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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돌프 히틀러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평가를 다룬 문서.2. 상세
히틀러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평가는 아마추어리즘으로 대표된다. 실제로 히틀러가 노르망디에의 상륙 가능성을 떠올렸음에도 정작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휘하 장군들을 설득하지 못했고 스스로도 납득한 바 있다. 바다사자 작전의 무산은 처음부터 독일의 해군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전제인 영국 전투기 사령부 전력 궤멸이 완료되지 못했기에 취소되었다.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독일의 경제는 약탈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폐쇄적인 경제였으므로 빠르게 한계가 찾아옴은 불보듯 뻔했다. 바다사자 작전이 취소된 이후 독일은 또다른 전선을 만들 곳이 소련말고는 없었고 소련을 치지 않으면 깨진 독에 물을 붓듯이 군 유지비용으로 경제가 줄줄 샜을 것이다.이런 히틀러의 특징은 그가 전문적인 군사 장교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물론 역사를 돌아보면 별다른 군사 교육을 받지 않고도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해 당시의 군사적 상식을 습득하거나 오히려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명장도 분명히 드물지 않다.[1] 허나 히틀러는 최소한의 군사적 식견이 존재할 뿐 본인의 다른 능력들을 제외하더라도 명장이라는 이름을 남길 수 있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이런 점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히틀러의 발목을 잡게 된다.[2]
히틀러 스스로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자신하고 있었는데, 그가 1차대전 당시 참호에서 근무한 경험 덕분에 책상머리에 앉아 끙끙대는 장교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험 덕분에 히틀러는 줄곧 프란츠 할더를 비롯한 참모 장교들과 의견이 충돌하면 실전 경험도 없는 주제에 떠든다고 모욕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의지가 부족한 겁쟁이라며 까내리고는 했다. 실제로 히틀러는 할더에게 엄청난 욕설을 퍼붓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할더, 당신은 뭘 하자는 건가?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 회전의자에 앉아만 있던 당신 같은 자들이 나에게 감히 군대에 대해 논하고 있단 말인가? 당신 같은 사람들은 단 한 번이라도 전상 흑장[3]을 달아 본 적이 있는가!"
히틀러의 이런 면모에 대해 빌헬름 카이텔과 같은 아첨꾼들이 불세출의 군사적 영웅이라는 식으로 치켜세운 덕분에 그런 자신감은 날이 갈수록 더 강해졌고, 초창기엔 기발한 작전을 알아보고 승인함으로써 얻은 눈부신 성과는 이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황이 뒤집혔음에도 주도권을 운운하는 등 승리에 의한 낙관주의와 현실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거듭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만다.
정치적 지도자가 군사적 문제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반드시 갖춰야 할 필요는 없고, 이는 샤를 드골을 제외한 당시 참전국 지도자 대다수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히틀러에겐 그 전문적 식견을 넘치도록 보충해줄 전술적 지휘관들은 수도 없이 많았어도, 전략적 식견을 보충할 인재는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히틀러에겐 그 부재를 만회할 안목이 어느 정도 존재했으나, 그조차도 어디까지나 밀덕질과 군복무 경험으로 전문가를 흉내내는 아마추어로서 가진 능력에 불과했다. 아마추어나 하급 장교라도 기본적인 군사학 지식은 있는 만큼 나름대로 그럴싸한 계획을 만드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체계적인 참모 교육 과정과 지휘 경험 없이는 변화무쌍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전장의 상황을 온전히 예측할 수 없고 이는 군사적 패배를 거듭할수록 더욱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이전까지 그 판단에 기대어 어마어마한 대박을 거둔 히틀러가 그 사실을 시인하는 대신 전술한 군사귀족들의 경우처럼 따서 갚으면 되지 하는 마인드로 무장했다는 점이고, 결과적으로 히틀러는 그 한 번의 역전승을 거두지 못한 채 몰락했다.
히틀러는 분명히 나름대로 군사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레벨의 이야기였으며, 작전이 실패했을 때 그 여파를 줄일 만한 전문적인 지식이 히틀러에겐 부재했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중재자 역할에 만족한 타국의 지도자들과 달리, 히틀러는 그럴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물론 히틀러 또한 그 점을 알고 있었으나, 스스로 그 결점을 만회하거나 전문적인 전략 수립 참모를 마련하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던 만큼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히틀러의 뿌리 깊은 군부 불신을 고려하면 설령 당시 전략적 식견이 탁월한 지휘관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 의견을 귀담아 들었을지 의문스럽다. 독일의 군사 천재들이 내린 판단을 히틀러가 일방적으로 무시해 나치가 패배했다고 말하기엔 어려움이 있으나, 반대로 말하자면 딱 거기까지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히틀러는 좋게도 나쁘게도 약간의 재능과 현장 경험이 있는 밀덕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이런 점은 히틀러 본인이 품었던 행정 체계에 대한 혐오와 (좋게 말하면) 예술가적 면모에서 기인했다는 평이 있다. 한 마디로, 히틀러에게 있어 전쟁은 국가의 이권을 두고 다투는 각축장이기 이전에 독일 민족의 생활권을 확보하기 위한 성전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히틀러 자신은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독일 민족을 위한 구세주이자 위버멘쉬였으며, 때문에 예술적인 찰나적 번뜩임으로 상황을 타개할지언정 진득하게 앉아 군사학을 공부하는 건 아리아인의 영웅인 자신에겐 걸맞지 않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실 정치와 군사 이야기하는 와중에 무슨 판타지 같은 이야기를 하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히틀러는 실제로 그런 인간이었다.
정리하자면, 히틀러는 일부의 타당한 군사적인 결정을 내린 바는 있었으나 군사적 능력은 치명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승리에 중독된 히틀러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나머지 합리적인 식견을 제공하던 참모들의 진언을 점차 무시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나치 독일의 파멸에 일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의 이런 자신감의 근간이 된 사병 경력은 오히려 독일 병사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기도 했다. 병사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는 예전에 이렇게 했는데, 너희는 어째서 그렇게 노오오오력을 하지 않느냐는 것.[4]
그 외에도 밀덕답게 신무기 개발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서 '보복무기' V1, V2의 연구를 지원하기도 했다. 덕분에 인류의 로켓 과학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으나 무기 자체의 성과는 가성비가 처참했다. V2의 경우 런던에 총 1358발을 쐈는데 사망자는 2754명. 물론 독일 측의 인명 손실은 없다시피했고, 일방적으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장점도 없지는 않았지만 가성비가 저래서야.
거기에 대형 슈퍼병기에 대한 환상이라도 있는지 독소전쟁 개전 즈음에는 1000톤급 차체에 순양전함용 주포를 탑재한 전차 란트크로이처(육상순양함) P.1000 라테의 개발을 지시하기도 했으나,[5] 애초에 현실성이 없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에 의해 개발이 취소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중전차에 대한 로망을 버릴 수 없었던 히틀러는 결국 포르쉐 박사에게 지시하여 200t급의 괴물 마우스 전차를 내놓게 하는데, 그것도 포르쉐 박사가 가져온 초안을 직접 손보면서 어설픈 수정사항들을 일일이 기록하는 등 밀덕질을 보여준다.
그래도 부정적인 영향만 미친 것은 아니어서 3호전차에 장포신 주포를 장착해야 한다고 닥달했는데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그의 판단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역사학자들은 히틀러의 이런 전차에 대한 비정상적 관심이 1차 대전 도중 일개 보병으로서 참호전을 겪었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 추측하고 있다. 물론 국가의 지도자가 무기에 관심을 가지는 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관심을 갖는 지도자가 많았으므로 히틀러만 특이한 건 아니다.[6][7]
그래도 의외로 인도적인 결단을 내렸던 적이 있었다. V1 로켓을 개량해서 사람이 직접 탑승해 목표물로 유도하는 자폭 병기의 개발을 건의하자, 히틀러는 "자살 공격은 독일 민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반대해서 시제기만 제작하고 끝났다.[8]
3. 히틀러의 군사적 평가
3.1. 긍정적 평가
단순한 결과만 두고 보면, 히틀러는 분명 어마어마하게 넓은 영토를 손에 넣었다. 동맹국의 강역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영국을 제외한 유럽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성기에는 서유럽은 물론 동유럽, 북아프리카 대부분과 스칸디나비아반도가 나치 독일 및 추축동맹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독소전쟁 개전 초기에는 유럽 러시아 영토마저 거의 점령할 뻔 했다. 최전성기 때 나치 독일 인구는 9200만에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등 동맹국과 괴뢰국을 합치면 소련의 인구와도 맞먹었다.뿐만 아니라 슈투카에 싸이렌을 달아서 재미를 보거나[9] 스스로 스케치한 유럽 전선 서부 방벽에 대한 토치카는 아마추어가 그린 주제에 육군 사령부의 이의 없이 원안대로 채택된 적도 있었다. 다른 장군들과 달리 파드칼레가 아닌 노르망디에 연합국의 상륙 가능성이 있다 생각하기도 했고,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공세가 나치의 바르바로사 작전 3주년인 6월 22일쯤 시작되리라고 예상하는 등 날카로운 모습도 간혹 보였다.
히틀러의 군사적 결정으로 인한 승리들은 비록 그렇게 많지는 않으나 이 결정들이 2차 대전의 결정적인 국면에서 아주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명백하다. 앞서 히틀러의 수많은 실책들이 있었으나 애초에 히틀러가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나치 독일은 그까지 세력을 확장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치 독일에게는 대단한 업적인 셈이다.
