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21:09:55

루트비히 1세(바이에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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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왕국 제2대 국왕
루트비히 1세
Ludwig I
파일:King_Ludwig_I_in_his_Coronation_Robes.jpg
<colbgcolor=#0098d4><colcolor=#fff> 이름 루트비히 카를 아우구스트
(Ludwig Karl August)
출생 1786년 8월 25일
프랑스 왕국 스트라스부르
사망 1868년 2월 29일 (향년 81세)
프랑스 제2제국 니스
재위 바이에른 왕국의 왕
1825년 10월 13일 ~ 1848년 3월 20일
배우자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테레제
(1810년 결혼 / 1854년 사망)
자녀 막시밀리안 2세, 마틸데 카롤리네, 오토, 루이트폴트, 아델군데, 힐데가르트, 알렉산드라, 아델바이트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어머니 헤센다름슈타트의 아우구스테 빌헬미네
형제 아우구스테, 카롤리네, 카를 테오도어
종교 로마 가톨릭
서명
파일:루트비히 1세(바이에른)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즉위 전2.2. 치세2.3. 퇴위
3. 예술에 대한 관심4. 가족관계
4.1. 자녀
5. 여담

[clearfix]

1. 개요

바이에른 왕국의 제2대 국왕.

2. 생애

2.1. 즉위 전

1786년 8월 25일에 프랑스 왕국에서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의 장교였다.

바이에른의 선제후가 된 막시밀리안은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루트비히 1세는 7군단 제1바이에른 사단의 사령관으로써 프랑스 동맹군을 지휘했다. 바이에른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승전에 기여한 공으로 선제후국에서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1806년 1월 1일에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가 바이에른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루트비히 1세는 왕세자가 되었다. 그러나 루트비히 1세는 반프랑스 동맹을 지지했으며, 1813년에 바이에른이 반프랑스로 돌아서는 데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파일:Therese of Saxe-Hildburghausen.jpg
파일:Ludwig I and Queen Therese with their families.jpg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테레제 루트비히 1세의 가족 초상화
1810년에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1] 공작의 딸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테레제와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왕세자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서 경마 경기가 열렸다. 이 경기가 대중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옥토버페스트의 기원이 되었다.

2.2. 치세

1825년 10월 13일에 왕위에 올랐다. 루트비히 1세는 변덕스럽고 탐미적이었으나 국무에 성실하게 임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독일 최초의 철도가 만들어졌으며, 다뉴브 강과 마인 강을 연결시키는 운하가 건설되었다. 또한 만하임시 인근의 라인샨체 거주지에 도시를 건설하고 루트비히스하펜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외에도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들을 세우는 등 바이에른 왕국의 산업화에 힘썼다.

1837년에 행정 제도를 개편해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바이에른 주의 7개 현을 정비했다.

한편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으로 인한 자유주의 사상에 유럽 ​​전역이 영향을 받으면서 검열 정책을 강화시켜 자유주의를 억압했다. 이에 대한 반향으로 라인란트팔츠의 함바흐 성에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인 함바흐 축제가 열렸다.

2.3. 퇴위

파일:Lola_Montez.jpg
파일:Lola Montez.jpg
롤라 몬테즈

호색한이었던 루트비히 1세는 여러 애인을 두었다. 그중 아일랜드 출신 무용가이자 배우인 롤라 몬테즈[2]와의 염문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롤라 몬테즈는 배우이면서 고급 창녀 일을 병행하며 그 이전에도 니콜라이 1세, 프란츠 리스트, 알렉상드르 뒤마와도 염문을 뿌렸었다. 1846년에 바이에른 왕국에 온 롤라 몬테즈는 옥토버페스트에서 춤을 추다가 루트비히 1세의 눈에 띄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처음 만났을 때 루트비히 1세는 그녀에게 가슴이 진짜냐고 물었고 롤라는 옷을 찢어서 가슴을 인증(...)했다고 한다. 얼마 안 가 25세의 롤라 몬테즈는 60세인 루트비히 1세의 정부가 되었다.

