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0:41:06

스웜 전술

1. 개요2. 전술 개념3. 유목민과 스웜 전술
3.1. 장단점
3.1.1. 장점3.1.2. 단점
3.2. 사회경제적 관점에서의 고찰
3.2.1. 정주국가의 스웜전술 대처법3.2.2. 유목민의 정치적 약점
3.2.2.1. 약점을 이용한 유목민 통제법: 이이제이3.2.2.2. 약점 극복의 어려움3.2.2.3. 극복할 경우
3.2.3. 정주제국의 역습
4. 사례5. 게임에서의 등장

무릇 적군을 만나면 삼삼오오사오하여, 집결시켜서 적에게 포위되어서는 안 된다. 대체로 보병은 전체가 적합하고 기병은 분할이 적합하다. 적이 많으면 분할하고, 적이 모으면 모아서, 맹렬히 돌진시킨다. 멀거나 가깝거나, 많거나 적거나, 집중하거나 분산하거나, 나아가거나 사라지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오고 번개가 사라지듯이 간다.
▲ 몽골 제국군 전법. < 초한전>의 부록에 따르면 이는 마오쩌둥의 16자 전법의 기원 중 하나이다.

1. 개요

화기가 보편화 되기전 냉병기 시대의 전장에서 궁기병을 주로 운용하던 군대가 주로 사용하던 전술. 영단어 Swarm은 벌같은 곤충들이 떼지어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다.

2. 전술 개념

스웜 전술은 , 투창 등 투사병기로 무장한 기병의 히트 앤 런 전술을 말한다. 기병의 기동력을 이용해 빠르게 접근과 후퇴를 반복하고, 접근 시 투사무기를 이용해서 공격한다.

기병은 정밀한 진형 구성이 어렵고 신속한 이탈이 중요한데 스웜 전술에서는 정밀한 움직임 대신에 무리지어 움직여서 치고 빠지는게 중요하며, 이 때 기병 무리의 움직임이 벌레떼가 뭉쳐서 움직이는 것과도 같아 이것이 곧 전술의 어원이 된다.
말을 타고 화살의 공격 범위까지 접근한다. → 쏜다. → 상대가 추격해오면 기수를 돌려 내뺀다. → 승마술이 된다면 추격당하여 도망가는 도중에도 쏜다. → 추격을 포기하면, 다시 접근하여 쏜다. → 반복.

현대적인 스웜 전술은 흩어진 소규모 부대를 적재적소에 적절히 집합시켜 지역적 우월성을 얻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예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은 레이더와 각종 관측 정보를 활용해서 적재적소에 편대를 잘 배치해 선방했다.

3. 유목민과 스웜 전술

말에 올라탄 튀르크족 병사 1천 명이 나란히 달리면서 한꺼번에 화살을 쏘면, 반드시 1천 명의 적들을 죽이고 말 것이다. 어느 군대도 그들의 공격에 맞서 싸울 수 없다. 말에 탄 채로 화살을 쏘는 실력으로는 튀르크족 병사가 아랍인 병사보다 더 뛰어나다. 튀르크족 병사들은 말에 탄 채로 전후좌우 사방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화살을 쏘면 사람과 동물들을 반드시 맞춘다. 아랍인 병사가 화살을 한 번 쏠 동안, 튀르크족 병사는 화살을 무려 10번이나 쏠 수 있다.
아랍의 문인인 알 자히즈(Al-Jahiz 767~869년)가 서술한 튀르크족 궁기병들에 대한 내용.[1]
(투르크인들은) 자신들이 프랑크인과 한 뿌리에서 나온 종족이라고 하면서 프랑크인과 투르크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기사로 태어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어서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와 기독교권에 대한 믿음이 강력했더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들보다 더 강하고 용감하고 기술이 좋은 병사들을 찾아보기 어렵다[2].
피터 프랭코판, <동방의 부름>[3]
말을 빠르게 달리면서 활을 사용해야 하는 궁기병이 필요하고 개별 집단으로 무리 지어 움직이는데 익숙해야 한다. 그래서 궁기병을 대량으로 육성하고 훈련을 시킬 수 있어야 한다.

궁술 자체가 꽤나 연마가 필요한 기술이고, 마상 궁술은 훨씬 더 고급 기술이다. 말을 세우고 쏘고 빠지는 수준은 일반적인 기병으로도 가능하지만, 스웜 전술은 빠르게 말을 달리면서 조준, 장전을 해야 하고 거기다 필수적으로 고삐를 놓고 달리기 때문에 양다리만으로 몸을 지탱해야 한다. 그리고 양다리만으로 몸을 말에 지탱하면서 균형을 잡는 건 어지간히 말에 익숙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보통 유목민이 환경상 스웜 전술을 적용하기 적당하고 많이 쓴다.

유목민은 구성원 대부분이 을 소유하고 말에 익숙한 사회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장거리 이동을 위해서 말이 필수적이어서 말에 익숙하고 어린 시절부터 말을 타기 때문에 마상 기술을 빠르게 습득한다. 또한 유목민은 수렵 생활도 병행하기 때문에 수렵으로 마상 궁술에도 익숙한 경우가 많다. 또한 사냥 같은 관습으로 다수의 인원이 스웜 전술에 필수적인 유기적인 움직임과 말 위에서 호흡을 맞추는 걸 자연스럽게 배운다.

각 생활단위인 가족 씨족, 부족은 사냥, 이동 때도 함께하고 이것이 전투할 때도 부대단위로 변하게 된다. 수렵을 통해서 얻어진 경험은 곧 전투기술이 되고 이미 익숙한 움직임이기 때문에 복잡한 전술을 쓸 여력이 안 되는 유목민의 부족한 훈련도와 전술을 보충할 수 있다.

궁기병을 양성할 수 있다면 정주민도 못쓸 것은 없지만 비용과 효율면에서 유목민과 비교가 안 된다. 농경, 목축을 막론하고 정주민 사회에서 말은 사치품이자 군수품이며, 생산면에서 일부 농경이나 짐 수송용으로 쓰일 뿐이고 유목민처럼 생존과 직결되는 경우는 없다. 설사 말을 소유하더라도 목축민이나 돼야 그나마 말을 좀 타는 수준이고 통상 생산에 투입하는 말을 타고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루 웬 종일 농사일을 해야 하는데 한가하게 말을 탈 시간이 날 수가 없다. 설사 말을 타더라도 잠깐 시간이 날 때 타거나 이동수단으로 타는 것일 뿐이고 마상 기술을 전문적으로 습득하기 어렵다.

본격적으로 말을 타는 정주민은 부유층이나 고위 군사 집단으로 제한된다. 이렇게 정주민 입장에서는 기병 양성을 하고 싶다면 유목민보다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데, 마상 궁술이 필요한 궁기병 양성은 기병 양성보다 더 어렵다. 유목민과 같은 수준으로 키워내려면 비용이나 효율성면에서 상대가 안 된다.

이래서 정주민 국가들은 기병 육성은 후순위로 미루거나 기병을 육성하더라도 보통 적대 정주민의 보병을 격파할 충격 기병 위주로 육성하고 특히나 중장기병 육성을 더 선호하며, 궁기병은 유목민이나 기타 민족에서 용병으로 고용하는 걸로 충당했다.[4]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같은 부유하고 국력이 막강했던 나라들도 직접 농민들을 경기병으로 양성하기보다 자국 영토 내에 사는 튀르크, 타타르, 카자크같은 유목민 공동체들에게 대충 국경 통과증이나 자치 혜택 같은 걸 주고 대신 필요할 때 기병들을 징발하는 것을 선호했다. 기병 양성에 열심히였던 동로마 제국도 궁기병은 이민족 용병을 고용하는 걸로 충당했다. 단, 조선은 정주민이면서 궁기병 비율이 높지만 이건 조선 쪽이 예외. [5]

3.1. 장단점

3.1.1. 장점

  • 1. 일방적인 공격이 가능하다.
    이론상 상대에게 공격하고 상대방이 반격하기 전에 빠지기 때문에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팰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피해가 나지만 일반적인 충격 기병이나 보병을 상대로 한다면 무기를 맞대지 않고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대단히 효율적이고 적은 피해로 적을 상대할 수 있다.
  • 2. 기동력을 극대화 한다.
    충격 기병은 그 특유의 속도를 바탕으로 돌격하는데 강력하지만 적에게 집단으로 접촉해야 한다는 전술적 제약상 전술적으로 의외로 기동에 제약이 걸린다. 기병 돌격이 멈추면 수적으로 우세한 보병에게 역으로 둘러싸이기도 하고, 돌격 후 통제가 안 돼서 진영이 와해되기도 한다. 스웜 전술에서는 돌격은 최후반에 끝장날 때 쓰고 치고 빠지기만 반복하면 되기 때문에 속도를 바탕으로 상대방이 접근을 쉽게 예상하지 못하거나 빈틈을 빠르게 찌르기 쉽다.
  • 3. 소수로 전장의 주도권을 잡기 유리하다.
    기동력을 극대화 하면서 전장을 넓게 쓰고 공격 선택에 우선권을 가지지 때문에 수적 열세에도 공세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숫자가 곧 전투력인 시대에 수적 열세를 전술적으로 극복이 가능하다는 건 굉장한 이점이다. 유목민은 인구가 적기 때문에 정주민과 싸울 경우 수적으로 항상 열세인데 이런 약점을 보완해준다.
  • 4. 패배 시 퇴각이 유리하고 큰 피해를 입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적이 밀고 들어오면 후퇴하는 것을 전제로 움직이고 그에 맞춰서 견고한 진형은 유지하지 않기 때문에 압박을 당해서 진형 붕괴로 이어지지 않는다. 적이 공격하는만큼 빠지면서 반격을 하고 적의 공세가 심하면 공격은 접고 그냥 후퇴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밀집대형을 이루지 않고 느슨한 대형을 이루기 때문에 일부가 격파되더라도 진형 자체에 영향도 적고, 후퇴로 인한 사기 저하나 도주 심리 형성도 적다. 추격전 상황에서도 구성원 대부분이 기병이다 보니 그냥 냅다 튀면 되기 때문에 큰 손실도 적다. 그러다가 무리하게 추격하느라고 흩어지면 우월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재집결해서 각개격파하거나 몰아붙이면 된다.

