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09 19:29:27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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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톨레마이오스 1세: 가장 성공한 디아도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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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3세의 죽음 이후 분열된 제국의 판도.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어머니는 아르시노에로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 알렉산드로스 1세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아버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많은 고대 기록들은 그가 필리포스 2세 사생아였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이복동생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하였고, 알렉산드로스가 아버지와 대판 싸운 뒤 일리리아로 망명했을 때 함께 하기도 했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정을 단행했을 때 처음부터 참가하여 인도 원정까지 이어지는 무수한 전투에서 활약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3세가 바빌론에서 사망한 뒤, 필리포스 3세 알렉산드로스 4세가 공동 왕으로 등극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섭정을 맡은 페르디카스에 의해 이집트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이집트에서 독립할 야욕을 품고, 이를 실현하고자 갖은 모략을 꾸몄다. 기원전 322년 말 또는 321년 초, 알렉산드로스의 유해가 마케도니아로 이송되고 있을 때, 그가 파견한 기병대가 습격하여 유해를 탈취한 뒤 이집트로 가져갔다. 대왕의 유해는 처음에는 멤피스에 안치되었다가, 나중에 알렉산드리아로 이송되어 시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황금 석관에 안장되었다. 페르디카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응징하고자 대군을 일으켜 이집트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나일 강변에 무수한 요새를 세워놓고 철통 방비를 구축해놓았고, 페르디카스는 무리하게 건너려 했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결국 그는 메디아의 사트라프 페이톤과 셀레우코스, 안티게네스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제국의 섭정을 제의받았지만, 통합된 제국을 이끄는 것보다는 이집트에서 독자적인 기반 확보에 주력하고 싶었기에 거절했다. 디아도코이들이 곳곳에서 할거하여 긴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그의 첫번째 목표는 이집트의 안전을 사수하는 것이고, 두번째 목표는 키레나이카, 키프로스, 시리아, 유대 등을 포함한 이집트 외곽 지역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제2차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안티고노스 1세 에우메네스를 꺾고 최강의 세력을 갖추자, 다른 디아도코이들을 설득하여 반 안티고노스 동맹을 결성했다. 기원전 314년 봄 안티고노스가 남부 시리아로 선제 공격하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의 군사를 티레까지 후퇴시켜 1년간 막았지만 결국 빼앗겼다.

그는 셀레우코스 1세를 시켜 티레를 되찾도록 하면서 셀레우코스에게 수백 척의 전함을 주고 로도스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안티고노스에게서 지원을 약속받고 협박을 받았기에 로도스에 거절당했다. 그래도 소아시아 남서부 해안의 카리아로부터는 협력받는 것에 성공했고 기원전 313년에 동생 메넬라오스를 시켜 해군과 전함으로 셀레우코스를 돕게 했다. 기원전 312년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남부 시리아로 진격해 가자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를 격파하고 시돈을 공략했다. 이 전투에서 안티고노스로부터 바빌론의 사트라프로 지명되었던 아게노르의 아들 페이톤이 전사하자, 셀레우코스에게 일부 병력을 줘서 바빌론에 복귀하게 하였다. 셀레우코스는 재빨리 바빌론을 장악한 뒤 세력을 키워서 안티고노스를 괴롭혔다. 안티고노스는 어쩔 수 없이 프톨레마이오스와 평화 협약을 맺고 물러났다.

기원전 309년 안티고노스가 셀레우코스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동방으로 출전하자, 그는 이 틈을 타 킬리키아, 리키아, 카리아를 공격하여 그중 리키아, 카리아를 점령했다. 기원전 308년 코린토스, 시키온, 메가라 등을 점령했으며, 기원전 305년 비로소 파라오를 칭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개창을 지중해 전역에 선포하였다.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가 벌어질 때는 직접 참가하는 대신 시리아의 시돈을 점령한 후 상황을 예의주시하다가 안티고노스가 이 전투에서 패망하자 재빨리 유대 지방을 차지했다. 기원전 300년경 반란이 끈질기게 일어나던 키레나이카를 완전히 복속시키고 의붓아들 마가스를 총독으로 세웠으며, 기원전 295년에 키프로스를 공략했다. 기원전 288년에 에게 해에 함대를 보내 그리스 도시들에게 데메트리오스 1세로부터 독립하라고 선동하였고, 리시마코스,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1세와 힘을 합쳐 데메트리오스 1세를 마케도니아에서 축출했다.

이렇듯 지속적으로 공세를 펼치면서 외적이 이집트를 노릴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면서, 이집트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헬레니즘 문화를 들여왔으며, 토착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그 결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었고, 다른 디아도코이들이 대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좋지 않은 말로를 맞은 데 비해 그만은 천수를 누렸다. 기원전 285년 차남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공동 파라오로 삼은 뒤 나라를 함께 통치하다가 기원전 282년 사망했다.

2. 프톨레마이오스 2세: 성공적인 내치, 성공과 실패가 교차한 외치

이복형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와 치열한 암투를 벌인 끝에 아버지의 선택을 받아 파라오가 된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단독 파라오가 된 직후 케라우노스의 일가족을 처형하고 리시마코스에게 그쪽으로 망명한 케라우노스를 압송하라고 요청했다. 리시마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누이 아르시노에 2세를 아내로 두었고, 후계자 아가토클레스를 케라우노스의 여동생 리산드라와 결혼시켰다. 그는 어느 한쪽과 관계를 끊기를 원치 않았기에, 케라우노스를 이집트로 보내지 않는 대신 자신의 딸 아르시노에 1세를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결혼시키기로 하였다.

그런데 리시마코스가 얼마 후 셀레우코스 1세와 코루페디움 전투를 치르다 전사하고 그의 영역이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역에 귀속되자, 그는 아내가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여 원전 275년 자신을 몰아낼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이유로 아르시노에 1세를 콥토스로 추방한 뒤 기원전 273년경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했다. 그는 이러한 조치로 인해 '필라델포스(Philadelphus: 형제를 사랑하는 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후대 파라오들은 그의 선례를 따라 근친결혼을 이어갔다. 한편, 그는 즉위 직후 아버지를 신격화했으며, 아버지가 시작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숭배를 국가 숭배로 전환하여 매년 정해진 때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알렉산드로스 3세를 기리는 축제를 개최하도록 하였다. 또한 자신과 아르시노에 2세를 '테오이 아델포이(Theoi Adelphoi 형제 신)'의 현신으로 승격시켰으며, 또다른 누이 필로테라 역시 신으로 숭배받게 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정부인 빌리슈테 역시 아프로디테와 동일시되었다. 그는 왕국 곳곳에 신전을 건설했으며, 고대 이집트 종교를 국교로 삼고 사제들을 후원했다.

이렇듯 왕권 강화와 국가 종교 정립에 매진하는 동시에, 행정 방면에도 힘을 기울었다. 수도 알렉산드리아에는 '파라오의 친구들'이라는 특별한 계층에서 뽑힌 관료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에피스토로가라포스(epistolographos: '편지 작성자'. 외교 담당), 하이포네마토그라포스(hypomnematographos: '메모 작성자'. 수석 비서), 에피톤 프로스타그마톤(epiton prostagmaton: '명령을 담당하는 자', 왕실 칙령 초안 작성)이 포함되었다. 또한 디오이케테스(dioiketes)가 제국 전역에서 세금을 거둬들이고 재정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이집트 전역을 '노메스(nomes)'로 불리는 39개의 구역으로 나누었고, 각 구역에는 농업 생산을 담당하는 노마치(nomarch), 재정을 담당하는 오이코노모스(oikonomos), 토지 측량과 기록 보전 임무를 맡은 바실리코스 그라마테오스(basilikos grammateus)를 두었다. 이 세 관리들은 국왕이 파견한 세금 관리인 디오이케테스(dioiketes)의 관리를 받았으며, 각자 동등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각 마을에는 코마치(komarch)와 코모그래마테오스(komogrammateus)가 있었는데, 이들은 각각 노마치와 바실리코스 그라마테오스에게 보고했다. 여기에 각 노모스 마다 장군 한 명이 이끄는 군대가 주둔했다.

