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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베르어: ⵉⵎⵔⵉⵏⴻⵏ (Imrinen)
아랍어: المرينيون
존속기간: 1215년 ~ 1465년
국기
1. 개요
무와히드 왕조를 멸망시킨 후에 페스를 수도로 하여 모로코와 알제리 북부 일대를 통치한 베르베르 계 왕조. 이베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미치려 한 마지막 모로코 (무어인) 국가이다.2. 역사
2.1. 건국
마린 부족은 원래 알제리 서부에 거주하던 제나타 베르베르 유목민이었는데, 12세기에 무와히드 왕조의 군대에 편입되어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 레콘키스타) 세력과 싸웠다. 그들은 1195년에 무와히드 왕조와 카스티야 왕국 간에 벌어진 알라르코스 전투[1]에서 활약하며 이슬람 군대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부족장 무흐유는 이때 얻은 부상으로 사망하였고, 압둘 학크가 후임 부족장이 되었다. 그러던 1212년,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무와히드 왕조가 크리스트교 연합군에게 대패하면서 급속도로 쇠퇴하자, 압둘 학크가 이끄는 마린 부족은 타자를 중심으로 북부 모로코의 경작지들을 무력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모로코 동북부 해안이 마린 부족에 조공하게 되자 무와히드 조는 반격에 나섰다. 1217년 아랍계인 바누 리야흐와 연합한 무와히드 정규군은 마린 군대를 격파하였고, 압둘 학크가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 아부 사이드 우스만 1세는 남은 세력과 남쪽으로 철수하였다.2.2. 모로코 통일 전쟁
1224년부터 무와히드 조가 12년에 걸친 내전에 돌입하자 우스만은 마린 조의 세력을 회복하고 재차 모로코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228년 안달루스가 3차 타이파 시대에 돌입하고 1235년 틀렘센의 자얀 왕조가 자립한 후로 무와히드 조의 세력은 모로코 일대로 축소된 상태였다. 다만 1240년 우스만은 기독교도 노예에 의해 암살되었고 동생 무함마드가 계승하였다. 그는 무와히드 조와의 싸움을 지속하였고 타자, 페스, 크사르 엘 케비르의 농촌 지방을 점령하며 모로코 북부를 잠식해갔다. 이후 무함마드는 메크네스의 지배권을 두고 접전을 벌였는데, 무와히드 칼리파 앗 사이드 알 무타디드가 직접 반격하여 승리하였다. (1244년) 무함마드는 전투 중 기독교도 용병대의 장교에게 살해되었고, 마린 조는 모로코 북부에서 축출되어 아틀라스산맥 너머로 철수하였다. 이에 다른 동생 아부 야흐야 아부 바크르가 계승하였는데, 그는 재차 세력을 규합하여 정식으로 에미르를 칭하고 모로코 북부에 대한 원정에 나섰다.1245년 아부 바크르는 숙원 사업이던 메크네스 점령에 성공, 첫 수도로 삼았다. 다만 1248년 칼리파 알 무타디드가 친히 북상하자 아부 바크르는 그에게 복속을 표하고 리프 산지의 요새로 철수하였다. 그해 6월 틀렘센 원정에 나선 알 무타디드가 우지다에서 자얀 왕조의 매복을 당해 전사하자 아부 바크르는 회군하는 무와히드 군대를 구에르시프에서 공격해 섬멸하였고, 그 휘하에 있던 기독교 용병대를 고용하였다. 곧바로 정복에 나선 아부 바크르는 메크네스를 수복하고 페스까지 점령, 후자를 수도로 삼았다. 그외에 타자, 라바트, 살레 등이 점령되며 북부 모로코가 평정되었다. 마린 조는 대서양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비옥한 지역을 모두 장악하였고 무와히드 조의 지배력은 마라케쉬와 수스 일대로 축소되었다. 1255년 아부 바크르는 시질마사를 점령하였으나 3년 후 병사하였다.
아부 유수프 야쿱이 재위하던 시절에 마린 왕조는 발전하였다. 1262년에 1차 마라케시 포위 공격을 하였고, 1266년에 무와히드 왕조의 꼭두각시 칼리프를 옹립하였다. 1268년, 모울로야 전투에서 틀렘센 왕국 군대 격파. 1269년에 마라케시를 정복하였고, 술탄 직위 획득과 함께 무와히드 왕조를 멸망시켰다. 1271년에는 남부 모로코를 점령했고, 1274년에는 시질마사를 정복하였다.
2.3. 레콘키스타 세력과의 전쟁
1260년 9월, 카스티야 왕국이 라바트 인근의 항구 도시인 살레를 공격하였다.1275년에 아부 유스프가 카스티야 왕국의 알헤시라스 지방을 차지하였다.
