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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권법

전권 위임법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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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권법에 대한 정부 요인들의 서명
위에서부터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총리 아돌프 히틀러, 내무장관 빌헬름 프리크, 외무장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재무장관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1. 개요2. 조문
2.1. 독일어 원본2.2. 영어 번역본2.3. 한국어 번역본
3. 조문의 해설4. 투표와 통과5. 결과6. 폐지7. 표면적 합법성 문제8. 반성

[clearfix]

1. 개요

Ermächtigungsgesetz / Enabling Act

수권법()은 비상시 입법부 행정부 입법권을 위임하는 법률이다. 수권법과 유사한 법률이 제정된 사례는 허다하나, 대개는 1933년 3월 24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정부가 법률을 제정할 수 있게 한 법률을 가리킨다. 총리 히틀러는 이를 통해 국회를 거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는 껍데기만 남고 나치 독일 체제가 들어서게 되었다.

정식 명칭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Gesetz zur Behebung der Not von Volk und Reich)'[1]이다. '전권 위임법' 또는 '권리 부여법'이라고도 한다.[2]

2. 조문

2.1. 독일어 원본

Gesetz zur Behebung der Not von Volk und Reich
Der Reichstag hat das folgende Gesetz beschlossen, das mit Zustimmung des Reichsrats hiermit verkündet wird, nachdem festgestellt ist, daß die Erfordernisse verfassungsändernder Gesetzgebung erfüllt sind:

Artikel 1
Reichsgesetze können außer in dem in der Reichsverfassung vorgesehenen Verfahren auch durch die Reichsregierung beschlossen werden. Dies gilt auch für die in den Artikeln 85 Abs. 2 und 87 der Reichsverfassung bezeichneten Gesetze.

Artikel 2
Die von der Reichsregierung beschlossenen Reichsgesetze können von der Reichsverfassung abweichen, soweit sie nicht die Einrichtung des Reichstags und des Reichsrats als solche zum Gegenstand haben. Die Rechte des Reichspräsidenten bleiben unberührt.

Artikel 3
Die von der Reichsregierung beschlossenen Reichsgesetze werden vom Reichskanzler ausgefertigt und im Reichsgesetzblatt verkündet. Sie treten, soweit sie nichts anderes bestimmen, mit dem auf die Verkündung folgenden Tage in Kraft. Die Artikel 68 bis 77 der Reichsverfassung finden auf die von der Reichsregierung beschlossenen Gesetze keine Anwendung.

Artikel 4
Verträge des Reiches mit fremden Staaten, die sich auf Gegenstände der Reichsgesetzgebung beziehen, bedürfen für die Dauer der Geltung dieser Gesetze nicht der Zustimmung der an der Gesetzgebung beteiligten Körperschaften. Die Reichsregierung erläßt die zur Durchführung dieser Verträge erforderlichen Vorschriften.

Artikel 5
Dieses Gesetz tritt mit dem Tage seiner Verkündung in Kraft. Es tritt mit dem 1. April 1937 außer Kraft, es tritt ferner außer Kraft, wenn die gegenwärtige Reichsregierung durch eine andere abgelöst wird.

2.2. 영어 번역본

Law to Remedy the Distress of the People and the Nation
The Reichstag has enacted the following law, which is hereby proclaimed with the assent of the Reichsrat, it having been established that the requirements for a constitutional amendment have been fulfilled:

Article 1
In addition to the procedure prescribed by the constitution, laws of the Reich may also be enacted by the government of the Reich. This includes the laws referred to by Articles 85 Paragraph 2 and Article 87 of the constitution.

Article 2
Laws enacted by the government of the Reich may deviate from the constitution as long as they do not affect the institutions of the Reichstag and the Reichsrat. The rights of the President remain undisturbed.

Article 3
Laws enacted by the Reich government shall be issued by the Chancellor and announced in the Reich Gazette. They shall take effect on the day following the announcement, unless they prescribe a different date. Articles 68 to 77 of the Constitution do not apply to laws enacted by the Reich government.

Article 4
Treaties of the Reich with foreign states which affect matters of Reich legislation shall not require the approval of the bodies of the legislature. The government of the Reich shall issue the regulations required for the execution of such treaties.