3.1.1. ' 낫질 작전'의 승인
'낫질 작전'은 기존의 황색 상황(Fall Gelb[10])과는 다른 차원에서 구성되었다. 우선 공수부대가 로테르담과 에반-에마엘 요새에 투입되었고, 이후 루프트바페의 폭격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의 공군기지에 행해져 이들의 항공기 운용 능력을 마비 시킨다. 기존의 주공이었던 우익의 B집단군은 그 규모가 줄어든 채로 조공을 담당했는데, 이들은 벨기에를 정면으로 공격, 연합군을 벨기에 내부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여기에 묶어둔다. C집단군은 마지노선에 대한 제한적인 공세를 실시, 마지노선에 위치한 프랑스군의 이탈을 방지하는 한편 가능하다면 교두보를 마련한다. 주력이 된 중앙의 A집단군은 벨기에 남쪽의 룩셈부르크를 지나 아르덴 숲을 돌파, 디넝과 스당을 통과하여 솜강 까지 도달한다.[11]그러나 만슈타인이 이러한 작전안을 건의하자,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할더가 이끄는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끝까지 반대하였고 오히려 만슈타인을 새로 창설된 후방의 제38군단장으로 사실상 좌천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반대로 만슈타인에게 38군단을 방문한 히틀러와 독대할 기회를 얻게 되는 큰 행운이 되었다.
당시 히틀러는 독일 총 참모본부가 제시하였던 황색 상황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만슈타인이 제안한 낫질 작전을 직접 듣고는 곧바로 허가하였고, 곧 총통의 지시로 낫질 작전이 준비에 들어갔다.
이 작전이 실행되면서 프랑스 육군은 전력이 양분되었고 결국 프랑스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과 같이 됭케르크라는 해안 도시까지 밀리게 된다. 영국 대륙 원정군과 프랑스군의 철수를 허용하는 실책[12]을 저질렀으나 이미 승기는 독일군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당시에 참모장이었던 할더를 비롯한 육군 수뇌부들은 1차대전 때의 슐리펜 계획과 거의 다름이 없는 황색 상황을 계획하였는데[13] 만슈타인의 전략안과 히틀러의 과감한 결단으로 인하여 그런 진부한 계획은 취소 되고[14] 참신한 방법의 침공 계획이 수립되었던 것.
이때 만약에 히틀러가 아니었다면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은 묻혔을 것이고 원래의 황색 상황이 시행되었을 텐데, 그리 되었다면 과거 1차대전 때와 같이 끝없는 대치전이 이루어져 결국 그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패전을 되풀이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15]
만슈타인 계획안의 가치를 알아본 히들러의 안목으로 독일이 4년간 서부전선에서 질질 끌다가 결국 패전한 1차대전과는 달리 2차대전에서는 불과 6주 만에 서부전선을 정리하게 되는 엄청난 성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 결정은 2차 대전에서의 가장 중요했던 결정들 중에 하나였다고 볼 수 있는데 독일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서부전선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승리에서 얻은 결과물들은 어마어마해서 그러한 결과물들을 바탕으로 독일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결국 소련을 공격할 야심을 실행에 옮길 자신을 얻게 되었다.[16]
3.2. 긍부정이 엇갈리는 평가
3.2.1. 모스크바 공격 거부
이 점은 미묘하다. 물론 모스크바는 소련의 수도로서 독소전쟁의 최중요 목표 중 하나였다. 모스크바는 군사, 정치, 공업의 중심지이자 도로와 철도망의 요충지였으며 소련군은 붕괴 직전의 상황이 되었고, 이 독소전쟁의 결정적인 지점에서 승리를 거두어 소련군의 주력을 괴멸시킨다면 보다 쉽게 우크라이나 공업지대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키예프 공략을 우선하고 키예프 함락 후인 늦가을 10월 2일에야 모스크바 공격을 명함으로써 독일군은 소련군의 저항과 동장군으로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하고 이는 독소전쟁뿐만 아니라 2차 대전 독일군 패배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된다.[17]그러나 최근에는 키예프 공략 이전에 모스크바 공세를 행하였다면 키예프의 소련군으로 인하여 배후가 위협당해 모스크바 공략이 더욱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애초에 툴라에 당도한 구데리안 기갑집단이 모스크바를 공략할 여력이 있었는지부터가 의문시 되는 중이다. 쾌속진격은 보급선을 연장시킬 뿐만 아니라 기갑전력등 즉각적인 보충이 어려운 손실을 누적시키고 있었고 키예프 전투로 시간을 벌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런 너덜너덜한 병력으로 공략이 가능할 정도로 모스크바의 방어수준이 낮지 않았다.
3.2.2. 1941년 키예프 전투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연전연승을 하던 중 8월 3일, 히틀러는 일시적으로 남쪽의 우크라이나 키예프 공격을 위해 모스크바 전진을 중지했다. 중부집단군에 비해 더 강한 소련군의 저항으로 인한 남부집단군의 진격속도 떨어지자 키예프 돌출부가 형성되었는데 그곳에는 백만에 가까운 소련 남서 방면군이 있었다. 이 돌출부의 이 거대한 병력은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중부집단군에 크게 위험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18]구데리안은 모스크바 진격이 우선이라며 히틀러를 설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8월 12일 34 총통 지시령에서 프란츠 할더, 페도어 폰 보크, 하인츠 구데리안 등 모스크바로 바로 진격하자는 주장과 모스크바 진격을 시작하기 전 중부 집단군을 남부 집단군의 키예프 방면으로 진격시켜야 한다는 히틀러의 의견 사이에서 타협을 이루게 되었다.
북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을 각각 지원하기 위해 재배치되었던 중부 집단군의 2 기갑 집단과 3 기갑 집단을 중부 집단군으로 돌린 이후 북부 집단군의 4 기갑 집단과 함께 목표로 돌리고자 했다. 그리고 이 3 기갑 집단은 중부 집단군 지휘 하에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8월 18일, OKH가 히틀러에게 동부에서의 연속적인 작전에 대한 전략적 보고서(Denkschrift)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북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이 중부 집단군의 도움 없이 목표 달성이 가능하기에 모스크바로의 진격이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로의 결정적인 작전을 시작하기까지 겨울이 오고 있어 충분한 시간이 없다는 것에 대해 지적했다.
8월 20일, 히틀러는 자신의 우선 순위에 대해 독일을 위해서 산업 지역을 먼저 점령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8월 21일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의 알프레트 요들은 히틀러의 지시 사항을 요약한 보고서를 육군총사령관인 발터 폰 브라우히치에게 전달했다. 이 계획은 겨울이 오기 전까지 크림 반도 및 돈 강의 석탄 산업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강조했다.
8월 23일 구데리안이 직접 동프로이센 총통 본부에서 히틀러를 면담했지만 결국 설득하는데 실패하였다.
즉 수많은 군수뇌부 특히 중부집단군 2기갑단장 구데리안이 계속 해서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히틀러는 자신의 갑작스러운 결정을 끝까지 추진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구데리안은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히틀러의 결정을 지지한다. 반면 할더는 이러한 결정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본인도 딱히 유망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히틀러의 중부 집단군을 이용하여 남부집단군과 함께 소련군을 포위한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그들은 체계적으로 2개의 기갑군이 만든 포위망을 줄이기 시작했다.
키예프 동부의 마지막 군이 9월 26일 항복하였고 독일군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승과 함께 약 60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 히틀러는 이 전투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라고 말했다.
만약 여기서 키에프를 무시하고 모스크바를 공격한다고 가정하면 모스크바에 배치된 소련 전력은 실제 역사에서 모스크바 전투 이전에 손실한 병력이 그대로 보존되므로 오히려 더 강력한 상태가 되고 거기에 키에프 방면에 배치된 60만 명의 소련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독일군 전력을 할당해야 할 것이다.[19] 그러나 키예프 전투에서 소련군을 갈아버리면서 후방을 위협하는 적이 소멸했으니 오히려 키예프 전투가 마음놓고 모스크바를 공격할 수 있게 해준 바탕이 되었던 셈으로 냉전 중이었던 1970년, 서방과의 인터뷰에서 해당 당시 서구 군사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주코프가 조소를 날리며 일축했던 일화가 있었을 정도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계속 되지만 키예프 방면 남부집단군의 그 수많은 소련 병력을 그대로 놔두고 중부집단군이 모스크바로 진격을 하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나도 컸다. 또한 모스크바에는 이미 수많은 전투 준비가 되어있었으며 중부집단군이 키예프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더 빠르게 모스크바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모스크바 함락은 힘들었다는 게 많은 군역사학자들의 의견이다.
3.2.3. 쿠르스크 돌출부 공격 연기
기갑전력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작전 개시일을 7월달로 2달 이상 연기하였고, 이미 우수한 정보수집 능력으로 치타델 작전계획을 파악한 소련군은 그 동안에 6겹으로 된, 대전차지뢰로 도배된 수백km길이의 방어선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독일 또한 준비가 안 되어있기는 마찬가지였으며 소련군의 방어선은 이미 상당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작전 개시를 미루었던 원인인 증강된 기갑병력들 중 판터는 쿠르스크 남부전역에서 200대중에 1/3 정도인 60대 이상이 작전 초반에 가동불능이 되면서 작전을 연기하였던 이유가 무색하게 되었다. 물론 이 판터가 전부 제대로 돌아갔어도 뚫을 가능성은 희박했을테지만. 그리고 단순히 기갑부대를 보충하려고 미룬 게 아니라 하르코프 전투 이후 해빙기의 진흙탕으로 공세를 펼치기에는 상황이 너무 안 좋았던 점도 일조했다.이런 주장은 만슈타인이 그의 회고록인 '잃어버린 승리'에서 밝혔던 내용인데, 사실 만슈타인이 주장하는 시기에는 아직 독일의 병력이 제대로 집결하지 못했고 또 소련군의 방어선 역시도 이미 그전에 상당수 준비되어 있었고 수많은 예비대들도 마련되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결국 이러나 저러나 승리를 거두기는 어려운 작전이었다. 즉, 히틀러의 선택이 그리 잘못된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세한 정보는 쿠르스크 전투 문서 참조.
