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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ddd> 레온하르트 오일러 Leonhard Eul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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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레온하르트 파울 오일러 Leonhard Paul Euler[1] |
국적 | 스위스 |
출생 | 1707년 4월 15일 |
스위스 바젤 | |
사망 | 1783년 9월 18일 (향년 76세)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직업 | 수학자, 물리학자 |
학력 | 바젤 대학교 (철학 / 석사) |
배우자 |
카타리나 그셀 (1734년 ~ 1773년, 사별) 살로메 아비가일 그셀 (1776년 결혼)[2] |
종교 | 개신교 ( 칼뱅파)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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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 눈을 감고 우주를 보았다.
레온하르트 오일러
스위스 태생의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논리학자, 공학자.레온하르트 오일러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아르키메데스, 아이작 뉴턴 등과 함께 수학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위대한 수학자다. 스위스 바젤 출신으로 러시아 및 독일 등에서 평생 연구에 매진했다. 현존하는 수학의 여러 갈래의 시초가 되었고 당시 기존에 존재하던 다양한 수학 이론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수학뿐만 아니라 물리학이나 천문학 등에도 적잖게 기여했다.
현대에 널리 사용되는 기호나 표기법 등을 만들었는데, 자연로그의 밑 [math(e)]가 그 예이다.[3]
오일러가 연구한 분야에 대해서는 매우 광범위해서 고등학교 수학만 배워도 그의 업적을 접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그는 지수와 로그의 관계를 정립하였다. 즉, 오일러 이전에는 지수와 로그가 서로 연관되지 않은 별개의 개념이었다. 또한 현대에 쓰이는 삼각함수의 정의, 즉 원의 극좌표를 이용한 삼각함수의 정의도 오일러의 업적이다. 또한 여러모로 실용적이고 유명한 오일러 공식([math(e^{ix} = \cos x + i \sin x )])을 만들었다.[4]
2. 생애
1707년 스위스 바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수학을 배웠으며 이어 아버지의 스승이기도 한 야코프 베르누이로부터 수학을 배웠다. 13세 때 바젤 대학에 입학하였고, 오일러에게 초등 수학(elementary mathematics)를 가르친 요한 베르누이[5]에게 수학적 재능을 인정받고 수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이무렵 신학을 전공할지 수학을 전공할지 많은 갈등을 하다가 결국 수학을 전공하기로 하지만, 종교적 신앙심도 버리지 않아서 평생동안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남았다.20세인 1727년, 베르누이 형제의 추천으로 러시아 제국의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로 건너갔다. 이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는 요한 베르누이의 아들 다니엘 베르누이가 교수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카데미를 후원하던 예카테리나 1세가 사망하고 어린 표트르 2세가 즉위하자 보수적인 귀족들이 정권을 잡고 외국인에 배타적인 정책을 펼쳤다. 외국인 과학자들을 위한 지원금이 삭감되었다. 러시아에 도착한 오일러는 아카데미에서 다니엘을 도와 일하였고, 러시아 해군에서 의무병으로 복무하는 투잡을 뛰어야 했다. 1730년 표트르 2세가 사망하고 독일에 친화적인 안나 황후가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나아졌다.
1731년 물리학 교수로 승진했으며, 러시아 해군에서 소위 승진을 거절하고 전역했다. 1733년에 다니엘이 러시아의 검열 및 적대감에 질려 러시아를 떠나 스위스 바젤로 돌아가자, 오일러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26세에 수학과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스위스 출신 화가 게오르크 그셀의 딸 카타리나와 결혼했고, 이후 러시아에 장기간 눌러 앉았다. 그러나 집념이 강하고 연구에 온 힘을 다했던 그는 과한 연구로 인해 1735년, 28살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같은 해에 그의 친형제인 요한 하인리히 오일러가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로 와서 화가로 일하게 되었다.
1740년 프로이센 왕에 즉위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일러를 베를린 아카데미로 초청하려 했다. 이미 가족들이 러시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오일러는 갈등했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에 제안한 조건이 좋았고 때마침 안나 황후가 사망하고 러시아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1741년에 그는 베를린 아카데미로 자리를 옮겼다. 오일러는 러시아 아카데미측에 시력을 위해 따뜻한 베를린으로 떠나겠다고 했고, 러시아 측은 그에게 현역 회원 자격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연간 200루블을 지급하겠다고 제의했다. 때문에 오일러는 베를린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자신이 쓴 논문의 일부는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 쪽에 꾸준히 보냈다.