3.1.2. 단점

참고
  • 1. 경무장 뿐이라 근접 전투력이 떨어진다.
    경기병인 궁기병 자체가 가볍게 입기도 하고 스웜 전술을 위해서 빠르게 움직이고 활도 쏴야 하기 때문에 갑옷은 아무래도 가볍게 입을 수밖에 없다. 거기다 스웜 전술을 주로 쓰는 유목민 사회는 생산력이 떨어지다 보니 무장이 훨씬 빈약해서 우월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한 정주민 기병보다 훨씬 무장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사람은 무장해도 말은 속도와 지구력, 그리고 무엇보다 돈 문제 때문에 마갑은 포기할 수밖에 없어서 생존성에 한계가 있다. 이 문제는 후술할 모든 문제의 근원이기도 하다.[6] 거기다 화살 가격도 절대 싼 것이 아니다. 화살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현대에도 화살 가격이 한 발에 수천 원을 호가한다. 이 비용을 생각하지 않고 화살을 계속 소모하면 현대 미군이 한 발당 가격이 몇 억원을 넘어서는 토마호크 미사일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적을 돈으로 깔아죽이는 전술을 유목민이 쓴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 2. 충격력이 없어서 적에게 결정타를 날리지 못한다.
    치명적인 단점이자 유목민 궁기병이 그토록 강력했음에도 정주민을 일방적으로 압도할 수 없었던 이유다. 스웜 전술의 요점은 경기병으로 투사무기로 적을 공격해서 이쪽 피해는 최소화 하면서 빈틈을 만들고, 전투는 못한 채 일방적인 출혈을 강요당해서 사기가 떨어지고 진형이 무너진 적에게 직접 공격으로 최후의 일격을 가해서 끝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인 돌격에 필요한 돌격 부대가 없거나 적을 충분히 상대하기에 충격 기병의 전투력이 부족하거나 아예 적이 이 악물고 버티면 궁기병만으로 끝을 못낸다. 궁기병이라고 돌격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전문적인 돌격부대도 아니고 상술했다시피 유목민은 아무래도 무장이 훨씬 빈약해서 돌격할 때 입을 피해도 더 크다. 그래서 유목민도 어느 정도 돌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해서 충격 기병을 보유하려고 했고, 유목 제국은 약탈과 정복으로 충분한 생산력을 갖추면 정주민 같이 중무장 기병을 육성했다.[7]
  • 3. 대기병 전투력이 떨어진다.
    스웜 전술의 핵심은 기동성을 바탕으로 거리를 두고 싸운다는 것인데 같은 기병에게 이런 장점을 살리기 어렵다. 말을 달리면서 뒤로 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상대가 기병이어서는 치고 빠진다는 전제가 성립이 안 된다. 결국은 그냥 맞서 싸우거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계속 후퇴하는 수밖에 없다. 맞서 싸운다면 당연히 일단적인 스웜 전술은 살릴 길이 없이 보통의 기병전이 되기 때문에 유목민 특유의 마상 전투술을 살리기도 어렵다. 정주민도 일반적인 마상 전투술은 시간을 들여서 충분히 습득 가능하다. 정주민 국가가 작정하고 기병을 키우면 경제력이 훨씬 좋기 때문에 무장이 좋고 덕분에 중장 기병 육성과 유지도 수월하다. 스웜 전술의 가장 큰 약점이 기병 돌격에 무기력하게 무너진다는 점인데 사실 이건 유목민들끼리 싸워도 마찬가지였다. 칭기즈 칸이 케레이트족과 나이만족을 박살낼때 경기병들끼리 화살쏘는 스웜전을 펼치다가 본진 중앙에 모아둔 중기병대의 일제 돌격 한방으로 회전에서 승리하고 초원을 통일했다. 원조비사를 보면, 초원에서 오랫동안 한가닥했던 나이만족과 케레이트족 둘 다 말을 타고 있는데, 활을 쏘지않고 창칼을 쓰는 적을 처음보고 놀라 쟈무카에게 "뭐, 저렇게 싸우는 애들이 다 있냐? 저것들을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나?" 라고 물어본다. 물론, 쟈무카의 대답은 "그거 못 막는다. 나도 저들한테 깨졌다."였다. 이렇듯, 스웜전술로 적 보병에 화살 신나게 쏘다가 말과 사람이 지치고, 보병 진열 뒤에서 놀고있던 중기병대가 지친 유목민들에게 돌격을 걸어버리면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더 부자인 제국은 그 우월한 경제력으로 중장 기병도 육성하면서 이민족을 용병으로 고용하면 정주민이 고용한 궁기병이 맞 스웜으로 상대하다가 화살이 떨어지고 말이 충분히 지치면 뒤에서 놀던 정주민의 자랑거리인 돈 쳐발라서 육성한 마갑까지 입힌 중장 기병이 창과 칼을 세우고 돌격해버린다. 물론 이 정주민족의 승리공식을 패배공식으로 바꾸어서 돌진한 중기병들을 유인해서 매복후 포위 격멸하는 전술도 있는데. 이 후퇴매복전술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군대도, 장군도 유목민족 중에서도 매우 드물었다. [8]
  • 4. 적절한 공간과 넓은 전장이 필요하다.
    기병 자체가 넓은 기동공간과 평탄한 지형을 필요로 하지만 스웜 전술의 궁기병은 적을 최대한 공격하기 위해서 더 넓은 기동공간이 필요하고 치고 빠지기 위해서 속도 유지를 위해서 지형지물도 최대한 제약이 없어야 한다. 궁기병이라고 무한정 치고 빠질 수 없고 유목민이라고 진지가 없는 건 아니다. 궁기병도 말이 지치면 갈아타야하고 중간에 쉬기도 하고 화살이 떨어지면 재보급도 받아야 한다. 이런 재보급 요소가 있기 때문에 이걸 노리고 공간을 장악해서 밀어붙이면 보급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지 못하고 밀리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후방에 있는 거점부터 공격해서 전투 지속 능력을 차단해버리는 방법도 있다. 당연히 이런 적의 우회 기동의 위협이 있는 언덕, 산악, 숲 등의 지형은 전장을 제한하고 기동성을 약화시키는 등 스웜 전술을 약화시킨다. 몽골 거란, 돌궐 등 유라시아를 호령한 유목제국들이 자신들의 최대 장기인 스웜전술을 쓸 수 없는 산악지대에 위치한 수렵민족인 예맥, 만주족, 파슈툰족, 캅카스인들에게 고질적으로 약했던 이유다. 특히 만주족 같은 경우는 기마술, 궁술도 뒤쳐지지 않는데다가 철이 풍부한 만주지방 특성상 중장기병 육성도 용이하고 삶의 기반 자체가 쳐들어가기 힘든 험준한 산악지대다 보니 초원 지대 유목민족들이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상대였다.
  • 5. 일반 궁병에 비해 사정거리가 짧다.
    궁기병의 실제 전투거리는 1m~20m 내외로 일반 궁병에 비해 매우 짧았다. 말을 타면서 활을 당기려면 지상보다 2배는 많은 힘과 허릿심이 필요한 데다가, 말의 흔들림으로 조준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에게 잘 훈련된 궁병이 있다면 더 멀리서 활을 쏴 대응하므로 스웜전술의 의미가 없어진다. 특히 화기가 보편화된 이후에는 이 문제점이 극대화되어 궁기병이 쇠퇴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러한 경향은 총이 활을 대체한 시대 이후에도 여전한데 기병용으로 제작되어 현대에도 휴대 편의성이 중시되는 병종에서 사용되는 사용하는 카빈 소총은 동시대의 보병용 소총을 사거리나 정확도 측면에서 근처에라도 따라가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아예 들고 움직이는걸 반 쯤 포기하다시피 한 저격총이나 기관총을 상대로 정면에서 카빈 들고 돌격을 하는건 그냥 자살행위가 된다.

정주민족이 앞선 산업화로 인해 총과 대포를 발명하게 되자 스웜전술의 우위는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정주민족이 사거리가 더 길고 화력이 압도적이니 치고 빠지러 접근하다가 화기 사격에 노출되어 모두 죽어버리게 된다. 차라리 돌격기병이라면 좋은 타이밍, 충분한 수, 유리한 지형을 맞이하면 퀴레시어처럼 충격력을 발휘하여 접근전으로 박살낼 수도 있는데 총과 대포 상대로 활로 사격전을 펼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행위다.

3.2. 사회경제적 관점에서의 고찰

매우 악랄한 명성을 떨치게 된 전술이라 인터넷에서는 일종의 무적의 필살전술로 회자되기도 하지만, 사실 전술적으로는 그다지 특이하거나 괴상한 형태라고는 할 수 없다. 원사무기를 활용한 소모전에서의 우위 개념이 정주민족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무지막지한 기병의 규모와 결합하여 극단적으로 강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멀리서 쏘는 이 전술적으로 매우 유용한 병기라는 것을 모르는 군대는 없다. 이론적으로는 상대방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원거리 무기를 동원하여 사격전을 강요할 수 있다면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형국으로 쉽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정주민족의 군지휘관들도 다 알고 있었고, 특히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궁기병이 유리하다는 것 또한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제반 경제적, 사회적 여건 상 대병력을 전부 기병화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보병이 큰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고, 발로 뛰는 보병들을 궁병화 해봤자 스웜전술 같은 일방적 소모전의 강요는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중심 꽉 잡힌 전열을 이루고 회전을 치르는 형식으로 발전한 것 뿐이다.

따라서, 정주민족 군대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이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형태의 스웜전술 위주 유목민 기병전력과 맞붙게 되는 경우에는 지속적인 소모전을 강요 당하는 형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슨 기마민족 기병이라고 해서 스펙 자체가 넘사벽이라 이기기 힘들었던 게 아니라, 앞서 거론한 이유 등으로 인해 정주민족의 군대는 기병만으로 대병력을 편성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동수의 군대가 대치하는 경우 적의 후퇴를 추격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기병전력이 보병전력과 분리되어 고립 및 각개격파를 당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고립→기병격파→보병소모의 패배를 보여준 가장 유명한 사례가 바로 카르헤 전투(53 BCE).

그러한 각개격파를 우려하는 경우 당연히 원거리에서 사격전을 유지하는 궁기병 집단을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대가 전체적으로 일방적 소모를 강요받게 되고, 그렇게 해서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면 빈사의 먹이감을 노리며 주변에서 맴도는 하이에나나 머리 위를 도는 독수리 떼처럼 퇴각도 제대로 못하게 괴롭히는 방해전술(harass tactic)이 이어지면서 소모의 악순환이 거듭된다.

즉, 여러모로 유목민의 궁기병 위주 스웜전술은 야전(野戰)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다.

3.2.1. 정주국가의 스웜전술 대처법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웜전술이 무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은 유목민들이 돌아다니던 지역의 정 반대편의 "변경"도 마찬가지라, 유럽에서도 대체로 유목민의 진출은 정주민족들이 생활의 터전으로 여기지 않았던 스텝 지역까지로 한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스웜 전술이 상대하기 불가능한 무적의 전술이었으면 진작에 온 세계를 다 정복을 했을 것이다. 물론 온 세계를 정복했던 사례가 있긴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유목민족과 정주민족은 승패를 주고 받으며 대치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칭기즈 칸과 같은 정복군주가 출현한 사례는 유목민족의 역사에서도 보기드문 매우 예외적인 사례에 속한다.[9][10]

이는 역설적이게도 야전에서 극단적으로 효율적인 형태의 군대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된 유목민의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그 이상 더 큰 결과를 이룩하기는 불가능하도록 제약을 가하는 족쇄의 역할도 동시에 했기 때문이다. 즉, 스웜전술의 강점은 곧 스웜전술의 약점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사격전을 통한 소모전" + "기병을 활용한 그러한 소모전 효율의 어마어마한 뻥튀기"의 형식을 취하는만큼 스웜전술이 노리는 방식의 소모전을 피하기만 한다면, 그 상황을 타개할 능력이 스웜전술을 사용하는 군대에는 전무했다.

즉, 몇 가지 핵심을 정리한다면:
(1) 각개격파를 피하기 위해 그 스웜을 무리하게 추적하지 않는 것
(2) 추격하지 않으면 당하게 될 사격전의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
(3) 나아가, "피해를 당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그 사격전에서 오히려 상대방을 압도하는 것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할 수 있다면 스웜전술은 무력해지기 마련이었으며, 실제로 유목민과 수 천년을 싸우면서 자기 영역을 지킨 정주민족들은 동방이건 서방이건 모두 이 기본을 지켜가며 성공적으로 자기 영역을 방어하고 유목민 진출을 막아냈던 것이다.

가장 좁은 형태로는, 전술적으로 다수의 궁병이나 총병을 배치하고 대기병 방어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상궁은 좁고 흔들리는 말 위에서 쓰기 위해 작고, 그만큼 사정거리도 짧다. 정확도도 낮으며 때문에 지상에서 활을 쏠 때보다 훨씬 가까이 접근해야 유효타를 날릴 수 있다. 당연히 연사는 기대하기 어렵다. 반대로 궁병은 활을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들 수 있으니 사정거리가 길고, 더 밀집할 수 있으니 같은 면적을 점유한다면 기병에 비해 더 많은 화살을 날릴 수 있다. 훈련도가 높다면 사격통제를 통한 일제사격과 장전이 교대로 이루어지니 연사를 통해서 공격횟수는 더 늘어난다.

즉, 순수한 사격전의 능력에서는 궁기병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는 궁병이나 총병전력을 갖추고, 상대방 사격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기병의 급습에 대항할 수단을 갖추면 되는데, 즉, 일반적인 야전 형태의 싸움을 거부하고 진지구축의 형태를 취하게 되며, 그러한 전술을 전략적 단위로 업그레이드하면 변경 요새들을 중심으로 하는 요새망의 구축이 된다.

