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00:58:00

윌리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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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윌리엄 1세
(William I)
출생 1028년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팔레즈
사망 1087년 9월 9일 (향년 58세)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루앙
재위기간 노르망디 공작
1035년 7월 3일 ~ 1087년 9월 9일
잉글랜드의 왕
1066년 12월 25일 ~ 1087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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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별칭 정복자 (Le Conquérant / The Conqueror)
사생아 (Le Bâtard / The Bastard)
아버지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
어머니 아를레트 드 팔레즈
배우자 파일:800px-Blason_Comte-de-Flandre.svg.png 플랑드르의 마틸다 (1051년 결혼 / 1083년 사망)
자녀 슬하 4남 4녀
로베르 2세, 리처드, 아델리자, 세실리아, 윌리엄 2세, 콘스탄스, 아델라, 헨리 1세
종교 가톨릭 }}}}}}}}}
파일:william.jpg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나오는 한 장면.[1]
<colbgcolor=#810000><colcolor=#fadb43> 고대 노르만어 Williame I
고대 영어 Willelm I
영어 William I
프랑스어 Guillaume I
라틴어 Gulielmus I / Willelmus I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시련기2.3. 플랑드르의 마틸다와의 결혼2.4. 세력 강화2.5. 잉글랜드 원정2.6. 거듭되는 반란 및 외세의 침략과 윌리엄의 수습2.7. 돌 전투의 패배와 장남 로베르의 반란2.8. 말년
3. 가족 관계
3.1. 자녀
4. 평가5. 여담

[clearfix]

1. 개요


노르망디 공국 4대 공작, 잉글랜드 왕국 노르만 왕조 초대 군주. 유럽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를 정복한 최후의[2] 노르만 정복이 마지막 잉글랜드 정복으로 알려졌으나, 엄밀하게 따지면 최후의 잉글랜드 정복은 명예혁명이라 볼 수 있다. 물론 본인이 직접 무력을 일으켜 잉글랜드를 정복한 이민족 군주로는 진짜로 윌리엄 1세가 마지막이다. 또한 아직도 영국 왕족의 뿌리는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이 표현이 적절하기도 하다.] 정복자였다.

프랑스식 이름은 기욤으로 노르망디 공작으로는 기욤 2세다. 하지만 기욤은 현대 프랑스어 형태이고, 당시 노르만인들이 쓰던 고대 노르만어 기록에는 Williame, 앵글로색슨족 고대 영어로는 Willelm이다. 전자의 경우 윌리아므, 후자의 경우 윌렐름 비슷한 발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3] 보통 정복왕 윌리엄으로 알려졌으나 사생아이라는 별명도 있다.

2. 생애

2.1. 유년기

아버지는 노르망디 공국 3대 공작 로베르 1세이고, 어머니는 아를레트 드 팔레즈다. 출생지는 팔레즈로 전해지는데, 아마도 팔레즈 성이 아니라 팔레즈의 마을에 있는 어머니의 집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언제 출생했는지는 불분명하다. 11세기와 12세기 노르망디 수도자이자 역사가 오더릭 바이탈(Orderic Vital, 1075 ~ 1141/1143)에 따르면, 윌리엄이 사망할 당시 64세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윌리엄은 1023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탈은 아버지 로베르 1세가 예루살렘 순례를 떠났을 때 윌리엄의 나이는 8살이었다고 기술했는데, 이에 따르면 1027년생이었을 것이다. 12세기 잉글랜드 수도자이자 베다 이후 중세 잉글랜드 최고의 역사가로 손꼽히는 맬스버리의 윌리엄(William of Malmesbury, 1095 ~ 1143)은 아버지가 예루살렘으로 떠났을 때 윌리엄의 나이는 7세였다고 기술했다. 이에 따르면, 윌리엄은 1028년생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라틴어 사본인 데 오비투 윌렐미(De obitu Willelmi, "윌리엄 왕의 죽음")에 따르면, 윌리엄은 59세의 나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1027년 또는 1028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현대 학자들은 대체로 1027년에서 1028년 사이에 출생했을 거로 추정한다.

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윌리엄의 어머니 아를레트는 '폴린크토르(polinctor)', 즉 방부 처리업자였던 팔레즈의 풀베르트(Fulbert of Falaise) (976년 ~ ?)의 딸이라고 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의 역사교수이자 노르만 시대 전문 역사가 데이비드 찰스 더글러스(David Charles Douglas, 1898 ~ 1982)와 프랑스 역사가 알랭 드 부아르(Alain de Bouard, 1882 ~ 1955)는 오더릭 바이탈의 저서에서 기술된 라틴어 단어는 'pelliciari'의 오기이며, 풀베르트는 의류 재단사 또는 무두장이였다고 밝혔다. 이는 12세기 프랑스 시인 브누아 드 생트모르(Benoît de Sainte-Maure, ? ~ 1173)가 노르망디 공작을 주제로 한 시에서 풀베르트를 옷을 재단하는 사람인 'peletier'(팔레티에라)로 묘사한 데서 착안한 추론이다. 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풀베르트는 로베르 1세가 자기 딸 아를레트를 정부로 삼은 덕분에 노르망디 궁정의 시종이 되었다고 한다.

로베르 1세가 아를레트를 정부로 삼은 과정에 대해 여러 전승이 전해진다. 한 전승에 따르면, 로베르 1세는 말을 타고 돌아가던 중 아를레트가 팔레즈 성 기슭에 있는, 나중에 "La Fontaine d'Arlette"(아를레트의 분수)로 일컬어지는 강어귀에서 빨래하던 걸 보고, 그녀가 맨다리를 드러낸 모습에 반하여 정부로 삼았다고 한다. 또다른 전승에 따르면, 아를레트는 다른 어린 소녀들과 함께 들판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었는데, 이때 로베르 1세가 창가에서 그녀를 보고 정부로 삼았다고 한다. 로베르 1세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외아들 윌리엄을 낳았다.

윌리엄에게는 1026년경에 출생한 아들라이드라는 누이가 있었지만, 아들라이드의 정확한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로베르 1세와 아를레트 드 팔레즈의 딸일 수 있고, 알려지지 않은 정부의 딸일 수도 있으며, 아를레트와 에르뤼앙의 자녀일 수도 있다. 그녀는 나중에 윌리엄 1세에 의해 오말레 여백작이 되었으며, 볼로뉴 백작 외스타슈 1세의 둘째 아들인 랑베르 2세 드 랑스와 초혼, 트루아, 모, 샹파뉴 백작 외드 3세와 재혼, 퐁티외 백작 앙게랑 2세와 삼혼했다.

아를레트는 나중에 센 강 하구 남쪽의 소규모 영주인 에르뤼앙 드 콩테빌(Herluin de Conteville, 1001 ~ 1066)과 결혼했다. 언제 결혼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두 가지 가설이 제기된다. 하나는 로베르 1세가 아를레트에게 싫증을 느끼고 그녀를 에르뤼앙과 결혼하도록 해줬다고 한다. 두 번째 가설은 로베르 1세가 사망한 뒤 아를레트가 에르뤼앙과 결혼했다고 한다. 아를레트는 에르뤼앙과의 사이에서 로베르 드 모르탱과 오돈 드 바이외를 낳았다. 두 형제는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원정에 동참했으며, 로베르는 모르탱 백작 및 콘월 백작을 역임했고, 오돈은 바이외 주교이자 켄트 백작을 역임했다. 한편, 아를레트에게는 오스베른(Osbern)과 고티에(Gautier)라는 두 형제가 있었다.

1034년, 로베르 1세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많은 연대기 작가들은 그가 형제 리샤르 3세를 독살한 것을 참회하려고 순례를 결심했다고 기술했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그는 떠나기 전에 귀족들을 페캉에 소집한 후 어린 아들 윌리엄을 후계자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루앙 대주교 로베르, 지역 주교, 대영주 모두가 기욤에게 충성하겠다고 맹세했다. 사실 많은 귀족은 사생아인 윌리엄이 후계자가 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로베르 1세의 분노를 살 것이 두려워서 마지못해 따랐다. 그 후 로베르 1세는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의 궁정에 아들을 맡기고, 브르타뉴 공작 알란 3세를 아들의 대부로 삼았다. 그러나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귀국 중이던 1035년 7월 2일 니케아에서 병사했다.

2.2. 시련기

로베르 1세가 니케아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윌리엄은 큰삼촌인 루앙 대주교 로베르,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의 지원을 받은 덕분에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1037년 3월 로베르 대주교가 사망한 뒤, 많은 노르망디 귀족들은 사생아 출신인 어린 공작에게 복종하길 거부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여러 친척이 귀족들에게 자기를 공작으로 추대하라고 부추겼다고 한다. 브르타뉴 공작 알란 3세는 윌리엄의 대부로서 그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노르망디에 개입했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어머니를 통해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의 진정한 후계자라고 자처했다. 그러던 1040년 10월 1일, 노르망디 원정에 착수했던 알란 3세가 비무티에에서 중독이 의심되는 증세를 보이며 사망했다.

