시 트랙스의 외적 컨셉이 그 당시의 트렌드와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도저히 흥행이 될수가 없었던 것에 있었다. 같은 시기에 데뷔한 동방신기와는 대조되는 부분. 그나마 트랙스의 멤버였던
노민우는 빼어난 외모와 나쁘지 않은 연기력을 통해 현재 연기자로 활동 중인데 TV 드라마 락락락의 주연을 맡는 등 배우로서의 입지를 제법 굳힌 상태다.
[16]
사진으로 봐서는 The Last Song, Jade, Beneath The Skin, Hero의 순서로 보인다. 나머지 트랙에는 Scarlet Love Song, Born To Be Free, I.V 등의 선공개된 곡들이 묶일 듯...이었지만 2015년 공개한다던 새 앨범이 2016년 3월로 다시 밀린 것으로 봤을 때 트랙리스트에 변동이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17]
LA의 "One on One Recording Studio"(구매 당시 명칭, 1998년부터는 "Extasy Recording Studio", 2012년부터 현재는 "17 Hertz Studio") 구매 에피소드는 요시키의 압도적 재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데, "드럼 녹음을 위한 세계 최고의 스튜디오"라는 엔지니어의 평을 들은 후 스튜디오 녹음 예약을 하려 했으니 당시에
메탈리카가 "THE BLACK ALBUM"(셀프 타이틀인 "
Metallica"(1991)를 지칭)를 녹음 중이었고 이 후로도 1년여간 예약이 꽉 차있길래 그냥 사버렸다고 본인이 직접 밝힌다. "One on One Recording Studio"의 경우
마이클 잭슨도 레코딩 작업에 사용했다고 하는데, 해당 스튜디오를 현재는 매각했고 본인 표현으로는 지금은 설비가 훨씬 더 좋은 스튜디오를 재구매하여 전용으로 쓰고 있다고 하니 더 후덜덜하다.
[18]
그러나, 안타깝게도 보컬로 발탁됐던
YOSHI가 2022년 11월 5일 새벽에 오토바이를 몰다 트럭에 치이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
https://www.oricon.co.jp/news/2226046/full/
[20]
해석: "닛폰테레비로부터 이야기를 받아, 매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Nothing is Impossible.' 아시아가 주목받고 있는 지금이기 때문에 새로운 "최강의 장르리스 그룹"을 세계에 내보낼 수 있으면 기쁘겠습니다 엔터테인먼트의 세력도라는 세계지도가 있다면 지난 몇 년 동안 아시아는 확실히 꾸준히 확대되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 살고있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일본에도 훌륭한 아티스트가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과 달리 세계로의 문이 순식간에 열리는 지금, 일본의 아티스트에도, 지금까지 이상으로 기회가 있다고 느끼고 있고, 새로운 세대의 도전에 공헌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오랜 경험치에서 저도 조언할 수 있고 세계와 싸우고 있는 중인 아티스트의 한 사람으로서 함께 성장하고 싶다는 기분입니다. YOSHIKI=비주얼계 록 밴드의 이미지가 강할지도 모르지만 탄생하는 것은 댄스 그룹일지도 모르고 HIPHOP일지도 모릅니다. 기발하지 않아도 좋다, 패셔너블하고 엣지 있는 「장르레스의 그룹」입니다. 세계에서 승부하기 위해서는 “최강”의 그룹이어야 하고, “열정”도 “노력”도 당연합니다. 그 위에 플러스 알파로 뭔가 빛나는 것이 있는지 여부. 그 재능과 기운을 간파하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꿈」은 좀더 무한히 갖고 싶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스스로의 「가능성」을 믿으면 좋겠습니다. 나와 함께 세상에 도전합시다. 여러분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21]
한국에서
다국적 보이그룹
Z-BOYS로 활동했던
가이가 소속되어 있다.
[22]
청춘과 전성기를 함께 한 멤버의 급작스런 사망 소식에 누구보다 황망한 마음이겠지만, 그와 별개로 요시키의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에 히스의 장례식으로 추측되는 시기에 ‘상복 셀카’를 올린 것이 다른 의미(..)로 회자 되고 있다.
[23]
2000년의 어느 일본 예능프로그램에서 그 유명한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가 리포터로 LA의 요시키 자택을 방문했을 때 즉석에서 피아노로 만든 곡이 해당 프로그램의 로고송까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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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녹색지대의 "준비없는 이별", 김민종의 "나를 위해" 등의 원곡이다. 즉 당시 많은 한국가요들이 대놓고 베낀 곡. 일본에서도 X JAPAN 최고의 발라드로 인기가 높지만, 한국에서의 인지도와 인기가 훨씬 높았던 대표곡. 요시키의 발라드곡들은 확실히 한국인 감성에 훨씬 더 호소하는 바가 큰 것으로 보인다.