이런 방식으로는 "거점을 막을 수는 있어도 약탈은 막지 못한다"라면서 스웜전술이 본질적으로는 대처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것이 잘못된 이야기이다. 전국시대 조나라 최후의 명장 이목이 진(秦)에 압박당하는 암울한 국가적 위기상황 아래에서도 변경에 부임하여 제대로 거점방어를 수행하다 연합부족들 10만명을 탈탈 털어버린 것만 봐도 알 수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그런 식으로 유목민들을 성공적으로 막아왔다. 또한 약탈을 한다는건 정규군이 거점을 지키는 동안 농민들의 재산은 속절없이 털린다는걸 가정해야 하는데 기병 털어먹는 보병으로 유명했던 스위스 용병의 원래 직업은 다름아닌 농민이었다. 당연히 자기 재산을 도적질 해 가는 유목민들에게 이를 갈고 있을 건 당연하니만큼 변경의 농민이 순한 양 같았을거라 생각하면 매우 오산이다.

즉, 동양이든 서양이든 유목민을 상대로 한 싸움은 종례의 선형방어(line defense)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야만족을 상대로한 로마군의 방어전략의 발전과정에서 점점 선형방어 개념인 "벽(limes)" 개념이 퇴색된 것도 이러한 예시의 하나. 물론 그 선이 명나라시대의 만리장성 수준으로 상상과 상식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수준으로 만들어지면 좀 이야기가 다르긴 하다.

3.2.2. 유목민의 정치적 약점

앞서 언급한 유목민의 근본적 한계로 인하여, 야전에서는 매우 강한 형태의 군대를 운용할 수는 있어도, 그러한 군대가 사시사철을 작전계획에 따라 움직일 수는 없다. 이러한 부족제적 세력에서 군대는 해마다 정례적으로 약탈에 동원되는 것이기에 (약탈경제라는 말이 있는 것을 상기해보라), 약탈은 정치적이거나 신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생존과 생활상의 문제였기 때문에 강력한 방어선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압한다"라는 의지를 애초에 기대할 수가 없었으며, 그러한 약탈 캠페인(campaign)에서 일정 정도의 성과를 이룩하지 못하면 부족장 권위의 실추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먹고 살기 위한 약탈인지라, 리턴이 크면 부족장이 가지 말라 해도 가고, 리스크가 크면 부족장이 뭐라 해도 안 가는 형태다.

또, "창칼을 부딛히는 것만이 싸움"이라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면, 이미 손자도 모공편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다"라는 말을 했듯, 싸우지 않고 전력을 보존하면서 상대방의 전략적 목표달성을 완전히 어그러뜨려놓는 정주민족들의 강력한 거점방어 전략은 정주민족이 유목민을 야전에서 상대하기 어려운 것 이상으로, 유목민들에게는 무지막지하게 '더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야전에서 스웜전술에 정면으로 맞서서 격파하기 힘들다면, 야전을 거부하고 피해를 최소화 하는 지연전으로 맞상대하는 것.

그러한 효율성에 비한다면, 소규모 경작지가 자잘하게 약탈당하는 정도는 정주민족의 입장에서는 피해라고 할 수도 없음은 물론이다. 애초에 유목하지 않고 안정된 기반을 이룩하여 산출 가능한 경작물과 잉여생산물로 막대한 경제적 산물, 여력, 인구를 자랑하는 것은 정주민족의 전략적 이점이다. 평생을 말 위에서 사는 덕분에 강한 기병전력을 갖게 된 것이 유목민들의 전략적 이점인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자잘한 피해 따위 금세 회복하는 막강한 경제적 여력을 100% 발휘하여 약탈하러 쳐들어온 놈들에게 솥바닥이나 긁으라고 내주고, 철통같이 방어하여 아무런 소득이 없도록 한 결과, 그 침략자들이 그 해의 약탈이 매우 부실해지고, 이득도 없는데 수고만 하고, 부족장 권위는 실추되고, 내분과 불만으로 허송세월하도록 헛수고로 만들어버리면 그거야말로 효율 100%의 스웜전술 상대법이며, 실제로 역사상 유목민과 맞붙은 민족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성공적으로 대처를 해 온 것.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리 정주민이 유목민에 비해 부유하다지만, 변경의 소규모 정착지를 약탈하는 수준으로는 대규모 약탈대를 구성할만한 동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약탈로는 대규모 약탈대 코에 붙이기에도 모자라며, 따라서 소집단 단위의 약탈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물론, 정주 제국의 입장에서는 이런 소규모 약탈대는 딱히 위협적이지도 않고 그 피해가 크지도 않다. 당하는 정착지 주민 입장에서야 피눈물이 날지도 모르지만...[11] 아니면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처럼 수시로 예방전쟁의 개념으로 먼저 쳐들어가서 아예 마적떼 같은건 만들 궁리도 못하게 유목민 지역의 경제적 기반을 수시로 박살을 내버리고 유목민을 알거지로 만들어버리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했다.

결국 대규모 약탈대를 만족시킬만한 약탈물을 얻기 위해서는 재화와 물자가 집중된 성읍이나 도시를 터는 것이 가장 좋은데, 이런 성읍과 도시는 당연히 요새화 우선도가 높은 거점이 된다. 그리고 유목민과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한 생산력을 가진 정주민족의 요새화는 많은 경우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튀르크족에게 시달리던 동로마 제국의 축성술은 웬만한 도시의 성벽은 두겹씩 둘러쳐버리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아나톨리아 전역이 튀르크족에게 석권된 이후에도 이런 요새화된 도시들은 수십년 이상이나 제국의 기치를 올리며 버텨냈다고 할 정도이고, 중국같은 경우 만리장성 처럼 역사에 위업으로 남을 정도로 엄청난 성벽을 건설하기까지 했을 정도인 것이다.

또한, 유목민족보다 훨씬 인구가 많은 정주민의 경우 기병의 숫자에서는 유목민보다 밀리더라도 보병을 포함한 총 병력의 숫자에서는 충분히 우위를 점할 수 있으며, 기병이 절대적인 강세를 보이는 평야에서의 야전과는 달리 요새를 거점으로 한 방어전에서는 보병도 충분히 기병을 위협할 수 있는 전력이 될 수 있다. 물론 평야에서도 보병이 팔랑크스 같은걸 들고 나오거나 테르시오와 유사하게 창병으로 궁병을 보호하는 방진을 구성한다면 이 경우에도 기병의 절대적 우세는 장담하기 어렵다.

그리고 유목민의 경우 야전에서는 아주 강하지만 생산력과 공학기술의 부족으로 인해 공성전에서는 그렇게까지 강한 면모를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이런 요새화된 거점을 들이받는 것은 별로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유목민 입장에서는 약탈도 사업인데 빨리 한탕 크게 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공성전 한다고 죽치고 앉아있는다거나, 짜잘한 마을이나 털자고 한도끝도없이 돌아다니고 싶겠는가? 자칫하면 약탈대가 고향을 비운 사이에 남겨둔 가족이나 소중한 목초지를 빼앗길지도 모르는데... 또한 주변 마을들을 철저히 털고 돌아다닌다 치더라도 원래 도시는 교통의 요지에 형성되기 마련이니 정주민도 바보가 아닌 이상 가능한 한 주변 영역을 통제하기 쉬운 곳에 거점을 건절했을 것이고, 여력이 있는 상태라면 이 거점을 기반으로 약탈대를 역습하여 타격을 입히려고 시도할 것이다. 재수없으면 지리를 잘 파악한 정주제국의 군대에 몰려 스웜전술이 효과를 발휘하기 힘든 험지같은 곳으로 외통수에 몰려 섬멸당할지도 모르는 것. 이렇게 되면 자신은 만리타향의 고혼이 되고 고향에 남겨둔 처자식은 노예로 끌려가는 신세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정주민족에게 유목민의 약탈을 막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던 것처럼 유목민에게도 정주민을 약탈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요약한다면, " 유목민이 침입했는데 바로 격퇴 못시키고, 지방을 털고 다니도록 냅둘 수밖에 없으니 대처가 불가능하다"라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매우 잘못된 인식이다. 선형방어 개념으로 "이 방어선 안에 침입을 허용하면 패배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12]

형태의 영토를 지배하는 국가, 즉 <정주민 국가>에서는 각각의 국가가 지배하는 면과 면이 만나는 이 발생하게 되고, 이 선이 바로 국경선으로써 선형 방어를 위한 방어선이 된다. 따라서 정주민 국가의 전쟁은 기본적으로 영토를 빼앗으려는 전쟁, 즉 상대가 지배하는 면을 빼앗아 내가 지배하는 면에 포함시키려는 전쟁이며, 이는 다르게 말하면 상대의 지배영역과 내 지배영역을 나누는 경계선을 상대 쪽으로 밀어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의미인 것이다[13]. 바로 이 때문에 '내 영역에 상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선형방어>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것.

하지만 이런 정주민 국가들과는 달리, 유목민들의 사회상은 '면 위를 떠돌아다니는 '의 형태이고, 유목민의 영역이란 그들이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영역이 아니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영역이다. 물론 정주민 국가의 입장에서는 유목민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와서 하는 일이란 십중팔구는 결국 약탈이므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아예 유목민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버리고 싶겠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아무리 농경정주민의 인구와 경제력이 유목민에 비해 우세하다 해도 하나의 점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유목민에 대해 자신들의 영역을 가르는 경계선 전체에 그에 상응하는 역량을 배치해둘수는 없기 때문이다.[14]

하지만 역으로, 이 때문에 정주민 국가의 입장에서는 설령 유목민들이 자국의 영역 내를 들락거린다고 해도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면 자체를 지배하려 드는 다른 정주민 국가와는 달리 유목민들은 약탈이나 한 뒤 다시 나갈 뿐, 그 영역 자체를 빼앗아 자신들이 배타적으로 지배하려 들지는 않기 때문. 정주민 입장에서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주민의 영역에 대한 유목민의 침범이 너무 심해지고 일부 유목민들이 아예 그 자리에 눌러앉기 시작하여 정주 국가가 해당 영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데 이르거나, 유목민의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영역이 영토의 중심부(심장부)에 이르는 경우, 또는 본 문단에서 여러번 언급된 것처럼 유목민 사이에서 원대한 시야를 가진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유목민을 규합하고 이전까지의 약탈 켐페인을 정복 캠페인으로 전환한 경우(=정주민의 영역 자체를 빼앗아 배타적으로 지배하려 드는 시도를 시도한 경우)이다.

결국, 유목민 대 정주민의 관계에서 유목민이 정주민의 영역을 가르는 선 내로 침입하는 것 자체를 막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유목민과 정주민의 역학구도 내에서 이런 침입-약탈은 일상적인 상황의 일부일 뿐, 정주민 국가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문제라고 볼 수도 없다. 요약하자면 정주민 국가의 입장에서 변경 정착지의 약탈은 상시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의 일부였을 뿐이고, '영역에 대한 지배력 상실'을 겪지 않으면 진짜 패배를 당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통상적인 상황에서, 영역 자체의 상실은 거점 방어- 요격 전술로 심하게 선을 넘은 유목민들을 털어주는 정도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유목민-정주민 관계에서 "유목민이 침입했는데 바로 격퇴 못시키고, 지방을 털고 다니게 냅둿으니 정주민의 패배" 라는 식의 관점은 '양측의 교전중에 한 쪽의 병사가 하나라도 죽었으니 그 쪽의 패배" 라는 식으로,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불공정한 관점이라는 것.

즉, 전술적 영역에서 무적처럼 보이지만, 스웜 전술은 전술단계에서의 싸움을 거부하고 전략 단계의 상위의 싸움으로 끌어올려버리는 것으로 무력화되는 것이 역사적 상례라고 할 수 있다. 스웜전술에 맞서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만큼, 유목민들에게 있어서도 스웜전술을 파해하기 위한 정주민족의 전략적 포진은 극복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유목민족의 위협은 적절한 범위 내에서 통제될 수 있었다.
3.2.2.1. 약점을 이용한 유목민 통제법: 이이제이
이러한 "상례"가 깨지는 것은 정주민족이 아니라 유목민족들에게 달린 경우가 많았다.

유목민족의 약탈 캠페인은 장기적으로 끌 수 없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그 점을 노리고 정주민족이 지연전을 펼치면, 분명 전투에서도 지고 있고 피해는 가중되고 있지만 유목민족의 약탈 캠페인의 내구력은 한계가 있고 한정된 시간안에 막대한 약탈이익을 얻지 못하면 지리멸렬하고 족장의 권위도 실추되어 내전이 발생한다는 점을 노린 방어전략이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 그렇지만 유목민족 내부에서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뛰어난 지략을 가진 족장이 갑자기 튀어나와 유목민 답지않은 장기적이고 조직적인 캠페인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갖추게되면 재앙적인 결과가 발생한다. 그게 바로 묵돌, 아틸라, 야율아보기, 완안아골타, 테무진, 누르하치, 오스만 1세 등의 유목 제국 창시자들이 했던 일이다.

