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7 13:11:35

왕진악

송서(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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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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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2·3권 「무제기(武帝紀)」 4권 「소제기(少帝紀)」 5권 「문제기(文帝紀)」
유유(劉裕) 유의부 유의륭
6권 「효무제기(孝武帝紀)」 7권 전폐제기(前廢帝紀)」 8권 「명제기(明帝紀)」
유준(劉駿) 유자업 유욱(劉彧)
9권 「후폐제기(後廢帝紀)」 10권 「순제기(順帝紀)」
유욱(劉昱) 유준(劉準)
※ 11권 ~ 40권은 志에 해당. 송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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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3f51ba> 41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42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43권 「서선지등전(徐羨之等傳)」 44권 「사회전(謝晦傳)」
유목지 · 왕홍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사회
45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46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47권 「유회숙등전(劉懷肅等傳)」
왕진악 · 단소 · 상정 · 유회신 · 유수 조륜지 · 왕의 · 장소 유회숙 · 맹회옥 , 맹용부, · 유경선 · 단지
48권 「주령석등전(朱齡石等傳)」 49권 「손처등전(孫處等傳)」 50권 「호번등전(胡藩等傳)」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손처 · 괴은 · 유종 · 우구진 호번 · 유강조 · 원호지 · 장흥세
51권 「종실전(宗室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준고
52권 「유열등전(庾悅等傳)」 53권 「장무도등전(張茂度等傳)」 54권 「공계공등전(孔季恭等傳)」
유열 · 왕탄 · 사경인(1) · 원담 · 저숙도(2) 장무도(3) , 장영, · 유등지 , 유병지, · 사방명 · 강이 공계공 · 양현보 · 심담경
55권 「장도등전(臧燾等傳)」 56권 「사첨등전(謝瞻等傳)」 57권 「채곽전(蔡廓傳)」
장도 · 서광 · 부륭 사첨 · 공림지 채곽
58권 「왕혜등전(王惠等傳)」 59권 「은순등전(殷淳 等傳)」 60권 「범태등전(范泰等傳)」
왕혜 · 사홍미 · 왕구 은순 · 장창 · 하언 · 강지연 범태 · 왕준지 · 왕소지 · 순백자
61권 「무삼왕전(武三王傳)」
유의진 · 유의공 · 유의계
62권 「양흔등전(羊欣等傳)」 63권 「왕화등전(王華等傳)」 64권 「정선지등전(鄭鮮之等傳)」
양흔 · 장부 · 왕미 왕화 · 왕담수 · 은경인 · 심연지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65권 「길한등전(吉翰等傳)」 66권 「왕경홍등전(王敬弘等傳)」 67권 「사령운전(謝靈運傳)」
길한 · 유도산 · 두기 · 신념 왕경홍(4) · 하상지 사령운
68권 「무이왕전(武二王傳)」
유의강 · 유의선
69권 「유담등전(劉湛等傳)」 70권 「원숙전(袁淑傳)」 71권 「서담지등전(徐湛之等傳)」
유담 · 범엽 원숙 서담지 · 강담 · 왕승작
72권 「문구왕전(文九王傳)」
유삭 · 유굉 · 유창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약
73권 「안연지전(顏延之傳)」 74권 「장질등전(臧質等傳)」 75권 「왕승달등전(王僧達等傳)」
안연지 장질 · 노상 · 심유지 왕승달 · 안준
76권 「주수지등전(朱脩之等傳)」 77권 「유원경등전(柳元景等傳)」 78권 「소사화등전(蕭思話等傳)」
주수지 · 종각 · 왕현모 유원경 · 안사백 · 심경지 소사화 · 유연손
79권 「문오왕전(文五王傳)」
유탄 · 유위 · 유혼 · 유휴무 · 유휴범
80권 「효무십사왕전(孝武十四王傳)」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81권 「유수지등전(劉秀之等傳)」 82권 「주랑등전(周朗等傳)」 83권 「종월등전(宗越等傳)」