이후 로베르 3세의 사촌이었던 브리온 백작 질베르 드 브리온(Gilbert de Brionne, 1000 ~ 1040)이 노르망디 보안관을 맡아 윌리엄을 대신해 노르망디를 다스렸지만, 그 해 3월 루앙 전임 대주교 로베르의 아들인 라울 드 가스(Raoul de Gacé, ? ~ 1051)의 사주를 받은 자객의 습격으로 암살당했고, 라울 드 가스가 노르망디 보안관을 맡았다.이때 윌리엄의 스승이었던 투르체틸도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1040년 또는 1041년에 보드레이유에서 윌리엄의 침실을 습격한 자들에 의해 노르망디 총독 오스베른 드 크레퐁이 살해되었고, 윌리엄도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11세기 연대기 작가 기욤 드 쥬베이쥬( Guillaume de Jumièges, ? ~ 1070)에 따르면, 오스베른을 살해한 범인은 몽고베리 영주 로제 1세의 아들 기욤이었다고 한다. 이후 윌리엄의 외삼촌인 고티에는 조카를 가난한 사람들의 오두막에 숨겨서 자객이 침입하는 걸 막아줬다.

윌리엄이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동안, 로베르 1세의 두 형제인 루앙 대주교 모거와 아르퀘 백작 기욤, 노르망디 보안관 라울 드 가스를 비롯한 여러 귀족들이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연대기에 따르면, 봉건 영주들 사이에 불화가 생겨 피비린내 나는 충돌로 이어졌다. 공작의 소유였던 성 몇 곳이 무단으로 함락되었고, 봉건 영주들은 새로운 성을 무단으로 건설했다. 여기에 전염병과 기근이 창궐하면서 수많은 백성의 목숨을 앗아갔다. 하지만 이런 혼란에도 노르망디의 행정체제는 무너지지 않았다. 봉건 임대료는 공작 재무부에 정기적으로 지불되었고, 주교들은 공작에게 충성을 유지하면서 교회 영지에서 지불해야 할 금액을 그에게 내주었다. 공작 궁정의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한 에브뢰 백작 리샤르 데브뢰는 군대를 모아 여러 차례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수행해, 공작의 권위가 붕괴되는 걸 저지했다.

윌리엄은 매일 밤 장소를 바꿔가며 암살 위협에서 벗어났고, 친구와 친척들의 협조 아래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19살 무렵인 1046년, 크룰리 영주인 하몬 르 덴투(Hamon le Dentu), 생소뵈르 남작 넬 2세(Néel II de Saint-Sauveur), 플레시 영주 그림몰트, 베생 영주 라이눌프, 튜리아르코트의 영주인 라눌프 테숑 등이 부르고뉴 백작 르노 1세와 연합하여 전임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의 딸 아들라이드의 아들인 기 드 브리옹을 노르망디 공작으로 추대했고, 노르망디 공국의 서부 지역인 베생, 코탕탱, 싱글레 일대가 반란에 가담했다. 그들은 바이외에 집결한 뒤 발로뉴에 머물던 윌리엄에게 자객을 보내 죽이려 했지만, 윌리엄은 충직한 광대 골레의 고변을 받고 밤에 코탕탱과 베생으 경계인 베이 만을 건넜고, 베생의 소규모 영주 휴베르 드 라이스(Hubert de Ryes)의 도움을 받아 팔레즈 성으로 피신했다.

윌리엄은 자신의 주군인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앙리 1세는 병사 10,000명을 이끌고 북상한 뒤, 윌리엄이 이끌고 온 기사 350명과 병사 1,000명과 합세했다. 1047년 8월, 앙리 1세와 윌리엄 연합군은 에서 남동쪽으로 12km 떨어진 발에스듄 평원에서 25.000명에 달하는 반란군과 대면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반란에 가담한 영주 중 한 명이었떤 라눌프 테숑이 돌연 윌리엄의 편으로 돌아섰고, 반란군은 얼마 안가 궤멸되어 많은 기사들이 도주하다가 아티스 여울목에서 오르네 강을 건너려 하다가 익사했다.

윌리엄은 대체로 반란군 지도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고, 상당수 공모자는 성채가 해체되는 걸 지켜본 뒤 추방되거나 많은 노르만족 동포가 살고 있던 이탈리아 남부로 자발적으로 망명했다. 다만 플레시 영주 그림몰트만이 윌리엄에게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그 후 윌리엄은 에서 영주들을 소집하여 대규모 회의를 연 뒤, 영주들 간의 사적인 전쟁과 불법적인 요새화를 엄격히 금지했다. 기 드 브리옹은 브리옹 성에서 항전했지만 1050년경 모든 영지를 상실하고 해외로 망명했다. 이로써 윌리엄은 진정한 노르망디 공작으로 군림했다.

2.3. 플랑드르의 마틸다와의 결혼

윌리엄은 발에스듄 전투 승리로 노르망디 공작으로 군림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자리를 노리는 정적이 곳곳에 도사렸다. 이에 윌리엄은 입지를 다지기 위해 플란데런 백국의 백작 보두앵 5세의 딸이며, 프랑스 왕 로베르 2세의 외손녀인 플랑드르의 마틸다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승에 따르면, 윌리엄이 대리인을 보내 청혼하자, 마틸다는 "나는 사생아와 결혼하기에는 너무나 고귀한 가문의 사람"이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윌리엄은 노르망디에서 브뤼헤까지 말을 타고 달려갔다. 한 버전에 따르면, 그는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서 그녀를 폭행했고, 다른 버전에 따르면 성당으로 향하던 마틸다를 길가에서 습격해 말에서 끌어내리고 진흙 더미로 던진 뒤 폭행했다고 한다. 보두앵 5세가 이 광경에 격분해 검을 뽑으려 하자, 마틸다는 아버지를 막아서며 윌리엄 외에는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이 유명한 전승에 대해, 현대 역사가들은 허구로 간주한다. 보두앵 5세와 윌리엄 모두 잉글랜드 왕국에 관한 이해관계를 공유했으며, 윌리엄이 강력한 플란데런 백작을 배경삼아 입지를 다지기를 희망했듯이, 보두앵 5세 역시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하인리히 2세 저지대 국가에 대한 복속 시도에 맞서고 있었던 터라 노르망디 공국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학자들은 두 사람의 결혼 협상은 1048년부터 시작하여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1049년 10월, 랭스 공의회를 주관하던 교황 레오 9세가 두 사람의 결혼 승인을 거부했다. 사유는 윌리엄과 마틸다가 먼 친척이라 근친상간이라는 것이었다. 마틸다의 어머니인 프랑스의 아델은 프랑스의 경건왕 또는 현명왕이라 불린 로베르 2세의 딸로서 프랑스의 왕녀였다. 윌리엄의 백부 노르망디 공작가의 리샤르 3세와 결혼했다가 결혼 6개월만에 남편이 죽자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와 재혼하여 딸 마틸다를 낳았다.

또한 윌리엄의 아버지인 장엄공 로베르 1세의 어머니는 부르고뉴 공작 코난 1세의 딸 주디트, 주디트의 외할아버지는 앙주 백작 조프루아 1세였는데 이 조프루아는 선대 앙주 백작 풀크 2세의 아들이었다. 풀크 2세는 조프루아 1세 외에도 딸 아델하이드가 있었고, 이 아델하이드의 딸이 프로방스의 콘스탄스이고 콘스탄스는 경건왕 로베르 2세의 딸인 프랑스의 아델을 낳았다.

윌리엄의 할머니인 부르고뉴의 유디트와 마틸다의 어머니인 프랑스의 아델이 같은 외증조부를 둔 외가 쪽 외삼종자매(6촌)이고, 따라서 윌리엄과 마틸다의 촌수는 외가에 외가가 겹친 11촌 당고모와 조카라, 가톨릭 못지 않게 보수적 성리학 중심의 조선에서마저 그냥 남남으로 쳤을 관계였다.[4] 그런데 교황은 이를 두고 근친혼이라고 반대한 것이다.

