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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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趙明생몰연도 불명
후조의 인물. 자는 현소(顯昭).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출신. 서진 시기 동래태수 조팽(趙彭)의 아들.
2. 생애
가평 3년(313년) 4월, 한(漢)의 기주목 석륵이 장수 석호를 보내 업(鄴)을 함락시켰다. 석륵은 우장사 장빈의 건의에 따라 조팽을 위군(魏郡)태수로 삼아 업의 통치를 맡기려 하였는데, 조팽이 진나라의 녹을 먹었던 몸으로 그러할 수 없다며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석륵은 조팽의 충절을 기특히 여기고, 그 뜻을 존중해 조팽 대신 그 아들 조명을 참군으로 삼아 등용하였다.건평 원년(330년) 12월, 명제 석륵이 붕어하고 승상 석호가 정권을 잡자 조명은 상서로 승진하였다. 이후 석호가 석륵의 여러 아들들을 주살하기 시작하니, 조명이 석호에게 나아가 간하였다.
"조(趙)의 태조이신 명제의 공적은 황천(皇天)에 닿을진대, 어찌하여 그 대를 끊으려 하십니까."
이에 석호가 답하였다."이것은 우리 집안의 일이니, 경은 아무 말도 말라."
조명은 이후로도 석호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으면서 번번이 그의 심기를 거슬러 10여 년간 승진을 못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조명이 정도를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고 가히
소칙에 필적한다며 높이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