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8:06:24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유럽의 주요 관현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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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19 시즌 소개 영상

1. 개요2. 연혁3. 역대 수석 지휘자4. 특징

1. 개요

영국의 대표적인 관현악단. 이름 그대로 런던을 본거지로 하고 있다.

2. 연혁

1932년에 지휘자였던 토머스 비첨이 창단한 사설 관현악단으로 출발했는데, 비첨 가문은 대대로 제약 사업으로 거액의 부를 모은 대부호였다. 비첨은 비록 경영 승계는 받지 않았지만, 물려받은 유산을 자신의 음악 활동에 엄청나게 쏟아부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여러 음악 단체 중 21세기까지 살아남아 있는 단체가 이 악단과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두 단체다.

비첨은 창단 직후 초대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고, 세계 대공황으로 빌빌대고 있던 영국 음악계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쇼미더머니를 시전해 구조조정으로 퇴단해야 했던 많은 실력파 연주가들을 거꾸로 영입하면서 악단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놓았다. 녹음 활동도 시작해 비첨 자신의 전속 음반사였던 컬럼비아나 EMI 등지에 여러 장의 레코드를 취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첨은 무슨 이유인지 1939년에 악단 운영권과 수석 지휘자 직책을 모두 포기해 버렸다. 공황기에도 별 탈 없었던 악단의 재정 상태는 갑자기 빈곤 상태로 급추락했고, 악단원들이 직접 운영에도 책임을 지는 자주 운영 제도를 채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로 뒤이은 2차대전 때문에 상황은 훨씬 심각해졌고, 영국 본토 항공전이 치열했던 1941년 5월에는 상주 공연장으로 쓰던 퀸즈 홀이 폭격으로 박살나면서 악단 소유의 악기와 악보 상당수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한 때 심각하게 해체가 고려되기도 했지만, 애호가들의 지원과 BBC의 방송 출연 주선 등에 힘입어 간신히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종전 후 창립자였던 비첨이 잠시 일선에 복귀해 악단 재건을 시도했는데, 1년 반 정도 객원 지휘만 했고 이후 로열 필의 창단과 육성에 주력하는 바람에 큰 성과는 없었다. 결국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강행군에 가까운 수많은 공연을 치르는 수밖에 없었고, 자국 출신이던 동맹국이던 과거 추축국이건 수많은 네임드 지휘자들을 초빙해 닥치는 대로 공연을 하며 혹사당했다.

1947년에는 세계적인 거장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역시 베를린 필에서 활동하던 차세대 유망주 세르주 첼리비다케와 음반 녹음을 하기도 했다. 특히 푸르트벵글러와의 음반 녹음은 런던 필로서는 빅 이벤트였다. 그러나 런던 필과 녹음하러 온 푸르트벵글러는, 지휘자들에게 권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유명한 데카사 프로듀서들[1]에게 불편한 기색을 보였고 결국 이 녹음은 런던 필에게나 데카에게나 단발성 이벤트로 그치고 말았다.

1947년,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명문 오케스트라인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던 에두아르트 판 베이눔이 제2대 수석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베이눔은 네덜란드의 음반사 필립스에서 많은 음반을 녹음하고 있었지만 런던 필에 취임하고 나서도 대부분의 녹음을 콘서트헤보와 녹음했기 때문에 런던 필 입장에서는 재정적으로 아쉽게 되었다. 악단의 재정적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아서 1949 ~ 1950년에도 런던 필은 무려 240여회의 콘서트를 하는 살인적인 일정을 치러야 했다. 베이눔은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년에 6개월만 할애하는 조건으로 취임했으나 런던 필의 살인적인 스케줄은 심장병을 지병으로 가지고 있던 베이눔에게는 너무나 무리였다. 결국 베이눔은 7년 계약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1950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베이눔의 후임으로 1950년 영국의 노장 지휘자 에이드리언 볼트가 취임하여 1957년까지 7년간 악단을 이끌었다. 네덜란드에 연고를 두고 있었던 전임자 베이눔에 비해 볼트는 당시 영국 음악계에서 비첨과 더불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원로 음악인이었기 때문에 런던 필이 안정화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볼트는 악단 체제를 재정비하는 등 많은 공헌을 했다. 또 볼트는 EMI, 데카 등에서 적지 않은 음반 녹음을 하면서 악단 재정난에 숨고를 틔워주기도 했다. 1956년에는 영국 관현악단으로서는 전후 최초로 소련 순회 공연을 하기도 했다.