기원전 259년 거듭된 전쟁으로 세금을 보다 체계적으로 거둬들여야 할 필요성이 커지자 '세입법 파피루스'로 알려진 법령을 반포했다. 이 법령은 이집트 전체를 조사해 토지, 관개 시설, 수로 및 삼림의 양과 징수할 수 있는 소득 금액을 파악하고, 각 분야별로 특정 세금을 지정하였다. 그 결과 제국은 세금을 보다 효율적으로 거둬들여서 다른 경쟁국가들을 능가하는 재정 수입을 기록하였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기원전 253년에 파이윰의 모에리스 호수 인근의 늪지대를 개간하여 군인들에게 분배하기도 했다.

그는 대외 관계에도 힘을 기울였다. 사라쿠사 왕 히에로 2세와 우호관계를 유지해, 양국의 지식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하였다. 이 시기에 아르키메데스가 이집트를 방문하여 수학과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카르타고와도 가급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기원전 273년 사절을 로마에 보내 친선 관계를 맺었다. 기원전 26년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양자를 한 쪽을 돕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마우리아 왕조에도 디오니시오스라는 이름의 사절을 보내 양국의 무역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이렇듯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는 국가들과 가급적 잘 지내려 노력했고, 그들과의 무역을 지원해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는 다리우스 1세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당시에는 방치되어 있던 수에즈 운하를 복구하게 하였고, 홍해 해안을 따라 270개의 항구 기지를 건설하게 하였다. 이중 일부는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그리고 코끼리를 포획하는 기지로 활용하고자 홍해 최남단에 프톨레마이오스 테론을 설치해, 전투 코끼리를 지속적으로 충원하는 동시에 주요 무역품목인 상아를 확보하도록 했다. 또한 홍해 동쪽 해안에 베레니케와 암펠로네 시를 건설하고, 나바테아인과 교역하도록 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국가들을 상대로 군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기원전 275년, 이집트 남쪽에 있는 누비아를 침공하여 누비아의 북부 일부 지역을 공략했다. 이 영토에 속한 와디 알라키에는 풍부한 금광이 있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여기에 베레니케 판크리소스라는 도시를 세워서 광산을 개발하도록 하였다. 이 지역의 금 생산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번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기원전 275년 말, 안티오코스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기습 공격해 다마스쿠스를 탈취하였고, 여세를 몰아 시리아 해안과 아나톨리아 남부를 점령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기원전 274년 반격에 나서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오히려 카리아와 시리아 대부분을 공략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시리아에 가있는 동안 키레나이카의 총독이었다가 기원전 276년에 왕을 칭했던 마가스가 아내의 설득을 받아들여 독립을 선포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이집트로 돌아가서 키레나이카의 반란을 진압한 뒤, 안티오코스 1세가 이집트 본토를 침략하는 걸 막고자 나일 삼각주 동부 전선의 방어를 강화했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 역시 국내 사정이 좋지 않아서 이집트를 공격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기원전 271년, 양자는 현 상태를 유지하는 선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기원전 272년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마케도니아의 왕으로서 입지를 굳히고 그리스 본토로 진출을 꾀하자, 동부 지중해와 에게 해, 심지어 흑해까지 진출할 정도로 방대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세력이 위협받았다. 그는 마케도니아의 침략으로부터 그리스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아테네,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268년 말 아테네 지도자 크레모니데스가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양자가 본격적으로 충돌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해군 사령관 파트로클레스는 기원전 267년 에게 해로 항해해 케이오스 섬에 기지를 세우고 기원전 266년 아티카로 항해했다. 그는 스파르타군과 합세한 뒤 아테네를 견제하고 있는 마케도니아군을 격파하려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군이 적에게 가로막히는 바람에 아티카로 오지 못하면서 계획은 실패했다.

기원전 265년 스파르타 왕 아레우스 1세는 코린토스 지협을 건너 마케도니아군에게 포위당한 아테네를 도우려 했지만, 안티고노스 2세가 그들을 격파했다. 프톨레마이오스 해군 역시 적 해군에게 가로막혀 아테네에 물자를 공급해주지 못했다. 아테네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에게 육군을 보내달라고 청원했지만, 그는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결국 기원전 261년 초, 아테네는 안티고노스에게 항복했다. 이리하여 그리스에서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기원전 261년, 안티오코스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휴전을 파기하고 시리아 해안 도시들을 공략했다. 이에 안티오코스 2세는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와 연합하여 에게 해에서 프톨레마이오스군을 몰아내기 위한 군사 작전을 실시했다.(제2차 시리아 전쟁) 안티고노스 함대는 코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함대를 격파하고 코스 섬을 공략했으며, 안티오코스는 팜필리아 이오니아, 밀레투스, 에페소스를 공략한 뒤 이집트 본토로 쳐들어갈 태세를 갖추었다. 기원전 257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반격에 나서 시리아 일부를 공략하였다. 여기에 코린토스와 칼카스를 선동하여 마케도니아에 반란을 일으키게 했고, 안티고노스 2세는 어쩔 수 없이 그리스로 철수했다.

게다가 안티오코스 2세가 시리아 전쟁에 열을 올리느라 동방 속주에 별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파르티아와 박트리아에서 사트라프들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파르티아의 사트라프 안드라고라스는 독립을 선포했고, 박트리아 총독 디오도토스도 기원전 256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권을 부정하고 자신이 왕이라고 선포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게 돌아가자, 안티오코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화해하기로 하고, 아내 라오디케 1세와 이혼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딸 베레니케와 결혼했다.

제2차 시리아 전쟁 후,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에게 해와 그리스 본토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아카이아 동맹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그들이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지속적인 위협을 가하도록 조장하였다. 한편 키레네의 마가스와 손을 잡기로 하고 그의 외동딸 베레니케 2세와 자신의 후계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나 기원전 250년 마가스가 죽자, 베레니케 2세의 어머니인 아파마 2세는 약혼을 취소하고 마케도니아 왕자 데메트리오스를 키레네로 초대하여 베레니케 2세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데메트리오스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키레네의 지배는 공화 정부에 맡겨졌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기원전 246년 1월 28일 자연사하였고, 아르시노에 1세 사이에서 낳은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뒤를 이어 파라오로 등극했다.

3. 프톨레마이오스 3세: 바빌론까지 진격한 파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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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시리아 전쟁으로 최대 판도에 이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기원전 24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즉위 직후 키레네 여왕 베레니케 2세를 이집트로 데려와 결혼하고 공동 파라오로 삼았다. 이로 인해 키레네가 이집트에 재합병되자 그는 에클루스와 데모파네스라는 이름의 두 키레네인이 이끄는 키레네의 공화 정부를 전복하고 두 개의 항구 도시를 주변에 새로 세우게 하였다. 이 도시들은 파라오의 이름을 따서 '프톨레마이스'(오늘날 톨메이타), '베레니케'(오늘날 벵가지)라고 명명되었다.

기원전 246년 7월, 셀레우코스 왕조 안티오코스 2세가 갑자기 죽었다. 그는 생전에 첫 번째 아내인 라오디케 1세에게서 셀레우코스 2세를 두었다. 그러나 기원전 253년 라오디케 1세와 이혼하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여동생 베레니케와 결혼하여 안티오코스를 낳았다. 그러다 안티오코스 2세가 소아시아에서 영지를 경영하고 있는 전 아내 라오디케 1세를 찾아갔다가 돌연 죽어버린 것이다. 라오디케 1세는 재빨리 아들 셀레우코스를 왕으로 내세우며 소아시아 서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베레니케에게 구원 요청을 받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지중해 해안을 따라 이동하였다. 그해 늦가을, 그의 군대는 셀레우키아와 안티오키아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입성했다. 그러나 그는 곧 누이 베레니케와 외조카 안티오코스가 라오디케 1세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동생의 비참한 죽음에 분노한 그는 대대적인 정벌에 착수했다. 기원전 246년에서 245년 사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해군은 아나톨리아 남서부, 이오니아, 트라키아 해안을 따라 원정하여 여러 해안 도시를 공략하거나 복속시켰다. 에페소스 총독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지지를 표명했다. 또한 육군은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포스의 지휘하에 시리아를 돌파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해, 셀레우코스 2세가 도망친 바빌론을 향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진격했다.