사촌간 혼인도 흔한 유럽 귀족가에서 11촌의 혼인 반대는 말도 안 되는 트집이었다. 레오 9세 그레고리오 7세 개혁 이전에 교회를 쇄신하고자 노력한 독일계 교황이었으므로, 당연히 원론적 입장에서 근친상간을 반대한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노르만 본진의 수장인 윌리엄이 플란데런 백국의 힘을 얻는 상황을 피하려는 것이었을 공산이 크다. 정확히는 당시엔 교황청이고 동로마 제국이고 하나같이 행패 심한 노르만을 경계하고 싫어했던 게 사실이다. 당시 레오 9세가 다스리는 교황청은 지브롤터를 넘어 이탈리아 남부를 위협하는 노르만족에게 계속 침략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1053년에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노르만족을 공격했지만 치비타테 전투에서 대패하여 인질로 붙잡혀 있었다가[5] 노르만족의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풀려나 간신히 로마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렇듯 교황청의 거부에 부딪혔지만, 1053년 이전에 외에서 윌리엄과 마틸다의 결혼식이 강행되었다. 그 후 부부는 병원 4개와 수도원 2개를 건설하는 등 교회의 인정을 받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레오 9세는 죽을 때까지 반대했고, 이후 여러 교황도 반대했으나 결국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가 승인했다. 윌리엄 1세와 마틸다는 아들 4명과 딸 최소 5명 이상을 낳았다. 윌리엄이 잉글랜드 원정을 떠날 때 마틸다가 남편을 위해 개인 재산까지 털어서 '모라'라는 이름을 붙인 배를 선물했으며,[6] 윌리엄에게 정부나 혼외자식이 있다는 역사적 증거도 일절 없고, 딱히 추문 같은 게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다는 점을 볼 때, 부부 사이는 굉장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2.4. 세력 강화

1051년 3월 26일, 멘 백작 위그 4세가 사망했다. 당시 위그 4세와 첨예하게 대립했던 앙주 백작 조프루아 2세 마르텔은 이 때를 틈타 멘 백작령의 중심지인 르망 주민들을 꼬드겨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하고, 뒤이어 멘 백작령을 석권했다. 이후 북동쪽 방향으로 진군하여 동프롱과 알랑송 성채를 점령했다. 이제 앙주 백작령이 노르망디 국경까지 이르자, 이에 위협을 느낀 윌리엄은 조프루아 2세에 대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앙주 백작을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킨 프랑스 국왕 앙리 1세가 멀헤른 성을 포위할 때 지원군을 제공했으며, 조프루아 2세가 앙리 1세에 맞서기 위해 군대를 돌린 틈을 타 1051년 말에 알랑송과 동프롱을 기습 공략했다.

1052년, 프랑스 국왕 앙리 1세는 노르망디 공작의 권세가 너무 강해졌다고 판단하고, 조프루아 2세 마르텔과 화해하기로 했다. 여기에 루앙 대주교 모거가 동생인 탈루 백작 기욤을 부추겨서 윌리엄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게 했고, 윌리엄의 권력이 강해져서 자기들이 누리던 자치권이 침해받고 있다고 여기던 일분 노르만족 귀족들이 대거 가세했다. 윌리엄은 1053년 내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토벌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1054년 2월, 노르만 반군의 구원 요청을 받은 앙리 1세가 노르망디를 향한 공세를 단행했다. 앙리 1세는 에브뢰 백국을 침공했고, 이복 형제인 오도가 이끄는 별동대는 노르망디 동부를 침공했다.

윌리엄은 군대를 둘로 나눈 뒤, 자기는 본대를 이끌고 앙리 1세에 대적했고, 외 백작 로베르, 롱그빌 영주 고티에 1세 기파르, 모르테메르의 로제, 기욤 드 바렌이 이끄는 별동대는 오도와 대적했다. 롱그빌 영주 등이 이끄는 별동대는 모르테메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고, 앙리 1세의 이복 형제 오도는 생포되었다. 당시 윌리엄과 대치 중이던 앙리 1세는 이 소식을 듣자 경악하여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철수했다. 이후 윌리엄 1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노르만족 영주들은 항복한 뒤 모조리 추방당했다. 다만 퐁티외 백작 기는 2년간 투옥 생활하다가 윌리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풀려났다. 또한 윌리엄은 리지외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루앙 대주교 모거의 폐위를 선언했다. 모거는 채널 제도로 피신했다가 1055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기욤 드 탈루의 영지는 압수되어 루앙 백국의 일부가 되었고, 기욤은 불로뉴로 망명한 뒤 더 이상 윌리엄에게 대항하지 않았다.

1054년, 윌리엄은 멘을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1057년, 앙주 백작 조프루아 2세와 프랑스 국왕 앙리 1세는 다시 노르망디를 침공해 오른 강 서쪽의 노르망디 공국 영토를 약탈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듬해에 바라빌에서 디베 강을 건너던 중, 윌리엄이 이끄는 노르만군의 기습을 받으면서 후위대가 완전히 궤멸되었다. 1058년, 윌리엄은 드뢰 백국을 침공하여 틸리에르쉬르아브르와 티메르를 함락했다. 이에 앙리 1세는 1058년 6월 29일에서 8월 15일 사이에 프랑스군을 이끌고 티메르를 탈환하려 했다. 포위 공격은 이듬해까지 이어졌고, 발루아 백작 랄프 4세와 블루아 백작 티보 3세도 가세했다. 그러나 티메르가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앙리 1세는 1059년 5월 23일 아들 필리프 1세를 공동 왕으로 선임한 뒤 윌리엄과 협상했다. 그러나 협상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고, 앙리 1세는 계속 공성전을 이끌었지만 1060년 8월 4일에 병사했다. 그 후 티메르는 새 국왕 필리프 1세에게 항복한 뒤 파괴되었고, 노르만인들은 1061년 인근에 샤퇴뇌프앙티메레 요새를 건설했다.

1056년, 윌리엄은 모르탱 백작 기욤 드 제를랑이 반역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하고 그를 추방한 뒤, 이부 형제인 로베르에게 모르탱을 넘겨줬다. 여기에 외 백작 기욤 1세의 둘째 아들인 기욤 드 부샥 역시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혐의를 적용해 추방했다. 이후 귀족들은 윌리엄에게 다시는 대들 엄두를 내지 못했고, 공작 직속의 노르망디 행정체계가 완성되었다. 윌리엄의 가장 중요한 관리들은 자작이 되었고, 이 직위는 세습되었다. 또한 그는 교회 업무에 많은 관심을 가져 클뤼니 운동의 정신에 따라 교회 기관을 개혁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주교와 수도원장의 임명에 간섭하는 걸 자제해 지역 고위 성직자들과 교황청의 호감을 이끌어냈다.

이렇게 노르망디의 지배권을 굳건히 하고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시에, 윌리엄은 이웃 영주들과 인맥을 다지려 노력했다. 1053년 여동생 아들레이드와 결혼했던 폰티유 백작 앙게랑 2세가 사망하자, 윌리엄은 노르망디의 가신이었던 오말레 백작령을 빼앗아 아들레이드에게 양도한 뒤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의 남동생인 렌 백작 랑베르 2세와 아들레이드의 결혼을 주선했다. 랑베르 2세는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5세의 측근이었기에, 학자들은 이 결혼이 플란데런 백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추정한다. 1054년 랑베르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와 대적하다가 릴 공방전 도중 사망하자, 윌리엄은 트루아 및 상파뉴 백작 외드 3세 드 블루아와 결혼시켰다. 외드 3세는 윌리엄과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나중에 윌리엄이 잉글랜드 원정을 단행했을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060년, 윌리엄은 드뢰에서 프랑스의 새 국왕 필리프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 무렵 앙주 백작 조프루아 2세가 사망했고, 멘 백작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윌리엄은 위베르 2세가 멘 백작이 되도록 주선한 뒤 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으며, 위베르 2세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를 자신의 장남인 로베르와 약혼시켰다. 그러나 1062년 위베르 2세가 사망한 후, 멘 귀족들은 윌리엄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고, 앙주 백작 조프루아 3세가 이들을 지원해 아미앵과 백상 백작 고티에 3세가 멘 백작이 되도록 했다. 윌리엄은 이에 대응해 1063년 멘 백국을 공격하여 각지를 황폐화하고 르망을 공략했으며, 고티에 3세와 그의 아내 비오타를 생포했다. 뒤이어 마엔 시를 포위하여 함락한뒤 초토화했다. 고티에 3세와 비오타는 팔레즈 성에 투옥되었고, 같은 해 불분명한 상황에서 사망했다. 여기에 윌리엄의 장남 로베르와 약혼했던 마르그리트도 급사하자, 윌리엄은 스스로 멘 백작을 칭했고 나중에 아들 로베르에게 물려줬다.

