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말의 동아현령에 대한 내용은 조지(삼국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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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至
생몰년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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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경진(景眞) → 양화(陽和)로 유주 대군 사람.2. 생애
그의 선조는 한나라 말에 구지현에서 방랑했고 12살 때 현령이 새로 부임해 어머니와 함께 그 현령을 보았는데, 어머니가 너의 선조는 미천한 집안이 아니라면서 나중에 이 사람처럼 될 수 있겠냐고 묻자 될 수 있다고 대답했다.그 이후 스승을 찾아가 공부했고 아버지가 밭을 갈면서 소에게 소리치는 소리를 듣자 책을 놓고 울었는데, 아버지가 물으니 아버지를 고생시켜서 마음 아프다고 했다. 14살에 태학관에 입학했고 혜강이 석경의 고문을 쓴 후에 떠나려 하자 풍격이 비상하다고 여겨 혜강에게 이름을 물었으며, 15살 때에는 병든 척 해 자주 미친 듯이 달리곤 해서 집안 사람들이 쫓아가 그를 데려왔다.
16세에 집을 떠나 낙양으로 가서 혜강을 찾으려 했지만 그를 찾지 못하고 업에 이르렀는데, 사중화에게 의탁했고 이름을 날리자 이름을 익(翼), 자를 양화로 바꿨다. 혜강이 업에 오자 태학관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혜강을 따라 산양으로 돌아가 몇 년을 보냈다.
키가 7척 3촌으로 흰 얼굴, 검은 머리, 붉은 입술, 맑은 눈을 가졌고 수염은 많지 않았으며, 침착하고 세심하면서 몸가짐이 공경스럽고 겸손했으며, 논변이 유창해 훌륭한 재주가 있었지만 스스로는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맹원기가 그를 요동종사로 삼자 군에 있으면서 많은 송사를 판결해 청렴하고 공정하다는 칭송을 받았으며, 양친을 버려두고 멀리 떠돌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도 찾아가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면서 피를 토하고 병이 들어 상의 기간이 끝나기 전에 사망했다.
세설신어에서 혜강이 백기의 풍모가 있지만 그릇이 협소한 것이 애석하다고 하자 조지가 이에 대해 한 자의 해시계로도 천체의 운행의 표준을 잴 수 있고 한 촌의 피리로도 사시의 오가는 기운을 헤아릴 수 있으니 어찌 반드시 커야 하냐면서 식견이 어떠한가를 물을 따름이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