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7 15:14:19

알라르코스 전투

파일:알라르코스 전투.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4. 경과5. 결과

1. 개요

서기 1195년 7월 19일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 카스티야 알폰소 8세가 시우다드 레알 주에 위치한 알라르코스에서 맞붙은 전투. 무와히드 왕조가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레콩키스타의 기세가 일시적으로 꺾였다.

2. 배경

서기 711년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우마이야 왕조군이 과달레테 전투에서 로데리쿠스 왕이 지휘하는 서고트 왕국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이래, 이슬람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를 거의 전부 장악하며 알안달루스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722년 피레네 산맥 기슭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 펠라요가 이끄는 고트족 300명이 무슬림군을 기습 섬멸한 코바동가 전투가 벌어졌고, 이를 발판으로 기독교 국가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탄생하여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인의 은신처가 되어줬다.

이후 기독교 세력과 무슬림 세력은 오랜 세월 이베리아 반도에서 격돌했지만, 한 쪽이 강해져서 공세를 퍼부으면 다른 쪽이 수세로 몰렸다가 힘을 길려서 역습을 가하는 패턴이 반복될 뿐, 좀처럼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후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한 뒤 무슬림 세력은 여러 토후국으로 나뉘어 전력이 분산되었고, 기독교 세력은 이 틈을 타 조금씩 남하했다.

급기야 1085년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공략하고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칭하면서, 기독교 세력의 사기가 끌어올랐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 시기에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는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 세력과 전투를 벌이는 기사들은 레반트 성지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며 이베리아 반도의 세력 다툼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다. 이리하여 레콩키스타는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이 하나로 뭉쳐서 이교도를 몰아내는 성전으로 인식되었다.

이렇듯 상황이 악화되자, 사라고사 토후국의 타이파 알 무타미드는 무라비트 왕조의 지도자 유수프 이븐 타쉬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유수프는 군대를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갔고, 1086년 사그라지스 전투에서 알폰소 6세를 상대로 승리했다. 이후 무라비트 왕조는 토후국들을 완전히 병합하여 알안달루스 전체를 지배했고, 1097년 콘수에그라 전투에서 다시 한 번 카스티야군을 격파하고 1102년 발렌시아를 탈환했다.

이후에도 무라비트 왕조와 기독교 국가들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무라비트 왕조가 각지의 반란에 시달리며 급격히 쇠락하면서 기독교 세력이 우세해졌고, 1147년 리스본이 포르투갈의 국왕 알폰소 1세에게 공략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다수 영역이 기독교 세력에게 넘어갔다. 이후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8세는 1156년 톨레도를 수호하기 위해 창설된 칼라트라바 기사단을 열렬히 후원했다. 그는 무슬림에게서 빼앗은 모든 영토의 1/5를 기사단에게 넘길 것이며, 왕실 수입의 1/10을 기사단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기사단은 이에 고무되어 무슬림의 영역을 지속적으로 공격해 카스티야의 영역을 계속 늘려줬다.

그러나 무슬림 세력의 반격 역시 만만치 않았다. 1147년 무라비트 왕조를 멸망시킨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압드 알 무민은 뒤이어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알 안달루스의 타이파들을 모두 굴복시키고 수도를 세비야로 옮겼다. 이후 무와히드 왕조는 기독교 국가들을 상대로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1184년 유수프 1세가 전사하자, 마침 아프리카에 있던 야쿱 알 만수르는 부친의 복수를 천명하며 1190년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카스티야와 맞붙었다. 그러나 양측 모두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몇년 간 휴전을 맺기로 했다.