1064년, 윌리엄은 자기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한 브르타뉴 공작 코난 2세를 견제하기 위해 콩부르 영주인 리왈론 1세 드 돌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코난 2세는 군대를 이끌고 리왈론 1세를 돌 성채에서 포위했지만, 윌리엄이 역습을 감행하는 바람에 격퇴된 뒤 렌에 이어 디낭까지 추격당했다. 그러나 윌리엄은 브르타뉴에 너무 깊숙이 진군했다가 보급로가 끊어지는 바람에 병사들이 기아에 시달리자 결국 노르망디로 철수해야 했다.[7] 그 후 코난 2세는 가신들의 지원을 받아 돌을 점령하고 리왈론을 추방했다.

2.5. 잉글랜드 원정

윌리엄은 잉글랜드 국왕인 참회왕 에드워드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에드워드 왕의 어머니인 노르망디의 엠마의 조카였으며, 에드워드가 지난날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를 정복했을 때 노르망디 궁정에 망명하여 25년간 지내기도 했다. 리지외 대주교이자 <노르만 연대기>의 저자인 기욤 드 푸아티에(Guillaume de Poitiers, 1020/1027 ~ 1087/1090)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윌리엄을 형제나 아들처럼 사랑했기 때문에 윌리엄을 상속자로 지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사료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없어서 교차검증되지 않기에, 학자들은 기욤 드 푸아티에가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는 걸 정당화하려고 꾸며낸 이야기로 추정한다. 다만 에드워드가 노르만인들에게 지극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건 분명하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을 통제하는 강력한 앵글로색슨족 데인족 출신 귀족들에 맞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르만 기사와 성직자들을 잉글랜드로 불러들여 높은 지위와 토지를 수여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나중에 앵글로색슨-데인족 귀족의 지도자 고드윈 백작의 압력에 굴복하여 노르만인들을 궁정에서 추방했다.

1066년 1월 5일, 참회왕 에드워드가 직접적인 상속인을 지명하지 않은 채 사망했다. 기욤 드 푸아티에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1064년에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가장 강력한 가신인 해럴드 고드윈슨을 윌리엄에게 보내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로서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그러나 해럴드는 도중에 폰티외 백작 기 1세에게 생포된 뒤 윌리엄 앞으로 끌려왔다. 윌리엄은 그를 풀어줬고, 해럴드는 증인 앞에서 자발적으로 성물 앞에서 윌리엄을 영국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고 그를 지원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맹세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역사가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이 별로 없다고 보며, 윌리엄이 헤럴드 2세에게 위증 혐의를 뒤집어 씌워서 그를 타도한 걸 정당화하고자 이야기를 꾸며낸 거라고 추정한다.

참회왕 에드워드 사후, 잉글랜드 귀족들은 해럴드 고드윈슨을 잉글랜드 국왕 해럴드 2세로 추대했다. 해럴드는 교회의 축복을 받으며 왕관을 쓰고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대관식은 켄터베리 대주교 스티건드가 집전했는데, 그는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2세와 첨예하게 대립하던 터라 교황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필리움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헤럴드 2세의 대관식은 교회법으로 볼 때 불법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었고, 윌리엄은 바로 이 점 역시 헤럴드 2세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무기로 적절하게 활용했다.

윌리엄은 헤럴드 2세를 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은 선왕 에드워드가 살아있을 때 왕위를 약속했다고 주장하면서 잉글랜드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선언했다.[8] 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헤럴드 2세가 성물 앞에서 한 맹세를 어겼으니 자기가 왕위에 오르는 걸 지지해달라는 윌리엄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후 윌리엄은 노르만 귀족들을 대거 소환했고, 프랑스 북부의 많은 기사들도 그의 높은 명성에 경도되어 군대에 가세했다. 노르만인들은 윌리엄 군대의 1/3 이하를 구성했고, 나머지는 멘, 아키텐, 플란데런 백국 및 프랑스에서 왔다. 그 결과, 윌리엄은 1066년 8월까지 약 7,000명에 달하는 잘 무장된 군대를 보유했다. 윌리엄은 영국 해협을 한 번에 건너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선박을 고용하거나 건조했다.

당시엔 북풍이 심해서 윌리엄이 좀처럼 건너지 못하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사이에 노르웨이의 하랄 3세가 먼저 잉글랜드를 침공했다가 해럴드 2세가 이를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물리쳐 유력한 경쟁자 하나는 저절로 줄고, 주적은 힘이 빠져 버리는 행운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해럴드 2세가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를 마치자마자 풍향이 바뀌었고, 윌리엄은 아내 마틸다에게 노르망디 섭정을 맡긴 뒤 1066년 9월 27일 솜 강 어귀에서 배를 타고 영국 해협을 건너서 다음날 아침 페벤지 시 인근 잉글랜드 해안에 상륙했다. 그 후 윌리엄은 헤이스팅스로 진군했고, 그곳에서 나무로 만든 성채를 짓고 적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해럴드 2세는 윌리엄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남쪽으로 달려갔다. 요크에서 헤이스팅스까지 9일만에 질주한 앵글로색슨군은 10월 13일 윌리엄의 진지에 접근했다. 10월 14일 이른 아침, 양군은 헤이스팅스 전투를 치렀다. 전투는 하루 종일 지속되었다. 궁수들의 결투로 군대의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후 노르만 병사들은 도보로 공격을 시작했고 기병대가 뒤따랐다. 그러나 언덕 위에 포진하여 방패벽을 형성한 앵글로색슨군은 끝까지 버텨냈고, 노르만군은 점점 밀려났다. 여기에 윌리엄이 타던 말이 투창에 맞아 쓰러지면서 윌리엄이 전사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노르만인들이 동요했다. 이에 윌리엄은 새 말로 갈아탄 뒤 투구를 벗고 최전선을 돌면서 장병들에게 맨 얼굴을 보임으로써, 자기가 살아있음을 입증했다.

첫번째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뒤, 윌리엄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2번째 공격을 개시했다. 앵글로색슨군이 이번에도 굳건히 버티자, 노르만인들은 후퇴하는 척했다. 이걸 본 앵글로색슨족 일부가 추격했다가 노르만 기병대의 역습으로 학살되었다. 이리하여 앵글로색슨군의 대열이 흐트러지던 그 때, 눈 먼 화살이 해럴드 2세의 눈에 꽂혔고, 해럴드 2세는 낙마했다. 그 후 윌리엄은 기병대를 재차 파견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따르면, 볼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 위그 2세 드 몽포르, 위그 드 퐁티외, 고티에 지파드 등 윌리엄에게 신임받는 4명의 기사가 낙마한 해롤드에게 달려들어 해치웠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윌리엄 본인이 해럴드 2세를 죽였다고 한다. 해럴드 2세가 정확히 누구에게 살해된 건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해럴드 2세가 전사한 뒤, 앵글로색슨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패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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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성직자 및 일부 영주들은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에도 항전을 이어가기로 하고, 에드먼드 2세의 손자이며 망명자 에드워드의 아들인 에드거 2세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이에 윌리엄은 공세를 이어가 도버와 켄트 일부를 확보하고, 잉글랜드 왕실 재무부가 있는 캔터베리와 윈체스터를 차지했다. 이후 런던을 남쪽과 서쪽에서 압박하면서, 가는 길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웠다. 12월 초 노르만군이 윌리어퍼드에서 탬스 강을 건너자,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건드가 귀순했고, 뒤이어 수많은 앵글로색슨족 영주와 귀족들이 귀순했다. 결국 에드거 2세도 1066년 12월 초 런던에 입성한 윌리엄에게 항복했다. 윌리엄은 1066년 크리스마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정식으로 잉글랜드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 왕은 노르망디 공작을 겸하면서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었다. 한국인의 눈으로 보기엔 이상할 수도 있지만, 이는 봉건제도의 특성 때문이었다. 잉글랜드의 왕으로서는 프랑스의 신하가 아니지만 노르망디 공작위는 잉글랜드 왕위와는 별개로 프랑스의 봉신이기 때문에 노르망디 공작으로서는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된 것이다. 즉, 평소에는 독립왕국인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지만 노르망디 공국에 한해서는 프랑스 카페 왕조의 봉신이었으므로 세금도 냈다.

윌리엄이 런던에서 대관식을 치른 후, 런던이 본격적으로 잉글랜드의 수도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물론 앨프레드 대왕이 데인 족의 침략을 격퇴한 후로 런던을 중심도시로 키웠기에 이미 인구 수로는 이전의 수도인 윈체스터를 넘어섰고, 참회왕 에드워드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건설한 이래로 종교적 중심지로도 노릇했지만, 잉글랜드 임금의 공식적인 궁전은 아직 윈체스터에 있었다. 그러나 1066년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런던으로 개선할 적에 웨스트민스터로 정궁(正宮)을 공식적으로 옮기면서 웨스트민스터가 행정수도로도 기능하기 시작했고, 덩달아 옆의 시티 오브 런던은 상업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다.

