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월 쩐 왕조의 추존 황제 진승(陳承)에 대한 내용은 쩐투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80><colcolor=#ece5b6> 장초의 은왕(隱王)
진승 | 陳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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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3세기 | ||
진나라 남양군(南陽郡) 양성(陽城) | |||
사망 | BC 208년 | ||
하성보(下城父)[1] | |||
능묘 | - | ||
재위 | 장초의 왕 | ||
BC 209년 ~ BC 208년 (6개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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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 성 | 진(陳) | |
휘 | 승(勝) | ||
자 | 섭(涉) | ||
묘호 | - | ||
시호 | 은왕(隱王) | ||
공치제 | 가왕(假王) | }}}}}}}}}}}} |
1. 개요
진(秦)나라 말기 농민봉기의 주도자. 자는 섭(涉).무능한 황제인 호해와 환관 조고 때문에 몰락해가던 진나라에서 진승·오광의 난을 일으켜 결정적 몰락의 원인을 제공한 중국의 반역자이다. 동양 역사상 최초의 민중 혁명가[2]이자 초한전쟁의 계기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중국의 유일한 공치제(2인 군주)로 그의 공치제는 가왕 오광이다.
2. 생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과진론에 의하면, '찢어지게 가난한[3] 집안 출신에 한낱 농사를 짓는 노예로 살았다'고 한다.그러나 평소 호방하고 보스 기질이 충분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지며, 소작농으로 전전하던 시절부터 허풍을 잘 떨어 그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연작(燕雀, 제비와 참새)이 어찌 홍곡(鴻鵠,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겠느냐(燕雀安知 鴻鵠之志哉)는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은 현재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느냐." 등으로 변용되어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만리장성 축조에 동원되어 목적지로 향하던 중 큰 비 때문에 900명이 함께 고립되어 기일에 맞춰 도착할 수 없게 되었는데, 당시 진나라는 법가 사상에 따라 지나치게 엄격한 법 집행으로 악명이 높았다. 예정된 기일보다 늦게 도착한 것만으로도 목이 날아갈 상황이었고, 진승은 이왕 죽을 바에 한 번 뒤집어보고 죽자는 생각으로[4] 프로파간다를 퍼트렸다. 봉기에 앞서 비단천에 '진승왕'이라고 붉은 글로 쓴 후 물고기 배 속에 넣었던 것. 사람들이 그 물고기를 사다가 배를 가르니 '진승왕'이란 글이 적인 비단천이 나왔고 부하를 시켜 여우 목소리를 흉내내 "진승이 왕이 되어 초나라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라고 말하게 했다. 함께 고립된 다른 사람들도 진나라 법에 의하면 죽을 목숨인 걸 알고 공포에 떨고 있었으므로, 그 와중에 이런 신이한 일을 겪자 모두들 진승이야 말로 하늘이 돕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 후 부하들의 신뢰를 얻은 진승은 동료 오광과 함께 초나라의 장군을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남긴 말이 그 유명한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더냐(王侯將相寧有種乎).[5] 이후 스스로 '초를 부흥시킨다'라는 의미로 국호를 '장초'(長楚)라 짓고 왕위에 올랐으며, 친구 오광을 가왕(假王)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진나라 진압군과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해 오늘날의 허난 성 지방 일대의 여러 고을을 차지했다. 단지 세력만 넓히는 게 아니라 진시황이 쫓던 당대의 명사 장이, 진여를 포섭해 휘하에 두어 세력을 확대시켰으며, 자신이 진시황의 적자이며 억울하게 죽은 부소 황태자, 또는 옛 초나라의 명장인 항연[6] 장군이라고 선전해 많은 무리가 호응하였다.[7]
진승의 반란에 편승하여 진나라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밀고 와 기세를 크게 올리고 각지에서 군세를 일으켰다. 이후 초한쟁패기의 주인공인 항우나 유방도 이 무렵에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진승은 일개 농민 출신이었고, 역사적 유명인들을 사칭하는 것도 처음 잠깐 이후론 안 통했기 때문에 무수한 반군 세력을 통합하여 하나로 통솔할 수 있는 권위가 없었다.[8]
6국의 후손들은 진승에게 굳이 복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부하들도 점점 진승을 이탈하게 되었다. 부하 무신(武臣)이 조왕(趙王)을 사칭하며 배반을 했고, 또 다른 부하인 주문이 함곡관에서 진나라의 명장 장한에 의해 패퇴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몰락의 조짐이 보였다. 더욱이 친구 오광마저 부하의 배신으로 죽자 실의에 빠지게 되었고, 진군의 대대적인 공략에 의해 수세에 몰린 끝에 결국 자신의 마부[9]에게 살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자세한 전개는 진승·오광의 난에서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패배자가 되었지만 그의 행동이 마냥 헛되지는 않았다. 진나라의 멸망 및 훗날 전한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초한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3. 평가
진승의 패배는 당연한 것이다. ("아니 왜?") 진나라가 6국을 멸망시킬 때 초나라가 그 원한이 가장 컸다. 회왕(懷王)이 진에 들어가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나라 사람들은 지금도 (이를 떠올리면) 분격한다. 그래서 남공(南公)은 "시발, 초나라가 초가집 세 채만 남을 정도로 쇠락하더라도,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건 반드시 초나라가 되리라(楚雖三戶 亡秦必楚)!" 한 것이다. 진승이 초나라에서 거사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게 다 진나라의 폭정에…") 아니다. 초나라 사람들은 진승이 회왕의 한을 풀어주리라 착각했기 때문이다. ("착각?") 사람들은 진승이 회왕의 후손을 세워 초나라를 다시 일으킬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왕을 칭했으니 그 기세가 오래 가지 못한 것이다.[10]
범증이 항량에게 출사하기 직전 한 말
범증이 항량에게 출사하기 직전 한 말
- 진승·오광의 난과 왕후장상 영유종호의 고사를 연구하면 절대로 누락되지 않는 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진승의 몰락과 패배이다. 그 과정은 왕후장상 영유종호의 주장을 실력주의란 요지에서 더 확장된 의미로 오해하지 않게끔 강조하는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해당 고사를 설명하는 중문학자나 전문가들은 진승이 자신의 그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는 것을 왜곡이 있을지언정 반드시 부연하는 경향이 있다.
