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광 麗順光 | Yeosungw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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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 위치 | 전라남도 동부 |
면적 | 1,887.46㎢ |
인구 | 698,838명[1] |
인구 밀도 | 373.71명/㎢ |
최대 도시 | 순천시 |
범위 | 여수시, 순천시, 광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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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라남도 동남부에 위치한 여수시, 순천시, 광양시를 아울러 이르는 말.일반적인 용례는 전통적인 인구 순위에 따라 '여순광'이나, 종종 '순여광'으로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순천시가 이들 중 최대도시이기 때문.
전남 동부권을 대표하는 도시권으로, 전남 인구의 약 40%와 지역내총생산(GRDP)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어 도내 위상이 높다.
2. 인구
3. 역사
3.1. 원삼국시대~ 후삼국시대
이 일대는 6세기 이후에야 고대국가( 백제)에 편입되기에, 비교적 늦은 5세기까지는 자체적인 정치체가 성장했던 다소 특이한 지역이었다. 원삼국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지금의 여수에는 원지국(爰池國)이, 순천에는 사타국(娑陀國)이, 광양에는 만로국(萬盧國)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마한의 맹주인 건마국(현 전라북도 익산시)과 목지국(현 충청남도 천안시)이 이곳까지 깊이 간섭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느슨한 형태로 마한에 속했던 것으로 생각된다.3세기 중후반 목지국을 누르고 마한의 패권을 차지한 한성백제가 마한 영역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 남하를 시작하였고, 4세기 후반에는 근초고왕이 근처 영산강 일대의 침미다례를 무력으로 굴복시키면서 이곳도 백제의 간접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침미다례는 백제에 굴복한 이후로도 나름대로 세력을 유지하면서 백제의 상당한 견제를 받았고, 덕분에 지금의 여순광 지역은 외부의 영향력 행사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나 475년 한성백제가 고구려에게 수도 위례성을 함락당하면서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되자, 일찍부터 섬진강 유역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반파국(대가야)이 백제의 혼란을 틈타 진출하면서 여순광은 가야 연맹에 복속된다. 여수시 고락산성에서 가야토기가 출토되었고, 순천시 서면 운평리 고분군의 묘제와 토기 주류가 반파국 양식임이 밝혀지면서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다만 그렇다 하여도 가야 연맹으로부터 직접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었고, 백제 아래에 있던 때처럼 간접 지배를 받는 형태였다. 이후 백제가 국난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세력을 회복하였고, 512년 백제 무령왕이 반파국을 격파하고 대가야 연맹의 일원이었던 사타국을 멸망시키면서 이 일대도 완전히 백제의 직접 지배 영역이 되었다. 그 후 순천에는 감평군(欿平郡, 혹은 삽평군歃平郡)이 설치되었으며, 감평군은 여수의 원촌현(猿村縣)과 돌산현(突山縣), 광양의 마로현(馬老縣)을 영현(領縣)으로 관할하였다.
이후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이곳도 신라에게 점령되었고, 686년 9주 5소경 중 무진주에 소속되었다. 경덕왕대엔 지명을 대거 중국식으로 바꾸면서 감평군은 승평군(昇平郡)으로, 산하의 원촌현은 해읍현(海邑縣)으로, 돌산현은 여산현(廬山縣)으로, 마로현은 희양현(曦陽縣)으로 개칭되었다. 통일신라가 쇠퇴한 결과로서 나타난 후삼국시대에는 박영규가 이 일대에서 호족으로 군림하였고, 그가 견훤의 신하이자 사위가 되면서 여순광 지역도 후백제의 지배하에 놓인다. 그러나 견훤의 아들 견신검이 아버지를 폐위하고 왕좌를 강탈하자 견훤은 고려로 망명, 박영규도 겉으로는 신검에게 복종하는 척하였으나 뒤로는 견훤 및 왕건과 은밀히 협력하였다.
