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22:10:01

석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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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해왕의 태자
석우로 | 昔于老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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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년 4월 또는 253년[1]
사로국 서라벌
재위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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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태자
209년 7월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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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석씨
우로(于老) / 우류(宇流)
부모 부왕 내해 이사금
모후 석씨
형제자매 석날음, 아이혜부인
배우자 명원부인
자녀 흘해 이사금
작위 왕태자(王太子)
관등 서불한 }}}}}}}}}

1. 개요2. 생애
2.1. 무인으로서의 전성기2.2. 비참한 최후
3. 새로운 견해4. 일본서기와의 비교5. 평가6. 실제 기년 문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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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 초기 석씨 왕조의 귀족, 장군. 제10대 내해 이사금의 아들이자 제11대 조분 이사금의 큰사위였다.

기록이 모호한 신라 초기에서도 여러 전쟁에서 활약한 몇 안 되는 명장이다. 장인인 조분 이사금 시대에 대장군으로서 경상도 지역 안쪽의 신라 주변 소국의 반란이나 고구려, 의 침략을 방어해 내며 맹활약했다.

하지만 본인의 미흡한 처세에 석씨 족단 내부의 왕위 계승 문제에 당시 신라가 처한 묘한 대고구려, 대왜 외교의 복잡한 역학 관계까지 얽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2. 생애

2.1. 무인으로서의 전성기

昔于老
奈解尼師今之子.[或云, 角干水老之子也.] 助賁王二年七月, 以伊 爲大將軍, 出討甘文國, 破之, 以其地爲郡縣. 四年七月, 倭人來侵, 于老逆戰於沙道, 乘風縱水{火} , 焚賊戰艦, 賊溺死且盡. 十五年正月, 進爲舒弗耶{舒弗邯} 兼知兵馬事. 十六年, (+冬十月) 高句麗侵北邊, 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至夜, 士卒寒苦, 于老躬行勞問, 手燒薪 { } , 暖熱之, 群心感喜, 如夾 . 沽解王{沾解王} 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
석우로는 나해 이사금의 아들이다.[혹은 각간(角干) 수로(水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조분왕 2년 7월에 이찬으로서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을 토벌하여 이를 격파하고 그 지역을 군현으로 만들었다.
4년 7월에 왜인이 침략해오자 우로가 사도에서 역습하였다. 그가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적의 전함을 불태우자 적들은 물로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그는 15년 정월에 서불한으로 승급되고 동시에 병마사도 겸하였다.
16년,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우로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여 마두책을 지켰다. 밤에 군사들이 몹시 추워하므로 우로가 직접 다니면서 위로하고, 직접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해주니 여러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기쁘게 느껴 마치 솜을 두르고 있는 것 같이 여겼다.
첨해왕이 왕위에 있을 때, 이전부터 우리에게 속해있던 사량벌국이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로 투항하므로, 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여 멸해버렸다.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與伊伐飡利音 將六部兵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14년(서기 209) 가을 7월,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모의하여 가라(加羅)를 침범하자, 가라의 왕자가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임금은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에게 명하여 6부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삼국사기》 〈 내해 이사금 본기〉
二年 秋七月 以伊飡于老爲大將軍 討破甘文國 以其地爲郡
2년(서기 231) 가을 7월, 이찬 우로(于老)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하여 격파하고, 그 땅을 군으로 삼았다.

四年 夏五月 倭兵寇東邊 秋七月 伊飡于老與倭人戰沙道 乘風縱火焚舟 賊赴水死盡
4년(서기 232) 여름 5월, 왜의 병사가 동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沙道)에서 싸웠다.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배를 불태우니, 적들이 물에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十五年 春正月 拜伊飡于老爲舒弗邯 兼知兵馬事
15년(서기 244) 봄 정월, 이찬 우로를 서불한(舒弗邯)으로 삼고 병마의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十六年 冬十月 高句麗侵北邊 于老將兵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其夜苦寒 于老勞士卒 躬燒柴煖之 群心感激
16년(서기 245) 겨울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하였다. 우로가 병사를 이끌고 나가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키고 있었다. 그날 밤은 매우 추웠는데, 우로가 병졸들을 위로하고 몸소 나무로 불을 지펴 따뜻하게 해주니 모두 마음속으로 감격하였다.
삼국사기》 〈조분 이사금 본기〉