베를린에서는 문예에 관심이 많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직접 아카데미 운영에 많이 관여했는데, 오일러는 이것을 다소 불편하게 여기기도 했다. 또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일러 뿐만아니라 볼테르 등 다른 여러 뛰어난 학자들을 아카데미로 초빙했는데, 말빨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볼테르는 토론에 어눌했던 오일러를 종종 위트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대왕 또한 오일러를 " 사이클롭스"[6]라고 놀려대서 25년간 베를린에 머물면서도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베를린 시절 오일러는 학문적 성과에 있어 정점에 있었다. 베를린 시절 그는 380편의 논문 및 출판물을 썼다.
1766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가 엄청난 연봉에다가 심지어 그의 아들들을 고위직으로 임명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고, 이에 오일러는 다시 러시아로 되돌아갔다. 하루에 20시간 이상을 연구에 매진하여 몸을 혹사시켜온 오일러는 오른쪽 눈을 잃은 후에도 계속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가 결국 백내장으로 인해 다른 한 쪽의 눈까지도 못 보게 되어 1766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17년을 맹인으로 살았다.[7] 여기서 오일러의 천재성이 다시 한 번 드러나는데, 시력을 잃은 후에 낸 논문의 양이 훨씬 많으며 계산이 필요한 부분은 모두 암산으로 처리했다.
시각 장애인이 된 후에 오일러는 영국 해군이 낸 문제인 태양, 달, 지구의 위치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법을 연구하기도 했다.[8] 그러나 만유인력을 매개체로 하여 상호 작용하는 세 개의 물체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은 이른바 ' 삼체문제'라 하여, 이후 앙리 푸앵카레에 의해 결코 풀 수 없음(즉, 해가 없음)이 증명된 문제이다. 하지만 오일러는 발상을 전환해 위치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대신 근사치를 구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항해하는 배의 위치를 cm 단위까지 파악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반복 연산법( 알고리즘)을 개발하였는데, 이것은 첫 계산으로 대략적인 값을 알아낸 후 그 결과를 다시 계산식에 넣어서 더 정확한 값을 얻어내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9] 이렇게 해서 오일러는 배의 위치를 km 단위까지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고, 이에 영국 해군은 상금을 지급함으로써 그의 공로를 인정했다.
1783년 9월 18일 그는 가족들과 점심 식사를 한 후 학술회의 동료 안데르스 요한 렉셀과 함께 새로 발견된 행성 천왕성의 궤도를 논의하던 도중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져 몇 시간 후 사망했다.[10] 그 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카브리스토프 섬에 있는 스몰렌스키 루테란 묘지에 묻혔다. 1956년에는 오일러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묘비와 유품이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에 있는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비록 그는 끊임 없는 연구로 인해 시력과 건강을 잃었으며 결국 뇌출혈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지만, 그의 일생은 단순히 한 수학자의 삶을 넘어 시련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진정한 인간 승리의 귀감이 되었다.
3. 업적
오일러의 업적 중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의 예로는 오일러 공식이나 한붓그리기 문제[11] 등이 있다. 사실 오일러가 기여했거나 그의 이름이 들어간 정리와 공식은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이곳에 적기에는 여백이 부족할 정도이다.주요 활동 분야는 해석학(미적분, 복소해석, 수열, 미분방정식)과 정수론 전 분야[12]이고, 기하학(특히 위상수학의 근간으로 여겨지는 정다면체와 평면 그래프에 관한 연구)과 역학(mechanics)에서도 많은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런 이유로 순수 수학 분야를 깊게 공부하지 않더라도 전자기학, 유체역학, 건축공학 등을 공부하다 보면 심심찮게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오일러는 천재적인 직관력의 소유자이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허수 [math(i)]의 개념이 처음 알려졌을 때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무도 감을 못 잡고 있었다. 하지만 오일러는 [math(i^i)] 같은 것들의 값을 정확하게 계산해 냈다.[13]