3.2.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결국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맞붙은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이 대승하면서 후백제가 멸망함과 동시에 후삼국시대도 막을 내렸고, 박영규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서 조정에서 승승장구했을 뿐만 아니라 두 딸을 제3대 국왕 정종의 왕후로 시집 보내기까지 하면서 순천 박씨는 유력 가문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제4대 국왕 광종이 선대 국왕 정종의 지지 세력인 순천 박씨를 숙청하자 승평군(지금의 순천시) 일대도 순천 박씨를 따라서 정치적으로 몰락한다.한편 태조 왕건은 건국 후 해읍현을 여수현(麗水縣)으로, 여산현을 돌산현(突山縣)으로, 희양현을 광양현(光陽縣)으로 개칭하였고, 곡성군 산하의 부유현(富有縣, 현 순천시 승주읍 및 주암면 일대)이 승평군 산하에 들어왔다. 983년( 성종 2년)에는 승평군을 승주목(昇州牧)으로 승격해 12 목(牧) 중 하나로 삼았다. 995년(성종 14년)에는 전국을 10도로 나누면서 해양도에 속하였고, 현종대에 다시 5도 양계로 개편되며 비로소 전라도에 속하게 된다. 12세기에(1108년 또는 1172년에) 광양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처음으로 순천으로부터 분리되었고, 1350년에는 여수현과 돌산현에 현령이 파견되어 속현에서 벗어났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대한 교지(敎旨)를 전국에 내렸는데, 당시 여수현령 오흔인(吳欣仁)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며 이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이성계가 대노한 탓에 여수현은 폐현되어 순천부 산하로 강등되었다. 반면 순천은 1413년( 태종 3년) 순천 도호부로 개편된다.
1479년에는 옛 여수현 땅에 전라좌수영이 설치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이곳은 왜란의 최대 요충지이자 격전지 중 하나가 된다. 1593년에는 여수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어 하삼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금의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순천왜성을 쌓고 주둔했고, 이순신을 비롯한 조명연합군이 이를 공격한 왜교성 전투가 일어났으나 연합군이 성을 함락하는 데는 실패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숙종대부터는 일명 '삼복삼파'(三復三罷)라 불리는 여수복현(復縣)운동이 전개되는데, 결과적으로 1696년(숙종 22년), 1701년( 영조 1년), 1750년(영조 26년) 세 차례 전라좌수사가 도호부사를 겸하는 형태로 '여수도호부'가 되었으나 모두 1년도 지나지 않아 도로 혁파되어 순천부에 귀속되었다. 구한말이 되어서야 겨우 여수군으로 승격되어 순천에서 분리되었다.
1895년 23부제가 시행될 때 이곳은 남원부에 속했다. 그러나 23부제가 이듬해 바로 폐지되면서 전라남도의 하위 행정구역으로서 여수군, 순천군, 광양군 등 독자적인 3개 군으로 편제되었다.
여기까지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전통적으로 여순광의 중심지는 순천이었고 여수와 광양이 예속되어 있었다.
3.3.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1949년 10월에는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조선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장병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출병 명령을 거부한다는 명분으로 남조선로동당과 합세하여 이 일대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4. 정치
4.1. 여순광 통합 논의
5. 경제
2021년 기준 여순광의 지역내총생산(GRDP)는 50조 7853억 원으로, 전라남도 전체 GRDP(88조 3838억 원)의 약 60%를 차지한다. 이는 인구가 여순광의 두 배가 넘는 호남 최대도시 광주광역시의 GRDP(43조 7425억 원)보다 큐모가 크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여수가 30조 5669억 원, 광양 13조 8343억 원, 순천 6조 3839억 원으로 여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실제로 오래 전부터 이 일대에는 "여수에 가서 돈 자랑 하지 마라"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여수는 전통적으로 부유한 지역으로 유명했다. 과거부터 풍요로운 어장을 바탕으로 수산업이 매우 흥하였고, 개항 이후에는 일본과의 무역 또는 밀수를 통해 큰 돈을 만졌으며, 1970년대에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석유화학단지인 여수국가산업단지가 건설된 이후로는 손꼽히는 공업도시가 되었다. GS칼텍스, LG화학, 롯데케미칼, 여천NCC, 남해화학, 한화솔루션, DL케미칼, E1, KCC, 삼남석유화학, 바스프 등 다수의 대기업 및 외국계 기업이 입주해있으며, 국내 유일의 석유화학 계열 마이스터고등학교인 여수석유화학고등학교도 이곳에 위치한다.
관광업도 가히 독보적이라 2023년에는 연간 누적 관광객 수가 2759만 명이었다. # 특히 2012 여수 엑스포와 버스커 버스커의 노래 여수밤바다로 지역 인지도가 크게 높아졌다.