유수지 · 고침 · 고기지 주랑 · 심회문 종월 · 오희 · 황회
84권 「등완등전(鄧琬等傳)」 85권 「사장등전(謝莊等傳)」 86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등완 · 원의 · 공기(孔覬) 사장 · 왕경문(5) 은효조 · 유면
87권 「소혜개등전(蕭惠開等傳)」 88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89권 「원찬전(袁粲傳)」
소혜개 · 은염 설안도 · 심문수 · 최도고 원찬
90권 「명사왕전(明四王傳)」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91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劉瑜) · 가은 · 곽세도 · 자원평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민 · 손극 · 하자평
92권 「양리전(良吏傳)」
왕진지 · 두혜도 · 서활 · 육휘 · 완장지 · 강병지 · 왕흠지
93권 「은일전(隱逸傳)」
대옹 · 종병 · 주속지 · 왕홍지 · 완만영 · 공순지 · 유응지 · 공기(龚祈) · 적법사 · 도잠 · 종욱지 · 심도건 · 곽희림 · 뇌차종 · 주백년 · 왕소 · 관강지
94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완전부 · 왕도륭 · 양운장
95권 「삭로전(索虜傳)」 96권 「선비토욕혼(鮮卑吐谷渾)」
삭로 토욕혼
97권 「이만전(夷蠻傳)」
임읍국 · 부남국 · 가라타국 · 가라단국 · 반황국 · 반달국 · 사파파달국 · 사자국 · 가비려국 · 고구려 · 백제국 · 왜국 · 형옹주만 · 예주만
98권 「저호전(氐胡傳)」 99권 「이흉전(二凶傳)」
구지 · 저거몽손 유소(劉劭) · 유준(劉濬)
100권 「자서전(自序傳)」
심약
(1) 본명이 사유(謝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인(景仁)으로 표기되었다.
(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3f51ba><tablebgcolor=#3f51b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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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송본기상(宋本紀上)」 2권 「송본기중(宋本紀中)」 3권 「송본기하(宋本紀下)」
유유(裕) · 유의부 유의륭 · 유준(駿) · 유자업 유욱(彧) · 유욱(昱) · 유준(準)
4권 「제본기상(齊本紀上)」 5권 「제본기하(齊本紀下)」
소도성 · 소색 소소업 · 소소문 · 소란 · 소보권 · 소보융
6·7권 「양본기상·중(梁本紀上·中)」 8권 「양본기하(梁本紀下)」
소연 소강 · 소역 · 소방지
9권 「진본기상(陳本紀上)」 10권 「진본기하(陳本紀下)」
진패선 · 진천 · 진백종 진욱 · 진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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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1·12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은숙의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 진도정 · 유지용 · 배혜소 · 왕보명 · 하정영 · 왕소명 · 유혜단 · 저영거 · 왕순화 · 장상유 · 치휘 · 왕영빈 · 정영광 · 완영영 · 서소패 · 장요아 · 심묘용 · 왕황후 · 유경언 · 심무화 · 장여화
13·14권 「송종실급제왕전(宋宗室及諸王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의경 · 유준고 · 유의진 · 유의강 · 유의공 · 유의선 · 유의계 · 유소 · 유준(濬) · 유삭 · 유굉 · 유탄 · 유위 · 유창 · 유혼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무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범 · 유휴약 ·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15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16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유목지 ·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왕진악 ·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 주수지 · 왕현모
