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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00년 6월 13일 ~ 6월 15일 | |
장소 | 평양시 | |
주최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참석 | 남 | 북 |
대통령 김대중 | 국방위원장 김정일 | |
영부인 이희호 | 위원장 부인 공석[1] | |
결과 | 6.15 남북공동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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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대한민국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 평양에서 진행한 회담.2.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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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위원장은 박재규 전 통일부장관이었으며, 외교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국무조정실장, 청와대 경제수석·외교안보비서관 등이 위원에 포함됐다. 준비기획단엔 통일부 차관(단장)과 각 정부부처 차관급 및 청와대 경호처장·의전비서관 등이 참여했다.
1948년 한반도가 분단된 이후로, 두 당국의 대표가 처음으로 만난 회담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은 남북한관계사의 이정표로 남을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다. 한반도 평화 조성과 햇볕정책의 결실과도 같은 이 회담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애 전반에 걸친 한국 민주화 운동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것에 영향을 미쳤다.
정상 회담 이후 남북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북한의 남한 주최 스포츠 경기 행사 참가 등 민간 교류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남북 당국 간 회담이 지속했으며, 북한은 일본, 미국과도 화해 분위기를 유지하며 국교 정상화 교섭에 나섰다. 김정일의 조기 서울 방문도 예견됐으나 국제 정세의 급변 및 대한민국 국민 정서에 의한 국내의 반감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3. 6.15 남북공동선언
자세한 내용은 6.15 남북공동선언 문서 참고하십시오.4. 여담
- 당시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회담의 진행과정과 성과 등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하여 일반에 공개했다. 15대 청와대 웹기록 참고.
- 남북이 회담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북한 측이 남한 측 인사들에게 금수산태양궁전 참배를 끈질기게 요구한 것이 밝혀졌다. 결국에는 철회되었지만 이 사실이 대중들에게 바로 알려졌다간 사회 분위기도 그렇고 어렵게 조성해 놓은 남북관계가 깨질게 분명해서 숨겼다가 회담 후 4년 후인 2004년에 공개했다.
-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측은 조선일보와 KBS의 북한 방문을 불허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에 기자들을 무조건 태우라고 지시했고, 결국 조선일보와 KBS도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평양에 도착해 정상회담을 취재할 수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남한은 민주국가이다. 민주국가에서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정상회담을 하는 것 자체가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고 누가 수행취재를 가느냐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취재기자 선별까지 양보하면서 정상회담을 할 필요는 없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 회담을 진행하기로 해놓고 정작 북한이 준비에 매우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당시 청와대와 국정원 내부에선 북한의 법적 국가원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비관이 나왔다고 한다. 실제로 준비협상에서 북한에서도 그런 운을 계속 띄웠기 때문에 회담의 의미가 크게 퇴색되는 것 아니냐는 기류가 형성됐다. 그러다가 출발 3일 전 새벽 북한에서 '궁중요리를 먹어볼 수 있는가?'라는 급전이 들어오자 김정일이 직접 나온다는 판단 아래 분위기가 급변했다. 왜냐하면 저렇게 뜬금 없이 궁중요리를 먹을 수 있냐는 질문은 유일하게 김정일만 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가능하다는 답전을 보냈고, 해외 출국이 예정돼 있던 궁중요리 전문가 한복려를 설득[3]해 궁중요리 만찬을 준비했다.
- 이렇게 어려운 과정 속에 섭외된 한복려는 롯데호텔, 워커힐호텔, 신라호텔, 국립극장 지화자 식당의 조리사들을 구성된 특별 셰프팀을 이끌고 방북하여 만찬용 음식을 준비하였다. 요리 연구가로서 방북한 김에 북한 음식 문화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인민들의 일반적인 음식은 당연히 맛볼 수 없었으나, 연회용 음식을 먹어보고 간은 싱거웠고 맛은 담백했는데 사흘째 식사를 하고나서야 그 깊은 맛을 느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의외로 서양 요리와 중국 요리의 강한 영향력을 확인하였다. # 한편 북한 측은 냉면 비법까지 가르쳐줄 정도로 대단히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
- 회담을 진행하면서 외교 관례에 따라 남북간의 선물을 교환하였다. 이 중 화제를 모은 것이 바로 개였다. 남한에서는 북한에게 '평화'와 통일'이라는 이름의 진돗개 한 쌍을, 북한에서는 남한에게 '자주'와 '통일'이라는 이름의 풍산개 한 쌍을 선물하였다. 이 중 풍산개는 남한으로 들여온 후 '우리'와 '두리'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풍산개들은 과천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사육하다가 2013년에 노환으로 자연사했다. 북한에 보낸 진돗개들은 평양의 조선중앙동물원에서 사육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제기한 것에 감사를 나타내고 남북 정상회담에서의 합의가 김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대단한 승리라고 칭송하기도 했다.[4]
- 한국에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당시 북한에 생존해있던 6.25 국군포로들은 귀환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993년 비전향 장기수였던 리인모가 북한으로 송환되어 자신들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자신들의 송환과 관련된 아무 내용도 없자 자신들이 조국에게 잊혀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국군포로들은 크게 절망했다고 한다. 한 국군포로 자녀 탈북민의 아버지는 창고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한다. # 정작 남한 내 비전향 장기수 63명은 6.15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북한으로 송환되었는데 그 대가로 국군포로의 송환을 추진하지 않은 것은 지금까지도 크게 비판받고 있다. 당시 국군포로들은 60-70대의 나이였으므로 송환되었다면 그나마 남은 여생을 고향에서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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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괄호 안의 연도는 북한의 주장에 근거한 연도이며, 실제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단체 및 사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연도일 수 있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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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김정일에게는 비공식적인 부인
고용희가 있었지만 여러 이유로 인해 전면에 등장하지는 못했다.
[2]
아마
대한민국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맡아 당시 문화관광부의 장관이 발표를 한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현재에도 대한민국 정부의 대변인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다.
[3]
당시 한복려는 프랑스 파리의 리츠 파리 호텔에서 전통 한식과 궁중 요리를 소개하는 행사에 참석할 계획이었고, 여기에는 프랑스 문화 당국의 장관과 대통령 참석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 청와대에서 한복려에게 연락을 했을 때 해외의 국가 원수가 참석하는 행사가 선약되어 있어서 정상회담 준비에 응할 수 없다고 거부했었다. 그러자 당시 외교 당국이 급히 총동원돼 프랑스 대통령궁과 직접 교섭해 양해를 받았고, 이를 한복려에게 전달하자 마지못해 응했다고 한다.
[4]
김대통령 핵,미사일 등에 대해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