단, "상례"가 깨지고 약탈 캠페인이 정복 캠페인으로 전환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유목민 내부에서 강력하고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날 때 이루어지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정주민들로써는 전혀 손쓸 방법이 없고, 오직 그런 인물이 나타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어야 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정주 제국들은 충분한 여력이 있을 때에는 유목 부족들 사이에서 이런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유목민들을 관리 해왔다. 이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이이제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시적 분열 상태인 유목 부족들 중에서 한 부족을 선택하여 작위나 관직 등을 통해 권위를 부여하고 물자를 지원함으로써 다른 유목민들을 억누르고 관리하게 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이제이의 대행자 역할을 담당한 부족은 계속 세력이 성장하게 되지만, 그 세력이 정주 제국을 위협할 수준에 이르기 전에 후원 대상을 바꿔서 이전까지 후원대상이던 부족을 역으로 억누르게 만들면 된다. 이를 계속 반복함으로써 유목민족 특유의 상시적 분열 및 대립상태를 고착시켜 강력한 통일체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이제이의 핵심이다.

'장기적이고 조직적인 캠페인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체제'란 결국 '유목민족의 상시적 분열과 대립을 극복한 통일적 정치체제'이고, 이것을 이뤄내야 정주 제국을 휩쓰는 강력한 유목민 정복자가 나타날 수 있다면, 정주제국의 통치자는 이 약점을 조장하고 고착시킴으로써 강력한 유목민 정복자가 나타나 제국을 위협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정주 제국의 '통제력'이 유목민들에 대해 확고한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단순히 '제국을 위헙하지 못하도록 견제' 하는 수준을 넘어 용병으로 활용하는 것까지 가능했다. 어느 정도의 이권을 보장해주고 정주민들로써는 대규모로 양성하기 어려운 숙련된 기병 전력으로 활용한 것. 물론 이렇게 유목민 용병들에 대한 군사적 의존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유목민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면 그때는 단순히 외부로부터의 침략-정복이 아니라 병력으로 기용한 유목민 용병( 맘루크 굴람 등)이 제국 내부에서 권력을 장악해버리는 사태가 생기게 되지만.[15]

실제 역사에서도 강력한 유목 제국 창시자들은 주로 인접한 정주 제국이 혼란이나 쇠락상황에 빠져 유목민족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나타났고, 강력한 정주 제국이 유목민들에게 계속 통제력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그 견제를 극복하고 강력한 유목민 정복자가 나타난 상황은 찾아보기 어렵다. 누르하치 후금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사실상 조선 임진왜란때문에 여진족들을 견제할 수 없었던 것이 컸다. 그 이전까지는 명도 그렇지만 조선에서도 무슨 수를 쓰던 간에 여진족에게서 강력한 지도자가 나오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있었다.

물론 유목민들 역시 바보가 아니므로 이런 ' 이이제이'가 자신들을 견제하고 약화시키기 위한 것임을 모를 리야 없었겠지만, 안정기의 정주 제국은 유목민들에 비해 훨씬 부유하고, 강력한 문화적 권위까지 가지고 단기적이지만 확실한 이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입장이었던 것. '잘하면 정주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더 잘하면 세력을 규합하여 유목민족을 통합하는 데 성공할 수도 있고, 아주 잘하면 정주 제국을 정복하여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런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지금 당장 확실한 이익을 가지고 주변의 경쟁세력들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닌 셈이다.[16]

게다가 설령 원대한 시야를 가진 위대한 유목민 지도자가 나타나 정주 제국에 억눌려있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이이제이의 떡밥을 받아먹지 않고 유목민의 규합을 시도하더라도, 유목민에 대한 정주 제국의 견제력이 유지된다면 손을 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덜 원대한 시야를 가진 덜 위대한 다른 유목민 지도자와 유목 세력을 후원하여 원대하고 위대한 꿈을 주저앉히려 시도할 수 있다.

즉, 역사적으로 정주민과 유목민의 관계는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하며 서로의 빈틈을 엿보는 관계였지[17] 결코 일방이 다른 일방에 대해 명확하고 압도적인 우세를 가진 관계가 아니었으며, 이러한 양자간의 관계에서 '상시적으로' 우세한 입장에 있던 것은 오히려 정주 제국이었다.[18] 다만 이 역학 관계가 '일시적으로' 뒤집혔을 때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유목민들의 힘이 주변의 정주 제국을 휩쓸고 역사를 바꿔버렸던 것이다.
3.2.2.2. 약점 극복의 어려움
이 점에서 유목 제국의 탄생이 역사의 큰 흐름 구비구비마다 그 방향을 바꿔버릴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은 맞지만... 이런 '특별한 사건' 에만 너무 시선을 빼앗겨 정주민과 정주 제국이 유목민과 유목 제국을 도저히 막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짓밟혀 온 입장이었던 것처럼 오해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 '특별한 사건' 은 말 그대로 특별한 사건이니까 가끔씩만 일어나는 것이고, 가끔 특별한 일이 일어난 순간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인 것도 맞지만 그 못지 않게 역사의 많은 부분은 '상례적인 상황' 들로 채워져 있는 것.[19][20]

결국 앞서 말한 것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역사상 이걸 해낸 유목민족 족장이 얼마나 드문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유목민족들은 안정된 정치체제가 없으며 갈등 원인은 엄청나게 산재되어 있다. 유목민족은 씨족 이외에 집단을 아예 이루지 않는데 그 때문에 갈등을 해결할 방법 자체가 전쟁밖에 없다[21] 물론 혼인이나 의형제 등을 통해서 갈등 관리에 그럭저럭 성공한 사례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혼인 동맹이나 혈맹 등은 유목민 사회를 구성하는 각 씨족/부족 사이에서 나타나는 관계이지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며 갈등을 조절할 상위의 사회적 질서가 아니다.

즉 유목민 씨족들은 평시부터 항상 혼인이나 혈맹등을 통해 적을 줄이고 동맹을 늘리며 갈등이 폭발하지 않도록 관리 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이 갈등 관리가 실패하여(또는 부족하여) 갈등이 불거져 버릴 경우, 이 갈등을 중재하고 해결할 상위의 구조(=정치체제)가 없었다. 그래서 전쟁을 통해 갈등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고, 혼인동맹이나 혈맹등의 관계는 이 전쟁에서 어떤 씨족이 어느 진영에 속할지 세력 구도를 결정하는 역할밖에 할 수 없었던 것.

반면 유목민보다 더 고도화된 사회구조를 구축한 정주 제국들의 경우 / 황제의 권위나 <>과 같은 형태로 사회 구성원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해소할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칭기즈 칸같은 유목민 정복자들이 괜히 유목민 세력을 통일한 후에는 '법'과 같은 지속 가능한 사회적 규약을 마련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례 중 유목민족의 사회와 가장 비슷한 사례가 바로 소말리아다. 소말리아 목동들은 를 키우기 위해 요새화한 보루에 기관총까지 두고 소를 키우는데 이렇게하지 않으면 다 빼았겨버리기 때문이다. 유목민족의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칭기즈 칸 자무카의 연합이 말 몇마리 도둑질 때문에 결정적으로 틀어진 이유도 유목민족들이 갈등해결을 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문제 때문이다. 한정된 초지를 둘러싸고 씨족단위로 끊임없이 전쟁하는 것은 자신의 아들들의 유목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단체로 농경민족을 털러갈 수도 있겠지만 농경민족은 저 멀리에 있고 바로 옆 부족은 말 달려서 이틀이면 충분한 거리에 있다. 누구와 싸우게 되겠는가? 현재 아프리카에서 유목을 하는 유목민들도 집단적으로 자기들끼리 혹은 농경민족과 내전을 벌이고 있는데 이게 유목사회가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내전의 근본원인이다. 가축들은 어마어마한 물을 소모하고 잠깐만 있어도 목초지를 거덜내버린다. 애초에 이동하는 것 자체가 가축들을 한지역에서 키우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동하는 것이다. 중앙아시아 사우디아라비아 아프리카건 이들이 사는 지역은 그렇지않아도 물과 목초지가 부족하다. 농사가 안돼서 유목을 하는 것인데 농사도 못할만큼 척박하고 물이 적은 땅에서 가축을 키우는데 이들이 물을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겠는가?

즉, 이웃 부족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더라도 존재 자체로 한정된 자원(물, 풀, 사냥감 등)을 축낸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적대적인 눈과 똑같은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것을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무작정 원정을 떠나면 내 재산과 가족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한다. 오로지 족장의 권위만 믿고 장기 원정을 한다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전쟁이 장기화되거나 약탈이 별 재미없어지면 끌고나온 족장의 권위가 실추되고 그 권위가 실추돼서 모두가 족장을 더이상 겁내지 않게되면 고향에 놔둔 내 가족의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다. 한명이라도 돌아간다면, 그놈이 내 가축과 가족을 털지도 모르니 내 집을 지키기위해서라도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22][23]
3.2.2.3. 극복할 경우
따라서 정주민족들은 유목민들이 우르르 몰려와도 버티기만 하면 대충 지나가리라 하면서 버티는 전략을 채택하지만 이 역사상 거대 유목 제국들을 건설했던 족장과 그 후계자들은 일반적인 약탈 캠페인과 다르게 이러한 거점을 고립시키고 차츰차츰 함락시켜나가는 점령 캠페인으로 바꾸어버릴만큼 강력한 권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다시말해 권위만으로 소말리아를 딱히 경찰도 동원하지 않는데 범죄가 일어나지않는 강력한 통제국가로 바꾸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몇백년에 한번쯤 이런걸 해내는 위인이 등장하는데 이런 족장이 탄생하게되면 유목민족의 국가가 발생하는 세계사적 대형사건이 발생하게 된다[24].

이런 유목 제국이 탄생하면 이전과 같이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병력을 분산시켜 거점을 막는 상황은 국토 전체가 적의 손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거점 속에서 굶어죽기만을 기다리는 형세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거점들은 주변의 농지로부터 식량을 공급받는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단기간이라면 모를까, 장기간의 정복 캠페인이 가능해진 유목민족들을 상대로 더 이상의 보급과 식량공급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때가 되면 이전의 유목민족에 대처했던 거점방어전략은 오히려 손쉽게 각개격파를 당하는 자살행위로 돌변해버린다. 이런 점 때문에 역사상 손꼽게 남은 유목 제국은 일단 건립에 성공하면 믿을 수 없는 속도의 정복전을 펼치며 정주민족의 국가들을 단체로 갈아버리며 거대 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유목민족에 대한 정주민족의 방어적 대처법은 어디까지나 핵심지역을 일정시간동안 지켜내면서 유목민들의 정치적 취약함을 노리는 대처법이지 유목민족의 병력을 실질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는 방안이 아니다. 스웜 전술의 핵심은 이탈이고. 이런 전투로 대승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스웜 전술을 펼치는 경기병들의 패퇴 후 재집결을 막을 수 없고 본진에 대한 깊숙한 진공은 자살 행위에 가깝기에 시도할 수도 없다. 결국 일방적으로 약탈당하는 변방을 막으러 뛰어다니다가 국력이 차츰 쇠퇴하고 정벌군을 편성해서 나가도 정면에서 상대해주지 않고 집요하게 보급선만을 노리고 병력과 맞닥뜨려도 스웜 전술을 통해 피해를 강요하다 불리해지면 퇴각해버리는 이 유목민족들을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스웜 전술은 분명 전장에서의 전술이지만 교전이 발생해도 압도적인 기동력을 바탕으로 불리한 전투는 회피하고 유리한 전투만 해가면서 전력보존과 상대국가의 국력 소모를 강요한다는 전략적 측면과 강하게 연계되어 있는 전술이었다.