Article 5
This law takes effect with the day of its proclamation. It loses force on 1 April 1937 or if the present Reich government is replaced by another.
(출처 필요)

2.3. 한국어 번역본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
독일 국가의회는 다음과 같은 법률을 제정한다. 이로써 참사원의 승인을 선언하며, 이 법률의 하위 항들로 인해 헌법 수정의 요건을 채운 것으로 확실하게 인정받는다.[3]

제1조
독일의 법률은 헌법에서 규정되고 있는 절차 이외에 독일 행정부에 의해서도 제정될 수 있다. 이 조는 국가헌법 제85조 제2항 및 제87조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도 적용된다.

제2조
독일 행정부는 국가의회 및 국가참사원의 제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헌법에서 정한 것과 다른 내용의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 다만, 대통령의 권한을 변경할 수는 없다.

제3조
독일 행정부에 의해 제정된 법률은 총리에 의해 작성되어 관보(官報)를 통해 공포된다. 다른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그 법률은 공포한 다음 날부터 그 효력을 발생한다. 헌법 제68조에서 제77조는 정부에 의해 제정된 법률에 대하여서는 적용하지 아니한다.

제4조
독일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경우 그 조약은 입법권을 가진 다른 기관과의 합의를 필요로 하지 아니한다. 행정부는 이러한 조약의 이행에 필요한 법률을 공포할 수 있다.

제5조
이 법은 공포한 날부터 1937년 4월 1일까지 효력을 발휘하며 이 법 시행 당시의 행정부가 다른 행정부로 교체될 경우에는 효력을 잃는다.
(출처 필요)

3. 조문의 해설

  • 제1조
    입법권을 의회에서 내각(정부)으로 이양하여 법률을 행정부가 독자적으로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의회의 존재 의미가 소멸되었다.[4]
  • 제2조
    대통령의 권한, 국가의회 및 참사원 제도를 제외하면 국가의 정부형태를 변경할 수 있다.
  • 제3조
    행정부가 입안한 법률은 행정부 수반인 총리가 공포할 권리를 가진다.[5] 법률제정권과 법률공포권이 분리된 국가에서는 법률공포권은 곧 법률안거부권으로 이어진다. 법률이 효력을 가지는 것은 법률이 공포되는 시점부터인데, 공포권자가 공포를 거부하면 법률이 효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권법이 입법권을 행정부에 위임하는 내용을 담은 이상 그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고 대통령의 견제를 회피하기 위해서는 총리에게 법률안공포권을 맡기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 조항과 제1조가 합쳐지면 총리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법안을 제정하고 즉시 공포할 수 있는 절대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이를 통해 당시 대통령인 힌덴부르크의 권한을 일부 빼앗았다. 후술한 이유에 따라서 일단 한 발 물러선 것으로, 나중에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히틀러가 대통령과 총리를 겸직하면서 양보한 부분을 되찾았다.
  • 제4조
    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의회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교권도 히틀러 마음대로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 제5조
    이 법률이 한시법안임을 보여 준다. 비(非)나치계 우파정당인 독일 중앙당[6]의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조항이다. 중앙당에서도 수권법에 대한 거센 반발이 있었으나 당 지도부는 수권법은 한시적이며 중앙당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나치당의 약속을 믿고 법안 통과에 적극 협조하였다. 그러나 나치당은 수권법을 통과시킨 후 중앙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을 강제 해산하고 법의 유효 기간이 끝날 예정이던 1937년에 갱신하였다. 이후 1939년과 1943년에도 갱신하여, 사실상 무늬만 한시법안이 되고 말았다.

수권법을 통해 나치당은 바이마르 공화정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이후의 체제는 나치 독일로 알려지게 된다.

4. 투표와 통과

1933년 2월 17일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벌어진 1933년 3월 5일 하원(국가의회) 총선에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역대 최다인 288석으로 전체 의석의 44.5%를 차지했지만 이는 히틀러의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였다. 수권법 제정을 위해 개헌을 추진하려면 총 하원의원 수 647명 중 2/3인 431.33..명 이상이 출석하여 출석 인원 중 2/3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나치의 288석과 연립 정당인 독일 국가인민당의 52석을 합쳐 봐야 340석으로 필요한 출석 인원 431.33..명에 미달했기 때문이다.