또한, 그는 1748년 자신의 저작에서 [math(P(x)=1 + Ax + Bx^2 + Cx^3 + ... = (1+ax)(1+bx)(1+cx) \ ... \ )]에 대하여 [math(a+b+c=A, a^2 + b^2 + c^2 = A^2 - 2B, a^3 + b^3 + c^3 = A^3 - 3AB + 3C)] 등이 성립한다고 주장하였다. 자기에게는 이것이 직관적으로 자명하지만 추후에 엄밀한 증명을 내놓겠다고 약속하였고, 실제로 2년 뒤에 보란 듯이 증명에 성공하였다. 이 정리는 선대 수학자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math(displaystylesum frac{1}{{n}^2} = frac{1}{1} + frac{1}{4} + frac{1}{9} + frac{1}{16}+ text{...} )]의 값을 구하는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보조 정리로 활용되었다.[14] 그는 비슷한 방법으로 [math(\displaystyle\sum \frac{1}{{n}^4} = \frac{1}{1} + \frac{1}{16} + \frac{1}{81} + \frac{1}{256} + \text{...} = \frac{\pi^4}{90})] 또한 증명하였다. 하지만 그런 오일러도 [math(\displaystyle\sum \frac{1}{{n}^3} = \frac{1}{1} + \frac{1}{8} + \frac{1}{27} + \frac{1}{64} + \text{...} \ )]가 수렴하는 값은 찾지 못했는데, 그는 이에 대해 "이런 급수는 로그나 원주율의 조합으로 나타낼 수 없으며 유한한 항으로 표현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약 250년이 지난 현재에도 저 급수의 값은 컴퓨터를 통해 근사적으로밖에 구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직관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15][16]
오일러는 그가 발표했던 수많은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직관적인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수학적인 정의에 다소 모순되는 표현도 거리낌 없이 사용하였다. 이를테면 [math(\log 0)] 같은 식도 빈번히 사용하였으며, 무한대 분의 1을 서슴없이 더하기 빼기도 하였다. 그러나 [math(\sqrt{-5}\sqrt{-3} = \sqrt{15})] 같은 간단한 계산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17] 대수학의 기본정리를 연구할 때에도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였지만 오히려 증명 자체에는 오류가 있어 사후 20대 초반의 젊은 가우스에게 공격을 받았다. 이 비판으로 가우스는 유럽 전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나, 본인의 증명도 오류가 발견됐다.
스위스 과학학회 오일러 위원회(Euler Committee of the Swiss Academy of Science)라는 곳에서는[18] 1911년부터 오일러가 생전에 낸 문헌들을 정리해서 담으려는 시도를 해왔다. 제목은 Opera omnia(라틴어로 전집이라는 뜻)이며, 이 책은 75권이 넘게 나와있고 여전히 나오고 있다. 그가 학계에서 얼마나 많은 활동을 했는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3.1. 오일러 공식
자세한 내용은 오일러 공식 문서 참고하십시오.3.2.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그는 페르마가 남긴 자료를 뒤진 끝에, [math(n=4)]일 경우의 증명을 찾아냈다. 페르마 자신이 증명해서 써놨는데, 오일러가 매의 눈을 부릅뜨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걸 찾지 못했던 것. 그는 이 증명을 바탕으로 [math(n=3)]의 경우의 증명을 해냈지만, 일반적인 경우의 증명에 실패하였다.[19][20] 그러나 [math(n)]이 소수(素數, prime number)여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또 이것을 확장해서 [math(x^4 + y^4 + z^4 = w^4)]의 정수해는 없을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이것은 1988년 노암 엘키스가 반례 [math(2682440^4 + 15365639^4 + 18796760^4 = 20615673^4)])을 구하면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노암 엘키스는 그뿐만 아니라 이 식을 만족시키는 정수 [math(x,\,y,\,z,\,w)]의 값이 무수히 많다는 것까지 증명하였다.3.3. 감마 함수[21], 제타 함수[22]
오일러의 천재적인 직관은 현재 수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두 함수에서도 작동했었다.감마 함수의 극한형태를 만들어내서 감마 함수를 미분한다든가 로그를 씌운다든가의 조작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서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던 [math(\gamma)][23]와의 연관점을 찾아냈다. 다만 감마 함수의 경우 오일러가 정의역을 자연수에서 더 큰 범위로 확장시킨 방법은 무한곱으로 나타낸 방법인데 반해 요즘에 감마 함수를 정의하는 방법은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가 해놓은 방법이다. 물론 둘의 결과는 같다. 이외에 바이어슈트라스가 감마 함수를 정의한 방법도 유명하다.
