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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안티고노스 왕조 5대 국왕 | |
안티고노스 3세 도손 Ἀντίγονος Γ΄ Δώσων | Antigonus III Doson |
|
|
|
휘 |
안티고노스 Ἀντίγονος |
별명 |
도손 Δώσων |
출생 | 기원전 263년 |
마케도니아 왕국 펠라 | |
사망 | 기원전 221년 |
마케도니아 왕국 | |
재위 기간 | |
마케도니아 왕국 바실레우스 |
기원전 229년 ~ 기원전 2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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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티고노스 왕조 5대 국왕.2. 생애
아버지는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딸 프톨레마이스의 아들인 키레네 왕 데메트리오스이다. 그는 안티고노스 2세의 이복동생이기도 했다.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도손의 어머니는 테살리아 라리사 귀족 파울리클리토스의 딸 올림피아스이다. 그에게는 형제 에케크라테스가 있었으며, 아들 안티고노스도 있었는데, 페르세우스가 왕위에 오른 뒤 살해당했다. 안티고노스 3세의 별칭인 “도손”은 “맡아 두는 자”, “주려고는 하지만 주지는 않는 사람” 등을 뜻했다.기원전 229년, 데메트리오스 2세 아이톨리코스가 다르다니아인과의 전쟁 도중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필리포스 5세는 겨우 9살이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마케도니아 군대와 귀족 모두 필리포스가 성인이 되기를 기다리는 건 부적절하고 생각하고, 데메트리오스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안티고노스를 왕으로 옹립했다고 한다. 안티고노스는 왕으로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 데메트리오스의 미망인이자 필리포스의 어머니인 크리세아스와 결혼하였고, 필리포스 5세의 섭정으로서 나라를 통치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먼저 다르다니아인을 크게 격파하여 나라 바깥으로 내쫓았으며, 스파르타 왕 클레오메네스 3세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아카이아 동맹이 잇따라 패전한 끝에 구원을 요청하자, 이에 응하여 기원전 226년 클레오메네스 전쟁에 참전했다. 클레오메네스 3세는 마케도니아군이 몰려오자 펠레폰네소스 반도의 입구인 코린토스 지협의 성벽을 요새화하며 버텼다. 그러나 후방의 아르고스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스파르타 군대는 남쪽으로 후퇴하여 라코니아 방어에 주력했다. 안티고노스는 테게아, 만티네이아, 오르코메노스를 공략한 뒤 라코니아를 압박했다.
안티고노스는 라코니아의 방어가 강력하여 쉽게 뚫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당시 스파르타를 돕던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소아시아의 일부 영토를 넘겨주는 대가로 스파르타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끊어내어, 클레오메네스 3세를 고립시켰다. 용병 월급 주기도 힘들어진 그는 스파르타의 예속 농민인 헤일로타이에게 자유를 준 후 무장시키기까지 하며 결전을 준비했다. 이에 안티고노스가 친정하여 스파르타로 진격하였고, 기원전 222년 스파르타 동북면의 셀라시아에서 스파르타군을 섬멸하였다. 클레오메네스 3세는 시민들에게 안티고노스의 요구에 순응하라고 부탁한 뒤 이집트로 피신하였고, 마케도니아군은 스파르타에 입성했다. 안티고노스는 약탈을 금지하였고, 클레오메네스가 이전의 전쟁에서 빼앗은 영토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건국 후 오랜 세월 지속되었던 전통적인 정치 제도를 포기하고 마케도니아 왕국에 충실한 공화정을 수립해야 했다.
기원전 221년 일리리아군이 마케도니아로 쳐들어오자, 그는 급히 국내로 돌아와서 일리리아군과 결전을 벌였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티고노스는 일리리아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으나 전투 직후 혈관이 파열되는 바람에 승리를 만끽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그는 죽기 직전에 "오, 행복한 하루로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사후 필리포스 5세가 1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