17권 「유경선등전(劉敬宣等傳)」
유경선 · 유회숙 · 유수 · 손처 · 괴은 · 상정 · 유종 · 우구진 · 맹회옥 · 호번 · 유강조
18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19권 「사회등전(謝晦等傳))」
조륜지 · 소사화 · 장도 사회 · 사유 · 사방명 · 사령운
20권 「사홍미전(謝弘微傳)」 21권 「왕홍전(王弘傳)」 22권 「왕담수전(王曇首傳)」
사홍미 왕홍 왕담수 , 왕훈,
23권 「왕탄등전(王誕等傳)」 24권 「왕유지등전(王裕之等傳)」 25권 「왕의등전(王懿等傳)」
왕탄 · 왕화 · 왕혜 · 왕욱 왕유지 · 왕진지 · 왕소지 · 왕열지 · 왕준지 왕의 · 도언지 · 원호지 · 장흥세
26권 「원담전(袁湛傳)」 27권 「공정등전(孔靖等傳)」 28권 「저유지전(褚裕之傳)」
원담 공정 · 공림지 · 은경인 저유지
29권 「채곽전(蔡廓傳)」 30권 「하상지전(何尙之傳)」 31권 「장유전(張裕傳)」
채곽 하상지 장유 , 장승,
32권 「장소전(張邵傳)」 33권 「범태등전(范泰等傳)」 34권 「안연지등전(顔延之等傳)」
장소 범태 · 순백자 · 서광 ·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안연지 · 심회문 · 주랑
35권 「유담등전(劉湛等傳)」 36권 「양흔등전(羊欣等傳)」 37권 「심경지등전(沈慶之等傳)」
유담 · 유열 · 고침 · 고기지 양흔 · 양현보 · 심연지 · 강이 · 강병지 심경지 · 종각
38권 「유원경전(柳元景傳)」 39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40권 「노상등전(魯爽等傳)」
유원경 은효조 · 유면 노상 · 설안도 · 등완 · 종월 · 오희 · 황회
41권 「제종실전(齊宗室傳)」
소도도 · 소도생 · 소요광 · 소요흔 · 소면 · 소경선 · 소적부 · · 소탄 · 소탄지
42·43권 「제고제제자전(齊高帝諸子傳)」
소억 · 소영 · 소황 · 소엽 · 소고 · 소장 · 소삭 · 소감 · 소봉 · 소예 · 소갱 · 소구 · 소현
44권 「제무제제자·제문혜제자·명제제자전(齊高帝諸子·文惠諸子·明帝諸子傳)」
소장무 · 소자량 · 소자경(卿) · 소자향 · 소자경(敬) · 소자무 · 소자륭 · 소자진 · 소자명 · 소자한 · 소자륜 · 소자정 · 소자악 · 소자문
소자준 · 소자림 · 소자건 · 소자하 · 소소수 · 소소찬 · 소보의 · 소보현 · 소보원 · 소보인 · 소보유 · 소보숭 · 소보정
45권 「왕경칙등전(王敬則等傳」 46권 「이안인등전(李安人等傳)」
왕경칙 · 진현달 · 장경아 · 최혜경 이안인 · 대승정 · 환강 · 초도 · 조무 · 여안국 · 주산도 · 주반룡 · 왕광지
47권 「순백옥등전(荀伯玉等傳)」 48권 「육징등전(陸澄等傳)」
순백옥 · 최조사 · 설연 · 우종 · 호해지 · 우완지 · 유휴 · 강석 육징 · 육혜효 · 육궐
49권 「유고지등전(庾杲之等傳)」 50권 「유환등전(劉瓛等傳)」
유고지 · 왕심 · 공규 · 유회진 유환 · 명승소 · 유이 · 유규
51·52권 「양종실전(梁宗室傳)」
소경 , 소매 소발 소앙 소욱, · 소의 · 소부 · 소창 · 소융 · 소굉 , 소정인 소정의 소정덕 소정립, 소수 · 소위 · 소회 · 소담
53권 「양무제자전(梁武帝諸子傳)」
소통 · 소종 · 소적 · 소속 · 소윤 · 소기
54권 「양간문제자·원제제자전(梁簡文帝諸子·元帝諸子傳)」
소대기 · 소대심 · 소대관 · 소대림 · 소대련 · 소대춘 · 소대성 · 소대봉 · 소대아 · 소대장 · 소대균 · 소대위 · 소대훈 · 소대구 · 소대흔 · 소대지 · 소대원 · 소방등 · 소방제 · 소방구 · 소방략
55권 「왕무등전(王茂等傳)」
왕무 · 조경종 · 조의종 · 석천문 · 하후상 · 길사첨 · 채도공 · 양공칙 · 등원기 · 장혜소 · 장징 · 풍도근 · 강현 · 창의지
56권 「장홍책등전(張弘策等傳)」 57권 「심약등전(沈約等傳)」 58권 「위예등전(韋叡等傳)」
장홍책 · 유역 · 정소숙 · 여승진 · 악애 심약 · 범운 위예 · 배수
59권 「강엄등전(江淹等傳)」 60권 「범수등전(范岫等傳)」 61권 「진백지등전(陳伯之等傳)」
강엄 · 임방 · 왕승유 범수 · 부소 · 공휴원 · 강혁 · 서면 · 허무 · 은균 진백지 · 진경지 · 난흠
62권 「하창등전(賀瑒等傳)」 63권 「왕신념등전(王神念等傳)」 64권 「강자일등전( 江子一等傳)」
하창 · 사마경 · 주이 · 고협 · 서리 · 포천 왕신념 · 양간 · 양아인 강자일 · 호승우 · 서문성 · 음자춘 · 두즉 · 왕림 · 장표