제타함수에서는 오일러 곱(Euler product)라고 불리는 것을 증명해내서 완전한 수론의 주제로 여겨졌던 소수를 해석학쪽으로 이끌어 내는 것을 성공해낸다.[24] 이것을 살짝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들릴수도 있지만 정말로 무서운 것이 소수의 규칙성을 분석해내는데 ' 미분'[25]같은 강력한 무기를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도 만약 오일러가 없었다면 리만 가설 같은 건 못 나왔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 오일러 곱이다.
3.3.1. 오일러 곱
오일러 곱은 제타함수와 소수와의 관계를 기술하는 것이 주 목적인데 증명만 생략하고 간단히 결론만 쓰자면[math(\displaystyle \sum^{\infty}_{n=1}\frac{1}{n^s}=\prod^{}_{p\, prime}\frac{1}{1-p^{-s}})]
좌변: [math( \sum n=1 \sim \infty )]는 해당 수열의 무한합이다.
우변: [math( \prod )]는 해당 수열의 무한곱을 의미하며 p prime은 p가 소수이며[26] n번째 항의 p에는 n번째 소수가 들어감을 의미한다.
오일러가 증명에 사용한 방법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설명하자면 '리만가설(승산)'의 저자 존 더비셔는 이 증명을 독자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증명을 찾아놓고, 적어놨는데 오일러가 증명한 원 방법을 살펴보자마자 적어놓은 쪽지들을 그냥 버렸다고 한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체와 비슷한 방법으로 [math( S = \sum n^{-s} )] 라 놓고 양변에 [math( 2^{-s} )]를 곱하면 [math(2^{-s}S=\sum (2n)^{-s})]이 된다. 이때 우변을 살펴보면 모든 짝수에 대한 항만 나온다. 양변을 끼리끼리 빼면 [math( (1-2^{-s})S= \sum m^{-s} )] (m은 2와 서로소인 자연수)가 된다. 이제 양변에 [math( 3^{-s} )]를 곱하면 [math( (1-2^{-s})3^{-s}S=\sum (3m)^{-s})] 이므로 m중 3의 배수에 대한 항만 나온다. 뺄셈하면 [math( (1-2^{-s})(1-3^{-s})S = \sum k^{-s} )] (k은 2,3 모두와 서로소인 자연수)가 된다. 이젠 [math( 5^{-s} )]를 곱해서 빼고, [math( 7^{-s} )]을 곱해서 빼고... 모든 소수 p에 대해 반복하면 오른편 [math( \sum )] 안에는 모든 소수 [math(p)]와 서로소인 자연수 [math(1)]만 남게 되고 왼쪽에는 [math((1-p^{-s}))]의 무한곱과 [math(S)]가 남는다. [math((1-p^{-s}))]를 우변으로 이항시키면 끝.
3.4. 보 이론
베르누이 방정식으로 유명한 베르누이와 함께 보에 관련된 이론을 고안해냈다. 요약하자면 보가 하중을 받아 휨이 발생했을 때, 가해진 하중과 보의 변위 사이의 관계를 알아낸 것.또한 오일러는 기둥에 좌굴[27]이 생겨나는 최소 하중인 임계 하중을 계산하는 법 역시 고안해냈다. 우리는 이를 특별히 오일러 임계 하중(Euler's critical load)라고 부른다.
3.5. 유체장의 기술 방법
유체역학에서 유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기술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흔히 라그랑주의 방법과 비교되며, 이 둘을 묶어서 Lagrangian and Eulerian specification of the flow field라 말한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라그랑주의 방식은 fluid particle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시간과 공간에 따라 기술한다면, 오일러의 방식은 특정한 구역 하나를 지정해놓고 그곳에서의 시간에 따른 유체의 출입에 주목하는 방식이다.유체의 particle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기에 라그랑주의 방식은 유체역학보단 기존의 역학에서 좌표축을 잡고 물체의 움직임을 기술하는 데에 어울리는지라 복잡한 유체역학의 계산엔 오일러의 방식을 자주 택하게 된다.
3.6. 기호의 고안
수학이론 외에도 오늘날 많은 영향을 미치는 훌륭한 업적이 있는데 바로 몇몇 수학 기호를 통일시킨 것이다. 그중 유명한 것 몇 개를 서술하면- 1734–1735년, [math(x)]의 함수를 [math(f(x))]로 표기함
- 1736년, 약 반세기 전에 이미 발견된 수였으나 표기법이 제각기 따로놀던 자연로그의 밑에 [math(e)]라는 기호를 씀
- 1737년, 원주율의 기호로 [math(\pi)]를 채택함
- 1777년, 허수 단위의 기호로 [math(i)]를 씀[28]
- 합을 나타내는 기호로 [math(\sum)]를 도입함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표기법은 이 정도이고 몇몇 자잘한 것도 있다.
