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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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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보르본 왕조 제9대 국왕
이사벨 2세
Isabel II
파일:Isabel_II_de_Borbón_y_Borbón-Dos_Sicilias.jpg
출생 1830년 10월 10일
스페인 마드리드
사망 1904년 4월 9일 (향년 73세)
프랑스 파리
재위기간 스페인 여왕
1833년 9월 29일 ~ 1868년 9월 30일
서명 파일:이사벨 2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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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243><colcolor=#fff> 가문 보르본 가문
이름 마리아 이사벨 루이사 데 보르본 이 보르본도스 시실리아스
(María Isabel Luisa de Borbón y Borbón-dos Sicilias)
아버지 페르난도 7세
어머니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형제자매 루이사 페르난다
배우자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1]
(1846년 결혼 / 1902년 사망)
자녀 이사벨, 알폰소 12세, 마리아 델 필라르, 마리아 데 라 파스, 에우랄리아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Queen_Isabella_II_of_Spain_by_Franz_Xavier_Winterhalter%2C_1852.jpg
초상화

1. 개요2. 칭호3. 생애
3.1. 3살에 여왕이 되다3.2. 카를로스 전쟁3.3. 불안정한 치세3.4. 망명과 퇴위, 사망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5. 기타

[clearfix]

1. 개요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여왕.

스페인 역사상 16세기 이후 오랜만에 나온 여왕으로, 현재까지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유일한 여왕이다.[2][3]

2. 칭호

이사벨 2세의 칭호는 스페인이 입헌군주제로 이행한 1837년을 기점으로 달라진다. 1837년 이전의 칭호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양 시칠리아, 예루살렘, 나바라, 그라나다, 톨레도, 발렌시아, 갈리시아, 마요르카, 세비야, 사르데냐, 코르도바, 코르시카, 무르시아, 메노르카, 하엔, 알가르브, 알헤시라스, 지브롤터, 카나리아 제도, 동서인도, 대양의 제도 및 육지의 여왕, 오스트리아 여대공, 부르고뉴, 브라반트 및 밀라노의 여공작, 합스부르크, 플랑드르, 티롤과 바르셀로나의 여백작, 비스케이 및 몰리나의 영주 등등이신 이사벨 2세(Doña Isabel II por la Gracia de Dios, Reina de Castilla, de León, de Aragón, de las Dos Sicilias, de Jerusalén, de Navarra, de Granada, de Toledo, de Valencia, de Galicia, de Mallorca, de Sevilla, de Cerdeña, de Córdoba, de Córcega, de Murcia, de Menorca, de Jaén, de los Algarbes, de Algeciras, de Gibraltar, de las Islas Canarias, de las Indias Orientales y Occidentales, Islas y Tierra firme del mar Océano; Archiduquesa de Austria; Duquesa de Borgoña, de Brabante y de Milán; Condesa de Aspurg, Flandes, Tirol y Barcelona; Señora de Vizcaya y de Molina &c. &c.)'

그리고 입헌군주제가 시행된 1837년 이후의 칭호는 아주 간략하게 축소되었다.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은총과 스페인 군주국 헌법에 따르는 제()스페인의 여왕이신 이사벨 2세(Doña Isabel II, por la gracia de Dios y la Constitución de la Monarquía española, Reina de las Españas)'

3. 생애

3.1. 3살에 여왕이 되다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와 그의 조카딸이자 네 번째 아내인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장녀.

1830년 10월 10일에 태어났다.

1833년 9월 29일 아버지 페르난도 7세가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3살배기 아기였던 이사벨이 스페인의 여왕으로 즉위하고 모후인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섭정이 되었다.

페르난도 7세는 3번의 결혼에서 자식을 두지 못했다. 4번째 아내인 마리아가 드디어 임신하자, 만약 딸이 태어나더라도 무조건 자신의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1830년 3월에 살리카법을 폐지시키고 이전의 왕위 계승법을 부활시켜 여성도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사전 준비를 마쳤다. 몇 개월 뒤 장녀 이사벨이 태어났고, 1832년에 차녀 루이사 페르난다가 태어났다.