내해 이사금의 태자인데, 삼국유사에서는 내음/이음이 내해의 태자로 나온다. 학계에서는 날음이 우로의 형으로 먼저 태자였다 우로보다 먼저 사망하여 우로가 태자 자리를 물려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209년 7월, 가야( 함안 안라국 혹은 김해 금관국)가 한반도 남부 8개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자( 포상팔국의 난) 이음(利音), 물계자 등과 함께 6부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포상팔국의 연합군을 제압하고 적장을 죽이며, 가야인 포로 6,000여 명을 탈환하는 맹활약을 펼쳤다. 현대 학계 연구상으로는 어느 종주국에 반기를 드는 그런 난( 반란)이 아니라 당시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던 여러 가야계 도시 국가들 간 국제적인 전쟁이라고 해석되는 편이다. 다만 임진왜란도 그렇듯이 전통적으로 사용돼 왔던 용어가 포상팔국의 '난'이라서 계속 사용하는 것.

삼국유사에서는 반대로 태자가 나음(㮈音)으로 총대장이며, 일벌(一伐)과 물계자(勿稽子)가 장수로 동행하였고 물계자가 군공을 세웠으나 태자 내음의 미움을 사 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내음(奈音)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내해의 왕자 이음(利音)의 이명으로, 12년(207) 정월 이벌찬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병마를 맡았고, 13년(208) 4월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자 이음이 병사를 거느려 막았다. 14년(209) 포상팔국의 난 진압 때도 우로와 동행하였으며, 19년 7월 백제가 서불성을 공격하여 성주 설부(薛夫)를 죽이자 이벌찬 이음이 정예 6천을 이끌고 백제를 쳐 사현성(沙峴城)을 함락시켰다. 25년(220) 3월 이음이 죽었기 때문에 충훤(忠萱)이 이벌찬이 되어 병마의 일을 겸해 맡았으나 27년(222) 충훤이 백제와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자 진주(鎭主)로 좌천당하고 연진(連珍)이 이벌찬이 되어 병마를 맡아 29년(224) 백제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2] 시기를 감안했을 때 이음이 우로보다 먼저 태자가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약 20년간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데, 230년 부왕 내해 이사금이 승하하자 왕위는 태자였던 석우로가 아니라 사위였던 조분 이사금(제11대)에게 돌아갔다. 석우로는 자신의 누이 아이혜부인 석씨와 결혼한 당숙인 조분에게 밀려 왕이 되지 못했지만 조분 이사금 시기 대장군은 물론 최고 관직인 서불한에 임명되었고, 조분 이사금의 딸인 명원부인 석씨와 혼인했다. 이로써 석우로는 부왕 내해 이사금 재위 당시의 석조분이 그러하였듯 왕위 계승 서열 1순위가 되었다.[3] 하지만 조분 이사금의 승하 이후 왕위는 또다시 조분 이사금의 동생인 첨해 이사금(제12대)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231년 7월 석우로는 지금의 김천시에 있었던 소국 감문국을 정벌했다. 233년에는 동해 바다를 건너온 왜군의 침략을 영덕군 사도성에서 바람의 방향을 읽어 화공을 사용해 격파했다.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적의 전함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다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하며, 거의 전멸에 이르는 피해를 입은 왜군은 한동안 신라를 직접 침공하지 못하고 외교 교섭에 나선다.

245년 고구려가 신라 북쪽을 침입했을 때는 신라군이 고전해 마두책이라는 곳에 물러나 있었는데 이때 밤에 군사들이 추위에 괴로워하자 석우로가 몸소 다니며 위로하고 손수 풀섶에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해줘 군사들 모두가 마음속으로 깊이 감격했다고 한다. 고위 귀족 출신이지만 그런 권위를 휘두르지 않고 신분 낮은 아랫사람들과도 친밀하게 지내려고 하는 지휘관이었던 듯하다.

247년 사량벌국(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일대의 소국. 사벌국(沙伐國)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의 난[4]에서 활약하였다.