65권 「진종실제왕전(陳宗室諸王傳)」
진의 · 진상 · 진혜기 · 진창 · 진담랑 · 진백무 · 진백산 · 진백고 · 진백공 · 진백인 · 진백의 · 진백례 · 진백지 · 진백모
진숙릉 · 진숙영 · 진숙견 · 진숙명 · 진숙경 · 진숙헌 · 진숙제 · 진숙문 · 진숙달 · 진숙탄 · 진숙표 · 진숙웅 · 진숙중 · 진숙엄 · 진숙신 · 진숙우 · 진숙평 · 진숙오 · 진숙흥 · 진숙선 · 진숙목 · 진숙검 · 진숙징 · 진숙소 · 진숙광 · 진숙순 · 진숙모 · 진숙현 · 진숙륭 · 진숙영
진심 · 진장 · 진윤 · 진억 · 진언 · 진경 · 진건 · 진념 · 진지 · 진전 · 진번
66권 「두승명등전(杜僧明等傳)」
두승명 · 주문육 · 후진 · 후안도 · 구양위 · 황법구 · 순우량 · 장소달 · 오명철
67권 「호영등전(胡穎等傳)」
호영 · 서도 · 두릉 · 주철무(1) · 정령세 · 심각 · 육자륭 · 전도집 · 낙문아 · 손창 · 서세보 · 주부 · 순랑 · 주경 · 노실달 · 소마하 · 임충 · 번의
68권 「조지례등전(趙知禮等傳)」
조지례 · 채경력 · 종원요 · 한자고 · 화교 · 유사지 · 사기 · 모희 · 심군리 · 육산재
69권 「심형등전(沈炯等傳)」
심형 · 우려 · 부재 · 고야왕 · 요찰
70권 「순리전(循吏傳)」
길한 · 두기 · 신념 · 두혜도 · 완장지 · 견법숭 · 부염 · 우원 · 왕홍궤 · 심우 · 범술증 · 손겸 · 하원 · 곽조심
71권 「유림전(儒林傳)」
복만용 · 하동지 · 엄식지 · 사마경 · 변화 · 최령은 · 공첨 · 노광 · 심준(峻) · 공자구 · 황간 · 심수 · 척곤 · 정작 · 전완 · 장기 · 고월 · 척곤 · 왕원규
72권 「문학전(文學傳)」
구영국 · 단초 · 변빈 · 구거원 · 왕지심 · 최위조 · 조충지 · 가희경 · 원준 · 유소(昭) · 종영 · 주흥사 · 오균 · 유협 · 하사징 · 임효공 · 안협 · 기소유 · 두지위 · 안황 · 잠지경 · 하지원 · 서백양 · 장정견 · 완탁
73·74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瑜) · 가은 · 곽세통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구걸 · 사각수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인 · 손극 · 하자평 · 최회순 · 왕허지 · 오경지 · 소예명 · 소교처양 · 공손승원 · 오흔지 · 한계백 · 구관선 · 손담 · 화보 · 해숙겸 · 한영민 · 유풍 · 봉연백 · 오달지 · 왕문수 · 악이지 · 손법종 · 유도민 · 등담공 · 도계직 · 심숭소 · 순장 · 길분 · 견염 · 조발호 · 한회명 · 저수 · 장경인 · 도자장 · 성경준 · 이경서 · 사린 · 은불해 · 사마고 · 장소
75·76권 「은일전(隐逸傳)」
도잠 · 종소문 · 심도건 · 공순지 · 주속지 · 대옹 · 적법사 · 뇌차종 · 곽희림 · 유응지 · 공기 · 주백년 · 관강지 · 어부 · 저백옥 · 고환 · 두경산 · 장영서 · 오포 · 서백진 · 심인사 · 완효서 · 등욱 · 도홍경 · 제갈거 · 유혜비 · 범원엽 · 유선 · 장효수 · 유승선
77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서원 · 완전부 · 기승진 · 유계종 · 여법량 · 여문현 · 여법진 · 주석진 · 육험 · 사마신 · 시문경 · 심객경 · 공범
78·79권 「이맥전(夷貊傳)」
임읍 · 부남 · 중천축국 · 사자국 · 고구려 · 백제국 · 신라 · · 부상국· 하남왕국 · 탕창 등지 · 무흥국 · 형옹주·예주만 · 고창 · 쿠처 · 우전국 · 파사국 · 연연
80권 「적신전(賊臣傳)」
후경 , 왕위, · 웅담랑 · 주적 · 유이 · 진보응
(1) 본명이 주철호(周鐵虎)로 당태조로 추존된 이호(李虎)를 피휘하여 무(武)로 개칭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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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용양장후(龍陽壯侯)
王鎭惡 | 왕진악
시호 장(壯)
작호 박륙현오등자(博陸縣五等子) → 한수현자(漢壽縣子)
→용양현후(龍陽縣侯)
왕(王)
이름 진악(鎭惡)
본적 북해군(北海郡) 극현(劇縣)
출신 전진 장안
생몰 373년 6월 11일 ~ 418년 3월 7일[1]
부친 왕휴(王休)
조부 왕맹(王猛)
국적 전진(前秦) → 동진(東晉)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동진으로의 귀순2.3. 유유의 부름2.4. 유의 토벌2.5. 사마휴지 토벌2.6. 후진 정벌2.7. 최후
3. 사후