3.2.4. 라트비아 북단에 고립되어 있던 쿠를란트 집단군을 빼오지 않은 것
쿠를란트 집단군[20]은 1945년 5월 항복할 때도 19만 명의 대병력이 남아있었다. 그리하여 독일 항복 이후에도 독일의 점령지인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가 남아있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나치 독일 항복 이후 이 2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은 사실 제때 후퇴했으면 동프로이센으로 충분히 후퇴할 수 있었지만 히틀러의 뻘짓인 사수명령으로 1944년 10월 중순부터 포위되어 고립되어 있었다. 그나마 이곳은 발트해로 바다가 있기 때문에 유보트를 비롯한 해상보급으로 종전까지 계속 버틴다. 늦어도 1944년말 시점에서 쿠를란트 반도를 포기하고 병력을 철수시켜서 동부전선에 돌리든, 서부전선에 돌리든 하는 게 훨씬 나았다. 히틀러는 벌지전투란 뻘짓을 하면서 인력난으로 노인, 어린 소년까지 박박 긁어서 20만 명을 투입하는데, 정작 동부전선의 정예병력 20만 명을 고립된 라트비아 북단에 방치했다.이 병력을 철수하자고 제안한것은 구데리안이지만 히틀러가 여기 병력을 남겨서 이 지역을 사수하고자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되니츠는 더 많은 유보트 승무원과 유보트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발트해의 제해권을 지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련 육군과 해군의 발트해 진입을 막아야 했고 되니츠는 이 지역을 사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발트해의 제해권은 유보트 훈련 뿐 아니라 전쟁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철광석을 운반하는 데도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 덕분에 독일 해군은 종전 직전까지 소련 해군을 그럭저럭 막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소련군 잠수함들이 독일군이 탑승한 수송선들을 족족 잡아들이고 있었으므로 쿠를란트 집단군의 철수 자체가 불가능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 즉,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 보았을 때 마냥 히틀러만의 잘못이라 보기는 어려운 상황인 것. 결국 쿠를란트 집단군은 1945년 3월 경, 소련군에 의해 완벽하게 궤멸되나 쿠를란트 집단군이 방치한 수많은 무기들이 그대로 발트 3국의 반소 게릴라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반소게릴라들은 이를 바탕으로 1950년대까지 소련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인다.
3.3. 부정적 평가
3.3.1. 소련 공격과 대미 선전포고
영국과 한창 전쟁 중이던 1941년, 히틀러는 "소련을 공격한다"[21]는 의사를 피력했고 결국 영국 침공 실패 이후 전력을 재정비하여 소련을 공격한다. 기대와는 달리 정작 일본은 도와줄 의사도 능력도 없었고 소련과 불가침 조약까지 맺은 상태였으며, 독일한테 얻어맞은 영국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또 소련 침공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식민지 주둔 잔여 프랑스군들과 영국군을 상대로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소련이 가장 취약하던 시점이었고 여기에 스탈린의 환상적인 트롤링까지 겹쳐서 초반에 독일군은 엄청난 전과를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모스크바 공방전으로 인해 궁극적인 목표였던 모스크바 점령은 실패했고, 스탈린그라드에서 병력 30만 명을 말아먹은 히틀러의 뻘짓 덕분에 이후 인민 웨이브에 털리게 된다. 그리고 당시 독일은 유럽을 거의 다 집어삼켰고 소련은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높이고 싶어했던 차에, 석유와 같은 필수 전쟁물자인 천연자원과 식량이 모자랐으므로 경제적으로도 유용한 동유럽을 눈독들이고 있던 히틀러가 언젠가는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게다가 시기적 이로움도 있었다. 스탈린이 정적 대숙청을 하면서 여러 장성들이 처형당해 지휘체계가 엉망이었고 더욱이 히틀러가 소련의 기술력과 생산력을 과소평가[22][23]한 것도 한 몫을 했다.한술 더 떠서 소련 침공 개시 후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는 일본 제국이 미국을 건드리는 초대형 병크를 저질렀지만, 이에 매우 기뻐하며 본인들도 미국에게도 선전포고했다. 물론 히틀러가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더라도 시기 자체가 늦춰지는 정도지 미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독일군 장성들도 대미 선전포고에 반대하지 않은 데다 말로는 중립이라고 하면서도 영국 편을 들면서 잠수함을 선전포고 없이 격침시키는 미국에 분노한 해군은 내심 대미 개전을 바라고 있었고 무엇보다 양면전쟁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소련에게도 양면전쟁을 벌이게 할 수 있는 일본의 참전이 절실한 상황에 일본이 "독일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면 우리도 독소전쟁에 참전하겠다"고 뻥을 쳤으니 일본에게 빅엿을 먹은(...) 히틀러만 바보라고 까기도 좀 뭣한 경우.[24][25]
사실 1차 대전 때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술적 차원의 현란한 기동과 포위 섬멸 몇 차례로 나머지 전세계 열강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을 독일 전체가 공유하고 있었다. 밀덕후 총통 혼자만이 아니라, 이를 좋다고 따라한 군부와도 참 손발이 잘 맞았다. 그래서 이는 당시 독일이란 나라 전체의 국가 의식과 정치 문화에 대한 비판이라면 모른까, 히틀러 혼자만의 잘못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점을 감안하면 애초에 현대에 와서는 이렇게 아무리 봐도 망상병으로 밖에 안 보이는 히틀러의 대외인식에 그토록 합리성을 중요시한다는 프로이센 군부가 무력하게 끌려다닌 것 또한 당시 동방의 슬라브 국가들은 서구 문명을 파괴하려는 열등민족으로 보면서도 또 역설적으로 서방의 영미와 프랑스는 자유주의적 퇴폐성 때문에 끝장난 문명으로 보았던 전간기 독일의 독특한 우월주의적 사상, 선민의식이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3.3.2. 공수부대 투입을 꺼림
크레타 전투 이후 공수부대의 피해가 매우 심각하게 크다는 이유로 그 피해가 발생하게 된 원인을 개선하지 않고 오히려 공수부대의 공수작전투입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최정예 병사들을 방치하고 주요 작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주로 독소전쟁과 몰타. 몰타에서의 전투를 말아먹으면서 북아프리카 전선의 보급이 굉장히 어려워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알다시피 공수부대는 적진 후방에 낙하해서 유격전을 통해 후방을 노리거나 적의 보급선 공격 혹은 전략거점 수호 등등 여러가지 역할이 가능한 특수부대인데 정작 공수작전을 안한다면 이들은 그냥 알보병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팔쉬름예거의 크레타 전투에서의 피해는 극심했지만 공수사단들의 핵심이 뿌리뽑힐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작전당시 투입된 신병들 중 생존자들은 극한의 전장에서 최고의 베테랑이 되어 살아남은 공수부대의 전투력자체는 더 좋아졌다. 이는 보충병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오히려 훗날 이 공수사단들이 알보병으로 이탈리아 전역과 노르망디전역에서 압도적 우세의 연합군을 상대로 호각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히틀러의 공수작전 금지령은 좋은 최정예 공수부대를 그대로 말아먹은 어리석은 수라고 할 수 있다.몰타 항공전에 공수부대를 적극 투입했다면 몰타를 점령했을 가능성은 상당했는데, 이는 나치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을 포함한 추축국에게 굉장히 뼈아픈 지적으로 다가온다. 루프트바페의 활약으로 방공전투기의 씨가 말라버린 몰타섬은 폭격에 고스란히 노출 되었고, 보급 물자를 실은 수송선들 또한 폭격기에 의해 차단 당했다. 그야말로 몰타는 말라죽어가고 있었고 여기에 공수부대를 투입했다면 섬을 점령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를 전제로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이 엘 알라메인 전투 직전까지의 성과를 그대로 거두어 준다면 얘기가 꽤나 재밌어지는데, 기존의 아프리카 군단이 겪던 공습과 수송선의 상실, 토브록항의 기능부전 등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연합군 공해군의 작전은 크게 제한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엘 알라메인 전투를 치렀다면 6군의 방어선을 분쇄, 알렉산드리아까지 진출할 가능성도 결코 낮지 않았다.
물론 크레타에서 공수부대를 갈아마시다시피 한 것이 어디갔을까마는, 단순히 능력 부족이었던 것과 애초에 못하게 막아버린 것은 차이가 아주 현격하다. 전자는 운이나 기타 변수로 극복할 여지가 있지만 후자는 가능성을 아예 0으로 보내버리기에 공수작전을 금지한 것은 히틀러의 치명적인 실수들 중 하나이다.
3.3.3. 신무기 도입 중지
42년에 소총과 기관단총을 통일하고 보병화력을 획기적으로 높여줄 신무기 FG42와 MKb42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생산성의 문제와 기존의 무기들의 재고 등을 문제로 계획을 중지시켜 화력을 극대화할 기회를 날려버렸다. 심지어 MKb42는 실험명목으로 우회생산해서 보낸 소수물량으로도 엄청난 성과를 거두어 전선에선 빨리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어차피 돈은 들어가고 손 닿는대로 이 총 저 총 다끌어다 쓰는 바람에 보급은 잡다하니 아예 몇 가지만 지정하고 물량이 매우 많은 러시아 쪽 노획품을 제외한 나머지는 탄약을 공용화(7.92x57과 7.92x33mm) 하든가 아니면 도태시키는 것이 더 나은데도 억지를 부려서 하지 않았다. 아예 생산을 안 할 것이면 모를까 나중엔 MKb42같은 것도 잘만 생산해서 쓴 것을 보면 실책이다. 그나마 MKb42는 탄종이 다르니까 그럴 수 있다 쳐도 FG42는 탄약도 같은데 이런 짓을 저질렀다.[26]이 문제는 항공 전력 측면에 들어가면 더 문제다. 마음만 먹었다면 Me 262를 Ar 234와 마찬가지로 42년 10월 부터 생산 가능했었지만(심지어 이 Me 262는 현재 우리가 아는 Me 262와 별 반 차이가 없다.)(시제기 3대만 만들라는 지시가 내려왔음에도 1942년에 피스톤 엔진을 사용한 시제기가 시험비행에 성공했으며 BMW의 003 터보제트 엔진을 사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 엔진이 자꾸만 말썽을 부렸는데, 한번은 시험비행 도중 엔진 트러블이 일어나서 예비로 장착했던 융커스 피스톤 엔진을 쓸 수밖에 없었고 결국 메서슈미트 사는 더 크고 무겁지만 쓸 수 있는 엔진을 달기로 했는데 그것이 바로 융커스 유모 004 터보제트였다. 그리고 이로써 Me262는 드디어 제트 전투기가 되었다.)[27] 히틀러가 총통령으로 오래 걸릴 것 같은 무기사업은 싹 다 중단하라는 명령을 1940년 2월 9일에 내리는 바람[28]에 늦어진 것이었다. 아라도 234는 그나마 43년부터 날았지만 메서슈미트 262는 43년에 테스트 전투기로 전투행동에 들어가서[29] 모스키토를 격추하는 등 성과를 거두고 있는데도 히틀러가 폭격기로 배치 운운하는 것 부터 시작해서 온갖 태클을 걸어버리는 바람에 별 가망 없는 44년에야 전투기로 실전배치 되기 시작했다. 6개월에서 1년이상 개발기간이 소요될 것 같은 무기체계 개발은 폐기하라는 명령 덕분에 항공 전력 말고도 지상전력에도 치명타를 먹였지만 항공 전력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42년에만 실전배치 가능했던 물건만 하더라도 V-1 로켓, Fw190D 도라 전투기, 대형 과급기를 장착한 고공용 DB605엔진, 엔진 출력을 급격히 높이고 출력의 지속시간까지 개선한 MW50부스터, 세계 최초의 제트전투기인 Me 262, MKb42 등의 생산이 1944년까지 미뤄졌다. 그나마 푸쉬가 이루어져서 개발과 생산이 제때 된 것이 전차들일 정도.