2.2. 비참한 최후

○七年癸酉, 倭國使臣葛那古在館. 于老主之, 與客戱言: "早晩, 以汝王爲鹽奴, 王妃爲 婦." 倭王聞之怒, 遣將軍于道朱君, 討我, 大王出居于柚村. 于老曰: "今玆之患, 由吾言之不愼, 我其當之." 遂抵倭軍, 謂曰: "前日之言, 戱之耳, 豈意興師至於此耶." 倭人不答, 執之, 積柴置其上, 燒殺之乃去. 于老子, 幼弱不能步, 人抱以騎而歸, 後爲訖解尼師今. 未鄒王時, 倭國大臣來聘, 于老妻請於國王, 私饗倭使臣. 及其泥醉, 使壯士曳下庭焚之, 以報前怨. 倭人忿, 來攻金城, 不克引歸.
7년 계유(서기 253)에 왜국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사관에 와 있었다. 우로가 주인처럼 행세하며 손님에게 다음과 같은 농담을 건넸다.
"조만간에 너의 국왕을 염전의 노비로 만들고, 너의 왕비는 취사부로 만들겠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5]을 보내 우리를 공격하자 대왕이 우유촌(于柚村)[6]에 나가 있었다.
우로가 말했다. "지금의 환란은 제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우로는 마침내 왜군에게 가서 말하기를 "전일에 한 말은 농담일 뿐이었는데, 이렇게 군사를 일으킬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랴?"라 하니[7] 왜인이 대답을 하지 않고 그를 붙잡아 장작을 쌓아 그 위에 얹어 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가버렸다.
우로의 아들은 어려서 몸이 약한 탓에 걸음을 걷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항상 그를 안아다가 말에 태워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는 후에 흘해 이사금이 되었다.
미추왕 때 왜국 대신이 예방하여 왔었는데 우로의 처는 국왕에게 청하여 왜국 사신을 개인적으로 대접할 기회를 얻었다. 왜국의 사신이 흠뻑 술에 취하였을 때, 그녀는 장사(壯士)로 하여금 그를 뜰에 내려놓고 불에 태워 전날의 원수를 갚았다. 왜인들이 분개하여 금성에 침공하여 왔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
三年 夏四月 倭人殺舒弗邯于老
3년(서기 249) 여름 4월, 왜인이 서불한 우로(于老)를 죽였다.
삼국사기》 〈첨해 이사금 본기〉

제12대 첨해 이사금 재위 7년(서기 253년), 석우로는 왜국 사신 앞에서 왜왕(오오키미(大王(オオキミ))을 모욕했다. 때문에 분노한 왜는 신라와 전쟁까지 치르게 된다. 이에 우로는 자신의 태도로 자초한 일이니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며 적진으로 갔지만 우로의 되도 않는 변명에 분노한(...) 왜군에 의해 그 자리에서 붙잡혀 화형을 당한다.

우로가 왜 굳이 왜국 사신 앞에서 이런 거친 표현을 써서 화를 불렀는지는 불명이지만 위에도 적혀있듯 석우로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왜군과 싸운 경력도 있는 만큼 평소에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상대가 아무리 적국이라 한들 일단은 우호적인 말이 우선적으로 오가야 할 외교석상에서 굳이 안 해도 될 실언을 해서 전쟁을 촉발시킨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본인도 "내가 말을 조심하지 못해서 이런 환란이 생겼다"고 인정했고.

하지만 사건은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미추 이사금이 즉위한 뒤, 왜국 사신이 찾아오자 이번에는 원한을 품고 있던 우로의 처 명원부인 석씨가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매부인 미추의 허락을 받아낸 뒤[8] 왜국 사신을 불태워 살해하는 복수 사건이 일어났고, 왜국이 살해된 사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금성에 쳐들어왔지만 신라 측이 막아내서 결국 돌아간다. 그야말로 복수가 복수를 낳는 상황.[9] 당시 신라와 왜 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원한과 복수의 반복이 두드러지는 무시무시한 에피소드이며, 이러한 원한의 누적은 4세기 후반~5세기 초에 신라-왜 전쟁으로 절정을 찍는다.

3. 새로운 견해

다만 석우로가 말 한 마디 잘못해 일으킨 전쟁에서는 이사금이 우유촌으로 피난해야 할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나중에 왜가 또 다시 쳐들어왔을 때에는 첨해 이사금이 별 어려움 없이 거뜬하게 격퇴한 점을 들어서 석우로의 죽음에 어떤 정치적 이유가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신라는 개국 초부터 왜로부터 여러 차례 침공을 당했지만 대부분은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기림 이사금 때에 강화가 이루어지고 흘해 이사금 때에는 왜왕이 왕자와 통혼을 요청하자 아찬(阿湌) 급리(急利)의 딸을 왕녀라고 속이고 시집 보냈고, 사실상 사기결혼을 당한 셈(...)인 왜국은 다시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지만 흘해 이사금은 “내 딸은 다 시집가고 없다”며 이를 생깠다. 결국 왜는 이듬해에 서면으로 국교 단절을 선언, 전쟁은 재개되었다.