결국 유목민족이 정주민에 대해 가지는 우위는 이렇게 전술적인 측면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유목민 입장에서) 적이 우리 영역으로 쳐들어오고 지킬 수 있는 능력은 한정되어 있는데 우리쪽은 조금만 정주민 세력의 방어가 허술해져도 바로 치고 들어가 털어먹고 빠져나올 수 있다는 전략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전근대 국가가 포괄적으로 방어할 방법은 결국 하나가 무너져도 나머지는 버틸 수 있는 여러겹의 방어선을 깔아두고, 봉화 체계를 비롯한 다른 연락 수단을 촘촘히 깔아둔 다음 유목민이 쳐들어와 털어먹어도 피해를 한정시키고 즉각 반응할 수 있는 대규모 단계적 방어 체계를 평소에 유지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도 정주민 국가가 해당 유목민들의 근거지로 쳐들어 가 아예 박살내지 못하는 한 원천봉쇄라 하긴 힘들지만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하고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장기적인 해결책이다. 근세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확장할 무렵 남쪽의 크림 칸국 이반 뇌제의 정복 이전 카잔, 아스트라한, 그리고 노가이 칸국 같은 남쪽 변경 지대에서 쏟아져 나오는 타타르계 유목민들을 막기 위해 현대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모스크바 일대 까지 깔아 놓은 대 목책 방어선(Большая засечная черта)이 이런 전략적 방어 체계의 교과서적인 사례로 통한다.

이런 소규모 전진 방어 기지들의 네트워크 시스템은 일단 기지 하나 하나는 다시 만들고 복구하는데 큰 자원을 소모하지 않으니 유목 세력에게 함락당해도 피해가 크지 않으며, 나아가 이반 뇌제의 현대 타타르스탄 정복도 그렇고, 훗날 크림 칸국 정복 때도 그랬듯이 이를 갈고 있던 정주민 국가가 훗날 국력을 끌어모아 아예 유목민들의 근거지로 쳐들어가 대규모 원정을 벌일 때 중간 병참 기지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욱 효과적이다.

물론 이런 대규모의 다중 방어선은 짓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그 필요성을 주민들에게 설득하는 것도, 실재로 저런 타격 흡수→피해 상황 보고→대응반 소집→역습이란 근대 군대와 정부 입장에서도 큰 부담인 대규모 병략 체계를 유지할 만한 국력이 있을 때나 설득력 있는 이야기지, 중국, 러시아만큼의 대국이 아닌 한 저런 방어선 짓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이미 예산이 파탄나기 일쑤다. 괜히 화약 무기와 근대적 병참 체계 이전 그 많은 높은 문명 수준을 자랑한 정주민들의 국가들이 유목 세력의 침략에 치를 떨며 갈려나간게 아니다.

3.2.3. 정주제국의 역습

위에 제시된 방법들은 정주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수동적인 대응, 즉 유목세력이 공격해오면 그에 대응하여 방어하는 수단들이다. 물론 상기된 바와 같이 이는 많은 경우에 효과적인 대응책이기는 하였으나, 상황의 주도권을 주고 유목민들을 적극적으로 격파할 수 있는 대책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정주민족 역시 단지 변경을 방어하고 있는데에만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고, 여력이 있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유목세력을 공격하여 그 세력을 꺾어놓으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양자의 대결이 정주민족의 승리로 완전히 결판지어진 것은 물론 근대에 들어서이다. 정주민족은 국민개병제로 상징되는 고도화된 행정시스템과 기관총으로 상징되는 화약무기, 근대 건축술을 이용한 요새와 기차, 자동차등을 통한 운송기술까지 모든 측면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갖춘 근대국가를 이루었지만 유목민족은 그렇지 못했고, 따라서 유목민족은 정주민족에게 완패하여 그 지배 아래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25] 하지만 이는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고 본 문단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것은 근세 이전의 정주제국이 과연 어떻게 유목세력에게 역습을 가했느냐는 점일 것이다.

이는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바로 기병이다. 기병은 기병으로밖에 상대할 수 없기 때문.

흔히 떠올리는 수레로 바리케이트를 두르고 목책을 세우거나 장창으로 방진을 만든다는 대기병 전술은 전술적 차원에서의 해법이지, 머나먼 유목민족의 땅으로 쳐들어가 기나긴 보급선을 유지한 채 이러한 기동력 떨어지는 보병으로 기병들을 상대한다는 건 전략적 차원에서는 자살행위다. 한무제 당시 이릉은 보병 5천으로 8만에 이르는 기병을 상대로 매우 훌륭히 싸우기는 했으나 끝내는 패배했다. 물론 훌륭히 싸울 수 있었던 원인은 기병들이 이릉의 보병을 얕보았기 때문이지 보병이 10만이었다면 애초에 싸워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반면에 같은 한무제 시기 위청과 곽거병에게 주어진 기병 10만은 오르콘 강 상류의 바이칼 호까지 침투하여 흉노의 배후지였던 목초지를 점거하고 부락들을 불사지르고 학살하여 흉노의 국력을 결정적으로 결단내어 버렸고 이후 흉노의 국력은 크게 저하하여 한나라의 적수가 되지 못하게 된다.

농경민족의 기병으로 더 우세한 유목민족의 기병을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물량과 전투의지의 문제가 있다. 일단 아무리 유목민 기병이라도 같은 기병을 대상으로는 일격 이탈을 할 수 없다는 점. 개별 병사의 속도는 더 빠를지는 몰라도 군대의 움직임은 둔중해질 수밖에 없고 또 싸우기전에 병력을 퇴로에 배치해두는 방법으로 충분히 유목민족 기병의 병력을 섬멸시킬 수 있다. 스웜 전술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결국 전선에서의 병력유지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적의 병력을 소모시킬 수 없었다.

전략적으로도 보병 병력의 진군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속도다. 따라서 진군의 소식이 들려오면 유목민족의 게르가 이탈하는데 별 문제가 없지만 경기병 대군의 진군속도는 그보다 훨씬 빠르다. 노약자도 섞여있는 사람들이 가축을 몰고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정도의 속도로 밖에 움직이지 못하듯 유목민족의 본거지는 기병에게는 결국 따라잡힌다. 실제로 곽거병은 한나라로부터 전혀 보급을 받지 못하고 현지조달로 막북 원정을 성공시켰으며 러시아 카자크의 현장약탈은 악랄하기로 유명했다. 이런 점 때문에 현장보급품을 약탈당하는 상황을 막을 수 없어서 보급을 꺾는다는 방법도 효력이 떨어진다. 결국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이 작정하고 모은 대군과 결전이 강요된다는게 핵심.

그리고 물량은 작정하고 쏟아내면 곡물을 사람 먹이는 대신에 말을 먹인다는 방법으로 생산력에서 월등히 앞서는 농경민족이 훨씬 더 많은 경기병을 쏟아낼 수 있었다. 곽거병의 흉노 원정 당시 동원한 기병이 10만, 소모한 군마가 14만필이었고 크림 칸국을 박살낼 때 러시아가 동원한 카쟈크와 제후국들의 합계 병력은 15만에 달했다. 유목민족이 동원할 수 있는 기병보다 압도적인 숫자의 기병을 동원하면 전략적으로 유목민족의 일격이탈 전술을 봉쇄할 수 있고, 전술적으로도 스웜 전술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포위해서 백병전으로 섬멸할 수 있다. 이를 수행한 러시아와 한나라는 십자군과 동로마의 운명과 다르게 유목제국을 제압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전투의지의 문제는 동로마 제국- 페체네그 전쟁의 전환점이 된 레부니온 전투의 사례로 이해하면 적당하다. 레부니온 전투 당시 동로마군은 쿠만족과 동맹을 맺고 자국 내 깊숙히 침입해온 페체네그족을 격파했다. 그리고 전투가 동로마-쿠만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뒤, 승리의 일익인 쿠만족은 동맹군인 동로마군이 자신들까지 도륙해버릴까 두려워 약속한 보상만 받고 얼른 동로마 영역 바깥으로 빠져나갔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결국, 유목민의 입장에서 전쟁이란 약탈을 통해 이득을 얻기 위한 일종의 사업인 데 비해 정주제국의 입장에서는 외부의 공격(유목민의 약탈)을 막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차이에서 비롯된 일이다. 예컨데 유목민간의 전쟁이라면 일단 상대를 쳐서 꺾은 뒤에는 가축과 재화를 약탈하여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고 승리자가 재물을 확보하는 데 신경을 기울이는 사이 부족의 핵심 구성원 및 여력이 있는 이들은 다른 재산을 미끼로 던져주고라도 일단 탈출하여 후일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26] 하지만 정주 제국, 예컨데 유목민의 침략을 방어하고 있는 동로마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난한 유목민의 재산 따위를 약탈해서 얻을 이득은 별로 없다. 그보다는 해당 부족이 다시 약탈 공격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격파하여 전력을 파괴하는 쪽이 훨씬 중요한 일이다. 게다가 각각의 병력 단위가 각자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행동하는 부족 연합체와는 달리 사회가 고도화된 정주 제국일수록 모든 병력을 국가의 전략적 목표에 따라 운영하는 데 유리하다.

따라서, 정주민의 입장에서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자신들을 약탈하고 재빨리 도망칠지 모르는 유목민 약탈자들이 끔찍한 것처럼 반대로 유목민의 입장에서는 싸움이 끝나면 재산이나 약탈한 뒤 해산하지 않고 자신들을 끝까지 박살내버리겠다고 조직력을 유지한 채 계속 공격해오는 정주민의 군대가 끔찍하고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이런 특성들 때문에 농경민족이 강요하는 결전에서는 유목민족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물량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목민족은 정치체제가 안정적이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대규모 병력을 자주 모을 수 있었던 원인은 약탈의 기대감이었다. 종군할 경우 많은 재보와 가축을 얻을 것으로 보고 많은 유목민들이 유력한 족장의 소집령에 응했지만 대규모 병력을 상대로 방어전을 펼칠 목적으로 병력을 소집할 경우 자신의 가축과 가족들도 위험한 상황에서 싸워봐야 얻을 것도 없는 압도적 기병 대군들 상대로 절망적인 전투를 하러 유목민들은 모이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아주 쉽게 집과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결국은 각개격파당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유목민들은 에 대한 집착이 정주민들보다 월등히 약했고 이것이 결국 최후의 유목제국 준가르처럼 정주민으로 변신하지 못했던 유목 제국이 최종적으로 모두 몰락하는 원인이 된다.

4. 사례

카르헤 전투는 가히 스웜 전술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보병 위주의 로마군이 아득바득 버텨냈으나 수레를 통해 화살을 보급받아가며 결국 로마군의 전의를 꺾어냈다. 다만 여기서도 궁기병만으로 로마군을 격멸하지 못했고 충격 기병과의 조화로 로마군 전열을 붕괴시켜 승리를 거둔 것이다.

반대로 필로멜리온 전투는 스웜전술에 대한 수비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잘 훈련된 동로마 중보병들과 장궁병들이 수비와 반격을 완벽히 해내었고, 궁기병들이 가장 취약한 화살이 떨어지고 재보급을 받아야 하는 타이밍을 핀포인트로 노려 카타프락토이 예비대를 투입해 궤멸시킨 대승이었다.

의외로 동로마의 대패로 유명한 만지케르트 전투도 스웜 전술의 장점과 한계를 잘 보여주는 전투다. 동로마군은 굳건한 대열을 짜고 튀르크군의 진영을 향해 전진했고, 반대로 투르크군은 정면 대결을 피하고 스웜 전술로 동로마군을 괴롭혔다. 튀르크군은 동로마군의 전열을 무너트리는데는 실패하고 진영도 점령당했지만 동로마군도 양익에 큰 피해를 입고 더이상 전진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적어도 이 시점까지는 승패가 명백히 가려지지 않았고, 동로마군은 후퇴하긴 했지만 아직 예비대가 멀쩡했으므로 튀르크군도 큰 피해를 입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즉 전술적으로는 튀르크군은 압도적인 전력의 동로마군을 상대로 피해를 누적시켜 물러나게 만들었지만[27] 반대로 본진이 점령당했을 뿐만 아니라 충격력의 부재[28]로 적의 전열을 무너트릴 능력은 없었다. 다만 이 때 동로마군 내부에서 배신이 벌어져 황제 로마누스 4세가 튀르크군에게 붙잡히는 참사가 벌어졌으며, 동로마군의 피해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이후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 때문에 아나톨리아 내륙지대를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차 십자군 전쟁 때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튀르크 기병들은 서유럽 기사들을 맞이하여 스웜 전술로 압도하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막상 중무장한 전투기계인 기사를 상대할 중무장 기병이 없어서 계속 화살비만 날려댔다. 이렇게 한참이 지나도 십자군은 피해를 입을지언정 무너지지 않았고 다른 곳에서 응원군이 달려오는 바람에 오히려 역포위된 튀르크군이 격파된 사례가 있다.