2.6. 거듭되는 반란 및 외세의 침략과 윌리엄의 수습

윌리엄은 자신이 잉글랜드 왕좌에 대한 정당성이 있다고 꾸준히 강조했지만, 그가 앵글로색슨 왕과 혈연 관계가 깊지 않은 건 분명했고, 잉글랜드 왕국의 주요 종족인 앵글로색슨족 및 데인족은 노르만족의 왕이 집권한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에 윌리엄은 토착 귀족들과 어떻게든 화해하려 노력했다. 머시아의 에드윈, 노섬브리아의 모르카르, 노샘프턴의 월시오프 등 대귀족들의 땅과 직위를 확인했고, 윌시오프는 윌리엄의 조카딸인 주디트와 결혼했으며, 머시아의 에드윈과 윌리엄의 딸 중 한 명 사이의 결혼이 제안되었다. 여기에 교황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켄터배리 대주교 스티건드를 포함한 앵글로색슨 족 주교들도 교회 직분을 계속 맡는 걸 허용했다. 다만 해럴드 2세와 그의 형제들 및 가족들은 영지를 몰수당했고, 헤이스팅스에서 윌리엄과 싸웠던 다른 귀족들도 영지를 몰수되었다. 이들의 영지는 윌리엄을 위해 싸워 준 북부 프랑스 기사 및 남작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1067년 3월, 윌리엄은 노르망디로 돌아가면서 스티건드, 모르카르, 에드윈, 에드거 2세, 월시오프 등을 데려갔다. 그러면서 이부 형제인 바이외 주교 오도를 켄트 백작으로 삼고 잉글랜드 섭정으로 세웠고, 핵심 추종자인 윌리엄 피츠오스번을 초대 해리퍼드 백작으로 삼아서 오도를 보좌하게 했다. 윌리엄은 노르망디에 도착한 뒤 루앙과 페캉 수도원을 잇달아 방문해 교회 봉헌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윌리엄이 떠나있던 사이, 슈롭셔와 헤리퍼드셔의 색슨계 거물인 에드릭이 반란을 일으켜 헤리퍼드를 공격했고, 엑서터에서는 해럴드 2세의 어머니 귀타가 주동한 반란이 발발했다. 오도와 피츠오스번은 토착 귀족들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었고, 어떻게든 지배력을 유지하려고 여러 성을 서둘러 건설했다.

1067년 12월, 윌리엄은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엑서터를 포위했다. 엑서터는 18일간 버텼지만 함락되었고, 윌리엄은 엑서터 성을 허문 뒤 인근에 새 성을 세웠다. 그 사이, 아일랜드로 망명했던 해럴드 2세의 아들들이 잉글랜드 남서쪽 해안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한 뒤 브리스톨 인근에 상륙했다. 브리스톨 보안관 에드노스가 이들을 블레이든에서 격퇴했으나 도중에 전사했다. 1068년 5월, 윌리엄의 부름을 받고 잉글랜드로 온 마틸다는 윈체스터에서 잉글랜드 왕비로서 대관식을 치렀다.

1068년, 머시아의 에드윈과 노섬브리아의 모르카르가 노르망디에서 탈출한 뒤 본국으로 돌아온 후 노섬브리아 백작 고스패트릭의 지원을 받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연대기 작가 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에드윈이 반란을 일으킨 건 윌리엄의 딸 중 하나의 결혼 협상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피츠오스번의 권력이 강성해져서 자신의 입지가 위협받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윌리엄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에드윈의 영지로 진군해 약탈을 자행했고, 워릭 성을 건설했다. 에드윈과 모르카르는 항복했지만, 윌리엄은 요크로 계속 진군해서 요크 성과 노팅엄 성을 추가로 건설한 뒤 남쪽으로 돌아가면서 링컨, 헌딩턴, 케임브리지 성을 잇달아 건설한 후 그 해 후반에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1069년 초, 스코틀랜드로 망명한 에드거 2세가 스코틀랜드 국왕 말 콜룸 3세와 누나 마가렛을 혼인시켜서 복위에 대한 지원 약속을 받아낸 뒤, 노섬브리아로 가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서 요크를 침공했다. 여기에 노섬브리아인들의 구원 요청을 받은 덴마크 왕 스벤 2세 에스트리드센이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공세를 개시하여 엑서터와 슈루즈베리 일대를 휩쓸었다. 요크는 곧 에드거와 스벤 2세의 연합군에게 함락되었고, 에드거 2세는 지지자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윌리엄은 이에 대응해 1069년 크리스마스에 폐허가 된 요크로 돌아와서 왕관을 썼다. 이후 그는 티스 강으로 진군하면서 농촌을 모조리 짓밟았고, 스벤 2세에게 거액의 돈을 줘서 덴마크로 도로 돌아가게 했다. 이에 추종자들이 모조리 이탈하자, 에드거 2세는 스코틀랜드로 도피했다. 윌리엄은 겨울 동안 페나인 산맥을 진군해 슈루즈베리에서 남은 반군을 격파한 뒤 체스터와 스태퍼드 성을 건설했다.

원정을 마친 윌리엄은 1070년 4월 윈체스터에서 부활절을 기념해 왕관을 재차 썼다. 또한 공의회를 개최해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건드와 그의 동생이자 엘름햄 주교인 애텔메르를 폐위했으며, 토착 수도원장 일부도 폐위하고 노르만 출신 인사들을 그 자리에 앉혔다. 또한 그는 헤이스팅스 전투가 벌어진 장소에 베네딕토회 소속의 배틀 수도원을 건설했는데, 이는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을 속죄하고 기념하기 위한 조치였다. 한편, 스코틀랜드로 도로 돌아온 에드거 2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로부터 윌리엄의 대륙 근거지인 노르망디를 협공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에드거 2세는 이에 호응해 추종자들과 매형 말 콜룸 3세의 지원을 받아 무리를 이끌고 바다 건너 프랑스로 향했지만, 도중에 풍랑을 만나 잉글랜드 해안에 좌초했고, 많은 군사와 인원을 상실한 뒤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1070년 초, 스벤 2세가 잉글랜드로 돌아와 험버 강 유역을 거쳐 이스트 앵글리아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한 뒤 그곳의 지역 지도자 헤레워드와 합류했다. 헤레워드의 군대는 피터버러 수도원을 점령하고 약탈했다. 윌리엄은 스벤 2세와 재차 협상한 끝에, 그들이 막대한 공물을 받아내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한 뒤, 1069년 부터 르망에서 반란이 일어난 뒤 혼란에 빠진 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륙으로 돌아갔다. 1070년 7월 플란데런 백작이자 윌리엄의 왕비 마틸다의 형제인 보두앵 6세가 사망한 뒤, 보두앵 6세의 미망인인 리칠드와 보두앵 6세의 동생인 로베르 1세가 권력 분쟁을 벌였다. 리칠드는 윌리엄 왕의 최측근인 윌리엄 피츠오스번에게 결혼을 제안했고, 피츠오스번은 이를 수락하고 로베르 1세와 대적했지만 1071년 2월 카셀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 리칠드를 몰아내고 플란데런 백작이 된 로베르 1세는 윌리엄을 적대했고, 이로 인해 윌리엄은 주요 동맹국이었던 플란데런 백국을 상실했다.

1071년 멘 백국의 반란을 진압한 뒤 잉글랜드로 돌아온 윌리엄은 북부에서 발발한 반란을 진압했다. 반란군 지도자 에드윈은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죽었고, 헤레워드와 모르카르는 엘리 섬으로 피신했다. 윌리엄은 엘리 섬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펼쳤고, 헤레워드는 탈출했지만, 모르카르는 체포된 뒤 영지를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다. 1072년, 윌리엄은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얼마 전 잉글랜드 북부를 약탈했던 말 콜룸 3세를 격파했다. 그 후 두 왕은 애버네시 조약을 체결해 영원한 평화를 약속했고, 말 콜룸 3세의 아들 던컨이 인질로 보내졌다. 그 후 윌리엄은 대륙으로 돌아간 뒤 1073년 초 앙주 백작 풀크 4세가 멘을 침공해 르망을 점거한 것에 반격하고자 했다. 그는 신속히 공세를 펼쳐 르망을 탈환했고, 3월 30일 무렵에 멘 전역을 평정했다. 하지만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1세는 윌리엄의 정적인 에드거 2세를 자기 궁정으로 받아들였고, 이복 누이 베르테를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와 결혼시켜서 반 노르만 연합을 결성했다. 윌리엄은 프랑스와 플란데런 백국이 노르망디 공국을 협공할 것을 우려해 1074년을 노르망디에서 보내면서, 리처드 피츠길버트와 윌리엄 드 워렌, 랑프랑크를 비롯한 추종자들에게 잉글랜드를 맡겼다. 그 사이, 에드거 2세가 몰래 스코틀랜드로 이동했다.