식민사학자들은 신라와 왜의 전쟁이 대부분 왜의 선제공격으로 이루어졌으며 더러는 왜가 신라 수도를 포위하기까지 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가지고 당시 신라와 왜의 국력은 안 봐도 뻔하다고 주장했지만, 이러한 왜의 침공들은 대부분 신라의 반격으로 인해 섬멸 내지 격퇴로 끝났다는 점은 애써 무시했다. 왜의 잇따른 침공을 받았던 신라였지만 어지간히도 왜를 얕잡아보고 싫어했던 모양인데, 신라의 이러한 왜국에 대한 개김은 식민사학자들 주장대로 양국의 국력차가 왜가 우위였다면 나올 수 없는 반응이라는 반박이 많다.

이것은 석우로가 그 사건 전에 한 발언도 일부 원인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석우로가 훗날 흘해 이사금(제16대)이 되는 자신의 어린 아들의 자질을 크게 칭찬하고 "가문의 앞날이 이 아이에게 있다"는 식으로 발언했는데, 석우로 본인으로서야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첨해 이사금을 비롯한 골정계 입장에선 다음 왕위는 자기 아들에게 가야 한다는 암묵적인 압력으로 받아들였을 개연성이 크다. 결국 나중엔 그렇게 되긴 했지만 첨해 이사금이 석우로를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 당시에도 석우로는 그냥 왕족이 아니라, 상당한 공적과 군권을 가지고 있던 선대 내해 이사금의 장자였기 때문이었다. 이 석우로가 실언해서 왜군이 침략해 오게 되자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않고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으로 압박했을 개연성이 다분하다.

포상팔국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뒤로 20년 동안 석우로는 기록에서 사라진다. 그러다 내해 이사금이 사망한 뒤에 조분이 뒤를 이어 즉위한다. 당시 신라는 벌휴 이사금(제9대)의 두 아들인 석골정(장남)을 따르던 이들과 석이매(차남)를 따르던 이들로 나뉘어 있었다고 여겨지는데, 내해 이사금의 사망으로 인해 석우로로 대표되던 이매계가 석조분으로 대표되던 골정계에게 알력 다툼에서 밀렸던 것으로 보인다.

조분 이사금에게 왕위가 돌아간 이유는 석조분이 전 전왕 벌휴 이사금의 적장손이었던 점이 가장 컸다. 석골정과 석이매가 벌휴 이사금 시기 때 모두 태자에 올랐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그다음 왕위는 당연히 석골정의 장남 석조분에게 넘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내해 이사금의 어머니 내례부인의 힘으로 인해 석조분보다 나이가 많았던 석내해가 대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물론 석내해는 백부인 석골정의 딸, 즉 석조분의 누이와 결혼하면서 석골정의 사위 신분이라는 것도 이용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한 점이 마음에 걸렸는지 내해 이사금은 사촌이자 처남인 석조분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켰고,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조분을 자신의 사위로서 왕위 계승 1순위로 올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더라도 석우로 본인의 실언이 결국 그의 목숨을 거두게 되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왜왕의 사신 앞에서 실언해 전쟁을 촉발한 것 이전에 자기 아들을 두고 "가문의 앞날은 이 아이에게 있다"고 한 것까지 포함해서 석우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행동할 정치적인 처세술이 모자랐다는 것이니까.