이미 제정 시기부터 궁기병에게 당해와서 이골이 난 동로마 제국은 유목세력들을 막기 위한 노하우가 뛰어났는데, 위에서 궁기병의 대처법으로 등장했던 장궁병 양성, 중보병 우주방어 이후 돌파, 카운터 궁기병, 요새화와 봉화 설치 등이 모두 동로마 제국에서 사용한 해법이었다.

동로마는 보통 궁기병은 페체네그, 알란, 쿠만족 등 정교회 내지 가톨릭 신자비율이 많은 기마민족이나, 모태신앙이 정교회인 튀르크인들을 징집하여 부대를 만들었고, 궁기병과 돌파용 경기병의 병종구별이 확실했다. 동로마인 토박이 기병대는 보통 카타프락토이같은 중기병이였지만, 이들도 최소한 콤니노스 왕조 시기까지는 궁술을 필수적으로 교육받았었다.[29]

또한 동로마의 역대 황제들은 스웜 전술의 힛 앤 런을 막기 위해 종심을 따라 역참, 요새, 봉화를 완비했고, 마누일 1세 때 완공된 아드라미티온-니케아 요새 라인은 오스만 제국이 아나톨리아를 전부 삼키기 전까지 뚫리지 않을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이런 요새들은 보통 그리스의 불을 담은 수류탄이나, 거대한 요새포 형식의 트레뷰셋 혹은 노포를 장착했으며, 이들은 이슬람 군주들의 최우선 공격목표였다.

좀 예가 다르지만 3차 십자군 때 리처드 1세 살라흐 앗 딘의 아르수프 전투. 살라흐 앗 딘의 아이유브 왕조 군대는 유목민의 후예였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장을 했다. 반대로 리처드의 십자군은 유럽식의 중무장한 군대. 아이유브 군은 일제히 접근해서 해안가를 행군하는 십자군을 공격했는데, 창, 화살, 다트 등 투사병기를 수도 없이 날렸다. 아이유브 군은 십자군보다 숫자도 많아서 거의 반포위하면서 압박을 높여갔고 행군중인 십자군은 반격을 위해서 이렇다 할 진형을 갖추지 않았다. 그러나 십자군은 실로 놀라운 응집력을 발휘해서 계속 행군하며 아이유브 군의 압박이 거세짐에도 전열을 흐트려뜨리거나 대열을 이탈하지 않았다. 아이유브 군의 공격은 직접적인 타격을 못주었는데, 십자군 중에는 몸에 화살을 11개나 달고 행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압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십자군은 한순간에 반격으로 돌아섰고 이 한 번의 공세로 아이유브 군은 와해되었다.

보다 직접적인 사례로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제1차 십자군 전쟁 당시에 벌어진 도릴레움 전투가 있다. 당시 이슬람 궁기병들이 스웜 전술을 펼치며 둘로 나누어 행군하던 일단의 십자군을 기습했지만 지휘관인 타란토의 보에몽과 노르망디의 로베르는 스크럼을 짜고 버텼다. 사상자가 꽤 나오기는 했지만 중세 유럽 군대의 특유의 중무장과 지휘관들의 적절한 대처로 다른 그룹의 십자군들이 지원을 올 때까지 버텨낼 수 있었다. 이후 스웜 전술을 펼치던 이슬람 궁기병들은 유럽 기사들의 중기병 돌격에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다. 사실 버티던 십자군들의 대형 일부가 뚫리기도 했는데 이슬람 기병들은 스웜 전술에 집착하느라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소수가 돌입해서 십자군이 보호하던 비무장 순례자 일부와 약간의 병사들을 살상하는 데에 그치고 만다.

도릴라이온의 전투가 지휘관들의 즉흥적 전략이었다고 한다면, 필로밀리온 전투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에서 마이엔데르 강의 동로마 군은 궁기병에 대한 FM을 보여주었다. 일부러 궁기병이 스웜전술을 쓰기 쉬운 평야나 기동력을 보여주기 좋은 아나톨리아의 고지대를 피해서 먼저 평탄한 언덕들을 선택해 포진하고, 제 1진의 보병대에게 중갑을 둘러 화살에 대한 방어를 확실히 한데다, 1차 십자군에서는 보호하지 못했던 경보병과 비무장 인원 보급물자들을 방진 안으로 넣어 보호했으며, 궁기병이 스웜 전술을 계속하면서 지치고, 화살이 떨어지려 하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해, 경기병과의 회전에서 절대우위인 중갑기병들을 투입, 궤멸시켰다.[30][31] 미리오케팔론 전투의 패배 이후 설욕전을 펼쳤던 동로마 제국이 룸 술탄국을 개박살냈던 마이안데르 강 전투에서는 궁기병이 기동하지 못하게 일부러 강과 협곡 사이로 밀어넣고 카타프락토이와 궁기병, 장궁병으로 쌈싸먹는 완벽한 전략이었고, 수만이 넘는 룸 술탄국의 정예 투르코만 궁기병들이 박살나, 오히려 미리오케팔론 전투 이전보다 더 많은 영토를 빼앗긴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유럽 세계에서는 무시무시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돈치트로 모병한 유목부족들의 궁기병을 외인부대로 가지고 있을수 있었고[32] 수천 정도의 상비군으로 장궁병대를 보유할 수 있던 동로마였기에 가능한 전략이기도 했다.

또한 3차 십자군 전쟁에서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가 이끈 독일 십자군은 1190년 5월 14일 이코니움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룸 셀주크의 주력 군대를 패배시켰는데, 셀주크측 기록에 의하면 이는 7천 명의 창기병으로 구성된 십자군의 파괴적인 중기병 돌격 덕분이라고 언급되었다 #.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무제 때의 한나라 장군 이릉은 잘 훈련된 보병들로 흉노족 기병들을 여러차례나 격파했다. 비록 이릉은 초원에 고립되어 결국 항복하기는 했지만[33] 규율과 훈련을 갖추고 궁기병에 대항할 수 있는 투사병기를 갖춘 보병대열은 궁기병만으로는 격파하기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이다.[34] 이처럼 상대방이 중무장하고 감투정신이 높다면 멀리서 긁어대는 걸로는 효과가 미미하다.

바투의 유럽 원정군이 헝가리 왕국군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 연합군과 붙은 모히 전투 역시 비교적 최근 연구로는 스웜전술은 오히려 실패로 돌아갔고 유럽식의 중무장 기병과 기사에 고전하고 바투 자신도 크게 위험했지만 수부타이의 기습 공격이 성공함으로서 헝가리 군을 붕괴시키고 승리 할 수 있었다. 위의 사례는 스웜전술은 절대 무적은 아니고 방어력이 튼튼한 중무장 기병과 보병은 스웜전술로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5. 게임에서의 등장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서는 근접유닛의 부실한 인공지능 때문에 정말 흉악한 위력을 발휘한다. 중 궁기병(Heavy Horse Archer)은 밸런스를 고려해 최종테크라고는 믿겨지지가 않는 어마어마한 물몸으로 설정해 놓았지만 수가 모이면 못 이기는 병력이 거의 없다. 악명높은 마케도니아 백부장, 고조선의 군단병, 수메르 투석기, 히타이트 군선도 다 때려잡는다. 특히 최강의 궁기병인 히타이트 중 궁기병은 그야말로 최종병기.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는 기마궁수 계열 유닛들의 이동속도가 전반적으로 조금씩 느려져서 마냥 써먹기는 힘들게 되었다. 1, 2에서는 이동 사격이 불가능해서 멈춰서 쏘고 이동하고를 반복해야 했지만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4부터는 이동사격이 가능해졌다. 러시아와 몽골이 기마궁수를 사용한다.

토탈 워 시리즈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 아주 사실적으로 구현하는데 성공했다. 로마: 토탈 워에서는 기마궁수를 보유하고 있는 파르티아, 아르메니아, 스키타이의 주력전술로 활용되며 투창기병이 존재하는 누미디아도 초반 전술로 애용한다. 확장팩인 바바리안 인베이전에서는 고트, 훈족, 사산 왕조 등 좀 더 다양한 세력들이 사용 가능하다. 토탈 워: 미디블2에서는 강력한 궁기병 전력을 보유한 대부분의 동유럽, 이슬람, 동방정교회 팩션의 주력전술로 애용된다. 소수의 궁기병만으로도 훨씬 많은 적 보병과 중기병을 농락할 수 있다는 장점과,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일방적으로 두들기고도 결국 최후엔 강력한 충격력의 부재로 인해 난감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까지 그대로 재현했다. 보통은 "두들길 때는 신나지만 내가 화살이 떨어져도 저쪽은 꽤 살아남았더라"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궁기병의 양이 다수가 된다면 또 경우가 달라지기는 한다.

중보병과 중기병의 강력한 충격력과 육박전 능력을 장기로 삼는 서유럽 팩션에게 있어서는 참 여러모로 상대하기 난감한 전술이다. 가만히 앉아서 맞고만 있을 수도 없는데 그렇다고 쫓아가봐야 잡을 수도 없기 때문. 결국 서유럽 팩션에서는 지형을 이용하여 포위를 하든, 공성전으로 끌고가든 해서 상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어떻게든 백병전을 유도하던지, 혹은 사정거리와 화력 모두 궁기병보다 강력한 고급 궁병들(주로 파비스 석궁병이나 장궁병 등)을 다수 동원하거나 경기병/궁기병 용병들을 동원하여 상대하게 된다. 그런데 궁기병들이 경무장이라지만 궁보병들은 스코트 근위대나 투르크 보병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백병전에서는 그보다 더 약하고, 궁기병 중에서도 투르크 시파히나 헝가리 마자르 기병처럼 근접전도 잘 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사격전으로 대응한답시고 근접 보병의 비율을 줄이고 궁병의 비율만 지나치게 높히면 그냥 사방에서 돌격당해서 박살난다(...). 아니, 궁기병들은 돌격 보너스가 있기 때문에 근접전 좀 하는 궁병이 근접능력 개판인 궁기병에게 돌격 보너스 얻어맞고 박살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35]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 하는 참으로 골치아픈 상황이다. 이러다가 나중에 총병과 대기병 전문 파이크가 등장하면 이제 집중된 총격 앞에 궁기병은 파리처럼 쓰러지면서 격파할 수 있게 된다. 나름 역사적으로 스웜 전술의 부상과 몰락을 잘 재현했다.[36]

토탈 워 시리즈 토탈 워: 아틸라는 시대 배경이 배경인 만큼 주인공 팩션인 훈족을 위시한 일부 팩션이 궁기병을 갖추었고, 스웜 전술의 피말리는 악랄함 역시 충실히 구현된 편. 그러나 스웜의 단점은 미토 시절보다 더욱 극단적이라 화살 다 퍼붓고도 테스투도로 버티는 로마 보병들에게 변변한 타격 하나 못주는 경우도 흔하며, 제대로 사용 가능한 팩션도 훈과 백훈 등 유목민 팩션과 일부 용병에 한정된 터라 효과적으로 운용하려면 충격기병과 함께 편성해야 한다. 팁이 있다면 포섭 가능한 민족은 불태우지 않고 도시에 바로 옆에 군단이 없는 경제 허브를 만들어 공존하면 부족한 경제력까지 보충할수도 있다. 유목민 특유의 장점을 유지하면서도 정주화하는 전략이다.

토탈 워: 워해머에서도 엘프 고블린, 브레토니아, 제국 세력 등이 스웜 전술을 사용한다. 제국은 권총 기병을 사용한다. 경장갑 유닛들에게는 쓸만하지만 방패 갑옷 상대로 효과가 매우 낮은 편이며 보병 궁수들의 사격에 상당한 피해를 볼 수 있다. 또한 뱀파이어 카오스 등 세력의 속도 빠른 박쥐 군견 유닛에게 물려 죽을 수 있다. 캠페인에서는 인기가 낮은 편이나 멀티플레이 대전에서는 약점을 노리기 위해 자주 보이는 편.