- 삼각형의 내접원의 반지름을 [math(r)]로 표기함
- 삼각형의 외접원의 반지름을 [math(R)]로 표기함
- 삼각형의 변을 [math(a)], [math(b)], [math(c)]로 표기한뒤 그에 대응되는 각을 [math(A)], [math(B)], [math(C)]로 표기함
- 삼각형 둘레의 반을 [math(s)]로 표기함
- x의 로그를 [math(lx)]로 표기함 #[29]
이 표기법들이 널리 사용된 이유는 오일러가 시대를 초월한 천재이기 때문이기도, 그리고 편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교과서를 저술했던 학자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학자 윌리엄 던햄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기도 했다.
확실히 현대의 독자가 오일러의 저작을 보면 마치 최근에 쓰인 느낌을 받는다. 물론 그런 느낌을 받는 이유는 오일러가 현대적인 표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영향력이 너무도 커서 후대의 수학자들이 그의 방식(style)과 표기법, 그리고 형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30]
3.7. 약방의 감초
연구분야가 굉장히 광범위하고 남긴게 많은 만큼 오래되고 유명한 미해결 문제에선 꼭 한번씩 언급된다. 골드바흐 추측은 골드바흐가 오일러에게 쓴 편지로부터, 리만 가설의 제타 함수의 유래는 오일러의 연구[31]에서 시작되었으며,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도 역시 도전하였다.[32]영국의 윌리엄 로원 해밀턴[33]이라는 수학자는 어렸을때 보인 천재성으로 인해[34] 매우 주목받던 수학자였고, 뉴튼-라이프니츠의 미적분관련 논쟁으로 인해 대륙 수학자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그 이후 대륙의 오일러와 가우스 수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웃풋이 떨어지던 영국민들에게 있어 해밀턴은 다시 한 번 뉴튼의 영광을 재현할 국민적 희망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런 해밀턴이 연구하던 분야가 바로 복소평면에서 축을 하나 더 확장한 3차원 공간 시스템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밀턴은 결국 실패하고 4차원 공간에서 방법을 찾아내는데 이것이 바로 사원수다. 그리고 이 발견으로 일약 영국의 국민스타로 떠오르고 영국민은 희열에 들뜨는데, 문제는 한참 옛날에 오일러가 골드바흐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원수와 동일한게 이미 발견되었다. 오일러는 이것을 발견해놓고도 대수롭지 않은 발견인양 쳐박아두었던 것이다. 게다가 해밀턴의 사원수 연구는 결국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오일러의 공식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오일러가 아니라 영국의 수학자 로저 코츠라는 주장이 있다. 코츠가 현재 알려진 오일러의 공식 양변에 자연로그를 씌운 형태로 처음 발견했고 나중에 오일러가 현재 알려진 것과 같은 형태의 공식을 발견했다는 주장이다. 단, 현대의 정의로 복소로그는 단일 함수값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코츠의 형태는 사용되지 않으며, 코츠가 쓴 원문 수식을 오일러의 공식과 같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3D그래픽을 하면 자주 볼 수 있는 위인이다. 물체를 회전 시킬때 오일러 방식(위의 오일러가 발견하고 처박아둔 방식과 다른 방식이다.)과 사원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오일러 방식은 복잡한 회전을 하면 축이 겹치는 문제가 있고 사원수 방식은 회전 그래프를 볼 수 없다는 점이 있다.
3.8. 오일러 이름이 들어간 것들
- 오일러 공식: [math( e^{iz}= \cos z + i \sin z )]
- 오일러 등식: [math(e^{ i \pi } = -1 )] 혹은 [math( e^{ i \pi } + 1 = 0 )]
- 오일러 방정식
- 오일러 정리: 페르마의 소정리를 일반화 한것
-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
- 오일러 지표
- 오일러 추론
- 오일러 파이 함수
- 오일러 직선: 삼각형의 수심, 구점원의 중심, 무게중심, 외심이 함께 놓여있는 직선
4. 오일러와 관련된 명언
오일러의 업적은 너무나도 대단해서 나중에 수학자들은 그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몇 마디를 남겼는데 유명한 것을 적자면,'오일러를 읽고 또 읽어라. 그는 우리 모두의 스승이다.'