루트비히 1세는 롤라 몬테즈에게 푹 빠져 그녀에게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그는 롤라에게 뮌헨에 위치한 궁전을 선물하고 그곳에서 롤라를 만났다. 또한 바이에른 국적을 부여하고 란츠펠트 여백작 작위를 수여하였으며, 막대한 연금을 롤라에게 주었다.[3] 이에 바이에른 국민들은 크게 반발했다. 롤라는 외국인인데다 성격이 괴팍했으며, 문란한 여성이라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또한 바이에른 국민들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왕비였던 테레제 왕비를 동정했다. 그런데 왕이 계속 롤라에게 큰 돈을 쓰며 바이에른 국적까지 준다고 하자 대중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1848년 2월에 루트비히 1세의 퇴위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정치인들과 루트비히 1세의 가족들마저 그에게 고개를 돌렸으며, 궁지에 몰린 루트비히 1세는 롤라 몬테즈의 바이에른 국적 부여를 취소하고 그녀를 추방시켰다.[4] 3월 20일에 아들 막시밀리안 2세에게 양위하고 왕위에서 물러났다.
파일:어쩔TV_.png
말년의 루트비히 1세, 1860년

퇴위 후 예술가 양성에 힘쓰다가 1868년 2월 29일에 니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3. 예술에 대한 관심

예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고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의 독립을 지지했으며 사비를 털어서 그리스 독립 전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 영향으로 루트비히 1세의 차남 오토 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또한 그리스 고궁 역시 루트비히 1세가 후원한 자금으로 건설된 궁전이다.

여러 예술가들을 후원했으며 건축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치세 동안 발할라 명예의 전당, 뮌헨 글립토테크 미술관, 해방의 전당, 알테 피나코테크 등 많은 신고전주의 건축물이 건설되었다.
파일:Gallery of Beauties of King Ludwig I.jpg
님펜부르크 궁전의 미인 갤러리

루트비히 1세의 유산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님펜부르크 궁전의 미인 갤러리(Schönheitengalerie)다. 루트비히 1세는 왕실 화가에게 당대의 가장 아름다운 여성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 그 초상화들을 님펜부르크 궁전의 한 방에 전시했다. 그림의 모델들에는 무용수에서 공주까지 다양한 여성들이 있다. 그 중에 롤라 몬테즈를 비롯한 루트비히 1세의 애인들이 있기 때문에 36점의 초상화 모두 루트비히 1세의 애인들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초상화의 모델들 중에는 루트비히 1세의 이복여동생인 바이에른의 조피 공주와 딸 바이에른의 알렉산드라도 있다.

4. 가족관계

4.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막시밀리안 1세
(Maximilian II)
1811년 11월 28일 1864년 3월 10일 프로이센의 마리
슬하 2남[5]
1녀 헤센 대공비 마틸데 카롤리네
(Matilde, Grand Duchess of Hesse and by Rhine)
1813년 8월 30일 1862년 5월 25일 헤센 대공 루트비히 3세
2남 오톤
(Otto)
1815년 6월 1일 1867년 7월 26일 올덴부르크의 아말리
3남 바이에른의 섭정 루이트폴트
(Luitpold, Prince Regant of Bavaria)
1821년 3월 12일 1912년 12월 12일 오스트리아의 아우구스테 페르디난데
슬하 3남 1녀[6]
2녀 모데나 공작부인 아델곤다
(Adelgunde, Duchess of Modena)
1823년 3월 19일 1914년 10월 28일 프란체스코 5세
슬하 1녀
3녀 테셴 공작부인 힐데가르트
(Hildegard, Duchess of Teschen)
1825년 6월 10일 1864년 4월 2일 테셴 공작 알베르트 대공
슬하 1남 2녀
4녀 알렉산드라 공주
(Princess Alexandra)
1826년 8월 26일 1875년 9월 21일
4남 아달베르트 왕자
(Prince Adalbert)
1828년 7월 19일 1875년 9월 21일 스페인의 아말리아 인판타
슬하 2남 3녀

5. 여담

  • 치세 동안 비교적 강압적인 정권을 유지한 데에 반해 소탈하고 친구가 많았다고 한다.
  • 마찬가지로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손자 루트비히 2세와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으며 말년에 루트비히 2세와 함께 파리 만국박람회를 방문하기도 했다.

[1] 작센알텐부르크 공가가 1826년 에른스트 계열 공가들의 영지가 조정되기 전까지 다스리던 공국이었다. 1826년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가가 단절되어 영지가 조정되는 과정에서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가가 알텐부르크를 얻고, 기존 영지인 힐트부르크하우젠은 작센마이닝겐 공국에 양도하면서 작센알텐부르크 공국이 시작된다. [2] 본명은 엘리자베스 로잔나 길버트. 아일랜드 출신이지만 스페인 사람같은 외모를 가져서 롤라 몬테즈라는 스페인식 예명을 썼다. 현대 인물 캐서린 제타존스와 비슷한 케이스인 듯. [3] 작위를 내리고 연금을 준 것은 로얄 미스트리스로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4] 추방당한 롤라 몬테즈는 이후 미국과 호주 등을 전전하며 나이가 들면서 미모가 시들자 몰락하여 40세의 나이에 쓸쓸히 사망한다. [5] 루트비히 2세, 오토 [6] 루트비히 3세, 레오폴트 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