- 문학서나 대중서는 대개 진승이란 인물을 민중을 해방하고 압제에 대항하려는 순수하고 능력있는 효웅이었으나 권력욕과 오만함에 방자해져 타락하고 끝내 죽었다는 식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진승에 대해 대다수 자료를 제공하는 《 사기》 〈진섭 세가〉의 내용과도 다르고 근현대 사가들의 분석과도 다르다. 진(陳)에서 장초왕을 자칭한 과정과 그 뒤 부하들의 연이은 반란에도 불구하고, 후방에 안주하여 직접 전선에 나서지 않았단 사실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소작농인 진승이 갑옷을 걸치고 칼을 들었지만 상위 계급의 전유물인 승마와 전차 조종을 직접 할 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해석한다. 앞서서 사열하고 전선에서 부대를 선도할 가장 기본적인 능력과 그 능력으로 표현되는 권위를 호소할 방법이 없었기에 전선으로 나가고 독립해버린 부하들을 뒤쫒아 직접 통제할 수단이 없었으리라는 분석은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진나라의 장한이 장초의 수도를 공격하자 도주하게 된 진승은 그 때도 직접 수레를 몰지 않았고 그의 마부의 손에 죽었다.
- 사마천은 《 사기》에서 진승에 대한 박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를 단순한 반란 주동자로 기록하지 않았으며, 제후들을 기록하는 〈세가〉에 그를 당당하게 기록해 놓았다. 진승은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타도에 실패했지만 진승이 분봉한 제후들과 장상들이 결국 진나라를 몰락시켰다는 점에서 〈세가〉 범주에 포함시킨 것 같다. 진승이 왕이라 칭할 수 있었던 기간은 고작 6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가 일으킨 반란을 시작으로 그 휘하에 있던 장졸들이 결국에는 진 제국을 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사마천이 진승을 달리 보는 것이다. 한고제도 진승을 반진(秦)항쟁의 선구자로 높이 보아 그의 무덤에 사람을 두어 관리하게 했고, '은왕'(隱王)이라는 시호도 내려주었다. 무덤은 망탕산에 위치해 있다.
-
진승이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옛 친구가 찾아왔는데, 허름한
옷차림 때문에 병사들에게
문전박대당하는 그를 진승이 반갑게 맞이하여 궁궐에서 왕래할 수 있게끔 하였으나, 일자무식 농부 친구는 궁궐에서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으려고 진승의 과거를 재미삼아, 그것도 여러 번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다가 이것이 진승의 귀에 들어갔다. 진승은 왕을 모욕했다며 크게 분노했고, 결국 옛 친구를 처형했다고 한다. 이는
사마천의 《
사기》 〈진섭 세가〉에 적힌 일화이다.