광양시도 과거에는 평범한 농어촌이었으나, 1980년대에 포스코 광양제철소를 중심으로 광양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었고 수출 기지로서 광양항이 개항하면서 지역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광양제철소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제철소이며, 최근 포스코의 신산업 관련 투자도 광양제철소에 집중되는 추세다. 또한 이곳을 거점으로 여순광을 넘어 경상남도 하동군까지 아우르는 일대가 광양만권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1인당 GRDP에서도 여수와 광양이 앞선다. 2020년 기준 여수의 1인당 GRDP는 약 9500만 원, 광양 6800만 원, 순천 2300만 원이었다. 순천의 GRDP가 여수는 물론이고 광양에게도 크게 뒤쳐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대기업의 사업장이 여럿 위치해 노동생산성이 매우 높은 여수 및 광양과 달리 순천의 경제구조는 제조업이 빈약하고 서비스업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대신 순천은 전남 동부권 내에서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서 기능한다. 철도는 경전선과 전라선, 고속도로는 호남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 순천완주고속도로가 만나기에 인구가 30만 명도 안 되는 중소도시임에도 교통 환경이 매우 좋다. 덕분에 서쪽으로는 광주광역시, 북쪽으로는 전라북도 전주시와 충청도 및 수도권, 동쪽으로는 부울경까지 이동이 용이하다.
또 순천 아랫장은 과거부터 장날마다 인근 지역 주민들이 몰려들어 전국 최대 규모의 5일장으로 성장하였으며, 현재 전남의 유일한 백화점인 NC백화점 순천점도 영업하고 있다. 영화관( 메가박스 1개, CGV 2개)과 주요 대형 할인점( 이마트 1개, 홈플러스 2개)도 각각 3개로 도시 규모에 비해서 많은 편이다. 과거 코스트코가 호남권 입점을 최초로 시도했을 때 지목한 곳도 순천이었고, 1990년대 전국에 네 곳뿐이던 BMW 본사 판매점이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와 함께 순천에 들어섰다는 사실은 순천의 뛰어난 상업환경을 방증한다 할 수 있다.
2010년대 이후로는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계기로 순천만국가정원과 순천만 습지가 크게 알려지면서 여수처럼 관광업도 흥하고 있어, 2017년에는 순천 관광객이 연간 900만 명을 돌파하였다. # 2017년 기준 순천의 사업체 구조에서 1차 산업은 0.1%, 2차 산업 9.4%, 3차 산업 90.5%로 서비스업이 매우 압도적이다.
자체적인 노동 생산성이 낮아 주변 공업도시에 의존하는 소비도시라는 점에서, 규모는 순천이 더 작지만 대경권의 대구광역시와 경제 구조가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많은 대구 시민들이 정주 여건이 좋은 대구에 거처를 두고 인근 구미시와 포항시 등지에서 돈을 벌어 대구에서 소비하는 것처럼, 순천도 많은 시민들이 순천에 살면서 일은 광양이나 여수로 통근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6.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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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기본적으로 서남 방언(대방언) 중에서도 전남 방언(중방언) 사용권이지만, 소방언적으로는 광주광역시를 위시한 전남 서부권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일단 일부 문법과 억양에서 차이를 보이며, 경상남도와 이웃한 지리적 특성상 경남 방언의 영향을 받은 사례도 관찰된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서남 방언의 상대높임법에서 아주높임 표현은 '허씨요'체라 할 수 있고 명령형으로는 -(으)씨요'[2]로 쓰이지만,여수와 광양에서는 이것이 쓰이지 않고 '-(으)이다'[3]가 쓰인다는 것이다.
