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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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8대 군주 Antiochus IV Epiphanes 안티오코스 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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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출생 | 기원전 215년 | |||
셀레우코스 제국 슈쉬 | ||||
사망 | 기원전 164년 11월 또는 12월 | |||
미상 | ||||
재위 | <colbgcolor=#000> 셀레우코스 군주 | |||
기원전 175년 9월 3일 ~ 기원전 164년 11월 또는 12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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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제호 |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Antiochus IV Epiphan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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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아버지) 라오디케 3세(어머니) 안티오코스(첫째 형)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둘째형) 라오디케 4세(아내) 안티오코스 5세 에우파토르(장남) 라오디케 6세(장녀) 안티오치스(차녀)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차남)[1] 라오디케(삼녀)[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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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 시리아 전쟁, 마카베오 전쟁, 동방 원정 등 | |||
종교 | 그리스 다신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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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8대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상대로 연전연승했고, 제국의 재통합을 위해 강력한 종교 정책을 실시했으나 마카베오 전쟁을 초래했다.2. 생애
기원전 215년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와 라오디케 3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큰형은 안티오코스이고, 둘째형은 셀레우코스 4세이다. 기원전 190년 말 부친이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 공화국에게 참패한 뒤, 기원전 189년부터 175년까지 로마에서 인질로 지내면서 그들의 제도와 정책, 그리고 군사력을 눈여겨봤다. 그러다 형 셀레우코스 4세가 자신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1세를 인질로 보내고, 그를 국내로 복귀시켰다.기원전 175년 9월 3일, 셀레우코스 4세는 주요 관료 중 한 명인 헬리오도로스에게 암살당했다. 헬리오도로스는 셀레우코스 4세의 막내 아들 안티오코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섭정을 자처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페르가몬 왕국의 지원을 받고 안티오키아로 진격하여 몇 달만에 역신 헬리오도로스를 죽였다. 어린 조카 안티오코스는 왕좌에서 밀려나 은신처에 연금되었고, 기원전 170년 또는 169년에 사망했다. 현대 학자들은 안티오코스 4세가 왕권을 다지기 위해 잠재적인 경쟁자인 조카를 살해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사치스럽고 관대한 통치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안티오키아 거리에서 서민들에게 돈을 뿌리고, 면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뜻밖의 선물을 주었으며,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과 델로스 섬의 제단에 돈을 기부했다. 또한 안티오키아 교외의 다프네에서 최고의 향신료와 천을 사용하여 귀족들과 함께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다. 이렇게 해서 귀족과 백성들의 지지를 끌어모으고 명성을 쌓던 중,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후견인들이 지난날 안티오코스 3세가 정복한 코엘레 시리아, 팔레스타인, 페니키아의 소유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양국은 로마에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굳이 개입하고 싶지 않아 어느 쪽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기원전 173년,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 공화국이 부친 안티오코스 3세에게 부과한 전쟁 배상금을 전액 지불했으며, 로마와 우호 관계를 다지고자 동맹 협약을 새로 체결했다. 이후 이집트 공략에 착수하기로 결심하고, 기원전 170년 펠루시움 전투에서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펠루시움을 점령했다. 뒤이어 이집트 본토로 진격해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모든 지방을 공략했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체포했다. 하지만 로마 공화국의 개입이 두려워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멤피스에서 꼭두각시 파라오로서 계속 통치하게 한 뒤 귀환했다. 그가 철군하자 알렉산드리아 시는 새로운 파라오로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에우에르게테스를 선출했다. 두 사람은 갈등을 벌였지만, 로마의 중재에 따라 내전을 치르는 대신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했다.
기원전 169년 겨울, 마케도니아 왕국의 페르세우스 왕이 안티오코스 4세에게 자신과 연합하여 로마에 맞서 싸우자고 주장했지만 거절했다. 기원전 168년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로마에 지원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함대를 키프로스로 보내 이집트 함대를 격파하고 키프로스를 수중에 넣었다. 이후 육군을 친히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하여 펠루시움을 추가로 공략하고, 하이집트를 점령한 후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진을 쳤다. 이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멸망하고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집트를 석권하는 듯했다.
그러나 기원전 168년 6월 22일 피드나 전투에서 페르세우스의 마케도니아군을 섬멸하고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을 멸망시킨 로마가 개입했다. 로마 사절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안티오코스 4세에게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즉시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경고했다. 안티오코스 4세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포필리우스는 지팡이로 왕 주위에 원을 그리고, 안티오코스 4세에게 대답을 하기 전에는 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지난날 로마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로마가 얼마나 강한지 파악했기에,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대신, 셀레우코스 제국이 남부 시리아를 계속 영유하는 건 인정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쇠락해진 이집트를 지속적으로 공략하는 동시에 그리스 도시들을 건설하고 육성하여 내실을 다지고자 노력했다. 시리아 오론테스 강변의 에피파니아 시를 확장하여 수도교, 공의회당, 시장, 그리고 주피터 카피톨리누스 신전을 세웠다. 또한 또 다른 에피파니아 시를 아르메니아에 세웠으며, 페르시아 만에 안티오키아 조폐국을 세워 인도와 메소포타미아 강 하구의 지역 사이의 바닷길을 따라 무역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 외에도 여러 도시가 세워졌는데, 이 도시들은 각자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한편, 안티오코스 4세는 제국 통합을 이루기 위해 제국의 국교인 그리스 종교를 전 신민이 따르게 하고자 노력했다. 제국 곳곳에 신전을 설치했고, 토착민들에게 기존에 믿던 신 대신 제우스를 섬기라고 권고했다. 이러한 정책은 곳곳에서 파열을 일으켰는데, 특히 유대에서의 반발이 심했다. 당시 유대교는 전통을 지키려는 하시아파와 헬레니즘을 선호하는 개혁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개혁파를 지원했고, 이아손을 대제사장으로 선임하여 예루살렘에 체육관을 짓고 젊은이들에게 그리스 문명을 가르치는 걸 허락했다. 기원전 172년, 그는 모종의 이유로 이아손 대신 메넬라오스를 임명했다. 그러나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로 쳐들어갔을 때, 이아손이 반란을 일으켜 성채를 제외한 예루살렘 전역을 정복하고 메넬라오스의 많은 추종자를 학살했다.
기원전 167년, 안티오코스 4세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전 유대 대제사장 이아손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의 특권을 박탈한 후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후 제우스 신전을 예루살렘에 세우도록 했고, 자신의 모습을 담은 동상을 세우며 그 발 아래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러자 유다 마카베오가 이끄는 하시아파가 반란을 일으켰고, 조기 진압에 실패해 마카베오 전쟁으로 커지면서 제국의 국력을 상당히 갉아먹었다.
기원전 167년 파르티아의 명군 미트리다테스 1세가 헤라트를 점령하여 인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동방으로 출진해 파르티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상당한 영토를 되찾았고, 아르메니아 군주 아르탁세스 1세가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원정을 지속하던 기원전 164년 11월 또는 12월, 페르시아에서 나나야 신전을 약탈하게 한 직후 병사했다. 사후 장남 안티오코스 5세가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