나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편법을 활용한다. 우선 3월 5일 총선 바로 다음 날인 3월 6일에 독일 공산당의 활동이 원천적으로 금지되었다. 총선 이후에 금지한 이유는 총선에 독일 공산당이 참가하게 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의 표를 갉아먹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원내 제1당의 힘을 이용하여 의사규칙을 개정해 무단결석한 사람은 출석 후 기권한 것으로 간주하게 했다. 당시 독일 공산당 의원 81명 전원은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영향으로 체포되거나 외국으로 도망쳐 무단결석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던 데다 방화 사건으로 얽어매서 독일 사회민주당 120명의 의원 중 26명도 출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나치당 288석, 연립정당인 독일 국가인민당 52석, 독일 공산당 81석(결석으로 기권 처리), 독일 사회민주당 26석(결석으로 기권 처리)을 합치면 447석으로 총 의원수의 2/3 출석 요건은 넘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총 하원의원수 647석 중 출석 처리된 447석을 제외한 200석은 독일 사회민주당이 120석 중 결석자 26명을 제외하여 94석, 우파인 중앙당이 73석, 기타 군소 정당들이 33석을 차지하는 상황이었다. 이들이 전원 출석 후 반대표를 행사한다면 찬성 340, 반대 200으로 통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중 독일 사회민주당은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이후 히틀러의 정치 탄압을 당한 피해자로서 수권법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타협이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히틀러는 중앙당 및 여타 군소 정당들과 타협하여 대통령과 주의 권한에 손대지 않는 조건으로 수권법에 찬성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결론적으로 총 의원의 2/3인 431.33..명을 넘어서는 찬성 의원수를 확보해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 의원들이 모두 방해 없이 출석했어도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모든 사전 작업이 완료된 후인 1933년 3월 23일 나치 친위대( SS)와 돌격대( SA)가 독일 국회의사당을 둘러싼 상태에서 투표가 치러졌다. 앞서 말했듯 독일 공산당 의원 81명은 라이히스탁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였으며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 중 26명, 독일 중앙당 의원 중 1명, 독일 인민당 의원 중 1명도 체포, 도망, 질병, 개인 사정 등의 이유로 출석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과는 찬성 444 : 반대 94로 가결이었다. 의회 스스로 의회민주주의를 포기했다는 점에서 형식적 법치주의의 자살이라고도 불린다.
정당 의석수 의석비율 찬성 반대 불참
나치당 288 44.5% 288 0 0
독일 사회민주당 120 18.5% 0 94 26
독일 공산당 81 12.5% - - 81
독일 중앙당 73 11.3% 72 0 1
독일 국가인민당 52 8% 52 0 0
바이에른 인민당 19 3% 19 0 0
독일 국가당[7] 5 0.8% 5 0 0
기독사회인민당 4 0.6% 4 0 0
독일 농민당 2 0.3% 2 0 0
독일 인민당 2 0.3% 1 0 1
독일 농업동맹 1 0.2% 1 0 0
합계 647 100% 444
(총 69%)
94
(총 15%)
109
(총 17%)

파일:9Qxr8vs.jpg

당시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오토 벨스(Otto Wels)는 반대연설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 역사적 순간에 인간성과 정의, 자유,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밝힌다. 전권위임법(수권법)이 당신들에게 영원 불멸의 이념을 없앨 수 있는 힘을 주지는 못한다. … 또한 독일 사민당은 이 박해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박해받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국가 내의 동지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여러분의 의연함과 충직함은 존경받을 만하다. 여러분들의 확신에 찬 용기, 끊임없는 확신은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 원문(독일어)
또 최후의 한마디로 히틀러에게는 이 말을 남겼다.
"우리의 자유와 생명을 빼앗을 수 있지만, 우리의 명예를 빼앗을 수는 없다." 원문(독일어)

이 발언을 들으면서 메모하던 히틀러는 오토 벨스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즉각 연단에 올라 "우리 중에 당신들에게 탄압받고 감옥에 갇혀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며 이를 비웃었고 "독일은 자유로워지겠지만 당신들을 통해서는 아니다."라며 통박을 해 버려서 오히려 나치당의 사기만 진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나치당원들은 히틀러가 연설하는 내내 좋아 날뛰었고 히틀러는 "우리는 이미 수권법을 의회 표결 없이 얻을 수 있지만 자비를 베푸는 것"이며 "사민당 의원들은 투표하지 말라"고 위협했다.