2.3.1. 알 안달루스 개입
아부 야쿱 유수프의 치세 후반부터 그라나다의 지원을 받은 우스만 이븐 아빌 울라가 모로코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유수프의 손자이자 후계자인 아부 싸비트 아미르는 우지다 ~ 틀렘센의 영토를 포기하고 테투안을 거점으로 반란 집압에 나섰으나 1308년 7월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를 계승한 동생 압둘 라비 술레이만은 세우타 포위를 이어갔고 카스티야, 아라곤에 사절을 보내 그라나다를 공격하게 하였다. 1309년 3월 후자의 군주 무함마드 3세를 폐위하고 즉위한 동생 나스르는 우스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였고, 마린 군을 지원한 결과 그해 7월 세우타가 회복되었다.한편 모로코-그라나다 대립을 틈타 지브롤터를 점령한 카스티야 군은 알헤시라스를 포위한 상태였다. 세우타 수복에 대한 도움을 보답하기 위해 술레이만은 1310년 1월 알헤시라스에 원군을 파견해 카스티야 군의 철수를 이끌어내었고 아라곤의 알메리아 포위 격퇴에도 도움을 주었다. 관계 회복의 상징으로 술레이만은 그라나다 공주와 결혼하였고, 그녀의 지참금으로 알헤시라스와 론다를 양도받으며 15년만에 안달루스의 교두보를 회복하였다. 혼란스러웠던 마린 조에 안정을 되찾은 술레이만은 1310년 11월, 즉위한지 불과 2년만에 병사하였다. 그는 자녀가 없었기에 숙부이자 유수프의 아들인 아부 사이드 우스만 2세가 계승한다.
그의 안정기 이후 즉위한 아들 아불 하산 알리는 틀렘센을 정복하며 향후 반세기 가량 이어지는 마린 조의 마그레브 패권을 이루기 시작한다. 1340년, 이베리아 남단의 살라도 강에서 마린 왕조와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연합군과 전쟁이 일어났는데, 마린 왕조가 패배하여 통치력이 북아프리카로 한정되었다.1347년 아불 하산 알리는 하프스 왕조의 수도 튀니스를 공격하여 마그레브 지역의 종주권을 차지하였다.
2.4. 중흥 노력과 쇠퇴
1348년에 마린 왕조의 영토에서 흑사병이 일어나자, 틀렘센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하프스 왕조가 마린 왕조에 대해 반항을 하기 시작하여 마린 왕조의 마그렙 통일은 2년 반에 그쳤다. 알리의 아들 아부 이난 파리스가 1357년 재차 마그렙을 통일하지만 1년을 넘기지 못한다. 이듬해 그가 암살된 후 마린 조는 10여년간 내전에 돌입한다. 장남 아부 자얀 무함마드가 폐위되고 동생 아부 바크르 사이드가 계승한 틈에 1359년 틀렘센의 자얀 왕조가 재차 독립한다. 아부 바크르 사이드 역시 1359년 그라나다의 지원을 받은 숙부 아부 살림 이브라힘에게 폐위되고, 후자 역시 동생 타슈핀에게 폐위된다. 1362년 아부 자얀 무함마드가 복위하나, 시질마사가 자립하여 2년 후까지 독립을 유지하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1366년 그나마 안정을 구축하던 아부 자얀 무함마드는 재상 우마르 빈 압둘라 알 야바니를 해임하려다가 오히려 그에게 암살당한다.폐스의 궁전에 유페되어 있다가 즉위한 숙부 아부 파리스 압둘 아지즈 1세는 권력을 공고히 한 후 우마르 빈 압둘라 알 야바니를 처형하며 왕권을 회복하였다. 이후 1370년 그는 자얀 조의 틀렘센을 점령, 꼭두각시 군주를 옹립한다. 그곳에서 압둘 아지즈는 당대의 학자 이븐 칼둔과 이븐 리드완을 고용하여 2년 후 전자의 세계사 집필을 의뢰한다. 또한 그는 힌타타 부족이 장악하고 있던 마라케쉬를 수복하여 재차 모로코를 통일하였고, 안달루스에서 박해받던 학자 리산 앗 딘 이븐 알 카팁을 지브롤터 수비대로 하여금 구출해오게 한다. 다만 중흥을 이끌던 압둘 아지즈가 불과 6년의 치세 만에 1372년 사망하자 마린 조는 재차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그의 장남 아부 자얀 앗 사이드 무함마드가 계승하였으나 차남 아불 압바스 아흐마드 (알 무스탄시르)와 친척 압둘 라흐만 빈 얄푸신이 그라나다의 지원으로 거병하여 앗 사이드를 폐위하고, 각각 페스와 마라케쉬를 수도로 정하며 모로코를 양분하였다. (1374년) 아흐마드는 도움의 대가로 지브롤터와 세우타를 그라나다에 양도하고, 무함마드 5세의 지시대로 리산 앗 딘 이븐 알 카팁을 교살한다.