토탈 워 사가: 트로이에서 아마존 기마 궁수들과 켄타우로스, 아리마스포이 등이 사용한다.

미토2와 같은 시대배경을 다루는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도 후퇴 매복 전술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발동 조건은 부대의 지휘관이 알타익(유목민) 문화 그룹에 속해있고(종교는 상관없다) 부대 내에서 궁기병 비율이 20%가 넘을 경우 랜덤하게 발동되며, 지휘관의 무력 수치가 높고, 부대의 궁기병 비율이 높을 수록 발동 확률이 높아진다. 효과는 스커미쉬[37] 국면이 밀리[38] 국면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발동해서 국면을 다시 스커미쉬로 되돌려 놓는 것. 요컨데, 궁기병이 달려가서 화살을 쏘아대다가 접전이 벌어지기 직전에 후퇴한 뒤 다시 화살을 쏘아대는 거다. 크킹의 경우 미토워처럼 섬세한 유닛 컨트롤이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역시 사실적으로 구현된 것. 발동 확률도 높은 편이고 발동시 사격 공격력 보너스도 있어서 전술로써의 활용도는 아주 높고 이 때문에 똑같이 궁기병을 대량운용하는 알타익계와 페르시아계 사이에 희비가 크게 갈린다. 페르시아 궁기병은 그냥 쓸만한 정도지만 무력 높은 지휘관이 운용하는 유목민 궁기병은 정말 동아시아 초원 지대의 공포라는 평판이 아깝지 않다. 뭐, 역시 궁기병을 대량 운용하는 비잔틴 제국의 경우에도 스웜 전술을 못 쓰긴 하지만... 얘들은 궁기병+경기병을 운용하는 페르시아나 알타익과는 달리 궁기병+중기병을 운용하기 때문에 스커미쉬에서 일단 사격으로 좀 다져놓은 다음에 중기병 돌격으로 밀리 국면에서 상대를 조져버릴 수 있다. 이거시 바로 충격력(...). 이 덕분에 비잔티움의 상비군인 카타프락트는 사기 소리를 들으며 여러 차례 너프도 먹었다. 그래도 가성비가 문제인거지 여전히 강하다[39]. 반면, 알타이 페르시아 궁기병은 충격력 부재 때문에 밀리 국면으로 넘어가면 아주 좋다고 하긴 어렵고, 스커미쉬 국면에서 상대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혀두어야 한다. 뭐, 궁기병 비율이 높고 지휘관 무력도 뛰어나면 밀리 없이 스커미쉬 짤짤이만으로 상대를 모랄빵내서 퇴각하도록 만든 뒤 추격에는 아주 강한 경+궁기병 조합으로 쫒아가면서 밟을 수 있지만, 병력보다는 사기 데미지를 크게 주는 사격전의 특성상 이 작전이 잘 된 경우에도 상대 병력의 섬멸보다는 사기 저하를 통해 군을 붕괴시키는 형태의 승리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 전술에 대한 대처 방법 역시 미토워와 비슷하다. 스커미쉬 공격력이 궁기병보다 좋은 궁병을 대량 배치해서 스커미쉬 국면에서 맞불을 놓든지(대신 이 경우, 전술이 발동하지 않고 밀리 국면으로 넘어가 버리면 궁병은 궁기병과 경기병에게도 다져진다. 평소와는 달리 적이 후퇴매복 전술에 성공하기를 기대해야 하는 상황) 방어력 좋고 사기도 높은 창병을 배치해서 화살을 버텨내면 된다(이 경우 방어력이 좋은 창병은 스커미쉬 공격에 꽤 잘 버티므로 일단 몸빵으로 버티다가 밀리로 넘어가면 기병에게 강한 창병으로 궁기병과 경기병을 꼬치로 만들어 버리는 것). 이 경우 상대 지휘관의 무력이 높으면 계속 스커미쉬 짤짤이가 발동해서 전투가 엄청 길어진다.

스타크래프트 시리즈는 전략게임 중에서도 유닛의 개별 컨트롤이 주가 되기 때문에 전술로서 직접 구현되진 않았지만 임요환을 필두로 한 테란들이 선보이는 마이크로 컨트롤로 재연할 수 있다.[40] 테란 게이머의 기본소양에 속할 정도. 예를 들면 마린으로 치고빠지며 러커를 두들겨 잡고 저쪽이 접근하면 적당히 쏘고 튀는 식. 벌처는 우월한 기동성을 이용해 먼저 선빵-적이 반격하면 튀면서 무빙샷-도망치면 지옥끝까지 추격 이라는 아주 멍멍이같은 컨트롤을 보여줄 수 있어서 근접 유닛들을 빡치게 만든다. 맨 위로 돌아가서 읽어보면 알겠지만 기병으로 사거리까지 접근해서 쏘고, 보병들이 오면 튀고, 그러면서 컨트롤이 되면 튀는 와중에도 쏘고, 추격을 포기하면 다시 쫓아가면서 쏘는게 정확히 스웜전술을 수행하는 궁기병의 모습이다. 오토바이(말)에 탑승하여 장착된 유탄(화살)을 쏜다는 점에서 대략적인 비주얼도 궁기병과 유사하다. 후속작도 마찬가지로 전투자극제 낀 병력을 산개시켜 가며 저글링과 맹독충을 쏘고 도망치고를 반복해서 손실없이 잡아내는 등 여러 컨트롤이 있다. automaton 2000으로 유명한 인공지능 시연 영상에서도 매우 잘 보여준다.

