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2 11:20:05

우예(외척)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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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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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虞豫
생몰연도 미상

서진의 인물이자 동진의 외척. 연주 제양군(濟陽郡) 외황현(外黃縣) 출신. 경황후 우맹모의 아버지.

2. 생애

젊었을 적 명성이 높아 주와 군에서 예를 갖추어 우예를 초빙하려 하였으나, 우예는 이에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후 남양왕 사마모의 문학으로 출사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딸 우맹모는 낭야왕 사마예의 왕비가 되었으나, 사마예가 황제를 칭하기도 전에 35세의 이른 나이로 사망하면서 생전에 황후에 오르지 못 하였다. 그리고 수 년 후에 사마예가 황제를 칭하고, 우맹모를 경황후로 추존하여 사후에 그의 가문은 동진의 외척이 되었다.

영창 원년(322년) 11월, 원제 사마예가 붕어하고 명제 사마소가 즉위하였다. 명제 사마소는 친모가 아님에도 자신을 친자식처럼 보살펴주었던 경황후의 은혜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그녀의 아버지인 우예를 뒤늦게나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추증하고, 평산현후(平山縣侯)에 추봉하였다. 그 작위는 우예의 아들이자 경황후의 동생인 우윤(虞胤)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다.

아들 우윤은 동진에서 산기상시, 보병교위, 우위장군, 종정경, 계양태수, 낭야태수, 노릉태수를 역임했으며, 남돈왕 사마종(司馬宗), 명제 사마소와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때문에 남돈왕 사마종이 반란을 꾸미다가 들켰을 때 연루당할 뻔 했지만 황제의 비호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우윤은 사후 위장군으로 추증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으며, 아들 우홍(虞洪)이 습작하여 후사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