그리고 하원 표결과 같은 날 열린 상원(국가참사원/국가평의회, Reichsrat)에서는 만장일치로 수권법이 가결되었다. 당시 상원은 현재의 독일 연방상원처럼 각 주의 의회에서 지명하는 자를 의원으로 보내는 방식이었는데 이미 이 시점에서는 모든 주 정부가 나치당에 장악되었으니 상원에서 수권법을 막을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당시 바이마르 헌법에서는 하원 2/3의 찬성으로 재의결하면 상원의 거부권을 무시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같은 날 나치당 정권의 정국 운영에 만족한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여 수권법이 공포되었다.

5. 결과

수권법의 제정으로 거리낄 것이 없어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은 권력을 재빠르게 장악하였다. 나치당은 갖가지 수단으로 나치당 외 기존 정당들을 해산시켰으며 수권법 통과 3달만인 7월 14일 정당신설금지법을 23시 20분에 발안하고 5분만에 통과시켰다.

수권법 반대 연설을 했던 오토 벨스는 1933년 8월 3일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국적 박탈 조치를 받고 강제 추방되었다. 오토 벨스는 시범 케이스로 쫓겨난 것으로, 독일 국적 박탈 1호였다. 유대인이나 독일 공산당보다도 빨리 쫓겨난 것을 보아 히틀러가 어지간히 벨스한테 빡쳤던 듯 하다. 벨스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직후인 1939년 9월 16일 망명지 파리에서 숨을 거뒀다.[8]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권한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수권법을 통해 새로운 의회를 구성했는데 876석으로 기존 독일 의회보다 약 220석 정도 새 의석이 추가되었다. 새 의회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Reichstag라는 이름을 썼지만 단원제고 국가유일정당인 나치당만이 출마할 수 있었으며 선거는 나치당이 후보 명부를 제시하면 거기에 대해서 가부를 투표하는 방식이었다. 비밀투표 원칙은 지켜졌지만 반대에 투표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협박을 받거나 보복을 당했다. 그리하여 90% 넘는 찬성률로 나치당이 의회 전 의석을 채울 수 있었다. 선거는 1933년 11월과 1936년, 1938년까지 치러졌지만 나치당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선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수권법에 따르면 대통령의 권한, 연방의회 및 참사원(상원) 제도를 변경할 수 없다고는 했는데 국가유일정당이 된 나치당의 의지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수권법에 따라 합법적 독재가 가능했지만, 때로는 수권법에 규정된 제한조차 무시하고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나치 독일은 1934년에 국가 재건에 관한 법률(Gesetz über den Neuaufbau des Reichs)을 제정하여 정부의 입법만으로 헌법 개정을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상원을 없애 버렸다. 이는 수권법 위반이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권법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을 불가침으로 해놓았으나 1934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한 후 아돌프 히틀러 총리는 수권법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을 자신에게 부여하는 법률을 제정해 총통(지도자 겸 국가총리)이 되었고 이에 대해서는 국민투표로 추인을 얻었다. 히틀러는 대통령의 권한을 '총리'(라는 직책을 가진 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직접 부여해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했다. 역시 대통령 권한 변경에 해당하여 수권법 위반이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 모든 과정은 표면상 합법적인 법률 제정과 이에 따른 통치 방식에 의해 유지되었다.

6. 폐지

나치 체제의 근간이 되는 법률인 만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는 1945년 5월 8일에 이 법률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독일의 연합군 군정 통치기구인 연합군 관리위원회는 1945년 9월 20일에 관리위원회 법률 제1호를 제정해 수권법을 폐지했다.

7. 표면적 합법성 문제

히틀러가 '표면적으로' 합법적 틀 안에서 수권법을 제정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투표 전부터 좌파 반대 정당들은 무력에 의한 탄압을 받던 상태였다. 반대파들이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었냐와는 별개의 문제로 무력에 의한 반대파 탄압은 분명 불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투표는 괴링이 거느린 나치 친위대와 돌격대가 국회의사당을 둘러싼 상태에서 진행되었는데 이게 무슨 의미이겠는가. 그것도 단순히 위압감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대놓고 무력으로 위협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무력을 동원한 국회 통과 압박불법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이런 절차를 금지할 헌법 조항이 없었다. 또한 군인에 대한 정치적 중립 의무도 규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치당 SA를 만들고 독일 공산당 전위대를 만들어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무력 충돌을 벌일 수 있었다. 결국 무장세력을 금지할 법이 없는 상황이었으니 표면적으로 합법적인 절차가 되고 만 것이다.