또 서남 방언에선 청자대우법[4]으로서 '-라우' 첨사가 쓰여 반말 뒤에 '-아라(우)/어라(우)'가 붙지만, 여수와 광양에서는 '-이다'로 갈음한다. 한편 순천에서는 '-라우' 첨사도, '-이다'도 아닌 '-요'가 붙어 청자대우법 기능을 하는데, 이는 경남 방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교통이 발달한 순천의 특성상 여수 및 광양과 달리 독자적인 방언이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양의 경우 전남에서 경남 방언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은 지역이고, 특히 섬진강을 맞댄 다압면, 진월면에서 더욱 두드러지며 강 건너 하동군과 묶어 '섬진강 방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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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문화
흔히 ' 전라도 향토음식' 하면 홍어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한국에서는 홍어가 서해에서만 잡히기 때문에 광주광역시와 목포시 등 전남 서부권과 달리 여순광 토박이들에게는 상당히 생소한 식재료다. 오히려 남해 여자만 연안에서 잡히는 꼬막이 여순광을 대표하는 식재료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여순광에 속하진 않지만 여순광 생활권인) 보성군 벌교읍의 꼬막이 유명하다.
돼지국밥은 경상도(특히 부산광역시) 향토색이 강한 음식으로 여겨지지만, 여순광은 전라도에 속하지만 지리적으로 경상도와 가깝기 때문인지 순천 웃장(북부시장)을 중심으로 돼지국밥집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다만 '순천식 돼지국밥'은 부산식과 달리 돼지고기가 아니라 돼지뼈에서 육수를 내며, 살코기가 아니라 머릿고기와 내장, 선지가 주가 된다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부산식 돼지국밥을 파는 가게도 많이 있고, 순천 아랫장에서 가장 이름난 국밥집도 부산식 돼지국밥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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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전반적으로 개신교가 강세인 호남답게 자연히 개신교가 대세다. 구한말부터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이 곳에서 집중적인 선교 활동을 벌인 결과 장로회, 특히 통합의 세가 강하다. 영남에서는 유교와 불교 전통이 깊어 현지인들의 선교사에 대한 반발이 컸지만, 호남에선 비교적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주로 학교나 병원을 세우는 방식으로 한국인들에게 다가갔다. 예를 들어 순천에 있는 순천매산중학교, 순천매산고등학교, 순천매산여자고등학교가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재단이 설립한 학교법인 호남기독학원 산하 학교들이고, 여수 애양병원도 1926년 미국 포싸이트 의료선교사에 의해 광주에서 이전되어 세워진 병원이다.
2015년 기준 순천의 경우 종교 인구 중 63%가 개신교이고, 전체 인구에선 25% 정도를 차지하였다. 반면 불자의 경우 종교 인구 중 22.9%, 전체 인구 중 9%에 불과할 정도로 불교의 불모지이며, 가톨릭 신자는 종교 인구 중 12.5%, 전체 인구 중 5% 정도로 불교보다도 더 파워가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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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이 곳을 배경으로 한 소설로는 1964년 김승옥이 발표한 무진기행이 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무진'(霧津)이라는 지역은 한자를 뜻풀이 해보면 '안개가 낀 항구'라는 뜻으로, 저자가 유년 시절을 보낸 순천만 인근 대대포구가 모티브인 것으로 여겨진다. 2010년 순천만 인근에 순천문학관 김승옥관(순천시 무진길 130)이 건립되었고, 2013년 KBS순천방송국 주관으로 김승옥문학상도 제정되었다.
음악으로는 여수 만성리 해수욕장을 배경으로 한 버스커 버스커의 여수 밤바다(2012)가 유명하다. 멜론 차트 3위까지 올라가는 호성적으로 젊은 세대에서 여수의 인지도를 끌어올려 지역 관광업 부흥에도 크게 기여한 노래였다. 실제로 여수 밤바다 발매 이전까진 여수의 한 해 평균 관광객 수는 700만 명 정도였으나, 해당 노래가 발매된 2012년 1500만 명을 기록하며 두 배 이상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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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프로축구 전남 드래곤즈의 홈구장 광양축구전용구장이 위치해 있고, 한때는 순천팔마종합운동장을 제2 홈구장으로 이용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경기가 열리지 않는다.
프로야구는 KIA 타이거즈의 실질적인 광역연고지에 속하며,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외에는 프로 경기가 열리는 야구장이 가까이 있지도 않기 때문에 타이거즈 팬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1차 지명 제도가 있던 시절에는 타이거즈가 순천효천고등학교 야구부에 우선지명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980년대에는 순천상업고등학교(현 순천효산고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었으나 별다른 족적을 남기진 못한 채 해체되었고, 1994년 순천효천고등학교가 야구부를 창설한 이래 여순광에서 유일하게 야구부가 있는 고교로 유지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