해당 사건이 실제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4세기 초반 왜는 단일 세력이 아니라 당대 가야처럼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고 금관국- 반파국- 안라국처럼 호족들의 대표가 오오키미(大王)라 불리던 시절이다. 즉 이때 우로가 모욕을 주었던 왜왕은 신라와 유독 사이가 나빴던 호족 세력만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 일본 기록에 나오는 여러 정황을 보면 우로가 모욕을 주었던 왜 호족 세력은 오진 덴노의 일족으로 추정되며, 당대 신라에게 유독 무시당하던 신라계 도래인 세력으로 유력시된다.[10] 영국이 20세기 초반까지 영국계 미국인을 양키, 촌놈이라 부르며 굉장히 무시했던 걸 고려하면 우로가 왜 사신에게 왜왕과 왕비를 모욕한 것은 신라에서 밀려나 왜로 도망친 세력이 해적질이나 하며 신라 본토에 시비를 걸자 영국이 미합'중국' 시절의 미국을 까내린 것과 비슷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종합하면 360년대 초까지 오진 덴노 일족은 신라와 자주 전쟁한 것과 별개로 신라와의 외교 대우 개선을 줄기차게 요구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결국 해당 호족이 참다 못해 366년에 백제와 외교를 갖고 나서야 367년부터 신라의 외교 대우가 개선되었다는 정황이 있다. 그리고 410년대 말까지 오진 덴노-우지노 와키이라츠코로 이어지는 오진 덴노의 일족이 백제의 용병이 되어 신라 공격을 주도한 걸 고려하면 신라가 수십 년간 신라계 도래인 일족을 무시한 결과 불필요한 손실을 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11]

4. 일본서기와의 비교

일본서기》에서도 석우로가 일본 측에 붙잡혀 살해당하고, 그 부인이 남편의 원수를 갚는다는 큰 틀에서 비슷한 기록이 전한다.
於是, 新羅王宇流助富利智干, 參迎跪之, 取王船卽叩頭曰, 臣自今以後, 於日本國所居神御子, 爲內官家, 無絶朝貢. 一云, 禽獲新羅王, 詣于海邊, 拔王臏筋, 令匍匐石上. 俄而斬之, 埋沙中. 則留一人, 爲新羅宰而還之. 然後, 新羅王妻, 不知埋夫屍之地, 獨有誘宰之情. 乃誂宰曰, 汝當令識埋王屍之處, 必敦報之. 且吾爲汝妻. 於是, 宰信誘言, 密告埋屍之處. 則王妻與國人, 共議之殺宰. 更出王屍葬於他處. 乃주 002時取宰屍, 埋于王墓土底, 以擧王櫬, 窆其上曰, 尊卑次第, 固當如此. 於是, 天皇聞之, 重發震忿, 大起軍衆, 欲頓滅新羅. 是以, 軍船滿海而詣之. 是時, 新羅國人悉懼, 不知所如. 則相集共議之, 殺王妻以謝罪.]
그러자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이 마중 나와 무릎을 꿇고 황후의 배를 잡고 땅에 닿도록 머리를 숙이고 “신은 앞으로 내관가가 되어 일본국에 계시는 신의 아들에게 끊이지 않고 조공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어떤 책(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신라왕을 포로로 잡아 해변으로 가서 왕의 무릎 뼈를 뽑고서 돌 위에서 기도록 하고, 곧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남겨 신라의 재(宰)로 삼고 돌아왔다. 그 후에 신라왕의 처는 남편의 시신이 묻혀있는 곳을 몰라, 혼자 재를 유혹할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재를 꾀어서 “그대가 왕의 시신 묻은 곳을 알려주면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대의 처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재는 꾀는 말을 믿고 몰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그 후 왕의 처와 국인(國人)이 공모하여 재를 죽였다. 그리고 왕의 시신을 꺼내어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 그때 재의 시신을 왕의 묘 아래에 묻고, 왕의 관을 들어 올려 그 위에 두면서 “존비(尊卑)의 순서는 원래 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천황이 이것을 듣고 심히 노하여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군선이 바다 가득히 떠서 신라에 이르렀다. 신라 사람이 모두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가 결국 서로 모여 공모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였다.]
일본서기》 권제9 200년 12월 14일자 中 #

' 우류조부리지간'에서 이름 부분에 해당하는 '우류'(宇流)가 (석)우로와 음운상 공통점이 크다. '조부리지간'은 신라 고유의 관등인 서불한의 음을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이다. 여기서 '신라 왕'이라 한 이유는 당시에는 왕이 국가수반뿐 아니라 귀족층들의 존칭으로도 쓰였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 예로 영일냉수리비에서 간지(干支)층의 귀족들도 '왕'(王)으로 칭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혹은 《 일본서기》 〈 신공황후기〉 기록에 가필이 심하게 들어가 있다는 특성을 고려하면, 왜에서 자신들의 전공을 선전하기 위해 석우로를 일부러 '왕'으로 높여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6세기 초까지 신라 왕은 6부 간(干)의 대표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과 5세기 간을 왕으로도 불렀음을 고려하면 일본이 간이었을 우로를 왕이라 부른 게 마냥 틀린 명칭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6부의 수장들 외에도 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간들은 몇몇 더 있었다.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은 즉시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를 인질로 삼아 금은채색(金銀彩色) 및 능라겸견(綾羅縑絹)을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
일본서기》 권제9 200년 10 3일자 中 #