훗날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그리스어로 쓴 승전비에는 그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엘람, 페르시아, 메디아, 그리고 박트리아까지 정복하고 "페르시아인들이 이집트에서 운반해온 모든 신성한 물건들"을 되찾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명백한 과장이지만, 이집트군이 티그리스 강을 건너 바빌론까지 위협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 있는 영토에 총독을 세우기도 하는 등, 이 지역을 영구적으로 통합하려는 야망을 드러냈다.

그러나 상이집트의 테베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이집트로 귀환했다. 파피루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45년 나일강의 범람이 예전만하지 않아서 기근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시리아 전쟁을 위해 막대한 세금을 물리자,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셀레우코스 왕조군은 이 틈을 타 반격하여 245년 7월 메소포타미아를 탈환했다. 여기에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해군이 안드로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해군을 격파하고 키를라데스 제도를 함락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이집트로 돌아와 반란을 진압한 후,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는 비문을 세웠으며, 기원전 243년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에서 발견한 조각상들을 이집트에서 복원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2세가 반격에 나서 안티오키아를 탈환하였고 기원전 242년 시리아 북부의 내륙 지대를 탈환했으며, 다마스쿠스 주변 지역을 습격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휴전을 제의했고, 기원전 241년 양국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그 결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트라키아의 마로네이아에서 리비아의 시르티스에 이르는 동지중해 연안 일대를 지배하에 두었다. 여기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 안티오키아의 항구 도시인 셀레우키아 피에리아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것으로 귀속되어서, 셀레우코스 왕조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지만, 셀레우코스 2세의 적들에게 은밀히 지원하였다. 기원전 241년 셀레우코스 2세의 동생 안티오코스 히에락스가 소아시아에서 반기를 들었을 때 암암리에 지원하였으며, 페르가몬 왕 아탈로스 1세를 지원하여 셀레우코스 왕조의 소아시아 영토를 갉아먹게 했다. 또한 아카이아 동맹을 지원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이어갔다. 그러나 기원전 226년 아카이아 동맹이 마케도니아와 손을 잡고 스파르타를 적대하자, 아카이아 동맹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스파르타를 지원했다.

기원전 224년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3세가 '그리스 동맹'을 창설하면서, 그리스의 대다수 국가들은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에 놓였다. 하지만 아이톨리아와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와 적대 관계를 유지했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충성을 바쳤다. 아테네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와 베레니케 2세를 신으로 숭배하는 국가 종교 의식을 조직했다. 이 종교의 중심지는 프톨레마이온으로, 젊은 남성 시민들이 시민과 군사 훈련을 받는 체육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기원전 223년 스파르타 왕 클레오메네스 3세가 끝내 참패하여 이집트로 망명하자, 그는 왕을 환대하면서 다시 권좌에 앉히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기원전 222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안티고노스 3세와 평화 협정을 맺고 클레오메네스를 더 이상 돕지 않기로 했다. ( 클레오메네스 전쟁)

기원전 223년 셀레우코스 장군 아카이오스가 소아시아의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페르가몬 왕국을 공격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아들 마가스에게 군대를 맡겨 페르가몬 왕 아탈로스 1세를 돕게 했다. 그러나 페르가몬-이집트 연합군은 아카이오스에게 패배했다. 그는 마가스가 이집트로 쓸쓸히 귀환한 직후인 기원전 222년 11월 또는 12월에 사망했고,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뒤를 이어 파라오로 즉위했다.

4. 프톨레마이오스 4세: 라피아 전투의 영광, 그러나 쇠락하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즉위 당시 22세의 성인이었으나 정부 아가토클레아에 푹 빠져 있을 뿐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아가토클레아의 형제 아가토클레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시절부터 활약한 장군 소시비오스에게 모든 걸 위임했다. 이로 인해 이집트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셀레우코스 왕조 안티오코스 3세는 이 틈을 타 제3차 시리아 전쟁 때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로 하고, 기원전 221년 코엘레-시리아의 프톨레마이스를 침공했다. 하지만 총독 테오도토스의 강력한 저항으로 고전하다가 메디아의 사트라프 몰론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219년 봄 모든 반란을 제압한 그는 재차 공세를 개시했다. 당시 소시비오스에게 숙청될 위기에 몰려 있었던 테오도토스는 셀레우코스군에 귀순하였고, 코엘레-시리아와 프톨레마이스 함대 상당수를 넘겼다. 안티오코스 3세는 안티오키아의 항구도시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공략하고 뒤이어 티레우스와 프톨레마이스를 공략한 뒤 시리아 해안 도시들을 잇따라 공격했다. 그러나 시돈과 도라에서 오랜 공성전을 치러야 했고, 공세는 지지부진해졌다. 이때 소시비오스가 휴전을 제의하자, 안티오코스는 4개월간 휴전을 맺기로 하였다.

한편, 알렉산드리아에서 스파르타의 전 국왕 클레오메네스 3세가 3,000명의 용병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왕위를 되찾게 해주겠다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약속을 믿고 이집트에 왔으나,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곧 죽었고 뒤를 이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그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급기야 소시비오스는 그를 경계하여 가택 연금했다. 기원전 219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카노포스에 떠나 있는 사이, 클레오메네스는 탈출한 뒤 소시비오스에 대항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고 요새 공략도 실패했다. 이후 토벌대가 압박해오자, 추종자들과 함께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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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피아 전투의 모습.

기원전 218년 초, 안티오코스 3세는 다시 공세를 개시해 베리투스에 주둔한 적군을 섬멸하고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를 공략했다. 그러나 다마스코스, 시돈 공략엔 실패했다. 소시비오스는 이집트 병사 3만 명을 모집하고 용병대를 최대한 긁어모은 뒤 파라오를 설득해 군대를 직접 인솔하여 적을 상대하게 하였다. 기원전 217년 여름,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아르시노에 3세와 함께 8만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 국경 바로 너머에 있는 팔레스타인 라피아에서 안티오코스 3세의 셀레우코스군 7만 명과 격돌했다.( 라피아 전투) 코끼리 간의 서전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인도 코끼리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아프리카 코끼리에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셀레우코스군이 맹공을 가하여 대열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의외로 두려운 기색 없이 이집트 장병들 뒤에 서서 격려하자, 이집트 장병들이 용기를 내어 마케도니아 정예 보병대를 상대로 대단히 선전했다. 여기에 안티오코스 3세가 패주하는 좌익을 무리하게 추격하다가 대열을 완전히 이탈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고, 왕이 부재한 상황에서 고전하던 셀레우코스군의 팔랑크스가 무너지자 다른 부대도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뒤늦게 복귀하여 전열을 재정비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전장을 이탈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코엘레-시리아에 수개월간 머무르면서 통제력을 회복하는 한편, 소시비오스를 안티오코스 3세에게 보내 협상하도록 하였다. 안티오코스 3세는 군대가 무너진 상황에서 전쟁을 이어가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막대한 양의 금을 헌납하고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제외한 모든 점령지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기원전 217년 10월 12일 이집트로 돌아온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멤피스에서 '라피아 칙령'을 발표하여 승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고대 역사가들은 전쟁을 더 이어갔으면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탈환하고 시리아 전역을 확고히 장악할 수 있었는데 이집트로 얼른 돌아가서 사치를 즐기고 싶은 생각에 그만뒀다며 파라오를 비난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라피아 전투 7년 후 이집트가 은화를 표준 통화로 사용하는 걸 완전히 포기한 걸 볼 때, 은 부족 현상이 심각해져서 용병을 추가로 고용하기 어려워졌기에 전쟁을 더 이어갈 여력이 안 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후 마케도니아와 아이톨리아 동맹이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평화 협상을 할 때 중재 역할을 하였으며, 그리스 도시들에게 많은 재정 지원을 해 환심을 사고자 하였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일 때 로마 공화국 고대 카르타고 중 어느쪽도 손잡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과 프톨레마이오스 파라오들의 무덤을 허물고, 알렉산드리아의 궁전 구역 내에 알렉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시신을 함께 수용한 새로운 피라미드 건축물을 축성했다. 동시에 왕조의 창시자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왕비 베레니케 1세의 숭배를 알렉산드리아의 사제가 감독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숭배에 포함시켰다. 기원전 211년 어머니 베레니케 2세를 위한 또다른 숭배 의식을 벌이고자 알렉산드리아 해안가에 베레니케 신전을 세웠다.