- 라플라스
- 라플라스
'비유할 필요도, 과장할 필요도 없이 오일러는 해석학의 화신이다. 마치 사람이 숨을 쉬는 것처럼 또 독수리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그는 아무 힘을 들이지 않고 계산을 해냈다'
- 프랑수아 아라고[35]
- 프랑수아 아라고[35]
'오일러는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거장이다.'
- 존 폰 노이만
- 존 폰 노이만
5. 그 외
- 오일러가 수학 논문을 냈던 잡지중에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에서 새로 창간한 "Commentarii Academiae Scientiarum Imperialis Petropolitanae"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오일러가 논문을 워낙 많이 써낸 덕분에(수백 편에 달함) 편집자는 실을만한 내용이 없어서 잡지가 휑해질 걱정 없이 편하게 일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이 냈는지 페테르부르크 학술원은 오일러가 죽고나서 그의 논문을 무려 50년 동안 우려먹었다. 오일러의 저술량을 평균 내면 1년에 약 800페이지 분량을 저술한 꼴이라고 한다.
- 수학사가 칼 보이어는 "오일러의 1748년 저작 '무한소 해석 입문'이 해석학에서 갖는 위상은 기하학에서 '원론'이 갖는 위상과 같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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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오일러의 일화인 것처럼 잘못 알려진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 오일러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앞에서 당시 유명한
철학자이자
무신론자였던
드니 디드로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수식을 제시하며 "(a+bn)/n=x 이므로 신은 존재합니다. 대답해 주시오!"라고 말하자 수학적 지식이 부족하여 반박할 수단을 찾지 못한 디드로는 그대로 꿀먹은 벙어리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마저 저서인
만들어진 신에 잘못 인용했을 정도로 널리 퍼졌다.
박부성 교수( 경남대학교 수학교육과 교수)의 조사[36]에 의하면 이 일화는 문법학자였던 디외도네 티보(Dieudonné Thiébault)라는 사람의 책 <베를린에 머문 20년의 추억>에 나오는 이야기가 원전인데, 원래 이야기에서는 오일러가 아니라 '러시아의 한 철학자'이며 수식도 (a+b^n)/n=x가 아니라 (a+b^n)/z=x라고 한다. 또한 디드로가 등장하긴 하지만, 수학 지식의 부재로 답을 하지 못한것이 아니라 낚시 수준이 워낙 한심해서 씹은 것이라고 한다. 디드로는 기하학과 확률 분야에 대한 논문을 쓸 정도로 수학에 조예가 있었다. 따라서 이 정도 수식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실제로 와전된 이야기들에서는 대부분 디드로가 수학에 무지한 사람으로 나온다. 그리고 성품이 온화했던 오일러가 저렇게 과격하고 비논리적인 공격을 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이렇게 잘못된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오거스터스 드 모르간이 티보의 책에 실린 일화를 소개하면서 위와 같은 변형을 가하고 디드로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드 모르간의 저서에 실린 것이라 딱히 원전을 확인하지도 않고 이를 인용하는 바람에 진짜인 것처럼 널리 퍼져버린 것이다. 참고로 박부성 교수는 드 모르간이 착각했다고 여기는 듯 하다. 실제로 오일러가 당시 러시아에서 주로 활동했던 것이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점 등등 착각할 만한 요소들이 있었다고 한다.
- 2013년 4월 15일 구글 메인 화면의 로고는 오일러의 탄생일을 기념하여 그의 대표적인 발견들인 오일러의 공식과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건너기 문제, 복소평면, 도형 꼭지점의 오일러 정리 등으로 디자인되었다.
- “오일러가 초상화에서 머리에 쓰고 있는 게 뭔가요?”라는 질문은 온라인에서 종종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느슨한 옷을 입는 것이 사고력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으며, 학자들은 대개 느슨한 가운과 헐렁한 모자를 즐겨 썼다. 피보나치, 가우스 등도 초상화를 보면 가운과 헐렁한 모자를 쓰고 있다. 오늘날에도 졸업식 등 예식에 학자들이 걸치고 나오는 가운과 베레모가 바로 이러한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다.