볼트의 사임 후 1958년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인 윌리엄 스타인버그가 런던 필 상임지휘자를 겸직하게 되어 2년간 악단을 이끌었다. 스타인버그는 피츠버그 심포니와 함께 미국에서 어느정도 잘 나가는 지휘자이긴 했지만 당시 미국 빅5 오케스트라 및 그 상임지휘자들(번스타인, 셀, 라이너, 오먼디 등)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다소 부족했고, 런던에서 마찬가지로 전임자들인 비첨, 베이눔, 볼트에 비해서 네임 밸류가 다소 떨어졌다. 물론 스타인버그의 음악성이 전임자들보다 떨어진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대중적 인지도는 떨어지는게 사실이었고 때문에 스타인버그의 경우 기존에 해오던 피츠버그와 마이너 레이블의 음반 녹음 말고[2] 런던 필에서는 거의 녹음을 남기지 못했다. 스타인버그에게 있어 런던 필이 피츠버그 심포니보다 조금더 국제적인 네임 밸류가 있던 오케스트라였지만 그는 결국 런던 필에서 2시즌만에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피츠버그 심포니로 돌아갔다. 실제로 그는 당시 팔의 통증 등 건강상의 이유가 있기도 했지만 지휘를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3], 실제로는 런던의 악명 높은 평론가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등의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스타인버그 이후 2년간 공석으로 있다가 1962년 존 프리처드가 상임지휘자에 취임해서 4년간 악단을 이끌었다. 존 프리처드는 주로 오페라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았던 지휘자였는데, 프리처드는 영국 국내 한정으로는 오페라 분야의 본좌였지만, 오페라 분야를 제외하고 콘서트에서는 당시 런던 무대에서 활동하던 네임드 지휘자들에 비해 네임밸류가 확연하게 떨어졌고 실제로 이 시기에 런던 필과 음반 녹음도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4]. 그러나 프리처드는 영국 국내 오페라계에서는 끗빨이 있던 지휘자라 임기 막판에 자신이 예술 감독을 맡고 있던 음악제인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서 런던 필이 기존의 로열 필을 대신해 전속 관현악단이 되는 데 기여했다. 이는 악단 재정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볼트, 스타인버그, 프리처드 시기를 거치며 막장이었던 재정 상황도 50~60년대에 걸쳐 꾸준히 나아졌고 합주력도 더욱 안정화되었다.

프리처드의 후임으로는 넉넉지 못한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던 네임드 지휘자인 베르나르트 하이팅크가 영입되었다. 하이팅크는 예전의 베이눔이나 스타인버그처럼 자신의 본령인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와 대부분의 녹음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네임드였고 필립스가 간판으로 밀던 지휘자였기 때문에 런던 필과도 녹음을 제법 남겼고 재정 상황이 풍족하지 못했던 런던 필의 제한적인 상황에서는 나름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또 프리처드 말기에부터 참여하게 된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서도 기존에 오페라 경험이 없었던 런던 필이었지만, 하이팅크의 역량과 명성으로 인해 런던 필은 비교적 호평을 받으며 완전히 자리잡게 되었고 덕분에 런던 필은 재정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하이팅크는 역대 수석 지휘자들 중 12년이라는 최장기 재임 기간을 기록했다.

하이팅크의 후임으로는 역시 세계적인 네임드 지휘자인 게오르그 솔티가 영입되었다. 솔티 역시 본인의 본령인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대부분의 녹음을 남겼지만 런던 필과도 종종 녹음을 남겼다. 하이팅크와 솔티 시기를 거치면서 악단의 명성은 더욱 공고해졌다. 1982년에는 악단 창립 50주년을 맞아 성대한 축하 공연을 열기도 했다.