3.3.4. 현지 사수 및 후퇴 금지 명령
전쟁 중 상황에 따라서 방어전을 수행 중인 병력 전부를 갈아넣어서 까지도 고수해야할 전략ㆍ전술적인 지점이 있을 수 있다. 단적으로 교두보로부터 확보한 종심이 아주 얕은 경우, 기껏 확보한 교두보를 상실한 이후의 소모가 극히 심해질 것으로 점쳐진다면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현지 사수를 명령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분명 전략적 후퇴라는 것은 존재한다. 수에서 수십 킬로미터 물러난 지점에 하천이나 산악과 같은 방어상의 이점을 증대시키는 지형이 있거나, 미리 건설 해둔 방어선이 있다면 해당 지점까지 물러남은 지극히 타당하고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다. 전략에 있어서 후퇴는 대체로 결정적인 회전에서의 패배로부터 기인하지만, 결코 그 이득이 작지만은 않다. 보급선의 단축으로 병력과 장비의 보충 또한 비교적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고, 비전투 손실 또한 줄어든다. 기존에 건설해 놓았던 방어시설을 활용할 수 있게 되고, 또 지연전으로 확보한 시간은 이를 강화하는데 투자할 수 있다. 반대로 적군은 보급선이 길어지고 기존에 누리던 방자로서의 이점은 대체로 상실하게 된다.히틀러는 이러한 전략상의 후퇴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전선 물리기에 대해 극렬히 반대했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지휘관들을 패배주의자로 몰아 경질하기 일수였고, 그 태도는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심해져만 갔다. 이는 동부 전선에서 여러 재앙을 초래했고, 동시에 항복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반응해 불필요하게 사상자를 늘리기도 했다. 아래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지만, 드네프르 강의 하천방어선을 포함한 동부방벽 건설 거부 조치도 히틀러의 이러한 기조의 결과였다. 주도권에 대한 집착이 과도했고, 명백히 방어로 전환해야할 시점임에도(혹은 한창 방어전을 펼치는 도중임에도) 주도권을 회복하고자 무리한 공세를 계획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비단 동부전선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열린 서부전선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그 발단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또한 그러했다. 해당 상륙작전은 포티튜드 작전이라는 이름의 수개월 전부터 이루어진 기만작전을 포함한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작전이었다. 비록 해변에서의 저항은 거셌으나, 내륙에서의 병력 재배치는 크게 지연되었다. 연합군 또한 보카쥬(bocage)와 hedgerow라고 불리는 일종의 잡목으로 된 울타리를 이용한 독일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막혀 해안에 인접한 내륙 지역에서 빠져나오는 데에 고전하고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방어전에서의 성과지 그들을 다시 해변까지 몰아낼 수 있다는 식의 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상륙 작전의 규모를 몰랐던 히틀러는,[30] 그들을 도버해협의 바닷물 속에 수장시키기를 바랬고 그에 더해진 여타 이유로 지연된 후퇴는 팔레즈에서의 재앙을 초래했다.
3.3.5. 바르바로사 작전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크리스마스 전까지 전쟁을 끝낸다는 근거없는 망상으로 월동장비 지급을 금지해서(뒤늦게나마 괴벨스가 수습하긴 하였지만) 1941년 12월 말의 시점에서 동상자가 10만 명 이상 발생. 단 이 역시 히틀러 혼자만의 실책이라 평가할 수 없는 것이 애당초 독일군 전체가 상황을 전혀 모른 채 망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11월 7일 오르샤에서의 회의에서 할더는 '최대', '최소' 두 개의 경계선이 그려진 지도를 준비해왔는데 '최소'는 말 그대로 육군이 틀림 없이 도달 가능한 지점을 의미했다. 이 최소 진출선이 모스크바 동쪽 260km를 통과하여 로스토프에서 끝난다. 이것만으로도 황당한데 최대경계선은 소련의 동쪽으로 120~150km를 더 전진해 볼로그다, 고르키 산업지대를 포함하고 남동쪽으로는 320km를 더 뻗어서 스탈린그라드 동쪽으로 50km를 넘어 마이코프 유전지대까지 이어졌다. 이것만으로는 할더가 낸 보고서이니 할더만 정신이 나갔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또 골 때리는 것은 동부전선 외국군 정보과는 11월 중순 소련이 200개 주요 부대를 보유했으나 그 부대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해 실질 전투력은 50% 이하라고 보고했다. 이 시점의 소련은 373개의 주요 부대를 보유하였으며 비교적 무장, 훈련 상태도 좋았던 극동 사단들까지 모조리 때려박고 있었다. 설령 이 시점의 일부 장교들은 더 이상의 전진이 힘들다는 정도는 깨달았을지언정 여전히 소련의 저력을 완전히 얕잡아 보고 있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이미 이 시점(41년 11월 10일)에서 전사, 부상, 실종을 전부 합쳐 장교 2만 2432명, 사병 66만 3676명에 달하였고 편제과에서는 136개 사단의 전투력이 83%까지 저하 되었다고 진단하였고 수송체계 역시 라스푸티차가 끝나자 몰아닥친 한파에 차량과 기관차도 피해를 입으며 도로가 얼어붙은 효과가 상쇄되어 버린 판국이었다. 당연히 동계장비 지급이 쉽지도 않았는데
3.3.6. 청색 작전 말아먹기
아군 병력 85만 명을 스탈린그라드와 캅카스에서 말아먹었다. 스탈린그라드 하나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국에 드넓은 캅카스 지역과 바쿠 유전까지 전부 점령하겠다는 무리한 작전안으로 전력을 불필요하게 분산시켰다.[31]이렇게 날려버린 병력 중에서 45만 명은 동맹군 쩌리병력이라 치더라도 6군(+ 제4장갑군 일부)은 독일군 중에서도 최정예 병력이었다. 이들은 포위당하고 보급까지 차단당해 불리한 상황에서도 독일 남부집단군의 최정예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게 소련군을 110만이나 줄여놓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간 투입된 소련군은 결코 고문관들이 아니었고 하나하나 최정예였으며 소련군의 역량이 모두 결집 되어 있었음에도 끝까지 소련군을 상대로 높은 교환비를 보이다가 전멸했다. 만약 이들이 이렇게 소모되지 않고 살아남아 정상적인 작전에서 충실한 보급을 받아가며 작전했다면? 소련군이 독일군을 완전히 포위하기 직전에 6군 사령관이었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B집단군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소련군의 서쪽 포위망을 돌파하여 후퇴하겠다는 의견을 전달했으나, 망상에 젖어 있던 히틀러는 후퇴를 허가하지 않았다.[32] 결국 제6군은 완전히 고립된 채로 괴멸되어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그나마 파울루스가 소련군을 묶어두는 사이 A집단군은 무사히 탈출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파울루스는 애당초 스탈린그라드 시가지 진입이 아닌 기동포위로 스탈린그라드 수비 병력을 고사시키면서 응원군을 외곽에서 처부순다는 지극히 옳은 작전을 계획했지만 히틀러가 고집해서 시가지로 진입했었다는 것. 그리고 정확히 주코프는 파울루스가 계획했던 것과 비슷하게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해 6군을 고사시키는 동시에 외곽 방어선을 강화에 만슈타인의 겨울폭풍작전을 막아냈으니 스탈린그라드의 패전은 빼도박도 못한 히틀러의 실패작. 그리고 히틀러의 이 초대형 삽질 덕에 독일은 독소전쟁 주도권을 소련군에게 넘겨주며 사형장 티켓을 예약하게 된다.[33]
3.3.7. 성채작전의 승인( 쿠르스크 전투)
스탈린그라드에서의 패배 이후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사실상 공세능력을 상실했으나 하리코프에서의 승리에 고무된 만슈타인은 쿠르스크의 돌출부에 대한 공세작전을 입안한다. 이는 사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착 짙어진 것과 점점 강성해져가는 소련군에 대한 부담감에서 비롯된 자포자기와도 같은 계획이었으나, 입안자인 만슈타인과 승인자인 히틀러를 포함한 다수의 고위층에게 이러한 인식은 없었다.[34] 절대적인 약자가 상대적으로 약한 전쟁 형태인 공격을 택하는 것은 히틀러가 읽었다던 전쟁론에서도 어리석다고 말하는 일이었고, 성채작전의 결과 또한 이를 다시금 입증해냈다. 이러한 성채작전의 승인은, 공세 시기에 대한 조정 이전 부터 잘못된 것이었고 이는 독일군의 동부전선과 히틀러 그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되는 판단이었다. 이는 하술된 동부방벽과도 연관이 있었으며 쿠르스크에서 병력을 대거 상실한 독일군은 동부전선을 안정시킬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3.3.8. 동부방벽 건설 거부 (1943년 3월~8월초)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드네프르강은 10km에서 최대 22km 이상까지 가는 아주 어지간한 넓은 강폭지대가 크게 세 덩어리나 있다. 이를 이용하면 상당한 길이의 전선축소가 가능하고, 강폭이 좁은 지대를 요새화하여 제대로 방어선을 구축한다면 소련군은 시체로 강을 메우다시피 하며 축차투입을 강요받을 수 밖에 없게 된다.
