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30 09:05:39

장무(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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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전량 3대 국왕
태종 성왕 | 太宗 成王
출생 277년
서진 양주 안정군 오씨현
(現 간쑤성 핑량시)
사망 324년(향년 48세)
재위기간 3대 국왕
320년 ~ 3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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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7589><colcolor=#ece5b6> 성씨 장(張)
무(茂))
부모 부친 장궤
모친 불명
형제자매 3남 1녀 중 차남
자녀 없음
성손(成遜)
작호 양왕(凉王)
묘호 태종(太宗)
시호 전량: 성왕(成王)[1]
전조: 성열왕(成烈王)[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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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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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량의 제3대 군주이자 전조의 인물.

자는 성손(成遜)이었다. 제2대 장식까진 사마씨 진나라의 관직을 받으며 지방정권치고는 나름 충실한 군신관계를 유지했으나, 제3대 장무때부터는 왕을 칭하고 독립적인 군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 생애

형 장식이 양주를 떠나 서진의 중앙 관료로 활동할 때, 아버지 장궤 곁에 남아 양주(凉州)의 업무를 보좌했다.

312년에 남양왕 사마보가 장무를 서진 조정에 종사중랑, 산기시랑으로 추천했지만 사양했다. 바로 다음해(313) 3월, 영가의 난으로 포로로 잡힌 진회제 사마치가 호한의 열종 소무제 유총에게 모욕을 당한 후 살해당하고 서진이 붕괴되자 사마보는 멋대로 관직을 내려 장무를 평서장군, 진주자사에 임명했다.

320년 6월, 형 장식이 사이비 교주 유홍에게 넘어간 측근들에게 암살당했다. 장무는 관련자들을 모두 주살한 뒤, 너무 어린 조카 장준을 대신하여 장식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장식의 부하들은 장무를 대도독, 양주목, 태위로 추대하려 했으나 거절했다.[3] 장무는 형의 관직이었던 지절도독양주제군사, 양주자사직만을 계승했고, 조카 장준에게 무군장군, 무위태수, 서평공의 작위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자신과 사돈 관계인 양주의 호족 가모(賈摹)가 가씨 가문의 세력을 믿고 방종한 것을 보고 처형해 양주의 지배를 공고히 다졌다.

322년, 장수 한박(韓璞)에게 군사를 주어 진주(秦州)를 점령했다. 이듬해(323), 전조의 유요가 주력 29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왔다. 유요가 친히 이끄는 전조의 군대는 고창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황하 인근 지역을 뒤흔들었다. 결국 장무가 유요의 진영으로 사자를 보내 대량의 공물을 바치자, 유요는 장무에게 지절과 부월을 주어 그를 시중, 태사, 영대사마에 임명하고 양왕(凉王)에 봉한 뒤 물러갔다.

324년, 장무가 병으로 승하하자 유요가 사자를 보내 그를 성렬왕(成烈王)으로 추증했다. 장무에겐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 장준이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후에 위왕 장조가 장무를 성왕(成王)으로 추존했다.

3. 둘러보기

전량의 역대 국왕
2대 고조 명왕 장식 3대 태종 성왕 장무 4대 세조 문왕 장준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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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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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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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왕(威王) 장조(張祚)가 추존했다. [2] 전조의 제5대 황제인 유요가 추존했다. [3] 원래 서진의 민제 사마업이 호한(전조)의 유요에게 투항하러 가기 전 장식에게 조서로 내렸지만 장식이 사양했던 관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