그보다는 애초에 헌법에 정한 권한을 의회가 임의로 주고받을 수 있느냐에 대한 정당성을 따져보는게 맞다. 아무리 의회가 만든 법이라도 헌법을 뛰어넘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헌법의 개정도 의회가 하므로 사실 다수의 폭정이 이뤄지면 의미가 없긴 하다.

8. 반성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제1조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되지 아니한다. 이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책무이다.
② 그러므로 독일 국민은 이 불가침ㆍ불가양의 인권을 세계의 모든 인류공동체, 평화 및 정의의 기초로 인정한다.
③ 다음에 열거하는 기본권은 직접 적용되는 법으로서 입법권ㆍ행정권ㆍ사법권을 구속한다.

나치 독일이 무너진 후의 서독과 현재의 독일에서는 이 법률로 인하여 히틀러의 독재가 명목상 정당화될 수 있었던 과거의 역사를 반성하고, 헌법에 대한 충성 의무를 못박아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모든 정당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각 국가의 헌법 1조를 보면 그 나라의 헌정사가 느껴지는데 독일의 경우 기본권 조항이 1조다. 인권의 강조가 합법적 독재나 전체주의를 막는 가장 확실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체제를 이용해서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제2의 나치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한 이른바 방어적 민주주의가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어적 민주주의론은 합법적 독재 방지와는 큰 관계가 없고 반공주의에 치우친 시대적 상황의 결과물이라는 비판도 학계에서 거세다. 독일 국방군에 대한 미화와 비슷한 맥락이다.

하튼 이에 따라 헌법에 위헌정당해산제도를 도입하였으며 독일 연방헌법수호청을 신설하여 반민주적 행위와 사상을 감시하고 있다. 현재의 주요 감시 대상은 독일 민족민주당(NPD)과 독일을 위한 대안 네오나치를 포함한 극우 세력과 좌파당 내 극좌 인사들이다.[9] 실제로 서독 시절에는 나치당의 후신인 극우 정당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SRPD)과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던 극좌 정당 독일 공산당(KPD[10])이 연방헌법재판소의 위헌정당 해산 결정에 따라 해산된 전례도 있다. 당시 독일 공산당 해산 결정은 독일 국내외를 막론하고 큰 논란이 되었고 1968년에는 독일 공산당이 재창당되어서 원외 군소정당이긴 하지만 현재도 활동 중이다. 한국의 주류를 이루는 보수주의적 헌법학자들의 교과서에서 아주 자주 거론되는 판례다. 근래에 독일 민족민주당도 해산 청구가 되긴 했으나 무산됐다. 헌법수호청 요원이 신분을 감추고 입당하여 당 지도부까지 들어갔는데 이러다 보니 당 강령의 어디서 어디부터가 민족민주당 주동 세력의 것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신분을 감추고 입당한 요원들의 것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워서 헌법재판소가 해산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지금도 이 정당이 골칫거리가 되고 있지만 연방의회에는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 외에도 정치적 극단주의 세력이 정치권에서 세력을 떨치기 어렵도록 장치를 여럿 두고 있다. 예를 들면 연방 하원 총선에서 정당 명부식 비례대표 의석 배분 기준인 봉쇄조항이 무려 5%나 된다. 즉 5% 미만의 지지를 얻는 정당은 연방 하원에서 비례대표 의원을 한 명도 당선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괴상한 극단주의 정당이 지지를 조금 받는다고 의원을 배출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는 시도다. 반면 회원국마다 지역구와 의원 선출 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이 '5% 룰'이 위헌이라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판단이 나왔다.

이는 정당 명부식 비례대표를 도입한 다른 나라와 비교해 봐도 이례적으로 높은 기준치다. 대한민국 국회의 비례대표 의석 배분 기준은 3%이며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보통 1~2% 정도다. 독일의 5%는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 중에선 상당히 높은 기준이다. 듣보잡 정당으로 출발했다가 언제부터인가 이 5% 컷은 늘 넘겨 주요 정당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독일 녹색당의 사례가 정치학계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 거대 정당은 아니지만 사민당과의 연립 정부를 구성하고 장관을 배출하기도 하는 등 완전히 주요 정당이 되었다.