구데리안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곳을 요새화할 것을 1943년 3월부터 건의했으나 히틀러는 '후방에 요새를 건설하면 장병들이 최선을 다해서 싸우지 않을 것'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이를 각하한다. 뒤늦게 쿠르스크를 말아먹고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된 1943년 8월에 되어서야 동부방벽 건설을 허가받아 발터 모델 주도로 판터-보탄 라인을 건설하지만 제대로 된 방어선을 축조할 시간이 모자랐다.
따라서 본디 보다 강력하게 축조되어, 보다 큰 손실을 야기시킬 수 있었던 동부방벽은 참호 따위로 엉성하게 구축된 채 소련군을 맞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형 자체가 워낙 요충지로 그래도 소련군이 고전하게 만드는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소련은 독일군의 퇴각 명령이 늦게 떨어지는 것을 최대한 이용하였고, 현지 빨치산들의 협조를 받아 9월21일에 재빨리 강건너 첫 교두보를 만들어버린다. 한 곳이 뚫리자 교두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결국 드네프르강 라인은 허무하게 뚫려버린다.[35]
게다가 히틀러가 드네프르강 동쪽의 동부전선 독일군에게 드네프르강 서쪽으로 후퇴를 허용한 것은 9월 15일이었다. 이 때 남부집단군의 상당수가 드네프르강 동쪽에 있었는데 강을 건너 후퇴한 병력은 후퇴시기를 놓쳐서 소모되고 피로가 쌓여 전투력이 급감한 부대 뿐이었다.
결론적으로 독일군은 재정비할 시간을 잃고 후퇴하는 동안 수많은 장비와 인력을 잃으며 와해되는 결과를 겪게 되었다.
다만 현지 사수 명령과는 다르게, 히틀러는 처음에 쿠르스크 돌출부보다는 판터-보탄 라인의 핵심지인 도네츠 강 교두보를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능한 쿠르트 차이츨러 육군참모총장과 남방집단군이 입은 피해를 생각하지 않고 무모하게 작전을 추진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불협화음으로, 처음부터 성공 가능성이 낮았던 쿠르스크 전투가 더욱 차질을 겪어 패배하면서 전력이 급감해 전선이 붕괴하게 된 것이다.
3.3.9. 이해할 수 없는 폭격기 중시 사상
히틀러는 폭격기 만능론의 신호탄을 쏴 올린 이탈리아의 줄리오 두헤의 이론에 깊이 빠져 있었다. 적의 전력을 하늘에서 격멸하고 대량 폭격으로 적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한다는 두헤의 이론은 오로지 공격만을 외치던 히틀러의 마음에 아주 쏙 들었던 것.그 결과, 공군을 공격수단으로 여기는 사상이 루프트바페 지휘부를 지배했고 폭격기가 우선시 되었으며 전투기는 폭격기의 부수적인 존재로 전락했으며 이런 사상은 전쟁 말기까지 이어진다.[36]
이런 상황에서 1939년 생산한 항공기 1,491대 중 전투기는 그 중에서 3분의 1 정도인 449대 뿐이었고 이 비율은 계속 떨어져서 1940년대는 6,618대의 항공기 총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4분의 1인 1,693대밖에 되지 않게 된다.
그리고, Ju 87의 전과를 보고 급강하 폭격기에 푹 빠져있던 나머지 장거리 폭격기의 개발과 생산을 늦춰버리는 병크도 저지른다. 쌍발 급강하 폭격기인 ju 88과 do 217을 계속 생산하면서 그 밖의 폭격기와 4발기인 He 177마저 최대한 급강하폭격이 가능하도록 높은 안정성과 급강하 에어브레이크, 자동수평비행장치와 급강하폭격 조준기를 달도록 요구한다.
미 육군항공대와 영국 공군이 대규모 폭격을 시작했을 때도 히틀러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채 밀히가 주장하는 전투기 증산계획을 씹어버리고 보복공격을 실시하라고 명령하면서 쓸데없는 손실을 낸 것은 물론 '방어용의 전투기는 필요없다, 보복용의 폭격기가 더 필요하다'는 표어를 나치 독일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하게 했으며 알베르트 슈페어가 1944년 4월에 폭격기의 생산을 줄여야 한다는 제안을 했음에도 '항공군수의 핵심은 여전히 중폭격기'라는 결정을 내렸고, 독일 지휘부는 본토방공이 위태로운 상황인데도 전투기보다도 폭격기를 중시해 폭격기의 생산량을 늘리는 삽질을 한다.
영국 본토 항공전 손실은 물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만 항공기를 8000대를 상실하고[37], 그런 상황에서 1943년 11월 Me 262의 시제비행에 강력한 인상을 받은 히틀러는 1943년 12월에 동프로이센의 인스터부르크 공군기지에서 열었던 최신 연구개발 성과 전시회에 와서 괴링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이 항공기로 폭탄을 운반할 수 있나?"
그러자 괴링은 메서슈미트에게 곧바로 물어보고는
"예. 총통, 이론적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500kg 폭탄은 확실히 실을 수 있고 대략 1,000kg까지도 실을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폭탄을 실을 수는 있어도 목표물에 제대로 명중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Me 262는 폭탄용 렉, 투하장치, 신관기동장치, 사격통제장치[38]가 없었고 비행특성과 시야 등으로 봐도 정밀폭격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나마 할 만한 것이라고는 수평폭격이었는데 그렇게 하면 정밀도가 우주로 날아가버린다...
물론 히틀러에게 이런 점을 설명할 수 있는 자는 없었고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고속폭격기'를 공군에 요구해 왔다. 고속폭격기가 있으면 적 전투기의 방어를 상관하지 않고 목표에 확실히 도달할 수 있다. 나는 여러분이 소개한 이 항공기를 '전격폭격기(blitz-bomber)'라고 하겠다. 이것으로 유럽침공을 시도하는 연합군을 상륙 초기 단계의 가장 취약한 순간에 공격하겠다. 적의 호위전투기를 돌파해 상륙하는 물자와 부대를 공격해 혼란과 죽음을 가져올 존재, 그것이 바로 전격폭격기다.
여러분 중에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39]
군수당국이 Me 262의 생산량을 월 1,000대 이상으로 끌어올렸음에도 폭격기에 미쳐 있던 히틀러는 바로 태클을 걸었고[40] 지금까지 만든 Me 262 중 폭탄을 실을 수 있는 항공기가 몇 대나 되냐고 밀히에게 물었는데, 히틀러가 인스터부르크에서 소위 전격폭격기에 대한 구상을 떠드는 자리에 없었던 그는
"한 대도 없습니다, 총통. Me 262는 전투기 용도로만 만들었습니다."
라고 말해버렸고 히틀러는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화를 낸 다음 밀히, 괴링, 루프트바페 모두를 겁쟁이, 배신자, 반항만 해 대는 것들이라고 싸잡아서 욕해댔다.[41][42] 그리고 괴링에게 Me 262을 죄다 폭격기로 전환, 개조하라는 명령을 하면서 Me 262를 전투기나 전투폭격기가 아니라 전격폭격기라고 부르게 강제했다.
연합군이 상륙하기 전까지 몇 주 동안 독일 본토의 도시, 군수공장, 수송시설, 석탄액화연료공장 등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Me 262를 폭격기로 전환하는 시험을 하는 중 6월 6일에 연합군의 유럽 침공이 시작되었지만 당연히 히틀러가 '적의 호위전투기를 돌파해 상륙하는 물자와 부대를 공격해 혼란과 죽음을 가져올 전격폭격기'는 전혀 출동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상륙 후 수 주일동안 전선이 연합군 상륙지대에 제한되어 있던 기간에도 전격폭격기는 출격하지 못했고 1944년 8월이 되어서야 연합군에게 첫 번째로 날아가서 2,3발의 폭탄을 적 영역 어딘가에 연일 던졌지만[43] 연합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
물론 Me 262를 폭격기로 쓸 생각이 없었던 공군은 폭격기 버전을 전투기로 개조해 요격 임무에 보내는 한편[44] 히틀러를 설득하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물론 히틀러는 'Me 262를 전격폭격기 이외의 용도로 사용하거나 제안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지시를 내렸으나, 결국 1944년 9월에 '20대 중 1대는 전투기로 만들어도 된다'며 전투기 버전의 생산을 허가한다.
물론 히틀러가 전투기 증산 계획을 승인했다한들 독일 공군의 패망은 1944년 2월 논쟁작전을 기점으로 확정된 상황이었다. 기존의 독일 공군은 연합군의 폭격기와 전투기를 각각 담당하는 요격기와 교전기를 분리하고 지역별로 요격대를 출격해 연합군이 출격-공습-복귀 전 과정에 있어서 출혈을 내도록 강요했으며 미군이 좋아한 컴뱃박스 대형의 후미 편대에 집중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하지만 미군이 1944년 P-47, P-51에 연료 탱크를 장착해 호위를 붙이며 독일군 요격기들을 가로막았을 뿐더러 1939년 이후 지속된 소모를 조종사 양성속도가 따라잡지 못했다. 조종사 부족문제는 둘째치더라도 어쨌든 제공권을 먼저 따야 하는 상황에서 폭격기에 미친듯이 매달리며 독일공군의 역량을 필요한 곳에 집중하지 못한 것은 가히 히틀러의 삽질이 맞다.