[1]
이름인 Euler를 간혹 그대로 율러라고 읽는 사람이 있는데, 오일러가 옳다. (
독일어에선 eu가 '오이'로 읽힌다. 예를 들어 축구 선수
노이어의 철자는 Neuer이며,
로이스도 Reus이다. 그리고
도이칠란트의 철자 역시 Deutschland이다.) 참고로 똑같이 Eu로 시작하는 기관차
오이로슈프린터도
발음을 영국식으로 할지 독일식으로 할지 논의가 진행되었고 결국 독일식으로 하는 것으로 결정났다.
[2]
두 아내 모두 자매 사이로, 독일의 화가이자 생물학자인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외손녀들이다.
[3]
원주율
[math(pi)]의 경우, 오일러가 먼저 고안한 것은 아니고 대중화에 이바지한 것이다. [math(π)]를 처음으로 쓴 사람은
웨일스의 윌리엄 존스다.
[4]
지수함수와 삼각함수 간의 관계가 잘 드러나므로 미분방정식을 푸는 등의 상황에서 실용적이고 공학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5]
그 유명한
로피탈의 정리를 발견한 수학자다. 요한은
야코프 베르누이와 함께 흔히 '
베르누이 형제'라고 불리는데 형 야코프는 '
베르누이 부등식'과 '
큰 수의 법칙'을 발견했다. 다만 야코프가 '베르누이 부등식'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아니다.
[6]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들로, 외눈박이라는 상징성을 가진다.
[7]
시각 장애인이 됐을 때 "이제 양쪽 눈 시력이 똑같아져서 덜 헷갈리겠군."이라고 했다고 한다.
[8]
망망대해에서 배의 위치를 계산하기 위해서 태양과 달과 지구의 위치를 알아야 했다.
[9]
이러한 접근 방법을 연구하여 엄밀성을 더하고 확장한 것이
수치해석이라는 수학의 세부 분야인데, 이는 공학에서 굉장히 자주 사용된다. (물론 오일러가 수치해석적 방법을 최초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10]
그는 마지막 순간에 석판에 "나는 죽는다."라는 글을 유언처럼 남겼다.
[11]
점들이 특정 변들을 통해 연결된 그래프 위를 따라 붓을 종이에서 한번도 떼지 않고 모든 변을 딱 한 번만 지나는 경로를 찾는 문제이다.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를 풀기 위해 오일러가 만든 이 이론은 추후
위상수학의 시초가 된다.
[12]
특히 페르마가 세웠던 가설(현재는 정리)의 많은 부분을 증명했다. 대표적으로 페르마의 소정리가 있다.
[13]
오일러 공식([math(e^{ix} = \cos x + i \sin x )])에 [math(x=\dfrac{\pi}{2})]를 대입하면 우변은 [math(i)]로, 좌변은 [math(e^{i \frac{\pi}{2}})]가 된다. 복소수의 값을 계산하기 위해 지수함수와 삼각함수를 동시에 사용한 것이다.
[14]
참고로 답은 [math(\dfrac{\pi^2}{6})]이다.
[15]
그런데 제타 함수의 비밀(구로카와 노부시게 저, 정경훈 역)이라는 책을 보면, 오일러는 [math(\displaystyle \sum \frac{1}{{n}^3} = \frac{1}{1} + \frac{1}{8} + \frac{1}{27} + \frac{1}{64} + \text{...} \ )]의 값을 구했다고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오일러가 구한 [math(\zeta(3))]는 다음과 같다: [math(\displaystyle \zeta(3) = \frac{2\pi^2}{7} \log2 + \frac{16}{7} \int_{ 0 }^{ \frac{\pi}{2} }{ x \log (\sin x ) dx})]. 자세한 증명이 궁금하다면 이 책의 135쪽에 있는 부록 3을 참고하라.
[16]
현재는 이 값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폴리로그함수를 사용해 [math(-\dfrac{4}{3} \mathrm{Li}_{3}\left(-1\right))]로 표현할 수 있으며,
아페리 상수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17]
[math(\sqrt{a}\sqrt{b})]는 [math(a)]와 [math(b)]가 둘 다 음수인 경우에는 [math(\sqrt{a}\sqrt{b}=\sqrt{-1}\sqrt{-a}\sqrt{-1}\sqrt{-b}=\sqrt{-1}^{2}\sqrt{(-a)(-b)}=-\sqrt{ab})]이 된다. 둘 중 하나라도 0 이상이라면 그대로 [math(\sqrt{a}\sqrt{b}=\sqrt{ab})]가 성립한다.