3.2. 카를로스 전쟁

포르투갈 내전 스핀오프[4]

어린 이사벨이 즉위하자, 페르난도 7세의 남동생인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가 조카딸의 즉위는 무효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살리카법 대로라면 자신에게 왕위계승 우선권이 있기 때문. 카를로스는 '카를로스 5세'를 자칭하며 자기가 스페인의 국왕이라 선언했고, 이로 인해 스페인은 '카를로스 전쟁'이라 불리는 7년간의 내전이 발발했다.[5]

카를로스를 지지하는 세력은 기존의 기득권층인 교회 귀족이 중심인 보수파였고, 이사벨 2세를 지지하는 세력은 의회의 주요 정당들이 중심인 진보파였는데 이는 여왕의 즉위가 페르난도 7세의 반동 전제군주정을 몰아내고 입헌주의에 근거한 의회정부를 재건할 호기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내전 초기에는 반군이 승리할 것처럼 보였으나 의회가 교회의 재산을 국고로 몰수하는 강경책을 써서 카를로스파의 돈줄을 끊고, 정부군의 활약과 반군의 내분 등으로 무너지면서 1839년 이사벨 2세의 여왕 즉위가 확고하게 굳어졌다.

참고로 카를로스파는 계속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이후에도 두 차례에 걸쳐 전쟁을 일으켰지만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집권한 후 차기 스페인 왕위를 여왕의 현손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잇도록 함으로써 한 세기 넘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게다가 카를로스파의 직계는 남계후손이 끊기면서 1936년에 단절되었기 때문에 살리카법으로 따지면 다음 계승자는 카를로스의 동생인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와 이사벨 2세의 손자인 알폰소 13세인데, 이렇게 되면 카를로스파 입장에서는 이사벨 2세의 후손을 인정하는 꼴이 돼버리므로 카를로스파는 부르봉파르마계에서 후손을 추대했으나, 이는 살리카법을 바탕으로 한 카를로스파의 주장에 근본적인 모순이 된다.(이 때문에 카를리스타는 알폰소 12세가 이사벨 2세의 사생아라고 주장하고 있다.) 더구나 스페인 사람들은 아마데오 1세의 상황에서 보듯이 이탈리아 출신 왕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3.3. 불안정한 치세

어린 여왕은 어렵사리 왕위를 지켰지만 카를로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40년 진보당을 이끄는 발도메로 에스페르테로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여왕의 모후이자 왕대비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섭정 자리에서 물러나 망명했고, 에스페르테로가 대신 섭정이 되어 급진주의 정책을 펴다가 3년 뒤인 1843년 마리아 크리스티나파 장군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실각하고 말았다. 새로 구성된 내각은 의회가 섭정을 두지 않고 여왕이 친정하는 것을 인정하도록 했는데, 이때 여왕은 13세였다.[6][7]

친정은 1868년까지 25년간 계속되었지만 그동안 장군들이나 정파들이 서로 대립하는 와중에 쿠데타가 계속되고 집권당이 교체되는 등 정국은 매우 불안정했다. 하다못해 이런 와중에 이사벨 2세가 구심점 역할이라도 제대로 했으면 조금이라도 나았겠지만, 여왕은 일관성 없는 태도로 정치에 개입해 보수세력과 진보세력 양쪽을 오가며 보수반동 정치를 해 국민의 평판이 바닥을 쳤다.

여왕의 치세 중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으로는 나폴레옹 3세와 연합해 멕시코 제국을 지지한 것과 1859년 모로코와의 전쟁으로 영토 일부를 확보한 것, 멕시코 쿠바를 둘러싼 미국과의 관계 악화 등이 있다.

미국으로 도주한 선상노예를 두고 미국과 대립한 아미스타드 호 사건이 이 때 일어났다.

이사벨 2세의 재위기간 35년 동안 6개의 헌법, 41개의 내각, 15번의 군대 봉기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종합하면 내치는 잦은 정쟁으로 실패하고 외치는 불안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4. 망명과 퇴위, 사망

파일:external/uploads7.wikipaintings.org/sovereigns-no-20-caricature-of-isabella-ii-of-spain.jpg

이러한 여왕의 무능력함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스페인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마침내 1868년 프란시스코 세라노 장군과 후안 프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군을 굴복시킨다. 같은 해 9월 30일 여왕은 프랑스로 망명하는데 이를 9월 혁명이라고 한다.