기원전 207년, 이집트 토착민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난 원인은 분명하지 않으나, 현대 학자들은 라피아 전투에서 대활약한 토착민들이 자신들에게 참정권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무시당하자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205년 10월 또는 11월, 반란군은 테베를 점령한 뒤 호르베네페르(Horwennefer)라는 인물을 파라오로 선출했다. 호르베네페르는 이후 20년간 남부 이집트에서 통치를 행사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대항했다. 누비아는 이집트가 양분된 틈을 타 지난날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침략으로 빼앗겼던 도데카스코에누스(Dodecaschoenus) 일대를 탈환하고 그곳에 지어진 많은 사원의 비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들의 왕 아르카마니의 이름을 새겼다.

기원전 204년 7월 또는 8월,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붕어했다. 안티오키아의 요한에 따르면, 그는 궁전에서 화재가 일어난 지 얼마 안가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공동 파라오 아르시노에 3세 역시 이때 죽었다.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죽기 직전에 정부 아가토클레아의 권유에 따라 그녀와 이혼한 뒤 곧 죽였다고 한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녀는 소시비오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죽음은 며칠간 비밀에 붙여졌다가 6살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공식적으로 소시비오스와 아가토클레아의 형제 아가토클레스를 섭정으로 하여 파라오로 즉위했다.

5. 프톨레마이오스 5세: 급속도로 쇠락하는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섭정을 맡은 소시비오스는 곧 기록에서 사라졌고, 아가토클레스가 단독 섭정을 맡았다. 그는 저명한 귀족들을 해외로 파견하여 자신과 대적하지 못하게 하고, 알렉산드리아 주둔 장병들에게 두 달치봉급을 지급했다. 또한 소시비오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파견되어 셀레우코스 왕조 안티오코스 3세에 맞서 양국의 동맹을 맺고 필리포스 5세의 딸과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결혼을 주선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기원전 203년, 안티오코스 3세는 아미손 시를 포함한 카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영토를 공략했다. 그리고 그해 말에는 필리포스 5세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를 서로 나눠가지기로 합의했다. 아가토클레스는 셀레우코스군이 이집트에 들이닥칠 걸 대비해 그리스에 사절을 보내 용병들을 고용하게 하였다.

한편,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인기 많던 여성 파라오 아르시노에 3세가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가토클레스 정권에 반감을 품었다. 그러던 기원전 203년 10월, 펠루시움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던 장군 텔레폴레모스가 아가토클레스에게 체포된 뒤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를 수비하는 장병들도 반감을 품었다. 그러던 중 아가토클레스가 궁전 경비대와 군대를 소집하자, 장병들은 이 틈을 타서 그를 모욕했다. 아가토클레스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왕실 경호원 중 한 사람인 모에라게네스가 텔레폴레모스와 유착 관계라고 의심하여 체포한 뒤 고문을 가했다. 모에라게네스는 가까스로 탈출한 뒤 병사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가뜩이나 정권에 반감을 품고 있던 시민들은 이 반란에 호응하여 왕궁을 포위하고, 새 파라오를 데려오라고 요구했다. 다음날 새벽 군대가 진입했고, 아가토클레스는 체포되었다. 그 후 아가토클레스, 아가토클레아, 그리고 그들의 가족은 경기장으로 끌려간 뒤 폭도들에게 살해되었다.

텔레폴레모스는 이 사건 직후 섭정으로 임명되었고, 소시비오스의 아들 소시비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후견인이 되었다. 얼마 후, 소시비오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는 동생 소시비오스를 텔레폴레모스에 대항하여 섭정으로 세우려 했지만 발각되었고, 소시비오스는 후견인 직임에서 해임되었다. 하지만 텔레폴레모스는 아가토클레스보다 무능한 인물이었다. 기원전 202년 안티오코스 3세가 코엘레-시리아를 침공하여 다마스쿠스를 공략하였고, 기원전 201년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여 가자를 점령했다. 한편 필리포스 5세는 사모스 섬을 점령하고 카리아를 침공했으며, 기원전 200년 여름 트라키아와 헬레스폰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영토와 독립 도시들을 정복했다. 그는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단지 로마에 구원을 호소했다. 하지만 로마 역시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느라 지칠대로 지쳐서 이집트를 돕지 못했다.

기원전 200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장군 스코파스가 팔레스타인을 일시적으로 탈환했으나 안티오코스 3세의 반격으로 파니움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그는 시돈에서 포위되어 장기간 농성하다가 기원전 199년 초여름에 항복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여세를 몰아 기원전 198년 코엘레-시리아와 유대를 정복하였고, 기원전 197년 소아시아의 킬리키아, 리키아, 이오니아, 크산토스, 텔메소스, 에페소스를 정복했다. 게다가 프톨레마이오스 4세 말기에 발발한 이집트 토착민들의 반란은 진압되긴 커녕 더욱 거세졌다. 반란군 지도자 호르베네페르(Horwennefer)는 테베에서 파라오를 칭한 뒤 남부 이집트를 석권하고 알렉산드리아를 꾸준히 위협했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이 모든 혼란상을 똑똑히 목격했고, 상황을 수습하려면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결심했다. 기원전 196년 3월 26일, 그는 13살의 나이에 키프로스의 총독인 아르고스의 폴리크라테스의 주선하에 옛 수도 멤피스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이제부터 자신이 나라를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포했다. 폴리크라테스는 수석 장관이 되었고, 섭정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이집트 전역에서 모인 사제들은 자신들에게 큰 은혜를 베푼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찬양하는 내용의 멤피스 칙령을 통과시켰다. 이 법령은 여러 비석에 새겨졌는데, 그 중 하나가 그 유명한 로제타 석이다.

기원전 197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필리포스 5세를 격파한 뒤, 로마 공화국은 안티오코스 3세에 관심을 돌렸다. 기원전 196년 말 또는 195년 초,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안티오코스 3세를 찾아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점령지를 모두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3세는 이미 평화 협상을 하는 중이라고 답하고 사절단을 돌려보냈다. 기원전 194년-193년 겨울, 16세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안티오코스 3세의 딸 클레오파트라 1세와 결혼했다. 이때 안티오코스 3세는 자신이 일전에 패배한 장소인 라피아에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했는데, 이는 자기가 코엘레-시리아를 정복했음을 전 세계에 과시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전쟁을 가까스로 종결시킨 뒤,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남부 이집트 탈환 작전에 착수했다. 기원전 191년 말 또는 190년 초,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파견한 코마누스 장군이 반란군을 격파하고 테베를 탈환했다. 반란군 지도자 안크마키스(Ankhmakis)는 메로에로 철수하여 전열을 재정비한 뒤 기원전 186년 8월 27일 테베로 쳐들어갔지만 코마누스에게 완패하고 사로잡혔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끌려간 뒤 기원전 186년 9월 6일 처형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사면령을 발표해 모든 탈주자와 난민이 본국에 돌아오게 하고 기원전 186년 9월 이전에 저지른 모든 범죄(신전을 약탈한 범죄 제외)를 사면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남부 이집트에서 더 이상 반란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새로운 군사 총독인 에피스트라고스(epistrategos)를 창설하고, 코마누스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그리스 출신 장병들이 남부의 여러 마을과 도시에 주둔하여 토착민들의 분란을 저지하게 하였다. 반란군은 이후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대한 저항을 지속했지만 기원전 185년 10월 아르고스의 폴리크라테스에게 완전 진압되었다. 폴리크라테스는 반란 지도자들에게 항복하면 후한 대접을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믿고 찾아온 그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벌거벗긴 채 수레에 태워서 사이스로 끌고 간 뒤 가혹한 고문을 가해 죽였다. 이러한 행보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이집트의 일부 기록에서 폭군으로 규탄되었다.

