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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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重
(253 ~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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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서진의 인물. 자는 무증(茂曾). 형주 강하군 종무현 사람으로 이강의 아들.2. 생애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어릴 적부터 부모를 잃어 동생들과 함께 살았고 우애가 있는 걸로 알려졌다. 약관에 중정이 되었지만 사양했고 후에는 시평왕문학이 되었으며, 구품에 관계없이 백성들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거주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을 허용해야 토단법을 실행할 수 있다고 상소를 올렸지만 시행되지 않았다. 왕은의 진서에 따르면 젊어서 이름이 있어 이부랑, 평양태수를 역임했다고 한다.태자사인, 상서랑을 지내고 태중대부 염화가 한나라의 공광, 조위의 서간 등의 논의를 들어 왕공들에게 노비의 수를 제한하고 사람들이 집 파는 것을 금지하도록 상소를 올리자 이를 위한 방법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
사례교위인 석감이 욱림태수 개등(介登)이 다스리는 것이 관할을 벗어나서 소환해야 한다고 참소하자, 상서 순개(荀愷)가 이를 믿고 개등을 강등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이중이 조정에 "법을 세움에 있어 특례가 존재해선 안 된다"며 반박하는 상소를 올려 개등은 강등을 면할 수 있었다.
290년, 정위평이 되어 한단취 등과 함께 정위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중서랑으로 옮겨졌고, 매번 큰 일이나 의문점이 있는 상소문이 올라올 때마다 경전을 참고하면서 일을 처리했고, 상소문이 합당하다 판단되면 대부분을 시행하였다. 상서이부랑으로 승진하여 당시 서진 귀족들의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은둔한 선비들 중 유능한 사람을 천거했다. 이에 북해의 서곽탕, 낭야의 유형, 연국의 곽원, 빙익의 길모 등이 발탁되어 비서랑으로 제왕의 문학에 앉았다. 한번은 당시 연국의 중정 유침이 곽원을 한소로 천거했다가 사도좌장사 순조에게 집안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이중은 이를 반박하고 곽원을 등용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고 조정에서 받아들여졌다.
이중은 동생 이억(李嶷)과 상서이부랑으로 일하며 재야의 인재들을 열심히 찾았는데,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뜻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상서 왕융이 이들 형제의 능력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중은 276년부터 280년에 이르기까지 재야의 인재들을 등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수 차례 상소를 올려 언급하였으나, 서진의 정치가 문란하고 혼란스러워 시행되지 않았다.
조정에 난이 일어나자 이를 따르지 않다가 나가서 토로호군, 평양태수가 되었다. 이중은 부임지를 덕정으로 통치하면서 학교를 설치해 백성들을 교육하고, 품행을 단정히 하며, 부패한 지방 관료들을 타도하니, 4곳의 현령이 부정부패로 파면되었다. 부임한지 3년이 지난 후 동생 이억이 사망하자 표를 올려 관직을 떠났다.
300년, 조왕 사마륜이 이중의 명망을 흠모해 상국좌사마로 삼았는데, 이중은 사마륜이 장차 난을 일으킬 것이라 여겨 병을 핑계로 취임하지 않았다. 사마륜은 꾀병을 눈치채 노여워하며 핍박하니, 이중은 스스로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것을 근심하여 억지로 임명에 응했다가 진짜로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병세는 대단히 위중하여 수 일이 지나 48세로 병사하였다. 사후 산기상시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성(成)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