1194년 휴전이 끝나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전쟁을 재개하기로 했다. 마침 야쿱이 마라케시에서 중병을 앓고 있으며, 그의 동생인 알 안달루스 타이파 아부 야히아가 지중해를 건너 왕을 자칭하며 마라케시를 포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알폰소 8세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세비야를 탈환하기 위한 일련의 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야쿱은 아부 야히야의 반란을 신속하게 제압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와서 카스티야 왕국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1195년 6월 첫째 날 타리파에 도착한 야쿱은 여러 타이파를 소집하여 전쟁 계획을 논의했다. 여기에 카스티야 왕과 반목하던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카스트로 휘하의 기독교 기사들의 지원도 있었다. 6월 30일 코르도바에 도착한 그는 7월 4일 코르도바에서 출정하여 무라달 고개를 넘어 살바티에라 평야를 지나갔다. 칼라트라바 기사단 분견대가 도중에 그들을 발견했고, 적 정찰대에게 포위되어 거의 전멸할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하고 알폰소 8세에게 달려와 적의 대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알폰소 8세는 톨레도에 군대를 모아 왕국의 남쪽 경계 지점인 과디아나 강 인근의 알라르코스로 진군했다. 이윽고 7월 19일 무슬림군이 알라르코스에 도착하면서,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4. 경과

야쿱 휘하의 무슬림군은 2개의 전열을 편성했다. 첫번째 전열 우익에는 안달루시아 기병대가 배치되었고, 좌익과 중앙에는 무와히드 왕조 본대가 배치되었다. 또한 두번째 전열에는 궁수병과 창병이 밀집 배치되었으며, 흑위 근위병 부대를 포함한 수천 명의 예비대가 후방에 배치되었다. 알폰소 8세는 적의 병력이 아군에 비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바라 왕국 안초 7세가 파견한 원군을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전투를 벌여도 괜찮을 거라 판단했다.

그는 8천 가량의 중기병대에게 적 중앙 전열을 공격하라고 명했고, 산티아고 기사단, 칼라트라바 기사단을 비롯한 기병대는 곧바로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3차례에 걸친 돌격 끝에, 무슬림군의 중앙 전열이 뚫렸고, 기병대는 여세를 몰아 무슬림군 제2 전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사전에 밀집 배치되어 있던 무슬림 창병대가 결연하게 막아섰고, 궁수대가 화살비를 퍼부으며 적 기병대의 기세를 꺾었다.

기병대의 기세가 주춤해지자, 무슬림군은 반격을 개시하여 적군을 포위섬멸하려 했다. 알폰소 8세는 기병대를 구하기 위해 뒤쳐져 있던 보병대를 서둘러 파견했지만, 재정비를 마친 무슬림 기병대가 덮치는 바람에 무너져 버렸다. 알폰소 8세와 몇몇 측근들은 전황을 수습할 길이 없자 과달헤르자 성으로 도피했고, 다른 이들은 알라르코스 성채로 피신했다가 성채가 함락되면서 죽거나 포로로 전락했다. 이리하여 알라르코스 전투는 무와히드 왕조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5. 결과

전승에 따르면, 2만에서 2만 5천 명에 달하는 카스티야인이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기사단 500명 역시 죽었다고 한다. 이것은 과장된 수치이겠지만, 카스티야군이 이 전투에서 참담한 대패를 당한 건 분명하다. 야쿱은 여세를 몰아 말라곤, 베나벤테, 칼라트라바, 카라쿠엘, 토레 데 과달페르사 등 여러 성채를 함락하였다. 이제 툴레도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렸으나, 야쿱은 군대의 손실이 크고 다들 지쳤다고 판단하여 툴레도를 공격하는 대신 세비야로 철수했다.

이후 야쿱의 군대는 2년간 엑스트레마두라, 타구스 계곡, 라 만차, 톨레도 주변을 초토화했고, 몬탄체스, 트루히요, 플라센시아, 탈라베라, 에스칼로나 등지를 약탈했다. 그러나 야쿱은 곧 북아프리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이베리아 반도에 흥미를 잃고 1187년 수도 마라케시로 돌아간 뒤 1199년 2월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무함마드 알 나시르 역시 기독교 왕국들을 상대로 공세를 펼쳤지만, 기독교 왕국들은 똘똘 뭉쳐서 선전하였다.

이에 1211년 알 나시르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기독교 국가들 역시 연합군을 편성하여 응전했다. 이리하여 양측은 1212년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를 치렀고, 기독교 세력이 완승을 거두면서 승부의 축이 기독교 세력 쪽으로 완전히 기울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