기원전 190년 12월 셀레우코스 제국을 상대로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로마는 기원전 188년 안티오코스 3세에게 타우루스 산맥 서쪽의 모든 소아시아 영토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사절을 보내 승리를 축하하면서 자기들도 빼앗긴 영토를 되찾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로마는 이를 무시하고 소아시아 서부의 영역을 승리에 기여한 로도스와 페르가몬 왕국에 넘겼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힘으로 영토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187년 안티오코스 3세가 암살당하고 셀레우코스 4세가 즉위하자, 그는 즉시 군대를 일으키기로 하고 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환관이자 친구인 아리스토니코스를 그리스로 파견했다. 또한 아카이아 동맹과의 연합을 부활시키고자 그들에게 금전적 선물을 주고 지원을 받아내려 하였다. 그는 그리스에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기원전 182년 파나티나이아에서 열린 전차 경주에 참가했다. 같은 해 아리스토니코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한 해상 공격을 이끌어 아라도스 섬을 공략했다.

그러나 기원전 180년 9월, 용병대를 규합하여 시리아를 향한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려던 30세의 파라오는 급사했다. 폴리비오스 등 고대 역사가들은 그가 새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산을 거둬간 것에 원한을 품은 신하들에게 독살당했다고 주장했다.

6. 프톨레마이오스 6세 vs 프톨레마이오스 8세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아내 클레오파트라 1세는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공동 파라오로 즉위시키고 섭정하였다. 기원전 176년 섭정 4년만에 그녀마저 사망하면서, 환관이자 가정교사인 에우라이오스와 시리아 출신의 해방노예이자 이집트로 시집 올 때 자신과 함께 했던 레네오스에게 아들을 부탁했다. 기원전 175년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여동생 클레오파트라 2세가 결혼했으며, 기원전 170년 10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공동 파라오로 즉위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인식을 치렀지만, 실제로는 에우라이오스와 레네오스가 권력을 독차지했다.

에우라이오스와 레네오스는 지난날 안티오코스 3세가 빼앗아간 코엘레-시리아,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를 탈환하길 희망했다. 그들은 로마에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중재를 부탁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굳이 개입하고 싶지 않아 어느 쪽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무력을 행사하기로 결심한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70년 또는 기원전 169년 이집트의 국경 요새 펠루시움 근처에서 프톨레마이오스군을 격멸하고 펠루시움을 점령했다. 그 후 안티오코스 4세는 나일강 삼각주로 진격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을 평정했다. 에우라이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에게 해의 사모트라케 섬으로 피신시키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장군 코마누스와 시네아스가 정변을 일으켜 왕궁을 장악했다. 이후 안티오코스 4세가 알렉산드리아로 접근하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그를 맞으러 나왔다. 그는 이집트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보호국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격분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코마누스와 시네아스는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유일한 왕으로 선포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이에 대응하여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했지만 도시를 점령할 수 없었고, 겨울이 다가오자 기원전 169년 9월 이집트에서 철수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안티오코스 4세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굴욕적인 협약을 맺었을 뿐 진심이 아니었다고 호소했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이에 설득되어 그를 다시 파라오로 모셨다. 이집트가 협정을 거부하고 그리스에 사람을 보내 새로운 용병대를 모집하기 시작하자,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68년 봄 이집트로 쳐들어가서 멤피스를 장악한 뒤 이집트의 왕을 칭하고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진을 쳤다. 한편 셀레우코스 함대는 키프로스로 항해해 이집트 함대를 격파하고 키프로스를 수중에 넣었다. 이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곧 멸망하고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집트를 석권하는듯 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로마 공화국이 개입했다. 로마 사절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안티오코스에게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즉시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경고했다. 안티오코스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포필리우스는 지팡이로 왕 주위에 원을 그리고, 안티오코스에게 대답을 하기 전에는 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다고 하였다. 안티오코스는 지난날 로마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로마가 얼마나 강한지 파악했기에,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대신, 셀레우코스 제국이 남부 시리아를 계속 영유하는 건 인정되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공동 통치를 하였지만, 두 형제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자신을 쫓아내고 동생을 단독 파라오로 선출하려 했던 일을 뼈저리게 기억하며 동생을 경계했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역시 야심을 이루기 위해 형을 몰아낼 때를 노렸다.

그러던 기원전 165년, 궁정관 디오니시오스 페토사라피스가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에게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암살하려 했다고 선동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즉시 동생을 찾아가서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밝혔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이를 믿고 형과 함께 경기장에 공개적으로 함께 나타나 자신들의 관계에 문제가 없음을 대중에 과시했다. 디오니시오스 페토사라피스는 알렉산드리아를 탈출한 뒤 병사들을 설득하여 피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테베에서도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두 반란을 겨우 진압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농장이 파괴되어 정부의 농업 수입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기원전 165년 가을, 정부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사유지를 몰수하여 국영지로 삼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에 대토시 소유자들은 분노했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이를 활용하여 정권을 탈취하기로 작정했다.

기원전 164년 말,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쿠데타를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를 축출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환관과 세 명의 신하와 함께 로마로 망명해 자신을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다시 키프로스로 가서 그곳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심복 티메테오스를 시켜 수많은 이들을 고문하고 처형하게 했다가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기원전 163년 여름 시민들에게 축출되었다. 그 덕분에 알렉산드리아로 복귀한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동생과 화해하기로 하고, 키레나이카의 지배권을 그에게 주었다.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공동 통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키레나이카에 만족하지 못했고, 기원전 163년 말 또는 162년 초에 로마로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로마 원로원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키프로스를 받아야 했는데 분할이 불공평하게 이뤄졌다고 판단하고,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를 알렉산드리아에 사절단으로 보내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게 키프로스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저하면서 쉽사리 넘기려 하지 않자, 사절단은 그해 162년 말 로마로 돌아와서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무력으로 키프로스를 장악하는 걸 도우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타국의 권력 분쟁에 병력을 보내 주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겨서 결정을 미뤘다. 그는 단독으로 용병들을 끌어모아 키프로스로 쳐들어갔지만,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자 1년만에 로마로 돌아갔다.

이 무렵, 로마에 인질로 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비오스 등의 협조에 힘입어 로마를 탈출한 뒤 안티오코스 5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이를 도와줬지만, 데메트리오스 1세가 왕위에 오른 뒤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양국간의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기원전 158년 또는 154년, 키프로스 총독 아르키아스가 데메트리오스 1세에게 500달란트를 받고 섬을 셀레우코스 왕조에 넘기려 했지만, 곧 발각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기원전 154년 형이 보낸 암살자의 공격을 가까스로 모면한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원로원에 출석해 암살 시도로 입은 상처를 보이면서 자신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5척의 로마 선박과 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와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가 이끄는 두 번째 사절을 그와 함께 하게 하였고, 그리스로 가서 용병을 자유롭게 고용할 수 있는 권한도 줬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그리스에 들러 용병을 고용한 뒤 키프로스를 점령하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군대에 붙잡혔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로마 사절까지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로마가 분노할 걸 두려워해, 동생을 용서하기로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딸 클레오파트라 테아를 동생과 약혼시키고 성년이 되면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로마의 요구에 따라 동생을 키레네로 돌려보낸 뒤 아들 유파토르를 키프로스 통치자로 삼고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유파토르는 기원전 152년 가을에 사망했다. 이에 또 다른 딸 클레오파트라 3세를 파라오로 삼기로 하고, 그녀를 신격화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그러던 기원전 150년 셀레우코스 왕위를 노리던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와 손을 잡기로 하고, 프톨레마이스에서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알렉산드로스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이집트의 지원에 힘입어 데메트리오스 1세를 붙잡아 처형하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단독 군주가 되었다.