솔티의 후임으로 동독 출신의 지휘자 클라우스 텐슈테트가 수석 지휘자로 취임했다. 당시 콧대 높기로 악명 높은 런던의 평론가들은 어이없게도 텐슈테트의 영입을 도박으로 여기며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텐슈테트는 아직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는 않았지만 출중한 실력을 가진 지휘자였고, 런던 필의 지휘자가 되기 전 몇년간 미국과 유럽의 여러 명문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며 여러차례 큰 호평을 얻었다. 아직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 객원 지휘 직후에 베를린에서 카라얀의 후임 지휘자로 거론될 정도였다. 아직 텐슈테트의 명성이 서방에 퍼져나가기 전에 런던 필 경영진이 그의 가치를 재빨리 알아채고 발빠르게 그를 영입한 것은 악단에게 큰 행운이었다. 텐슈테트의 재임 기간은 런던 필의 전성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임인 하이팅크나 솔티도 네임드 지휘자들이지만 이들은 본진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런던 필과의 음반 녹음이나 연주 여행 등의 활동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텐슈테트는 런던 필을 메인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런던 필과 많은 녹음을 남겼고 연주 여행도 활발히 다녔다. 특히 말러 교향곡 전집 녹음은 크게 호평을 받았다. 텐슈테트와의 활발한 음반 녹음 출시는 런던 필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더욱 높여줬으며, 악단의 재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텐슈테트의 지병이었던 성대암이 악화되면서 80년대 중후반부터 활동에도 많은 지장을 받게 되었고 1987년에는 결국 건강 악화로 사임하고 말았다. 텐슈테트의 사임 후에는 후임을 찾지 못해 수석 지휘자 직책이 3년 동안 공석으로 남아 있기도 했다. 텐슈테트는 암에서 회복하고 나서 다시 런던 필 지휘대에 올랐지만 여전히 건강 때문에 제약을 받았다.

1990년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젊은 신예였던 프란츠 벨저-뫼스트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30세의 경력도 일천한 젊은이를 새 상임지휘자로 임명한 것에 대해서는 당시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던 런던 필의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적지 않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젊지만 장래가 촉망되는 지휘자였던 벨저-뫼스트는 EMI 등과 음반 작업을 통해 불안정한 악단 재정을 충당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취임 직후에 내놓은 브루크너 교향곡 제7번은 카라얀의 유명한 마지막 녹음과 비슷한 시기에 출시되었지만 나름 호평을 받았고 벨저-뫼스트를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런던의 신랄한 비평가들에 의해 공연이나 음반 출반 때마다 평단에서 신나게 까였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악평과 달리 그의 음반과 순회 공연은 미국, 일본, 한국 등 해외에는 나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런던 비평가들의 까임에도 불구하고 벨저-뫼스트는 런던 필 사임 후 취리히를 거쳐 미국의 본좌급 오케스트라인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에 취임한다. 1995년에는 소프라노 가수 조수미와 함께 한국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벨저-뫼스트가 사임한 후에는 또 악단 재정이 영 좋지 않은 상태 속에서 4년 동안 객원 지휘에만 의존해야 했다. 이 시기에는 로열 필과의 합병설이 자주 거론되기도 했다.

2000년이 되어서야 독일 쿠르트 마주어를 후임으로 맞아들였다. 뉴욕 필에서 이사진들이 요구했던 음악 외적인 비즈니스 활동에 지쳐있던 마주어는 절친했던 텐슈테트의 오케스트라였던 런던 필이 어려움에 처해있는 것을 돕고자 뉴욕 필보다 훨씬 낮은 연봉에도 불구하고 뉴욕 필을 사임하고 런던 필의 포스트에 취임했다. 마주어의 음악적 성향은 뉴욕 필보다 런던 필에 보다 잘 어울린다는 평을 받았지만 음반 시장이 침체에 빠지게 되어 음반 녹음을 많이 남기지는 못했다.

마주어는 2007년까지 재임했고, 후임으로는 러시아 출신의 블라디미르 유롭스키가 자리를 이어받아 2010년 현재까지 재임하고 있다. 2008/09년 시즌 부터는 프랑스 캐나다 지휘자 야닉 네즈세갱이 수석 객원 지휘자로 영입되었다.

