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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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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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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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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ddd>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Carl Friedrich Gauß
파일:Carl_Friedrich_Gauss.jpg
본명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Johann Carl Friedrich Gauß
출생 1777년 4월 30일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 신성 로마 제국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령 브라운슈바이크
사망 1855년 2월 23일 (향년 77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Flag_of_the_German_Confederation_%28war%29.svg.png 독일 연방 하노버 왕국 괴팅겐
직업 수학자
학력 괴팅겐 대학교
수상 랄랑드 상 (1809)
코플리 메달 (1838)
부모 아버지 게프하르트 디트리히 가우스[1]
배우자 요한나 오스토프 (1805년 – 1809년, 사별)
프리데리카 빌헬미네 월덱 (1810년 – 1831년, 사별)
자녀 6명
제자 리하르트 데데킨트[2]
베른하르트 리만
프리드리히 베셀[3]
소피 제르맹
종교 표면상 루터교회, 실제론 이신론 추정[4]
서명 파일: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서명.svg

1. 개요2. 상세3. 생애4. 주요 업적
4.1. 정십칠각형 작도 가능성의 증명4.2. 소수 정리4.3. 그의 이름을 딴 것들
4.3.1.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그 이름이 붙은 것
5. 주요 저서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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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4px-Stamps_of_Germany_%28DDR%29_1977%2C_MiNr_2215.jpg
1977년에 발행된 동독(DDR)의 우표에 그려진 가우스 초상[5]

1. 개요

GEORGIVS V REX HANNOVERAE MATHEMATICORVM PRINCIPI
하노버의 국왕 게오르크 5세가 수학의 왕에게.[6]
Die Mathematik ist die Königin der Wissenschaften, und die Arithmetik ist die Königin der Mathematik.
수학은 학문의 여왕이고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 [7]

독일의 수학자, 천문학자, 측지학자, 물리학자. 30세부터 죽을 때까지 근 50년간 괴팅겐 대학교 천문학과 교수이자, 괴팅겐 천문대 소장으로 재임했다.

수학사에서 이 사람을 빼놓고서는 수학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수학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위대한 수학자이다. 대수학, 정수론, 해석학, 기하학, 통계학 등 여러 수학 분야뿐만 아니라, 천문학, 측지학, 물리학에도 기여했다.

소행성 세레스의 식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하노버 왕국의 측지 조사의 책임자로 일하며, 지구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명이 되었다.

2. 상세

철저한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내용이 완벽하게 정리되기 전에는 절대 발표를 하지 않아서, 누군가가 최초로 발견해서 발표했는데 알고보니 가우스의 노트 한쪽에 이미 끄적여져 있었다든가 하는 일화가 많다. 참고로 이 내용은 분량이 노트 19페이지밖에 안 되는데 하도 내용이 암호처럼 적혀있어 아직도 완벽하게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사후에 그가 남긴 자료를 분석하던 학자는 '그의 연구가 제때 발표되었다면 수학 역사가 50년은 앞당겨졌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가우스도 풀지 못한 난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이다. 해당 문제는 20세기 말에서야 간신히 증명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알려지기로는 주변에서 이 페르마가 제시한 난제를 가우스라면 풀 수 있을 것이라며 도전할 것을 권하자 "그런 문제는 전혀 관심 없다.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도 안되는 명제를 만들라면 나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당시로서는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눈치챘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수세기가 거치고 나서야 현대수학의 최신 이론을 총동원한 끝에 겨우 증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학계에선 대체로 그 당시의 수학적 도구로는 애초에 증명이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가우스는 닐스 헨리크 아벨의 논문을 읽지도 않고 버려 나중에 비난을 들었지만 많은 논문을 보고 개차반이 많아 보는 게 쓸데없는 것이라고 여겨 그랬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아벨의 논문을 읽어보고 가우스나 많은 다른 수학자들도 뒤늦게 '왜 읽어보지 않았던 건가!' 라며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래서 가우스는 이전과 달리 오는 논문을 무조건 버리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보게 되었다고 한다.