기원전 147년 데메트리오스 1세의 장남 데메트리오스 2세가 크레타 용병대와 함께 시리아로 돌아와 여러 영토를 장악하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를 지원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기원전 145년 시리아로 진군해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포함한 해안가의 모든 셀레우코스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런데 그는 돌연 편을 바꾸기로 마음먹고 클레오파트라 테아를 알렉산드로스로부터 떼어낸 뒤 데메트리오스 2세와 재혼시켰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안티오키아에 접근했다. 안티오키아 수비대 지휘관 디오도토스 트리폰과 히에락스는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도시를 넘겨주었다. 당시 킬리키아에서 반란군과 맞서고 있던 알렉산드로스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안티오키아로 돌아왔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데메트리오스 2세는 오이노파루스 강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라비아로 도망쳤지만, 곧 암살당했다.

디오도토스와 히에락스는 그를 셀레우코스 왕으로 선출할 의사를 밝혔지만, 그는 로마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합에 반발할 걸 우려해 데메트리오스 2세를 잘 섬기라며 거절했다. 그 대신 코엘레-시리아를 이집트의 영역으로 귀속하게 했다. 이로써 지난날 안티오코스 3세에게 했던 영토 대부분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돌아왔다. 그러나 앞서 오이노파루스 강 전투 때 입은 부상이 악화되면서, 이집트로 귀환하던 중 사망했다.

7. 프톨레마이오스 8세, 클레오파트라 3세 vs 클레오파트라 2세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숨을 거두기 전 자신의 7살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7세가 아내 클레오파트라 2세와 함께 공동 파라오로 집권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어린 군주보다는 전 파라오의 동생을 모시는 편이 낫다고 여기고 한달 만에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사절을 보내 이곳에 와서 파라오가 되어 클레오파트라 2세와 결혼해달라고 요청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즉시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하여 클레오파트라 2세와 결혼했다. 기원전 144년 두 사람 사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멤피테스가 태어나자, 그는 사람을 시켜 조카 프톨레마이오스 7세를 죽였다. 한편, 그는 에게 해의 마지막으로 남은 해군 기지인 이타노스, 테라, 메타나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역은 이집트, 키프로스, 키레네에 한정되었다.

기원전 142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딸이며 자신의 조카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결혼하고 그를 공동 파라오로 삼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9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클레오파트라 4세, 트뤼파이나,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셀레네가 태어났다. 이렇게 되자 궁정은 두 패로 나뉘었다. 클레오파트라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멤피테스가 후계자가 되길 원했고,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자기 자식들이 뒤를 잇기를 희망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클레오파트라 3세 쪽으로 기울었고, 멤피테스를 파라오로 세우라는 클레오파트라 2세의 요구를 무시했다.

기원전 139년,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신하였다가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집권 후 추방당했던 갈라스테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기가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어린 아들을 돌보고 있다며, 소년을 파라오에 앉히려고 이집트를 침공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부리던 용병들은 급료가 자꾸 밀리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에 가담하려 했지만, 그들의 사령관 히에락스가 자비를 들여 봉급을 지불해서 이를 막았다. 갈레스테스는 곧 패배한 뒤 잡혀 죽었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이집트 사제들의 권리와 특권을 인정하는 칙령을 발표하여 종교계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32년 말, 클레오파트라 2세와 프톨레마이오스 9세-클레오파트라 3세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이집트 각지에서 양자를 따르는 무리가 전투를 벌였고,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시가전이 벌어졌다.

기원전 131년 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클레오파트라 2세에 호응하여 폭동을 일으켜 왕궁에 불을 질렀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 클레오파트라 3세,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은 키프로스로 탈출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역사상 최초로 여성으로서 단독 파라오로 즉위하여 '테아 필로마토르 소테이라(Thea Philometor Soteir 구원자 여신)'의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지배권은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해 그리스계가 몰려 사는 도시들에 한정되었고, 이집트 원주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를 더 지지했다. 상이집트에선 이러한 혼란을 틈타 하르시에시(Harsiesi)가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131년 8월이나 9월에 테베를 장악하고 파라오를 자칭했다. 하지만 2달만에 테베의 스트라테고스 파오스에게 쫓겨났다.

기원전 130년 초,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는 키프로스에서 이집트로 들어와 멤피스에 자리잡았다. 두 사람은 파오스를 상이집트 전체의 스트라테고스로 승진시켜 지지를 얻어냈고, 병사들을 동원하여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했다. 그러나 도시의 수비가 워낙 강력해서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했다. 또한 클레오파트라 2세는 전국 곳곳에 설치된 요새들의 지배권을 여전히 간직했다. 그녀는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멤피테스를 알렉산드리아로 소환하여 파라오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멤피테스는 도중에 붙잡혔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는 일부러 클레오파트라 2세의 생일에 멤피테스의 온몸을 조각낸 뒤 그녀에게 돌려보냈다.

아들의 끔찍한 죽음에 분노한 클레오파트라 2세는 기원전 129년 셀레우코스 왕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이집트로 와서 구원해달라. 파라오로 세우겠다."라고 부탁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이집트로 진군하다가 이집트로 들어가는 관문인 펠루시움 요새 밖에 진을 쳤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군대가 굳건히 버틴 데다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가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원조를 받고 자신을 안티오코스 7세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급히 귀국해야 했다. 이리하여 셀레우코스군의 원조마저 끊기면서, 그녀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기원전 127년, 클레오파트라 2세는 국고 대부분을 챙겨 알렉산드리아를 탈출하여 데메트리오스 2세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한 뒤 클레오파트라 2세 지지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기원전 124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에 대한 지지를 취소하고 데메트리오스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8세를 지지하기로 했다. 그는 딸인 트뤼파이나와 안티오코스 8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또한 클레오파트라 2세가 이집트로 돌아오는 걸 허락했으며, 공동 파라오로 들어오는 것도 허용했다. 기원전 118년 4월, 프톨레마이오스 8세, 클레오파트라 2세, 클레오파트라 3세는 공동으로 사면령을 발표했다. 이 법령은 기원전 118년 이전에 자행된 살인과 절 강도 이외의 모든 범죄를 사면하고, 피난민들의 귀향과 재산 환수를 장려하며, 모든 밀린 세금을 면제하고, 내전 당시 군인들에게 지급된 토지 증여를 확인하고, 절의 토지 보유와 세금 특권을 확인하고, 세무관료들에게 표준화된 무게를 사용하도록 했다.

기원전 116년 6월 28일,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붕어했다. 당시 궁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9세보다는 차남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선호했지만,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세우라고 요구하자 받아들이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공동 파라오로 선임했다. 클레오파트라 2세도 공동 파라오를 맡았으나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8. 프톨레마이오스 9세 vs 클레오파트라 3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강력한 요구로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파라오로 선임되고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키프로스 총독으로 부임했지만, 클레오파트라 3세는 포기하지 않고 여러 신하를 포섭해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지지하게 했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아내이며 자신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4세가 남편을 부추겨서 자신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 들자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게 당장 그녀와 이혼하고 자신에게 순종적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결혼하도록 강요해 관철시켰다. 클레오파트라 4세는 시리아로 보내져 안티오코스 9세와 결혼했다. 그러던 107년 가을,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자신을 모시던 하인들에게 공격당해 부상을 입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이 상처들을 두루 보이며,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파우사니아스(Pausanias)에 따르면, 이 공격은 클레오파트라 3세가 아들을 축출하기 위해 하인들을 시켜 일부러 부상입히게 한 것이었다고 한다.