그럼에도 그라나다 술탄 무함마드 5세는 장애가 있는 아흐마드의 사촌 무사 알 무타와킬을 지원해 1384-86년간 페스의 술탄으로 옹립하기도 한다. 복위한 아흐마드는 재상의 권력을 확대해주었고, 틀렘센과 알제를 재차 정복하며 일정 수준의 중흥을 과시하였으나 1393년 타자에서 사망하였다. 그후 아흐마드의 어린 손자들이 즉위하며 술탄의 권위가 추락하고 재상들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아흐마드의 5촌 조카이자 아부 살림 이브라힘의 손자 아부 사이드 우스만 3세는 최후의 중흥을 시도한다. 1410년 그라나다령 지브롤터 수비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우스만은 3천 병력을 보내어 돕게 하였고, 한때 마르베야와 에스테포나를 장악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그라나다 군의 반격으로 안달루스에서 완전히 축출된다.[2] 그리고 원정군을 이끈 우스만의 동생은 역으로 그라나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1415년 포르투갈이 세우타를 점령한다. 1419년 우스만은 친히 출정하여 세우타 수복을 시도하지만 격퇴되었고, 이듬해 암살당한다.
2.4.1. 1465년 반란과 멸망
우스만의 사후 혼란을 틈타 살레 총독이던 아부 자카리야 야흐야 알 와타시가 페스 왕궁을 장악, 우스만의 1세 아들인 압둘 학크 2세를 옹립하고 스스로 재상이자 섭정으로 선포하였다. 1423년까지 여러 경쟁자들을 제거한 재상 야흐야는 1437년 압둘 학크가 성인이 되었음에도 섭정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하였고, 같은해 포르투갈의 탕헤르 포위를 격퇴하며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이듬해 야흐야는 페스의 실질적 창건자인 이드리스 2세의 무덤을 성역화하였고, 1448년 사망하며 조카 알리 이븐 유수프에게 섭정직을 넘겼다. 1458년 후자가 사망하고 야흐야의 아들 야흐야..가 섭정이 되었는데, 그간 몰래 친위 세력을 키우던 압둘 학크 2세는 와타스 일족에 대한 학살을 선포하였다. 이에 야흐야[3]의 어린 아들 아부 압둘라 앗 셰이크 무함마드 등 소수를 제외한 와타스 가문이 학살되었고, 아불 학크는 실권을 회복하는듯 하였다.그러나 압둘 학크는 권력 기반이 약한 유대인들을 재상으로 고용, 무슬림 신민들의 공분을 샀다. 페스의 군중은 압둘 학크 2세가 수도를 비운 틈에 봉기하여 무프티를 협박해 유대인 학살 포고령을 얻어내어 재상을 살해한 후, 시내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개종 혹은 죽음의 선택지를 주었다. (1465년 모로코 반란) 군중은 14세기 말엽부터 명망을 쌓아가던 이드리스 왕가의 후손인 샤리프 무함마드 이븐 이므란을 군주로 추대하였고, 그해 라마단 무렵 압둘 학크에게 복위를 약속하며 페스로 불러들인 후 살해하였다. (1465년 5월 18일) 이로써 마린 왕조는 250년 만에 멸망하였고, 모로코 전역에서 유대인 박해가 진행되었다. 심지어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대인 상인 집단인 무하지린 역시 페스에서 추방될 정도였다. 그러던 1471년 살아남은 와타스 가문의 공자 앗 셰이크 무함마드가 기존 마린 조의 지지자들과 함께 무함마드 이븐 이므란을 축출하고 페스를 장악, 와타스 왕조를 창건하였고 시내의 유대 공동체를 재건하였다.[4]
[1]
7월 15일. 이베리아 반도의 안달루스 무슬림 세력이 야전에서 기독교 세력 상대로 거둔 회전에서의 마지막 대규모 승전. 여기서의 패배로 카스티야 왕국은 수도 역할을 담당했던 톨레도까지 털리고 10세기 이전, 즉 레콩키스타의 본격적 남하 이전의 강역으로 축소될 위기에 처했으나 무와히드 왕조의 고질적인 문제인 이중전선, 북아프리카에서의 반란으로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2]
유수프 3세의 아들 아흐마드의 포위 끝에 지브롤터 내부의 그라나다 내통자가 성문 열어줌
[3]
야흐야의 아들 야흐야
[4]
일시적으로 개종했던 유대인들의 신앙 회복 허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