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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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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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褚陶생몰연도 불명
삼국시대 오나라 및 서진의 인물. 자는 계아(季雅). 양주 오군(吳郡) 전당현(錢塘縣) 출신. 저소손의 후손.
2. 생애
어린 나이에도 또래들과 달리 노는 것을 즐기지 않았고, 성격도 과묵하고 담담하며, 총명하고 지혜로워 홀로 분전(墳典)을 읽는 것을 좋아하였다. 저도가 13살에 불과한 나이에 〈구조〉(鷗鳥), 〈수애〉(水磑) 두 부(賦)를 지으니, 사람들은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또, 저도는 항상 친구들에게 이르길"성현(聖賢)은 책 안에 갖추어져 있거늘, 이를 버리고 무엇을 구할 수 있겠는가!"
라 하였다.엄은이 그를 비범하다고 여겨 저선생(저소손)이 다시 출현했다고 말했다.
주와 군에서 저도를 불러 관리로 삼으려 했으나 저도는 응하지 않았다. 오나라가 진나라에게 평정되자 이번에는 진나라 조정의 부름을 받고 상서랑에 제수받았다.
장화가 저도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저도가 등용된 것에 대해 육기, 육운은 강한에서 뛰는 용, 고영은 조양에서 우는 봉황이라고 했으며, 지금 이후로는 남방의 황금(남방의 인재)들이 이미 바닥난 것이라 걱정했지만 다시 그대(저도)를 얻어 계찰의 덕이 외롭지 않고 산천의 보물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후 건충도위, 구진태수(九真), 중위(中尉)를 역임했고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