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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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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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차 코소보 전투(1389)
자세한 내용은 1차 코소보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2. 2차 코소보 전투(1448)
자세한 내용은 2차 코소보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3. 이후
3.1.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
주라지는 1451년, 헝가리와 오스만 술탄국간의 강화를 중재하였다. 같은 해, 발칸에 대한 오스만 패권을 정립시킨 무라트 2세가 사망하고 메흐메트 2세가 즉위하였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며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메흐메트는 마침내 세르비아도 멸망시키고 중부 유럽으로 나아가기로 하였다.3.2. 세르비아 제국 멸망(1459)
3.2.1. 스메데레보의 구원(1454)
1454년, 오스만 군대는 세르비아의 수도 스메데레보를 포위하였고 주라지(78세)는 헝가리로 피신하였다. 수비대의 결사항전과 후녀디 야노시(48세), 주라지가 적절한 시점에 2만의 구원병을 끌고 온 덕에 스메데레보는 구원되었다. 이후 세르비아-헝가리 연합군은 오스만군을 추격, 크루셰바츠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다만 그해 11월, 세르비아의 맹장 니콜라 스코발리치가 오스만 측에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비록 오스만 군대는 물러갔지만 세르비아인 5만여명이 노예로 끌려가는 피해를 입었다.3.2.2. 노보 브로도 함락(1455)
1455년 봄, 오스만 군대는 코소보 지역에 대한 완전 정복에 들어갔다. 세르비아의 주요 광산이 있던 노보 브로도는 40일간의 포위 후 6월 1일에 함락되었다. 이후 귀족들은 처형되었고 소년들은 예니체리로, 여자들은 첩이 되었다.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의 회고록, "술탄 친위부대원의 추억"에 묘사되어 있다. 이후 오스만은 별 저항 없이 프리슈티나를 비롯한 코소보를 정복하였고 세르비아의 영토는 크루셰바츠 이북 지역으로 축소되었다.3.2.3. 베오그라드 공방전(1456)
그리고 1456년 봄, 독일과 중부 유럽 일대에서 고아들로 구성된 십자군이 후녀디 야노시와 함께 베오그라드의 외곽인 제문에 도착했을 때, 메흐메드 2세는 마침내 베오그라드를 포위하였다. 세르비아-헝가리 측은 함대를 조성해 7월 14일, 도나우 강 해전에서 승리하였고 오스만 군대는 철수하였다. 하지만 포위 직후 제문에 흑사병이 돌아 후녀디 야노시가 사망하였다. 세르비아에선 시비냐닌 얀코 설화가 생겨났다.3.2.4. 왕들의 죽음
베오그라드 포위 이후 후녀디 야노시에 이어 주라지 브란코비치까지 성탄 전야에 사망하며 세르비아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뒤를 이은 주라지의 차남 라자르는 1457년 초, 메흐메트와 새로운 주종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라자르는 형제들을 시기하여 추방하였고 형 스테판 만이 남았다.그리고 1458년 1월, 동생 라자르도 병사하여 형 스테판이 뒤를 이었는데, 이때 보스니아의 왕자 스테판 토마시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였다. 이에 형 스테판은 헝가리에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재상 미하일로 안젤로비치는 오스만 측에 기울며 조정이 분열되었고, 이 틈을 노린 메흐메트 2세는 세르비아를 침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