1075년, 노퍽 백작 랄프 드 게일과 헤리퍼드 백작 로저 드 브레퇴유가 노섬브리아 백작 월시오프 등과 함께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덴마크 국왕 스벤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윌리엄은 프랑스의 압박 때문에 잉글랜드로 돌아갈 수 없었고, 그 대신 오돈 드 바이외, 조프루아 드 몽브레이, 리처드 피츠 길버트, 윌리엄 드 워렌 등 윌리엄의 측근들이 진압에 나섰다. 랄프 드 게일은 진압군을 피해 노리치 성에서 농성하다가, 아내에게 노리치를 맡긴 뒤 브르타뉴로 향했다. 노리치는 곧 항복했고, 수비대는 랄프를 따라 브르타뉴로 향했다. 한편, 스벤 2세의 동생인 크누드는 함대 200척을 읶르고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그들은 반란군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해안을 따라 습격하면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뒤 본국으로 돌아갔다. 윌리엄은 그 해 말에 왕비에게 노르망디를 맡기고 잉글랜드로 가서 반란과 덴마크의 침공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했다. 로저와 월시오프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월시오프는 1076년 5월에 참수형에 처해졌다.

윌리엄은 자꾸만 반란을 일으키는 북부 잉글랜드를 상대로 연이어 공세를 벌이면서 초토화했는데, 이를 북부 약탈(Harrying of the North)이라고 부른다. 북부 약탈이 참혹했음은 여러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정복자가 학살을 벌이는 것이 흔한 일이긴 했지만, 북부 약탈은 당시 기준에서도 너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윌리엄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한 중세 역사가 및 수도자 오더릭 바이탈은 윌리엄이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하고, 식량 비축량과 가축 떼를 파괴했으며, 생존자들은 한겨울에 완전히 궁핍함을 깨닫고, 살아남을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집단으로 죽었다고 기술했다. 그러면서 그는 탁월한 군주였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평가했다. 연대기 작가 우스터의 플로렌스는 생존자들이 기아를 피하기 위해 강제로 고양이, 개, 인간의 시체를 먹어야 했다고 기술했다.

2.7. 돌 전투의 패배와 장남 로베르의 반란

1075년, 브르타뉴 공작 호엘 2세가 팡티에브르 백작 에우돈의 아들인 조프루아 1세 드 팡티에브르, 렌백작 조프루아 그레노나트, 포르호에트 영주이자 렌 자작 에우돈 1세의 반란에 직면했다. 먼저 조프루아 그레노나트는 이스트 앵글리아 백작 랄프 드 게일이 돌(Dol)을 점령했고, 뒤이어 조프루아 1세 드 팡티에브르, 포르호에트 영주 에우돈 1세가 호응했다. 호엘 2세는 노르망디 공작이자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1세의 도움을 받아 반란군을 상대로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1076년 9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가 돌 성채를 포위하던 윌리엄을 기습 공격해 격파했다. 윌리엄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노르망디로 퇴각했고, 호엘 2세는 윌리엄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자 점점 밀려나다가 1077년 반군에게 생포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알란 4세가 반란군을 물리친 덕분에 곧 풀려났다. 반란은 1079년 팡티에브르 백작 에우돈이 사망한 뒤 양자가 화해하기로 하면서 종결되었다.

돌에서의 참패는 언제나 승리를 거듭했던 윌리엄에게 뼈아픈 타격을 가했다. 그는 이로 인해 명성에 손상을 입었고, 정적들은 이를 틈타 그를 약화하려 애썼다. 1076년 말, 앙주 백작 풀크 4세가 멘을 침공했다. 윌리엄은 원군을 보내 이를 저지하게 했지만, 예전과는 달리 풀크 4세를 압도하지 못했다. 1077년, 아미앵, 베생, 블루아 백작 시몽이 코다트 수도원으로 은퇴하자, 필리프 1세가 베생을 별다른 반대 없이 자기 영지로 가져갔다. 이에 윌리엄은 더 이상 필리프 1세와 싸우는 건 무익하다고 여기고 엡테 강변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고, 1078년에는 앙주 백작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제 모든 시련이 끝나는 듯 했지만, 1년 후 가장 큰 시련이 닥쳤다.

윌리엄의 장남 로베르는 1063년 아버지에 의해 멘 백작으로 즉위했고,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인정받았지만, 별다른 권력을 갖지 못했다. 1073년 윌리엄이 멘을 다시 정복했을 때, 로베르는 원정대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로베르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충분한 영토를 맡기지 않아 자신의 재정적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했고, 자기에게 통치할 기회를 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결국 그는 1078년 로베르 2세 드 벨렘, 기욤 드 베르퇴유, 로저 피츠리처드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뒤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루앙을 장악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티메레 성에 파산해 그곳에서 농성했다. 윌리엄은 성을 포위해 공성전을 벌인 끝에 공략했고, 로베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필리프 1세의 궁정으로 피신했다. 필리프 1세는 로베르가 강력한 군대를 모으는 걸 도왔고, 노르망디 국경지대인 제르베로이 요새를 넘겨줬다. 이후 로베르는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아버지에 대적했다.

파일:윌리엄 1세에게 상처를 입힌 장남 로베르.jpg
에드먼드 에반스 작, <아버지에게 상처를 입힌 로베르 커트호즈>, 1864.

1079년 1월, 윌리엄이 제르베로이 성을 포위했다. 이에 로베르는 극비리에 성에서 출격해 포위군을 습격해 많은 병사를 사살했다. 연대기 작가 우스터의 존(John of Worcester, ? ~ 1140)에 따르면, 로베르는 전투 도중에 아버지의 팔에 상처를 입힌 뒤, 아버지의 목소리를 뒤늦게 인식하고 말에서 내린 뒤, 자기 말을 타고 떠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이 기록은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기 보다는 다윗이 아돌람 굴에서 사울을 살려준 성경의 일화에서 착안해 창조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무튼 윌리엄은 3주간 포위 공격을 퍼부었지만 공략에 실패해 루앙으로 후퇴했고, 로베르는 플란데런 백국으로 이동했다. 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자기 아들들이 로베르의 반란에 가담한 것에 심적 부담을 느낀 노르만 대귀족들은 윌리엄에게 로베르와 화해하고 그의 동료들을 사면해달라고 요청했다. 윌리엄은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양자는 1년간 협상한 끝에 1080년 4월 12일에 화해했다. 윌리엄은 로베르를 상속인으로 확인했고, 로베르는 삼촌인 오돈 드 바이외와 함께 잉글랜드를 통치할 책무가 주어졌다.

1079년 9월, 스코틀랜드 국왕 말 콜룸 3세가 윌리엄이 장남 로베르의 반란으로 정신없는 틈을 타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3주 동안 노섬벌랜드를 약탈하고, 막대한 전리품과 많은 노예를 데리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노섬브리아인들은 스코틀랜드의 침략에 무기력하게 당한 당국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여기에 1080년 봄 대 집사 레오빈이 노섬브리아 출신의 고문 리굴프의 영향력이 커지는 걸 질투한 끝에 월처의 친척 길버트를 포함한 부하 2명과 함께 리굴프를 살해하자, 노섬브리아인들이 분노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 윌리엄 월처는 반란군과 협상하려 시도했지만, 5월 14일 게이츠헤드에서 피살당했다. 윌리엄은 바이외의 오돈을 파견해 이들을 진압하도록 했다. 오돈은 노섬브리아의 거의 모든 시골을 황폐화했고, 대다수 토착 귀족은 망명했다. 이리하여 노섬브리아에서 앵글로색슨 귀족의 권력은 완전히 무너졌다. 1080년 7월 노르망디를 떠나 런던으로 간 윌리엄은 그 해 가을 로베르에게 스코틀랜드를 응징하는 원정을 이끌도록 했다. 로베르는 스코틀랜드로 진군해 로디언 일대를 황폐화한 뒤, 말 콜룸 3세에게 평화 협상을 강요했다. 이후 런던으로 돌아가던 중 뉴캐슬어폰타인에 새로운 성을 세웠다.