3. 생애

불과 5살쯤에 자기 아버지가 직원들의 월급 계산을 다 끝마쳤을 때 아버지는 틀렸고, 자신의 답이 맞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훗날 가우스는 "나는 글을 배우기 전부터 이미 계산을 할 줄 알고 있었다."라는 농담까지 하였다. 또한 학교 선생님이 낸 "1부터 100까지의 숫자를 모두 더하면?"이라는 문제를 등차수열의 합 공식으로 순식간에 풀어냈다는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그러한 원리를 최초로 고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 나이에 그것을 스스로 생각해냈다는 것이 대단하다. 참고로 답은 5050이다.[8][9]

많은 천재들이 인정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살다 요절한 것과 달리, 가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부각된 뛰어난 재능으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재정적 후원을 받았다.

1799년 대수의 기본 정리(Fundamental Theorem of Algebra)에 관련된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 논문에서 달랑베르, 라플라스, 라그랑주, 오일러 등 기존 학자들의 증명의 오류를 지적했다. 이후에도 가우스는 말년까지 이를 수정, 보완하기 위한 증명을 몇 차례 다시 내놓았다. 그 과정에서 복소수의 개념을 상당히 명확히 했다.

24세 때 최소제곱법으로 소행성 세레스[10]의 궤도를 예측하여 천문학계를 넘어 과학계 전체에서 유명해졌다.

30세에 괴팅겐 대학교 천문학과 교수이자 천문대장으로 임용되었고, 죽을 때까지 근 50년간 재직했다. 하지만 그는 강의를 싫어했고, 종종 지인들과 나눈 서신에서 가르치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호소하고는 했다.

1820년 하노버 왕국의 측지 조사 책임자에 임명되었다. 이 작업을 하며 그는 지구물리학과 자기 관련 연구에 관심을 가지며 업적을 남겼다.

1828년 하노버 왕국의 도량형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다. 길이, 척도의 표준을 만들었다.

50대 이후에는 전자기학 관련 연구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정전기학, 전기역학, 전자기학, 유도에 관한 통일된 법칙을 발견하여 뉴턴의 중력 법칙에 필적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생전에 위대한 학자로 이름을 날리며 학문적, 사회적 성취를 모두 누렸다.

첫 아내인 요하나 오스토프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으나 아내는 셋째 출산 후 곧 사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막내 아들 루트비히마저 세상을 떠났다.

미나 발데크와의 재혼에서 역시 2남 1녀를 얻었지만 두 아들들과의 사이는 소원했고[11] 아내 미나가 오랜 투병 끝에 사망한 후 77세에 사망하기까지 24년간의 생애를 홀몸으로 살았다.

사망하기 얼마 전에는 손자에게 자신의 삶이 불행했다는 고백의 글을 남겼고, 이후 가우스는 괴팅겐대의 자신의 교수실의 의자에 앉은 채 심근경색으로 생을 마감했다.

가우스는 매우 성공적인 투자자였다. 교수 및 공직에 근무하였지만, 평생 주식, 증권에 투자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

4. 주요 업적

가우스의 업적은 너무나도 많아서 하나하나 다 나열하다가는 끝이 없으나, 아마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대수학의 기본정리의 증명일 것이다. 사실 최초로 증명했다고 하기에는 논란이 조금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네이버캐스트-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참고하자. 상술한 수열의 합 공식도 어릴 때 만들어냈으며, 정 17각형이 작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19세의 나이에 발견했다.

놀랍게도 외계인의 존재를 믿어 다른 별에 생물이 살 것이라고 자신했기에 지구에서 거대한 횃불을 신호로 그들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지인들이 '설마?' 라고 하자 그는 ' 저 많은 별을 빈 채로 쓸데없이 창조했다면 신은 역사상 최악의 수학적 낭비를 하는 것'이라면서 반드시 무언가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죽고 160여년이 지난 2018년, MIT 우주에 조명을 설치하여 외계인과 대화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4.1. 정십칠각형 작도 가능성의 증명

19세 때, 정17각형(hepta-deca-gon(17-gon) 또는 septadecagon)이 작도 가능한 다각형임을 증명하였다.[12]

파일:attachment/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Gaus.gif
가우스가 실제로 정17각형의 작도법을 찾아낸 것은 아니다. 단지 작도가 가능하다는 사실만을 증명했을 뿐이며 실제 작도법이 나온 것은 이로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이다. 가우스가 증명한 것은 아래의 식이다.