3. 역대 수석 지휘자

  • 토머스 비첨 (Thomas Beecham, 재임 기간 1932-1939)[5]
  • 에뒤아르트 판 베이뉨 (Eduard van Beinum, 재임 기간 1947-1950)[6]
  • 에이드리언 볼트 (Adrian Boult, 재임 기간 1950-1957)[7]
  • 윌리엄 스타인버그 (William Steinberg, 재임 기간 1958-1960)
  • 존 프리처드 (John Pritchard, 재임 기간 1962-1966)
  •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Bernard Haitink, 재임 기간 1967-1979)[8]
  • 게오르그 솔티 (Georg Solti, 재임 기간 1979-1983)[9]
  • 클라우스 텐슈테트 (Klaus Tennstedt, 재임 기간 1983-1987)[10]
  • 프란츠 벨저-뫼스트 (Franz Welser-Möst, 재임 기간 1990-1996)
  • 쿠르트 마주어 (Kurt Masur, 재임 기간 2000-2007)
  • 블라디미르 유롭스키 (Владимир Юровский, Vladimir Jurowski, 재임 기간 2007-2021[11])
  • 에드워드 가드너 (Edward Gardner, 재임 기간 2021-현재)[12]

4. 특징

1인자인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이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런던의 2~3인자 자리를 양분하고 있는 오케스트라다. 연혁 항목에 숱하게 언급될 정도로, 재정 형편이 좋았던 시절이 별로 없는 어려운 세월을 보낸 악단이었다. 어느 정도 클래식을 듣기 전[13]까지는 거의 존재감이 없는 악단으로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역대 상임지휘자들의 면면을 보면 의외로 나름 쟁쟁한 네임드[14]들이 많다. 특히 같은 '런던'이라는 상호를 사용하는 런던 심포니와 비교할 때, 런던 필의 역대 상임지휘자들이 음악적으로 더 수준 높은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클래식 음반도 나름 상당히 많은 편이다. 런던 심포니가 악단 기량 자체는 세계 수위급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상임지휘자들의 음악적 내공이 이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아 의외로 명반이 많이 없다는 점과 대비된다. 2000년대 들어 녹음 시장이 활기를 점차 잃어가게 되자, 2005년에 다른 악단들과 마찬가지로 자체 음반사인 'LPO' 레이블을 출범시켜 음반이나 인터넷 유료 다운로드 음원들을 제작하고 있다. 유튜브 같은 동영상 사이트를 통한 홍보도 활발하게 진행중이다.

완전 다른 조직이긴 하지만, 비첨이 창단한 악단이라는 점에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는 미묘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거의 모든 악단이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던 1990년대 중반에는 두 악단의 통합 문제도 진지하게 논의되기도 했지만, 서로의 자존심 때문에 마찰이 심했는지 아니면 따로 뭔가 해결책을 내놓았는지 결국 취소되었다.

자주 운영 악단으로서 늘 마주치게 되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인지, 굳이 클래식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배경의 음악인들과 협연하면서 지명도와 재정 모두를 붙들어 잡는 데 꽤 심혈을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 영화음악 오리지널 스코어 연주에서부터 나이트위시 오아시스 같은 메탈/ 록 음악 밴드, 칙 코리아 같은 네임드 재즈 피아니스트와 협연하고 음반 작업까지 하는 등 거의 마당발 수준으로 활동 중이다[15][16].

동양권에서도 이 악단의 이름을 음반 등에서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데, 수구꼴통 작곡가 스기야마 코이치가 자작의 게임 OST인 드래곤 퀘스트 1~7편을 교향조곡(교향 모음곡)으로 개작한 CD들이 출반되어 있다. 이외에도 파이널 판타지 제노사가 등의 게임 음악에도 참여했고 히사이시 조, 양방언이나 유희열 같은 뮤지션들도 이 악단과 세션을 한 바 있다.

xjapan의 곡들을 조지 마틴이 클래식버전으로 편곡해서 eternal melody라는 앨범을 1993년에 발매한적이 있다. 이때 앨범곡들을 연주했던 악단이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합창이 붙는 작품의 연주 때는 1947년 창단된 악단 부속 합창단인 런던 필하모닉 합창단(London Philharmonic Choir)이 줄곧 협연하고 있다.