2.8. 말년

1081년, 윌리엄은 웨일스를 방문해 성 데이비드의 유물을 성 데이비드 대성당으로 가져왔다. 이 무렵 교황 특사가 찾아와서 교황에 대한 잉글랜드의 충성을 요청했지만, 윌리엄은 거부했다. 그해 말, 윌리엄은 다시 멘을 확실히 접수하기 위해 대륙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고, 그는 교황특사의 중재에 따라 앙주 백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1082년, 윌리엄은 불확실한 이유로 이부형제이자 그동안 많은 공적을 세웠던 오돈 드 바이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돈은 곧바로 체포된 뒤 루앙 탑에 투옥되었고, 그의 잉글랜드 영지는 몰수되었다. 이에 대해 11 ~ 12세기 프랑스 연대기 작가 기베르 드 노장(Guibert de Nogent, 1055 ~ 1125)은 오돈이 윌리엄이 사망하는 즉시 잉글랜드 왕국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오더릭 바이탈은 오돈이 와이트 섬에서 로마로 원정 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분쟁으로 곤경에 처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몰아내고 자기가 교황이 되려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두 주장 모두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간주한다.

1082년, 장남 로베르가 윌리엄과 갈등을 겪은 끝에 노르망디를 떠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의 궁정에 피신했다. 이후 1083년 여름 오랫동안 윌리엄의 충실한 왕비로서 여러 자녀를 낳고 훌륭히 보좌해줬던 마틸다가 중병에 걸렸고, 1083년 11월 2일에 에서 사망했다. 마틸다의 유언에 따라 잉글랜드에 있는 그녀의 많은 땅은 막내 아들 헨리에게 넘어갔고, 왕비의 관은 캉에 있는 성 삼위일체 수녀원에 넘겨졌다. 윌리엄은 오래도록 함께 했던 아내를 잃은 상실감에 빠졌고, 전쟁에 더 이상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윌리엄의 부하이며 보몽과 멘의 자작인 위베르 드 보몽오멘이 생트수잔에서 1083년부터 3년간 생트수잔 성에서 멘의 반란군을 이끈 위베르 드 생트 수잔(Hubert de Sainte-Suzanne)에게 여러 차례 포위당했고, 알란 르 루가 지휘하는 노르만군은 이를 구하려 했지만 위베르에게 여러 차례 패배했다. 많은 기사들의 죽음에 낙담한 윌리엄은 마침내 1086년 4월 21일 위베르에게 보몽과 프레네이 일대를 넘겨주고 평화 협약을 맺었다.

1084년, 윌리엄은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덴마크 왕 크누드 4세의 예상되는 침공을 막기 위해 다네겔트[9]의 징수를 감독했다. 이때 그는 효과적인 징수를 위해 왕국의 토지를 조사해서 《 둠즈데이 북》을 작성하도록 했고, 이 책은 1086년에 완성되었다. 이 《둠즈데이 북》을 전후로 잉글랜드의 귀족 체계가 크게 뒤바뀌는데, 앵글로색슨계의 작위와 봉토를 인정한 이전과 달리 앵글로색슨계 귀족 중 단 2명만이 지위를 유지하였고, 나머지 귀족 4천여 명은 토지가 몰수되었다. 그리고 몰수된 영지는 200명이 채 안 되는 노르만계 (그리고 약간의 브르타뉴인과 플랑드르인) 남작들이 하사받았다. 그러나 정작 크누드 4세의 침공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

1086년 노르망디로 돌아온 윌리엄은 필리프 1세에 대항하기 위해 딸 콩스탕스를 브르타뉴 공작 알란 4세와 결혼시켰다. 1087년 7월, 윌리엄은 프랑스의 망트를 침공해 그곳을 불태웠다. 그러나 그곳에서 병을 얻거나 부상을 입어 수도 루앙으로 돌아갔고, 루앙의 성문에 있는 생 제르베 수도원에 며칠간 누워 있다가 1087년 9월 9일에 사망했다. 이때 그는 죽기 직전에 장남인 로베르를 용서하고 노르망디 공국을 물려주겠다고 밝혔고, 둘째 아들 윌리엄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주며, 셋째 아들 헨리에게 많은 돈을 주겠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그는 공공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겠다고 약속한 모든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령했는데, 그 중엔 5년간 루앙 탑에 갇혀 지냈던 이부형제 오돈도 포함되었다. [10] 사후 바다를 통해 캉으로 옮겨진 뒤 생테티엔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윌리엄을 성당에 안장시키려고 할 때 선약자가 나타나 권리를 주장하는 바람에 현장에서 60실링을 지불한 후에야 매장할 수 있었다. 거기다 윌리엄 1세는 말년에 말을 타지 못할 정도로 뚱뚱해져서 필리프 1세가 조롱할 정도였는데 매장이 늦어지자 부패한 시신이 부풀어 올랐다. 뚱뚱한 시신에 맞는 관이 없어서 사람들은 왕의 시신을 소가죽 안에 넣고, 꿰맨 뒤에 사이즈를 크게 맞춘 석관에 안장하기로 했는데 #, 그렇잖아도 뚱뚱한 그의 시신은 부풀어올라 도저히 석관 안에 들어가지가 않았는데도 신하들이 용을 써서 결국 석관에 밀어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시신이 터져 악취가 진동한 탓에 놀란 사람들이 성당에서 빠져나오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악취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향을 피워도 없어지지 않아 나중에 성당을 환기시켜 악취가 다 빠지고 나서야 장례식을 치렀을 정도였다. 그의 무덤은 16세기 종교전쟁 때와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약탈되어 지금은 관 속에 넓적다리뼈 하나만 남았다.

3. 가족 관계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
(Robert II, Duke of Normandy)
1051년 1134년 2월 콩두사노의 시빌라
슬하 1남
2남 노르망디의 리처드
(Richard of Normandy)
1054년 1070년
1녀 노르망디의 아델리자
(Adeliza of Normandy)
미상 1113년
2녀 노르망디의 세실리아
(Cecillia of Normandy)
1056년 1126년 7월 30일
3남 윌리엄 2세
(William II)
1057년 1100년 8월 2일
3녀 브르타뉴의 공작부인 콩스탕스
(Constance, Duchess of Brittany)
1057년/ 1061년 1090년 8월 13일 브르타뉴 공작 알란 4세
4녀 블루아 백작부인 아델
(Adela, Countess of Blois)
1067년 1137년 3월 8일 블루아 백작 에티엔 2세
슬하 6남 5녀[11]
4남 헨리 1세
(Henry I)
1068년 1135년 12월 1일 스코틀랜드의 마틸다
슬하 1남 1녀[12]
루뱅의 아델리자

윌리엄 1세에게는 4남 4녀가 있었는데 장남 로베르와는 사이가 나쁘다 못해 철천지 원수 같았다.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로베르가 프랑스로 도주하자 윌리엄은 로베르의 상속권 일체를 박탈하고, 죽기 전에야 유언으로 노르망디 공국을 남겨주었다.

장남 로베르는 모든 것을 잃고 프랑스로 추방당했으나 윌리엄이 죽어가면서 그래도 아들이라고 내어준 노르망디 공작 자리에 올라 로베르 2세가 되었고 십자군 전쟁에도 참가했다. 차남 리처드는 윌리엄보다 일찍 죽었고, 삼남 윌리엄은 원래라면 로베르가 물려받았어야 할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막내아들인 헨리는 영지를 살 돈을 받았는데 윌리엄 2세 사후 왕위에 올라 헨리 1세가 된다. 또한 장녀 아델라의 아들인 외손자 스티븐은 헨리 1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4. 평가