[18]
출처:
https://www.springer.com/series/4854
[19]
그렇다고 오일러의 업적이 대단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페르마와 오일러 사이의 100년 동안 아무도 문제에 손을 대지 못했기 때문이다.
[20]
복소수를 도입했던 이유도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math(n=3)] 일때 증명하기 위해서 도입한 것이라고 한다.
[21]
계승함수라고도 불리며 실제로 이 함수는 고등학교때 배우는
! 기호의 확장이라고 할수있다. 시작은 자연수지만 복소수까지 확장했다는 신비함.
[22]
자연수의 역수의 제곱꼴의 합으로 정의되며 조화급수라든가 바젤문제도 이 함수의 특수한 경우이다.
복소해석학을 배우기 전에는 아무리 살펴봐도 정의역은 x>1인 실수 밖에 안될 것 같지만 정말로 신기하게 x=1이 아닌 모든 복소수에서 정의되도록 복소해석학에서는 조작을 가한다. 이는
베른하르트 리만의 업적.
[23]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라고 불리며 감마라고 읽는다. 우연히 감마 함수와 연결된 거 같지만, 원래 오일러는 이 상수를 C라고 썼지만 나중에 카를 안톤 브레치나이더(Carl Anton Bretschneider)에 의해 감마 함수와 많은 연관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math(\gamma)]라고 이름지어졌다. 정의는 간단하지만
지면이 부족하므로 생략하자. 이 수가
유리수인지
무리수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24]
한 분야가 다른 분야와 이어지는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우리가 고등학생때 지겹게 배우는 좌표평면, 좌표공간이 바로 그 예다. 실제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증명될 때 증명의 주인공인
앤드루 와일스는 사실상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직접 증명한 것이 아니라, '
타니야마-시무라의 추측'을 일부분 증명한 것으로써
타원곡선과 모듈러를 연결시키고, 수론과 타원곡선을 연결시켜 결론적으로 모듈러로 수론을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그 정리를 증명하였다.
[25]
미분은 어떤 함수를 분석하는 데에는 최고의 무기이다.
[26]
요즘 표현으로 고치자면 [math(p \in \mathbb{P})].
[27]
길쭉한 기둥이 축 방향 힘을 받았을 때 찌그러지기 전에 옆으로 휘어버리는 현상을 말한다.
버클링 스프링 방식 키보드는 이 원리를 이용한 것.
[28]
오일러는 이 기호를 한참 쓰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사용했는데 그 이전에 i는
무한대(현재는 ∞를 사용함)를 뜻했기 때문이다. 이게 대중적으로 쓰이게 된건 가우스가 자기 책에서 이 기호를 채택한 이후다.
[29]
당대에는 오일러를 따라서 많이 쓰던 표기법이었으나 후에는 [math(\ln)][math(x)], [math(\log)][math(x)] 등으로 쓰게 되었다.
[30]
출처: "Journey Through Genius", 210페이지, ISBN 014014739X. 한국에 "수학의 천재들"이라는 제목으로 경문사에서 편역판을 냈는데 어이없게도 편역자의 이름만 써놓고 책에 원저자인 던햄 교수의 이름을 써놓지 않았다. 불과 10여년전까지 한국 수학계의 몰상식, 몰염치한 현실이었다. 대다수의 수학 교재들이 사실상 해외의 유명 서적을 편역한 수준에 불과했는데, 원 출처 따위는 써놓는 일 없이 사실상 책을 표절한 국내 수학 교수들의 이름만 자랑스럽게 표지에 저자로 나열해 놓았다. 그나마 저작권법이 강화된 최근에야 이런 일이 근절되어 가고 있다.
[31]
자주 나오는 1/1 + 1/4 + 1/9 + 1/16 + ... = pi제곱/6을 증명한게 오일러다.
[32]
n=3일 때만 증명에 성공하였지만, 이도 페르마의 대정리가 나온 뒤 100년이 지나서 나온 첫 결과인 만큼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33]
사원수를 개발해낸 수학자이다. 실제로 산책중에 다리를 지나다니던 중 갑자기 i^2 = j^2 = k^2 = i*j*k = -1을 다리에다가 적은 후 엄청나게 기뻐했다는 듯.
[34]
수학적 재능은 차치하고 언어적으로만 봐도 13살에 라틴어와 고대 희랍어, 히브리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등을 하였다.
[35]
19세기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
[36]
박부성 교수의 저서인 <천재들의 수학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