[clearfix]

1. 개요

전진, 동진의 인물로 전진의 명재상 왕맹의 손자였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선대는 북해군(北海郡) 극현(劇縣) 출신이지만, 373년에 전진의 수도 장안에서 왕휴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휴는 전진에서 하동군 태수를 지냈다. 왕진악이 태어난 음력 5월 5일은 집안에서 불길한 날로 여겨서 촌수가 먼 친척에 양자로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왕진악의 할아버지인 왕맹은 왕진악을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아이는 매우 비상한 아이다. 옛날 맹상군은 악월(惡月)[2]에 태어났지만 제나라에서 재상을 지냈으니, 이 아이 또한 장차 우리 집안을 일으킬 것이다.
이 말을 한 뒤에 이름이 진악(鎭惡)으로 정해졌다.

2.2. 동진으로의 귀순

383년 비수대전에서의 패배 이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전진은 멸망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이때 왕진악은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민지(澠池) 출신인 이방(李方)에게 의탁했고 이방은 왕진악을 매우 예우했다. 왕진악은 이방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진악: 만약 영명한 군주를 만나서 만호후의 작위를 얻을 수 있다면 마땅히 후하게 보답하겠습니다.
이방: 그대는 재상의 손자로 이렇게 뛰어난 인재인데, 어찌 부귀해지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가? 그때가 되면 현령으로 등용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왕진악은 뒤에 숙부인 왕요(王曜)를 따라 동진으로 귀순했고 형주에 머물렀다. 왕진악은 제가의 병서를 읽고 군국대사를 논의했으며, 기마나 활쏘기에 뛰어나지 못했지만 책략이 뛰어났고 결단력이 있었다.

2.3. 유유의 부름

동진의 장군인 유유가 남연을 정벌할 때 유유의 측근 중 한 사람이 왕진악을 천거했다. 당시 왕진악은 천문군(天門郡) 임례현령(臨澧縣令)으로 있었는데, 유유는 사람을 보내 왕진악을 불렀고 왕진악과 대화를 나누며 왕진악을 기이하게 여겼고 수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진악은 왕맹의 손자로 이른바 장수의 집안에 장수가 난다는 것이다.
왕진악은 곧바로 유유에 의해 청주 치중종사사로 임명되었고, 태위부 참군사, 전부적조를 역임했다. 또한 사포에서 노순(盧循)을 막고 여러 차례 전투에서 공을 세워서 박륙현오등자(博陸縣五等子)로 책봉되었다.

2.4. 유의 토벌

유유가 유의의 토벌을 도모할 때 왕진악은 유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께서 만약 서초(西楚)에서 군사를 부리신다면 저에게 배 100척을 내리시고 선봉으로 삼으시길 청합니다.
412년, 유의가 병에 걸려 자신의 사촌동생인 연주 자사 유번(劉藩)을 보좌로 보냈고 유유는 이를 짐짓 승낙했다. 9월, 왕진악을 토벌하고자 출병할 때 왕진악을 참군사로 삼고 진무장군을 더하였다.

