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군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1.4px" |
셀레우코스 1세 | 안티오코스 1세 | 안티오코스 2세 | 셀레우코스 2세 | 셀레우코스 3세 |
안티오코스 3세 | 셀레우코스 4세 | 안티오코스 4세 | 안티오코스 5세 | 데메트리오스 1세 | |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 | 데메트리오스 2세 | 안티오코스 6세 | 디오도토스 트리폰 | 안티오코스 7세 | |
데메트리오스 2세 |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 | 클레오파트라 테아 | 셀레우코스 5세 | 안티오코스 8세 | |
안티오코스 9세 | 셀레우코스 6세 | 안티오코스 10세 | 데메트리오스 3세 | 안티오코스 11세 | |
필리포스 1세 | 안티오코스 12세 |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 안티오코스 13세 | 필리포스 2세 필로로마이오스 | |
}}}}}}}}}}}} |
셀레우코스 7대 군주 Seleucus IV Philopator 셀레우코스 4세 |
||||
|
||||
<colbgcolor=#000> 출생 | 기원전 218년 | |||
셀레우코스 제국 슈쉬 | ||||
사망 | 기원전 175년 9월 3일 | |||
셀레우코스 제국 슈쉬 | ||||
재위 | <colbgcolor=#000> 셀레우코스 군주 | |||
기원전 187년 7월 3일 ~ 기원전 175년 9월 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 제호 |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 Seleucus IV Philopator |
||
가족 |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아버지) 라오디케 3세(어머니) 안티오코스(형)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동생) 라오디케 4세(부인)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장남) 라오디케 5세(장녀) 안티오코스(막내 아들) |
|||
참전 | 소아시아 전쟁 | }}}}}}}}} |
[clearfix]
1. 개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7대 군주. 아버지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가 암살된 후 혼란에 빠진 나라를 재정비했으나 그 역시 암살당했다.2. 생애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와 라오디케 3세의 둘째 아들이다. 큰형 안티오코스가 일찍 죽어서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기원전 196년경 아버지의 소아시아 원정에 참여했다. 파괴된 리시마키아에 도착했을 때, 안티오코스 3세는 셀레우코스에게 이곳을 재건하는 임무를 맡겼다. 기원전 190년, 부친은 셀레우코스를 아이올리스에 주둔시켰다. 그는 이곳에서 키마와 소아시아의 다른 도시들을 공략했으며, 포카이아를 포위 공격 끝에 일부 수비대원의 배신에 힘입어 함락시켰고, 뒤이어 페르가몬을 포위했다. 그러나 디오파네스가 이끄는 아카이아 동맹군이 도착하여 몇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셀레우코스는 페르가몬에서 철수했다.기원전 190년 12월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제국군의 좌익 부대를 지휘했지만,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세에게 완전히 패배한 뒤 아파메아 프리기아로 도망쳤다. 이듬해 로마와 평화 협정이 체결된 후, 그는 로마의 집정관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를 돕기 위해 파견되었다. 셀레우코스는 대량의 식량을 공급했고, 로마군이 갈라티아의 켈트족과 교전할 때도 참전했다. 이후 아버지와 공동 왕이 되어 부왕과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기원전 187년 7월 3일 안티오코스 3세가 암살된 뒤 왕위에 오른 그는 로마에게 갚을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긴축 정책을 실시해야 했고, 동생 안티오코스 4세가 국내로 돌아오게 하는 대신 아들 데메트리오스(훗날의 데메트리오스 1세)를 로마에 인질로 보냈다. 기원전 185년 아카이아 동맹에 사절을 파견해 부왕의 통치기간 동안 발효된 우호 조약을 갱신했다.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 2세가 폰토스와 전쟁을 벌이자, 그는 폰토스를 돕기 위해 상당한 동맹을 소집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타우루스 산맥의 횡단을 적대행위로 해석할 것을 우려하여 군대를 철수시켰다. 하지만 그는 로마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페르세우스와의 동맹 맺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딸 라오디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 마카베오기>에 따르면, 셀레우코스 4세는 헬리오도로스를 예루살렘에 세금 징수 임무로 파견했다. 헬리오도로스는 예루살렘 제2신전의 금고를 털려고 했지만, 천사들에게 격퇴되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로마에 내야 할 배상금을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던 그가 이교 신전을 대거 털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기원전 175년 9월 3일, 셀레우코스 4세는 그의 주요 관료 중 한 명인 헬리오도로스에게 암살당했다. 동기가 무엇인지는 기록되지 않았는데, 권력을 탐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셀레우코스 4세의 막내 아들 안티오코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섭정을 자처했으나 몇달 만에 페르가몬의 지원을 받은 안티오코스 4세에게 처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