망명은 했지만 왕위는 포기하지 않았던 이사벨 2세는 1870년 6월 25일 망명지 파리에서 왕세자 알폰소 12세에게 왕위를 양위하였다. 하지만 스페인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이탈리아 왕국 사보이아 왕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차남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를 아마데오 1세로 옹립했다. 그런데 아마데오 1세가 스페인에 오기 직전 자신의 지지자였던 프림 수상이 암살당했으며 도착하고 나서는 왕정복고파, 카를리스타, 노동자 등, 모든 세력들이 아마데오 1세더러 물러나라고 요구해[8] 결국 즉위한 지 4년 만인 1873년 스트레스를 받던 아마데오 1세는 도로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잠시나마 공화국이 된다.[9]

하지만 공화국이 되었는데도 개막장이 지속되자 1874년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알폰소 12세가 즉위하게 된다. 왕정복고가 되면서 이사벨 2세도 수도 마드리드로 귀환하였으나 정신 못 차리고 다시금 정치에 개입하려 하자, 이를 우려한 스페인 국내의 반대로, 또다시 국외로 쫓겨나 프랑스에서 살다가 1904년 4월 10일 파리에서 사망했고, 유해는 스페인의 엘 에스코리알 궁전에 안장되었다.

4. 가족관계

1846년 10월 10일에 여왕의 친가쪽과 외가쪽 모두 사촌 관계가 되는[10]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와 결혼해 슬하에 12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유아 때 사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은 알폰소 12세를 포함한 1남 4녀 뿐이었다.

파일:Francisco de Asís, Duque de Cádiz.jpg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1822년 5월 13일 ~ 1902년 4월 17일)

여왕의 혼담이 오갈 때 각국 왕실에서는 저마다 배우자감을 추천해 국익을 도모하려 했는데,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인 앨버트 공의 출신 가문인 코부르크 가문의 사람을 내세웠고 프랑스 루이필리프 1세는 자기 아들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11]을 내세우며 서로 기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은 이사벨 2세와 같은 날에 이사벨의 동생 루이사 페르난다와 결혼했다. 즉 합동결혼.

결국 이사벨 2세는 정치적인 이유로 사촌인 프란시스코와 결혼했는데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인지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고, 일각에서는 프란시스코가 성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그런데 이에 대해선 프란시스코도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어서 살리카법으로도 프란시스코와 이사벨의 남자 후손은 계승권을 갖게 되니,[12] 일부러 이사벨 2세의 자식이 프란시스코의 자식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카를로스파가 일부러 프란시스코에게 문제가 있다는 소문을 의도적으로 조장했다는 말이 있다.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이사벨 2세
(Isabella II)
<colbgcolor=#fff3e4,#331c00> 페르난도 7세
(Ferdinand VII)
<colbgcolor=#ffffe4,#323300> 카를로스 4세
(Charles IV)
카를로스 3세
(Charles III)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13]
(Maria Amalia of Saxony)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
(Maria Luisa of Parma)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14]
(Philip, Duke of Parma)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Louise Élisabeth of France)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hristina of the Two Sicilies)
프란체스코 1세
(Francis I)
페르디난도 1세
(Ferdinand I)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15]
(Maria Carolina of Austria)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이사벨
(Maria Isabella of Spain)
카를로스 4세
(Charles IV)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16]
(Maria Luisa of Parma)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지르젠티 백작부인 이사벨 공주
(Infanta Isabel, Countess of Girgenti)
1851년 12월 20일 1931년 4월 22일 지르젠티 백작 가에타노[17]
1남 알폰소 12세
(Alfonso XII)
1857년 11월 28일 1885년 11월 25일 오를레앙의 메르세데스[18]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슬하 1남 2녀[19]
2녀 마리아 델 필라르 공주
(Infanta María del Pilar)
1861년 4월 6일 1879년 5월 8일
3녀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페르디난트 왕자비 마리아 데 라 파스
(María de la Paz, Princess Ludwig Ferdinand of Bavaria)
1862년 6월 23일 1946년 12월 4일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페르디난드[20]
슬하 2남 1녀
4녀 갈리에라 공작부인 에우랄리아 공주
(Infanta Eulalia, Duchess of Galliera)
1864년 2월 12일 1958년 3월 8일 갈리에라 공작 안토니오[21]
슬하 2남

5. 기타

한편으로는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스페인의 사회, 교통 인프라가 확충된 시점이기도 하다. 1848년, 바르셀로나 - 마타로를 잇는 스페인의 첫 철도가 건설되었으며 1851년에는 마드리드와 아란후에스를 연결하는 철도가 건설되었고, 1864년에는 마드리드에서 프랑스 국경 이룬(Irún)까지 연결하는 노선이 개통되어 유럽 철도체계에 편입되었다. 1850년대 철도관련 법령 개정과 함께 스페인의 철도는 매우 빠른속도로 부설되어 1870년대 초 대도시를 연결하는 주요 노선 부설이 완료되었다.