[25]
X 시절 타이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툭하면 치고 싸웠지만, 능력 면에서는 최상의 궁합이었다는 평. 실제로 요시키 작곡-타이지 편곡 콤비는 X 초창기 시절 많은 명곡들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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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키는 트윈 기타 체제에 기반한 멜로딕 스피드 메탈을 지향했으나 타이지는 원 기타 체제의 LA메탈 및 아메리칸 하드락을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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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M.C The Max가 '잠시만 안녕'이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한 그 원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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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SS 119 97년 2월호 http://www2s.biglobe.ne.jp/~reiko/database/text/temp/01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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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곡에 컴퓨터로 찍은 전자 악기를 사용하는 것과 연주자로서의 실력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밴드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는 4집 Kid A 이후 기타 사용을 현격하게 줄이고(Kid A에서는 대부분의 곡에 아예 기타를 사용하지 않았다.) 신디사이저나 사운드 모듈 등의 디지털 악기를 적극 활용하지만, 그 누구도 조니 그린우드가 기타리스트로서 자각이 부족하다거나 실력이 떨어진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기타리스트로서 굉장히 높이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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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관해서는 Vanishing Vision에 수록된 I'LL KILL YOU, Blue Blood에 수록된 オルガスム, Jealousy에 수록된 Stab Me In The Back과 같은 곡들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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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인디즈 극 초기에는 싱글 I'll kill you 뒷면에서도 쓰여져 있듯이 본명으로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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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키 자서전 한국어 번역본을 볼 수 있는 블로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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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원이 교도소라면 소년분류심사원은 구치소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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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소년분류심사원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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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일본에서도
청소년 선도 관련 봉사활동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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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 보이는 사진 속의 모습과는 달리 전 날 그가 입국하던 당시의 공항에서는 그를 보러 온 팬들로 인해 온통 난리가 났었으며 이 당시의 상황은 공식 발매된 LAST LIVE DVD에도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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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엑스재팬의 음악적 전성기는 요시키와 타이지의 역관계가 균형을 이룰 때였지만 한국 팬들과 뮤지션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뭐라해도 요시키표 록 발라드이다. 일본 본토에선 이런저런 논란을 빚었던 메이저 3집 앨범 <DAHLIA>가 과거 한국에선 가장 인기 있던 앨범이었다. 사실 일본에서도 대중적으로는 요시키표 록 발라드가 압도적으로 더 인지도가 높다. 예를 하나 들자면, X japan의 열성팬으로 유명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요시키표 록발라드만 선호하지 정작 록 팬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X japan의 메탈 곡들은 아예 들어본 적조차 없다고 한 바 있다. 이렇듯 일본에서 메탈이라는 장르는 어디까지나 부분 문화에 가깝고 대중적으로 인기몰이를 했던 메탈 밴드는 X japan이 유일무이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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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평가가 불편할 사람도 있겠지만 90년대까지, 아니 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가요계는 일본 음악을 별다른 죄의식도 없이 마구잡이로 표절하는 관행이 성행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 음악가들에게 가장 많은 표절을 당한 게 요시키와 X JAPAN이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표절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암암리에 X JAPAN의 반주나 모습, 양식을 참고, 모방하는 제작자와 음악가가 많았다는 건 한국 대중음악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치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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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그 짤에 담긴 17가지 정보 가운데 14번 타이지 해고 사건, 15번 글레이 부당 계약,(이것도 사실 어느정도 왜곡이 있는데 글레이가 요시키의 레이블에서 데뷔한 것은 맞지만 나중에 다른 소속사로 떠난 후 부당계약 문제가 생긴 것이고 이때는 이미 레이블이 요시키의 손에서는 떠나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현재도 글레이와 요시키는 매우 친한 것을 알 수 있다.) 17번 호테이 토모야스와의 트러블 정도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운 내용이고 나머지는 전부 다 잘못된 정보이거나 확인되지 않은, 그리고 확인할 수도 없는 루머와 괴담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실에 가까운 정보마저도 과장과 악의적인 왜곡이 많은데 타이지 해고 같은 경우는 요시키 잘못이 더 크긴 하지만 타이지 역시 분명 문제가 있었고 요시키는 지금도 글레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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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em의 보컬
사카모토 에이조가
애니메탈을 결성하게 되는 계기에 관해서는, 소니뮤직의 중역이 택시 기사를 하던 사카모토 에이조의 택시에 우연히 탑승했는데 연말이 쓸쓸하여 함께 가라오케에 가자는 제의를 하게 되었고 택시 기사인 그 역시 쓸쓸한 연말을 보내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며 가라오케를 갔는데 애니메이션 노래를 엄청난 샤우팅으로 부르는 그의 모습에 경악해서 그를 애니메탈 프로젝트의 보컬로 낙점했다고 한다. 이것은 한때 국내 일본 록 팬들 사이에서 마치 정설인 것마냥 알려진 내용인데 바로 이 소문의 출처가 바로 <일본록디비보기>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 웹에서 출처는 커녕 그럴듯한 이야기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낭설이다. 지금과 같이 해외 정보를 해당 언어로 찾아보기 힘들었던 시대에 아무런 출처가 없는
카더라 통신이 일본 인디 뮤지션 출신의 재일교포가 소개하는 현지 정보라는 필터를 거쳐 마치 사실인 것처럼 전파되었고 엑스재팬 및 요시키에 관해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가능성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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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슈지의 만화
엘리트 건달 28권 <사부로, 노래합니다! 헬로우 로리타!> 편에서 신랄하게 조롱당한다. 작중 요시키는 '토시키'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어원은 토시와 요시키를 합친 것으로 보인다. B급 개그 만화 수준인터라 스토리가 어딘지 조잡하고 엉성한 게 특징이라면 특징인데 이 에피소드 만큼은 요시키와
비주얼계를 풍자하며 상당한 수준의 스토리 구성 능력과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보여준다.