학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박씨 왕조의 파사 이사금, 지마 이사금, 일성 이사금, 아달라 이사금은 실제로는 3세기 후반~중반에 활동한 인물로 여겨지며, 일본서기 우로와 동년에 먼저 언급되는 파사 이사금 미사흔을 바쳤다는 기사는 실성 마립간이 미사흔을 402년 인질로 보낸 사건을 320년으로 인상해 기록한 것으로 보이지만, 320년 당시 박씨 왕이 파사인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고 한다. 미추 이사금, 유례 이사금, 기림 이사금, 흘해 이사금도 마찬가지이다.

혹은 사서에 기록된 실성 마립간의 다른 이름이 보금(寶金)이며 '성'이 '쇠[金]'에 대응되는 고대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된 한자음이라는 점[12]을 근거로, 흔히 알려진 '실성(實聖)'이라는 표기를 '보성(寶聖)'으로 교정하고 파사 매금의 '파사(波沙)'와 같은 인명을 전사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13] 이에 따르면 파사 이사금과 실성 마립간은 유리 이사금- 유례 이사금처럼 동명이인 관계가 될 것이다.

5. 평가

○論曰: 于老爲當時大臣, 掌軍國事, 戰必克, 雖不克, 亦不敗, 則其謀策必有過人者. 然以一言之悖, 以自取死, 又令兩國交兵, 其妻能報怨, 亦變而非正也. 若不爾者, 其功業, 亦可錄也.
논평: 우로가 당시의 대신으로서, 군국의 사무를 맡아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또한 이기지 못하더라도 패하지는 않았으니, 그의 모책이 틀림없이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 한 마디를 잘못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고, 또한 두 나라 사이에 싸움까지 일으켰다. 그의 아내가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나 이것도 역시 변칙이요 올바른 길은 아니었다. 만약 이러하지 않았다면 그의 공적도 기록에 남길 만하였다.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

외국에 취한 태도와 달리 아군에겐 솔선수범하는 장수였고, 병사들에게도 존경받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이를 보여주는 한 일화로 고구려가 쳐들어와서 그걸 막으러 북쪽으로 갔을 때, 음력 10월인 겨울이어서 갑자기 한파가 불었다. 때문에 군사들이 힘들어하자 우로는 직접 나무를 해서 불을 피우며 병사들을 배려하고 거기에 병사들이 감격했다고 한다. 신라 초기 신라군 장수로서 수많은 진한 거수국들을 정복하고 수많은 나라의 침공에서도 백전불패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걸 보면 군사적 능력이 뛰어났음은 확실해 보인다.

그가 비록 무례한 실언을 해 쓸데없는 전쟁을 하게 해서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건 잘못이지만, 왜는 그 이전에도 걸핏하면 신라 변경을 습격하며 인구와 물자를 약탈하는 일이 잦았고, 그럼에도 사신을 보내서 왕의 딸을 달라는 등 되도 않는 강짜를 부리곤 했었다. 하지만 본인의 반왜적인 입장을 공식 외교 석상에서 당사자를 향해 내뱉는 바람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를 전쟁을 하나 더 불러왔다는 점에서 비난을 면하기는 어렵다. "전쟁을 피하려고만 해서는 안 되지만 먼저 전쟁을 걸지도 말라"는 경구가 왜 있겠는가. 왕이 우유촌으로 피난 가야 했을 정도면 분명 위기가 틀림없었다.