상주 공연장은 로열 페스티벌 홀로 되어 있었는데, 2000년에 이 홀과 주변 문화 공간들인 퀸 엘리자베스 홀, 헤이워드 갤러리가 대규모 개보수 작업을 거쳐 통합되면서 복합 문화 공간인 사우스뱅크 센터가 탄생했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악단 홈페이지에도 상주 공연장이 로열 페스티벌 홀이 아닌 사우스뱅크 센터로 변경되어 있다. 다만 악단 단독으로 쓰는 것은 아니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런던 신포니에타, 시대연주 단체인 계몽주의 시대 관현악단 세 단체가 같이 세들어 있다. 밥그릇 싸움이 걱정되지만 아직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고 있는 듯.

디스코그래피를 보면 Philharmonic Promenade Orchestra라는 명의로 나온 음반이 있다. 이는 계약상의 문제 때문에 이름만 바꾼 것 뿐 같은 악단이다.


[1] 당시 올로프가 수석 프로듀서로, 그리고 존 컬쇼가 조수로 참여했다. [2] 스타인버그는 피츠버그 심포니에서 캐피톨, 코만도 등 마이너 레이블에서 주로 음반을 남겼다. 비록 마이너 레이블이지만 평단에서도 그럭저럭 평가를 받았고, 실제로 입소문으로 미국 클래식팬들에게는 어느정도 인지도를 갖고 있었다. [3] 여전히 그는 피츠버그에서 지휘를 했다. [4] 프리처드는 그래도 오페라 녹음이 남아 있는데, 빈 필 등 다른 오케스트라 녹음한 것들이다. [5] 수석 지휘자를 그만 둔 이후 런던 필의 지휘봉을 잡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알려진 녹음 중 런던 필과 남긴 것은 없다. [6] 데카에 많은 녹음을 남겼다. [7] 런던 필 수석 지휘자를 끝으로 은퇴할 때 까지 상임지휘자 혹은 음악감독을 맡지 않고 주로 객원지휘를 하거나 녹음을 하였다. 수석 지휘자 재임 기간 동안에는 데카에 녹음을 주로 남겼고 이후에는 EMI(현 워너 클래식)에 녹음을 많이 남겼다. 대부분의 녹음을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했다. [8] 이때의 인연 때문인지 이후 EMI와 본 윌리엄스 교향곡 전곡을 녹음하게 된다. [9] 이 시기의 대표적인 녹음은 엘가 교향곡 1번이다. [10] 런던 필과 녹음한 말러 교향곡 사이클이 가장 유명하고 이외에도 베토벤 교향곡 사이클 등도 유명하다. [11] 2021년 부터 바이에른 국립 가극장 음악감독 취임으로 인한 임기 종료 [12] https://www.lpo.org.uk/news/gardner.html [13] 클라우스 텐슈테트가 런던 필로 오기 전까지는 주로 홀스트의 행성이나 본 윌리엄스 교향곡 등의 영국음악에 명연이 많았다. 전자의 경우에는 영국 악단이 아니라도 연주 및 녹음을 많이 하는 편이라 런던 필의 녹음 외에도 유명한 녹음들이 많지만, 후자는 영국의 악단 외에는 자주 연주하는 곡이 아니기 때문에 당시에 녹음했던 런던 필의 녹음이 리스트에 자주 오르는 편이다. [14] 역대 상임지휘자들의 네임밸류는 런던 심포니를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들 중 상당수는 본진이라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가 따로 있고, 투잡으로 런던 필에서 일한 경우가 많았다. 로얄 콘서트헤보의 하이팅크, 시카고 심포니의 솔티,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벨져-뫼스트가 그렇다. [15] 고전 음악은 인정하긴 쉽지 않겠지만 수요가 극히 제한되어 있는데다 활동 범위도 넓지 못하다. 과거의 보수적인 스탠스에서 벗어나 여러 분야로 활동을 넓히는 교향악단들이 많아지면서 이 추세를 벗어나기가 힘들어지는것 또한 사실이고 결정적으로 대중문화의 질도 과거와는 다르게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적극적이어야 할 이유도 충분하다. [16] 이를 예시로 들 수 있는 것이 또다른 런던 연고 오케스트라인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이다.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일찍부터 OST 연주로 분야를 넓혔고 덕분에 재정상태도 좋아졌다. 특히 스타워즈 OST는 전적으로 여기가 담당하고 있어서 팬들에게는 ‘스타워즈 전문 악단’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의 명성을 갖고있으며 게임과 같은 곳에도 참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