[math(\cos({2 \pi \over 17}) = \frac{- 1 + \sqrt {17} + \sqrt {34 - 2 \sqrt {17}} + 2 \sqrt {17 + 3 \sqrt {17} - \sqrt {34 - 2 \sqrt {17}} - 2 \sqrt {34 + 2 \sqrt {17}}}}{16} )]

야코프 베르누이가 묘비에 로그 나선을 새긴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묘비에 정17각형을 새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요청은 사람들이 과 혼동할 것을 우려하여 받아들여지지 않고 17개의 점으로 된 별을 대신 조각하였다. 맨 위의 사진에 나온 우표에 인쇄되었으니 나름 해피엔딩.

같은 방법으로 정257각형, 정65537각형 또한 작도가 가능하다는 사실도 입증했다. 이들은 모두 페르마 소수인데, 가우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n의 소인수가 2 또는 페르마 소수 뿐이고 홀수인 제곱수를 인수로 가지지 않을 때만 정 n각형이 작도 가능하리라는 추측을 1801년에 제시하였다. 이는 1836년에 증명되어 Gauss-Wantzel 정리라고 부른다.

4.2. 소수 정리

[math(\displaystyle \lim_{x \to \infty}\frac{\pi(x)}{\left(\dfrac x{\ln x}\right)} = 1)][13][14]
가우스는 동시대의 수학자인 아드리앵 마리 르장드르와 함께 소수에 대해 연구를 하던 중, 이것이 자연로그와 연관성이 있다는 추측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가우스는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하였고, 이후 후대의 수학자들이 이 문제에 몰입하여 마침내 이 추측이 사실임을 증명해냈다. 자세한 내용은 소수 정리 문서 참조.

참고로 이 정리는 가우스가 가장 아끼던 제자 베른하르트 리만이 제시한 21세기의 수학 난제 리만 가설로 이어졌다.

4.3. 그의 이름을 딴 것들

직접 이름 붙은 것만 이 정도고, 실제로 기여한 것은 수없이 많다. 이과로 대학에 입학할 경우 가우스의 이름을 심심하면 전공서에서 볼 수 있다.
  • 가우스 함수: 가우스 함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개념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아마도 아래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 가우스 기호 [ · ] (floor function): 최대 정수 함수가 고등학교 과정까지는 이렇게 표기되는 사례가 많은데, 가우스가 이 함수를 저런 형태로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는 [math(\left\lfloor \cdot \right\rfloor)] 형태가 표준.
    • 가우스 분포 (Gaussian distribution): 도수 분포 곡선이 평균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인 종 모양을 하는 분포 함수를 말한다. 정확히는 정규분포로 넘어가기 전에 튀어 나오는 일반 함수이지만, 최종 결과인 정규분포 말고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 가우스 적분 - 위 정규분포의 확률값을 계산하기 위한 적분.
      • 가우시안: 이건 포토샵등에서도 튀어나오기 때문에 미술/디자인쪽도 듣게 된다. 가우스 분포를 응용하여 만드는 필터 효과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어 있다.
  • 가우스 소거법(Gaussian elimination)
    연립 1차 방정식의 기본적인 해법. 미지수를 하나씩 소거해 가서 어느 미지수를 결정하고, 그것을 반대로 대입해 가서 전 미지수를 구한다.
  • 가우스 사상
    곡면위의 한 점에서의 단위법선벡터를 평행이동시켜서 곡면에서 단위구면에의 사상을 정의할 수 있다. 이를 가우스사상 또는 구면사상이라고 한다.
  • 가우스 미터
    자속 밀도의 CGS 전자기 단위로, 기호는 G이다. SI 단위 테슬라(T)의 1만분의 1.
  • 가우스 정수
    '복소정수'라고도 하며, 두 정수 a, b 에 대해서 [math(a + bi , (i^2 = -1))]로 표현되는 수를 의미한다.
  • 가우스 정리(Gauss's Theorem)
    발산 정리라고도 한다. 물리학의 가우스 법칙과도 관련이 있다. 미분위상수학의 스토크스 정리의 특수한 경우이기도 한데, 대학 미적분학에서 보통 스토크스 정리라고 하면 켈빈-스토크스 정리를 뜻한다.
  • 가우스의 평균값 정리(Gauss's Mean Value Theorem)
    함수 [math(f)]가 닫힌 원 [math(\left|z-z_{0}\right|\leq r)]에서 해석적(Analytic)이라고 하면, [math(f(z_{0})=\displaystyle{\frac{1}{2\pi}}\int_{0}^{2\pi}f(z_{0}+re^{i\theta})d\theta)]이다. 코시 적분 공식에서 유도된다.
  • 그 외
    • 가우스상 (Carl Friedrich Gauss Prize for Applications of Mathematics): 국제수학연맹에서 공학, 비즈니스 등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수학적 발견을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 가우스 초기하함수: [math(_2F_1(a,b; c; z))] 형태로 주로 사용되는 초기하함수로, [math(_pF_q(a_1,a_2,\cdots,a_p; b_1,b_2,\cdots,b_q; z))] 형태의 '일반화된 초기하함수'가 학부 과정 내에서는 쓰일 일이 거의 없어 [math(_2F_1(a,b; c; z))] 형태를 그냥 초기하함수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굳이 '가우스'를 붙인 이유는 오일러 이후 가우스가 최초로 [math(_2F_1(a,b; c; z))] 형태의 함수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4.3.1.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그 이름이 붙은 것