일단 석우로가 전후 사정이나 6촌 형제이자 외가 쪽으로는 4촌이기도 한 첨해 이사금의 문책을 그대로 받아들여, 스스로 목숨 걸고 책임져서 전쟁을 막은 건 대단한 일이란 걸 알아야 한다. 그 같은 경우 그때까지 쌓은 업적이나 위치를 봐선 저항할 수도 있었겠고 정 어려우면 고구려나 백제로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나라를 위해 깨끗하게 자기 목숨으로 책임진 것이다. 물론 애초에 굳이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6. 실제 기년 문제

제16대 흘해 이사금이 석우로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년만 그대로 믿으면 석우로가 죽은 딱 그해에 유복자로 태어났다고 쳐도 죽을 때 100세를 넘는다는 말인데 아주 장수했다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흘해 이사금이 즉위 당시 나이가 어렸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자체가 고고학[14]이나 중국 역사서와 교차 검증 시 연대 자체가 맞지 않고, 《삼국사기》 내에서도 인물들의 재위 기간과 수명이 지나치게 길다는 문제가 있어, 기년을 끌어올렸다는 의혹은 많다. 물론 김부식이 기년을 끌어올린 건 아니고, 김부식이 참고한 사료에서 연대가 늘어져 있던 것을 김부식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기년 문제에 대해 더 말하자면, 석우로가 싸웠다는 고구려는 기년만 믿으면 조위의 장수 관구검에게 당시 한참 떡실신 당하고 있던 시절의 3세기 중반 고구려인데, 그 당시 고구려가 국내를 추스르는 건 고사하고 위나라의 강력한 위협에 대처하기 급급했다는 걸 보면 당시 아예 세력권에서 잠깐 이탈 중이던 동예를 거쳐 신라 서북변 일대를 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체로 대세는 《삼국사기》의 계보는 구전으로 이어왔고, 김씨 족단이나 박씨 족단의 다른 계보와 대조해 보면 적어도 말이 되기에, 기년 모순과는 무관하게 계보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 그러므로 석우로는 흘해 이사금의 부친이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석우로에 대해 관련된 일은 적어도 4세기 초중반에 일어난 일이라고 봐야 여러모로 아귀에 맞다.

연대를 대조하는데 좋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는 《 일본서기》조차 하필 이 시점에 이주갑인상으로 시열대가 개판이 되는 게 문제지만, 연대 대조에 참조가 되는 건 《일본서기》만 있는 건 아니라서 비관적이진 않다. 그나마 고대 신라의 영역 거의 전체는 현재 남한 내에 있기에, 고고학적 연구 성과와, 그나마 사건 자체들은 딱딱 서로 간에 가계도와 함께 아귀가 맞춰 돌아가는 《삼국사기》 신라사와 대조하면 밝혀내긴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다. 신라사는 박•석•김 세 족단이 왕위를 주고받은 게 《삼국사기》에서도 분명히 드러나 그나마 낫지만, 백제사는 적어도 20세기가 되기 전까진 초고왕계와 고이왕계가 서로 다른 왕계임은 누구도 알아낼 수가 없었고 고고학적으로 지배층 자체도 애초부터 이원적이었다는 증거는 무려 21세기 와서야 확증할 수가 있었다. 연대는 그렇다 쳐도 백제는 초기부터 후기까지 가족관계가 상당히 엉망으로 기록된 사례가 잦아 더더욱 논란이 된다.[15]