얼마 후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비밀리에 키프로스를 떠나 펠루시움에 도착했다. 클레오파트라 3세는 그를 알렉산드리아로 데려왔고,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공동 파라오로 선임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무사히 탈출하자 분노하여 체포 임무를 맡았던 장교들을 처형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에 남겨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어머니의 권고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재혼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키프로스로 달아났지만, 클레오파트라 3세에게 충성하는 군대가 그를 몰아냈다. 그는 다시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로 도주했고, 거기서 군대를 끌어모은 뒤 기원전 106년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정복에 성공했다.

기원전 103년 하스몬 왕조의 새 왕 알렉산드로스 야나이가 프톨레마이스를 포위하자, 그는 함대를 이끌고 그곳으로 가서 야나이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후 갈릴리를 침공하여 요르단 강 근처의 아소폰에서 전투를 벌여 유대군을 격파하고 유대 일대를 약탈했다. 클레오파트라 3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그가 유대를 발판삼아 이집트를 침공할 걸 우려하여 유대로 군대를 파견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군대는 바다를 통해 페니키아를 침공하였고, 클레오파트라 3세의 군대는 프톨레마이스를 포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그들이 병력을 다른 데 보낸 틈을 타 이집트로 곧장 밀어붙이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급히 돌아와 이를 막았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가자에서 겨울을 보낸 뒤 기원전 102년 초 키프로스로 돌아갔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안티오코스 9세가 손을 잡을 기미가 보이자, 클레오파트라 3세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이혼시키고 안티오코스 8세와 결혼시켰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처음에는 어머니의 간섭에 순종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를 부당하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빠져나온 뒤 군대를 끌어모아 어머니에 대항했다. 클레오파트라 3세는 두 아들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화해를 시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기꺼이 응하겠다며 기원전 101년 알렉산드리아에 돌아왔지만, 도착한 즉시 어머니를 체포하여 파라오 직위에서 폐위시킨 뒤 처형했다. 그해 10월,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의 딸인 베레니케 3세와 결혼하고 공동 파라오로 선임했다. 그는 자신의 별칭을 필라델포스(Philadelphos: 형제를 사랑하는 자)로 바꾸었다.

기원전 91년, 상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테베의 지배권을 획득했고, 라토폴리스와 파트리스를 잇따라 공략했으며, 메로에 왕국은 트리아콘타스코에누스(Triacontaschoenus: 하 누비아 일대)를 공략했다. 기원전 88년 5월, 알렉산드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유대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에 그리스인들이 분노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알렉산드로스 3세의 황금 석관을 녹여 유리로 만든 석관으로 대체한 것에 분노했다는 설이 제기된다. 그는 아내 베레니케 3세와 함께 로마로 달아났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추대로 파라오에 복귀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이집트를 탈환하기 위해 로마 공화국에 막대한 자금을 빌리면서, 자신이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이집트를 로마 공화국에 맡기겠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이후 해군을 소집한 뒤 키프로스를 침공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로마는 그가 죽었을 때 유언장을 당장 이용하지 않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로마를 두려워하여 가급적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 애썼다. 그러다 기원전 81년 8월 5일 딸 베레니케 3세를 공동 파라오로 승격시켰다가 얼마 후 사망하였고, 베레니케 3세가 6개월간 홀로 통치했다. 그녀는 나라를 나름대로 잘 다스렸지만, 로마의 집권자 술라가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유언장을 빌미삼아 프톨레마이오스 10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1세를 공동 파라오로 세우라고 요구했다. 베레니케는 요구를 받아들여 프톨레마이오스 11세와 결혼하고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1세는 19일 후 베레니케 3세를 살해했다가 분노한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피살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의 사생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시민들의 추대로 파라오에 즉위했다.

9. 프톨레마이오스 12세 vs 베레니케 4세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전임 파라오들이 잇따라 피살된 덕분에 파라오가 될 수 있었지만, 사생아라는 점 때문에 입지가 불안했다. 그래서 지중해 세계 최강국인 로마의 비호를 받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로마의 간섭은 갈수록 심해졌고, 급기야 기원전 65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이집트를 아예 합병하자고 제안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 정치가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찔러서 이를 간신히 저지했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 미트리다테스 6세를 제압하고 동방 영토를 재편성하고 있을 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그에게 황금 왕관을 보냈으며 8,000명의 기병에 대한 급여와 유지비를 제공했다. 그러면서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반란을 진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렇게 막대한 자금을 로마에 바치다보니 재정이 바닥날 지경이 되자, 그는 세금 인상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려 했다. 그러자 헤라클레오폴리스의 왕실 토지 농부들이 불만을 품고 집단 파업을 일으켰다. 한편, 그는 가이우스 라비리우스 포스투무스 등 로마의 채권자들로부터 자금을 빌렸다. 이로 인해 이집트는 경제적으로도 로마에 예속되었다. 기원전 60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로 가서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접근했다. 그는 두 사람에게 이집트의 연간 총수입과 맞먹는 6천 달란트를 지불하면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고, 두 사람은 이를 수락하여 기원전 59년 프톨레마이오스를 로마인의 친구로 추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그토록 원하던 대로 로마의 든든한 비호를 받는 듯했다.

그런데 기원전 58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키프로스를 로마의 속주로 삼자는 법안을 원로원에 상정해 통과시켰다. 이보다 앞서, 풀케르는 킬리키아 해적들에게 붙들렸을 때 키프로스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몸값을 지불하길 거부했고, 풀케르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일로 원한을 품은 그는 키프로스를 로마의 속주로 삼는 것으로 복수했다. 로마군이 키프로스에 상륙했을 때, 그는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자결했다. 형제가 비참하게 죽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로마가 두려워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막대한 세금을 강제 징수해서 로마에 그대로 바치고, 로마가 키프로스를 독단적으로 빼앗아갔는데도 되찾으려 하지도 않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에게 강한 반감을 품었다. 결국 그들은 봉기를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몰아내고, 그의 딸 베레니케 4세와 클레오파트라 6세를 공동 파라오로 추대했다. 클레오파트라 6세는 1년만에 사망했고, 베레니케 4세가 단독 통치자로 군림했다. 베레니케는 아버지가 로마에서 자신을 복위시켜 달라고 청탁한다는 걸 알게 되자 100명의 사절을 보내 아버지의 무능을 성토하고 자신의 집권이 정당함을 알리려 했다. 그러자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사절단 대표 디오를 암살하고 다른 사절들에게 뇌물을 줬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로마 정계에 큰 소동이 벌어졌고, 그는 자신을 조사하려는 이들에게 뇌물을 찔러줘서 무마시키려 했다가 오히려 민중의 분노를 사자 에페소스로 피신하여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숨어지냈다.