3.3.10. 바그라티온 재앙
히틀러는 1942년말~1943년초 스탈린그라드는 물론, 1944년초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에서 후퇴 불허, 진지사수명령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보고도[45] 히틀러의 진지사수명령, 어떠한 종류의 후퇴도 불허라는 사상은 굳건했다.당시 소련군은 233만 명. 독일군은 85만 명이었다. 3:1이 조금 안되는 병력비였는데, 독일군은 수비측의 입장이었고 독일군은 독소전쟁 이래 1945년을 제외하고 소련군보다 우세한 교환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간섭 없이 싸웠더라면 소련군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 도 있었다. 비록 기동력의 차이로 포위-섬멸을 피하기는 어려웠겠지만.[46]
1. 효율적인 방어를 하려면 병력을 방어가 용이한 곳 위주로 배치해야 하는데, 방어거점이 아닌 행정거점에 병력을 다수 배치했다.
2. 수적으로 열세인 독일군이 소련군의 공격을 막아내려면 기동방어는 필수였으며 기동방어를 위해서라면 2보전진을 위한 1보후퇴, 즉 일시적인 후퇴는 불가피한데, 1cm의 영토도 내주기 싫어하는 히틀러는 6월 말~7월 내내 사실상 기동방어를 거의 불허했다.[47]
3. 바로 위에 언급한 대로 기동방어를 안 하니 수적으로 열세인 병력이 띄엄띄엄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소련군은 총 전력의 우세뿐 아니라 몇몇 곳을 집중타격해서 쌈싸먹기 각개격파를 하거나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니 실제로 전투를 할 때는 3:1정도가 아닌 10:1 이상의 병력비도 나오곤 했다.[48]
1944년 6월말 시점의 독일군은 전성기보다는 크게 약화되어있었으며 이미 승리는 소련에게 완전히 기운 상태였지만[49] 히틀러와 최고사령부의 삽질이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독일에게 악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 소련군의 반격 국면 당시엔 소련군 4 : 독일군 1 정도의 교환비를 냈었는데, 바크라티온에서는 소련군 : 독일군의 교환비가 1(18만) : 1.39(25만)이라는 결과가 나왔다.[50] 그러나 중부 집단군의 상황은 기동방어를 수행하는 것조차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는데 3기갑군은 이름과는 달리 예하에 기갑부대를 편제하지도 않은 상태였고 소련의 기만책에 낚인 독일군 사령부가 56기갑군단을 다른 지역으로 배치하는 삽질까지 겹치는 등 히틀러가 아니라도 이미 충분히 망할 상황이었다.
1943년의 소련군은 이미 누룽지 긁듯이 인구를 박박 긁어서 최대로 징병한 병력이 670만 명이었는데, 쿠르스크 전투 손실 85만 명, 쿠르스크 이후 반격에서 60만 명 이상 손실(류만체프, 쿠트죠프), 드네프르강 도하 전투로 최소 40만 명 이상 손실(최대 120만 명까지도 추산)으로 1943년에만 200만 명은 족히 사상자가 발생했고, 1944년 1월~3월 남부 우크라이나 공세로 110만 명 사상자 손실, 1944년 6월~8월 바크라티온 작전 손실 77만,[51] 발트공세 27만 명 손실에다가(1944년 9월~11월) 1944년에도 최소한 214만 명 이상의 손실이 발생했다.
즉, 1943~1944년 2년간 최소한으로 잡아도 소련군은 414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소련군이 전체 640만 명을 넘는 병력을 유지했던 것은 점령되었던 영토의 탈환을 통한 추가적인 징병과 부상자의 복귀 덕분이다.
히틀러가 뻘짓 안 하고 정상적인 작전운용이 가능했다면 1943~1944년 2년간 소련군의 손실은 실제 발생한 414만 명보다 훨씬 더 커졌을 것이고 드네프르강 라인을 유지하면서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계속 독일이 쥐고 있으면 실제 역사에서 이루어진 영토 회복 후 마구마구 징집해서 벌충도 불가능하다.[52] 문제는 히틀러가 뻘짓을 안 했어도 이미 전세는 소련이 우위였을 것이지만. 물론 덕분에 병력 손실을 훨씬 줄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히틀러의 삽질인 건 맞다.
3.3.11. 모르탱 삽질
연합군의 상륙을 미연에 저지했다면 모를까 이미 노르망디에 연합군이 상륙한 이상 그나마 독일이 버텨 보고자 시도라도 해보려면, 서부전선의 병력들을 보존하면서 프랑스 동북부와 독일 서부의 삼림지대로 후퇴시키고[53] 그나마 제공권을 확보하는데 어느정도 도움이 되는, Me 262 제트기를 전투기로 몰빵하고, 서부전선에서는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전을 펼치며 지연전을 벌이고, 동부전선으로 주력을 보내어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사수하는 것이 거의 최선의 방법이었다.하지만 아직도 상황판단이 안 됐는지 1944년 8월 7일부터 서방 연합군을 대서양으로 쓸어버리겠다는 망상으로 무리하게 모르탱 공세를 시도하다가 공세에 나선 전차(돌격포 포함)의 2/3를 넘기는 값인 120여대의 전차를 말아먹는다. 게다가 이러다 후퇴할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오버로드 작전기간인 1944년 6월부터 8월까지의 기간 동안 도합 23만에 달하는 병력이 포로로 잡히고 8만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한다.[54]
모르탱 공세의 뻘짓과 플로이에슈티 유전 상실 후, 1944년 9월 시점에서도 아직 헝가리의 유전과 액화석탄이 있긴 했지만, 그동안에 주요 연료 보급로였던 플로이에슈티 유전의 손실은 너무 컸다. 게다가 그와 함께 동맹국들도 줄줄이 이탈하면서 순식간에 발칸반도 거의 전역을 상실한다.
3.3.12. 아르덴 공세
1944년 12월 장군들 대다수가 뜯어말린 아르덴 대공세를 히틀러의 고집으로 강행해서 뻘짓으로 전차 800대이상을 또 손실했다. 상당수가 동부전선에서 빼온거라 1945년 1월13일부터 폴란드 비스와강을 건넌 소련군 공세에 동부전선은 쭉쭉 밀린다.[55] 물론 이쯤되면 히틀러가 삽질을 한것과 무관하게 이미 상황을 뒤집을 방법은 없었다(...). 다만 대전기 이후의 역사에는 영향을 미첬을 가능성이 있는데, 상술된 쿠르스크 전투시기 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서도 해당 시점 부터 공세를 포기하고 적극적인 기동방어로 전환하며 후퇴, 미리 건설해둔 견고한 방어선까지 물러나 동부 전선을 안정화 시킴과 동시에 구데리안 말마따라 서부전선에 들어가던 예비대와 병력을 동부 전선으로 돌렸다면 베를린 분할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3.3.13. 히틀러의 마지막 뻘짓 '발라톤 호수 공세'
1945년 3월초 베를린 방위에 돌려야할 사실상 마지막 기갑병력으로, 헝가리 유전지대를 탈환하려고 공세를 펴다가[56] 겨우 15~40km를 전진하고 실패했다. 마지막 도박 실패로 입은 손실은 전차 331대(완전 파괴 86대 + 가동불능 245대)에 돌격포와 구축전차는 244대 손실(완전 파괴 42대 + 가동불능 202대)로, 전차+돌격포+구축전차 총 575대가 날아갔다. 게다가 하프트랙과 장갑차의 손실도 거의 1000대에 육박했다.이후 베를린 공방전에서 남은 극소수의 전차 + 팬저파우스트로 소련군을 상대하게 된다. 만약 이 뻘짓 공세를 안하고 베를린 방어전에 돌렸으면 베를린 함락이 최소한 몇 주는 더 늦어졌을 것이다.[57]
이처럼 히틀러의 실책은 나치 독일이 패망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58] 결국 히틀러는 이렇게 실책을 거듭하여 수백만의 독일군의 목숨을 헛되이 날렸으며 전쟁에서 승리하여 전 유럽을 제패하고 독일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웅비할 기회를 놓쳤을 뿐 아니라 패전하고 자살함으로써 히틀러 그 자신이 인류 역사에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된다.
하지만 만에 하나 독일이 2차대전에서 승리하여 초강대국이 되고 히틀러가 자연사했더라도 독일은 머지않아 소련처럼 무너지고 나치 독일은 공산 소련처럼, 히틀러가 스탈린보다 더한 폭군으로 욕을 먹었을 것이라는 점은 변함없었을 것이다. 히틀러가 승리하였다면 미래는 전격 디스토피아의 강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사례를 딱 하나만 들자면
잔 다르크. 일개 농민의 딸로 태어난 만큼 군사 교육을 받을 필요도 이유도 없었으나, 백년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2]
실제로 비슷한 시기의 미군이 현장에서 두각을 드러낸 전쟁 영웅들에게
사관학교 복무를 제안하거나 일정 계급 이상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반드시 사관학교 졸업장을 요구한 건 그런 군사적 천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게 아니라, 설령 어지간한 천재라 하더라도 자신에 맞춰 시대의 군사적 패러다임을 바꿔버릴 정도가 아니라면 탄탄한 기본기를 갖춰두는 게 훨씬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군사적 전공은 틀림없이 사람들의 눈을 빼앗는 부의이 있지만, 현실에서 군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건 실패의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휘관이라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3]
1918년에 제정된 부상병들에게 수여된 전상 공로장(1급:금색, 2급:은색, 3급:흑색의 세 등급으로 나뉘어 있으며, 부상의 정도에 따라서 수훈되었다. 당연히 부상의 상태가 심할수록 높은 등급의 전상장이 수여되었다.), 한마디로 최전방에서 목숨에 위협을 받으며 싸워본 경험도 없는 책상배기라는 의미.