9월 29일, 고숙(姑孰)에 이르러 유유는 왕진악과 용양장군(龍驤將軍) 괴은과 배 100척을 선봉으로 파견했다. 왕진악은 유유의 명을 받들어 곧바로 출병하여 10월 22일 강릉성으로부터 20리 떨어진 예장구(豫章口)에 당도하였다. 왕진악이 유유의 명에 따라 유번이 왔다고 퍼뜨렸기 때문에 유의는 이에 대한 방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2.5. 사마휴지 토벌

만족의 수령인 상박저근(向博抵根)이 완두(阮頭)를 점령하여 여러 차례 약탈을 일삼자, 왕진악은 이를 토벌해 평정하였다. 이때 왕진악은 형주 자사 사마휴지에게 원병을 청했고, 사마휴지는 이에 주양(朱襄)을 파견하여 왕진악을 돕게 했다.

상박저근을 토벌하고자 출병할 때, 왕진악은 유유가 사마휴지를 토벌하고자 출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장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성들은 모두 관군이 이미 진군했고 또한 주양 등이 역적임을 알고 있으니, 만약 표리로 적을 만나면 나는 실패할 것이다.
결국 왕진악은 밤새 회군하였는데, 당시 강물이 매우 급하여 순식간에 수백 리를 진군했다. 왕진악은 대바구니에 돌을 가득 채우고 수로를 차단했으며, 주양의 군대가 당도하자

하지만 왕진악은 탐욕스러운 일면이 있었는데, 주양을 토벌한 뒤 약탈을 일삼아 즉시 돌아오지 않았다. 왕진악이 강릉으로 돌아오고 사마휴지가 이미 평정되었으나, 유유는 왕진악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나 왕진악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지 저에게 한번만 공을 만나게 하신다면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유유가 성에 올라 왕진악을 꾸짖었지만, 왕진악은 언변이 뛰어나서 결국 유유는 왕진악을 풀어주었다.

사마휴지와 노종지가 양양으로 달아나자 왕진악은 괴은과 수군을 이끌고 추격하였으나, 사마휴지와 노종지가 후진으로 망명하자 왕진악은 다시 추격을 시작했지만 국경에 이르러 다시 돌아왔고 유격장군이 되었다.

2.6. 후진 정벌

후진 정벌을 앞두고 유유는 왕진악을 자의참군(諮議參軍)으로 전임시키고 용양장군으로 삼아 선봉을 거느리게 했다. 왕진악이 출발할 때 적노당(積弩堂)에서 전장군(前將軍) 유목지가 왕진악을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장공은 망국의 백성들을 이렇게 아끼시고 도망친 반란자들을 쓸어버리는 것에 뜻을 두셨습니다. 옛날 진나라의 문왕(文王)께서는 등애(鄧艾)에게 (蜀) 정벌을 맡겼습니다. 지금 다시 경에게 관중의 정벌을 맡기셨으니, 큰 공을 세우는데 힘쓰고 이 임무를 소홀히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유목지의 이야기에 왕진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함양(咸陽)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다시는 장강을 건너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겠소!

왕진악은 단도제와 함께 선봉이 되어 회수, 비수 일대에서 허창과 낙양을 향해 출병했다. 왕진악은 후진으로 입성한 뒤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뒀는데, 후진의 장수인 왕구생(王苟生)이 여구(漆丘)에서 항복했다. 이후 후진 장수 요비 등이 전사하며 장안은 곧 함락됐고, 요홍은 스스로 투항했으며 동생 요찬은 종실 1백여 명을 이끌고 투항했다. 오직 11세의 요불념 많이 살아남기 어렵다 깨닫고 궁궐 담 위로 올라가 몸을 던져 자진했다. 이로써 후진은 세 명의 군주가 지나며 34년 만에 멸망한다.