[1] 숙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카를로스 4세의 막내아들)와 이모 루이사 카를로타( 프란체스코 1세의 차녀)의 아들이다. 즉, 친사촌 겸 이종사촌. [2] 현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가 더 이상의 자녀 계획이 없음을 밝혀 장녀 아스투리아스 여공 레오노르가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되었기 때문에, 레오노르가 즉위하면 약 200년 만에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유일한 여왕 타이틀이 깨지게 된다. [3] 압스부르고 왕조도 여왕을 옹립했으면 되지 않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때는 펠리페 4세의 공주들도 이미 죽은 뒤였기에 마리 테레즈의 손자인 펠리페 5세가 즉위하게 된다. [4] 농담이 아니라 전쟁의 명분이 둘 다 조카딸과 숙부 사이의 왕위 계승 문제였고, 실질적인 이유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충돌인 것까지 판박이다. [5] 사실 스페인은 프랑크 왕국계가 아니라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았으나 보르본 왕조가 들어서면서 생겨나게 되었다. [6] 참고로 13세면 동아시아 왕조 기준으로 보면 거의 무조건 수렴청정이 필요한 나이이고, 서양이라도 대비의 수렴청정이 아니더라도 섭정 비슷한 후견인이 있어야 하는 나이이다. [7] 비슷한 나이인 14살에 친정을 바로 시작한 조선의 숙종은 적어도 14살에 왕위에 오른데다 이전까지 착실히 후계자 교육을 받아온 케이스이다. 그리고 조선은 서양 왕실보다 왕비 및 대비의 권한이 강력했기 때문에 숙종의 모후이자 왕대비인 명성왕후 김씨의 권위가 똑같은 왕대비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막강해서 종친들이 국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탐낼 엄두를 아예 못 냈다. 거기다 가장 최고 웃어른인 대왕대비 장렬왕후 조씨도 살아있었다. [8] 이 과정에서 카를리스타는 또다시 내전까지 벌였다. [9] 왕정 포기하고 공화국이 되었더니만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네 명의 대통령이 나오는 개막장이 벌어지고 반란, 전쟁 심지어는 쿠바에서마저 반란이 터지는 개막장의 연속의 일이 터진다. [10] 친사촌 겸 이종사촌. 이사벨의 아버지 페르난도 7세와 프란시스코의 아버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가 친형제 지간이였고, 이사벨의 어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프란시스코의 어머니 루이사 카를로타도 자매지간이였다. 심지어 페르난도 7세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모두 자신의 외조카와 결혼해 이사벨과 프란시스코를 낳았다. [11] 참고로 모계로는 5촌인데 부계로는 대략 14촌 관계다. [12] 프란시스코는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의 동생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실질적 장남이기 때문에(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이 요절) 살리카법에 따라 왕위를 계승한다고 가정할 경우 계승 서열이 카를로스파 바로 다음 순서가 된다. 실제로 이에 따라 부르봉 왕조 직계가 단절된 후 카를로스계에게 넘어간 명목상의 프랑스 왕위는 카를로스계가 단절된 다음 이사벨 2세의 손자 알폰소 13세를 거쳐 그의 차남인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에게 넘어갔다. [13] 아우구스트 3세의 장녀이자 요제프 1세의 외손녀이다. [14] 펠리페 5세의 5남이다. [15] 프란츠 1세 마리아 테레지아의 10녀이다. [16] 펠리페 5세의 손녀이자 루이 15세의 외손녀이다. [17] 페르디난도 2세의 5남이다. [18] 루이필리프 1세의 손녀이자 페르난도 7세의 외손녀이다. [19] 아스투리아스 여공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 알폰소 13세 [20] 루트비히 1세의 손자이다. [21] 루이필리프 1세의 손자이자 페르난도 7세의 외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