우로가 참전했다는 포상팔국의 난도 4세기 초반, 정확히는 고구려의 313년 낙랑군 멸망과 314년 대방군 멸망이 주요 원인이 되어 포상팔국이 안라국을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시대 배경을 감안하면 4세기 초반 포상팔국의 난에 참전하고 몇 년 안 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우로의 아들 흘해는 부계로는 혁거세의 8대손이지만 모계로는 9대손인데, 우로의 아내 명원부인은 우로의 누이인 아이혜부인의 딸로 우로의 3촌 조카이기도 하다. 또 우로, 아이혜부인의 어머니인 골정의 딸은 조분의 누이이기도 해서 조분-아이혜부인은 5촌/3촌혼이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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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같은 책의 〈신라본기〉에는 재위 3년(249) 4월이라고 적혀 있어 양자가 충돌한다. 본기에 따르면 석우로는 244년 1월 서불한으로 임명되었고, 만 4년이 지난 248년 1월에 이찬 장훤(長萱)이 새로 서불한으로 임명되는데, 불과 15개월이 지난 시점에 다시 석우로가 서불한이라고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 15개월 사이에 장훤이 죽어서 석우로가 다시 서불한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열전의 기록을 본기에 옮겨 실을 때 연도를 착각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2] 이벌찬 충훤은 내해 32년(227) 3월 이찬이 된 파진찬 강훤(康萱)과, 첨해 2년(248) 정월 서불한(이벌찬)이 되어 나라의 정사에 참여한 이찬 장훤(長萱)과 이름이 유사해 동일인물 가능성이 있다. [3] 정략결혼이긴 했지만 훗날 우로가 왜에게 살해당하자 매부인 미추의 허락까지 받아 가며 왜인을 죽이는 사건을 벌인 걸 보아 우로와 명원부인과의 사이는 꽤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4] 백제 쪽에 붙으려고 했다. 후삼국시대 아자개에서도 다시 한번 재현되지만 상주시 지역은 고대 신라와 백제의 가운데쯤인 요충지라 단순한 지역 하나 이상의 의미가 있다. [5] 타케우치노 스쿠네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의 '실존 여부' 문단 참고. [6] 현재의 울진으로 추정된다. [7] 당장 책임지겠다며 왜군에 가서 “내가 전에 한 말은 농담인데 이렇게 군대까지 끌고 오냐?”라고 말하는(현대에도 저 정도 수준이면 아무리 우호국이라 한들 농담 아니라 대사 초치는 기본이요, 적국이라면 바로 군사도발 난다) 석우로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아무리 정치감각이 없어도 외국, 그것도 틈만 나면 신라로 노략질 오는 (준)전시 상태에 있는 국가의 원수를 향해서 ‘소금집 종’이니 ‘부엌데기’니 하는 식의 발언을 하고, 상대가 격분하자 “에이 술김에 장난 한 번 친 거 가지고 왜 그렇게 급발진하고 그래” 식으로 나오는 말은 어디 동네 일진 빵셔틀에게나 칠 수준의 상대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기 중심적 대사이고, 석우로 본인이 왜를 얼마나 아래로 보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8] 미추의 처 광명부인은 명원부인의 여동생이다. 즉, 미추는 손위 동서의 복수를 하고 싶다는 처형의 요청을 들어준 것이다. [9] 미추가 외교적 리스크를 감수하고 처형의 복수를 허락한 걸 보면 미추 또한 손위 동서가 실언했다지만 왜가 우로를 불태워 죽인 것에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이 높다. [10] 고고학적으로 5세기 중반까지 신라, 가야계 도래인들이 야마토의 주류였고 우도주군과 동일인물로 여겨지는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후손을 자칭한 일족들이 유독 신라 도래인들이 많고 오진 덴노의 모계 조상이라는 아메노히보코가 신라 박씨 왕족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진구 황후기와 오진 덴노기 기록을 보면 백제와 친하기는 했지만 내심 신라의 태도 개선을 더 의식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오진 덴노의 일족이 신라 도래인이라는 정황이 꽤 많다. [11] 여기에 신라도 나름 반성한 건지(?) 4세기 후반~6세기 초반까지 몇몇 왜 호족들과 우호관계를 맺으며 친백제 성향의 왜 호족들을 견제한 정황이 있다. 5세기 중반까지 친백제 호족의 상당수가 백제계 도래인보다 신라, 가야계 도래인이 더 많았음을 고려하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같은 느낌이기는 하지만. 왕조 성립 시기부터 부여곤지- 무령왕 일족의 도움을 크게 받아 절대적 친백제 성향이었던 게이타이 덴노 왕조(현 왕조)는 별개. [12] 삼국시대 지명 성량현(省良縣)이 고려시대에 금량부곡(金良部曲)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대략 *ser- 정도의 음가를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13] 한자음 '보'와 '파'가 대응되는 현상은 백제 지명 파로미(巴老彌)와 포미(布彌), 신라 인명 파도(巴刀)와 보도(保刀), 사파(蛇巴)와 사복(蛇伏), 고파리(古巴里)와 고보리(古寶里), 궁파(弓巴)와 궁복(弓福) 등 여러 사례에서 나타난다. [14] 대표적인 예시를 들자면 경주 월성의 《삼국사기》 기록상 초축 시기는 제5대 파사 이사금 22년인 기원후 101년이지만, 고고학적 조사 결과 월성의 초축 연대가 기원후 3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는 점이 있다. [15] 초기의 초고왕계-고이왕계 문제는 그렇다 쳐도, 중기와 후기에도 구이신왕- 비유왕, 개로왕- 문주왕, 동성왕- 무령왕, 위덕왕- 혜왕이 형제인데 부자라 오기되질 않나(심지어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된 무령왕은 무령왕릉 비석과 일본서기에서 동성왕의 임이 밝혀졌다) 무왕은 방계 왕족임만 확실시될 뿐 아버지가 누구인지 현대에도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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