2.7. 최후

후진을 멸망시킨 뒤, 유유는 장안을 북벌의 발판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동진에서 유목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급하게 회군하기로 했고 계양공 유의진을 안서장군, 옹진2주자사로 삼아 장안에 남겼다. 이때 왕진악은 유의진의 사마, 빙익군 태수가 되어 방어를 담당하였다. 그런데, 당시 후진을 정벌할 때 종군했던 왕진악은 심전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심전자는 부홍지와 함께 유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진악은 집안이 관중에 있으니[3], 그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자치통감

그러나 유유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일축하였다.
너희들의 문무관 장사들과 정예 1만 명을 남겨라. 왕진악이 만약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자멸했을 것이니, 더는 말하지 마라.
자치통감

유유는 또 사석에서 심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회가 결국 반란을 일으키지 못한 것은 위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맹수 한 마리가 여우 떼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열 명 남짓 되는 경들이 어찌 왕진악을 두려워하느냐! [4]
자치통감

여기에 대해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옛 사람들은 '의심하면 신임하지 않고, 신임하면 의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유유는 이미 관중을 왕진악에게 맡겼으나 다시 심전자와 더불어 험담을 했으니, 이것은 다투게 하여 어지럽힌 것이다. 안타깝구나! 백년의 적을 물리치고 천리의 땅을 얻는 것은 어려우나 잃는 것은 순식간이니, 풍고(豐鄗)의 도읍을 다시 적의 손에 떨어지게 했다. 순자는 '한 곳으로 합치는 것은 쉬우나, 단단하게 하는 것은 어렵다.'라고 했는데 정말이구나!

유유가 돌아간 뒤, 북하 혁련발발은 본격적으로 진군을 개시했다. 유의진은 심전자를 파견하여 북하군을 막게 했고 심전자는 장사 왕수(王修)를 왕진악에게 파견하여 이 소식을 알렸는데, 왕진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위께서는 10살짜리 아이[5]를 우리에게 맡겼으니 마땅히 각자 있는 힘을 다해야 하거늘, 심전자는 군대를 거느리고도 전진하지 않으니 오랑캐가 어찌 평정되겠는가!

왕수가 심전자에게 돌아와 위의 발언을 이야기하자, 심전자는 더욱 분노했다. 왕진악과 심전자가 북하군을 막을 때 왕진악이 남쪽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수천 명을 유의진에게 돌려보내려고 했고 관중을 점령하여 배반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떠돌기도 했다. 심전자는 왕진악을 군영으로 불러들였고 수하인 심경인(沈敬仁)이 영내에서 왕진악을 살해했고 왕진악의 영내에서 왕진악의 형인 왕기(王基), 아우인 왕홍(王鴻), 왕준(王遵), 왕연(王淵)과 사촌동생인 왕소(王昭), 왕랑(王朗), 왕홍(王弘)까지 모두 7명을 살해하였다. 심전자는 장사 왕수에게 살해당하여, 동진의 내분이 일어난 틈을 타 북하가 장안을 점령했다. 장안에서 태어나서 장안에서 죽었지만, 소속 왕조가 다른[6] 쉽게 있기 힘든 사례 중 하나이다.

3. 사후

왕진악은 사후 좌장군(左將軍), 청주(靑州) 자사로 추증되었다. 420년, 유유가 공제 사마덕문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른 뒤 용양현후(龍陽縣侯)로 추봉되었고 식읍 1500호가 내려졌으며, 장(壯)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태묘에 배향되었다. 즉 죽어사나마 개국공신 대우를 받은 것이다.

후대 당나라에서는 782년 안진경의 건의에 따라 고금의 명장 64명을 추봉하고 사당을 세웠는데, 이 64명의 명단에 왕진악의 이름이 올랐다. 송대에 당나라의 관례에 따라 72명을 추봉하며 여기서도 왕진악의 이름이 올랐고 『십칠사백장전(十七史百將傳)』에서는 왕진악의 이름이 올라갔다.


[1] 음력 1월 15일. [2] 음력 5월을 말한다. [3] 즉 다름아닌 장안을 수도로 했던 전진 출신이라는 것이다. [4] 북벌군의 핵심인 왕진악을 종회에 비유했으니 왕진악이 반기를 들 조짐이 보이면 왕진악을 죽여도 상관없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발언이다. [5] 당시 유의진은 10살 밖에 되지 않은 나이였다. [6] 물론 조위-서진이나 동진-송-제 같은, 국가승계 되어 전신-후신 관계에 있는 사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