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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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魏浚(? ~ 313)
서진의 인물로 자는 자해(子該).
2. 생애
연주 동군 동아현 출신으로 잠시 관중에 살고 있다가 옹주(雍州)의 하급 관리로 선발되어 일했다. 팔왕의 난이 터지고 하간왕 사마옹의 눈에 띄어 무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재능이 있어 탁지교위를 맡았다.311년 5월, 영가의 난으로 인해 살 곳을 잃어버린 유민 수백 호를 인솔하여 하음(河陰)의 협석(硤石)을 지키고있다가 인근에서 곡식을 약탈해 회제 사마치에게 바치니, 곤궁했던 회제는 이를 받아들이고 위준을 양위장군, 평양태수로 삼고 탁지교위직은 유지하였다. 그러나 한나라가 평양을 점거하는 바람에 부임하지 못했다.
동년 6월, 유총에 의해 낙양이 함락되고 회제가 사로잡혔다. 위준은 낙수(洛水) 북쪽 석량오(石樑塢)에 주둔해 도망쳐오는 백성들을 위무하고 병기를 정비하였다. 적을 편들려는 자가 있으면 군사로 해결하기보단 진나라의 앞날이 길고 창창하니, 반드시 재건될 것이라 설득하자 귀순해오는 세력이 많았다. 먼 곳에 있는 것을 믿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려는 자는 장수를 파견해 토벌하고 복종시키는 선에서 끝날 뿐, 해당 지역을 약탈하거나 방화하는 것을 엄금했다. 이에 거리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감복했고, 아이를 등에 업고 찾아오는 백성들도 있을 만큼 사방에서 위준에게 귀순하려 했다.
312년, 유곤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위준을 임시로 하남윤에 임명했다. 순번이 밀현에 행대를 세우자, 위준이 순번을 방문했다. 평소 위준의 명성을 흠모하던 이구는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밤이었음에도 그를 만나려 하니, 그의 부하가 위준은 믿을 수 없다며 밤에 가지 말라고 조언했다. 이에 이구는 "충신은 항상 마음을 같이 하는데, 무슨 의심이 있겠는가."라 답하며 위준과 면회했고, 위준은 먼저 와있던 다른 손님들과 함께 이구를 반겨 친분을 맺은 뒤, 다시 석량오로 돌아갔다. 이때 위준의 조카인 위해(魏該)가 무리를 모아 홍농군에서 일천오(一泉塢)를 지키고 있으니, 순번은 위해를 무위장군으로 삼았다.
313년, 한나라의 중산왕 유요는 위준이 병사와 백성을 거느리고 있는 것을 꺼려 군대를 휘몰아 석량오를 포위했다. 하북을 지키던 서진의 연주자사 유연(劉演)과 하내태수 곽묵(郭黙)이 그를 구원하기 위해 기병을 거느리고 출진하자, 유요가 군사를 나누어 이에 맞섰다. 유요의 군사들은 미리 구원군의 동선을 파악해 은밀히 매복한 뒤 유연과 곽묵을 기습해 크게 이기고, 유연 등을 포함해 그의 병사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위준은 밤을 틈 타 도주를 시도했지만 유요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조정에서는 위준을 평서장군으로 추존하였고, 위준이 이끌던 병사들은 도망쳐 조카 위해에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