이는 결국 유닛의 특징에 따라 적절한 운용방식이 나타나는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스타 1의 대표적인 스웜 전술 유닛으로 손꼽히는 벌쳐 같은 경우 뛰어난 기동성과 준수한 사거리 및 무빙샷 능력을 가지고 있고, 맷집이나 공격력은 그런대로 쓸만하기는 하지만 아주 우수하다고 보기는 힘든 수준이다. 그리고 이는 실제 역사의 전장에서 궁기병이 보여준 특징과 유사하다. 따라서 적 유닛(병력)과 붙어서 육박전을 벌이게 되면 이쪽 역시 큰 피해를 입고 별 재미를 못 보게 되므로 기동성과 사거리를 이용해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운용방법상의 공통점도 나타나게 되는 것. 물론 이에 대한 대응책 역시 현실 역사의 전장과 비슷하다. 스팀팩 마린은 기본적으로 스웜 전술 운영이 가능한 유닛이지만 스팀팩을 사용해도 기동성과 사거리에서 우위인 벌처를 상대로는 치고빠지기를 쓸 수 없다. 그리고 벌쳐의 경우, 벌쳐보다 기동력은 떨어지지만 반응속도와 사정거리, 화력에서 우위인 골리앗을 상대로는 역시 치고빠지기를 쓸 수 없다. 즉 스웜 전술의 기동력에 상응하는 기동력으로 대응하여 치고'빠질'수 없게 하거나(실제 전장에서는 경기병의 역할) 기동력으로 추격하지는 못하더라도 사거리와 화력, 신속한 대응속도에서 우수한 유닛으로 '치기'위해 다가왔을 때 큰 타격을 입히는 것(실제 역사에서는 창병이나 중보병의 보호를 받는 궁병의 역할. 하지만 스타 1에서는 골리앗의 체력과 방어력이 벌쳐보다 높으므로 경호 유닛은 필요없다.)으로 스웜 전술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1]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도현신 저, 서해문집, 137쪽. [2]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직접 투르크족 기마궁수들과 싸운 어느 십자군 기사가 남긴 기록이다. 비록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십자군이 승리하기는 했지만, 투르크족 기마궁수들의 뛰어난 승마와 궁술 실력은 십자군 기사들한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오죽하면 무장 성지 순례를 떠났을 만큼 열렬한 기독교 신자인 십자군 기사가 이교도인 투르크족을 가리켜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닌 것이 안타깝다."는 투로 기록을 남겼을까. [3] 이종인 역, 책과함께, 237쪽. [4] 고대 로마 제국도 기병은 대부분 동맹국이나 이민족 용병에 의존했다. [5] 여진족들이 궁기병의 숙련도로 중국인 조선인을 구분한 사례가 있을 만큼 중시했는데 주로 상대하던 적이 여진 부족들이었기에 발생한 일이다. 이런 궁기병 선호 사상은 임진왜란에서 큰 낭패를 보게 된데다 전란으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 국토의 목장이 갈려나가면서 점차 줄어든다. 다르게 말하면 군비를 대 유목민 병종 육성에 투자하다가 정주민 군대에게 털렸다고도 볼 수 있다. [6] 물론 만악의 근원의 근원도 존재한다. 바로 경제력. [7] 칭기즈 칸의 몽골기병 중에서도 충격용 중장기병이 존재했다. [8] 몽골제국의 수부타이는 이걸 너무나도 잘 써서 루스, 헝가리, 폴란드의 중기병들로부터 승리를 거뒀다. 동유럽 국가의 군대에겐 적 측의 경기병이 활쏘다 후퇴할 때 중기병을 돌진시키는 게 99% 승리카드이고 유목민들을 박살낼때 자주 쓰던 방식이었다. 그래너 몽골 제국과 싸웠을 때도 중기병들을 내보냈는데 하필 상대가 유목민들 기병을 수십년간 상대하며 초원을 통일한 몽골제국이었고, 그 몽골제국 장군 중에서도 고금을 통틀어 가장 완벽한 기병전술가라 평가받는 회전의 달인 수부타이라 그만 자살돌격이 되어버렸다. [9] 칭기즈 칸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스웜전술을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목민족들의 사회, 경제적 한계를 돌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칭기즈 칸 본인이 이런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 정도로 걸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칭기즈 칸은 신분같은 것에 그다지 구애되지 않았고 또, 신상필벌에 매우 엄격했기 때문이었다. [10] 사실 유목민족들은 정주민족 이상으로 사회에 대한 이런저런 규정들이 많았고 신분에 엄격했다. 원래 자무카는 테무진보다도 무력에서 강했고 혈통상으로도 더 순혈에 가까웠지만 귀족적인 탓에 한번 망하면 인심도 크게 잃었지만 테무진(칭기즈 칸)은 상술한 대로 신분에 구애받지 않았고 신상필벌에 엄격해서 전투에 패해서 흩어져도 금세 다시 모였다. [11] 그래서 보통 이런 정착지 주민들은 정말로 가진 게 없어서 변경에까지 와야 하는 빈민이거나 아니면 중죄인, 혹은 천민이나 해방노예들인 경우가 많다. 아니면 아예 중앙정부에 의해 끌려왔다든가 아니면 아예 둔전병으로써 반병반농인 경우도 있다. [12] 요새화한 원숭환 영원성 하나로 청의 만주팔기를 수성전으로 도륙내버린 것이 이 전략의 전형이다. [13] 물론 엄밀히 말하면 국경이 명확한 경계선 형태로 고착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고, 전근대의 국경은 양국의 영향력이 길항하는 영역, 즉 경계의 형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기는 하지만, 어차피 이해를 돕도록 간략화한 비유이니 그런가보다 하도록 하자. 아니면 '선'이라는 개념의 정의에는 어긋나지만 어쨌건 국경지대는 양국의 경계에 길게 형성되므로 두께가 있는 선, 즉 의 형태라고 이해할수도 있을 것이다. [14] 당장 현대 초기 2차 세계대전의 전훈을 보더라도, 기동력을 갖춘 집중된 전력의 침입을 선형 방어로 막기는 어려움을 알 수 있다. [15]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 용병들도 사실상 정주 민족화된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사실상 지배계층이 교체되는 것일 뿐 사회구조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16] 유목민족 입장에서는 어딨는지도 모르는 정주민족보다 당장 우리 목초지에 침범해서 자기네 가축들의 풀을 먹이려드는 옆부족이 훨씬 더 큰 위협이었다. [17] 물론 단순히 정주민과 유목민만 서로를 견제하는 게 아니라 정주민과 정주민, 유목민과 유목민도 서로를 견제한다. [18] 즉, 유목민의 약탈 캠페인은 정주제국의 변방에 머무르고, 제국의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19] 그리고 보통 이렇게 해서 유목 제국이 정주 제국을 집어삼키게 되면 그 유목 제국도 서서히, 혹은 빠르게 정주 제국화한다. 당연히 정주 제국 쪽이 훨씬 부유하고 문화적 수준도 높으며 무엇보다 기존의 유목제국을 통치하던 방식으로 수십 배의 인구와 부를 가진 정주제국의 구 영토를 통치할 방법이 없기에 유목 제국도 여기에 좋든싫든 동화되는 것. [20] 물론 좋아서 동화되는 쪽이 더 많다. 초원에서는 보기 힘든 정주 제국의 부유함을 차지하고 여기에 빠지게 되면 유목 제국은 보통 헝그리 정신을 잊어버리면서 무너지는 게 보통이었다. 사치로 인해 원래 유목 민족을 유목 민족답게 만드는 요소가 전부 사라지게 되면 기존의 정주 민족에게 쫒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목 제국에서는 가급적이면 정주 민족과는 통혼하지 않고 자기네 문화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또, 이 노력이 오래 지속될수록 국가의 수명도 오래 가게 된다. [21] 씨족 중심 사회 특유의 극단적인 군웅할거도 원인이다. [22]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 중 하나는 약탈 드라이브를 떠날 때 가족과 재산이 모두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주된 재산이 (이동가능한) 가축떼이고 평소에도 항상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는 유목부족의 특성상 꼭 부족은 자기 땅에 머무르고 주력군만이 원정을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 전체가 원정을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것.(정주민 기준으로 보면 나라가 통째로 움직이는 것이나 다를바 없다.) 이 경우 부족과 재산이 모두 함께 움직이므로 고향 땅에 남겨둔 가족이 약탈당할 염려가 없고, 약탈 원정의 세력이 훨씬 거대해지는데다 보급 등의 문제 역시 간단하게 해결되며 어쩌다 약탈 드라이브가 성공적일 경우 아예 해당 지역을 정복하고 그 자리에 눌러앉아버린다는 선택지가 생기는 등 많은 장점을 가진 방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23] 다만 이 방책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닌데, 일단 무리가 커지는 만큼 움직임이 둔중해지므로 정예 전사들만 추린 약탈대에 비해 (유목민의 최대 장점인) 기동성이 크게 저하될 수밖에 없고, 아무리 유목민이 사회기반 통째로 이동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좋은 목초지는 언제나 주인이 있기 마련이니 가축떼를 이끌고 원거리 원정을 할 정도면 재산 손실도 상당할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해 이동도중 남의 목초지를 함부로 침범하면 그 자리에서 전쟁이 나버릴테니, 목초지의 부족으로 먹여살릴 수 없는 가축은 바로 잡아서 고기로 만들어버려야 한다. 그나마 유목민의 주된 재산인 가축떼는 터만 잘 잡으면 확 줄어들었다가도 번식으로 다시 불어날 수 있어서 이런 이동이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최소한 일시적인 재산의 큰 손실은 피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한번 출정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자신들의 터전이 남아있을 것이란 보장도 없다. 결국 약탈 원정이 충분히 성공하지 못하면 오히려 부족의 세력이 꺾이는 대규모 투자인 셈이다. 최악의 경우, 레부니온 전투 처럼 약탈을 위해 정주 제국 깊숙히 진입했다가 패배할 경우 한방에 부족 전체가 절멸당하는 경우까지 발생할 수 있다. [24] 물론 그러한 위업의 성립을 위인 개인의 역량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너무 영웅주의적 역사관에 치우친 것이라 보고, 유목 사회의 제반 조건 역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관점 역시 있다. 예를 들어 유목사회는 농경사회에 비해 언제나 인구밀도가 낮고 사회구조도 단순하기는 하지만, 유목사회 역시 장기간에 걸쳐 인구가 증가하면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또 증가한 인구만큼 각 씨족과 부족도 많아지면서 그 씨족간 관계(즉 사회구조) 역시 복잡화되는 현상은 일어난다는 것. 이렇게 되면 복잡화된 씨족/부족간 관계는 어느정도 사회적 규약에 의한 압력과 비슷한 것을 행사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명문화된 법'이 없어도 보는 이의 눈이 많을수록 함부로 행동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인구가 증가하면 이를 초원지대의 부족한 인구부양력으로 지탱하기는 어려우므로, 유목민 내부 약탈 사업의 매력은 점차 매력이 줄어들고, 그런 만큼 외부의 부유한 정주민 약탈 사업 모델을 제시하는 지도자가 지지를 받기 쉬운 상황이 조성된다. 따라서 유목민의 인구가 증가하여 밀도가 높아지면 '통합된 유목 국가'가 탄생하기 쉬운 조건이 갖춰지고, 여기에 충분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 주변 정주제국의 견제능력 상실등 다른 조건들이 겹칠 때 유목제국이 탄생한다는 것. [25] 사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전열보병 시절에 정주민족들 국가가 궁기병의 유목민족을 압도했다. 아편전쟁 시절 청나라의 팔기군을 물리친 것도 전열보병이었고 기관총이 등장했을 때는 이미 어지간한 유목민족 국가들도 구식이나마 어느 정도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26] 또한 유목민 사회 내의 입장에서도 괜히 '저 씨족은 사람 죽이기 좋아한다'는 평판을 받아서 좋을 일은 별로 없다. [27] 다만 이에 대하여 만지케르트 전투에 참가한 동로마군은 약 2만 남짓이고 상당수가 향병이어서, 약 3만으로 추산되는 튀르크군보다 전력상 우위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28] 물론 튀르크군 내에도 충격부대 역할을 할 중기병은 있었지만 동로마군을 압도할만한 전력은 아니었다. [29] 이 추이는 팔레올로고스 왕조시기까지 이어졌는데. 유럽에서 온 대사들이 로마 황자들이 튀르크와 비슷한 마구를 하고 궁사를 하고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30] 안나 콤니니는 이 전략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1차 십자군과 유사했다는 설명을 넣었다. [31] 하지만 이 전략에도 허점이 있었다. 만일 궁기병의 보급력이나 전투지속능력이 방어측의 예측보다 컸다면, 동로마군은 그대로 포위되어 전멸되었을것이다. 이는 안나 콤니니도 지적한 점이었고, 실제 동로마의 1차 기병돌격은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화살보급에 실패하기도 했다. [32] 동로마는 궁기병들을 포에데라티라는 외인부대로 항시 4000여 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33] 이 때 이릉을 변호하다가 사마천이 궁형을 당해 고자가 되었다. [34] 보병용 활은 기마사격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기병용 활보다 더 크고 강한 경향이 있다. 물론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권의 활은 상당수가 기사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기 때문에 기병용 활과 보병용 활의 차이가 거의 없다. 대신 사격의 난이도는 보병이 훨씬 낮으며 명중률도 안정적인 자세를 갖추고 사격하는 보병이 더 나은 경우가 많다. [35] 말뚝을 박아대는 잉글랜드계 장궁병은 어느정도 예외. 사방으로 말뚝을 박아대고 진형을 구성하여 버티기 시작하면 돌격은 꿈도 못 꾼다. [36] 그러나 이 게임에서 다루는 초창기 총병은 아직 총검조차도 없던 시절이라, 궁병보다도 근접능력이 한참 부족하기 때문에 파이크 없이 땡총병으로 도배하면 궁기병 돌격에 아작난다. 참고로 게임 전기에는 셀주크, 후기에는 오스만 제국을 대표하는 튀르크 팩션의 경우 초반에는 이렇게 궁기병 중심이지만 후반 로스터에는 서유럽의 고급 병종과 맞다이 뜰만한 중기병, 화약 보병, 중보병에 저런 파이크 방진을 녹여버릴 중포도 많기 때문에 몽골과 티무르라는 핵폭탄 두발에 직접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강 팩션 중 하나로 꼽힌다! [37] 본격적 전투 이전에 투사병기에 의한 사격이나 기동력이 높은 부대에 의한 견제전. [38] 본격적인 접근 격전. [39] 정확히 말하면 크킹2의 전투 페이즈는 <스커미쉬(본격적인 전투 페이즈 시작 전, 사격과 견제전)>-<밀리(본격적인 육박 격전)>-<추격전(승패가 결정된 후 승자가 패자를 추격하여 전과를 확대하는 국면)> 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커미쉬 국면에서는 교전 양측간에 상대의 병력보다는 사기에 타격을 입히는 데 중점이 맞춰져 있고, 밀리 국면에서부터 본격적인 병력 타격이 시작되며 추적 국면이 되면 승자측이 패자측을 추격하여 전과 확대(=병력 타격)을 가하는 형태인 것. 그리고 경기병+궁기병 조합인 알타익(유목민)/페르시아 궁기병의 경우, 스커미쉬나 추격 국면에서는 강력하지만 밀리 국면에서는 별로 강력하지 못하다(경보병이나 궁병보다는 우세하지만 중보병만 되어도 상대하기 만만찮고, 대기병 카운터인 창병에게는 확실히 열세다) 따라서 스웜 전술을 쓰지 못하는 페르시아 궁기병의 경우 스커미쉬 국면에서 사기 타격을 입히더라도 결국은 밀리 국면을 감당해내야 하는데 비해 알타익(유목민) 궁기병대의 경우 스웜 전술이 터질때마다 스커미쉬 국면을 이어가며 계속 사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것.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아예 밀리 국면 없이 스커미쉬만으로 모랄빵을 내 버린 후 추격으로 병력 손실을 강요하는 것이고, 그 정도까진 못하더라도 스커미쉬 국면이 길어질수록 사기 타격도 더 커지고, 그러면 밀리 국면을 그만큼 더 짧게 끝내버릴 수 있다. 이에 비해 중기병+경기병 조합인 서유럽의 기사대는 스커미쉬에는 별 이점이 없지만 밀리 타격력을 뻥튀기하는 돌격계 전술이 잘 터지므로 일단 스커미쉬에서는 스텟빨로 버텨내면 밀리 국면으로 넘어가서 상대 병력을 다져버릴 수 있는 것. 그리고 중기병+궁기병 구성인 비잔틴 카탁프렉트는 딱 이 중간이다. 스웜 전술도 못 쓰고 돌격 전술의 버프 효과도 서유럽 기사에 비해 뒤쳐지지만 스커미쉬의 궁기병과 밀리의 중기병 모두 깡스텟은 좋고 둘 다 기병인 이상 추격 능력도 (일단 이기기만 하면) 아쉽지 않은 수준이다. 즉 전술 발동이나 상성에 너무 목숨 걸 필요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쓸만한 범용성이 장점인 것. 이 덕분에 초기 버전만 해도 알타익 궁기병(특히 몽골 둠스택)은 초원 지대의 공포였고, 비잔틴 카타프랙트는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직한 최강의 병종이었지만... 거듭된 패치로 지금은 먹튀라는 소리까지 듣는 판이다. 스커미시에서 궁기병 스웜전술의 카운터인 경기병 견제전술의 강화라거나, 한번 상대를 모랄빵내서 이기기만 하면 사기가 전투 가능한 수준으로 회복되기 전에 계속 쫒아다니면서 밟아버릴 수 있던 초기 버전과는 달리 일단 패배한 군대는 안전한 곳으로 퇴각해서 병력을 재편성할때까지는 교전을 회피하도록 한 전투 시스템의 개편등으로 인해 초기의 위용은 거의 상실한 편. 물론 단순히 병력 수로 따지면 당연히 아직도 최강이지만, 병력 편성 비용 대비 성능비가 영 좋지 않아 차라리 같은 비용으로 창병이나 중보병 상비군을 뽑는게(이러면 당연히 비용 대비 병력수는 기병보다 훨씬 많다) 훨씬 강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40] 프로토스 저그의 경우, 지상 유닛이 대부분 근접 공격유닛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다가, 가지고 있는 원거리 유닛들의 한계로 인해 이러한 컨트롤을 쉽게 사용하기 어렵다. 드라군의 경우 회전 모션이 전혀 없고, 한방이 강력해서 적은 수일 때는 가장 강력하지만, 그 충돌크기와 환장하는 인공지능 때문에 다수를 운영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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