5. 주요 저서

  • <Disquisitiones Arithmeticae>(산술에 관한 연구): 정수론 대수학에 대해 다루는 책으로, 가우스의 모든 저서와 논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는 저서이다. 실제로, 이 책 하나 때문에 당대의 수학자들이 모두 대수학과 정수론 분야로 관심을 기울였고, 닐스 헨리크 아벨이나 페터 구스타프 르죈 디리클레, 앙드레 베유 등의 수학자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저서를 출판할 때 가우스의 나이가 겨우 24세였다는 점이다.

6. 관련 문서



[1] Gebhard Dietrich Gauss. [2] '데데킨트 절단'으로 유명한 수학자 [3] 베셀 함수을 정립한 수학자. [4] G. Waldo Dunnington, Jeremy Gray, Fritz-Egbert Dohse, Carl Friedrich Gauss: Titan of Science (MAA, 2004), 300. [5] 오른쪽 그림은 자와 컴퍼스만으로 17각형을 작도한 것을 의미. [6] PRINCIPI는 PRINCEPS의 활용형으로, 어원이 되는 PRINCEPS는 본래 "첫째, 으뜸, 군주..." 등의 뜻을 지녔는데, PRINCEPS에 해당하는 단어들인 Prince(프랑스어) Prinz(독일어) 등이 시간이 지나며 국왕의 아들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기 시작하면서 가우스의 별명이 종종 '수학의 왕'이 아닌 '수학의 왕자'로 오인되곤 한다. [7] 다만 가우스는 1830년, 프리드리히 베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수는 순전히 우리 정신의 산물이지만 공간은 우리 정신 외부에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그 속성을 선험적으로 완전히 규정할 수는 없다는 점을 우리 모두는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8] 1+100=101, 2+99=101……50+51=101, 따라서 1에서 50까지의 101을 더하면 101*50=5050 [9] 고지능자들의 공통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학습이 아닌 본인의 사고만으로 원래 존재했던것을 혼자서 깨달은 셈, 더구다나 학생이었던 그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신이 내린 재능이 아닐 수 없다. [10] 당시에는 소행성으로 분류됐지만 현재는 왜행성으로 분류되고 있다. [11] 아들한테 "너희들은 수학하지 마라. 어차피 나를 뛰어넘지 못할테니"라고 하는 아빠였다. 대신 이건 아들들이 수학자의 삶을 택한다면 매번 자기와 비교될 것 같기 때문에 걱정하는 뜻으로 이랬다는 설도 있다. [12] 기하학에서 작도 가능하다는 것은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가지고 도형을 그릴 수 있다는 뜻이다. [13] [math(\pi(x))]는 소수 계량 함수이다. [math(x)]보다 작거나 같은 소수의 개수를 뜻한다. [14] [math(\dfrac x{\ln x})] 대신 로그 적분 함수 [math(\displaystyle \mathrm{li}(x) = \int_0^x \frac{{\rm d}t}{\ln t})]를 쓰기도 한다. [15] 라이벌인 공자의 이름을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인 공자에서 따왓듯이 서양에서 다양한 수학 분야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그에게서 이름을 따온 걸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