한편, 베레니케는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남편감을 고르려 했다. 그녀는 처음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후손인 셀레우코스[1]와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알렉산드리아 시에 도착했을 때, 시민들은 그의 저속한 외모와 천박한 행동에 충격받아 생선장수라 부르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녀는 결혼한 지 며칠 후 대중의 반감을 산 자와 같이 살아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하고 죽여버렸다. 그녀는 뒤이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 의해 폰토스 신전에서 제사장으로 부임했으며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던 아르켈라오스를 신랑감으로 고려했다. 기원전 56년 겨울, 아르켈라오스는 이집트에 와서 베레니케와 결혼하고 왕으로 선포되었다.[2]

기원전 55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폼페이우스의 부하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은화 1만 달란트를 줄 테니 군대를 동원하여 자신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가비니우스는 폼페이우스의 허락을 받고 유대 지방에 주둔 중이던 2,000명의 로마 군단병과 500명의 속주 보조병을 이끌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이집트로 호송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알렉산드리아로 입성하였고, 이집트 수비대는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항복했다. 그는 권력을 되찾은 뒤 베레니케 4세와 그녀의 지지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이후 채권자들이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지만, 당시 이집트 재정은 베레니케 4세의 지나친 사치로 인해 거의 파탄나 있어서 빚을 단시일에 갚을 수 없었다. 그는 고심 끝에 가장 많은 돈을 빌려준 가이우스 라비리우스 포스투무스를 디오케테스(dioiketes: 재무장관)으로 임명해서 민중으로부터 돈을 뜯어내게 했다. 그러나 포스투무스가 지나친 착취를 일삼는 것에 분노한 시민들이 봉기하였고, 파라오는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포스투무스를 일단 가두었다가 나중에 몰래 풀어줬다. 한편, 그는 자금을 마련하고자 주화의 가치를 낮추기로 했다. 그의 통치 말기에 이집트 주화의 가치는 그의 통치가 시작되었을 때의 가치의 50% 이하로 떨어졌다.

10. 클레오파트라 7세, 율리우스 카이사르 vs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아르시노에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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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의 연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기원전 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딸 클레오파트라 7세가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해야 하며, 로마가 이를 보증해달라고 부탁했다. 폼페이우스는 이 유언장을 승인하여 두 사람이 서로 결혼하여 공동 파라오로 집권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선임 파라오들이 그랬듯 곧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섭정을 맡은 환관 포티노스는 무척 총명한 클레오파트라가 계속 집권한다면 자신의 권력이 제한될 거라 여겼고, 그녀를 축출할 음모를 꾸몄다. 클레오파트라 7세 역시 이복동생을 배제하고 전권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이리하여 양자는 첨예한 갈등을 벌이다가 기원전 48년부터 내전을 벌였다. 클레오파트라는 곧 알렉산드리아에서 쫓겨난 뒤 사막 지대에서 병력을 규합하여 할거했다. 비슷한 시기 아르시노에 4세도 별도로 세력을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집트에 파라오가 3명인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던 기원전 48년 말,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참패한 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던 폼페이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망명 의사를 밝혔다. 폼페이우스는 이전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딸 베레니케 4세의 반란으로 축출되었을 때 파라오에 복위할 수 있도록 힘써 준 적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전적이 있으니 이집트가 자신을 도울 거라 믿었다. 그런데 폼페이우스가 파견한 사절들이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복위에 기여한 뒤 이집트의 정예병으로 남아있던 옛 폼페이우스파 장병과 장교들을 찾아가 폼페이우스 밑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요청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조언자들은 이 사실을 전해듣고, 폼페이우스의 망명 목적이 이집트를 자신의 손에 넣고 카이사르와 다시 대결을 벌이려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었다. 그들은 폼페이우스를 암살하고 그의 수급을 카이사르에 바쳐서 승리자의 호의를 얻기로 작당하고, 아킬라스와 폼페이우스의 옛 부하인 루키우스 셉티미우스를 파견해 폼페이우스를 반갑게 맞이하는 척하다가 죽이게 했다. 음모는 성공했고, 암살자들은 폼페이우스의 수급을 취하고 몸은 바다 속으로 떨어뜨렸다. 이후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 그들은 폼페이우스의 수급을 전달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전직 집정관이며 일찍이 이집트 왕실에 은혜를 베풀었던 폼페이우스를 이런 식으로 죽인 것에 분노하면서, 승리자의 호의를 얻으려던 그들의 계획은 틀어졌다.

한편 클레오파트라는 상황을 예의주시하다가 카이사르에게 몰래 찾아가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카이사르는 그녀의 매력에 반했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공동 통치를 로마가 보장해달라는 유언을 한 것도 있기에, 두 사람이 이전처럼 공동 통치를 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여동생 아르시노에 4세는 키프로스에서 통치하도록 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은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다고 여겨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폼페이우스 살해를 주도한 혐의로 환관 포티누스를 처형하자, 그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가신들이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을 선동해 봉기를 일으키면서, 알렉산드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시가전이 처음 벌어질 때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아르시노에 4세 모두 궁정에서 로마군에게 억류되어 있었는데, 아르시노에 4세가 고문 가니메데스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뒤, 프톨레마이오스의 가신 아킬라스와 접촉했다. 그 후 그녀는 파라오로 공식 인정받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동 파라오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방전을 지켜보다가 아킬라스가 무능하다고 판단하고, 가니메데스에게 아킬라스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권력은 약해졌고, 그녀가 주도권을 잡았다. 그녀는 군대의 통제권을 가니메데스에게 넘겼고,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거리를 봉쇄하고 벽을 쌓아서 로마군을 도시의 한 구역에 가두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로마군이 먹는 식수에 바닷물을 붓게 했다. 로마군은 우물을 파는 것으로 맞섰지만, 이 정도로는 임시방편에 불과했기에, 카이사르는 신선한 물을 구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해상 봉쇄를 뚫으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역공을 받아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자, 갑옷과 보라색 망토를 벗고 바다에 몸을 던져서 근처의 로마 함선으로 헤엄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가니메데스는 끝내 카이사르를 굴복시키지 못 했고, 이집트의 주요 장교들은 카이사르에게 아르시노에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교환하겠다고 제안했다. 카이사르는 상황을 호전시킬 기회라고 여기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반란군을 찾아가서 잘 타일러서 반란을 멈추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카이사르 곁을 떠나고 싶지 않다며 울음을 터트렸지만, 카이사르가 거듭 부탁하자 그 말대로 하겠다고 맹세하며 떠났다. 그러나 정작 반란군에 가담한 뒤에는 태도를 싹 바꾸고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를 향한 공세를 강화하게 하였다. 하지만 온갖 곤경을 헤쳐온 카이사르와 장병들은 끝까지 버텼고, 기원전 47년 1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파견한 구원군이 도착하면서 숨통을 돌릴 수 있었다. 그 후 그해 2월 나일 강 전투에서 이집트군이 참패했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달아나던 중 나일 강에 빠져 익사했다.

그리하여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공동 파라오로 선임하였고, 아르시노에 4세를 로마로 이송시켰다. 훗날 아르시노에 4세는 카이사르의 개선식에서 '전리품'으로 취급되었고, 개선식이 끝난 뒤에는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기원전 41년 클레오파트라의 청탁을 받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살해되었다.

11. 클레오파트라 7세의 중흥 시도와 패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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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티움 해전

클레오파트라 7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비호에 힘입어 이집트 내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오랜 혼란에 시달리던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었고,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카이사리온을 공동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5세로 내세웠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 막대한 이권을 뜯어냈다. 급기야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4년 파르티아 원정을 지원한 공으로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 자녀들에게 로마 공화국의 동방 속주를 전부 나눠주기로 했다. 클레오파트라를 왕 중의 여왕으로 선언하고 카이사리온과 함께 이집트를 공동 통치하도록 했으며, 쌍둥이 중 남자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에게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를 주었고 쌍둥이 중 여자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에게 크레타와 키레나이카, 막내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에게는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주었다.(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

안토니우스의 이같은 선포는 로마 시민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초래했고,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선언은 원천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공개했는데, 거기엔 사후 로마가 아니라 이집트의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참패한 후, 전황은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고, 결국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로 입성했다. 안토니우스가 자결한 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자식들의 생명을 위해 옥타비아누스에게 협상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가 자신을 로마에서 개최될 개선식에 내세울 계획이라는 게 분명해지자, 클레오파트라는 살아서 치욕을 받느니 죽기로 작정하고 자결했다. 이후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군에게 붙들려 처형되었고,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두 형제 모두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다. 이리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300여 년만에 멸망하였고,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1]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의 아들 셀레우코스 7세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2] 그는 신격화된 왕인 파라오가 아니라 그냥 '왕'이 되어, 베레니케 4세보다 격이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