김태권은 이 일화가 과거에 자신을 박대한 사람에게 오히려 벼슬을 주고 등용한
한신과 대조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혹자는 이 일화를 '전제군주 시절 무슨 이유로든 간에 왕을 욕보이는 것은 크나큰 죄였고, 엄벌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므로 사마천이 진승이 아니라 그 옛 친구를 비난하기 위해 적었다'라고 해석하나 《사기》 〈진섭 세가〉 본문에도 이 일이 있자 많은 사람들이 진승을 버리고 떠났다고 쓰여 있다. 즉 진승의 옹졸함을 비난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 춘추전국시대 내내 중국의 귀족사회는 왕족 및, 귀족이라도 따지고보면 왕족 방계가 대다수를 차지하여, 계통으로 보면 주나라의 희(姬)성 계열, 진·조나라의 영(嬴)성 계열, 순임금의 후예로 전해지는 진(陳)·제나라의 규(嬀)성 계열, 상나라의 후예인 자(子)성 계열[11] 크게 이 4계통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던 고인물이었으나, 혈통이나 돈·인맥 등 아무런 기반도 없는 진승이 스스로 왕을 칭하기 시작하면서, 중화권의 역사는 서양권과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서양권에서는 2천 년이 지나 근대까지도 자신이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아서 왕에 오르려는 경향이 이어지지만,[12] 중화권에서는 이후 '쟤도 왕 하고자 하는데 내가 못 할 소냐' 라며 왕족, 귀족이 아니더라도 너도나도 왕 자리에 도전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그래서 남북조시대쯤 되면 귀족 가문들의 족보를 정리한 씨족지에서 왕가가 귀족보다도 더 가문의 격이 낮게 평가되는 아이러니한 일도 벌어졌다. 당나라 때까지도 마찬가지라서 씨족지의 최상급 가문에 이씨 황실이 없자 황제가 압력을 넣어 최상급 가문에 넣는 일도 있었다. 문벌귀족(중국) 문서를 참조하면 좋다.
- 현대 중국 정부에서는 인민 봉기의 선구적인 인물로 보고 매년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 청나라의 사상가 서계여(徐繼畬)는 조지 워싱턴이 미국 독립 전쟁을 일으킨 것을 두고 진승, 오광과 같았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진승과 다르게 2번째 임기를 끝마친 후 대통령 자리를 내려놓은 행보는 자치통감에서 말하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을 따른 것이라고 평가했다.
4.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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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
안후이성
워양현 동남쪽 일대로 비정된다.
[2]
황금가지에서 정식으로 낸 쿠보다 센타로 원작 일본만화 《만화로 읽는 사기 1-항우와 유방》에선 세계 최초의 민중 혁명이라고 나왔지만 사실 이보다 200여 년 전 로마나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기에 기록상 세계 최초는 아니다.
[3]
원전(元典)의 옹유승추(瓮牖繩樞)를 말하며 그 뜻은 ‘깨진 항아리의 주둥이를 끼워 넣어 창문으로 삼고, 새끼줄을 엮어 문지도리를 만든다’는 뜻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를 일컫는 말.
[4]
진승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 문제였으니 심란했는지 저지르기 전에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봤는데, 일이 성공할 것이라는 좋은 점괘를 받았다. 다만 이게 좋은 점괘인지는 의문인데 성공하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지만 성패는 '귀신'에게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앞구절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뒷구절도 사실상 나는 모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당연한 것이 진승이 무당이라도 되는 게 아닌 이상 귀신에게 물어볼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5]
이는 고려시대
만적의 난 때에도
만적이 인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 말의 서양 버전 명대사는 1381년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와트 타일러의 난 때의 유명한 구호인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길쌈하던 시절에, 대체 귀족은 누구였나?(When Adam delved and Eve span, Who was then the gentleman?)" 다만 뉘앙스가 좀 다른데 진승은 신분제를 부정하지 않고 대신 우리가 그 자리에 앉겠다는 목표를 드러낸 반면 여기서는 신분제를 부정하는 뉘앙스가 있다.
[6]
항우의 할아버지이다.
[7]
흥미롭게도 항연이야 반진의 상징이라 쳐도 명백히 진나라의 태자인 부소를 사칭했다는건 그만큼 부소가 육국에서 그다지 나쁘게 비쳐지지는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8]
훗날
항량은 이 점을 보완하여 초나라 미성 웅씨 왕실의 후예
초회왕을 의제로 옹립하여 권위를 삼았다. 그리고
조카놈이 말아먹는다
[9]
이름이 장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 진승의 시종이었던 여신에게 살해당한다.
[10]
이 부분에서 진승이 거사하기 직전 점쟁이가 말한 '귀신에게 함 물어보슈'가 무슨 뜻인지 명확해진다. 진승은 귀신(이 된 회왕)의 한을 푸는 대신 자신이 왕이 되었고, 그 결과 실패한 것이다. 또한, '왕후장상 영유종호'란 구호 속에 숨어있는 함정도 이 말로써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말은 진나라만을 노린 게 아니라
나머지 6국에게도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그리고
먼저 왕을 칭한 진승에게도 이 말이 적용될 수 있음을…….
[11]
초나라는 묘족에서 출발했으므로 제외
[12]
서양권은 어쨌든 왕위를 주장하려면 왕가와의 혈연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했다. 물론 귀족이 왕위에 오르는 경우도 없는건 아니었지만 이 경우도 전국시대처럼 기존의 제후국 수준의 나라가 자국을 왕국으로 승격시키거나 어쨌든 혈연을 근거로 독립하는 거지 쌩 듣보잡이 왕이 되지는 않았다. 심지어 나폴레옹조차 지방 귀족으로 완전 듣보잡은 아니었다. 물론 이 정도면 당시 유럽에선 듣보 수준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