비주얼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00년대 중반 비주얼계 암흑기 시절 비주얼계가 직면한 문제점(과도한 비주얼 지향에 따른 실력 저하, 음악성을 도외시한 과도한 선정성, 기성 밴드들과 비교해 현저히 잦은 멤버들 간의 불화와 이에 따른 이합집산, 대중적 지지도의 몰락과 컬트화 등등)을 적확히 파악하고 비판하고 있다. 다만 진지하게 지적하자면 작가는 요시키(토시키)를 무슨 탐미주의의 화신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요시키와 엑스재팬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요시키의 음악적 성향과 콘셉트는 작가가 생각하는 탐미주의와 별 관계 없다. 그런 기믹은
Malice Mizer 계열 비주얼 밴드들이 잘 활용했지 요시키와 엑스재팬이 내세웠던 음악과 퍼포먼스와는 거리가 멀다. 요시키가 비주얼 록의 대부라는 이유만으로 비주얼계에 대한 상투적인 이미지를 뒤집어씌운 셈. 이 부분만 빼놓곤 다 타당한 지적이다. 작중에서
BOØWY 노래가 종종 언급되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작가가 록 음악 팬인 듯싶다. 00년대 중반 비주얼계의 암흑기 시절 일본 현지에서 요시키와
비주얼계에 갖던 극히 부정적인 인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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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지 생전의 자서전 '전설의 밴드 X의 생과 사'에 수록된 인세와 관련 문제에서 비롯된 스튜디오 뮤지션(세션)으로서의 별도 계약, 그리고 해고나 다름없었던 일방적인 탈퇴 요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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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키 본인도 스스로 인정한 바 있는 토시를 노래 부르는 기계나 다름없이 취급했던 점 등. 그 때문에 나이 들면서 토시의 목소리가 망가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ART OF LIFE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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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서 자신의 스텝진들과 식사를 하던 각트를 찾아 온 요시키에게 각트의 스텝진들이 식사를 권하자 3번을 거절하더니 4번째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면서 "먹으라면 먹을게!"라고 대답하고 먹기 시작했다. 근데 너무 잘 먹어서 한 번 더 먹기를 권하자 갑자기 또 버럭 화를 내면서 "알았어! 그렇게 먹으라고 하니깐 먹을 거야!"라고
대답... 각트로서는 이런 요시키가 재미는 있을지언정 이해는 할 수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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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hide에게서 무슨 일인지 연락이 왔는데 요시키가 '카레가 너무 맵잖아'라고 하니 히데는 '할 수 없지'라고 바로 수긍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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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각트가 주변 인물들과 불화가 있더라도 이를 잘 해결하는 편이고, 직접적으로 누군가와 다툰다는 식의 언급 등은 잘 하지 않는 타입이기 때문에 이를 두고서 일부에서는 여전히 “둘이 꽤나 심하게 싸우는 거 아닌가?“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진실은 당사자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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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키 집안이 무슨 대단한 부자라서 밴드 활동 자금을 여유 있게 댔던 것도 아닌데, 다른 멤버들이 바보라서 요시키 혼자 인세를 2배 독식했던 것을 그냥 넘어갔던 게 아니었다. 물론 타이지가 문제 제기 한 시점이 메이저 진출 후 엑스가 큰 히트를 치면서 큰 수익을 올리던 시점이었으니 인세 지분 비율을 어느 정도 재조정해야 했던 것도 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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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 여성 혐오, 과거사 부정이 담겼다고 해석한 <무라카미 하루키론: 해변의 카프카를 정독하다>라는 명저로 국내에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고모리 요이치 교수
#도 포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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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요시키에 대한 고모리 요이치 교수의 주장은 당시에도 과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링크 참고로 고모리 요이치 교수는 2차 대전 당시 히로히토가 전쟁에 책임이 있었다고 주장한 좌익 성향 인물이다. 즉, 천황제 자체를 반대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천황 관련 행사를 영국 왕실 행사 같은 국가적 문화 행사 정도로 인식하는 일반적인 일본 국민들과는 인식이 매우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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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지적되곤 하는 온갖 베스트의 남발을 비롯한 과도한 상업화 러쉬보다 실제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51]
신작 연기, 마스터 테이프 분실 사건, 레코드 사와의 불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