[4]
이는 동맹국이었던 일제의 장군
도조 히데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보헤미아 상병 따리였던 히틀러와 달리 도조는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장교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5]
히틀러가 직접 개발을 지시했다는 설도 있고 크루프사에서 제안한 것을 히틀러가 승인했다는 설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히틀러가 좋아했기 때문에 개발이 시작됐다는 점은 동일하다. 움직이는 요새와 같은 개념으로 방어 시엔 토치카나 고정포대처럼 기능하고, 공격 시엔 진격도 할 수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하는, 참으로 현실감이 결여된 히틀러다운 발상이었다. 당연하지만, 대다수 무기들은 장점을 덕지덕지 붙인다고 완전체가 나오는 게 아니라 특정한 장점을 얻기 위해 일정 부분의 능력치를 희생하는 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저런 꿈의 병기는 말 그대로 꿈으로 남을 뿐이다.
[6]
예컨대, 비록
임진왜란 와중에 잘못된 판단으로 큰 피해를 초래하기는 했으나
선조 임금도 일본군의
조총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자신이 직접 개발한
조총을 조정 대신들한테 보여주기도 했다.
[7]
인디펜던스급 경항공모함은 실용성에 회의적이던 해군을 루스벨트가 설득해서 잘 써먹은 사례고, 반대로 처칠은 6파운더의 양산을 미뤄서 영국 전차의 화력 개선을 가로막는 삽질을 했다. 스탈린 또한
다포탑 전차를 두고 '왜 전차에 백화점을 차리려고 하느냐'는 말로 다포탑 전차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8]
그런데
지구 반대편의 동맹군은
이 짓을
진짜로 했다(...). 그나마 독일군의 그것은 중간에 조종사가 탈출하는 방식인 반면에 이쪽은 아니었고, 일본도 공대공 자폭에는 독일처럼 조종사를 탈출할 수 있게 했다.
[9]
이로 인해 슈투카가 큰 피해를 주지 못해도 소음으로 인한 공황상태가 발생해 적들이 붕괴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붙은 별명이 제리코의 나팔. 다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전쟁 초기의 얘기지, 중반만 가도 스스로 울리는 공습경보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되었고 자체적으로 비행성능 저하를 유발했기에 제거되었다.
[10]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침공 계획을 이르는 표현으로 본 의미는 그 최종안인 만슈타인 계획(Manstein Plan)과 상통한다. 허나 본 문서에서는 만슈타인 계획 이전까지의 계획안을 지칭하며, 이는 슐리펜 계획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포위섬멸안을 의미한다. 우선 우익의 B집단군이 주공을 맏는데, 이들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Albert Canal(에반-에마엘 요새 등에 의해 강화된 벨기에군의 주 방어선)의 벨기에군을 분쇄, 그대로 솜강 까지 진격한다. 중앙의 A집단군은 벨기에 남부를 공격하여 주공을 지원하며, 마지노선을 마주보는 좌익의 C집단군은 프랑스와의 국경선을 유지하는 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는 사실상 1914년의 프랑스 침공의 재현이었고, 연합군의 방어 계획도 이에 맞추어 구성되어있었다. 딜 계획(Dyle Plan)이 이것이었는데, 벨기에의 확고한 중립 노선을 고려하면 이는 상당히 현실적인 동시에 효과적인 계획이었다.
[11]
흔히들 '전차가 통과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던 아르덴 숲을 돌파하여 뒤를 친다' 정도로만 알고 있으나, 만슈타인 계획(낫질 작전 이라는 이름은 후에 처칠이 붙인 것이다)은 단순히 고정관념의 빈틈을 노린 것 이상이었다. 우선 노르웨이에서의 경험을 살린 공수부대의 투입으로 주요 거점을 빠르게 제압함과 동시에 주공 방향을 오판하게 만들었으며, 우수한 전술공군이었던 루프트바페를 적극적으로 운용하여 제공권을 확보했다. 여기에 더해 최신 병기였던 전차를 집단적으로 운용하는 기갑군의 개념을 효과적으로 적용해 기동전을 수행해냈고, 임무형 지휘체계하에 추진력있는 작전 진행이 이루어 졌으며, 마지막으로 연합군의 적절한 삽질이 어우러졌기에 이뤄낼 수 있었던 성과였다.
[12]
단기적으로는 탈출한 10만여명의 프랑스군이 다시 프랑스 방위에 투입되어 독일국방군의 추가적인 손실을 야기했고, 장기적으로는 영국인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 시켜 영국의 궁극적인 저항을 결정하는 데에 일정부분 기여했다.
[13]
물론 여기서 함정은 프란츠 할더는 히틀러에게 영국과 프랑스가 가짜전쟁으로 별 전쟁수행 의지도 없으니 협상테이블로 가라고 강권했고 그런면에서 성공가능성이 전혀 없는 침공 계획을 만들어 히틀러의 프랑스 침공의지를 포기하려 했다. 뿐만아니라 프랑스-독일 국경에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마지노선이 들어서면서 세울 수 있는 전략의 폭이 크게 줄어든 것도 있다. 히틀러의 침공의지를 꺾을 수 없으리라고 판단되는 시점까지 와버려 그나마 유효할 것 같은 계획을 세워야 하는 시점에서의 fall gelb도 근간은 슐리펜 계획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마지노선 때문.
[14]
사실 기존의 계획안이 폐기된 것은 해당 자료를 실은 공군기가 추락, 모든 정보가 연합군 측에 넘어간 것이 더 컸다.
[15]
그럼에도 이를 섣불리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상황이 당시와는 여러부분에서 달랐기 때문이다. 우선 초장부터 양면전을 펼쳐야했던 1차대전 시기와는 달리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 중이었고,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까지도 스탈린이 해당 조약에 대해 보인 태도를 고려하면 개전 초기에 제 2의 전선이 열릴 가능성은 낮았다. 이탈리아 또한 독일의 우방이 되었기에 전선은 더욱 줄어들고, 노르웨이 전역에서의 승리로 스웨덴 산 철광석에 대한 접근성도 크게 늘었다. 뿐만아니라 프랑스가 상상 이상으로 약했는데, 가믈랭의 병크 중 하나로 평가 받는 Breda variant로 인해 벨기에 방면 프랑스군의 좌익이 크게 강화됐음에도 조공인 B집단군의 공세에 밀려 브레다까지 진출했다가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기술의 발전도 상당했는데, 우수한 전술공군인 루프트바페의 폭격은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고 북프랑스의 비행장을 파괴해 전투지역에서의 제공권을 사실상 장악하기에 이른다. 전차가 막 태동하던 1차대전 시기와는 달리 1940년은 그들로 하여금 기동전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발전된 기술을 작전술의 영역에까지 적용시킨 독일군과, 여전히 보병중심의 수동적인 전략을 고집하던 프랑스의 차이는 단순히 국력과 군사력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독일군의 특성이 만슈타인 계획과 맞물리고, 거기에 날개를 달아준 가믈랭과 프랑스군이 만들어낸 시너지의 결과가 바로 6주 전쟁이었던 만큼, 그중 한 축이 빠진 상태로는 실제 역사를 따라가기가 아주 어려울 것이다.
[16]
이러한 과도한 자신감은 비단 히틀러 자신만의 것은 아니었다. 고위 지휘관들 또한 다르지 않았고, 이는 곧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망상을 구상하기에 이른다.
[17]
특히 모스크바 공략을 주장한 구데리안이나 만슈타인은 모스크바로의 쾌속 진군 도중에 히틀러가 개입하여 중부집단군을 키예프 방면 포위전에 투입하게 되고 이는 소련군에게는 기사회생의 기회로 작용했다.
[18]
전통적으로 공세측의 측면부는 보호받아야할 약점이었다. 구데리안은 기갑군의 경우 측면부에 대한 보호가 상대적으로 불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아라스 전차전이 바로 기갑사단의 측면이 공격 받은 경우였다. 다만 아라스 전투는 기갑사단에 딸려오던 지원부대가 적측 전차에 노출된 경우인데, 이 때문에 88mm의 직사화력을 동원해야만 했다. 결과는 독일측의 승리였으나 이 역습의 충격은 상당했으며 심지어 그 덩케르크 철수에도 일정부분 기여했다.
[19]
한국전쟁 당시에도 UN군이 북진하는 과정에서 그리 많지도 않은 빨치산이 후방을 교란하는 것이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제대로 훈련도 안된 게릴라들이 설치는 것도 골치아픈데 60만 명에 달하는 그럭저럭 잘 훈련된 병력을 후방에 남겨두고 진격하는 것이 현명한 결정일지는...
[20]
북부집단군의 잔존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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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치 사상이 사회주의자들을 배척하고 공격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기에
레벤스라움 문제도 같이 들어가 있기도 했었고.
[22]
실제로 독일군은 T-34전차의 45도 경사면 장갑으로 기동력과 방호력을 살린 것에 놀랐으며 이 외에도 PPSh-41, SVT-40의 성능을 고평가 하고 노획해서 잘 써먹었다. 소련군이 초반에 참패를 거듭하며 후퇴한 것은 대숙청으로 인한 군대의 마비, 소련-폴란드 국경에 있던 방어선에서 더 전진하여 독-소 국경에 새로운 방어선을 만들었던 것이 완성되지 않았던 것, 겨울전쟁의 전훈을 받아들여 작계를 전환하는 중이어서 소련이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불가침 조약마저 파기하고 기습한 것이 완전히 허를 찌른 탓이다. 여러모로 소련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독일이 예상한 것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지도 않았고 최근으로 올 수록 소련은 그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잘 싸웠다는 평가가 나오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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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히틀러가 소련을 얕잡아 봤다고 보기에도 애매한 것이 히틀러 뿐 아니라 독일군 전체가 똑같이 생각했다. 소련은 (결과적으로 믿지 않았지만) 독일의 전면공격이 있을 것을 날짜까지 정확히 예측해낼 정도였지만 독일은 잘못된 정보에 의하여 소련이 3개월 내에 붕괴할 것이라고 믿었고 전쟁 내내 소련의 총체적인 전쟁수행역량은 고사하고 당장 소련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그게 어디로 가고 있는 지도 파악 못 하는 한심한 작태를 보였다.