또 이 시절의 영향으로 현대 독일은 제2의 돌격대나 전위대 등 무력집단의 난립을 방지하기 위해서 경찰력이 굉장히 강하다. 현대 독일은 경찰의 시위 과잉진압이라는 걸 법원에서 거의 인정하지 않는, 즉 경찰의 자위권을 굉장히 존중하는 국가로 유명하다.[11]


[1] 영어로는 이 수권법을 Enabling Act of 1933이라고 부르고 정식 명칭은 "Law to Remedy the Distress of People and Reich" 정도로 직역된다. [2] 일본어로는 전권위임법(全権委任法)이라고 한다. [3] 바이마르 헌법은 헌법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특정 법률을 제정하여 헌법에 포함시키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수권법도 헌법에 포함되는 특정 법률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제정할 수 있었다. [4] 별도로 언급된 "바이마르 헌법 제85조 제2항 및 제87조"는 각각 예산 편성과 국채 발행에 관한 내용으로, 상식적으로는 의회 고유의 권한이어야 할 돈 문제까지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즉, 입법권뿐 아니라 예산 결정권도(이 둘은 대표적인 입법부의 권한이다.) 행정부로 넘어간 것. [5] "헌법 제68조에서 제77조"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입법 관련 조항들인데 법안 제출과 공포 외에도 국민청원/국민투표, 참사원의 항의권, 헌법의 개정에 관련된 룰 등을 담고 있다. 이게 통째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내 말이 곧 법이다'라는 뜻이다. [6]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서독의 경제부흥을 이끌었던 콘라드 아데나워 기독교민주연합 인사 대부분이 1930년대까지는 이곳 소속이었다. [7] 독일 민주당의 후신이다. 1933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과 연대를 통해서 5석을 얻었지만 수권법에 찬성하며 배신했다. [8] 히틀러의 전임 총리인 슐라이허 총리는 사민당의 봉기계획이 수권법 통과 몇 달 전 사회민주당보다 더한 나치 돌격대 40만과 공산 깡패들의 폭동이 함께 일어났어도 국가방위군 병력과 프로이센 무장 경찰로 충분히 막았을 거라고 판단했다. 사민당의 봉기 계획 자체가 사민당이 장악했던 '프로이센 경찰'이 자기들 편을 들어 준다는 전제 하에서 짜여진 것인데 프로이센 주와 경찰이 나치에 완전히 장악당한 시점에는 이미 늦은 것이었으며 한 축을 담당해야 할 공산당도 당시 한창 세를 불리고 있던 나치를 견제하지 않고 사민당 세력과 전력을 다해 싸우는 근시안적인 행보를 보였다. 프로이센 쿠데타 이후에야 뒤늦게 노선을 전환하여 사민당과 공동투쟁에 나섰지만 그간의 갈등으로 쌓인 악감정이 많았던지라 이는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방화 사건을 계기로 히틀러와 나치당은 공산당원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다. 에른스트 텔만을 비롯하여 4천여명의 공산당원들이 방화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면서 세력이 와해되고 말았다. [9] 좌파당은 구 동독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출신 인사들과 기타 좌파 계열의 정치인들이 합쳐진 정당이다. 구 동독 지역의 지지율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인 데다 정당 내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다양하기 때문에 정당 자체가 위헌적이라고 판단하기 애매한 부분이 많지만 당원의 3분의 1 가량을 연방헌법수호청이 주시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중 AfD는 2022년 독일 쿠데타 모의에 전직 연방의원이 참가한 사실이 확인되어 전면적인 조사를 앞두게 되었다. [10] 혼동을 막기 위해 '서독 공산당'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11] 어쩌다 한 번 이례적으로 독일 법원이 과잉진압을 인정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그 사건이 뭐였냐면 바로 우연히 시위대 근처를 지나가던 (시위와는 거의 상관없었던) 노인이 경찰이 쏜 물대포를 직격으로 얼굴에 맞고 실명한 사건이었다. # ## 이 정도 급은 돼야 법원에서 경찰의 과잉진압 판결이 나올 정도로 현대 독일은 경찰의 힘을 강하게 해서 다시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수권법이 통과되던 시절의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