정복왕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영국이라는 나라를 온전하게 정복했다고 할 수 있는 군주이기도 하다. 헤이스팅스 전투가 있기 1,000년 전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전쟁 때 브리튼 섬을 침공하여 일시적으로 점령했지만 브리튼 섬은 그의 목적이 아니었던지라 이내 철수했고, 로마의 브리튼 섬 정복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8~9세기의 이교도 대군세 웨식스 앨프레드 대왕이 막아내었으며, 11세기 초 크누트 대왕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북해 제국을 세웠으나 그가 사망하자 금세 붕괴하였다. 17세기 명예혁명 당시 이름이 같은 윌리엄 3세가 즉위하고 나서 네덜란드군을 이끌고 와서 왕당파와 자코바이트를 진압한 것을 정복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영국 의회가 윌리엄 3세를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군연합 형식으로 영국의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여 데려온 것이므로 이는 의회 왕당파 간의 내전으로 볼수 있기에 정복이라 하기에는 애매하다.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 800년 뒤에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대륙 봉쇄령을 통해 영국 정복을 시도했지만, 결국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940년에서 1941년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의 항공기 공습을 가했지만, 결국 소련 침공 과정에서 영국 정벌을 포기했다. 이러한 정복자들의 사례를 보았을 때, 영국을 한번에 정복하고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데 성공한 인물은 정복왕 윌리엄뿐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윌리엄 1세 이후부터 잉글랜드에서 현대 영국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왕조가 바뀌는 등 변화는 있었지만 역대 왕조마다 왕위 계승자가 없으면 모계나 방계 계승 등으로 대대로 이어왔기 때문에 현재까지 영국의 왕은 미약하게나마 이 사람의 피가 흐른다. 《영국 왕실 계보도》 이 계보도에서는 영국 왕실의 시조를 윌리엄 1세가 아닌 알프레드 대왕으로 보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왕조 크누트 대왕의 덴마크 왕조처럼 이민족 왕조인 셈이다. 노르만 왕조의 바로 다음 왕조인 플랜태저넷 왕조의 창시자 헨리 2세의 외할머니가 앨프레드 대왕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앵글로색슨 민족주의에 입각한 역사관에 의한 관점이고, 헨리 2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윌리엄 1세의 아들인 헨리 1세 국왕의 외손자 자격으로 승계받은 것이기 때문에 노르만 왕조 이후로 잉글랜드와 영국의 군주들은 윌리엄 1세를 왕조의 시조로 여겼다.[13]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에드워드란 왕호이다.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 이후의 모든 영국 국왕들은 20세기에 즉위한 에드워드 8세까지 에드워드라는 왕호에 X세라는 대수 숫자를 붙이는 데 있어서 노르만 왕조 이전의 앵글로색슨 군주 에드워드가 아닌 노르만 정복 이후 시대에 즉위한 에드워드 1세를 시작으로 해서 대수를 세었다. 그래서 노르만 왕조 이전에도 에드워드란 왕호를 쓴 임금이 셋이나 있었지만, 각각 에드워드 1세, 2세, 3세라고 불리지 않고 각각 대 에드워드, 참회왕 에드워드, 순교왕 에드워드라는 별명으로만 불리는 것이다. 즉, 과거의 잉글랜드 왕실은 물론 현대의 영국 왕실까지 왕호의 대수를 세는 데 있어서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 이전의 국왕들은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다.

한편 영국에 맞서 미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미국 독립 혁명 시기에 활동했던 미국의 사상가 토마스 페인은 1776년 그가 작성한 팜플렛인 상식(Common Sense)에서 영국 왕실의 조상인 윌리엄 1세를 가리켜 "수천 명의 무장한 강도떼를 이끌고 섬으로 쳐들어가 불법적인 폭력으로 왕위를 빼앗았으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는 어떠한 신성함도 없다."라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5. 여담

윌리엄 1세가 가졌단 노르망디 영토 중에서 지금까지 남은 유일한 곳이 바로 채널 제도이다. 하지만 채널 제도를 제외한 다른 영토는 1204년 존왕 때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공격을 받아 모두 잃었다.[14] 백년전쟁 때 잠시 탈환했지만 백년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완전히 상실했다.

영국 방송 BBC에서는 그의 자산을 현재 가치로 2295억 달러로 추정했는데, 이는 인류 역사상 7위에 해당한다. 다만 그가 정복한 잉글랜드 땅 전체를 개인 자산으로 간주한 결과이다. 물론 당시에는 왕국 전체를 임금 개인의 소유물로 여기긴 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훨씬 더 큰 영토를 다스린 군주들이 수두룩하므로 적절한 답은 아니다.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 왕이 된 후에도 프랑스어만 말하고 쓰며 읽을 줄 알았지, 영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고 읽거나 쓰지도 못했다. 특히 프랑스 내 영토인 노르망디에 애착이 강하여 말년에는 아예 노르망디에 거주하며 잉글랜드에는 대리인을 통해 문서로 지시하며 통치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 노르망디 주민들과 잉글랜드인들이 서로 자신들의 위인이라며 다투기도 한다.

유럽 대륙에서 잉글랜드를 정복했다는 점으로 추측해볼 때 《 얼음과 불의 노래》의 정복왕 아에곤 1세의 유력한 모델이다.

2015년에는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기 전의 이야기를 다룬 프랑스 영화 《 정복자 윌리엄》이 나왔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도 언급되는데 말포이 가문의 시조인 아르망 말포이는 그가 잉글랜드를 정복할 때 같이 건너왔고[15] 그에게 여러차레 도움을 주었으며 그 보답으로 윌트셔 지역에 영지를 하사받고 그곳에 저택을 세웠다고 한다. 국제 비밀 법령 이전까지 말포이 가문은 머글 세계에서도 큰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왕실과도 가까웠다고 하는데 이런 인연도 한몫 했을 듯하다.

왕과 정복자라는 드라마에서 니콜라이 코스테르발다우가 맡을 예정이다.


[1] 헤이스팅스 전투 중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건재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 우뚝 일어서 투구를 쓰는 모습이다. [2] 보통 [3] 노르만어는 프랑스어와 가까워서 프랑스어의 방언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4] 현대 사회에서도 6촌 이상 넘어가면 사실상 남이고, 당연히 11촌 정도면 결혼도 문제가 전혀 없다. 연산군의 왕비인 폐비 신씨는 7촌 고모인데 문제 없다고 이야기했다. 다만 외가 쪽에는 살짝 널널하긴 했다. [5] 당연하지만 이 당시 노르만족도 가톨릭을 믿었으므로, 영적 지도자인 교황을 함부로 대하진 않았고 융숭히 대접했다고 한다. 교황의 입장에서는 인질이 되었음은 사실이니 매우 고까웠겠지만. [6] 이 배는 잉글랜드 침공 때 윌리엄의 기함이 되었다. [7] 기욤 2세의 잉글랜드 원정을 다룬 '바이외 테피스트리'에서는 코난 2세가 디낭에서 기욤 2세에게 도시의 열쇠를 바치며 항복했다고 묘사되었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브르타뉴 원정 실패를 감추려고 꾸며낸 것으로 간주한다. [8] 이 장면을 두고 《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 편에서는 윌리엄 1세가 "영국 왕이 죽기 전에 나한테 왕 자리 물려준다고 약속했어! 의심 가면 왕한테 물어봐!"라고 우기는 것으로 패러디했다. 물론 이미 왕은 죽고 없는데 죽은 왕이 대답할 수 있을 리는 당연히 없다. 그러자 영국 어느 관료가 "야! 죽은 왕이 어떻게 대답하니?"라고 되물었는데 윌리엄 1세는 뻔뻔하게도 "그럼 내 말을 믿으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로 받아쳤다. 이에 관료가 욕심도 많다며 니 영지나 잘 다스리셔라는 식으로 나오자 윌리엄 1세가 오냐 그럼 한번 힘으로 승부를 보자! 하고 응수한다. 표현은 개그스럽지만 중세시대의 분쟁이 다 이런 식으로 적당한 명분을 내세우고 실력으로 승부를 보아서 이기면 명분대로 목적을 달성하고 지면 못하는 식으로 흘러갔다. [9] Danegeld. 9세기 중반부터 바이킹의 위협을 받은 잉글랜드 주민들이 이들을 격퇴하거나 공물을 바치기 위해 나라에 바치는 세금 [10] 오돈은 1087년 윌리엄이 사망한 뒤 노르망디 공작이 된 로베르 2세에 의해 풀려난 뒤, 1088년 로베르 2세가 잉글랜드 왕위까지 겸하게 하기 위해 윌리엄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뒤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했다. 이후 제1차 십자군 원정을 결정한 클레르몽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1096년 로베르 2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날 때 동행하다가 1097년 1월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병사했다. [11] 스티븐 왕 [12] 신성로마 제국의 황후 마틸데 [13] 윌리엄 1세 이후의 모든 영국 국왕들은 모계나 방계가 승계하는 경우는 있어도 어쨌든 전 국왕과 혈통으로 이어진 사람이 왕위를 승계했지만 윌리엄 1세는 아예 정복을 통해 이전 앵글로색슨 왕들과 혈통상 관계없는 사람이 새로 왕위를 차지하여 왕가를 뿌리까지 교체한 것이기 때문에 윌리엄 1세 이전의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와 윌리엄 1세가 정복한 이후의 잉글랜드는 잉글랜드라는 국호만 같을 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것처럼 사실상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 이전의 잉글랜드는 순수한 앵글로색슨 계통의 고대 영어를 썼지만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노르만어가 섞여들어간 영어를 쓰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의 영어 어휘들에까지 이어졌다. [14] 칼레는 그나마 메리 1세 때까지는 가지고 있었는데, 칼레마저 메리 1세가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서 스페인 편에 서면서 잃었다. 그런데 당시 칼레는 잉글랜드 총 세입의 35%을 차지하는지라 이를 두고 메리 1세가 국익과 무관한 전쟁에 끼어들어 괜히 칼레만 잃었다며 욕을 많이 먹어야 했다. [15] 말포이라는 성씨 자체가 프랑스어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