[24]
당시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한참 공략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정확히 히틀러의 삽질에 대한 OKW를 비롯한 장성들과 현역 병사들의 반응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말리지 않았다면 독일군 OKW가 프랑스 침공 작전 입안 시 만슈타인이 등장할 때까지 일부러 불가능한 계획을 낸 것처럼 무능하고 장기적 전쟁에 대한 식견이 매우 부족하다고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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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히틀러가 양면전쟁을 피하려 애썼어도 루스벨트의 미국은 고립주의와 명분 부족, 처칠의 영국은 육군력 부족, 스탈린의 소련은 대숙청으로 불구가 된 군대를 회복시켜야 했기에 싸우지 않았을 뿐, 세 명 모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둘 다와 대극점에 위치한 히틀러와 나치 독일을 조질 생각을 하고 있어서 결국 독일은 셋의 다굴로 양면전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단기전으로 한쪽 전선을 빠르게 밀려 해도 미국과 영국은 해군력이 딸려 본토 접근이 안되고 소련은 국토가 더럽게 넓어 세 나라 모두 독일이 단기전으로 제압이 불가능한 상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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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FG42는 경기관총과 개인화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다가 생산성을 말아먹었다. 전쟁 전체적으로 봤을 때 군수공업력이 부족한 독일로서 좋은 선택지는 아닌 셈이다. 물론 MKb는 그런 거 없는데, Kar98k 1개 분대급 화력의 혁신적 총기 한 정이 Kar98k 한 정보다 조금 더 비싼 정도이다.
[27]
일반적으로는 세계 최초의 제트 엔진 전투기로 알려져 있지만 1938년에 이미 융커스 사에서 EF009 제트 전투기를 개발했으며 하인켈사가 1939년에 먼저 He 178 제트기의 시험 비행에 성공했고 그 뒤를 잇는 제트 전투기인 He 280의 개발에 성공했기 때문에(Fw 190와의 경쟁 당시의 독일군 관계자들의 제트 엔진에 관한 무관심 덕분에 Fw 190에 밀려 채택되지 못하였다.) Me 262는 세계 최초로 실전배치된 제트 전투기만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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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명령 Führerprotok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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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부터가 이미 당초 예정보다 1년이상 늦은 것이다.
[30]
실제로 BBC에 의하면 작전 당일 오전 10시에 기상해 연합군의 상륙에 대해 전해들은 히틀러는 해당 사실에 기뻐했다고(excited) 전해진다. 그는 독일군이 그들을 효과적으로 격퇴할 것이라고 믿었고, 설령 일부가 상륙하더라도 쉽게 다시 해변으로 밀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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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반론 역시 있다. 청색 작전의 목표는 소련 남부를 절단해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을 감소시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독일군의 석유 공급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군 입장에서는 빠르게 소련 남부 유전지대를 점령 후 빠르게 석유를 뽑아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만 해서는 오히려 비축유만 쓰고 유전 점령 후 안정적인 석유 확보까지는 더욱 시간이 걸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스탈린그라드 확보를 통한 남부 절단과 유전지대로 부대를 보내는 것까지 둘 다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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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허세왕괴링은 스탈린그라드의 병력에게 공중으로 물자를 보급하겠다!며 호언장담했으나, 양에 명확한 한계가 있는 공중 보급으로 30만 병력을 살리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후에 사태를 깨닫고
겨울폭풍 작전을 통해 제6군 구출을 명령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그런데 이전에 파울루스는 총통의 후퇴 금지령을 충실히 이행해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적이 있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의 태도 변화를 보고 그의 반역 가능성을 의심했을 수도 있다. 결국 총통은 파울루스에게 자살하라는 암묵적 메시지를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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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작전의 실패로 독일군이 소련군을 더 이상 밀어낼 수 없게 되었지만 전선지탱 능력은 충분했다. 이 상황에서 전선을 굳건히 방어하며 소련군의 희생을 강요했다면 독일군 전선이 그리 빨리 급격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 병력을 그대로 쿠르스크에서 날려먹으며 사형장 티켓을 발급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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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방어선을 쓸데없이 연장시키고 있던 쿠르스크 돌출부(독일입장에선 만곡부)를 제거하여 전선을 안정화시키고, 그와 동시에 소련군의 전략적 예비를 끌어내 공세 역량을 축소, 주도권을 회복한다는 거창한 취지였다.
[35]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서도 그렇듯 하천 방어선은 '강하지만 부서지기 쉬운 소재로 만들어진 도구'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한 지점에 교두보가 생겨 돌파되었다면 산악 방어에서 처럼의 종심상의 잔류 저항은 기대하기 어려우며 단 한 번의 작전으로 방어가 종결되고 만다. 그만큼 방어선은 견고히, 시간을 들여 강화될 필요가 있으나
부적절한 공세를 위해 병력을 빼가고 착공 시기를 늦춘 결과 그 단점만이 부각된 것이다.
[36]
전투기는 항속거리가 짧아서 폭격기의 넓은 행동반경을 제한할 수 있으므로 전략적 공격수단인 폭격기의 발목을 잡는다고 여겼다.
[37]
단, 이 손실은 이탈리아군과 비시 프랑스군이 보유한 항공기 손실을 모두 포함한 수치이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이 손실한 항공기가 1,400여대임을 고려하면 결코 가벼운 손실은 아니다.
[38]
노든폭격조준장치의 카피판이 있었지만 전투기로 쓸 물건에 그런 걸 배치할 리가...
[39]
아돌프 갈란트는 '
말은 맞다.
우리들 중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비꼬았다. 그걸 제외하고라도 히틀러가 폭격기에 얼마나 미쳐있었는지 알 수 있는 말이다.
[40]
히틀러는 방공전력을 증강시키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고 있었다.
[41]
아돌프 갈란트의 회고록에서 '주위에 있던 장교들의 말을 빌리자면 "히틀러가 그 정도로 화내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고'.
[42]
이 때문에 밀히가 실각했다는 말도 있지만 밀히의 실각은 1944년 8월의 일이었기 때문에 Me 262의 생산문제보다는 독일 공군의 전투기 조달 효율이 낮은 탓과 함께 본토 방공전 전략에서 히틀러 및 괴링과의 의견 충돌이 심했던 탓이 더 크다.
[43]
물론 성과는 어느 정도 올렸는지, 성과가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44]
어차피 폭격기 버전에도 기관포가 달려 있었고, 전투기로의 개조는 거기에 기관포를 2문 더 장착하고 폭탄창을 철거하는 방식이었다.
[45]
그나마 뒤늦게나마 만슈타인의 재량으로 병력은 상당수 살려냈지만 알토란같은 기갑장비들은 대다수 버리고 후퇴해야했다. 그리고 인명 구출도 기존의 인명피해보다 적었다는 것이지 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는 참사였다.
[46]
소련의
T-34는 공방능력에 있어서는 티거나 판터에 못미치고 4호 전차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전략적 기동성은 당대의 어느 전차보다도 우수한 장비였다. 게다가 독일군은 수송량의 절대다수를 말에 의존한 반면에 소련군은 차량을 이용했다. 말과 차량의 기동력 차이는 명백하다.
[47]
8월에 뒤늦게 발터 모델이 기동방어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미 독일군은 입은 피해가 매우 컸기 때문에 승기는 진작에 소련군이 잡은 상태였다.
[48]
물론 이 교환비는 소련측이 지나치리만큼 인명을 경시한 탓도 있었다.
[49]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하면서 독소전의 무게추는 완전히 소련 쪽으로 기울었다.
[50]
전사 및 실종자만 집계한 수치. 포로와 부상자를 전부 집계하면 소련이 77만 명, 독일이 60만 명의 손실을 입었다.
[51]
이는 사수명령으로 60만 명의 독일군이 77만 명의 소련군 사상자를 내고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로 잡히게 된 이유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소련군과 독일군의 기동력 차이로(소련은 랜드리스로 받아온 차량을 이용한 반면에 독일은 말을 이용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포위-섬멸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52]
드네프르 서안 우크라이나 인구만 해도 족히 2500만 명은 되고, 벨라루스도 거의 1000만 명 정도였으니 여기서 러시아 본토 식으로 10% 이상 징병하면 최소가 350만 명이다.
[53]
1944년 8월
팔레즈 포켓 재앙, 1944년 12월
아르덴 대공세에서의 뻘짓으로 독일군이 거의 반신불수가 된 상태에서도 서부전선의 연합군이 독일 서부의 삼림지대를 완전히 돌파한 것은 1945년 3월이 되어서였다. 모르탱 공세에서의 뻘짓으로 날린 전차 100-150대, 그리고 아르덴 공세에서 뻘짓으로 날린 전차 800대와 10만 명 전후의 병력을 보전했더라면 서부전선은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다.
[54]
구체적인 사상자 통계는 잡히지 않았다. 돌격포를 포함한 전차의 손실은 1500-2400대 정도이다.
[55]
그나마 보유하던 헝가리유전도 이때 함락된다.
[56]
물론 이때도 장군들은 반대했는데 히틀러가 관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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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의 실패로 남아있는 정예 병력과 제대로 된 기갑 전력마저 싸그리 말아먹어 베를린 공방전 때의 독일군은 수 천대의 전차가 몰려드는 소련군과 비교해 기갑전력이라고는 1500대정도의 이마저도 장갑차 위주로 양과 질에서 모두 밀렸다. 이 작전안을 실행하지않고 기갑전력을 베를린에 투입했더라면 그래도 2:1정도의 비율로 메꿀 수는 있어, 패배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독일군다운 전투력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58]
그러나 이런 실책은 히틀러만 저지른 것이 아니며, 스탈린이나 처칠도 이런 유의 실책은 히틀러 못지 않게 많이 저질렀으니 히틀러만 무능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당장 소련이 초반에 탈탈 털린 이유가 히틀러는 저리 갈 정도로 스탈린의 엄청난 트롤링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